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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야마 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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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기야마 겐은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육군 대장까지 진급했으며, 육군 대신과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러일 전쟁에 참전하고 육군대학교를 졸업한 후 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만주사변 당시 육군 차관으로 정당 방위 성명을 발표했으며, 2·26 사건 진압을 지휘했다. 하야시 내각과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을 지냈고,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참모총장으로 일본군의 군사 작전을 지휘했다. 전쟁 패배 후 자살했으며, 그의 메모는 '스기야마 메모'로 발간되어 당시 일본 군부의 동향을 파악하는 자료로 활용된다. 그는 전쟁 확대에 대한 책임으로 비판받았으며, 종전 직전까지 항전을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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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기야마 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스기야마 하지메
스기야마 하지메
직책
군사육군대신
임기 시작1937년 2월 9일
임기 종료1938년 6월 3일
군주쇼와
총리하야시 센주로
고노에 후미마로
이전나카무라 코타로
다음이타가키 세이시로
군사육군대신
임기 시작1944년 7월 22일
임기 종료1945년 4월 7일
총리고이소 구니아키
이전도조 히데키
다음아나미 코레치카
군사참모총장
임기 시작1940년 10월 3일
임기 종료1944년 2월 21일
군주쇼와
총리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이전간인 고토히토 친왕
다음도조 히데키
인물 정보
출생일1880년 1월 1일
사망일1945년 9월 12일
출생지고쿠라, 후쿠오카현, 일본
사망지일본 도쿄
소속일본
군대육군
복무 기간1901년–1945년
계급겐수이
지휘
지휘제12사단
북지나 방면군
제1총군
참전
참전러일 전쟁
중일 전쟁
충칭 폭격
제2차 세계 대전
훈장
훈장금치훈장, 욱일장
일본어 정보
로마자 표기Sugiyama Hajime / Sugiyama Gen
묘소
묘소다마 묘원

2. 생애

스기야마는 후쿠오카현 고쿠라시(현 기타큐슈시) 출신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 12기, 육군대학교 22기를 졸업하고 러일 전쟁에 참전했다.[1] 이후 참모본부 근무, 필리핀, 영국령 인도 등에서의 무관 활동, 육군 항공 분야 개척 등을 거쳤다.

1928년 육군성 군무국장에 올랐고, 1931년 만주사변 발발 당시에는 육군 차관으로서 "정당 방위" 성명을 발표했다. 1936년 2·26 사건 진압을 지휘한 뒤 교육총감에 임명됨과 동시에 육군 대장으로 승진했다. 1937년 하야시 내각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 대신을 역임하며 중일 전쟁 확전에 관여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참모총장으로서 태평양 전쟁 개전과 수행을 주도했으며, 1943년 원수 칭호를 받았다.[36] 전황 악화 속에서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가 고이소 내각에서 다시 육군 대신을 맡았다. 1945년 스즈키 내각 출범 후에는 본토 결전에 대비해 창설된 제1총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패전 후인 9월 12일 사령부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39]

2. 1. 초기 생애 및 군 경력

스기야마는 후쿠오카현 고쿠라시(현 기타큐슈시) 출신으로, 아버지는 덴포 14년(1843년)에 태어나 게이오 2년(1866년) 병인 변화 당시 농병으로 종군한 후 교육자로 활동한 스기야마 사다이다. 그는 호슈 중학교(하타 신지 중장과 동기)를 거쳐 1901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12기로 졸업했다.

