맨위로가기

사네히토 친왕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사네히토 친왕은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인물로, 오기마치 천황의 아들이자 고요제이 천황의 아버지이다. 1568년에 친왕 선하를 받고 원복했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지원을 받아 황태자 대우를 받았다. 덴쇼 시대에 조정의 소송에 관여하고, 오다 노부나가의 헌상으로 니조 신고쇼에 거처하며 사실상 천황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했다. 혼노지의 변 당시에는 아케치 미쓰히데 군에게 포위되었으나 탈출하여 금리로 피신했다. 1584년에 삼품에 서임되었으나, 1586년에 3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을 둘러싸고 여러 소문이 돌았다. 묘소는 교토 센뉴지의 월륜릉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고요제이 천황 - 고노에 사키코
    고노에 사키코는 고노에 사키히사의 딸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녀로, 고요제이 천황의 후궁이 되어 고미즈노오 천황을 낳았으며, 12명의 자녀를 통해 일본 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 고요제이 천황 - 히노 테루코
  • 추존 천황 - 진구 황후
    진구 황후는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일본의 전설적인 인물로, 섭정 기간 동안 구마소 정벌과 삼한 정벌 등의 업적을 이루었으며, 역사적 실존 여부에 대한 논란과 왜곡된 측면이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문화적으로도 영향을 미쳤다.
  • 추존 천황 - 사와라 친왕
    사와라 친왕은 나라 시대의 황족이자 간무 천황의 동생으로,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중 사망 후 스도 천황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 원령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 1586년 사망 - 아라키 무라시게
    아라키 무라시게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활약한 무장으로, 하극상으로 주군을 몰아내고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 되어 셋쓰 지역을 다스렸으나, 모리 가문과의 내통 혐의로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배 후 센노 리큐의 제자가 되었다.
  • 1586년 사망 - 오타비오 파르네세
    오타비오 파르네세는 파르마와 피아첸차 공국의 공작으로서, 파르네세 가문의 권력 유지 및 확장, 도시 계획, 경제 개혁, 문화 예술 후원에 기여했으며, 공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사네히토 친왕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기본 정보
사네히토 친왕 (세이닌 친왕) 초상 (센뉴지 소장)
이름사네히토 친왕 (세이닌 친왕)
추증된 칭호요코인 다이죠텐노
사네히토 (가즈히토)
신위친왕
경칭전하
생일1552년 5월 16일
사망일1586년 9월 7일
매장지쓰키노와 능 (교토 히가시야마 센뉴지)
가계
아버지오기마치 천황
어머니후지와라 후사코
배우자후지와라 하루코 (신죠토몬인)
나이시노쓰보네
자녀고요제이 천황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 친왕
기타
추호요코인

2. 생애

에이로쿠 11년(1568년) 12월 15일, 친왕 선하를 받고 원복을 치렀다. 자금난으로 미뤄졌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비용을 부담하여 겨우 실현되었다. 별당에는 기쿠테이 하루토키가 임명되었고, 가사에는 간로지 쓰네모토를 비롯해, 니와타 시게미치, 야마시나 도키쓰네, 나카야마 지카쓰나, 가라스마루 미쓰노리가 임명되었다. 정식적인 입태자례는 거행되지 않았지만, 정친마치 천황에게는 사네히토 친왕 이외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시대 사료에서는 그를 "춘궁", "동궁", "태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복에 앞서 에이로쿠 10년(1567년) 11월에는 간슈지 하루코를 상노로 맞이했다. 명목은 뇨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덴쇼 시대에 들어서면서, 견의상론, 고후쿠지 벳토 상론 등 조정에 제기된 소송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고후쿠지 벳토 상론에서 노부나가가 천황에게 의견을 무시당하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바로 천황을 대신하여 사죄 서장을 보냈다. 또한, 이시야마 전투에서 노부나가와 겐뇨의 강화 중재자로서 여러 차례 등장했으며, 덴쇼 8년(1580년) 칙명 강화에 의한 최종적인 해결 시에도 겐뇨에게 이시야마 혼간지로부터의 퇴거를 설득하는 서장을 보냈다.

