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 히데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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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토 히데오는 일본의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농상무성에서 요직을 거쳐 기획원 제4부장, 상공성 물가국장 등을 역임했다. 1946년 제1차 요시다 내각에서 내각부서기관장으로 발탁되어 정계에 입문, 제2차, 제3차 요시다 내각에서 농림상, 건설상, 경제심의청 장관을 지냈다. 자유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60년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이후 자치상, 제2차 이케다 내각에서 농림상을 역임했다. 1969년 총선 불출마를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했으며, 1973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 1981년 사망 후 정3위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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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 히데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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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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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명 | 周東 英雄 |
로마자 표기 | Suto Hideo |
출생지 | 일본 제국 야마구치현 오쓰군 미스미촌 |
출신교 |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독법과 |
소속 정당 | 일본자유당→민주자유당→자유당→자유민주당 |
칭호 및 훈장 | 서・정3위 |
세습 여부 | 무 |
정치 경력 | |
농림대신 | 제10·29대 |
내각 | 제2차 요시다 내각, 제2차 이케다 내각 |
임기 시작 | 1948년10월 19일 - 1949년2월 16일, 1960년12월 8일 - 1961년7월 18일 |
자치대신 | 제3대 |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 | 제12대 |
내각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장) | 제1차 이케다 내각 |
임기 시작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장) | 1960년 10월 13일 |
임기 종료 (자치대신, 국가공안위원장) | 1960년 12월 8일 |
경제심의청 장관 | 초대 |
내각 (경제심의청 장관) | 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 (경제심의청 장관) | 1952년8월 1일 |
임기 종료 (경제심의청 장관) | 1952년 9월 2일 |
건설대신 | 제5대 |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제2대 |
내각 (건설대신,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제3차 요시다 제1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 (건설대신,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1951년6월 7일 |
임기 종료 (건설대신, 홋카이도 개발청 장관) | 1951년 7월 4일 |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 제8대 |
물가청 장관 | 제8대 |
중앙경제조사청 장관 | 제4대 |
내각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물가청 장관, 중앙경제조사청 장관) | 제3차 요시다 제1차 개조 내각, 제3차 요시다 제2차 개조 내각, 제3차 요시다 제3차 개조 내각 |
임기 시작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물가청 장관, 중앙경제조사청 장관) | 1950년6월 28일 |
임기 종료 (경제안정본부 총무장관, 물가청 장관, 중앙경제조사청 장관) | 1952년 7월 31일 |
배상청 장관 | 제7대 |
임기 시작 (배상청 장관) | 1951년 6월 7일 |
임기 종료 (배상청 장관) | 1951년12월 27일 |
임기 시작 (중의원 의원) | 1947년4월 26일 |
임기 종료 (중의원 의원) | 1969년12월 2일 |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제12대 |
(총재) | 이케다 하야토 |
임기 시작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1964년 |
임기 종료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1965년 |
2. 생애
스토 히데오는 1898년 1월 27일 야마구치현 오쓰군 미스미촌(현 나가토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교토부로 이주하여 교토 제일 중학교(현 교토부립 라쿠호쿠 고등학교·부속 중학교)와 제삼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에는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독법과를 졸업했다.[2]
대학 졸업 후 농상무성에 들어가 관료 생활을 시작했으며, 미곡국장, 농무국장, 총무국장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6년 제1차 요시다 내각에서 내각부서기관장으로 발탁되며 정계와 인연을 맺었고, 1947년 총선거에서 처음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2]
이후 요시다 내각에서 농림대신, 국무대신(경제 안정 본부 총무장관, 배상청 장관), 경제심의청 장관 등을 역임하며 요시다 시게루의 신임을 받았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참여했으며, 이케다 내각에서도 자치대신과 농림대신을 지냈고,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1969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정계를 은퇴했고, 1973년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1981년 8월 8일 향년 83세로 사망했으며, 사후 정3위에 추서되었다.
2. 1. 관료 경력
1921년,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독법과를 졸업한 후 농상무성에 들어가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농상무성에서는 후에 농림대신을 지낸 이노 세키야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며, 농림성 미곡국장, 농무국장, 총무국장 등 주요 직책을 역임했다.전시에는 기획원 제4부장과 상공성 물가국장을 지냈으며, 1942년에는 제국 유량 통제 회사의 초대 사장이 되었다.
