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가노 이루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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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가노 이루카는 일본 아스카 시대의 정치가로, 소가 씨 일족의 일원이다. 600년에서 610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를 대신하여 국정을 장악했다. 그는 645년 을사의 변으로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소가 씨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는 《일본서기》에서 권력 남용과 왕위 찬탈을 시도한 인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지만, 당나라의 문물을 수용하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한 개혁가로 평가받기도 한다.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백제와의 외교를 중시했으며, 한국 드라마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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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가노 이루카 | |
---|---|
기본 정보 | |
씨족 | 소아씨 |
부모 |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 |
형제자매 | 소가노 이루카 모노노베노 오오마로 데시바히메 (조메이 천황의 아내)? |
묘소 | 나라현다카이치군아스카무라의 아스카사 |
이명 | 하야시노 오오미 구라쓰쿠리노 오오이라쓰코 |
사망 | 고교쿠 천황 4년 6월 12일 (645년7월 10일) |
관위 | |
관위 | 대신 |
생애 | |
시대 | 아스카 시대 |
주군 | 고교쿠 천황 |
주요 사건 | 을사의 변에서 암살 |
2. 생애
에도 시대 스미요시 조케이・구케이의 합작으로 그려진 것. 왼쪽 위는 고교쿠 천황. 단잔 신사 소장 『다무봉 연기 그림 두루마리』(나라현사쿠라이시)]]
소가노 에미시(蘇我蝦夷)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출생년도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대략 600년에서 610년 사이로 추정된다. 청소년기에 승려 민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우리 집에 들어오는 자는 소가 대랑(소가노 이루카를 말함)만 못하다"라고 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였다고 한다.
642년, 고교쿠 천황이 즉위하자 아버지를 대신해 국정을 맡았다. 같은 해 7월 23일에는 종자가 흰색 참새 새끼를 얻었는데, 이는 할아버지 소가노 우마코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643년, 아버지 에미시가 비공식적으로 "자관"을 이루카에게 수여하여 오오미(大臣)로 삼았다고 하나,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이는 소가 씨 내부의 문제로 관위 십이 계와는 별개였다고 한다.[4]
같은 해 11월 1일, 거세 토쿠타 등을 시켜 이카루가 궁의 야마시로노 오에를 습격했다. 야마시로노 오에는 요메이 천황의 2세 왕으로 이미 왕위 계승에서 멀어졌고, 이카루가에 독자적인 정치력과 경제력을 가진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야마시로노 오에는 이코마 산으로 도망쳤으나, 가신의 "동쪽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진언을 거절하고, 11월 11일 이카루가 절에서 일족과 함께 자결하여 상궁왕가는 멸망했다. 에미시는 아들 이루카가 야마시로노 오에를 살해한 것에 격노했다고 한다.
당시 황위 계승은 단순 세습이 아니라 황족 중 적합한 인물을 선택하는 방식이었고, 스이코 천황의 후계자 다툼에는 빈다쓰 천황 계와 요메이 천황 계의 대립이 있었다. 후지와라 씨 가전에는 가루 왕 등 여러 황족이 야마시로노 오에 습격에 가담하여, 소가노 이루카와 황위 계승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황족들의 의도가 일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644년 11월, 에미시와 이루카는 아마카시 언덕에 저택을 짓고 "위의 궁문", "계곡의 궁문"이라 칭하고, 이루카의 아이를 "왕자"라고 부르게 했다. 또한 에미시의 우네비 산 동쪽 집을 무장화했으나, 최근 연구에서는 이를 전횡이 아닌 아스카 방어를 위한 당연한 조치로 본다.
이러한 정책으로 이루카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사람들은 길에 떨어진 물건도 줍지 않을 정도로 그를 두려워했다. 이루카는 고구려처럼 권신이 괴뢰 왕을 세우고 독재 권력을 휘두르는 방식을 지향했다.
그러나 황위 계승과 정치 방침에서 대립하던 나카노오에 황자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등이 일으킨 을사의 변(645년 7월 10일)으로 아스카 이타부키 궁 대극전에서 고교쿠 천황 앞에서 살해되었다. 소가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상표문을 읽을 때 떠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던 중, 나카노오에 황자와 사에키노 고마로에게 베였고, 천황에게 무죄를 호소했으나 죽임을 당하고 비가 오는 밖에 유해가 버려졌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에미시와 이루카뿐 아니라 소가 계 왕통 적류인 고인 대형 황자도 제거하려 했고, 을사의 변은 소가 씨 내부의 씨족장 다툼 측면도 있었다.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씨족장과 대신 자리를 미끼로 이시카와마로와 아베노 우치마로를 유인했다.
