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당 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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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회당 좌파는 일본 사회당 내에서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과 미일 안전 보장 조약 체결을 둘러싼 분열로 인해 형성된 세력이다. 비무장 중립론을 주장하며 우파 사회당과 대립했고, 1955년 재통일 이후에도 구조 개혁 논쟁,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사회주의 협회의 과격한 주장 등으로 당내 갈등을 겪었다. 무라야마 정권 시기에는 자민당과의 연립 정권 참여를 둘러싸고 언론에서 좌파와 우파로 구분되었으며, 이후 민주당 등으로 흡수되거나 사회민주당, 신사회당, 입헌민주당 등으로 분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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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당 좌파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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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명칭 | 사회당 좌파 |
원어 명칭 | 일본어: 社会党左派 (Shakaitō-saha) 로마자 표기: Shakaitō-saha |
개요 | |
창립 | 1951년 |
해산 | 1955년 |
해산 사유 | 일본사회당과의 재통합 |
본부 | 도쿄 |
위치 | 일본 |
지도부 | |
위원장 | 스즈키 모사부로 |
서기장 | 와다 히로오 |
이념 및 정책 | |
정치적 이념 | 마르크스주의 혁명적 사회주의 |
정치적 성향 | 좌익 극좌 |
관련 정보 | |
색상 | 빨간색 |
이전 정보 | |
분리 정당 | 일본사회당 |
이후 정보 | |
합병 정당 | 일본사회당 |
2. 결성 배경 및 좌우 분열 (1951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및 (구) 미일 안전 보장 조약 체결에 대한 찬반을 둘러싸고 일본사회당 내에서 갈등이 발생했다. 이 조약에 반대하는 파벌은 '좌파 사회당'을 결성하게 되었다.[3] 좌우 양측 모두 '일본 사회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기 때문에 국회에서는 휴게실 번호로 구분하기도 했다. (분열 초기에는 우파는 "일본 사회당", 좌파는 "일본 사회당 제23 휴게실"로 구분했다.)[3]
좌파 사회당의 위원장에는 스즈키 시게사부로가, 서기장에는 노미조 마사루가 취임했다. (이후 1954년에 서기장은 와다 히로오로 교체되었다.)[3]
2. 1. 주요 인물 (분열 이전)
- 스즈키 시게사부로 - 가타야마 데쓰·아시다 히토시 내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청년이여, 총을 잡지 마라. 부인이여, 남편과 아들을 전장으로 보내지 마라"는 반전 연설은 비무장 중립론으로 이어졌다.[3]
- 가토 칸주 - 일본 무산당을 결성하여 파시즘에 반대했다. 가타야마 내각에는 비판적이었으나, 아시다 내각에서는 노동상을 역임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에 찬성하여 우파 사회당으로 갔다.
- 구로다 히사오 - 아시다 내각의 예산안에 반대하여 노동자 농민당을 결성했다.
- 오타 노리레이 - 안락사, 낙태, 단종 등을 권장하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었다.
- 아다치 우메이치 - 사회당 재건 전국 연락회를 결성하여 사회주의 정당 재건 및 일본 공산당과의 통일 전선 구축을 목표로 했다.
- 토카와 사토코 - 국회 키스 사건을 추궁하고 매춘 방지법 제정에 힘썼다.
- 후카자와 요시모리 - 일본 농민 조합 출신으로, 일본 공산당으로 이적했다.
- 스즈키 토우민 - 일본 공산당, 노동자 농민당에서 활동했고, 요미우리 신문사 노동 운동을 주도했다.
3. 좌파 사회당 (1951년 ~ 1955년)
일본 노동조합 총평의회(총평)의 지원을 받았으며, '조직의 좌사'라고 불렸다.[1] 비무장 중립론, 재군비 반대, 헌법 수호를 주장했다.[1] 여성 및 화이트칼라층을 중심으로 지지를 얻었다.[1]
1952년 총선에서 54석, 1953년 총선에서 72석을 획득하여 우파 사회당을 추월했다.[1] 1955년 총선에서는 89석을 획득했다.[1] 1955년 10월 13일, 좌우 사회당은 재통합하여 일본사회당(사회당 재통일)을 결성했다.[1]
선거 | 대표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 | 증감 | 순위 | 지위 |
---|---|---|---|---|---|---|---|
1952년 | 스즈키 모사부로 | 3,398,597 | 9.62 | 54 | 신규 | 4위 | 야당 |
1953년 | 4,516,715 | 13.05 | 72 | 18 | 3위 | 야당 | |
1955년 | 5,683,312 | 15.35 | 89 | 17 | 야당 |
선거 | 대표 | 선거구 | 정당 명부 | 의석 | 순위 | 지위 | |||||
---|---|---|---|---|---|---|---|---|---|---|---|
득표수 | % | 의석 | 득표수 | % | 의석 | 획득 | 총계 | ||||
1953년 | 스즈키 모사부로 | 3,917,837 | 13.99 | 10 | 3,858,552 | 14.27 | 8 | 18 | 40 | 2위 | 야당 |
4. 구조 개혁 논쟁과 이후 (1960년대 ~ 1980년대)
사사키 코조는 에다 사부로가 구조 개혁론을 제창하자 사회주의 협회와 손잡고 구조 개혁론을 비판하며 구조 개혁 논쟁을 일으켰다. 이 논쟁은 "에다 내쫓기" 양상을 보이며 당내 파벌 항쟁을 격화시켰다. 사사키 파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사회주의 협회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관계를 깊게 했지만, 그 때문에 좌파가 내건 비무장 중립주의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옅어져 갔다.
