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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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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을사의 변은 645년 일본 아스카 시대에 소가노 이루카가 암살된 사건을 말한다. 소가씨가 권력을 독점하고 야마시로노오에 왕을 멸망시킨 후,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와 나카노오에 황자는 소가씨 타도를 계획했다. 고교쿠 천황 앞에서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고, 소가노 에미시가 자결하면서 소가씨는 멸망했다. 이후 고교쿠 천황은 양위하고 고토쿠 천황이 즉위했으며, 나카노오에 황자는 황태자가 되어 다이카 개신을 단행했다. 을사의 변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며, 가루 황자 주모설, 한반도 국가 모델설, 반동 쿠데타설 등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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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의 변 - [전쟁]에 관한 문서
사건 개요
사건명을사의 변
로마자 표기Isshi no Hen
한자 표기乙巳の変
발생 연도645년 (황극천황 4년)
발생 날짜6월 12일 - 13일
발생 장소현재의 나라현아스카무라
결과소가 씨 종가의 멸망
교전 세력
교전 1나카노오에 황자의 군세
교전 2소가 씨 종가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나카노오에 황자
지휘관 2나카토미노 가마타리
지휘관 3소가노 이루카
지휘관 4소가노 에미시

2. 배경

스이코 천황 30년 2월 22일(622년 4월 8일), 섭정이자 우마야도 황자(厩戸皇子)였던 쇼토쿠 태자가 사망했다. 쇼토쿠 태자의 죽음으로 대호족인 소가씨를 억누를 자가 없게 되고, 소가씨의 전횡은 날로 심해져 그 권세는 황실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덴표호지 4년(760년)에 쓰여진 《등씨가전》(藤氏家傳) 〈대직가전〉(大織冠傳)에는, 소가노 이루카동탁에 비유하고 있다.[24]

소가노 우마코가 죽고 소가노 에미시가 대신이 되었으며, 스이코 천황이 후사를 지명하지 않고 승하한 뒤, 조메이 천황이 옹립되었다.[25] 641년 조메이 천황 사후에는 고교쿠 천황이 즉위하였다. 고교쿠 천황 원년(642년) 가뭄 때 고교쿠 천황이 직접 제를 올려 비를 내리게 하여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같은 해, 에미시는 가쓰라기에 조묘를 짓고 팔일의 춤을 추게 하였으며, 자신들의 수묘를 조영하여 '능'이라 칭하고 백성을 동원했다는 기록은 소가씨 전횡의 예시로 인용된다.[25] 고교쿠 천황 2년(643년), 에미시는 병을 이유로 이루카를 대신으로 삼고 국정을 장악하게 했다. 고교쿠 천황 3년(644년)에는 에미시와 이루카가 저택을 나란히 세우고 '윗궁문' 등으로 칭하며 전횡을 일삼았다.[25]

이후 소가노 이루카는 이카루가궁을 공격하여 야마시로노오에 왕을 자살로 몰아넣었다. 당시 왕위 계승은 세습제가 아닌 능력과 혈연을 기준으로 한 황족 간 경쟁이었다.

전(傳) 소가노이루카 머리묘. 2005년 촬영.


소가씨의 전횡에 불만을 품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나카노오에 황자와 함께 소가씨 타도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를 끌어들여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2. 1. 소가씨 전성시대

쇼토쿠 태자 사후, 소가씨 가문의 권세는 황실을 능가할 정도로 강해졌다. 소가노 우마코의 뒤를 이어 소가노 에미시가 대신이 되었고, 스이코 천황 사후에는 조메이 천황을 옹립하여 권력을 더욱 강화했다.[25] 조메이 천황 사후에는 고교쿠 천황이 즉위하였다.