덴쇼 7년(1579년) 11월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헌상한 "니조 신고쇼"에 거처를 정했다. 이곳은 "하어소"라고 불렸으며, 오기마치 천황도 조정의 의사 결정 시에는 반드시 사네히토 친왕에게 의견을 구하게 되어, "부조정"의 양상을 띠었다. 다몬인 일기와 렌조인 기록에서는, 사네히토 친왕을 "왕", "주상", "금상 황제" 등으로 칭하고 있어, 사실상의 천황(공동 통치자)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기마치 천황은 고령이었고, 사네히토 친왕도 즉위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지만, 조정은 양위에 따른 의식을 자력으로 거행할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고카시와바라 천황, 고나라 천황, 오기마치 천황과 같이 전국의 전국 다이묘로부터 기부를 모으는 것도 노부나가의 패권 하에서는 불가능했다. 조정은 노부나가에게 양위 실현을 요구했고, 노부나가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아즈치 성에는 천황의 행차를 맞이하는 "어행의 간"이 설치되어 있어, 사네히토 친왕의 즉위를 상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혼노지의 변 때, 오다 노부타다는 묘카쿠지를 포기하고 니조 신고쇼에 농성했다. 아케치 미쓰히데 군세가 어소를 포위하는 가운데, 사네히토 친왕은 자신이 노부나가에 의해 옹립되었고, 노부나가에 의존한 존재이며, 노부나가가 쓰러지면 순절할 수도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하여 미쓰히데에게 "자신도 할복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무라이 사다카쓰의 협상으로 사네히토 친왕과 그 처자·숙직 공가들은 어소를 탈출하여, 금리로 도망쳤다. 미쓰히데는 말과 탈것의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사네히토 친왕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사토무라 조하가 조달한 짐 운반용 여를 타고 이동했다.

덴쇼 12년(1584년) 1월, 삼품에 서임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상황이 되는 오기마치 천황을 위한 "원어소" 건설에 착수하는 등 양위에 적극적으로 임했지만, 사네히토 친왕은 덴쇼 14년(1586년) 7월 24일에 훙거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히데요시가 사네히토 친왕의 측실과 밀통한 것에 항의하여 자살했다" 혹은 "사네히토 친왕을 대신하여 히데요시가 천황이 될 생각이다" 등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오기마치 천황도 충격이 커서 며칠 동안 식사를 할 수 없었고, 단식하다 아사했다거나 사네히토 친왕을 따라 할복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2. 1. 어린 시절과 원복

에이로쿠 11년(1568년) 12월 15일, 친왕 사네히토 친왕는 친왕 선하를 받고 원복을 치렀다. 자금난으로 미뤄졌지만, 오다 노부나가가 비용을 부담하여 겨우 실현되었다. 별당에는 기쿠테이 하루토키가 임명되었고, 가사에는 간로지 쓰네모토를 비롯해, 니와타 시게미치, 야마시나 도키쓰네, 나카야마 지카쓰나, 가라스마루 미쓰노리가 임명되었다. 정식적인 입태자례는 거행되지 않았지만, 정친마치 천황에게는 사네히토 친왕 이외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시대 사료에서는 그를 "춘궁", "동궁", "태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복에 앞서 에이로쿠 10년(1567년) 11월에는 간슈지 하루코를 상노로 맞이했다. 명목은 뇨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2. 2. 황태자 시절

에이로쿠 11년(1568년) 12월 15일, 친왕 선하를 받고 원복을 치렀다. 오다 노부나가가 비용을 부담하여 원복이 실현되었다. 정식적인 입태자례는 거행되지 않았지만, 오기마치 천황에게는 사네히토 친왕 이외의 성인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동시대 사료에서는 그를 "춘궁", "동궁", "태자"라고 불렀다.