러일 전쟁에는 제12사단 예하 보병 제14연대 제3대대 부관(소위 계급[1])으로 참전했으며, 1904년 10월 사하 전투 중 시엔후 부근 전투에서 얼굴에 부상을 입었다. 이 부상으로 생긴 흉터 때문에 오른쪽 눈을 완전히 뜨지 못하는 후유증이 남았다.[14]

1910년 육군대학교를 22기로 졸업한 후 참모본부 제2부(정보)에서 근무했다. 1912년에는 민간 무역 회사 직원으로 위장하여 필리핀싱가포르에 무관으로 파견되었고, 일본 해군 중위로 위장하여 수빅 만의 미국 해군 기지를 시찰하는 등 첩보 활동을 벌였다.[15] 1913년 소령으로 진급했고, 1915년에는 영국령 인도 주재 무관으로 파견되어 인도 독립 운동가 라스 베하리 보스와 수바스 찬드라 보스를 비밀리에 만났다. 1918년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중동 전선에 군사 참관인으로 파견되어 에드먼드 앨런비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의 전투 방식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16] 전쟁 후에는 국제 연맹의 군사 항공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스기야마는 중령으로 진급하여 1918년 12월 제2항공대대장에 임명되었고, 1921년에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그는 군사 항공 분야의 강력한 지지자였으며, 1922년에는 육군 항공대의 초대 육군성 군무국 항공과장이 되어 '육군 항공대 육성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했다.

1924년부터 육군대신을 지낸 우가키 가즈시게에게 중용되어 1928년에는 육군성 군무국장에 올랐다. 1931년에는 우가키를 중심으로 한 군사 정권 수립을 목표로 한 3월 사건에 고이소 구니아키, 니노미야 하루시게 등과 함께 관여했다. 같은 해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육군 차관으로서 "정당 방위" 성명을 발표하며 군부의 입장을 대변했다.

그러나 1931년 11월, 아라키 사다오가 육군대신이 되면서 황도파가 육군 내 실권을 장악하자, 우가키의 측근으로 간주된 스기야마는 차관직에서 물러나 1932년 2월 구루메의 제12사단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황도파와 통제파의 대립이 계속되었으나, 아라키의 사임과 마사키 진자부로 교육총감 해임을 계기로 황도파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스기야마는 육군 항공 본부장을 거쳐 1934년 8월 참모차장 겸 육군대학교 교장으로 취임하며 군 중앙에 복귀했다.

1936년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 사건 당시에는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반란 진압을 지휘했다. 사건 수습 후 교육총감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며 우메즈 미치지로, 도조 히데키 등 통제파 핵심 인물들의 지지 아래 육군 내 중진으로 자리매김했다.

2. 2. 군부 내 권력 장악

1924년 육군대신 우가키 가즈시게에게 중용되었으며, 1928년에는 육군성 군무국장에 취임했다. 이 시기 스기야마는 육군 내 파벌 중 하나인 통제파(Tōseiha)의 주요 인물로 부상했다. 1931년에는 우가키를 총리로 추대하려던 군사 쿠데타 미수 사건인 3월 사건에 고이소 구니아키, 니노미야 하루시게 등과 함께 관여했다. 같은 해 9월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당시 육군 차관이었던 스기야마는 "정당 방위" 성명을 발표하며 일본군의 군사 행동을 옹호했다.

1931년 11월, 경쟁 파벌인 황도파(Kōdōha)의 아라키 사다오가 육군대신에 오르자 우가키계로 분류된 스기야마는 차관직에서 물러나 1932년 2월 구루메 제12사단장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황도파와 통제파의 항쟁이 이어졌지만, 아라키의 사임과 마사키 진자부로 교육총감 해임을 계기로 황도파는 세력을 잃었다. 스기야마는 육군 항공 본부장을 거쳐 1934년 8월 참모차장 겸 육군대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군부 중앙에 복귀했다.

1936년 황도파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 사건 당시, 스기야마는 반란군의 요구를 거부하고 진압을 지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황도파는 숙청되었고, 스기야마를 비롯한 통제파가 육군 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사건 직후 스기야마는 교육총감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1월 육군 대장으로 승진하며[2] 우메즈 미치지로, 도조 히데키 등과 함께 통제파의 핵심 인물로서 입지를 굳혔다.

