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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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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사키 고조는 1900년에 태어나 1985년에 사망한 일본의 정치인이다. 그는 일본사회당(JSP)의 창당에 참여하여 중의원 의원을 11번 역임했으며, 당 내에서 친중, 반미적인 입장을 보였다. 1965년 일본사회당 위원장에 취임했으나, 파벌 갈등과 노선 대립으로 인해 당의 쇠퇴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중일 국교 정상화에 기여했으며, 캄보디아 학살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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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고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사사키 고조
로마자 표기Sasaki Kōzō
출생일1900년 5월 25일
출생지미야기현 모토요시군
사망일1985년 12월 24일
국적일본
학력니혼 대학
정치 경력
소속 정당일본사회당
전직미야기 일반노동조합 위원장
선거구미야기현 제1구
당선 횟수11회
의원 임기 시작1947년 4월 26일
의원 임기 종료1976년 12월 9일
일본 사회당 위원장
직책제5대 일본사회당 중앙집행위원장
임기 시작1965년 5월 6일
임기 종료1967년 8월 19일
전임자가와카미 조타로
후임자가쓰마타 세이이치
기타 정보

2. 생애

1900년 5월 25일 미야기현 모토요시군(현 도메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1] 부모가 모두 가출했을 때 태어났기에 11살이 될 때까지도 호적에 등재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소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1] 이후 고향에서 숯을 굽는 등 중노동에 종사하다가 큰일을 하고자 결심을 했다. 1924년 센다이시의 공장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번 뒤 도쿄에 가서 니혼 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자전거 회사에서 일하다가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1928년 해고됐다.[2] 이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도쿄나 고향인 미야기현에서 많은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지도했다. 1937년 센디이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지만[2] 다음 해 인민전선 사건에 연루돼 체포되면서 시의원 지위를 잃었다.[2] 그 뒤엔 헌 책방을 운영하거나 연료회사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렸는데 사실 이 때가 사사키의 생애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안정된 때라고 한다.

1950년대 촬영한 사진.


1945년 일본사회당이 결성되자 참가하여 미야기현지부 창설에 힘을 쏟았다.[3] 1946년 센다이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으며 같은 해 총선에도 출마했지만 또 낙선했다.[3] 하지만 다음 해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돼 초선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3] 사회당 좌파에 속했으며 스즈키 모사부로의 측근으로 활약해 스즈키파의 중진이 되었다. 좌우파로 분열된 사회당의 통합에 앞장섰고 1955년 통합되자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통일에 반대했던 사회주의협회나 와다 히로오의 파벌과는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1960년 스즈키가 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서기장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위원장에 당선됐다. 스즈키파는 공석이 된 서기장으로 사사키를 지지했지만 가와카미파와 와다파가 반발하자 사사키는 서기장직을 사양하고 정치적으로 경력이 더 많던 에다 사부로를 지지했다. 하지만 서기장이 된 에다가 언론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자 사사키는 에다가 언론의 인기를 너무 노린다며 비판했다. 이후 에다가 구조개혁론을 주창하자 이에 반발한 사사키는 소원한 사이였던 사회주의협회와 손을 잡고 에다를 쫓아내고자 했다. 1962년 제21회 대회에서 서기장 자리를 두고 에다와 경쟁했지만 패배했다. 이후로도 에다파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아 두 파벌 간의 항쟁은 갈수록 격해졌다.

1967년 도쿄도지사 선거 당시 유세 현장. 왼쪽부터 사사키, 이치카와 후사에, 미노베 료키치, 노사카 산조.


1964년 부위원장직이 신설되면서 와다와 함께 공동 부위원장이 되었다. 다음 해에 위원장 가와카미가 병을 이유로 사임하자 사사키가 후임 위원장이 되었다. 사사키는 취임 연설 때 "미국 제국주의는 세계 인류의 적"이라 규정하며 반미적 색채를 여과없이 드러냈다. 역대 사회당 위원장들은 지식인 출신이 많았기에 서민적 분위기가 강한 사사키는 사회당 지지자들로부터 지지받기 힘들 거란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사사키 특유의 도호쿠 지방 방언 덕에 언론에 대한 노출이 늘어났고 과거 자신이 에다를 비판했던 걸 잊은 듯 사사키도 언론과의 밀월 관계를 즐겼다.

1967년 총선 때 의원 정수가 증가했음에도 사회당의 의석수가 감소한 데다가 「건강보험특례법」 처리 과정에서 소장파 의원들의 압력을 받아 결국 위원장에서 물러났다. 이후에도 에다가 위원장이나 서기장이 되는 것을 집요하게 방해하다가 자신이 이끄는 파벌로부터도 인망을 잃었다.