소가노 에미시의 아들 소가노 이루카고교쿠 천황 시대에 대신이 되어 전횡을 일삼았다. 특히 643년에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인 야마시로노오에 왕을 살해하여 왕위 계승 분쟁을 일으키고 자신의 권력을 더욱 강화하려 하였다.[25]

2. 2. 상궁왕가의 멸족

643년 11월, 소가노 이루카는 후루히토노오에 황자를 차기 천황으로 옹립하기 위해 고세노 토코타 등의 장수를 동원해 야마시로노오에 왕이 살고 있던 이카루가궁(斑鳩宮)을 공격했다.[15] 야마시로노오에 왕은 수십 명의 사인(舍人)을 거느리고 필사적으로 방어했지만, 결국 이코마 산으로 도망쳤다. 측근인 미와노 후미야노 키미는 동쪽으로 도망쳐 재기할 것을 권유했지만, 야마시로노오에 왕은 백성에게 고통을 주지 않겠다며 거절하고 이카루가 사찰(斑鳩寺)로 돌아와 왕자와 함께 자결했다. 이로써 쇼토쿠 태자의 피를 이어받은 상궁 왕가는 멸망했다.

당시 왕위 계승은 단순한 세습이 아니라, 황족들 중에서 천황에 걸맞은 인물이 선택되는 방식이었다. 인격, 나이, 천황 및 유력 제후들과의 혈연관계 등이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는 천황가의 권력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여러 호족들을 묶는 우두머리(長)의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권력 구조는 유력한 황족들 간의 권력 투쟁을 야기했고, 야마시로노오에 왕의 죽음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15]

3. 소가노 이루카의 암살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소가씨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나카노오에 황자와 함께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645년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이 조공을 바치는 의식을 이용해 암살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 의식에는 소가노 이루카도 참석했다.[25]

이루카는 평소 의심이 많아 항상 칼을 차고 다녔지만, 이날은 광대의 꾐에 넘어가 칼을 풀고 의식에 참석했다.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삼한이 보낸 표문을 읽는 동안, 나카노오에 황자는 위문부로 하여금 12곳의 문을 모두 닫고 사람의 왕래를 막았다.[25]

3. 1. 암살의 실행

나카노오에 황자와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는 645년 삼한(고구려, 백제, 신라)의 사신이 조공을 바치는 의식을 이용하여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궁궐 문을 닫고 위문부를 매수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25]

7월 10일, 고교쿠 천황이 참석한 의식에서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가 표문을 읽는 동안, 나카노오에 황자는 직접 창을 들고 대극전 옆에 매복했다. 가마타리는 활과 화살로 호위했다. 궁정 호위병 사에키노 무라지 코마로와 카츠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 무라지 아미타는 이루카를 암살하는 역할을 맡았지만,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저했다.[25]

이시카와마로가 땀을 흘리며 떨자, 이루카는 그 이유를 물었다. 이시카와마로는 "천황 가까이에 있어 경외스럽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코마로 등이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질책한 뒤, 스스로 나서서 이루카의 머리와 어깨를 베었다. 이루카는 즉사하지 않고 "천황의 자리에 오를 분은 하늘의 아들입니다. 저는 죄를 알지 못하니 살펴 주십시오."라고 호소했다.[26]

나카노오에 황자는 "이루카는 황족을 멸하고 황위를 위태롭게 하려 했습니다."라고 주장했고, 고교쿠 천황은 물러났다. 결국 코마로와 아미타가 이루카를 살해했다.[26]

4. 결과

645년 7월 10일(음력 6월 12일) 궁중에서 소가노 이루카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고교쿠 천황은 큰 충격을 받고 왕위에서 물러날 것을 결심했다.[3] 아스카 시대 일본 사회는 정신적, 개인적인 "부정"에 민감했는데, 특히 천황 가까이에서 벌어진 폭력적인 살인은 최악의 부정 행위로 여겨져 며칠간의 은둔을 필요로 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3]

고교쿠 천황은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즉시 양위하려 했으나,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의 조언에 따라 왕위는 그녀의 오라버니인 후루히토노오에 황자나 그녀의 남동생인 가루 황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5] 후루히토노오에 황자는 승려가 되어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힘으로써 교착 상태를 해결했다.[3] 645년 7월 12일, 후루히토노오에 황자는 호코지에서 머리를 깎았다.[6]

