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글인의 교회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앵글인의 교회사》는 베다 베네라빌리스가 731년경에 완성한 잉글랜드 교회의 역사에 대한 라틴어 저작이다. 잉글랜드 기독교의 초기 역사, 앵글로색슨족의 개종, 켈트 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갈등, 앵글로색슨족의 기독교화 과정,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교회의 발전, 플랜태저넷 왕조 시대의 교회와 왕권의 대립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잉글랜드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중세 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히고 연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잉글랜드 문학 - 롤랑의 노래
《롤랑의 노래》는 작자 미상의 프랑스 무훈시로, 롱스보 전투를 배경으로 롤랑과 프랑크 군대의 용맹함, 가넬론의 배신을 다루며, 기독교적 가치관과 기사도 정신을 반영한 중세 프랑스 문학의 대표작이다. - 잉글랜드 문학 - 브리튼 이야기
브리튼 이야기는 5세기 초 아서 왕을 중심으로 영국의 전설적인 역사를 다루며, 제프리 오브 몬마스의 기록 이후 다양한 문학 작품과 여러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 8세기 문서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황에게 로마와 서방 제국을 넘긴다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위조된 문서로, 교황권 강화에 이용되다가 르네상스 시대에 위조임이 밝혀졌다. - 8세기 문서 - 왕오천축국전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경 혜초가 인도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기록한 기행문으로, 일부 유실된 필사본만이 남아있지만 당시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이다.
앵글인의 교회사 |
---|
2. 잉글랜드 기독교의 초기 역사
597년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가 켄트 왕국에 도착하여 잉글랜드 포교를 시작했다.[3] 이는 잉글랜드 교회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된다.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la, 즉 "앵글인의 교회사"(''An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1]는 베다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731년경에 완성되었다. 이 책은 5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략부터 시작하여 잉글랜드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보여준다.[2] 로마 시대 브리튼의 기독교에 대한 간략한 설명에는 성 알반의 순교가 포함되어 있으며, 597년 아우구스티누스가 잉글랜드에 파견되어 앵글로색슨족에게 기독교를 전파한 이야기가 이어진다.켄트에서 기독교가 발전하는 과정과 노섬브리아를 기독교화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다룬다.머시아의 왕 펜다가 약 632년 해트필드 체이스 전투에서 노섬브리아의 에드윈을 살해하면서 좌절되었으나, 3권의 절정은 위트비 종교 회의에 대한 설명이다.캔터베리 대주교로 서임되면서 시작되며, 윌프리드가 서섹스 왕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노력을 기록한다.프리지아에서의 선교 활동과 부활절 날짜를 정확히 정하는 문제에 대한 켈트 기독교와의 갈등을 설명한다.
2. 1. 로마 시대 브리튼의 기독교
브리튼 섬의 기독교 역사는 로마 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말기에는 펠라기우스와 성 파트리키우스가 알려져 있으며, 후자에 의해 아일랜드 전도가 시작되었다.
아일랜드가 급속하게 기독교화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브리튼 섬은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을 받아 일시적으로 기독교 포교가 정체되었다. 하지만 563년 이후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성 콜룸바가 이오나 섬을 거점으로 스코틀랜드 개종에 착수하여, 597년 6월 9일 사망할 때까지 열성적인 포교 활동을 계속했다. 마침 같은 해 6월 2일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명을 받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켄트 왕국에 상륙하여 잉글랜드 포교도 시작되었다.
2. 2. 앵글로색슨족의 침입과 기독교의 쇠퇴
브리튼 섬의 기독교 역사는 로마 제국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말기에는 펠라기우스와 성 파트리키우스가 알려져 있으며, 성 파트리키우스에 의해 아일랜드 전도가 시작되었다.