1937년 2월 하야시 센주로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처음 입각했으며, 이어진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같은 해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강경론을 주장하며 중일 전쟁의 전면 확대를 지지했다. 1938년 육군대신에서 물러나 군사 참의관을 잠시 역임한 뒤, 같은 해 12월 북지나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산시 성 공격 등 중국 침략 전쟁을 직접 지휘했다.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참모총장을 역임하며 태평양 전쟁의 개전 결정과 전쟁 수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1943년 6월에는 군인으로서 최고 영예인 원수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던 1944년 2월, 도조 히데키가 수상, 육상, 참모총장을 겸임하려 하자 통수권 독립을 명분으로 반발했으나, 쇼와 천황과 기도가 고이치 내대신까지 동원한 도조의 정치 공세에 밀려 결국 참모총장직을 사임해야 했다.

1944년 7월 사이판 함락으로 도조 내각이 실각 위기에 몰리자, 스기야마는 야마다 오쓰조의 후임으로 교육총감 자리에 앉았다. 도조 실각 후 고이소 구니아키가 총리가 되자, 육군 내 통제파의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우메즈 미치지로 등의 의향에 따라 다시 육군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4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출범하자 아나미 고레치카에게 육군대신 자리를 넘기고, 본토 결전에 대비해 신설된 제1총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패전 후인 1945년 9월 12일, 스기야마는 제1총군 사령부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39]

상하이에 있는 일본군 상륙 지점을 시찰하는 스기야마(1938년)

2. 3. 육군 대신 및 참모총장



1937년 2월 9일, 스기야마는 하야시 센주로 내각에서 육군 대신으로 취임했으며[17], 후임 고노에 후미마로가 이끄는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일본과 중국 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이 발생하자, 스기야마는 강경론을 주장하며 고노에 총리에게 중국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압박했고, 이는 결국 중일 전쟁의 전면적인 발발로 이어졌다.

제1차 고노에 내각의 육군 대신 시절, 각의에서 탁무 대신 오타니 소네로부터 전쟁 확대에 대한 질문을 받았으나 이를 무시하고 답변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해군 대신 요나이 미쓰마사가 대신 답변하자, 스기야마는 "자네는 뭐야, 이런 곳에서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라며 요나이를 호통쳤다. 전시 상황이라 할지라도 각의를 공공연하게 "이런 곳"이라 폄하한 것은 그의 오만한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평가된다[25].

1938년 6월 3일, 스기야마는 육군 대신 직을 사임하고 일본 최고 전쟁 평의회 위원이 되었다.[3] 같은 해 12월에는 잠시 평의회를 떠나 북지나 방면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산시 성 공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몽골 주둔군 사령관을 맡다가 1939년 9월 다시 평의회로 복귀했다.[4]

1940년 9월 3일, 고령의 간인 고토히토 친왕의 뒤를 이어 일본 제국 육군 참모총장 자리에 올랐다. 참모총장으로서 그는 태평양 전쟁 개전의 입안과 지도에 깊숙이 관여했다. 1941년 9월 5일, 쇼와 천황에게 남방 작전 계획을 보고하면서 약 5개월 안에 작전이 종료될 것이라고 설명했으나, 천황은 과거 중일 전쟁 발발 당시에도 속전즉결을 장담했지만 전쟁이 장기화된 점을 지적하며 스기야마의 예측에 강한 불신을 드러내고 그 근거를 질책했다고 전해진다[20][21].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스기야마는 1943년 3월, 육군 내에서 조기 강화를 주장하던 마쓰타니 마코토 대령을 참모본부 전쟁지도과 과장으로 임명하고[18], 그에게 종전 연구를 지시하는 등 조기 강화 움직임을 지원하기도 했다[19]. 이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독일 패배 이후 전쟁의 향방을 우려한 쇼와 천황과 궁중의 의향을 따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같은 해 6월에는 원수 칭호를 받았다.[36]