사사키는 외교적으로 친중파에 속했는데 1972년 총리대신 다나카 가쿠에이의 의뢰로 사회당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 공명당 위원장 다케이리 요시카쓰 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극비리에 방문해 중일국교정상화의 초석을 쌓았다.

사회주의협회가 세력을 확장해 사사키파를 침식하자 친소파인 사회주의협회와 사사키의 대립이 격해졌다. 1974년에는 에다와 화해하고 전 위원장 가쓰마타 세이이치, 부위원장 미야케 쇼이치 등과 함께 7인위원회를 결성해 사회주의협회화의 대결 자세를 명확히 했다. 1975년 서적 『사회주의적 적정권』을 집필해 사회당 정권이 수립된 뒤에도 급격한 사회 변화를 지양하면서 현실주의적 자세를 보였다.

1976년 총선에서 세대교체의 여파로 낙선했고 정계를 은퇴했다. 1977년 제40회 대회에서 중국과의 우호를 호소했지만 사회주의협회 계열의 대의원들로부터 갖은 야유를 받았다. 1978년 민주 캄푸치아를 방문했는데 캄보디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학살 행위는 없었고 캄보디아 집단학살은 악의적인 선전이라 주장했다.

1985년 12월 향년 85세로 사망했다.

2. 1. 출생과 성장

사사키 고조는 1900년 5월 25일 미야기현 모토요시군(현 도메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1] 부모가 모두 가출했을 때 태어났기에 11살이 될 때까지 호적에 등재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초등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1] 이후 고향에서 숯을 굽는 등 중노동에 종사하다가 큰일을 하고자 결심했다.[1] 1924년 센다이시의 공장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번 뒤 도쿄에 가서 니혼 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1]

대학을 졸업한 뒤 자전거 회사에서 일하다가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1928년 해고됐다.[1] 이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도쿄나 고향인 미야기현에서 많은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지도했다.[1] 1937년 센디이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지만 다음 해 인민전선 사건에 연루돼 체포되면서 시의원 지위를 잃었다.[1] 그 뒤엔 헌 책방을 운영하거나 연료회사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렸는데 사실 이 때가 사사키의 생애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안정된 때라고 한다.[1]

2. 2. 노동운동과 정치 입문

1900년 5월 25일 미야기현 모토요시군(현 도메시)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가 모두 가출했을 때 태어났기에 11살이 될 때까지도 호적에 등재되지 못했고 그 때문에 소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1] 이후 고향에서 숯을 굽는 등 중노동에 종사하다가 큰일을 하고자 결심을 했다. 1924년 센다이시의 공장에서 일을 해서 돈을 번 뒤 도쿄에 가서 니혼 대학 전문부 정치과에 입학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자전거 회사에서 일하다가 파업을 주도한 혐의로 1928년 해고됐다.[2]

이후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에 투신하여 도쿄나 고향인 미야기현에서 많은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지도했다. 1937년 센디이시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지만[2] 다음 해 인민전선 사건에 연루돼 체포되면서 시의원 지위를 잃었다.[2] 그 뒤엔 헌 책방을 운영하거나 연료회사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꾸렸는데 사실 이 때가 사사키의 생애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안정된 때라고 한다.

2. 3. 일본사회당 참여와 활동

1945년 일본사회당이 결성되자 사사키 고조도 참여하여 미야기현지부 창설에 힘썼다.[3] 1946년 센다이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으며, 같은 해 총선에도 출마했지만 또 낙선했다. 하지만 다음 해 총선에 출마하여 당선돼 초선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사사키는 사회당 좌파에 속했으며 스즈키 모사부로의 측근으로 활약해 스즈키파의 중진이 되었다. 좌우파로 분열된 사회당의 통합에 앞장섰고 1955년 통합되자 선거대책위원장이 되었다. 하지만 통일에 반대했던 사회주의협회나 와다 히로오의 파벌과는 소원한 사이가 되었다.