아일랜드가 급속하게 기독교화된 것과는 대조적으로 브리튼 섬은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을 받아 일시적으로 기독교 포교가 정체되었다. 하지만 563년 이후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성 콜룸바가 이오나 섬을 거점으로 스코틀랜드 개종에 착수하여, 597년 6월 9일 사망할 때까지 열성적인 포교 활동을 계속했다. 마침 같은 해 6월 2일 교황 그레고리오 1세의 명을 받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켄트 왕국에 상륙하여 잉글랜드 포교도 시작되었다.[1]
2. 3. 아일랜드 선교와 켈트 교회
563년 성 콜룸바가 이오나 섬을 거점으로 스코틀랜드 개종에 착수하여, 597년 6월 9일 사망할 때까지 열성적인 포교 활동을 계속했다.[22] 성 파트리키우스의 선교 활동은 무시되었다.[22] 베다는 아일랜드에서 픽트족과 노섬브리아인들에게 선교사로 온 아이다인과 콜룸바에 대해 호의적으로 썼지만, 웨일스인들이 침략하는 앵글로색슨족을 복음화하지 못한 것에 대해 반대했다.[23]
아일랜드의 켈트 교회와 가톨릭 교회가 같은 섬에서 동시에 별도로 포교를 시작했지만, 양자는 여러 면에서 달랐기 때문에 포교를 둘러싸고 마찰과 대립이 발생하게 되었다.
켈트 교회와 가톨릭은 부활절 계산 방식이 달랐고, 양자의 날짜 사이에는 수 주간의 오차가 있었다. 켈트 교회는 유대교의 파스카 축제에 맞춰 유대력 니산월 14일에 부활절을 지냈다. 또한 양측 수도사들의 삭발 스타일도 달랐는데, 켈트 수도사들은 이마를 완전히 밀었던 반면, 가톨릭 수도사들은 도넛 모양으로 머리카락을 남겨두었다.
3. 앵글로색슨족의 개종과 교회의 발전
604년 그레고리오 1세가 사망한 후, 켄트에서 기독교가 발전하고 노섬브리아를 기독교화하려는 초기 시도가 있었다.[4] 그러나 632년 해트필드 체이스 전투에서 이교도 머시아의 왕 펜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노섬브리아의 에드윈을 살해하면서 좌절을 겪기도 했다.[4] 하지만 노섬브리아의 오스왈드와 노섬브리아의 오스위 왕 아래에서 노섬브리아의 기독교는 다시 성장했다.[5]
664년 위트비 종교 회의는 잉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캔터베리의 테오도르가 캔터베리 대주교로 서임되고 윌프리드가 서섹스 왕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다.[6][7] 베다는 프리지아에서의 선교 활동과 켈트 기독교와의 부활절 날짜 논쟁도 기록했다.[7] 그는 성 커트버트와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부활절 날짜를 잘못 지킨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3]
8세기 말, 데인족의 침입으로 잉글랜드 교회는 다시 정체기를 맞았지만, 10세기 알프레드 대왕 시대에 부흥을 이루었다. 이후 데인족의 2차 침입이 있었으나, 크누트 왕은 기독교를 보호했다.
3. 1.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와 로마 가톨릭 교회
캔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선교 활동과 켄트 왕국의 개종은 『앵글인의 교회사』의 중요한 내용이다. 베다는 잉글랜드 역사를 기록하면서 종교와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도 함께 드러냈다. 특히 성 커트버트와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부활절 날짜를 잘못 지킨 것에 대해 비판했다.[36]
3. 2. 노섬브리아 왕국의 기독교화
663년, 노섬브리아 왕국의 왕 오스위는 켈트 교회 방식을 따라 부활절을 기념했지만, 그의 아내는 가톨릭 방식을 따랐기 때문에 사순절을 지키고 있었다. 이로 인해 부활절 날짜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양측은 휘트비에서 교회 회의를 열어 왕 앞에서 논쟁을 벌였다. 결국 왕은 가톨릭을 지지했고, 664년 휘트비 교회 회의에서 가톨릭 측이 승리하면서 잉글랜드 지역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우세하게 되었다.[21]
3. 3. 위트비 종교 회의 (664년)
663년, 노섬브리아 왕국의 왕 오스위는 켈트 교회 방식을 따라 부활절을 기념했지만, 그의 아내는 가톨릭 방식을 따라 사순절을 지키고 있었다. 이로 인해 부활절 날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49] 켈트 교회와 가톨릭 교회는 부활절 계산 방식이 달랐고, 양측의 날짜는 몇 주간 차이가 있었다. 켈트 교회는 유대교의 파스카 축제에 맞춰 유대력 니산월 14일에 부활절을 지냈지만, 가톨릭 교회는 다른 날짜에 부활절을 기념했다. 또한, 양측 수도사들의 삭발 스타일도 달랐는데, 켈트 수도사들은 이마를 완전히 밀었던 반면, 가톨릭 수도사들은 도넛 모양으로 머리카락을 남겨두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664년 위트비에서 교회 회의가 열렸고, 양측은 왕 앞에서 논쟁을 벌였다. 최종적으로 오스위 왕은 가톨릭을 지지했고, 위트비 교회 회의에서 가톨릭 측이 승리하면서 잉글랜드 지역에서는 가톨릭 교회가 우세하게 되었다.
