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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 가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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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오키 가즈시게는 1551년 미노국에서 태어난 무장으로, 아오키 시게나오의 장남이다. 이마가와 우지자네, 도쿠가와 이에야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을 섬기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1588년 종5위하 민부쇼에 서임되었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 참여했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는 참전하지 않았으며, 이후 은거하여 162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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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오키 가즈시게
기본 정보
씨명아오키 가
씨족아오키 씨
이름아오키 가즈시게
시대센고쿠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덴분 20년 (1551년)
사망간에이 5년 8월 9일 (1628년 9월 6일)
개명가즈시게
이명시게미치
법호: 종좌
통칭주조
쇼노에몬 (위)
민부 쇼후
시호해당 없음
계명바이린인덴케야레이돈코지
묘소도쿄도시부야구의 쇼운지
오사카부이케다시의 부쓰니치지
관위종5위하민부 쇼후
막부에도 막부
주군이마가와 우지자네
도쿠가와 이에야스
니와 나가히데
도요토미 히데요시 (히데요리)
도쿠가와 이에야스
히데타다
셋쓰아사다 번 번주
부모아오키 시게나오
형제자매가즈시게
여자 (고데라 노리요리 실)
시게쓰네 (아쓰미 시게쓰네)
나오쓰구
가나오
배우자정보 없음
자녀마사시게
시게카네
정치 경력
아사다 번 번주 (아오키 가)대수: 1
임기: 1614년 ~ 1619년
전임신설
후임아오키 시게카네
이미지
아오키 가즈시게 상
아오키 가즈시게 상 (부쓰니치지 소장)

2. 약력

덴분 20년(1551년), 아오키 시게나오의 장남으로 미노국에서 태어났다. 아오키 씨는 미노의 호족으로, 도키 씨, 사이토 씨를 섬겼지만, 경위는 불분명하지만, 가즈시게는 아버지 시게나오를 떠나, 처음에는 스루가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섬겼다.

니이사카 전투에서 적과 창을 맞대고 싸워 목을 베어, 포상으로 황금을 받았다. 에이로쿠 11년(1568년)의 이마가와 씨 멸망 때의 스루가 침공에서, 다케다·도쿠가와 군과의 교전에서 부상을 입고, 토토미국 가케가와에 칩거했다.

겐키 원년(157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소환되어 섬기게 되었고, 6월의 아네가와 전투에서는, 아사쿠라 가의 무장이었던 마가라 나오타카의 아들 다카모토(주로)를 쳐서 무공을 세워 명성을 떨쳤고(「아오키 가네모토」 항목 참조), 포상으로 와키자시를 하사받았다.

겐키 3년(1573년)의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혼다 타로자에몬과 함께 증원으로 파견된 다카텐진성에서 수비를 맡았다. 미카타가하라에서는 동생 아쓰미 시게쓰구가 다케다 세력을 막기 위해 싸우다 전사했다. 같은 해, 도쿠가와 가를 떠나, 아버지 시게나오가 섬겼던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인 니와 나가히데에게 임관했다.[5]

니와 가의 가신으로, 덴쇼 10년(1582년)의 야마자키 전투, 덴쇼 11년(1583년)의 시즈가타케 전투 등에 참가했지만, 덴쇼 13년(1585년)에 나가히데가 사망하자,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겨, 쓰카이반이 되었고, 후에 기모로슈에 선발되었다. 같은 해, 셋쓰국도요시마군 내에 지행을 받았고, 빈고국·이요국 내 등에서 가증되어, 아울러 1만 석을 영유하여, 아사다성주가 되었다.

덴쇼 15년(1587년)의 규슈 전역에 종군했다.

덴쇼 16년(1588년)의 고요제이 천황의 주라쿠다이 행차에 즈음하여, 종5위하민부쇼에 서임되어, 나나테구미[6]의 조두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게이초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 역 때에는, 나나테구미의 조두로서 오사카성의 한쪽을 수비했다. 전후에도 계속 오사카성에 출사했다.