1960년 스즈키가 위원장에서 물러난 뒤 서기장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위원장에 당선됐다. 스즈키파는 공석이 된 서기장으로 사사키를 지지했지만 가와카미파와 와다파가 반발하자 사사키는 서기장직을 사양하고 정치적으로 경력이 더 많던 에다 사부로를 지지했다. 하지만 서기장이 된 에다가 언론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자 사사키는 에다가 언론의 인기를 너무 노린다며 비판했다. 이후 에다가 구조개혁론을 주창하자 이에 반발한 사사키는 소원한 사이였던 사회주의협회와 손을 잡고 에다를 쫓아내고자 했다. 1962년 제21회 대회에서 서기장 자리를 두고 에다와 경쟁했지만 패배했다. 이후로도 에다파에 대한 공격을 늦추지 않아 두 파벌 간의 항쟁은 갈수록 격해졌다.

2. 4. 일본사회당 위원장 시절

사사키 고조는 1965년 일본사회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취임 연설에서 "미국 제국주의는 세계 인류의 적"이라며 반미 입장을 분명히 했다.[7] 역대 사회당 위원장들이 주로 지식인 출신이었던 것과 달리, 사사키는 서민적인 이미지와 도호쿠 지방 방언을 사용하는 특유의 말투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과거 에다 사부로가 언론의 인기를 노린다고 비판했던 것과는 달리, 자신도 언론과의 밀월 관계를 즐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7]

1967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의원 정수 증가에도 불구하고 의석수가 감소했고, 「건강보험특례법」 처리 과정에서 젊은 의원들의 압력을 받아 사사키는 결국 위원장직에서 물러났다.[7] 이후에도 에다의 위원장 또는 서기장 취임을 집요하게 방해하여, 자신이 이끄는 파벌에서조차 인망을 잃었다.

산리즈카 투쟁 초기, 사회당은 반대 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66년 11월 29일, 사사키는 현장을 방문하여 도무라 잇사쿠 등 반대동맹원들에게 사토 내각 타도를 호소하며 "나도 도호쿠 농민 출신이라 여러분의 심정을 잘 알겠습니다"라고 도호쿠 방언으로 격려했다.[8][9][10] 그는 일평지주 운동을 철저히 진행하여 공항 건설을 반드시 저지하겠다고 약속했다.[8][9][10]

당시 지바현지사였던 도모노 다케토는 사사키에게 신공항의 필요성과 부지에 대한 의견을 물었지만, 사사키는 "나는 신공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야당이므로 부지에 대해선 생각할 필요가 없다"라고 답하며 돌아갔다.[11] 도모노는 이를 두고 "야당이라고 해서 무조건 반대만 하고 여당이 아니니까 대안도 생각하지 않는 건 무책임한 태도"라고 비판했다.[12]

신(新)도쿄 국제공항반대 운동(산리즈카 투쟁) 당시 사용되었던 입목 트러스트의 명인 팻말(나리타 공항 하늘과 땅의 역사관)
명인 팻말에는 사토 유키미치, 사사키 코우조우, 나리타 도모미의 이름이 있다


나리타 공항 하늘과 땅의 역사관에는 사사키의 이름이 적힌 입목 트러스트 명인 팻말이 전시되어 있다.

2. 5. 위원장 사임 이후

사사키는 위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에다 사부로가 위원장이나 서기장이 되는 것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1974년에는 그동안 격렬하게 다투었던 에다와 돌연 화해하고 가쓰마타 세이이치 전 위원장, 미야케 쇼이치 부위원장 등과 함께 7인위원회를 결성하여 사회주의협회와의 대결 자세를 분명히 했다.[3] 1975년에는 저서 『사회주의적 적정권』을 집필해 사회당 정권 수립 후에도 급격한 사회 변화를 지양하면서 현실주의적 자세를 보였다.

사사키는 외교적으로 친중파에 속했는데, 1972년 총리대신 다나카 가쿠에이의 의뢰로 사회당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 공명당 위원장 다케이리 요시카쓰 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극비리에 방문해 중일국교정상화의 초석을 쌓았다.

1976년 총선에서 세대교체의 여파로 낙선했고 정계를 은퇴했다. 1977년 제40회 대회에서 중국과의 우호를 호소했지만 사회주의협회 계열의 대의원들로부터 갖은 야유를 받았다. 1978년 민주 캄푸치아를 방문했는데 캄보디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학살 행위는 없었고 캄보디아 집단학살은 악의적인 선전이라 주장했다.

2. 6. 만년과 사망

사사키 고조는 1976년 총선에서 낙선하여 정계를 은퇴했다. 1977년 제40회 당 대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우호를 호소했지만, 사회주의협회 계열 대의원들로부터 야유를 받았다. 그는 1972년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대신의 의뢰로 나리타 도모미, 다케이리 요시카쓰 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중일국교정상화의 초석을 쌓는 등 외교적으로 친중파에 속했다.