1970년대, 사회주의 협회는 활동가들의 지지를 받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긍정하는 등 과격한 주장을 펼쳤다. 1977년 에다 사부로가 탈당하고 사망한 이후, 우파의 발언권이 강해졌고, 1986년 "일본 사회당의 신선언"이 결정되면서 노선상의 좌파 우위는 수렴되었다.
도이 다카코는 1986년 더블 선거 패배로 사임한 이시바시 위원장의 뒤를 이어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소비세에 절대 반대하는 자세를 관철하여 1989년 참의원 선거, 1990년 총선에서 사회당의 약진을 이끌었다.
4. 1. 주요 인물 (구조 개혁 논쟁 이후)
- 후지와라 토요지로 - 이치카와시 시의원을 거쳐 구 지바 1구에서 당선되었다. 중일 우호 운동에 힘썼으며, 후에 "일본 사회당 중국파"를 결성했다.
- 사사키 코조 - 사회주의 협회와 손을 잡고 에다 사부로를 집요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점차 자신의 정치 기반을 사회주의 협회에 침식당해, 에다와 화해하여 반(反) 협회 파를 형성했다.
- 나리타 도미 - 위원장을 역임했다. "복지 국가의 길은 택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로 간다"라고 말했다. 유럽에서의 사회주의상 변화에 둔감했으며, 제3국을 경유하지 않고 배로 동해를 횡단하여 북한을 방문했다.
- 카메다 토쿠지 - 나리타 도미의 맹우였지만, 사공련합 정권 구상이나 사공민 노선에 반발하여 탈당했다. 일본 공산당과의 공동 투쟁을 추진하여, 전국 혁신 간친 대표 간사가 되었다.
- 바바 노보루 - 부위원장. 중도 좌파 "일본 사회당 신생 연구회" 대표 위원이었다. 사공민 노선에 회의적이었으며, 위원장 이시바시 마사시의 "자위대 위헌 합법론"에 비판적이었다.
- 타카자와 토라오 - 학생 시절에는 공산당 국제파로서, 후와 테츠조, 안도 진베이, 타케이 아키오 등과 활동했다. 사회당 입당 후에는 사회주의 협회에 소속되어 "협회의 프린스"라고 불렸다. 만년에는 자유민주당 추천으로 네리마구 구청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 도이 다카코 - 반(反) 자민당 풍조에 편승하여 "마돈나 붐"을 일으켰지만, 정권 전략이 부족하여 붐을 일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5. 무라야마 정권 (1994년 ~ 1996년)
오자와 이치로의 강권 정치 및 신진당의 '보통의 나라' 노선에 반발한 사회당은 자민당과 연립 정권 (자사사 연립 정권)을 수립하였다.[1]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사회당 출신 총리가 탄생하였다.[1] 무라야마 총리는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하여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표명하였다.[1]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회당은 자위대를 합헌으로 인정하고 미일 안보 조약을 용인하는 등, 기존의 기본 정책을 전환해야 했다.[1]
5. 1. 무라야마 정권에 대한 평가
무라야마 정권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긍정적인 평가로는, 당시 70석에 불과했던 사회당이 제한된 조건 속에서도 사회당다움을 드러냈고, 사회당 붕괴의 원인이 된 소선거구제 도입을 저지하려 노력했다는 점이 꼽힌다.[1] 또한, 기본 정책의 전환도 당 대회에서 추인되었으므로 무라야마나 좌파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도 있다.[1]반면 비판적인 평가로는, 무라야마 담화 등을 제외하고는 사회당다운 정책을 내놓는 데 거의 실패했고, 오히려 사회당 자체가 기본 정책의 전환을 강요받게 되었다는 점이 지적된다.[1] 경제 격차 및 LGBT에 대한 대응이 불충분했던 것 역시 무라야마 정권의 책임이라는 비판도 있다.[1]