아버지 에미시도 자결하고 일족도 몰살되었다. 이후 사촌 이시카와마로와 아카에가 대신을 맡았으나, 이시카와마로는 모반 혐의로 멸망하고, 아카에는 임신 난으로 유배되어 소가 씨는 몰락, 헤이안 시대 초기에는 공경도 배출하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루카는 『후지와라 씨 가전』에 "소가노 타로", 『조궁 성덕법왕제설』에 "하야시 타로", 『일본서기』에 "군대랑"으로 기록되어 장남으로 추정된다. 『후지와라 씨 가전』에 따르면, 승려 민에게 『주역』을 배워 "우리 당에 들어오는 자 중에 소가노 타로만 한 자는 없다"라고 칭찬받을 정도로 학식과 인물이 뛰어났고, 민에게서 최신 통치 기술과 국제 정세를 배웠다.
고치현아가와군이노정 나미카와에는 소가노 이루카의 후예인 소가노 구니미쓰가 겐큐 연간에 이 땅에 내려와 나미카와 씨를 칭했다는 전설이 있다.
2. 1. 초기 생애와 권력 장악
600년에서 610년 사이 소가노 에미시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청년 시절에는 승려 민(旻)에게 학문을 배워 수재로 이름을 날렸다.[4] 642년 고교쿠 천황이 즉위하자 아버지를 대신해 국정을 맡게 되었다. 같은 해 7월 23일에는 흰 참새 새끼를 얻었는데, 이는 할아버지 소가노 우마코를 상징하는 것이었다.643년 10월 6일, 아버지 에미시로부터 오오미(大臣) 직을 물려받아 소가 씨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4] 그러나 이 무렵 쇼토쿠 태자 이후 왕실에서는 왕 중심의 국정 개혁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었다. 이루카는 이러한 움직임을 억누르고 소가 씨와 혈연이 깊은 후루히토노 오에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쇼토쿠 태자의 아들 야마시로노 오에를 비롯한 우에노미야 왕가(上宮王家) 사람들을 자결로 몰아넣었다.
644년 11월, 아마카시노오카(甘樫丘)에 저택을 짓고 자신의 자녀들을 미코(皇子)라고 부르게 했다. 또한 우네비 산(畝傍山)에 요새를 짓고 왕실 행사를 멋대로 대행하여, 최고 권력자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그의 치세에는 사람들이 크게 경외하여 길에 떨어진 것도 함부로 줍지 않았다고 한다.
2. 2. 권력 강화와 정책
643년 쇼토쿠 태자 사후, 왕실 중심으로 국정을 개혁하려는 움직임을 억누르고, 소가 씨와 혈연관계가 깊은 후루히토노 오에를 왕위에 앉히려 했다.[4] 같은 해 10월, 왕위 계승의 걸림돌로 여겨진 야마시로노 오에와 그 일가를 자결로 몰아넣었다.[5]644년 11월, 아마카시노오카(甘樫丘)에 저택을 짓고 자신의 자녀들을 미코(皇子)라고 부르게 하는 등 왕실에 준하는 권위를 과시했다. 또한 우네비 산(畝傍山)에 요새를 축조하고 왕실 행사를 대행하는 등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이루카는 견당사를 파견하여 당나라의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통해 고구려와 같은 방식의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2. 3. 을사의 변과 죽음
645년, 나카노오에 황자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등이 주도한 을사의 변으로 아스카 이타부키 궁(飛鳥板蓋宮) 대극전(大極殿)에서 고교쿠 천황이 보는 앞에서 암살당했다.[4] 소가노 구라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石川麻呂)가 표문을 읽으며 떨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겼는데, 나카노오에 황자와 사에키노 고마로(佐伯子麻呂)에게 베였다. 상처를 입고 죽어가면서 왕에게 자신의 무고함을 호소했으나, 결국 죽임을 당했다. 이루카의 시신은 비가 내리는 바깥에 내던져졌다.[4]이루카의 아버지 소가노 에미시도 살던 저택에 불을 질러 자결하면서 소가 씨 본종가는 멸망했다.[4]
을사의 변 이후, 소가 씨 친척인 이시카와마로와 아카에가 오오미(大臣)를 맡기도 했지만,[4] 아카에가 임신의 난으로 유배된 후 소가 씨(이시카와 씨)는 몰락했다.

