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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마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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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노마타성은 나가라강 서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센고쿠 시대 이전부터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1561년 오다 노부나가가 스노마타에 성채를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1566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룻밤 만에 성을 축성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하지만 이 전설은 사료적 근거가 부족하며, 에도 시대에 창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1584년 이케다 쓰네오키의 가신 이키 다다쓰구에 의해 개수되었으며, 1586년 기소강의 범람으로 전략적 중요성을 잃었다. 현재 스노마타 성터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스노마타 일야성 역사자료관이 건립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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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마타성
개요
스노마타성, 사이강 둑
사이강 둑에 위치한 스노마타성
유형일본 성곽
위치일본, 기후현, 오가키시
좌표35°22′1.54″N 136°41′15.76″E
역사
축조 시기1567년
축조자도요토미 히데요시
용도불명
철거 여부철거됨
상태재건축됨
소유 및 관리
소유불명
관리불명
주둔군
주둔군불명
지휘관불명
점령자불명
전투 및 사건
전투불명
사건불명
명칭
일본어 명칭墨俣城 (스노마타조)
별칭墨俣一夜城 (스노마타 이치야조)
구조
구조평성
천수각 구조없음 (복합식 층탑형 3중 4층, RC조 모의 천수각)
(당시에는 높이 3간 반의 2층 고층 망루가 있었음)
건축 관련 정보
건축가불명 (기노시타 히데요시, 나가야스, 고로쿠 등 하치스카 당파)
건축 연도불명 (1561년/1566년 추정)
개축이기 다다쓰구
지배
지배자불명 (기노시타 히데요시 추정)
폐성 연도불명
현재 상태
유적없음
재건축모의 천수각 (자료관)
문화재 지정오가키시 지정 사적

2. 역사

나가라강 서쪽 강변의 스노마타는 지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어서 센고쿠 시대 이전부터 이곳에서 종종 전투가 벌어졌다.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오타 규이치가 기록한 《신장공기》(信長公記)》에는 1561년 노부나가가 미노의 센고쿠 다이묘 사이토 가문의 스노마타(洲俣)를 거점으로 교전했고, 스노마타(洲俣)에 성채를 개축해 노부나가 자신의 진지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 무렵 스노마타(墨俣)에 성채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 후, 1566년 기노시타 히데요시(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스노마타에 성을 하룻밤에 축성하여 재성했다고 한다. 《무공야화》(武功夜話)》에 따르면, 오다 노부나가의 이나바 산성 공략 때, 히데요시는 이 성에서 출진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하지만, 신빙성이 낮다.[4]

오타 규이치의 신장공기 권두 「14조 전투의 일」에는 에이로쿠 4년 5월 상순(1561년 6월 중순경), 스노마타 요새의 수축을 명령하고 14조에서 미노 세력과 전투를 벌여 승리, 스노마타로 귀성한 후 이를 철수한다는 기술이 있다. 스노마타 요새의 수축을 누구에게 담당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스노마타 축성에 관한 그 외의 사료는 다음과 같다.


  • 고세 호안 저, 《호안 태합기》 (간에이 3년(1626년) 성립)에는 에이로쿠 9년(1566년)에 히데요시가 적지인 미노 국내에서 신성의 성주가 되었다는 기술이 있다. 성의 장소나 성 이름은 분명하지 않으며, 또한 스노마타의 지명은 호안이 저작 중에서 여러 번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의 기술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히데요시가 들어간 성은 스노마타와는 다른, 기소강 연안의 어딘가였다고도 읽을 수 있다. 또한, 기술 중에도 윤달이 고려되지 않는 등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 《무공야화》(마에노가 고문서)는 쇼와 34년(1959년)에 발견된 마에노가 고문서 중의 『에이로쿠 스노마타기』, 일부가 『무공야화』 쇼와 62년(1987년) 출판되었다.[5] 에도 시대 초기에 정리되었다고 하는 이 책에는, 스노마타 하룻밤 성 축성의 경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거의 전설로 취급되어 온 하룻밤 성의 실태를 알 수 있는 사료로 여겨지고 있다.[6] 그러나, 위서설도 강하게 제기되어, 자료로서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6] 현재, 스노마타 하룻밤 성의 일화가 사사실로 소개되는 경우, 그 상세는 이 『마에노가 고문서』에 많이 의존하며, 스노마타성터에 있는 스노마타 하룻밤 성 (오가키시 스노마타 역사자료관)도 『마에노가 고문서』에 기초하여 전시를 하고 있다.[6]