원복에 앞서 에이로쿠 10년(1567년) 11월에는 간슈지 하루코를 상노로 맞이했다. 명목은 뇨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비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 13명의 자녀를 두었다. 젊은 시절부터 와카와 서예에 뛰어났으며, 특히 와카에 관해서는 만년까지 여러 차례 가회를 열었다.

덴쇼 시대에 들어서면서, 견의상론, 고후쿠지 벳토 상론 등 조정에 제기된 소송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고후쿠지 벳토 상론에서 노부나가가 천황에게 의견을 무시당하고 분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곧바로 천황을 대신하여 사죄 서장을 보냈다. 또한, 이시야마 전투에서 노부나가와 겐뇨의 강화 중재자로서 여러 차례 등장했으며, 덴쇼 8년(1580년) 칙명 강화에 의한 최종적인 해결 시에도 겐뇨에게 이시야마 혼간지로부터의 퇴거를 설득하는 서장을 보냈다.

덴쇼 7년(1579년) 11월 이후, 오다 노부나가가 헌상한 "니조 신고쇼"에 거처를 정했다. 이곳은 "하어소"라고 불렸으며, 오기마치 천황도 조정의 의사 결정 시에는 반드시 사네히토 친왕에게 의견을 구하게 되어, "부조정"의 양상을 띠었다. 다몬인 일기와 렌조인 기록에서는, 사네히토 친왕을 "왕", "주상", "금상 황제" 등으로 칭하고 있어, 사실상의 천황(공동 통치자)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기마치 천황은 고령이었고, 사네히토 친왕도 즉위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지만, 조정은 양위에 따른 의식을 자력으로 거행할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고카시와바라 천황, 고나라 천황, 오기마치 천황과 같이 전국의 전국 다이묘로부터 기부를 모으는 것도 노부나가의 패권 하에서는 불가능했다. 조정은 노부나가에게 양위 실현을 요구했고, 노부나가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아즈치 성에는 천황의 행차를 맞이하는 "어행의 간"이 설치되어 있어, 사네히토 친왕의 즉위를 상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혼노지의 변 때, 오다 노부타다는 묘카쿠지를 포기하고 니조 신고쇼에 농성했다. 아케치 미쓰히데 군세가 어소를 포위하는 가운데, 사네히토 친왕은 자신이 노부나가에 의해 옹립되었고, 노부나가에 의존한 존재이며, 노부나가가 쓰러지면 순절할 수도 있는 입장이라고 생각하여 미쓰히데에게 "자신도 할복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무라이 사다카쓰의 협상으로 사네히토 친왕과 그 처자·숙직 공가들은 어소를 탈출하여, 금리로 도망쳤다. 미쓰히데는 말과 탈것의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사네히토 친왕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사토무라 조하가 조달한 짐 운반용 여를 타고 이동했다.

덴쇼 12년(1584년) 1월, 삼품에 서임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상황이 되는 오기마치 천황을 위한 "원어소" 건설에 착수하는 등 양위에 적극적으로 임했지만, 사네히토 친왕은 덴쇼 14년(1586년) 7월 24일에 훙거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히데요시가 사네히토 친왕의 측실과 밀통한 것에 항의하여 자살했다" 혹은 "사네히토 친왕을 대신하여 히데요시가 천황이 될 생각이다" 등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오기마치 천황도 충격이 커서 며칠 동안 식사를 할 수 없었고, 단식하다 아사했다거나 사네히토 친왕을 따라 할복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2. 3. 니조 신고쇼와 부조정

덴쇼 7년(1579년) 11월 이후, 사네히토 친왕은 오다 노부나가가 헌상한 '니조 신고쇼'에 거처했다. 이 저택은 원래 니조가의 저택이었으나, 노부나가가 니조가로부터 양도받아 대대적인 개조를 거쳐 자신의 거관으로 사용했던 건물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조영한 니조 성과는 다른 건물이다. 니조 신고쇼는 오기마치 천황이 거주하는 '상어소'에 대해 '하어소'로 불렸으며, 금리(상어소)와 마찬가지로 고반이 정비되었다. 오기마치 천황은 조정의 의사 결정 시 반드시 사네히토 친왕에게 의견을 구하여 '부조정'과 같은 양상을 띠었다. 고후쿠지의 승려가 남긴 일지인 "다몬인 일기"와 "렌조인 기록"에서는 사네히토 친왕을 "왕", "주상", "금상 황제" 등으로 칭하고 있어, 사실상의 천황(공동 통치자)으로 여겨졌음을 알 수 있다.