4. 노르만 정복 이후 잉글랜드 교회
『교회 잉글랜드사』는 중세 시대에 널리 필사되었으며, 현재 약 160개의 사본이 남아있다. 이 중 절반은 유럽 대륙에 존재한다.[51] 8세기와 9세기 텍스트는 대부분 카롤링거 제국 북부 지역에서 유래했다.[50] 1474년에서 1482년 사이에 스트라스부르에서 처음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51]
현대 역사가들은 『교회 잉글랜드사』를 광범위하게 연구해왔다.[52] 과거에는 앵글로색슨족 역사를 『교회 잉글랜드사』를 바탕으로 서술했지만, 최근에는 베다가 쓴 내용뿐만 아니라 쓰지 않은 내용에도 주목한다.[53] 베다의 관심사는 현대 역사가와는 달랐는데, 그는 잉글랜드 교회의 조직, 이단, 그리고 이를 근절하려는 노력에 초점을 맞추었고, 도덕적 교훈을 주거나 교회 관련 사건이 아니면 왕과 왕국의 세속 역사는 다루지 않았다.[3]
중세 초기의 『앵글로색슨 연대기』, 『브리튼 열왕사』, 알쿠인의 『요크 교회 선조, 왕, 성인에 관한 시』와 윌리엄 오브 말름즈베리, 헨리 오브 헌팅던, 몬머스의 제프리와 같은 후기 중세 작가들, 폴리도르 베르길리와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매튜 파커 같은 초기 근대 작가들은 『교회 잉글랜드사』를 자료와 영감의 원천으로 삼았다.[54] 종교 전쟁 당시 개신교와 가톨릭 양측 모두 이 책을 사용했다.[56]
일부 역사가들은 베다가 기록한 내용 중 일부의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샬롯 베르는 『교회 잉글랜드사』에 묘사된 켄트 지역 게르만족 침입자들의 도착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당시의 신화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57] 톰 홀랜드는 "알프레드 대왕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 잉글랜드 통일 왕국이 형성되었을 때, 베다의 역사가 그 왕국에 기원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조상의식을 제공했다"고 썼다.[58]
4. 1. 윌리엄 1세와 캔터베리 대주교 랜프랑크
1066년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승리한 윌리엄 1세는 노르만 왕조를 열고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내 주교와 대수도원장을 직접 임명하고 서임하는 등 강력한 지배권을 행사하려 했다. 이는 교황청의 개혁 운동과 충돌하는 것이었지만, 윌리엄 1세는 노르망디 공작 시절부터 교회 개혁에 찬성하면서도 성직 서임권은 자신이 행사했다. 1073년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은 윌리엄 1세를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다.윌리엄 1세는 칙령을 통해 국왕 동의 없는 파문 선언 동의, 주교의 무단 출국, 국왕이 인정하지 않는 교황 서신 수령 등을 금지했다.
윌리엄 1세의 종교 정책은 캔터베리 대주교 랜프랑크의 협력으로 추진되었다. 랜프랑크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잉글랜드 내 수위권을 확립하고자 요크 대주교에게 복종 서약을 받아냈다. 윌리엄 1세는 왕국 통일을 위해 이를 지지했다. 랜프랑크는 요크 대주교가 별도로 잉글랜드 왕을 성별할 가능성을 언급하며 캔터베리 대주교 수위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다만, 이 일화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도 존재한다.