스노마타성이 마지막으로 역사에 기록된 것은 1584년 음력 4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를 목전에 두고 미노를 지배하고 있던 이케다 쓰네오키의 가신 이키 다다쓰구가 성을 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2년 후 1586년 음력 6월, 기소 삼천(기소강, 나가라강, 이비강)의 대범란으로 기소강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 후, 스노마타는 전략상으로 중요성을 잃고, 이 지역의 성으로 기능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축성 시기는 불명이다. 나가라강 서안의 스노마타(墨俣) 땅은 교통상·전략상 요지로, 전국 시대 이전부터 종종 합전의 무대가 되었다(스노마타강 전투). 사이토씨 측에서 축조한 성은 사이토 도시나리 등이 성주를 맡았다.

2. 1. 스노마타 하룻밤 성 전설

일반적으로 1566년 오다 노부나가가 미노의 사이토 다쓰오키를 공격하기 위한 거점으로 스노마타에 축성을 시도했지만, 사이토 군의 방해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이에 오다 노부나가는 기노시타 도키치로(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축성을 맡겼고, 히데요시는 하치스카 마사카쓰 등 주변 호족의 협력으로 하룻밤만에 성을 완성했다. 이때 성의 축성 방법은 강 상류에서 성의 구성 부재를 미리 제작해 현지에서 조립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이 공으로 히데요시는 스노마타 성주로 임명되었고, 이후 출세 가도를 달렸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 스노마타 하룻밤 성 이야기는 사료에 근거가 빈약하다.

오제 호안의 《포암태합기》에는 “1566년 히데요시는 적지 미노 국내의 새로운 성의 성주로 되었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 성의 위치는 명확하지 않다. 호안이 스노마타 지명을 여러 번 쓰고 있지만, 새로운 성에 대해서는 기술하지 않아, 새로운 성이 스노마타가 아닐 가능성도 있다.

히데요시가 스노마타에 하룻밤만에 성을 축성했다는 기록은 에도 시대 후기에 쓰여진 소설 《회본태합기》에 명확히 남아있다. 《회본태합기》에는 “1561년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명으로 스노마타에 성을 하룻밤에 축성하여 그 성주가 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지만, 이는 이전 서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다.

따라서, 스노마타성 전설은 에도 시대 후반에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신장공기》의 “1561년 스노마타성 축성”과 《포암태합기》의 “새로운 성의 성주 취임”을 혼용하여 《회본태합기》에서 각색한 것일 수 있다.

메이지 시대의 역사가 와타나베 요스케는 소설 《회본태합기》의 이야기를 보다 신빙성 있는 《포암태합기》의 연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처럼 스노마타 하룻밤 성 이야기에는 축성 경위 및 연대에 신뢰를 두기 어려운 점이 많다. 때문에 현재 많은 역사가들은 통설을 부정하고, 스노마타 하룻밤 성 축성 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창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케우치 카쿠사이 저, 오카다 교쿠잔 삽화의 요미혼인 『에혼 태합기』에서는 에이로쿠 5년(1562년) 6월 중순에 스노마타 요새성이 세워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노부나가의 명령으로 사쿠마 노부모리, 시바타 가쓰이에가 수축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히데요시가 7일 안에 완성하겠다고 말한 뒤, 미노 세력을 복병 기습으로 격퇴하면서 요새 성을 완성했다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의 『신사 태합기』에서는 스노마타 축성에 관해, 미노 공격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군에게는 전장이 멀기 때문에 전진 기지로서 스노마타에 축성할 필요가 있다는 기노시타 도키치로의 진언으로 노부나가가 축성을 맡겼고, 도키치로는 3일 만에 거의 완성시켰다고 묘사하고 있다.

