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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민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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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공민 노선은 일본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등 중도 정당 간의 연대를 의미하며, 1970년대에 에다 사부로 등의 주도로 시작되었다. 이 노선은 자민당에 대항하기 위한 야당 연합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나, 공산당 배제, 민사당의 자민당 제휴, 사회당 내부의 노선 갈등 등으로 인해 변질되거나 좌절되었다. 이후 일본 정계는 자민당과 공명당의 연립, 민주당의 부침을 거치며 다양한 형태의 연합과 분열을 경험했고, 이는 한국 정치에도 정당 간 연합의 어려움, 정치 지형 변화의 중요성 등 시사점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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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민 노선
개요
명칭사공민 노선 (社公民路線)
로마자 표기Sagongmin Noseon
영문 명칭Social Democratic-Centrist Coalition
중문 명칭 (간체)社公民路线
중문 명칭 (번체)社公民路線
약칭사공민 (社公民)
정치적 성향
이념사회민주주의
중도주의
자유주의
역사
결성1990년대 후반
주요 활동자유민주연합과 새정치국민회의의 DJP연합에 대한 반대
참여 정당 (1990년대 후반)
정당 목록새정치국민회의 (일부)
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
자유민주연합 (일부)
꼬마민주당
기타
관련 인물김대중
김종필

2. 역사

일본사회당일본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야당의 공동 투쟁을 지향했지만, 1969년 총선에서 의석이 크게 줄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사회당 우파 에다 사부로공명당, 민사당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민사당 위원장 니시무라 에이이치는 "민주적 혁신 정당의 통일"을 제창했다. 사회당 에다, 공명당 야노 준야, 민사당 사사키 료사쿠는 반공 집단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모임"을 결성했다.

하지만 사회당 좌파는 사공민 노선에 강하게 반발했다. 사회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을 지향하여 제도권 정치 내 의회 투쟁을 중시하던 공명당 및 민사당과 간극이 있었다. 사회당이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공산당과 적극적인 공동전선을 펼친 점(사공 공투)도 공명당과 민사당의 불신을 샀다.

1975년 나리타 도모미 사회당 위원장과 다케이리 요시카쓰 공명당 위원장이 화해하면서 사회당과 공명당 간 선거 협력이 성립되었다. 1976년 자민당리버럴 세력이 탈당하여 신자유클럽을 결성하면서 중도 정당이 늘어났다. 1977년 에다는 공산당을 배제한 야당 협력에 기반한 '혁신·중도 연합 정권' 구상을 제안했지만, 사회당 좌파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에다는 사회당을 탈당해 사회시민연합을 결성했지만, 에다의 사공민 노선을 지지하는 세력 대부분은 사회당에 남았다.

1979년 공민 연합 정권 구상, 1980년 사공 연합 정권 구상이 수립되었고, 아스카타 이치오 사회당 위원장은 공산당을 배제하는 것에 동의했다. 그러나 사회당과 민사당 간 연합 정권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1980년 양원 동시 선거에서 사회당과 민사당은 의석을 유지했지만, 공명당은 참패했다. 민사당은 자민당과의 제휴를 밝혀 사회당의 반발을 샀고, 공명당도 친자민 성향을 띠면서 사공민 노선은 '자민당의 보완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이시바시 마사시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지만, 공명당과 민사당은 니카이도 옹립 구상을 통해 자민당과의 연립 정권을 목표로 했다. 1986년 사회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포기하고 서구식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새 선언을 내놓았다.

1986년 도이 다카코가 일본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성 당 대표가 되었다. 이는 도이 붐을 일으켜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이 승리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1989년 참의원 선거 때 도이는 야당들을 모아 비자민-비공산 단일 후보로 조정하여 자민당을 과반 미달로 몰아넣었다.

1990년 총선에서 사회당은 약진했지만, 공명당, 민사당, 공산당 등은 참패했다. 민사당은 미일 안보, 원전 용인 등 "현실화 노선"을 사회당에 요구했고, 공명당과 더불어 자공민 노선에 경도되었다.

