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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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46년 4월 10일에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주도하에 일본의 민주화 개혁의 일환으로 치러졌으며, 여성 참정권이 처음으로 인정되고 선거 연령이 낮아지는 등 선거법이 개정된 후 처음 실시된 선거였다. 선거 결과, 일본자유당이 140석으로 제1당이 되었고, 요시다 시게루가 총리가 되어 제1차 요시다 내각이 출범했다. 또한 이 선거는 39명의 여성 의원이 당선되어 일본 정치사에서 중요한 이정표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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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 |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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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가 | 일본 |
선거 유형 | 의회 |
이전 선거 | 1942년 일본 총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42년 |
다음 선거 | 1947년 일본 총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947년 |
선거일 | 1946년 4월 10일 |
선출 의석 | 468석 |
과반 의석 | 235석 |
투표율 | 72.08% |
주요 정당 및 결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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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당 대표 | 하토야마 이치로 |
제1당 이름 | 일본자유당 (1945년) |
제1당 획득 의석 | 141석 |
제1당 득표수 | 13,505,746표 |
제1당 득표율 | 2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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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당 대표 | 마치다 추지 |
제2당 이름 | 일본진보당 |
제2당 획득 의석 | 94석 |
제2당 득표수 | 10,350,530표 |
제2당 득표율 | 18.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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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당 대표 | 카타야마 테츠 |
제3당 이름 | 일본사회당 |
제3당 획득 의석 | 93석 |
제3당 득표수 | 9,924,930표 |
제3당 득표율 | 17.9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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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당 대표 | 도쿠다 규이치 |
제4당 이름 | 일본공산당 |
제4당 획득 의석 | 5석 |
제4당 득표수 | 2,135,757표 |
제4당 득표율 | 3.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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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당 대표 | 야마모토 사네히코 |
제5당 이름 | 일본협동당 |
제5당 획득 의석 | 14석 |
제5당 득표수 | 1,799,764표 |
제5당 득표율 | 3.35% |
총리 정보 | |
선거 전 총리 | 시데하라 기주로 |
선거 전 총리 소속 정당 | 무소속 |
선거 후 총리 | 요시다 시게루 |
선거 후 총리 소속 정당 | 일본자유당 (1945년) |
2. 역사적 배경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일본의 민주화를 위한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정당 활동의 자유화, 여성 참정권 인정, 선거법 개정 등이 포함되었다. 대정익찬회가 해산되면서, 기존 정당들이 부활하거나 새로운 정당들이 창당되는 등 정치적 활동이 활발해졌다. 입헌정우회의 후신으로 일본자유당이, 입헌민정당의 후신으로 일본진보당이, 사회대중당의 후신으로 일본사회당 등이 등장했다.
1945년 10월 히로히토 천황에 의해 임명된 시데하라 기주로 총리는 1945년 12월 중의원을 해산했다. 시데하라 총리는 연합군 점령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협력하여 새로운 헌법과 기타 정치 개혁을 시행하고 있었다.
선거 후, 시데하라 총리가 진보당에 합류하여 시데하라 내각을 유지하려는 짧은 시도가 있었지만, 다른 주요 정당들은 이에 반대했다. 자유당과 진보당은 5월 2일 자유당 지도자 하토야마 이치로 총재 하에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지만, 하토야마는 5월 4일 즉시 숙청되었고, 외무대신 요시다 시게루 총재 하에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어 5월 22일 공식적으로 총리가 되었다.
1945년 12월, 중의원 의원 선거법이 개정되어 여성 참정권이 처음으로 인정되었고, 선거 연령이 만 25세에서 만 20세로 낮아졌다. 피선거권 연령도 만 30세에서 만 25세로 낮아졌다. 대선거구제와 제한연기투표제가 도입되었다. 개정 중의원 의원 선거법(쇼와 20년 법률 제42호) 부칙에 "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은 당분간 이를 정지한다"는 조항에 따라, 이전 총선거까지 선거권·피선거권을 가지고 있던 한국인 및 대만인의 참정권이 정지되었다. 이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따라, 그때까지 외지로 여겨졌던 조선과 대만이 일본 영토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 여성이 투표할 수 있게 된 최초의 선거였다. 39명의 여성이 당선되었는데, 이는 2005년 선거까지 최다 당선 기록이다.