결과적으로 고교쿠 천황은 동생에게 양위했고, 그는 곧 고토쿠 천황(645–654)으로 즉위했다.[7] 고토쿠 천황 사후, 고교쿠 천황은 사이메이 천황(재위 655–661)으로 다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나카노오에 황자가 덴지 천황(661–672)으로 즉위했다.[8]

4. 1. 소가씨의 멸망과 다이카 개신

나카노오에 황자는 즉시 호코지(法興寺)로 들어가 소가노 이루카를 죽인 것을 알리고 전쟁을 준비했고, 여러 황자와 호족들이 그를 따랐다. 소가노 이루카의 시신은 소가씨족의 집에 있던 소가노 에미시에게 보내졌다. 에미시는 중국으로부터 귀화한 아야노 아타이(漢直) 등을 소집해 진을 쳤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고세노 도코타를 소가씨의 집으로 보내 자신이 이루카를 죽인 까닭을 전하고 이들을 회유했다.[25] 다카무코노 구니오시도 이들을 설득해 결국 소가씨의 부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25]

다음날인 6월 13일(7월 11일), 소가노 에미시는 집에 불을 질러 《천황기》, 《국기》, 그 밖의 각종 보물과 함께 불속에서 목숨을 끊었다. 이때 《국기》는 후나에노 에사카가 불 속에서 주워 보존한 끝에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전해졌다. 이렇게 오랜 세월 위세를 떨치던 소가씨족은 멸망하였다.[25]

다음날인 6월 14일(7월 12일), 고교쿠 천황은 남동생인 가루 황자(고토쿠 천황)에게 양위하니 그가 고토쿠 천황이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황태자에 봉해졌다. 나카노오에는 아베노 우치마로를 좌대신, 소가노 구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를 우대신, 나카토미노 가마타리를 내신에 임명하고 후에 "다이카 개신"이라고 불리는 개혁을 단행한다.

아스카 시대의 일본 사회는 정신적, 개인적인 "부정" 문제에 민감했다. 특히 천황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벌어진 폭력적인 살인은 최악의 부정 행위로 여겨졌으며, 이는 일종의 불경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을 바로잡기 위한 며칠간의 은둔을 필요로 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3]

4. 2. 고교쿠 천황의 양위와 고토쿠 천황 즉위

6월 14일(7월 12일), 이루카 암살에 충격을 받은 고교쿠 천황은 동생인 카루 황자(輕 皇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카루 황자는 고토쿠 천황으로 즉위했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황태자가 되었다.[3] 아스카 시대 일본 사회는 정신적, 개인적인 "부정" 문제에 민감했는데, 특히 천황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벌어진 폭력적인 살인은 최악의 부정 행위로 여겨졌다. 이는 일종의 불경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을 바로잡기 위한 불확실한 과정에서 며칠간의 은둔을 필요로 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3]

고교쿠 천황은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바로 왕위를 물려주고 싶어했지만, 나카토미노 가마타리의 조언에 따라 왕위는 그녀의 오라버니인 후루히토노 오에나 고교쿠 천황의 동생인 카루 황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5] 후루히토노 오에는 승려가 되어 왕위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혀 교착 상태를 해결했다.[3] 645년 7월 12일, 후루히토노 오에는 호코지에서 머리를 깎았다.[6] 고교쿠 천황은 동생에게 양위했고, 그는 곧 고토쿠 천황(645–654)으로 즉위했다.[7] 고토쿠 천황이 죽은 후 고교쿠 천황은 사이메이 천황(재위 655–661)으로 다시 왕위에 올랐고, 그 후 나카노오에 황자 자신이 마침내 덴지 천황(661–672)으로 즉위했다.[8]

5. 다이카 개신의 영향

고토쿠 천황 즉위 후, 나카노오에 황자는 황태자에 봉해졌다. 나카노오에는 아베노 우치마로를 좌대신(左大臣), 이시카와마로를 우대신(右大臣), 카마타리를 내신(內臣)에 임명하고, 이후 다이카 개신이라 불리는 개혁을 단행한다.[25]