1992년 PKO법을 둘러싸고 사공민 노선은 파탄났다. 공명당민사당자민당과 함께 PKO법에 찬성했다. 자민당 가네마루 신은 사회당 우파와 대연정을 꾀했지만, 오자와 이치로가 이를 막았다.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오자와는 탈당하여 신생당을 창당했고, 자민당은 과반수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 오자와는 사회당과 손을 잡을 생각이 없었지만, 결국 사회당까지 참여한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

1994년 호소카와 내각이 물러나고 하타 쓰토무가 총리가 된 뒤, 사회당은 연립에서 이탈했다. 자민당은 사회당·신당 사키가케와 연립하여 자사사 연립 정권을 발족했다. 사회당은 자위대와 미일 안보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1996년 사회당은 사회민주당(사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등은 민주당(구)을 결성했다. 1996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참패, 신진당은 부진했던 것에 비해 민주당은 현상 유지에 성공했다. 1997년 신진당은 해산하고 6개의 정당으로 분열되었다.

1998년 옛 공명당 세력이 모여 공명당을 재건했다. 민주당 역시 자민당 보수파 의원들을 흡수했지만, 당내 정치적 스펙트럼이 넓어져 의사 통일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1999년 자민당과 자유당은 연립에 합의했고, 공명당이 참여하면서 자자공 연립 정권으로 발전했지만, 자유당은 곧 연립에서 이탈했다. 2003년 자유당은 민주당에 합류했다(민유 합당).

2009년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300석이 넘는 의석을 획득, 민사국 연립 정권이 탄생했지만,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사민당이 연정에서 이탈했다. 민주당은 3당 합의 등을 통해 자민당 및 공명당과의 제휴를 강화했다.

2012년 제4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결과 자공 연립 정권이 재출범했고, 민주당은 해체되었다.

2. 1.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모임

일본사회당일본공산당을 포함한 모든 야당의 공동 투쟁을 지향하는 입장이었지만, 1969년 총선에서 기존 140석의 의석이 90석으로 크게 줄어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사회당 우파인 에다 사부로공명당, 민사당과 함께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민사당 위원장 니시무라 에이이치는 "민주적 혁신 정당의 통일"을 제창했다. 이를 시작으로 사회당의 에다, 공명당의 야노 준야, 민사당의 사사키 료사쿠 세 명이 모여 반공 집단인 "새로운 일본을 만드는 모임"을 결성했다.[1][2] 이것이 사공민 노선의 첫걸음이었다.

2. 2. 중도 세력의 약진

1976년 자민당리버럴 세력이 탈당하여 신자유클럽을 결성하면서 중도 정당이 늘어났다.[1][2] 1977년 에다 사부로는 공산당을 배제한 야당 협력에 기반한 '혁신·중도 연합 정권' 구상을 제안했지만, 사회당 좌파의 반발로 좌절되었다.

2. 3. 사공민 연합 정권 구상과 좌절

1979년 '공민 연합 정권 구상', 1980년 '사공 연합 정권 구상'이 수립되었으나, 사회당민사당 간의 연합 정권 구상은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1][2]

1970년대에 민사당 니시무라 에이이치 위원장이 '민주적 혁신 정당의 통일'을 제창했고, 1976년에는 사회당 에다 사부로, 공명당 야노 쥰야, 민사당 사사키 료사쿠 등 3당 간부가 반공 정책 집단인 "새로운 일본을 생각하는 회"를 결성하여 사공민 연합 정권 구상의 첫걸음이 되었다.

하지만 1990년 제39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사회당만 약진하고 공민·중도 세력 및 공산당은 참패하면서, 공민 양당은 사회당과의 공조를 철회하고 자민당과의 연대에 나섰다.

민사당은 미일 안보, 원전 용인 등 "현실화 노선"을 사회당에 요구하는 등, 기본 정책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결국 공명당을 포함한 양당은 자공민 노선으로 기울어졌다.