오자와 이치로의 강권 정치 및 신진당의 "보통의 나라" 노선에 반발하여 자민당과 손을 잡고서라도 사회당의 자주성을 되찾으려 했던 세력을 언론에서는 편의상 '좌파'라고 불렀다.[1] 그러나, 본래 반공적인 성향의 무라야마와 그 주변은 "사회당 우파"에 속한다.[1] 무라야마 내각 성립 후, 오자와 등과의 연계를 목표로 자사사 연립 정권에 비판적인 세력을 "사회당 우파", 자사사 연립 정권을 지지하는 세력을 "사회당 좌파"라고 언론이 편의상 호칭했기 때문에, 무라야마 자신이 사회당 좌파인 것과 같은 오해가 생겼다고 여겨진다.[1]
6. 무라야마 정권 이후 (1996년 ~ 현재)
1996년, 민주당 창당 과정에서 사회당 출신 좌파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러나 무라야마, 도이 등은 사회민주당(사민당)에 잔류했는데, 이들은 본래 사회당 우파였다는 내부 지적이 있었다.[1] 신사회당은 사회당 좌파의 입장을 계승했으나, 1996년 중의원 선거와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국회 의석을 모두 잃고 쇠퇴했다.[1]
1998년 이후, 신민주당 창당으로 보수파 인사들이 유입되면서 민주당 및 민진당 내 좌파의 영향력은 약화되었다. 2017년 민진당 분열과 입헌민주당 창당으로 이러한 상황이 해소될 때까지, 이들은 당내에서 다른 사상 세력과 공존하며 발언력 상실을 겪어야 했다.[1]
사민당은 사회민주주의와 리버럴을 혼합한 노선을 내세웠으나, 2006년 '사회민주당 선언'을 통해 호헌을 내걸고 자민당과의 대결 노선을 강화했다. 그러나 민주당 계열 야당과 일본공산당 사이에서 존재감을 잃고, 2010년대 이후에는 정당 요건 유지조차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1]
2020년대 현재, 사회당 좌파로 분류되던 정치인 및 활동가들은 사민당, 신사회당, 입헌민주당 등에 분산되어 있다.[1]
6. 1. 주요 인물 (무라야마 정권 이후)
- 코모리 류호 - 부락 해방 동맹 서기장을 지냈으며, 부락 해방 운동을 이끌었다. 이후 신사회당 위원장을 역임했다.[1]
- 이토 히데코 - 공산당에서 사회당으로 당적을 옮겨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코모리 등과 함께 좌파 논객으로 알려졌으나, 사토 타카유키의 요청으로 자민당 추천을 받아 홋카이도 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이후 국민신당에 합류했다.[1]
- 노사카 히로카즈 - 무라야마의 측근으로 무라야마 내각을 지지했다. 건설상으로 재직할 때 나가라가와 하구 댐 운용 개시를 승인하여 환경 보호론자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1]
- 야타베 오사무 - 사회당 이바라키현 본부 위원장, 참의원 의원 회장 등을 역임했다. 자사사 연립 정권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사회당에서 제명되었고, 코모리 등과 함께 신사회당을 창당했다. 신사회당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1974년 록히드 사건을 추궁하며 이름을 알렸다.[1]
- 간 마사토시 - 이시카와현 고마츠시에 있는 쇼코지(진종 오타니파)의 주지였다. 참의원 의원 시절, 자민당에 접근하는 무라야마에게 반대하며 1993년 사회당 위원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무라야마에게 큰 표 차로 패했다. 이후 탈당하여 신당 호헌 리버럴에 참여했다. 그러나 호헌 리버럴의 주요 구성원인 타 에이후와 구니히로 마사오가 "반 오자와·반 신진당"을 내세우며 자민당과의 협력을 주장하자, 이에 반발했다. 호헌 리버럴에서도 탈당한 후, 신당 "헌법 미도리 농의 연대"를 창당하고 대표가 되었다. 이후 신사회당에서도 활동했다.[1]
참조
[1]
서적
Japanese Economic Development: Markets, Norms, Structures
Routledge
2007
[2]
웹사이트
ブリタニカ国際大百科事典 小項目事典 - 日本社会党
https://kotobank.jp/[...]
2019-04-06
[3]
간행물
画報現代史 補巻第15集
国際文化情報社
1957-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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