3. 역사적 평가와 논란
《일본서기》는 소가노 이루카가 소가씨의 월권 행위와 고교쿠 천황의 아들인 후루히토노 오에 황자에게 황위를 계승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소가 씨는 본래 소가노 우마코 대부터 대륙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데 힘썼던 개혁파의 선두 주자였으며, 당나라나 백제 등 당시의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다는 의견도 있다.[4] 실제로 "우에노 미카도(上の宮門)"와 "다니노 미카도(谷の宮門)" 터로 추정되는 곳에서는 무기고 유구와 무기가 발굴되었으며, 서쪽에서 침공해 오는 당나라와 백제, 신라군으로부터 아스카의 도성을 수호하기 위해 소가 씨가 준비한 것으로도 생각된다. 또한 견당사도 여러 차례 파견되어, 당나라의 일본 파병을 소가 씨가 경계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루카의 암살과 그 뒤를 이은 소가 본종가의 멸망에 관해서는, 최근 개혁의 주도권 다툼을 둘러싼 소가 씨와 황족 및 반(反) 소가 씨 세력과의 갈등이 암살의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소가노 이루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몇 가지 논란이 있다. 메이지 학원 대학교수인 다케미쓰 마코토는 당시 시대는 정령 숭배 사상에 기초하여 동물에서 유래한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는 풍조에서 (같은 시대의 "동물에서 유래한 이름"을 가진 인물로는 노이 고래, 가와치 고래, 오키시 토끼, 고세 원숭이, 모노노베 곰 등), 소가노 이루카도 바다의 신의 힘을 빌리기 위해 돌고래에 빗대어 이 이름을 사용했다는 자신의 설을 표명하고 있다.[6] 그러나 그와 반대로 가도와키 데이지 등은 나카노오에 황자(후의 덴지 천황)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후의 후지와라노 가마타리)가 그의 진짜 이름을 자료와 함께 지우고, 짐승을 뜻하는 '이루카(入鹿)'라는 천한 이름을 함부로 붙였다는 설을 표명하고 있다.
3. 1. 한국과의 관계
1993년부터 1994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삼국기》와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방영된 KBS 드라마 《대왕의 꿈》에서는 소가노 이루카가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신라와 대립하는 인물로 그려진다.[1] 《삼국기》에서는 배우 김영선이, 《대왕의 꿈》에서는 배우 정진각이 소가노 이루카를 연기했다.[1]4. 유적 및 유물
아스카데라(飛鳥寺) 경내와 아마카시 언덕(甘樫丘) 근처에는 ‘이루카의 목 무덤(首塚)’이라 불리는 무덤이 있다.[1] 2005년 11월 13일, 나라현(奈良県) 아스카촌(明日香村)에서 소가노 이루카의 저택 터로 추정되는 유구가 발견되었는데,[1] 이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에현(三重県) 마쓰사카시(松阪市) 이다카정(飯高町) 후나토에도 "이루카의 목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오륜탑이 있다. 다카미산(高見山)까지 이루카의 목이 날아와 이 곳에서 힘없이 떨어지자 마을 사람들이 정중하게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이 다카미산에 낫을 가지고 들어가면 반드시 부상을 입는다고 하는데, 이는 이루카를 살해한 나카토미노 가마타리(中臣鎌足)의 이름에 "낫(鎌)" 자가 들어가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5. 대중문화 속 소가노 이루카
소가노 이루카는 드라마, 연극, 소설, 만화 등 다양한 대중 매체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5. 1. 드라마
- 1993년: KBS 드라마 《삼국기》 (배우: 김영선)
- 2012년: KBS 드라마 《대왕의 꿈》 (배우: 정진각)
- 1980년: TV 아사히 드라마 《누카타노 오오키미(額田女王)》 (배우: 츠가와 마사히코)
- 2005년: NHK 드라마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배우: 와타베 아츠로)
5. 2. 연극
- 곤치마쓰 한니 외 『이모세야마 여인 정훈』(오사카 타케모토좌 초연, 1771년)
- 다카라즈카 가극단 『가극(뮤지컬) "가마타리 - 꿈의 마호로바, 야마토 아름다움 - "』 (출연: 하나가타 히카루)
- 다카라즈카 가극단 『아스카 저녁놀 - 소가노 이루카 -』 (출연: 아야키 나오 = 현 아야키 나오)
5. 3. 소설
-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누카타노 오오키미(마이니치 신문사)
- 쿠로이와 쥬고의 소설 나카노오에 황자전(고단샤)
- 쿠로이와 쥬고의 소설 낙일의 왕자 - 소가노 이루카(분게이슌주)
- 마치이 토시오의 소설 아스카 불타다 - 개혁자 소가노 이루카(PHP 연구소)
5. 4. 만화
- 무로타니 츠네조의 『쇼토쿠 태자 불교 전래와 호류지』 (학습연구사 / 그림으로 보는 만화 일본사)
- 하라시마 사브로의 『덴지 천황 다이카 개신』 (학습연구사 / 그림으로 보는 만화 일본사)
- 야마기시 료코의 『해돋이의 천자』, 『마야코 여왕』 (하쿠센샤)
- 사토나카 마치코의 『천상의 무지개』 (고단샤)
- 도코보 키이치의 『변환 퇴마 야행 카르라 춤춘다!』
- 나오카 료코의 『새벽의 회랑』 (아키타 쇼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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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뉴스
Soga no Iruka house believed found
http://heritageofjap[...]
Japan Times Weekly
2005-11-14
[2]
서적
帝王編年記
[3]
서적
一代要記
[4]
서적
蘇我氏 古代豪族の興亡
中央公論新社
2015
[5]
서적
上宮聖徳法王帝説
岩波書店
2013
[6]
서적
語源に隠された日本史
河出書房新社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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