1991년 제12회 통일 지방 선거에서 사회당이 패배하고, 1992년 PKO법 찬반을 둘러싸고 사공민 노선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제1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는 사공민의 선거 협력이 실패로 끝났다.

2. 4. 마돈나 붐

도이 다카코가 사회당 위원장으로 취임했는데, 이는 일본 헌정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공당의 대표가 된 사례였다. 이는 도이 붐을 일으켜 지방선거에서 사회당이 승리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1]

1989년 참의원 선거 때도 도이는 야당들을 모아 비자민-비공산 단일 후보로 조정하는 데 성공하여 자민당을 과반 미달로 몰아넣었다. 이후 총리 지명 투표에서 야당은 도이를 총리대신으로 지지했지만, 의석 수에서 밀려 자민당의 가이후 도시키가 총리로 취임했다.[1]

2. 5. 사공민 노선의 파탄

1992년 「유엔 평화 유지 활동 등에 대한 협력에 관한 법률」(PKO법)을 둘러싸고 사공민 노선은 파탄에 이르렀다. 공명당민사당자민당과 함께 PKO법에 찬성하는 입장이었고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신임안이 상정되었을 때도 자민당과 함께 찬성표를 던졌다.[1] 자민당은 공명당과 민사당을 여당으로 대우해주지 않았지만 야당의 분열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며 사회당조차 국회대책위원장 회담 등을 통해 자민당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다.[1] 결과적으로 PKO법은 자민당과 사회당의 국회대책위원장인 가지야마 세이로쿠무라야마 도미이치 사이의 합의를 통해 통과되었다.[1]

이 무렵, 자민당의 가네마루 신은 맹우인 다나베 마코토를 통해 자민당과 사회당 우파의 대연정을 꾀하고 있었다.[1] 하지만 사회당을 중시했던 가네마루에 대해 공명당과 민사당을 중시하던 오자와 이치로가 이를 막아섰고 그해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사공민의 선거 협력은 실패하여 선거에서도 참패했다.[1]

2. 6. 비자민 연립 정권의 수립

1993년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내각불신임안이 상정되어 가결되고, 오자와 이치로 등이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생당을 결성했다.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수 의석 획득에 실패했다.[1]

오자와는 사회당공명당을 중시했지만, 사회당과의 연대에는 소극적이었다. 야마기시 아키라는 사회당 좌파 의원들과는 선거 공조를 하지 않는 등 노골적으로 압박했고, 이는 총선에서 사회당만이 패배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자민·사회·공산당을 배제한 야당끼리 모여도 과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기에 결국 사회당까지 참여한 비자민·비공산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 연립 정권의 수장은 일본신당호소카와 모리히로였다.[1]

2. 7. 자사사 연립 정권의 발족

호소카와 내각이 물러나고 신생당하타 쓰토무가 총리가 된 뒤, 사회당은 연립에서 이탈했다. 자민당은 이 기회를 틈타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에 접근,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를 총리로 추대하는 조건으로 연립을 제안했고, 사회당이 이를 수용하면서 자사사 연립 정권이 발족했다.[1] 하타 내각은 2개월 만에 막을 내렸고, 사회당은 자위대와 미일 안보를 정식으로 인정했다.[1]

2. 8. 민주당으로의 재편

1996년 1월 5일,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총리직 사임을 표명했다. 사회당은 하시모토 류타로가 이끄는 제1차 하시모토 내각에서도 사키가케와 함께 연립 여당으로 남았고, 같은 해 1월 19일 당 대회에서 사회민주당(사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다.

한편, 다음 총선거를 앞두고 사민당과 신당 사키가케를 중심으로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다시 나타났다. 하토야마 유키오 등이 중심이 되어, 같은 해 9월에 사민당과 사키가케 양당 대부분, 그리고 야마하나 사다오가 속했던 시민 리그가 합류하여 민주당(구)을 결성했다.