2. 1. 전후 일본의 정치 상황
1945년 일본의 항복 이후,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일본의 민주화를 위한 여러 개혁을 추진했다. 여기에는 정당 활동의 자유화, 여성 참정권 인정, 선거법 개정 등이 포함되었다. 대정익찬회가 해산되면서, 기존 정당들이 부활하거나 새로운 정당들이 창당되는 등 정치적 활동이 활발해졌다. 입헌정우회의 후신으로 일본자유당이, 입헌민정당의 후신으로 일본진보당이, 사회대중당의 후신으로 일본사회당 등이 등장했다.1945년 10월 히로히토 천황에 의해 임명된 시데하라 기주로 총리는 1945년 12월 중의원을 해산했다. 시데하라 총리는 연합군 점령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협력하여 새로운 헌법과 기타 정치 개혁을 시행하고 있었다.
선거 후, 시데하라 총리가 진보당에 합류하여 시데하라 내각을 유지하려는 짧은 시도가 있었지만, 다른 주요 정당들은 이에 반대했다. 자유당과 진보당은 5월 2일 자유당 지도자 하토야마 이치로 총재 하에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지만, 하토야마는 5월 4일 즉시 숙청되었고, 외무대신 요시다 시게루 총재 하에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어 5월 22일 공식적으로 총리가 되었다.
2. 2. 선거법 개정
1945년 12월, 중의원 의원 선거법이 개정되어 여성 참정권이 처음으로 인정되었고, 선거 연령이 만 25세에서 만 20세로 낮아졌다. 피선거권 연령도 만 30세에서 만 25세로 낮아졌다. 대선거구제와 제한연기투표제가 도입되었다. 개정 중의원 의원 선거법(쇼와 20년 법률 제42호) 부칙에 "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자의 선거권 및 피선거권은 당분간 이를 정지한다"는 조항에 따라, 이전 총선거까지 선거권·피선거권을 가지고 있던 한국인 및 대만인의 참정권이 정지되었다. 이는 포츠담 선언 수락에 따라, 그때까지 외지로 여겨졌던 조선과 대만이 일본 영토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3. 선거 정보
3. 1. 해산 및 투표일
1945년 12월 18일, GHQ에 의한 해산으로, '종전 해산'이라고 불린다.[2][3] 투표일은 1946년 4월 10일이다.3. 2. 선거 제도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선거 제도는 대선거구제(제한연기투표제)와 비밀투표로 이루어졌다.[1] 2인에서 14인 선거구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었으며, 홋카이도, 도쿄도, 니가타현, 아이치현, 오사카부, 효고현, 후쿠오카현은 2개의 선거구로 분할되었고, 나머지 40개 부현은 하나의 선거구로 설정되었다.[1] 의원 정수가 가장 적은 지역은 돗토리현 전현구(4인)였고, 가장 많은 지역은 홋카이도 제1구, 나가노현 전현구, 시즈오카현 전현구(14인)였다.[1] 오키나와현 전현구는 2인구였으나, 당시 미군정 하에 있어 선거가 실시되지 않았다.[1]만 20세 이상의 모든 일본 국민에게 선거권이 주어졌으며, 유권자 수는 36,878,420명(남성: 16,320,752명, 여성: 20,557,668명)이었다.[1] 이전까지 남성에게만 주어졌던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여성에게도 처음으로 부여되었고, 선거권 연령은 만 25세에서 만 20세로, 피선거권 연령은 만 30세에서 만 25세로 낮춰졌다.[1] 다만, "호적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자"는 제외되어, 한국인 및 대만인의 참정권은 정지되었다.[1]
정치평론가 다와라 코타로는 유권자가 여러 후보에게 투표할 수 있는 연기제에 대해 "1표는 보수, 또 다른 1표는 진보"와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했다. 자유당 중의원 의원 오자와 사에키는 정책이 다른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것이 드물지 않다며 연기제의 문제점을 제기했다.
3. 3. 입후보자 및 정당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는 총 2,770명이 입후보하였고, 후보를 낸 정당은 258개였다. 이는 모두 일본 총선거 사상 최다 기록이다.정당별 입후보자 수는 소수정당이 570명, 무소속이 773명이었다. 해산 전 소수정당은 전국농본동맹이었다.