전후인 1946년, 제1차 요시다 내각이 출범하자 내각 부서기관장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서기관장이었던 하야시 조지를 능가하는 능력을 보여주며 요시다 시게루 총리의 신임을 얻었다.[2]
2. 2. 정치 경력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6년, 제1차 요시다 내각이 출범하자 내각부서기관장으로 발탁되었다. 당시 서기관장이었던 하야시 조지보다 더 유능한 모습을 보여 요시다 시게루의 총애를 받았다. 1947년, 아베 간의 사망 후 후계자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공직 추방된 기무라 요시오를 대신하여 총선에 자유당 소속으로 구 야마구치 1구에서 입후보하여 처음 당선되었다.[2] 이후 중의원 의원으로 총 9회 당선되었다.요시다 정권 하에서 중용되어 1948년 제2차 요시다 내각에서 농림대신으로 처음 입각했다. 1950년 제3차 요시다 내각 제1차 개조 내각에서는 국무대신(경제 안정 본부 총무장관, 배상청 장관)을 지냈으며, 이후 제3차 요시다 내각 (제3차 개조)에서는 경제심의청 장관을 역임했다.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이에 참여하였고, 당내 파벌인 고치카이에 소속되었다. 1960년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야마자키 이와오가 사임하자, 그의 후임으로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어서 출범한 제2차 이케다 내각에서는 다시 농림대신으로 임명되어 두 번째 임기를 수행했다. 1964년부터 1965년까지는 자민당 정무조사회장을 지냈다.
1969년 총선에 불출마 선언을 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그의 지역구 기반은 하야시 요시로가 계승했다. 1973년에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1981년 8월 8일 향년 83세로 사망했으며, 사후 정3위에 추서되었다.
2. 3. 정계 은퇴와 말년
1969년 총선에 불출마하면서 정계를 은퇴했다. 그의 지지 기반은 하야시 요시로가 물려받았다. 1973년에는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1981년 8월 8일에 향년 83세로 사망했으며, 사후 정3위에 추서되었다.
3. 역대 선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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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 선거 종류 | 회차 | 직책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득표율 | 순위 | 당락 | 선거 제도 |
---|---|---|---|---|---|---|---|---|---|---|
1947년 | 총선 | 23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당 | 30,328표 | 12.4%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49년 | 총선 | 24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민주자유당 | 53,973표 | 17.7% | 2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2년 | 총선 | 25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당 | 53,743표 | 15.5%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3년 | 총선 | 26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당 | 49,902표 | 14.7% | 5위 | 낙선 | 중선거구제 |
1955년 | 총선 | 27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당 | 90,896표 | 26% | 1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58년 | 총선 | 28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0,239표 | 18.5%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0년 | 총선 | 29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9,756표 | 19.3%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3년 | 총선 | 30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71,811표 | 19.7%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1967년 | 총선 | 31회 | 중의원 의원 | 야마구치현 제1구 | 자유민주당 | 65,864표 | 17.5% | 3위 | 당선 | 중선거구제 |
4. 평가
스토 히데오는 전후 일본의 혼란기 속에서 요시다 시게루에게 발탁되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제1차 요시다 내각에서 내각 부서기관장으로 활동하며 요시다의 신임을 얻었고[2], 이후 제2차 요시다 내각에서는 농림대신, 제3차 요시다 내각 제1차 개조 내각에서는 국무대신으로 경제 안정 본부 총무장관과 배상청 장관을 겸임하며 전후 일본의 경제 회복과 농업 정책 분야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다.[2] 이러한 경력은 그가 요시다 정권 하에서 중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보수 합동 이후에는 자유민주당 내 파벌인 고치카이에 소속되어 활동했으며, 아사누마 이네지로 암살 사건 이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자치대신을 맡기도 했다. 또한, 제2차 이케다 내각에서 다시 농림대신으로 임명되었고, 자민당 정조회장과 같은 당내 요직을 역임하며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비록 특정 파벌의 영수는 아니었지만, 오랜 의정 활동과 각료 경험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정치 활동을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참조
[1]
간행물
官報 第7494号、1951年(昭和26年)12月29日、p.663、叙任及び辞令
1951-12-29
[2]
간행물
AERA NO.37「安倍家三代 世襲の果て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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