신진당은 총선에서 정권 교체를 목표로 중의원 의원 정수의 과반수 후보자를 내세우기로 결정했지만, 자민당이 총선 전에 신진당 의원들을 빼내려는 공작을 펼쳐 자민당 출신을 중심으로 많은 의원들이 신진당을 떠났다.

이후 실시된 제41회 총선에서 민주당은 현상 유지를 했지만, 신진당은 부진했고, 사회민주당과 당내 좌파가 분열되어 만들어진 신사회당은 참패했다. 이러한 선거 결과로 신진당은 자민당과의 보보 연합을 모색했지만, 오히려 자민당에 의원을 빼앗기는 결과만 낳았고, 오자와 이치로 등 당 지도부와 반대 세력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게다가 총리를 지낸 하타 쓰토무, 호소카와 모리히로가 잇따라 탈당하면서 당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당 지도부의 힘이 약해졌다. 1997년 11월, 구 공명당 잔류 그룹으로 나중에 합류할 예정이었던 '공명'이 신진당 내부 혼란 때문에 합류를 보류하고, 다음 해 참의원 선거를 단독으로 치르겠다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신진당의 붕괴는 확실해졌다.

1997년 12월 31일, 신진당은 창당한 지 불과 3년 만에 해산하고 6개의 정당으로 분열되었다. 민사당계는 신당우애로, 공명당계는 중의원은 신당 평화, 참의원은 여명 클럽으로 재편되었다. 다만, 민사당계와 공명당계 모두 오자와 이치로가 결성한 자유당(통칭 오자와 자유당)에 남는 의원도 있었다.

호소카와 연립 내각에 남아있던 야마하나 사다오, 아카마쓰 히로타카 등은 사키가케하토야마 유키오 등과 함께 민주당을 결성했다. 1996년 총선에서 사민당은 참패했고, 신진당은 부진했지만, 민주당은 현상 유지를 하는 데 성공했다. 정권 교체 가능성이 사라진 신진당은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결국 오자와는 신진당을 해체했다.

1998년 1월 신진당이 해체된 후, 옛 공명당 세력이 모여 공명당을 다시 만들었다. 민주당 역시 4월에 자민당의 보수파 의원들을 흡수했다. 하지만 이를 통해 민주당은 당내 의원들의 정치적 성향이 다양해져 개헌 문제 등을 놓고 당내 의견 통일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1]

2. 9. 자공민 노선과 민주당 정권

1998년 4월, 신당우애는 민정당 (태양당, from 파이브, 국민의 소리 3당이 합류) 및 민주개혁연합과 함께 민주당에 합류했다. 이에 따라 구 민주당은 해산되고 새 민주당으로 재편되었다. 이로써 구 사회당과 구 민사당에 의한, 공명 계열을 제외한 통합, 이른바 '사·민 통합'이 민주당에서 실현되었다. 그러나 민주당 내에서는 사회당·사민련 출신의 리버럴 성향 의원들과 자민당·민사당 출신의 보수 성향 의원들 간의 갈등이 여전히 존재했다. 이 갈등은 헌법 개정이나 안전 보장 등 여러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나타났으며, 오랫동안 민주당이 당내 의사 통일을 하는 데 큰 방해가 되었다.[1]

한편, 공명 계열은 1998년 7월 제18회 참의원 선거에 단독으로 참여한 후, 11월에 공명당을 재결성했다. 이후 공명당은 자민당과의 협력 노선을 선택했고, 1999년 1월 자유당이 자민당과 연립 정권을 구성했으며, 10월에는 공명당도 여기에 참여했다.[1]

2. 10. 자공 연립 정권의 부활과 민주당의 해체

2003년 9월, 오자와 이치로 등 자유당 주류파는 민주당에 합류했다(민유 합병). 민주당에 참가한 오자와는 이전과는 반대로 사회당 계열 의원과의 협조 노선으로 전환했는데, 이는 당내에서 정책적 거리가 먼 사회당 계열을 끌어들임으로써 당내 기반을 다지려는 의도였다는 설도 있다.[1] 같은 해 11월, 오자와와 사회당 계열 의원의 영수 요코미치 다카히로는 국제적 기여를 위해 미래의 유엔군으로 재편될 것을 상정한 "유엔 대기 부대" 창설에 합의했다.[1]