정당 | 합계 | 내역 | 남성 | 여성 | 해산 전 | |||
---|---|---|---|---|---|---|---|---|
전 | 전직 | 신 | ||||||
style="background:#33D6AD;" | | 소수정당 | 570 | 1 | 4 | 565 | 1 | ||
style="background:#전송 ;" | | 무소속 | 773 | 3 | 11 | 753 | 49 | ||
합계 | 2,770 | 49 | 99 | 2,622 | 2,691 | 79 | 412 | |
도도부현 | 정수 | 자유 | 진보 | 사회 | 공산 | 협동 | 제파 | 무소 | 계 | |
---|---|---|---|---|---|---|---|---|---|---|
홋카이도 | 23 | 112 | ||||||||
아오모리현 | 7 | 38 | ||||||||
이와테현 | 8 | 45 | ||||||||
미야기현 | 9 | 42 | ||||||||
아키타현 | 8 | 41 | ||||||||
야마가타현 | 9 | 36 | ||||||||
후쿠시마현 | 13 | 83 | ||||||||
이바라키현 | 13 | 89 | ||||||||
토치기현 | 10 | 57 | ||||||||
군마현 | 10 | 54 | ||||||||
사이타마현 | 13 | 56 | ||||||||
치바현 | 13 | 84 | ||||||||
가나가와현 | 12 | 77 | ||||||||
야마나시현 | 5 | 32 | ||||||||
도쿄도 | 22 | 253 | ||||||||
니가타현 | 15 | 67 | ||||||||
토야마현 | 6 | 38 | ||||||||
이시카와현 | 6 | 34 | ||||||||
후쿠이현 | 5 | 39 | ||||||||
나가노현 | 14 | 76 | ||||||||
기후현 | 10 | 59 | ||||||||
시즈오카현 | 14 | 82 | ||||||||
아이치현 | 18 | 98 | ||||||||
미에현 | 9 | 49 | ||||||||
시가현 | 6 | 35 | ||||||||
교토부 | 10 | 72 | ||||||||
오사카부 | 18 | 141 | ||||||||
효고현 | 18 | 116 | ||||||||
나라현 | 5 | 27 | ||||||||
와카야마현 | 6 | 48 | ||||||||
돗토리현 | 4 | 23 | ||||||||
시마네현 | 6 | 23 | ||||||||
오카야마현 | 10 | 47 | ||||||||
히로시마현 | 12 | 50 | ||||||||
야마구치현 | 9 | 45 | ||||||||
도쿠시마현 | 5 | 30 | ||||||||
가가와현 | 6 | 27 | ||||||||
에히메현 | 9 | 37 | ||||||||
고치현 | 5 | 24 | ||||||||
후쿠오카현 | 18 | 100 | ||||||||
사가현 | 5 | 37 | ||||||||
나가사키현 | 8 | 57 | ||||||||
쿠마모토현 | 10 | 56 | ||||||||
오이타현 | 7 | 49 | ||||||||
미야자키현 | 6 | 31 | ||||||||
가고시마현 | 11 | 54 | ||||||||
오키나와현 | 2 | - | - | - | - | - | - | - | - | |
총계 | 468 | 486 | 380 | 330 | 143 | 94 | 570 | 767 | 2,770 | |
출전: [https://dl.ndl.go.jp/info:ndljp/pid/1350471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일람. 제22회] | ||||||||||
4. 주요 정당
대정익찬회가 해산되면서, 구 정당들이 부활했는데, 입헌정우회의 후신으로 일본자유당이, 입헌민정당의 후신으로 일본진보당이, 사회대중당의 후신으로 일본사회당 등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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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정당: 38석
- 4석 (1단체)
: '''히유가 민주당'''(日向民主党): 이토 이와오, 오하시 키미, 카와노 요스미, 모리 요키오 (모두 미야자키 현 전 지역구)
- 3석 (2단체)
: '''홋카이도 정치동맹'''(北海道政治同盟): 지자키 우사부로, 시이쿠마 사부로 (모두 홋카이도 제1선거구), 모토나 타케루 (홋카이도 제2선거구)
: '''미야기 지방당'''(宮城地方党): 이노우에 토지로, 안베 슌고, 타케야 겐타로 (모두 미야기 현 전 지역구)
- 2석 (3단체)
: '''농본당'''(農本党): 아소 마사조, 이나다 켄지 (모두 도야마 현 전 지역구)
: '''히로시마 협동민주당'''(広島協同民主党): 오미야 고사부로, 오하라 히로오 (모두 히로시마 현 전 지역구)
: '''일본농본당'''(日本農本党): 우다 쿠니에이, 하라 쿠니 (모두 가고시마 현 전 지역구)