6. 을사의 변에 대한 여러 해석

을사의 변은 단순한 권력 투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20세기 중후반까지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바탕으로 을사의 변과 뒤이은 다이카 개신이 일본 율령제 도입에 큰 영향을 준 사건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1967년 후지와라쿄에서 발견된 목간을 통해 일본서기의 내용이 수정되었음이 밝혀졌다.[10][11]

2005년 이후 발굴 조사에서 아마카시 언덕에서 소가노 이루카의 저택, "계곡의 궁문(하자마노미카도)"의 병영과 무기고가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소가 씨가 아스카데라를 포함하여 이타부키노미야를 둘러싼 방어 시설을 구축하여 외적 방어를 강화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6. 1. 가루 황자 주모설

도야마 미츠오는 나카토미노 가마타리, 나카노오에 황자는 반란을 일으킨 일당의 일부에 불과하며, 가루 황자(고토쿠 천황)가 을사의 변의 주모자라고 추측하고 있다. 변 이후의 고토쿠 정권의 중추를 차지한 소가노 이시카와마로와 아베노 우치마로가 가루 황자의 본거지였던 나니와 주변에 세력 기반을 가지고 있거나 어떠한 연이 있었던 점, 또한 변 후에 나니와로 천도(나니와나가라노토요사키노미야)한 점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16]

6. 2. 한반도 국가 모델설

소아노 이루카가 야마시로노오에 왕을 멸하고 권력 집중을 꾀한 것은 고구려연개소문 정변을 의식한 것이며, 을사의 변은 신라김유신(『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따르면 김유신은 중국 황제의 아들 소호의 후손이다[17]) 등에 의한 비담의 난 진압 후 왕족 중심 체제 하에서의 여왕 추대와 유사했기 때문에 여러 신하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쉬웠다는 요시다 다카시의 견해가 있다[18]。더욱이 동시기 백제에서도 태자의 지위를 둘러싼 내란이 있었고, 그 결과 배제된 왕자 부여풍이 왜국에 인질로 잡히게 되었으며, 백제의 후계자 후보가 인질 명목으로 방출되어 왜국의 궁정에 나타난 충격이 왜국의 국내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스즈키 야스미의 견해도 있다[19]

6. 3. 반동 쿠데타설

20세기 중후반기까지는 『일본서기』의 신빙성이 높게 평가되어 을사의 변으로 시작된 다이카 개신이 일본의 율령제 도입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1967년 12월, 후지와라쿄의 북쪽 바깥 해자에서 "기해년 10월 상총국아파평 마쓰사토 □(기해년은 서기 699년)"라고 쓰인 목간이 발굴되어 군(郡)론쟁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일본서기』의 이 부분이 편찬 과정에서 수정되었음이 명확해졌다.[10][11]

2005년부터 시작된 발굴 결과, 아스카아마카시 언덕에서 소가노 이루카의 저택과 "계곡의 궁문(하자마노미카도)"의 계곡의 궁문에서 병영과 무기고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또한 소가노 에미시의 저택 위치와 소가 씨가 건립한 아스카데라의 위치로부터, 소가 씨는 아스카이타부키노미야를 둘러싸듯이 방위 시설을 설치하여 외적으로부터 도성을 지키려 했던 것이 아니냐는 설이 제기되었다.

당시 618년에 성립한 당나라한반도에 영향력을 미치고, 왜국도 당나라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위기감을 소가 씨는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기존의 백제 일변도의 외교를 개정하고 각국과의 협조 외교를 생각했다. 이에 반해, 기존의 "백제 중시" 외교 노선을 취하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덴지 천황 등 보수파가 "개명파"인 소가 씨를 타도했다고 한다. 소가 씨 타도 후 보수파는 백제 중시의 외교를 추진했고, 백강구 전투에서 그것이 파탄난다. 이른바 "대화 개신"은 그 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된다.