로마 교황청은 지역 수위 교회 개념에 반대했지만, 윌리엄 1세와 랜프랑크는 전통적인 정교 협력 사상을 바탕으로 잉글랜드에 강력한 정부를 수립하고 잉글랜드 교회의 독립을 유지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수위권 확인은 잉글랜드를 신앙 공동체로 만들고, 보편 가톨릭에서 분리되어 훗날 국민 국가로 이어지는 틀을 형성했다는 견해도 있다.
4. 2. 서임권 투쟁과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
안셀무스는 랑프랑크의 뒤를 이어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인물로, 로마 교황에게 충실하였다. 세토 가즈오는 안셀무스가 교황과 국왕 사이의 서임권 투쟁에서 "성속 절단"의 논리로 양측의 화해를 이끌어내고 캔터베리 대주교의 수위권 확립에 진력했다고 평가한다.안셀무스는 교황 수위권을 명확히 인정하여 1095년 2월 로킹엄 교회 회의에서 국왕의 교회 간섭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윌리엄 2세에게 충성하는 잉글랜드 주교들은 오히려 안셀무스에게 교황에 대한 복종을 포기하라고 권고했다.
이후 헨리 1세는 성직 서임 문제로 교황 및 안셀무스와 협상하여 1107년 런던 협약을 체결했다. 헨리 1세가 이러한 타협에 나선 이유는 당시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노리고 있었고, 자신의 왕위를 유지하려면 고위 성직자들의 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런던 협약에서는 국왕이나 속인이 성직자를 서임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했지만, 국왕에게 신종 선서를 하는 것을 이유로 주교 서임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로써 잉글랜드 국왕은 교회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1114년 캔터베리 대주교 선거에서 국왕이 추천한 후보가 낙선하는 등, 국왕의 교회 정책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4. 3. 스티븐 왕 시대의 혼란과 교회의 영향력 강화
헨리 1세의 뒤를 이은 스티븐 왕 시대는 혼란 그 자체였고, 왕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교회에 모든 양보를 했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오히려 국왕과 교회의 대립은 깊어졌다. 1139년에 국왕이 솔즈베리 주교 로저를 체포 투옥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스티븐은 성직자들의 지지를 결정적으로 잃었다.1141년 윈체스터 교회 회의에서 주교들은 주교에게 국왕을 성별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고, 마틸다를 "여성 지배자"(Domina Anglorum|도미나 앙글로룸영어)로 인정했다.[1][2] 스티븐 왕의 치세 동안 잉글랜드는 실질적인 내란 상태에 있었지만, 교회는 그 혼란 속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고 왕권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유를 획득했다.
5. 플랜태저넷 왕조와 잉글랜드 교회
플랜태저넷 왕조 시대 잉글랜드 교회는 왕권과 여러 차례 갈등을 겪었다.
헨리 2세는 윌리엄 1세 시대부터 분리되어 있던 세속 재판소와 교회 재판소의 이원적 구조를 개혁하려 했다. 성직자들이 교회 재판소에서 가벼운 처벌을 받는 경우가 많아 법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 2세는 클래런던 법을 제정하여 성직자 범죄에 대한 국왕 재판소의 권한을 강화하려 했으나,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의 반대에 부딪혔다. 베켓은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살해당한 후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결국 헨리 2세는 클래런던 법 대부분을 파기해야 했다.
존 왕 시대에는 캔터베리 대주교 선출 문제를 놓고 왕권과 교황권이 대립했다.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 월터 사후, 존 왕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중재를 요청했으나, 교황은 스티븐 랭턴을 대주교로 임명했다. 존 왕은 이에 반발하여 교회 재산 몰수를 명했으나, 결국 랭턴을 대주교로 받아들이고 잉글랜드 왕이 교황의 봉신이 됨을 인정해야 했다.
마그나 카르타는 왕권뿐만 아니라 교황권에도 도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잉글랜드 성직자들은 마그나 카르타 제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교황은 마그나 카르타를 비판했다.