- 1석 (22단체)
: '''교육민주당'''(教育民主党): 마루야마 슈이치로 (아키타 현 전 지역구)
: '''도호쿠 일본국민당'''(東北日本国民党): 스즈키 야고로 (아키타 현 전 지역구)
: '''중도회'''(中道会): 요네야마 후미코 (야마가타 현 전 지역구)
: '''일본민당'''(日本民党): 토가리 리코 (토치기 현 전 지역구)
: '''사이타마현 정치진흥회'''(埼玉県政振興会): 이소다 마사노리 (사이타마 현 전 지역구)
: '''신일본청년당'''(新日本青年党): 타케우치 우타코 (지바 현 전 지역구)
: '''일본정론당'''(日本正論党): 이시다 카즈마쓰 (도쿄 제1선거구)
: '''아사방위동맹'''(餓死防衛同盟): 마쓰야 텐코쿠 (도쿄 제2선거구)
: '''신일본부인당'''(新日本婦人党): 요시다 세이 (가나가와 현 전 지역구)
: '''일본평화당'''(日本平和党): 안도 하쓰 (나가노 현 전 지역구)
: '''일본흥성당'''(日本興誠党): 하츠카이데 ぼう (시즈오카 현 전 지역구)
: '''신생시민당'''(新生公民党): 코시하라 하루 (아이치 현 제1선거구)
: '''산슈농민당'''(三州農民党): 나카노 시로 (아이치 현 제2선거구)
: '''신일본건설동맹'''(新日本建設同盟): 타나카 히사오 (미에 현 전 지역구)
: '''민본당'''(民本党): 미키 키요코 (오사카 제1선거구)
: '''일본부인당'''(日本婦人党): 혼다 하나코 (오사카 제2선거구)
: '''전일본직역동지회'''(全日本職域同志会): 코니시 토라마쓰 (오사카 제2선거구)
: '''청년민주주의동맹'''(青年民主主義同盟): 히키다 토시오 (야마구치 현 전 지역구)
: '''일본민주당'''(日本民主党): 누리 아키 (에히메 현 전 지역구)
: '''오이타현 농본당'''(大分県農本党): 히라노 하치로 (오이타 현 전 지역구)
: '''농민당'''(農民党): 하라지리 츠카사 (오이타 현 전 지역구)
: '''민권동지회'''(民権同志会): 이시하라 노보루 (가고시마 현 전 지역구)
4. 1. 일본자유당
대정익찬회 해산 이후, 입헌정우회의 후신으로 일본자유당이 창당되었다. 일본자유당은 주로 구 입헌정우회 계열 인사들이 참여했으며, 총재는 하토야마 이치로였다. 일본자유당은 전후 일본의 재건과 자유주의적 가치를 내세웠다.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일본자유당은 140석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다.4. 2. 일본진보당
일본진보당은 대정익찬회 해산 이후 구 입헌민정당 계열 인사들이 참여하여 창당되었다. 총재는 마치다 주지였다. 일본진보당은 보수적인 성향을 띠면서도 사회 개혁의 필요성을 일부 인정하였다.4. 3. 일본사회당
대정익찬회 해산 후, 사회대중당의 후신으로 일본사회당이 등장했다. 서기장은 가타야마 데쓰였으며, 주로 구 사회대중당 계열 인사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사회주의적 정책을 주장하며 노동자와 농민의 권익 보호를 강조했다.4. 4. 일본협동당
일본협동당은 총재 센고쿠 고타로가 이끌었으며, 농촌 지역의 지지를 기반으로 협동조합 운동을 통해 사회 개혁을 추구했다.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14석을 획득하였다.4. 5. 일본공산당
일본공산당은 서기장 도쿠다 규이치가 이끌었다. 전쟁 이전에는 불법 정당이었으나, 전후 합법화되어 활동을 재개했다. 일본공산당은 급진적인 사회 개혁과 노동자 중심의 사회 건설을 주장했다.5.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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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의석수 |
---|---|---|---|
일본자유당 | 13,505,746 | 24.36 | 140 |
일본진보당 | 10,350,530 | 18.67 | 94 |
일본사회당 | 9,924,930 | 17.90 | 92 |
일본협동당 | 1,799,764 | 3.25 | 14 |
일본공산당 | 2,135,757 | 3.85 | 5 |
기타 정당 | 6,488,032 | 11.70 | 38 |
무소속 | 11,244,120 | 20.28 | 81 |
공석 | - | - | 4 |
일본자유당은 하토야마 이치로 총재, 고노 이치로 간사장, 미키 부키치 총무회장 체제로 140석을 획득했다. 일본진보당은 마치다 주지 총재, 이누카이 다케루 간사장 체제로 94석을 획득했다. 일본사회당은 가타야마 데쓰 서기장 체제로 92석을 획득했다. 일본협동당은 센고쿠 고타로 총재 체제로 14석을, 일본공산당은 도쿠다 규이치 서기장, 시가 요시오, 노사카 산조 정치국원 체제로 5석을 획득했다. 기타 정당은 38석, 무소속은 81석을 차지했다.