게이초 19년(1614년)의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도, 나나테구미 조두로서 오사카성의 한쪽을 수비했다. 12월, 강화 교섭이 시작되어, 같은 달 20일에 성립. 이듬해 게이초 20년(1615년) 3월 15일에 도요토미 히데요리요도도노로부터 화의의 사례 사절로서 가즈시게·조코인·니이노쓰보네·다이죠키노쓰보네·쇼에이니가 슨푸의 이에야스의 허가로 파견되었지만,[7] 이에야스는 (이미 다음 싸움을 준비하고) 나고야성으로 향하겠다며 답변을 미루고, 4월 10일에 나고야에서 알현하지만, "오사카는 아직 낭사를 내보내지 않았다"며 낭인을 대량으로 체류시키고 있는 것을 문제 삼아 책망하고, 조코인과 니이노쓰보네에게 편지를 가지고 먼저 오사카로 돌려보냈다. 이에야스가 교토에서 답장을 하겠다고 해서, 가즈시게와 다이죠키노쓰보네와 쇼에이니는 상경하여 기다렸지만, 24일, 여인들을 모두 돌려보낸 후에도 가즈시게만은 머물게 했다.[8] 가즈시게는 그 자리에서 교토 쇼시다이이타쿠라 가쓰시게에게, "만약 오사카로 돌아간다면 (이에야스에게 측근으로 있던) 동생 요시나오[4]를 주살하겠다"라고 경고를 받았기 때문에, 오사카로 돌아가지 않았다. 불과 2일 후인 26일에는 야마토 고리야마성에서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렇게 해서 오사카 여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오사카성의 함락을 듣자 가즈시게는 "어쩔 수 없다"며 실망하여 삭발하고, 소사라고 칭하며 은거했다.

그 후, 니조성에 소환되어, 이에야스를 다시 섬기게 되었지만, 감봉은 없었고, 아버지의 유령(약 2,000석)을 잇고, 셋쓰도요시마군, 토하라군, 빈고국고게쓰군, 아사쿠치군, 오다군의 5군, 및 이요국에서의 소령, 아울러 1만 2,000석이 되었다. 후에 요시나오에게 2000석을 분여하여, 1만 석이 되었다. 요시나오는 그 전의 소령을 합쳐 5천 석의 기하타가 되었다.

겐나 5년(1619년)에 치사하여 은거했다. 막부로의 배려에서인지, 여름 전투에서 가즈시게의 대리로 지휘를 맡았던 양자 마사시게[9]는 병을 이유로 폐적하고,[10] 대신 요시나오의 아들인 시게카네를 새롭게 양자로 맞이하여, 뒤를 잇게 했다. 요시나오의 집은 차남 나오즈미가 상속했다.

간에이 5년(1628년), 사망. 향년 78세.

2. 1. 출생과 초기 이력

아오키 가즈시게는 덴분 20년(1551년) 아오키 시게나오의 장남으로 미노국에서 태어났다. 아오키 씨는 미노의 호족으로, 도키 씨, 사이토 씨를 섬겼으나, 가즈시게는 아버지를 떠나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섬겼다.

니이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황금을 받았고, 에이로쿠 11년(1568년) 이마가와 씨 멸망 때 부상을 입고 토토미국 가케가와에 칩거했다. 겐키 원년(157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소환되어 아네가와 전투에서 마가라 나오타카의 아들 다카모토를 쳐서 명성을 떨쳤다.

겐키 3년(157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혼다 타로자에몬과 함께 다카텐진성을 수비했고, 같은 해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에게 임관했다.

2. 2. 이마가와 가문 몰락과 도쿠가와 가문 섬김

아오키 가즈시게는 덴분 20년(1551년)에 아오키 시게나오의 장남으로 미노국에서 태어났다. 아오키 씨는 미노의 호족으로, 도키 씨, 사이토 씨를 섬겼으나, 가즈시게는 아버지를 떠나 스루가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섬겼다.

니이사카 전투에서 적과 창을 맞대고 싸워 공을 세워 황금을 받았으며, 에이로쿠 11년(1568년) 이마가와 씨 멸망 당시 스루가 침공에서 부상을 입고 토토미국 가케가와에 칩거했다.