6. 4. 고교쿠 왕권 부정설

사토 나가토는 을사의 변이 소가씨에게 권력을 부여해 온 고교쿠 천황의 왕권 자체에 대한 이의 제기였으며, 실질적인 "왕 살해"에 필적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10][11] 하지만, 주모자인 나카노오에 황자는 고교쿠 천황의 친아들이었으며, 실제로는 대신인 소가 씨를 토벌함으로써 이의를 제기했고, 고교쿠 천황은 살해되는 대신 강제로 퇴위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7. 한국의 관점에서의 을사의 변

20세기 중후반까지는 일본서기의 신빙성이 높게 평가되어 을사의 변으로 시작된 다이카 개신이 일본의 율령제 도입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1967년 12월, 후지와라쿄 북쪽 바깥 해자에서 "기해년 10월 상총국아파평 마쓰사토 □(기해년은 서기 699년)"라고 쓰인 목간이 발굴되어 군(郡)론쟁에 종지부를 찍음과 동시에, 일본서기의 이 부분이 편찬 과정에서 수정되었음이 명확해졌다.[10][11]

7. 1. 한반도와의 관계

을사의 변 당시 한반도는 삼국시대였으며,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경쟁하고 있었다. 일본은 삼국과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고, 특히 백제와의 관계가 깊었다.[2]

소가노 이루카가 야마시로노오에 왕을 멸망시키고 권력을 집중하려 한 것은 고구려 연개소문의 정변을 의식한 것이었다. 을사의 변은 신라의 김유신 등이 비담의 난을 진압하고 왕족 중심 체제를 확립한 것과 유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쉬웠다는 견해가 있다.[18]

같은 시기 백제에서도 태자의 지위를 둘러싼 내란이 있었고, 그 결과 왕위 계승에서 배제된 왕자 부여풍이 왜국에 인질로 보내졌다. 백제의 후계자 후보가 인질 명목으로 추방되어 왜국의 궁정에 나타난 충격은 왜국의 국내 정치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도 있다.[19]

당시 618년에 성립한 당나라가 한반도에 영향력을 미치고, 왜국도 당나라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는 위기감을 소가 씨는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기존의 백제 중심 외교를 수정하고 여러 국가와의 협조 외교를 추진했다. 이에 반해, 기존의 "백제 중시" 외교 노선을 취하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덴지 천황 등 보수파가 "개혁파"인 소가 씨를 타도했다는 견해도 있다. 소가 씨 타도 후 보수파는 백제 중시 외교를 추진했고, 백강구 전투에서 그 정책이 파탄났다.

7. 2. 백제 부흥 운동과의 연관성

618년 당나라가 성립되면서 한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하자, 왜국은 당나라의 위협에 직면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에 소가 씨는 기존의 백제 중심 외교에서 벗어나 각국과의 협조를 추구하는 외교 정책을 펼쳤다. 반면,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덴지 천황 등은 백제 중시 외교 노선을 고수하며 소가 씨를 타도하였다. 이후 보수파는 백제 중심 외교를 추진하였으나, 백강구 전투에서 패배하며 이러한 외교 정책은 파탄을 맞았다.[10][11]

8. 관련 작품


  • 大化改新 (テレビドラマ)|대화개신 (드라마)일본어 (NHK, 2005년 1월 3일 방송)
  • 대왕의 꿈한국어 (한국 KBS, 주인공 김춘추 등이 삼한의 사신으로 등장)
  • 飛鳥の王女|아스카의 왕녀일본어 (카와무라 에리, 프린세스 코믹스), 을사의 변으로부터 약 10년 후의 이야기로, 외전이 을사의 변을 무대로 하고 있다.
  • 夕星の皇子、暁星の天子|저녁별의 황자, 샛별의 천자일본어 (코사카 이부키, Yahoo! 코믹 웹 매거진 코믹 히스토리아(미디어 팩토리)에서 2009년부터 연재 중)
  • 天地天武 -新説・日本書紀-|천지천무 - 신설·일본서기 -일본어 (원안 감수: 소노무라 마사히로, 그림: 나카무라 마리코, 2012년 17호 ~ 2016년 15호, 쇼가쿠칸빅 코믹)
  • 落日の皇子 蘇我入鹿|낙일의 왕자 소가노 이루카일본어 (쿠로이와 쥬고 저, 분게이슌주)[21]
  • 夏つばき -紅き夢の呼ぶもの-|여름 태풍 - 붉은 꿈이 부르는 것일본어 (아사카 쇼 저, 슈에이샤 슈퍼 판타지 문고)[22]
  • イルカ殺し -大化改新(改)〜妖変、乙巳の変の巻〜|돌고래 살해 - 대화개신(개) ~ 요변, 을사의 변의 권 ~일본어 (오자키 카츠유키 저, 와니북스)[23]