5. 1. 정당별 득표 및 의석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정당별 득표 및 의석 수는 다음과 같다.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 의석수 |
---|---|---|---|
일본자유당 | 13,505,746 | 24.36 | 140 |
일본진보당 | 10,350,530 | 18.67 | 94 |
일본사회당 | 9,924,930 | 17.90 | 92 |
일본협동당 | 1,799,764 | 3.25 | 14 |
일본공산당 | 2,135,757 | 3.85 | 5 |
기타 정당 | 6,488,032 | 11.70 | 38 |
무소속 | 11,244,120 | 20.28 | 81 |
공석 | - | - | 4 |
일본자유당은 하토야마 이치로 총재, 고노 이치로 간사장, 미키 부키치 총무회장 체제로 140석을 획득했다. 일본진보당은 마치다 주지 총재, 이누카이 다케루 간사장 체제로 94석을 획득했다. 일본사회당은 가타야마 데쓰 서기장 체제로 92석을 획득했다. 일본협동당은 센고쿠 고타로 총재 체제로 14석을, 일본공산당은 도쿠다 규이치 서기장, 시가 요시오, 노사카 산조 정치국원 체제로 5석을 획득했다. 기타 정당은 38석, 무소속은 81석을 차지했다.
5. 2. 투표율
제2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총 투표율은 72.08%였다. 남성은 78.52%, 여성은 66.97%였다. 이는 전년 대비 11.08% 감소한 수치이며, 남성의 경우 전년 대비 4.64% 감소하였다.5. 3. 여성 의원 당선
제22회 중의원의원 총선거는 일본 최초로 여성의 참정권이 인정된 선거로, 39명의 여성 의원이 당선되었다.[6] 이는 일본 정치 역사상 최초로 여성들이 국회에 진출한 사례이며, 2005년 제4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43명이 당선될 때까지 여성 국회의원 최다 당선 기록이었다.[6]이름 | 선거구 | 정당 | 나이 | 직업 |
---|---|---|---|---|
안도 하츠 | 나가노 | 일본 평화당 | 34 | 주부 |
이마이 하츠 | 후쿠이 | 일본자유당 | 44 | 무직 |
오이시 요시에 | 교토 | 무소속 | 49 | 무직 |
오하시 키미 | 미야자키 | 히유가 민주당 | 41 | 무직 |
가토 시즈에 | 도쿄 제2구 | 일본사회당 | 49 | 저술업 |
카라사와 도시코 | 홋카이도 제1구 | 일본공산당 | 35 | 무직 |
키무라 치요 | 교토 | 무소속 | 55 | 무직 |
쿠레나이 미츠 | 도쿠시마 | 무소속 | 52 | 무직 |
코시하라 하루 | 아이치 제1구 | 신생 시민당 | 60 | 나고야 고등여학교 교장 |
콘도 츠루요 | 오카야마 | 무소속 | 44 | 오카야마 고등여학교 교사 |
사이토 테이 | 와카야마 | 일본진보당 | 40 | 무직 |
사카키바라 치요 | 후쿠시마 | 일본사회당당우 | 47 | 무직 |
사와다 히사 | 미에 | 일본사회당 | 47 | 무직 |
스가와라 엔 | 이와테 | 일본진보당 | 49 | 농업 |
스기타 케이코 | 이바라키 | 일본자유당 | 38 | 무직 |
타케우치 우타코 | 지바 | 신일본청년당 | 31 | 회사 임원 |
타케우치 시게요 | 도쿄 제1구 | 일본자유당 | 65 | 의사 |
타케다 키요 | 히로시마 | 일본자유당 | 49 | 학교법인 이사 |
타나카 타츠 | 돗토리 | 무소속 | 53 | 조산사 |
토가네 리코 | 토치기 | 일본민당 | 37 | 무직 |