헨리 3세는 상설 국왕 평의회를 인정했는데, 이는 나중에 의회(parliament영어)로 발전했다. 에드워드 1세 시대 1295년 "모범 의회(Model Parliament영어)"부터 평민 대표가 의회에 소집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성직자에게 과세 동의를 구하려 했으나, 교황 보니파시오 8세의 교황 칙서 "클레리치스 라이코스(속인은 성직자에게, Clericis laicosla)"로 인해 좌절되었다.[71]
5. 1. 헨리 2세와 캔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베켓
헨리 2세는 잉글랜드의 무질서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법률을 정비하고 재판 제도의 개혁에 나섰다. 잉글랜드에서는 윌리엄 1세 시대부터 세속 재판소와 교회 재판소가 분리되어 성직자는 교회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는 성직자의 특권이었으나, 국왕 재판소에서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도 교회 재판소에서는 가벼운 처벌로 끝나는 경우가 있어 법의 허점이 존재했다. 헨리 2세는 법의 공정한 집행을 위해 클래런던 법을 제정하여, 교회 재판소에서 성직자가 성직을 박탈당한 경우 국왕 재판소에서 다시 속인으로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고, 국왕의 허가 없이 성직자가 교황에게 상소하는 것을 금지했다.right은 클래런던 법에 강경하게 반대하다가 참살당했으며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이에 캔터베리 대주교 토마스 베켓은 교회의 권리를 옹호하며 국왕에게 반대했다. 오랫동안 추방된 후, 베켓은 잉글랜드로 귀국했지만, 캔터베리 대성당에서 4명의 기사에게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베켓은 순교자로서 숭배받게 되었고, 국왕은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대역죄에 관한 조항을 제외하고 클래런던 법의 대부분은 파기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중세 초기에 국왕의 강력한 통제를 받던 잉글랜드 교회는 플랜태저넷 왕조의 시작과 함께 대륙에서의 교회 개혁의 성과를 받아들여 왕권에 대해 일정한 독립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시대에 캔터베리 대주교의 수위권이 점차 확립되었고, 잉글랜드에 하나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후의 잉글랜드 국교회 체제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5. 2. 존 왕 시대의 교황과의 대립
잉글랜드 왕권과 교권은 존 왕 시대에 캔터베리 대주교 선출 문제를 놓고 대립했다. 1205년 캔터베리 대주교 월터가 사망하자 후계자 선출을 두고 왕과 잉글랜드 교회는 서로 다른 인물을 내세우려 했고, 존 왕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교황은 왕과 교회를 모두 비판하며 스티븐 랭턴을 대주교로 임명하라고 명령했다. 존은 이 결정에 불만을 표했다. 전임 월터는 캔터베리 대주교이자 정치가였으며, 선대 국왕 리처드 1세가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부재중일 때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는 등 캔터베리 대주교는 잉글랜드 국내에서 왕의 고급 관료 역할을 수행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선출에는 왕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관례(클라렌던 법)가 있었고, 랭턴은 파리 대학교 출신의 유명한 신학자였지만, 전통적으로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가와 프랑스의 카페 왕가는 대립 관계에 있었고, 프랑스 대학 출신이라는 점도 존 왕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황은 잉글랜드 전체에 성무 정지를 부과했고, 존 왕은 보복으로 교회 재산 몰수를 명령했다.
이 분쟁은 1214년까지 이어졌고, 결과적으로 잉글랜드 왕권은 대주교 선거 시행 허가권과 선거 결과 동의권을 확보했지만, 랭턴을 대주교로 받아들이고, 잉글랜드 왕이 교황의 봉신이 되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으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5. 3. 마그나 카르타와 교회
존 왕에 대한 잉글랜드 제후들의 반발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제후들은 마그나 카르타를 기안하여 왕에게 승인을 요구했다. 마그나 카르타의 "보증 조항"이 왕권 제한을 가져올 것을 우려한 왕은 즉시 거부했다. 1215년 5월 5일 제후들은 신종 서약을 파기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존 왕은 반란 제후의 소유지 몰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런던 시민이 반란에 가담하여 그들이 런던을 거점으로 삼게 되자 존 왕은 타협했고, 6월 19일에 마그나 카르타가 승인되었다.마그나 카르타는 "보증 조항"에서 25명의 제후가 왕국 내의 평화와 여러 자유에 대해 권리를 갖고 책임을 지도록 규정했는데, 이는 왕권뿐만 아니라 교황권에도 바람직하지 않은 조항이었다. 당시 잉글랜드 왕은 교황의 봉신이었기 때문에, 마그나 카르타가 교황권의 재판권을 좁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성직자들은 이 점을 간파하여 마그나 카르타파의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고, 반란은 세속 제후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교황은 마그나 카르타를 비판했고, 존 왕은 이에 힘을 얻어 마그나 카르타를 지키지 않았다. 반란 제후들은 프랑스 왕권에 개입을 의뢰했고, 캔터베리 대주교도 이에 가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216년 10월 18일 존 왕이 갑자기 서거했다. 아들 헨리 3세의 즉위에 즈음하여 마그나 카르타에서 "보증 조항"이 삭제되었고, 수정판에는 섭정 윌리엄 마샬의 인장과 함께 교황 특사의 인장이 부여되었다.