1944년 2월, 트럭 섬 공습을 계기로 도조 히데키 수상이 육군 대신과 참모총장을 겸임하려 하자, 스기야마는 야마다 오쓰조 교육총감과 함께 통수권 독립을 내세워 저항했다. 그러나 쇼와 천황과 기도 고이치 내대신에 대한 도조의 공작으로 결국 참모총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같은 해 7월, 사이판 전투 패배로 도조 내각이 실각 위기에 처하자, 스기야마는 야마다를 대신하여 교육총감으로 자리를 옮겼다. 도조 실각 후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이 들어서자, 육군 내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우메즈 미치지로 등 육군 수뇌부의 의향에 따라 다시 육군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4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성립되자 아나미 고레치카에게 육군 대신 자리를 넘겨주고, 본토 결전에 대비해 창설된 제1총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종전 직전, 원수로서 천황에게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있었을 때, 그는 동료 원수인 나가노 오사미와 함께 "국군은 아직 여력이 있고 사기가 왕성하므로, 더욱 항전하여 미군을 격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쟁 지속 의지를 보였다. 이는 항복을 주장한 하타 슌로쿠 원수와는 대조적인 입장이었다.

패전 후인 1945년 9월 12일, 스기야마는 제1총군 사령부에서 권총으로 자살하여 생을 마감했다.[39] 향년 66세였다. 자결 직전 미 제8군 사령관 로버트 아이켈버거 중장과 만나 제1총군의 해체 및 무장해제 완료를 지시받았으며, 이 임무가 완료된 다음 날 자결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14]

스기야마는 "변소의 문"(便所の扉)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어느 쪽으로든 밀리는 대로 움직인다"는 의미로 그의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비꼬는 것이었다[22]. 또한 "구즈 겐"(愚図元)이라는 별명도 있었는데, 이는 그의 느릿한 행동과 외모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3][24].

2. 4. 자살

1945년 스즈키 내각 성립 후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신설된 제1총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패전 후인 9월 12일, 연합국의 지시에 따라 일본 제국 육군의 최종 해산을 위한 준비를 마친 뒤, 스기야마는 제1총군 사령부의 자신의 사무실 책상에 앉아 권총으로 가슴을 네 발 쏘아 자살했다.[39][10] 그의 묘는 후추의 다마 묘지에 있다.

스기야마는 루거우차오 사건 당시 육군 대신,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참모총장을 역임하는 등 전쟁 지도에 깊이 관여했던 인물로서, 패전의 책임을 통감하여 종전 당일인 8월 15일에 이미 "사죄 상언서(御詫言上書)"라는 제목의 유서를 작성해 두었다. 이 유서는 그의 자결 다음 날인 9월 13일 쇼와 천황에게 전달되었다.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죄 상언서(御詫言上書)

:대동아 전쟁 발발 이후 3년 8개월여, 혹은 휘장(帷幄)의 막료장으로서, 혹은 보필 대신으로서 황군의 요직을 욕되게 하고, 충용스러운 장병들의 분투, 열성적인 국민들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소관의 불민과 덕망 부족으로 능히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마침내 성전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전쟁 종결에 이르러 수백만 명의 장병을 잃고, 거액의 국비를 낭비하며, 집을 태우고, 재산을 잃어, 황국 개벽 이래 아직 본 적 없는 난국에 처하게 되어, 국체의 유지 또한 용이하지 않아, 몹시 천황 폐하의 심려를 끼쳐 드려, 공포와 두려움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죄는 만 번 죽어도 부족합니다.

:

:삼가 대죄를 사죄드리는 미미한 정성을 바치며, 폐하의 옥체와 황국 재흥의 날이 속히 오기를 기원합니다.

:

:쇼와 20년 8월 15일 작성              공포 삼가 말씀드립니다.