1978년 민주 캄푸치아를 방문한 사사키는 캄보디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학살 행위는 없었고, 캄보디아 집단학살은 악의적인 선전이라 주장했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쿠릴 열도의 일본 반환을 옹호하는 단체에 가입하기도 했다.[3]

1985년 12월 24일, 사사키 고조는 향년 85세로 사망했다.[3]

3. 정치적 입장과 활동

일본의 패전 후 사회주의가 합법화되자 사사키는 1945년 일본사회당(JSP) 창당에 참여했다.[3] 1946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으나, 이듬해 당선되어 1976년까지 11번 연속 당선되었다.[3] 국회에서 사사키는 친중반미적인 시각으로 유명했다.[3] 그는 스즈키 모사부로(鈴木茂三郎)의 측근으로 알려지며 당내에서 빠르게 성장했고, 1948년 당 분열 시 좌파사회당에 합류했다가 1955년 당 재통합을 지지하여 당내 위상을 높였다.

1960년부터 사사키는 에다 사부로(江田三郎)와 당 장악 및 정책을 놓고 경쟁했다.[4] 그는 에다의 "구조 개혁" 프로그램에 강력히 반대하며, 도시 프롤레타리아 기반의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다.[4] 사사키는 에다를 "현상 유지주의자"이자 "독점 자본에 아부하는 자"라고 비난하며, 1962년 에다를 당 사무총장직에서 축출했다.[4][5]

1965년, 사사키는 일본사회당 의장에 당선되었으나, 깨끗한 정부당과 일본 공산당의 약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5] 1967년 총선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오자, 그의 극좌적 성향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5] 이후 나리타 도모미(成田知巳)에게 당 의장직을 넘겨주었다.

사사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1972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과 중국 간의 외교 관계 회복 협상을 지원했다.

3. 1. 사회주의 사상과 노선

사사키 고조는 일본의 패전 후 사회주의가 합법화되자 1945년 일본사회당(JSP) 창당에 참여했다.[3] 1946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으나, 이듬해 당선되어 1976년까지 11번 연속 당선되었다.[3] 국회에서 사사키는 친중반미적인 시각으로 유명했다.[3] 그는 스즈키 모사부로(鈴木茂三郎)의 측근으로 알려지며 당내에서 빠르게 성장했고, 1948년 당 분열 시 좌파사회당에 합류했다가 1955년 당 재통합을 지지하여 당내 위상을 높였다.

1960년부터 사사키는 에다 사부로(江田三郎)와 당 장악 및 정책을 놓고 경쟁했다.[4] 그는 에다의 "구조 개혁" 프로그램에 강력히 반대하며, 도시 프롤레타리아 기반의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했다.[4] 사사키는 에다를 "현상 유지주의자"이자 "독점 자본에 아부하는 자"라고 비난하며, 1962년 에다를 당 사무총장직에서 축출했다.[4][5]

1965년, 사사키는 일본사회당 의장에 당선되었으나, 깨끗한 정부당과 일본 공산당의 약진으로 어려움을 겪었다.[5] 1967년 총선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오자, 그의 극좌적 성향이 원인으로 지목되었다.[5] 이후 나리타 도모미(成田知巳)에게 당 의장직을 넘겨주었다.

사사키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1972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정부의 요청으로 일본과 중국 간의 외교 관계 회복 협상을 지원했다.

3. 2. 외교 정책

사사키 고조는 친중파이자 반미 성향의 정치인이었다. 그는 중일국교정상화에 기여했다. 1978년에는 캄보디아를 방문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 하의 학살 주장은 미국의 선전이라고 주장하여 비판을 받았다.[3] 그는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 쿠릴 열도의 일본 반환을 옹호하는 단체에 가입했다.[3]

3. 3. 나리타 공항 문제 (산리즈카 투쟁)

사사키 고조가 위원장으로 재직 중일 때 산리즈카 투쟁이 발생했는데, 투쟁 초기에는 사회당이 반대 운동의 지도적 역할을 했다.[8][9][10] 사사키도 1966년 11월 29일에 현장을 방문해 도무라 잇사쿠 등 반대동맹원들로부터 사토 내각을 무너뜨려 달라는 호소를 받았다. 사사키는 "나 역시 도호쿠의 백성 출신이라 여러분의 기분을 잘 이해하고 있다", "(일평지주 운동을) 철저히 진행해 반드시 공항 건설을 저지하자"라며 도호쿠 방언으로 격려했다.[8][9][10]