2. 2. 전설에 대한 비판적 시각

일반적으로 알려진 스노마타 일야성 이야기에 따르면, 1566년, 오다 노부나가는 미노의 사이토 다쓰오키를 공략하기 위한 거점으로 스노마타에 축성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사이토 군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이에 축성을 기노시타 도키치로(후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맡겼고, 히데요시는 하치스카 마사카쓰 및 주변 호족의 협력으로 하룻밤만에 성을 완성했다고 한다. 성의 축성방법은 먼저, 강 상류에서 성의 구성 부재를 흘려보내 현지에서 조립하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이 공적으로 히데요시는 스노마타 성주로 임명되었고, 그 후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러나, 이 스노마타 일야성의 통설은 사료에 토대를 둔 근거가 빈약하다.

오제 호안의 《포암태합기》(甫庵太閤記)》에는 “1566년 히데요시는 적지 미노 국내의 새로운 성의 성주로 되었다”라는 기록만 있을 뿐, 성의 장소는 명확하지 않다. 호안이 스노마타 지명을 몇 번이고 쓰고 있지만, 정작 새로운 성이란 부분에는 기술하지 않은 점을 들어 새로운 성은 스노마타가 아니라 별개의 성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기술중 몇 곳에서 문제점이 존재해, 이 같은 이야기조차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히데요시가 스노마타에 하룻밤만에 축성했다는 기록이 명확히 남아 있는 것은 에도 시대 후기에 써여진 소설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로, “1561년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명으로 스노마타에 성을 하룻밤에 축성하여 그 성주가 되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이전에 전혀 볼 수 없었던 일화로 《포암태합기》를 포함해 《회본태합기》 이전에 써여진 서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다.

따라서, 스노마타성의 전설이 탄생한 것은 에도 시대 후반일 가능성이 있다. 스노마타 일야성 축성의 전설은 별개의 두 사실인 《신장공기》의 “1561년 스노마타성 축성”과 《포암태합기》의 “새로운 성의 성주 취임”을 혼용해 또는 혼동하여 《회본태합기》에서 각색한 것일 수 있다.

“1566년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명으로 스노마타에 성을 하룻밤에 축성하여 그 성주가 되었다.”라는 통설은 메이지 시대의 역사가 와타나베 요스케에 의해, 소설 《회본태합기》의 이야기가 보다 신빙성 있는 《포암태합기》의 연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고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스노마타 일야성의 일화에는 축성의 경위 및 년대에 신뢰를 두지 않는 점이 많다. 이 때문에 현재 많은 역사가들은 통설을 부정하고, 스노마타 일야성 축성이야기는 에도 시대의 창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다케우치 카쿠사이 저, 법교(法橋) 오카다 교쿠잔 삽화의 요미혼인 『에혼 태합기』에서는 에이로쿠 5년(1562년) 6월 중순에 스노마타 요새성이 세워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시바 료타로의 『신사 태합기』에서는 스노마타 축성에 관해, 미노 공격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군에게는 전장이 멀기 때문에 전진 기지로서 스노마타에 축성할 필요가 있다는 기노시타 도키치로의 진언으로 노부나가가 축성을 맡긴 결과, 도키치로는 3일 만에 거의 완성시켰다고 묘사하고 있다.

2. 3. 마에노 가문 고문서

1959년 《영록묵오기》(永禄墨俣記)를 포함 《전야가고문서》(前野家古文書)가 발견되었고, 그 일부를 1987년 간행된 《무공야화(武功夜話)》에서 기술하고 있다.