토미타 후사 | 교토 | 교토여자자유당 | 52 | 의사 |
나카야마 타마 | 효고 제1구 | 무소속 | 55 | 의사 |
니이즈마 이토 | 홋카이도 제1구 | 일본사회당 | 56 | 일용품 활용 협회 촉탁 |
노무라 미스 | 니가타 제2구 | 무소속 | 49 | 무직 |
혼다 하나코 | 오사카 제2구 | 일본부인당 | 37 | 무직 |
마츠오 도시코 | 가나가와 | 일본사회당 | 48 | 일본여성영학원 교장 |
마츠야 텐코 | 도쿄 제2구 | 아사방위동맹 | 27 | 무직 |
미키 키요코 | 오사카 제1구 | 민본당 | 26 | 회사 경영 |
무라시마 키요 | 니가타 제1구 | 일본진보당 | 54 | 무직 |
모가미 에이코 | 군마 | 일본진보당 | 43 | 무직 |
모리야마 요네 | 후쿠오카 제1구 | 일본진보당 | 55 | 여학교 강사 |
야마구치 시즈에 | 도쿄 제1구 | 일본사회당 | 29 | 야마구치 자전거 취사부장 |
야마자키 미치코 | 시즈오카 | 일본사회당 | 45 | 무직 |
야마시타 하루에 | 후쿠시마 | 일본진보당 | 45 | 회사 임원 |
야마시타 쓰코 | 쿠마모토 | 무소속 | 47 | 회사 사장 |
요시다 세이 | 가나가와 | 신일본부인당 | 36 | 무직 |
요네야마 히사 | 이시카와 | 일본사회당 | 49 | 무직 |
요네야마 후미코 | 야마가타 | 중도회 | 44 | 무직 |
와자키 하루 | 아키타 | 무소속 | 61 | 무직 |
5. 4. 재일 한국인 및 대만인 참정권 박탈
6. 선거 이후
1946년 4월 16일, 시데하라 기주로가 일본진보당 총재에 취임하여 정권 유지를 모색했으나 각 당의 반대로 4월 22일 내각이 총사퇴했다. 5월 2일, 일본자유당 총재 하토야마 이치로에게 대명강하가 내려졌으나, 5월 4일 하토야마가 공직 추방 통지를 받고 수상 지명을 사퇴했다.
5월 16일, 외무대신 요시다 시게루에게 대명강하가 내려져, 5월 22일 제1차 요시다 내각이 발족했다.
6. 1. 요시다 시게루 내각 수립
1946년 4월 22일 시데하라 내각이 총사퇴하였다. 5월 2일 일본자유당 총재 하토야마 이치로에게 대명강하가 내려졌으나, 5월 4일 하토야마가 공직 추방 통지를 받으면서 수상 지명을 사퇴하였다.5월 16일, 외무대신 요시다 시게루에게 수상 지명이 내려져, 5월 22일 제1차 요시다 내각이 발족했다.
6. 2. 정당 재편
1946년 4월 16일 시데하라가 일본진보당 총재에 취임했다. 기타 정당의 대부분은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3대 정당(일본자유당, 일본진보당, 일본사회당) 및 일본협동당에 흡수되거나, 선거 이후 결성된 국민당에 참가했다.7. 의의 및 영향
8. 같이 보기
참조
[1]
서적
Elections in Asia: A data handbook, Volume II
2001
[2]
뉴스
ごめんね カオナシ 自民党 お手上げ――解散、名付けると
朝日新聞
2009-07-22
[3]
서적
日本政治ハンドブック: 政治ニュースがよくわかる!
一藝社
[4]
서적
議会制度百年史
[5]
서적
行動科学研究
[6]
웹사이트
女性参政権行使70年
https://www.gender.g[...]
[7]
웹사이트
第90回帝国議会 貴族院 本会議(院の成立) 昭和21年5月16日
https://teikokugikai[...]
1946-05-16
[8]
법률
議院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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