:

:육군 대장 스기야마 겐(杉山 元) (화압(花押))

스기야마의 자결 과정에는 몇 가지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종전 직후 바로 자결하지 않았는데, 국방부인회 회장을 맡고 있던 그의 아내가 요양지에서 돌아와 남편이 아직 살아있는 것을 보고 자결을 재촉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내의 재촉에 스기야마는 병사들의 복원 문제를 마무리해야 한다고 답했지만, 아내는 그런 일은 당신이 아니어도 할 수 있다며 다그쳤다고 한다. 그는 이미 8월 15일에 유서를 작성하며 자결을 결심했지만, 아내에게 이를 밝힌 것은 8월 23일이었다.

종전 처리 업무를 마친 9월 12일 아침, 스기야마는 부하에게 권총을 받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잠시 후 문을 열고 나와, 밖에서 대기하던 제53군 고급 참모 다나카 타다카츠 대좌에게 "이봐, 총알이 안 나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권총의 안전 장치가 잠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나카 대좌가 안전 장치를 풀어주자, 스기야마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가슴에 네 발의 총을 쏘아 자결했다. 그의 자결 소식을 집에서 전해 들은 아내는 "숨을 거둔 것이 틀림없습니까?"라고 확인한 뒤, 정장을 입고 불상 앞에서 청산가리를 마시고 단도로 가슴을 찔러 남편의 뒤를 따랐다.

스기야마의 부관이었던 고바야시 시노지 중좌와 참모 다나카 타다카츠 대좌의 회고에 따르면, 스기야마는 패전 직후 자결을 결심하고 유서까지 준비했으나, 종전 처리와 제1총군 복원 문제 때문에 실행을 미루고 있었다. 그의 아내 역시 국방부인회 임원으로서 자결을 결심하고 도쿄로 돌아와 있었다. 12일 아침, 스기야마는 다나카 참모에게 자신과 아내가 같은 날 자결하기로 했음을 밝히며, 양녀를 위해 아내만이라도 살아남도록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다나카 참모와 고바야시 부관은 스기야마의 집으로 가 아내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이 사실을 보고받은 스기야마는 결국 자결했으며, 아내 역시 뒤따라 목숨을 끊었다.[14]

3. 스기야마 메모

스기야마 겐이 참모총장 시절 어전회의나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 등 주요 회의 내용을 기록한 메모 초고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스기야마 메모'라는 이름으로 공표되었다.[40] 이 메모는 당시 일본 군부와 정부 상층부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스기야마 하지메(1943년 6월 1일)


해당 메모는 1967년 참모본부 편으로 『스기야마 메모: 대본영 정부 연락 회의 등 필기』(상·하)라는 제목으로 하라서방에서 출판되었다.

4. 논란 및 비판

스기야마 겐은 중일 전쟁태평양 전쟁의 주요 결정 과정에 깊이 관여한 핵심 인물 중 하나로, 그의 군사적 판단과 정치적 행보는 많은 논란과 비판을 낳았다. 그는 전쟁 확대와 수행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나, 작전 예측 실패, 쇼와 천황과의 갈등, 각의에서의 독단적인 태도 등으로 인해 비판적인 평가를 받는다. 또한 그의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비꼬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전쟁 말기에는 종전을 위한 움직임에 관여하기도 했으나, 종전 직전까지 항전을 주장하는 등 일관되지 못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4. 1. 전쟁 범죄 책임



제2차 세계 대전이 아시아 및 태평양 지역으로 확대되기 전, 스기야마는 서방과의 전쟁을 적극적으로 주장한 육군 장교 중 한 명이었다.[5] 1941년 9월 5일, 쇼와 천황은 스기야마가 1937년 중일 전쟁에서 일본의 침략이 3개월 안에 완료될 것이라고 잘못 예측했던 점을 지적하며, 서방 열강과의 전쟁에서 빠른 승리를 장담하는 그의 자신감을 질책했다.[6] 그럼에도 불구하고, 1941년 12월 1일 천황은 결국 전쟁을 재가했다.