3. 주요 쟁점

2009년 8월 제45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하여 민사국 연립 정권이 발족했지만, 2010년 5월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사민당이 연립에서 이탈하면서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민주당은 3당 합의 등을 통해 자민당, 공명당과의 연계를 강화하며 '자공민(민자공) 노선'으로 전환했다.

2012년 12월, 자유민주당과 공명당(자공)이 정권에 복귀하자 민주당과 거리를 두었고, 민주당 역시 대결 색채를 강화했다. 2015년에는 공산당이 야당 연대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공산당을 포함한 비자공(자유민주당과 공명당을 제외한) 선거 협력 체제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구 사회당·총평계와 구 민사당·동맹계 간에 공산당과의 민공공투에 대한 온도 차가 커서, 민주당의 후계 정당인 민진당 해체의 한 원인이 되었다.

2017년,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국정 진출을 위해 민진당과 접촉했고,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전 민진당의 마에하라 세이지 대표는 소속 의원 전원을 희망의 당에서 출마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고이케가 좌파 배제를 선언하면서, 이에 반발한 진보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구 입헌민주당이 결성되었다. 연합의 지지는 양당으로 나뉘었고, 1998년 제2차 민주당 결성 이후 연합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기 어려워졌다. 2018년 5월 7일에는 민진당과 국민당의 합당으로 구 국민민주당이 결성되었고, 구 동맹계 노조의 대부분은 동당 지지로 이행했다.

2020년에는 신 입헌민주당으로의 합류가 시도되었으나, 타마키 유이치로 등 합류 반대파는 신 국민민주당을 결성하고 일본유신회에 접근했다.

3. 1. 이념적 차이

사회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혁명을 지향했지만, 공명당과 민사당은 제도권 정치 내에서 의회 투쟁을 중시하여 이념적 차이가 있었다. 사회당은 서구식 사회민주주의가 아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향했기 때문에, 의회주의를 중시하는 공명당 및 민사당과의 기본적인 정책 거리가 컸다.[1][2] 이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와 민사당을 지지하는 전일본노동총동맹(동맹) 간의 극심한 대립에서 기원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사회당이 국회 차원에서는 일본공산당과 거리를 두었지만,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는 미노베 료키치 도쿄도지사, 구로다 료이치 오사카부지사 등으로 대표되는 혁신 단체장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공산당과 적극적인 공동 전선을 펼친 점(사공 공투)도 공명당과 민사당의 불신을 샀다.

3. 2. 노선 갈등

일본사회당 내 좌파와 우파, 그리고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와 전일본노동총동맹(동맹) 간의 노선 갈등은 사회당, 공명당, 민사당 간의 연합, 즉 사공민 노선을 어렵게 만들었다.[1][2]

사회당 내에서는 일본공산당의 독선적인 태도에 대한 불신이 있었지만, 동시에 민사당과의 대립도 심했다. 이는 사회당을 지지하는 총평과 민사당을 지지하는 동맹 간의 극심한 대립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사회당은 서구식 사회민주주의가 아닌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혁명을 지향했기 때문에, 제도권 정치 내에서 의회 투쟁을 중시하던 공명당 및 민사당과의 간극이 컸다.

사회당이 국회 차원에서는 공산당과 거리를 두었지만,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는 미노베 료키치 도쿄도지사, 구로다 료이치 오사카부지사 등으로 대표되는 혁신 단체장을 배출하는 과정에서 공산당과 적극적인 공동전선을 펼친 점(사공공투)도 공명당과 민사당의 불신을 샀다.