에도 시대 초기까지를 정리한 동사료는 스노마타 일야성 축성의 경위를 극명히 기록하고 있고, 대부분 전설로 언급되어 온 일야성의 실태를 알리는 사료로 주목받고 있다. 현재, 스노마타 일야성의 일화를 사실로 소개한 경우는 《전야가고문서》를 근거로 한 것이다. 현재 스노마타성터에 스노마타 일야성 역사자료관도 《전야가고문서》를 기초로 전시하고 있다.

단, 동서과 그 밖의 무공야화 수록문서에 있는 스노마타 일야성에 관한 기술에는 스노마타의 “조아토”(城あと)란 지명이 엇갈리는 등의 근본적 의문과 에도 시대 초기의 기술부분에서의 의문점도 비판의 대상이다.

또, 이 일화를 사실로 본다면, 건축사에 있어서 프리패브 공법, 프리컷 공법의 시초로 볼 수 있다.

2. 4. 스노마타 성의 최후

덴쇼 12년(1584년) 4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를 앞두고 당시 미노를 지배했던 이케다 쓰네오키의 가신 이키 다다쓰구가 스노마타 성을 개수했다고 한다. 그 2년 후인 덴쇼 14년(1586년) 6월, 기소 삼천의 큰 범람으로 기소강의 유로가 현재의 위치로 바뀌면서 스노마타는 전략상의 중요성을 잃었고, 이후 이 땅이 성으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전국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친 사료는 다음과 같다.

  • 오타 규이치 저, 『노부나가 공기』 권두 「14조 전투의 일」에는 에이로쿠 4년 5월 상순(1561년 6월 중순경), 스노마타 요새의 수축을 명령하고 14조에서 미노 세력과 전투를 벌여 승리, 스노마타로 귀성한 후 이를 철수한다는 기술이 있다. 스노마타 요새의 수축을 누구에게 담당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스노마타 축성에 관한 그 외의 사료는 다음과 같다.

  • 고세 호안 저, 『호안 태합기』 (간에이 3년(1626년) 성립)에는 에이로쿠 9년(1566년)에 히데요시가 적지인 미노 국내에서 신성의 성주가 되었다는 기술이 있다. 성의 장소나 성 이름은 분명하지 않으며, 또한 스노마타의 지명은 호안이 저작 중에서 여러 번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의 기술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히데요시가 들어간 성은 스노마타와는 다른, 기소강 연안의 어딘가였다고도 읽을 수 있다. 또한, 기술 중에도 윤달이 고려되지 않는 등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 『무공야화』(마에노가 고문서)는 쇼와 34년(1959년)에 발견된 마에노가 고문서 중의 『에이로쿠 스노마타기』, 일부가 『무공야화』 쇼와 62년(1987년) 출판되었다.[5] 에도 시대 초기에 정리되었다고 하는 이 책에는, 스노마타 하룻밤 성 축성의 경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거의 전설로 취급되어 온 하룻밤 성의 실태를 알 수 있는 사료로 여겨지고 있다.[6] 그러나, 위서설도 강하게 제기되어, 자료로서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6] 현재, 스노마타 하룻밤 성의 일화가 사사실로 소개되는 경우, 그 상세는 이 『마에노가 고문서』에 많이 의존하며, 스노마타성터에 있는 스노마타 하룻밤 성 (오가키시 스노마타 역사자료관)도 『마에노가 고문서』에 기초하여 전시를 하고 있다.[6]