1944년 7월,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에서 육군대신을 맡고 있는 스기야마(앞줄 왼쪽), 요나이 미츠마사(앞줄 오른쪽)와 함께.


전쟁이 발발하자 스기야마는 육군의 군사 작전을 지휘하는 책임을 맡았다. 그의 지휘 아래 일본군은 몇 달 만에 말라야, 네덜란드령 동인도, 버마,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와 서태평양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했다.

1943년 초,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이 결정적인 패배를 겪으면서 전세는 일본에게 불리하게 돌아섰다.[7] 같은 해 스기야마는 명예직인 원수 칭호를 받았다.

전쟁 상황이 모든 전선에서 악화되자, 1944년 2월 21일 스기야마는 도조 히데키 대장(총리대신 겸임)에 의해 참모총장 자리에서 해임되었다.[8] 해임 직후 그는 육군 내에서 여전히 권위 있는 직위 중 하나였던 육군 교육 총감으로 임명되었다.

1944년 도조 히데키가 실각한 후, 스기야마는 새로 출범한 고이소 구니아키 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을 맡았다. 1945년 7월에는 연합군의 일본 본토 침공 작전에 대비하여 일본 동부 지역 방어를 담당하는 제1총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9]

일본의 항복 선언 10일 후, 연합국의 지시에 따라 일본 제국 육군의 해체 준비를 마친 스기야마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아내 역시 집에서 자살했다.[10] 그의 묘는 후추의 다마 묘지에 있다.

4. 2. 기타 논란


  • 스기야마 겐에게는 그의 성격이나 행동을 비꼬는 별명들이 따라다녔다. 대표적인 별명은 "변소의 문"인데, 이는 "어느 쪽이든 누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의미로, 그의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또한 "구즈 겐"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그의 태평하고 비만한 외모와 느릿한 행동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실제로 그는 운동 신경이 둔했다고 전해진다.

  • 『쇼와 천황 실록』에 따르면, 1941년 9월 5일 제국 국책 수행 요령 결정과 관련하여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 해군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와 함께 쇼와 천황에게 설명을 올리는 자리에서, 남방 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스기야마는 "육해군에서 연구한 결과, 남방 작전은 약 5개월이면 종료될 것으로 전망된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천황은 이를 납득하지 못하고, 과거 중일 전쟁 발발 당시 육상으로서 속전즉결을 장담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과거 스기야마의 발언은 종종 반대 결과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스기야마가 "중국 내륙이 워낙 광대해서 그렇다"고 변명하자, 천황은 "태평양은 더욱 광대하다. 작전 종료를 5개월로 보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며 강하게 질책했다고 한다.

  • 제1차 고노에 내각의 육상 시절, 각의에서 척무대신 오타니 소네로부터 "육군은 도대체 어디까지 진격할 생각인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이는 중일 전쟁의 전선 확대에 불안을 느낀 총리 고노에가 직접 묻기 어려워 오타니에게 대신 질문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기야마는 질문을 무시하고 답변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해군 대신 요나이 미쓰마사가 "대략 영정하와 보정 선에서 멈출 것 같습니다"라고 대신 답하자, 스기야마는 요나이에게 "자네는 뭔가! 이런 곳에서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라고 호통을 쳤다. 온화한 성격의 요나이는 "그럴까나"라고만 대답했고, 각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스기야마가 각의를 공공연하게 "이런 곳"이라고 칭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는데, 이는 "정당 출신자가 있는 곳"이라는 의미였다고 해석된다.