2. 4. 혼노지의 변과 탈출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 당시, 오다 노부나가가 헌상한 "니조 신고쇼"에 머무르고 있었다. 아케치 미쓰히데 군세에 포위되었으나, 노부타다와 동행했던 무라이 사다카쓰의 협상으로 탈출하여 금리로 피신했다. 미쓰히데는 도망자가 나오는 것을 경계하여 말과 탈것의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에, 사네히토 친왕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동행했던 렌가 시인 사토무라 조하가 어디선가 조잡한 짐 운반용 여를 조달했기 때문에, 사네히토 친왕만은 도중부터 그것을 탔다고 한다.

2. 5. 삼품 서임과 훙거

덴쇼 12년(1584년) 1월, 사네히토 친왕은 삼품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덴쇼 14년(1586년) 7월 24일, 35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훙거하였다. 사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불화, 자살설 등 여러 소문이 돌았다. 아버지 정친마치 천황도 충격이 커서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못했고, 세상을 떠난 아들을 따라 단식하다 아사했다거나 할복했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2. 6. 사후

가즈히토 친왕(和仁親王)같은 해 11월에 조부의 유자(猶子)가 되어 황위를 물려받았다. 고요제이는 아버지에게 "요코인(陽光院)"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태상천황의 존호를 올렸다.

세이닌 친왕의 다섯째 아들인 고이 호신노(興意法親王)은 오다 노부나가의 유자(猶子)가 되었고, 여섯째 아들인 지닌 친왕(智仁親王)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자가 되었다. 세이닌 친왕이 노부나가의 유자가 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것은 세이닌 친왕도 고이도 모두 "고궁(五宮)"으로 불렸던 데서 비롯된 오해라고 여겨지고 있다.

세이닌 친왕의 뇨보(女房) 중 한 명인 덴시노쓰보네(典侍局)는 덴쇼(天正) 10년에 세이닌 친왕을 떠나 혼간지(本願寺) 몬슈(門主) 켄뇨 코사(顕如光佐)의 차남인 켄손 사초(顕尊佐超)와 결혼했다.

3. 가족 관계


  • 아버지: 오기마치 천황(1517년 6월 18일 ~ 1593년 2월 6일)
  • 어머니: 후지와라 후사코(万里小路 房子; 사망 1580년)
  • 부인(''뇨보''): 후지와라노(칸슈지) 하루코(1553년 ~ 1660년 3월 21일), 훗날 조토몬인(上東門院)
  • 장녀: 에이추 여왕(1569년 ~ 1580년)
  • 장남: 황자 가즈히토(1571년 12월 31일 ~ 1617년 9월 25일)
  • 차남: 황자 구세이(1573년 ~ 1650년)
  • 삼남: 황자 승려 료조(1574년 ~ 1643년)
  • 사남: ''이름 없는 왕자''(1575년 출생)
  • 오남: 황자 승려 쿄이(1576년 ~ 1620년)
  • 차녀: ''이름 없는 공주''(1577년 출생)
  • 육남: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 친왕(1579년 2월 3일 ~ 1629년 5월 29일)
  • 삼녀: ''이름 없는 공주''(1580년 출생)
  • 사녀: ''이름 없는 공주''(1581년 ~ 1584년)
  • 오녀: ''이름 없는 공주''(1583년 출생)
  • 육녀: ''이름 없는 공주''(1584년 출생)
  • 칠녀: ''이름 없는 공주''
  • 부인(''뇨보''): 나이시노 쓰보네(1565년 ~ 1616년 3월 9일), 레이제이 타메마츠(冷泉為益)의 딸
  • 장녀: 이름 없는 공주(사망 1579년)
  • 삼녀: 시게츠 여왕(1580년 ~ 1590년)

3. 1. 부모

오기마치 천황(1517년 6월 18일 ~ 1593년 2월 6일)을 아버지로, 후지와라 후사코(万里小路 房子; 사망 1580년)를 어머니로 두었다.