3. 소재지 및 현재

스노마타 주변은 기소 3강(木曽三川)의 홍수로 인해 강의 흐름이 자주 바뀌고 강변 토지가 침식되어 성이 있던 정확한 장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스노마타를 그린 옛 지도에는 마을 북쪽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대지에 '조아토(城あと: 성터)'라는 지명이 기록되어 있어, 이 대지에 스노마타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스노마타 성터는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3층 천수를 본뜬 스노마타 일야성 역사자료관이 건립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성에는 천수가 없었다. 현재 스노마타성 터 북서쪽은 하룻밤 성터로서 공원으로 정비되어 있다. 공원 안에는 오가키성의 천수를 본뜬 오가키시 스노마타 역사자료관 (스노마타 하룻밤 성)이 세워져 있지만, 오가키 성 천수는 에도 시대에 정비된 것이므로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 실제 스노마타성은 간이 건축물과 울타리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원 안에 있는 시라히게 신사(라는 설이 있다) 경내 신사에는 모의 천수각이 축조될 때 분사된 호코쿠 신사가 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모셔져 있다.

4. 관련 사료

덴쇼 12년(1584년) 4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를 앞두고 당시 미노를 지배했던 이케다 쓰네오키의 가신 이키 다다쓰구가 스노마타성을 개수했다고 한다. 그 2년 후인 덴쇼 14년(1586년) 6월, 기소 삼천의 큰 범람으로 기소강의 유로가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으면서 스노마타는 전략상의 중요성을 잃었고, 이후 이 땅이 성으로 사용되는 일은 없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전국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친 사료는 다음과 같다.


  • 오타 규이치 저, 『노부나가 공기』
  • * 권두 「14조 전투의 일」에, 에이로쿠 4년 5월 상순(1561년 6월 중순경), 스노마타 요새의 수축을 명령하고 14조에서 미노 세력과 전투를 벌여 승리, 스노마타로 귀성한 후 이를 철수한다는 기술이 있다. 스노마타 요새의 수축을 누구에게 담당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스노마타 축성에 관한 사료는 다음과 같다.

  • 고세 호안 저, 『호안 태합기』
  • * 간에이 3년(1626년) 성립. 에이로쿠 9년(1566년)에 히데요시는 적지인 미노 국내에서 신성의 성주가 되었다는 기술이 있다. 성의 장소나 성 이름은 분명하지 않으며, 또한 스노마타의 지명은 호안이 저작 중에서 여러 번 사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의 기술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 히데요시가 들어간 성은 스노마타와는 다른, 기소강 연안의 어딘가였다고도 읽을 수 있다. 또한, 기술 중에도 윤달이 고려되지 않는 등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 『무공야화』(마에노가 고문서)
  • * 쇼와 34년(1959년)에 발견된 마에노가 고문서 중의 『에이로쿠 스노마타기』, 일부가 『무공야화』 쇼와 62년(1987년) 출판.[5] 에도 시대 초기에 정리되었다고 하는 이 책에는, 스노마타 하룻밤 성 축성의 경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거의 전설로 취급되어 온 하룻밤 성의 실태를 알 수 있는 사료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위서설도 강하게 제기되어, 자료로서의 신뢰성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6] 현재, 스노마타 하룻밤 성의 일화가 사사실로 소개되는 경우, 그 상세는 이 『마에노가 고문서』에 많이 의존하며, 스노마타성터에 있는 스노마타 하룻밤 성 (오가키시 스노마타 역사자료관)도 『마에노가 고문서』에 기초하여 전시를 하고 있다.

5. 관광


  • JR 도카이 기후하시마역에서 차로 15분 소요된다.
  • 기후 버스 스노마타 버스 정류장에서 도보로 10분 소요된다.

참조

[1] 서적 A History of Japan, 1334–1615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Sunomata Ichiya Castle http://www.city.ogak[...] Ōgaki City 2010-11-08
[3] 웹사이트 指定文化財一覧表 http://www.city.ogak[...] 大垣市 2013-03-21
[4] 문서 当時の地名は'''洲股'''、いくつかある支流の合流地の意。後に'''墨俣'''と当て字がされた。
[5] 문서 『永禄州俣記』以外にも『州俣覚』など別史料も存在する。
[6] 문서 詳細は[[武功夜話#史料的価値に対する論争]]を参照のこと。
[7] 서적 司馬遼太郎と城を歩く 光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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