3. 3. 자민당의 견제

1980년 6월 해프닝 해산에 의한 양원 동시 선거 때 중의원에서 사회당과 민사당은 의석을 어느 정도 유지했지만, 공명당은 58석에서 25석이나 줄어든 33석으로 크게 패했다. 참의원에서는 공명당과 민사당이 방어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사회당은 6석을 잃었다.[1] 그럼에도 민사당은 선거가 진행 중일 때부터 자민당과의 제휴를 밝혀 사회당의 반발을 샀고, 선거 후에는 공명당도 친자민 성향을 띠면서 사공민 노선은 '자민당에의 대항'에서 '자민당의 보완물'로 변질되기 시작했다.[2]

사공민 노선에 소극적인 아스카타 이치오가 물러나고, 사공민 노선에 적극적인 이시바시 마사시가 신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지만, 공명당과 민사당은 니카이도 옹립 구상을 통해 공공연히 자민당과의 연립 정권을 목표로 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사회당의 지지 기반인 노조가 자민당 후보를 지원하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는 사회당과 자민당이 동일한 후보를 지원하는 모습까지 연출되었다. 또한 노조는 총평과 동맹의 통일 움직임이 개시되어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의 결성으로 이어졌다.

1990년 2월 총선에서 공명당, 민사당, 공산당 등은 참패했으며, 신자유클럽을 흡수한 자민당은 안정적인 과반을 확보하며 방어에 성공했다. 이 선거는 결국 공명당과 민사당이 사회당보다는 자민당과의 제휴로 기울도록 했으며, 총리 지명 투표에서 공명당과 민사당은 기권하여 가이후 도시키가 연임하는 데 도움을 줬다.

민사당에는 가스가 잇코, 쓰카모토 사부로, 오우치 게이고 등 친자민 성향을 가진 의원들이 적지 않았으며, 지방의원 중에서는 자민당에서 민사당으로 이적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가스가와 대립했던 사사키도 니카이도 옹립 구상에 가담하는 등 자민당과의 연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민사당은 처음부터 사회당과의 연합 정권에는 열의를 보이지 않았고, 일미 안보 협력·원전 용인 등 민사당이 사회당에 요구해왔던 현실화 노선을 사회당이 받아들인 뒤에도 민사당은 여전히 사회당에 냉랭했다. 이후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민사당은 물론 공명당마저도 사공민 노선보다는 자공민 노선에 더 경도되어 갔다.

4. 평가

2012년 12월, 자유민주당(자민당)과 공명당정권에 복귀하면서 민주당과의 거리가 멀어졌고, 민주당 역시 대결 구도를 강화했다. 2015년 공산당이 야당 연대 노선으로 전환하면서 공산당을 포함한 비자공(자민당과 공명당을 제외) 선거 협력 체제가 논의되었으나, 구 사회당·총평계와 구 민사당·동맹계 간에 민공공투에 대한 입장 차이가 커 민진당 해체의 한 원인이 되었다.

2017년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국정 진출을 목표로 민진당에 접촉, 9월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전 마에하라 세이지 민진당 대표는 소속 의원 전원을 고이케가 이끄는 희망의 당에서 출마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고이케가 좌파 배제를 선언하면서, 희망의 당에 부정적인 진보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구 입헌민주당이 결성되었다. 연합의 지지는 양당으로 나뉘었고, 1998년 제2차 민주당 결성 이후 연합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2018년 5월 7일 민진당과 국민당의 합병으로 구 국민민주당이 결성되었다.

2020년 신 입헌민주당으로의 합류가 시도되었지만, 다마키 유이치로 등 합류 반대파는 신 국민민주당을 결성하고 일본유신회에 접근했다.

4. 1. 긍정적 평가

자유민주당공명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견제 심리가 작용하면서, 다양한 정치 세력 간의 연합을 시도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이러한 시도는 비록 민공공투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면서 온도 차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2017년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의 국정 진출 시도와 맞물려 희망의 당 창당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입헌민주당이 결성되고, 연합의 지지가 분열되는 등 어려움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2020년 신 입헌민주당 합류 시도와 국민민주당 결성 등으로 이어지며 정치 세력 재편에 영향을 미쳤다.