3. 2. 배우자

사네히토 친왕의 배우자는 부인(''뇨보'') 칸슈지 하루코(藤原勧修寺 晴子)와 부인(''뇨보'') 나이시노 쓰보네(典侍局)이다. 칸슈지 하루코는 훗날 조토몬인(上東門院)으로 불렸으며, 1553년에 태어나 1660년 3월 21일에 사망하였다. 나이시노 쓰보네는 레이제이 타메마츠(冷泉為益)의 딸로, 1565년에 태어나 1616년 3월 9일에 사망하였다.

3. 3. 자녀

사네히토 친왕은 후지와라노 하루코와의 사이에서 7남 6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은 가즈히토 황자이고, 육남은 하치조노미야 도시히토 친왕이다. 덴시노쓰보네와의 사이에서는 2녀를 두었다.

4. 계보

사네히토 친왕의 가계는 고쓰치미카도 천황, 고카시와바라 천황, 고나라 천황, 오기마치 천황으로 이어진다.[3]


5. 문화적 활동

5. 1. 와카와 서예

5. 2. 축국 대회 개최

덴쇼 3년(1575년), 교토에서 세이닌 친왕이 주최한 대규모 축국 대회가 열렸다.[4] 『노부나가 공기』에 따르면, 이 대회는 정규 의례에 준한 화려한 행사였으며, 오다 노부나가 등은 여관을 통해 정친정천황으로부터 술잔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대회에는 오섭가, 세이카가 사람들, 오다 노부나가와 그의 우마마와리, 벳쇼 나가하루, 벳쇼 시게무네, 미요시 야스나가, 다케다 모토아키, 헤미 마사츠네, 아와야 가츠히사, 구마가이 나오유키, 야마가타 모리노부, 나이토 시게마사, 시라이 미츠타네, 시오카와 나가미츠 등이 참관하였다.[4]

축국 대회는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참가자들은 다양한 복장을 착용하였다. 1회에는 아스카이 마사아츠가 옥충색 스이칸과 카츠라바카마를, 칸슈지 하루스케가 노송나무 껍질색 카리키누와 사시누키를 착용하는 등 다채로운 복장이 등장하였다.[4]

6. 묘소

친왕의 묘소는 태상천황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릉(陵)"으로 칭해진다. (미사사기)은 궁내청에 의해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 이즈미야마초의 센뉴지 내에 있는 월륜릉으로 지정되어 있다. 궁내청 상의 형식은 무방탑이다.

월륜릉 (교토부 교토시)

6. 1. 월륜릉

친왕의 묘소는 태상천황으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릉(陵)"으로 칭해진다. (미사사기)은 궁내청에 의해 교토부 교토시 히가시야마구 이마쿠마노 이즈미야마초의 센뉴지 내에 있는 월륜릉으로 지정되어 있다. 궁내청 상의 형식은 무방탑이다.

7. 평가

7. 1. 긍정적 평가

7. 2. 부정적 평가

8. 관련 작품


  • 바티칸에 잠든 오다 노부나가의 꿈(2007년, 배우: 나카무라 호류)
  • 기린이 온다(2020년 - 2021년, NHK 대하 드라마, 배우: 가토 세이시로)

참조

[1] 서적 Imperial House 1959
[2] 서적 Ancient Buddhism in Japan https://books.google[...] 1935
[3] 웹사이트 Genealogy https://reichsarchiv[...] 2018-01-24
[4] 서적 現代語訳 信長公記 中経出版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