겐키 원년(157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소환되어 섬기게 되었고, 아네가와 전투에서 아사쿠라 가의 무장 마가라 나오타카의 아들 다카모토를 쳐서 명성을 떨쳤다. 겐키 3년(157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혼다 타로자에몬과 함께 다카텐진성을 수비했다. 같은 해,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에게 임관했다.

니와 가의 가신으로,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등에 참가했지만, 덴쇼 13년(1585년) 나가히데가 사망하자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겨 쓰카이반이 되었고, 후에 기모로슈에 선발되었다. 같은 해, 셋쓰국도요시마군 내에 지행을 받았고, 빈고국·이요국 등에서 가증되어, 아울러 1만 석을 영유하여 아사다성주가 되었다.

덴쇼 15년(1587년) 규슈 전역에 종군했다. 덴쇼 16년(1588년) 고요제이 천황주라쿠다이 행차에 즈음하여 종5위하민부쇼에 서임되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역 때에는 오사카성의 한쪽을 수비했으며, 전후에도 계속 오사카성에 출사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도 오사카성을 수비했다.

오사카 여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으며, 오사카성 함락 후 삭발하고 은거했다. 이후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게 되었고, 겐나 5년(1619년)에 은거했다. 간에이 5년(1628년) 사망했다.

2. 3. 오다 가문, 도요토미 가문 섬김

아오키 가즈시게는 덴분 20년(1551년)에 아오키 시게나오의 장남으로 미노국에서 태어났다. 아오키 씨는 미노의 호족으로, 도키 씨, 사이토 씨를 섬겼지만, 가즈시게는 아버지를 떠나 처음에는 스루가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섬겼다. 니이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워 황금을 받았고, 에이로쿠 11년(1568년) 이마가와 씨 멸망 때 부상을 입고 토토미국 가케가와에 칩거했다.

겐키 원년(157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소환되어 섬기게 되었고, 아네가와 전투에서 마가라 나오타카의 아들 다카모토를 쳐서 와키자시를 하사받았다. 겐키 3년(157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혼다 타로자에몬과 함께 다카텐진성을 수비했고, 같은 해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에게 임관했다.[5]

니와 가의 가신으로 야마자키 전투, 시즈가타케 전투 등에 참가했지만, 덴쇼 13년(1585년) 나가히데가 사망하자 하시바 히데요시를 섬겨 쓰카이반이 되었고, 후에 기모로슈에 선발되었다. 같은 해 셋쓰국도요시마군 내에 지행을 받았고, 빈고국·이요국 등에서 가증되어 1만 석을 영유하여 아사다성주(아사다 진야)가 되었다. 덴쇼 15년(1587년) 규슈 전역에 종군했다.

덴쇼 16년(1588년) 고요제이 천황의 주라쿠다이 행차 때 종5위하민부쇼에 서임되었고, 나나테구미[6] 조두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역 때에는 오사카성을 수비했고, 전후에도 계속 오사카성에 출사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나나테구미 조두로서 오사카성을 수비했다. 강화 교섭 후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사절로 슨푸의 이에야스에게 파견되었지만,[7] 나고야성에서 "오사카는 아직 낭사를 내보내지 않았다"는 책망을 듣고, 교토에서 답장을 기다렸지만, 교토 쇼시다이이타쿠라 가쓰시게에게 경고를 받고 오사카로 돌아가지 않았다.[8] 오사카 여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오사카성 함락 후 삭발하고 은거했으나, 니조성에 소환되어 다시 이에야스를 섬기게 되었고, 1만 2,000석을 영유했다. 후에 요시나오에게 2,000석을 분여하여 1만 석이 되었다. 겐나 5년(1619년)에 은거했다. 간에이 5년(1628년) 사망했다.

2. 4. 규슈 평정 및 관직 서임

아오키 가즈시게는 1587년 규슈 평정에 종군했다. 1588년 고요제이 천황주라쿠다이 행차 때 종5위하 민부쇼에 서임되었고, 나나테구미 조두(組頭) 중 한 명으로 임명되었다.

2. 5.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

아오키 가즈시게는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나나테구미의 조두로서 오사카성의 한쪽을 수비했다. 전후에도 계속 오사카성에 출사했다.