참조

[1]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Ponsonby Memorial Society
[2] 문서 Perez, p. 145
[3] 문서 Ponsonby-Fane, p. 50.
[4] 문서 Sakamoto, Tarō et al. (1965). Nihon Koten Bungaku Taikei: Nihon Shoki Vol. II, p. 264.
[5] 문서 "Nihongi'', p. 195]–196; Brown, Delmer ''et al.'' (1979). ''Gukanshō'', p. 266; Varley, H. Paul. ''Jinnō Shōtōki''. p. 44. https://books.google[...]
[6] 문서 pp. 195]–196. https://books.google[...]
[7] 문서 "Annales des empereurs du japon'', pp. 47]–48. https://books.google[...] 1834
[8] 문서 p. 54. https://books.google[...]
[9] 문서 "[大化改新]『[[国史大辞典 (昭和時代)|国史大辞典]]』[[吉川弘文館]]、[[1997年]]。"
[10] 서적 藤原京―よみがえる日本最初の都城 "[[中央公論新社]]" 2003
[11] 서적 飛鳥の木簡―古代史の新たな解明 "[[中央公論新社]]" 2012
[12] 문서 後漢末の董卓は、皇帝であった[[少帝弁|劉弁]](少帝)を廃し、その弟の[[献帝 (漢)|劉協]](献帝)を即位させ、朝政を牛耳ったとされる。
[13] 웹사이트 八佾の舞(ヤツラノマイ)とは? 意味や使い方 https://kotobank.jp/[...] "[[DIGITALIO]]" 2024-08-21
[14] 웹사이트 奈良の歴史散歩 https://www.pref.nar[...] "[[奈良県庁]]" 2024-08-21
[15] 서적 蘇我氏 ― 古代豪族の興亡 "[[中央公論新社]]" 2015-12-18
[16] 서적 大化改新―六四五年六月の宮廷革命 "[[中央公論新社]]" 1993
[17] 문서 "{{quotation|{{lang|zh-Hant|金庾信,王京人也。十二世祖首露,不知何許人也。以後漢建武十八年壬寅,登龜峯,望駕洛九村,遂至其地開國,號曰加耶,後改為金官國。其子孫相承,至九世孫仇充,或云仇次休,於庾信為曾祖。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故姓金。庾信碑亦云:「軒轅之裔,少昊之胤。」則南加耶始祖首露與新羅,同姓也。}}|三国史記|巻四十一}}{{Wikisourcelang|zh|三國史記/卷41}}"
[18] 서적 日本の誕生 "[[岩波書店]]" 1997
[19] 서적 日本の古代国家の形成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2011
[20] 서적 日本古代王権の構造と展開 "[[吉川弘文館]]" 2009
[21] 웹사이트 落日の王子: 蘇我入鹿 https://www.amazon.c[...] "[[Amazon.com]]" 2024-12-29
[22] 웹사이트 夏嵐: 緋の夢が呼ぶもの (集英社スーパーファンタジー文庫 あ 5-1) https://www.amazon.c[...] "[[Amazon.com]]" 2024-12-29
[23] 웹사이트 ログイン - DMM.com https://accounts.dmm[...] 2024-12-29
[24] 문서 後漢末の董卓は、皇帝であった[[少帝弁|劉弁]](少帝)を廃し、その弟の[[献帝 (漢)|劉協]](献帝)を即位させ、朝政を牛耳ったとされる。
[25] 서적 蘇我氏 ― 古代豪族の興亡 "[[中央公論新社]]" 2015-12-18
[26] 웹인용 蘇我入鹿臣의 죽음(일본육국사 한국관계기사 > 일본서기(日本書紀) > 권 24 天豐財重日足姬天皇 皇極天皇) https://db.history.g[...] 202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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