  • 중일 전쟁에서 태평양 전쟁으로 확전되는 과정에서 육상과 참모총장을 역임한 스기야마는 주전파의 핵심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1943년 3월,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배하자 전쟁의 앞날을 우려한 쇼와 천황과 궁중의 의향을 받아들여, 참모본부 전쟁지도반장(초대 과장)에 육군 내에서 이단시되던 마쓰타니 마코토 대좌를 임명하고 종전 연구를 비밀리에 지시했다. 이는 천황의 의향에 충실히 따르는 그의 '승조필근(承詔必謹)' 원칙에 따른 행동으로 해석된다. 이후 고이소 내각에서 다시 육상이 되었을 때, 그는 도조 히데키 참모총장(수상 겸임)에게 조기 종전을 건의했다가 좌천되었던 마쓰타니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임명하여 중앙 정계에 복귀시켰다. 마쓰타니는 해군의 다카기 소키치 소장이나 외무성의 가세 토시카즈 등과 함께 종전을 위한 막후 공작을 진행했다. 마쓰타니는 전후 "(1943년) 3월 이후 천황 폐하의 종전 의사와, 이를 구현하려 했던 스기야마 참모총장의 노력이 나의 새로운 종전 방책 구상의 동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 미국과의 개전으로 이어진 중국 주둔 일본군 문제에 대해서는 철수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했으며, 도조 히데키, 기도 고이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 종전 직전, 원수로서 천황에게 의견을 질문받았을 때, 스기야마는 동료 원수인 나가노 오사미와 함께 "국군은 아직 싸울 여력이 있고 사기도 왕성하므로, 계속 항전하여 미군을 격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문을 받은 다른 원수 하타 슌로쿠는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어렵다"는 취지의 상반된 의견을 제시했다.

  •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이 이루어진 1945년 9월 2일, 스기야마는 요코하마의 미 제8군 사령부로 호출되었다. 사령관 로버트 아이켈버거 중장은 스기야마에게 구 일본 육군 제1총군복원을 완료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동일본 점령을 담당하는 미 제8군이 약 40개 사단 규모의 제1총군 병력을 신속히 해산시켜 점령지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스기야마는 아이켈버거가 자신에게 보여준 예우(정문 영접, 상석 권유, 개인적 교분 제안 등)에 감격했다고 부관 고바야시 시요지 중좌에게 말했다고 한다. 제1총군의 복원은 9월 11일에 완료되었고, 스기야마는 바로 다음 날인 12일에 자결했다. 그의 자결에 입회했던 다나카 타다카츠 대좌는 스기야마가 총군 복원 완료를 확인하고 자결할 각오였기에 12일을 택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장례는 제1총군 부대장으로 치러졌으며, 아이켈버거가 참석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5. 평가



스기야마 겐은 "변소의 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어느 쪽이든 누르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의미로 그의 기회주의적인 성향을 비꼬는 것이었다. 또한 "구즈 겐"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그의 태평하고 비만한 외모와 느릿한 행동에서 유래한 별명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 운동 신경이 둔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 개전 직전인 1941년 9월 5일, 제국 국책 수행 요령 결정과 관련하여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 해군 군령부 총장 나가노 오사미와 함께 쇼와 천황에게 남방 작전 계획을 설명했다. 이때 천황으로부터 작전 성공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받자 "육해군에서 연구한 결과, 남방 작전은 약 5개월이면 종료될 전망"이라고 답변했다. 그러나 천황은 이를 납득하지 못하고, 과거 중일 전쟁 발발 당시 육군대신으로서 속전즉결을 장담했지만 전쟁이 장기화된 점을 지적하며 "종래 스기야마의 발언은 종종 반대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했다. 스기야마가 "중국의 오지가 광대하기 때문"이라고 변명하자, 천황은 "태평양은 더욱 광대하지 않은가? 작전 종료 전망을 약 5개월로 잡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며 강하게 질책했다고 전해진다.

제1차 고노에 내각에서 육군대신으로 재임하던 시절, 각의(국무회의)에서 탁무대신 오타니 소네로부터 중일 전쟁의 확대 범위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이는 전쟁 확대를 불안하게 여긴 고노에 총리가 직접 묻기 어려워 오타니 대신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그러나 스기야마는 질문을 무시하고 답변하지 않았고, 보다 못한 해군대신 요나이 미쓰마사가 대신 답변하려 하자 "자네는 뭐야, 이런 곳에서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라고 호통을 쳤다. 전시 상황이라지만 각의를 공공연히 "이런 곳"이라고 칭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으며, 이는 스기야마가 정당 출신 각료들이 있는 자리를 얕잡아 보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다.