당시 지바현지사는 자민당 출신의 도모노 다케토였는데, 도모노가 "이 공항 문제는 우리 지역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니 정쟁 도구로 쓰지 말아주길 바란다. 국회의원은 국회에서 의론을 해야 한다. 정당 간의 정쟁을 그대로 지역에 가져와선 정말 곤란하다. 당신은 신공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생각한다면 부지는 어디가 좋겠는가"라고 묻자 사사키는 "나는 신공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정부·여당에 속하지 않았으니 부지에 대해선 야당이 생각할 필요가 없다. 지사가 하는 말은 타당하지만 오늘 나는 설득당하러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11]

도모노는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경위를 되돌아보곤 "정부 내에서 의견이 통일되지 않으니 야당이 신이 나서 정쟁의 도구로 삼는다. 중앙 정당이 지바까지 부채질하러 오고 있질 않나. 지금 나리타 공항 부지를 트집 잡아 봤자 1시간 이내의 거리는 거기밖에 없다. 야당이라고 무조건 반대만 하고 여당이 아니니까 대안도 생각하지 않는 건 무책임한 태도다. 외국에도 그런 무책임한 정당은 없다. 모두 국가적, 민족적인 문제는 통일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라고 주장했다.[12]

成田공항 문제 자료를 전시하고 있는 成田공항 하늘과 땅의 역사관에는 사사키의 이름이 적힌 입목 트러스트의 명인 팻말이 전시되어 있다.

4. 평가와 비판

사사키 고조는 당내 파벌 갈등을 심화시키고 에다 사부로와 대립하여 일본사회당의 쇠퇴에 영향을 끼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경도되어 에다 비전을 무시하고, 나리타 공항 문제에 대한 대응도 비판받았다.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는 "(사사키 씨가) 에다 군을 짓밟은 시점에서 정권 교체의 가능성은 사라졌다"라고 평가했다.

사사키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파벌 의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에다 사부로와 에다파를 공격했다. 이러한 파벌 항쟁은 사회당의 기초 체력을 약화시켜 쇠퇴의 원인 중 하나를 제공했다. 또한, 서구형 사회민주주의를 제창한 에다 비전을 무시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고집하여 사회당이 만년 야당으로 머무는 데 영향을 끼쳤다는 비판도 있다.

5.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회차직책지역구소속 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당락비고
1946년 총선거22회중의원 의원일본사회당낙선중선거구제
1947년 총선거23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일본사회당35,623표11.2%4위당선중선거구제
1949년 총선거24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일본사회당26,719표7.7%5위당선중선거구제
1952년 총선거25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좌파사회당44,275표10.6%3위당선중선거구제
1953년 총선거26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좌파사회당48,358표11.9%5위당선중선거구제
1955년 총선거27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좌파사회당65,224표14.4%3위당선중선거구제
1958년 총선거28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일본사회당65,917표14.1%3위당선중선거구제
1960년 총선거29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일본사회당58,797표12.8%5위당선중선거구제
1963년 총선거30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일본사회당62,989표13.2%4위당선중선거구제
1967년 총선거31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일본사회당99,214표18.3%2위당선중선거구제
1969년 총선거32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일본사회당69,349표11.8%5위당선중선거구제
1972년 총선거33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일본사회당91,041표13.7%3위당선중선거구제
1976년 총선거34회중의원 의원미야기현 1구일본사회당75,573표10.1%6위낙선중선거구제


참조

[1] 서적 Contemporary Politics in Japa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 웹사이트 Sasaki, Kozo (1901–1985) https://www.ndl.go.j[...] 2021-06-22
[3] 뉴스 Obituary: Kozo Sasaki of Japan, Former Leftist Leader https://www.nytimes.[...] 2021-06-22
[4]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5] 서적 Japan at the Crossroads: Conflict and Compromise after Anpo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6] 학술지 1946年の市長公選運動(3) https://hdl.handle.n[...] 福島大学 1996-07
[7] 서적 現代世相風俗史年表:1945-2008 河出書房新社
[8] 서적 大地の乱 成田闘争―三里塚反対同盟事務局長の30年 お茶の水書房
[9] 서적 成田空港365日 崙書房
[10] 뉴스 【ニュースの深層】成田空港反対闘争、煽って逃げた社会党 テロ集団を育てた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い 小川国彦氏の死去に思う https://www.sankei.c[...] 2018-09-24
[11] 서적 疾風怒濤 県政二十年のあゆみ 社会保険新報社
[12] 서적 続・疾風怒濤 千葉日報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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