4. 2. 부정적 평가

사공민 노선은 이념 및 노선 갈등으로 인해 실패하고, 일본 정치의 불안정성을 심화시켰다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다.[1]

2012년 12월, 자유민주당공명당정권에 복귀하면서 민주당과의 거리가 멀어졌고, 민주당 역시 대결 구도를 강화했다.[1] 2015년에는 공산당이 야당 연대 노선으로 전환하며 공산당을 포함한 비자공(자유민주당과 공명당을 제외한) 선거 협력 체제가 논의되었다.[1] 그러나 구 사회당·총평계와 구 민사당·동맹계 간에 민공공투에 대한 입장 차이가 커 민진당 해체의 한 원인이 되었다.[1]

2017년,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국정 진출을 목표로 민진당에 접촉하여, 9월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공시 직전에 마에하라 세이지 민진당 대표는 소속 의원 전원을 고이케가 이끄는 희망의 당에서 출마시키기로 결정했다.[1] 그러나 고이케가 좌파 배제를 선언하면서, 희망의 당에 부정적인 진보계 의원들을 중심으로 구 입헌민주당이 결성되었다.[1] 연합의 지지는 양당으로 나뉘었고, 구 총평계 노조 대부분은 입헌민주당을, 구 동맹계 노조 대부분은 희망의 당을 지지하게 되어, 1998년 제2차 민주당 결성 이후 연합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1] 2018년 5월 7일에는 민진당과 국민당의 합병으로 구 국민민주당이 결성되었고, 구 동맹계 노조 대부분은 국민민주당 지지로 이행했다.[1]

2020년에는 신 입헌민주당으로의 합류가 시도되었지만, 다마키 유이치로 등 합류 반대파는 신 국민민주당을 결성하고 일본유신회에 접근했다.[1]

5. 한국 정치에의 시사점

사공민 노선은 일본 민주당이 사민당, 국민신당과의 연립 정권 (민사국 연립 정권) 실패 후, 자민당, 공명당과의 연계를 강화하며 '자공민(민자공) 노선'으로 전환한 것을 말한다.[1] 이는 한국 정치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5. 1. 정당 간 연합의 어려움

2009년 8월 제45회 총선에서 민주당은 사민당, 국민신당 등과 선거 협력을 하였다. 선거 결과 민주당이 압승하여 사민당, 국민신당과의 연립 정권(민사국 연립 정권)이 발족했다. 그러나 2010년 5월,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를 계기로 연립이 결렬되어 사민당은 연립에서 이탈했다.[1]

5. 2. 정치 지형 변화의 중요성

2009년 8월 제45회 총선에서 민주당은 국민신당 등과 선거 협력을 통해 압승을 거두었고, 민사국 연립 정권이 출범했다.[1] 그러나 2010년 5월,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사민당이 연립에서 이탈하면서 연립 정권은 막을 내렸다.[1] 이후 민주당은 3당 합의 등을 통해 자민당, 공명당과의 연계를 강화하며 '자공민(민자공) 노선'으로 전환했다.[1]

5. 3. 한국의 진보 정당에 대한 교훈

제45회 총선에서 민주당은 국민신당 등과 선거 협력을 하여 압승했고, 민사국 연립 정권을 수립했다. 그러나 2010년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로 사민당이 연립에서 이탈하면서, 민주당은 3당 합의 등을 통해 자민당, 공명당과의 연계를 강화하여 '자공민(민자공) 노선'으로 전환했다.[1] 이는 한국의 진보 정당에게도 보수 정당과의 연대 및 협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참조

[1] 문서 昭和52年 警察白書 第1章 1 主な社会事象の推移 https://www.npa.go.j[...]
[2] 간행물 『社会・労働運動大年表』解説編 新しい日本を考える会 https://oisr-org.ws.[...] 법정대학대원사회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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