중일 전쟁에서 태평양 전쟁으로 확전되는 과정에서 육군대신과 참모총장을 역임하며 주전파의 핵심 인물로 여겨졌다. 대미 개전의 주요 쟁점이었던 중국 주둔 일본군 문제에 대해서도 철수를 절대 반대하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며, 이는 도조 히데키, 기도 고이치 등과 연계된 것이었다.

그러나 전쟁 말기인 1943년 3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전쟁의 장래를 우려한 쇼와 천황과 궁중의 의향을 받아들여, 참모본부 전쟁지도과장(후에 전쟁지도반으로 개칭)에 중국 전선에서의 병력 감축을 주장하여 육군 내에서 비주류로 여겨지던 마쓰타니 마코토 대좌를 임명하고 종전을 위한 연구를 지시했다. 이는 천황의 의향에 충실히 따르는 그의 '승조필근(承詔必謹)' 원칙에 따른 행동으로 해석된다. 이후 고이소 내각에서 다시 육군대신이 되었을 때, 도조 히데키에게 조기 종전을 건의했다가 좌천되었던 마쓰타니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복귀시켜 해군의 다카기 소키치, 외무성의 가세 도시카즈 등과 함께 종전을 위한 물밑 작업에 참여하게 했다. 마쓰타니는 훗날 "(1943년) 3월 이후 천황 폐하의 종전 의지와 스기야마 참모총장의 승조필근에 의한, 그 구현 노력이 나의 새로운 종전 방책 발의의 동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종전 직전, 원수로서 천황에게 의견을 질문받았을 때는 같은 원수인 나가노 오사미와 함께 "국군은 아직 여력이 있고 사기도 왕성하므로, 계속 항전하여 미군을 격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문을 받은 하타 슌로쿠 원수는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은 어렵다"는 상반된 의견을 제시했다.

일본의 항복 문서 조인이 이루어진 1945년 9월 2일, 스기야마는 요코하마의 미국 제8군 사령부로 호출되어 사령관 로버트 아이켈버거 중장으로부터 구 일본 제국 육군 제1총군의 복원 완료를 지시받았다. 이는 동일본 점령을 담당한 미 제8군이 약 40개 사단 규모의 제1총군 병력을 조속히 해체하여 점령지의 안정을 꾀하려 했기 때문이다. 스기야마는 아이켈버거가 자신에게 보여준 정중한 태도(사령부 정문으로 부관을 보내 맞이하고, 상석을 권하며, 개인적인 교분을 원한다고 말한 것 등)에 감격했다고 전해진다. 제1총군의 복원은 9월 11일에 완료되었고, 스기야마는 다음 날인 9월 12일 자결했다. 그의 자결 날짜 선택은 총군 복원 임무 완수를 확인하고 책임을 지려 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장례는 제1총군 부대장으로 치러졌으며, 한때 아이켈버거 사령관이 참석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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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3] 서적 The Generals of World War II
[4] 참고문헌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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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서적 破綻-陸軍省軍務局と日米開戦 講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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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간행물 官報 190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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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간행물 官報 1910-10-01
[30] 간행물 官報 1915-11-01
[31] 간행물 官報 1920-12-01
[32] 간행물 官報 1932-06-27
[33] 간행물 官報 1936-09-22
[34] 간행물 官報 1940-02-05
[35] 간행물 官報 {{NDLDC|2959081/23}} 1935-09-03
[36]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43-06-22
[37]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38-05-02
[38] 간행물 叙任及辞令 官報 1942-04-27
[39] 서적 우리의 눈으로 본 일본 제국 흥망사
[40] 서적 히로히토:신화의 뒤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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