게이초 19년(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도 나나테구미 조두로서 오사카성을 수비했다. 강화 교섭이 시작된 후, 1615년 3월 15일 도요토미 히데요리요도도노의 사절로 슨푸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파견되었으나, 이에야스는 나고야성으로 향하며 답변을 미뤘다. 4월 10일 나고야에서 이에야스를 알현했지만, "오사카는 아직 낭사를 내보내지 않았다"는 책망을 듣고 조코인과 니이노쓰보네는 오사카로 돌려보내졌다. 가즈시게는 교토에서 이에야스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24일 이에야스는 가즈시게만 남겼다. 교토 쇼시다이이타쿠라 가쓰시게는 가즈시게에게 "만약 오사카로 돌아간다면 (이에야스 측근인) 동생 요시나오를 주살하겠다"고 경고했고, 가즈시게는 오사카로 돌아가지 않았다. 불과 2일 후인 26일 야마토 고리야마성에서 전투가 시작되어, 오사카 여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오사카성 함락 후 가즈시게는 삭발하고 소사라고 칭하며 은거했다. 그 후, 니조성에서 이에야스를 다시 섬기게 되었고, 감봉 없이 아버지의 유령(약 2,000석)을 잇고 셋쓰도요시마군, 토하라군, 빈고국고게쓰군, 아사쿠치군, 오다군의 5군, 및 이요국에서의 소령을 합쳐 1만 2,000석을 받았다. 후에 요시나오에게 2,000석을 분여하여 1만 석이 되었다.

2. 6. 도쿠가와 가문 재仕官(시간) 및 사망

아오키 가즈시게는 1551년 아오키 시게나오의 장남으로 미노국에서 태어났다. 아오키 씨는 미노의 호족으로, 도키 씨, 사이토 씨를 섬겼으나, 가즈시게는 아버지를 떠나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섬겼다. 1568년 이마가와 씨 멸망 당시 부상을 입고 도토미국 가케가와에 칩거했다.

1570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소환되어 섬기게 되었고, 아네가와 전투에서 마가라 다카모토를 쳐서 무공을 세우고 와키자시를 하사받았다. 1573년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다카텐진성을 수비했고, 같은 해 오다 노부나가의 중신 니와 나가히데에게 임관했다.[5]

1585년 나가히데 사망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섬겨 쓰카이반이 되었고, 셋쓰국 도요시마군 등에서 1만 석을 영유하여 아사다성주가 되었다. 1587년 규슈 평정에 종군했다. 1588년 고요제이 천황주라쿠다이 행차 때 종5위하 민부쇼에 서임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오사카성을 수비했고, 전후에도 계속 오사카성에 출사했다.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도 오사카성을 수비했고, 1615년 강화 사절로 슨푸의 이에야스에게 파견되었으나, 이에야스는 오사카 측의 낭인 문제를 책망하며 가즈시게를 교토에 머물게 했다.[7][8] 교토 쇼시다이이타쿠라 가쓰시게에게 경고를 받은 가즈시게는 오사카로 돌아가지 않았고, 오사카 여름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오사카성 함락 후 삭발하고 은거했으나, 다시 이에야스를 섬기게 되었고, 셋쓰국 도요시마군 등 1만 2,000석을 받았다. 후에 동생 요시나오에게 2,000석을 분여하여 1만 석이 되었다.

1619년 은거했고, 양자 시게카네에게 뒤를 잇게 했다. 1628년 사망했다.

3. 가계

아오키 시게나오를 아버지로 두었다. 코데라 노리요리의 아들 아오키 마사시게를 양자로 들였다. 아오키 요시나오의 장남 아오키 시게카네 또한 양자로 들였다.

참조

[1] 문서 小寺宮内右衛門
[2] 문서 徳川家康の家臣
[3] 문서 羽柴秀吉の家臣
[4] 문서 次郎右衛門
[5] 문서 小牧・長久手の戦い
[6] 문서 速水守久、伊東長実
[7] 서적 大日本史料12編17冊
[8] 서적 大日本史料12編18冊
[9] 문서 小寺則頼
[10] 문서 正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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