5. 4. 헨리 3세, 에드워드 1세 시대와 의회의 발전
헨리 3세는 여러 제후들과의 협상을 통해 몇 명의 고정된 성원으로 구성된 상설 국왕 평의회(King's council영어)를 인정했는데, 이는 나중에 의회(parliament영어)라고 불리게 되었다. 헨리 3세에게 불만을 품은 제후들이 시몽 드 몽포르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몽포르는 기존 성원 외에 각 주에서 2명의 자유민과 각 도시에서 2명의 대표를 모아 의회를 열었다. 결국 반란은 진압되었고, 이것이 정례화되지는 않았지만, 에드워드 1세 시대 1295년의 "모범 의회(Model Parliament영어)"부터 평민 대표가 소집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에드워드 1세는 이 모범 의회에서 성직자와 평민에게 과세 동의를 구했지만, 성직자는 교황권에 호소했고, 교황 보니파시오 8세는 교황 칙서 "클레리치스 라이코스(속인은 성직자에게, Clericis laicosla)"를 발표하여 세속 권력의 교회 과세에는 매번 교황의 허가가 필요하며, 이를 위반할 경우 파문에 처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에, 에드워드 1세의 의도는 좌절되었다.[71]6. 14세기 이후 잉글랜드 교회
Edward III영어 시대에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교황권의 지배에 대해 국내 성직자들의 반발이 강해졌다. 이 시기 교황청은 아비뇽으로 옮겨져 이탈리아 반도에 있는 교황령이 주변 세력에 침식되어 만성적인 자금난에 시달렸고, 수입의 일환으로 성직 매매를 활발하게 행했다. 특히 존 이래 교황의 교회 지배가 강해진 잉글랜드에서는 성직 매매로 지위를 얻은 외국인 성직자를 받아들였다. 국왕과 의회는 1351년 성직자 임명 무효령과 1353년 상소 금지령을 발하여 잉글랜드 국내에서의 교황권과 교회법의 영향을 배제하려 했지만, 실제로 행사되지는 않았다.
7. 베다 베네라빌리스의 『앵글인의 교회사』
Historia ecclesiastica gentis Anglorumla, 즉 "앵글인의 교회사"(''An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1]는 베다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으로, 731년경에 완성되었다. 5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략부터 시작하여 잉글랜드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 책은 604년 그레고리오 1세의 죽음으로 시작하며, 켄트에서 기독교가 더욱 발전하는 과정과 노섬브리아를 기독교화하려는 최초의 시도를 추적한다. 세 번째 책의 절정은 위트비 종교 회의에 대한 설명이다.캔터베리 대주교로 서임되면서 시작되며, 윌프리드가 서섹스 왕국에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노력을 기록한다.프리지아에서의 선교 활동과 부활절 날짜를 정확히 정하는 문제에 대한 켈트 기독교와의 갈등에 대한 설명을 포함한다.
다섯 권(총 400페이지)으로 나뉜 《교회사》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시대부터 731년 완성될 때까지 잉글랜드의 교회 및 정치사를 다루고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 | 내용 |
---|---|
제1권 | 후기 로마 공화국 ~ 서기 603년 |
제2권 | 서기 604년 ~ 633년 |
제3권 | 서기 633년 ~ 665년 |
제4권 | 서기 664년 ~ 698년 |
제5권 | 서기 687년 ~ 731년 |
596년 이후, 베다는 잉글랜드 전역과 로마에서 힘들게 구한 문서 자료뿐만 아니라 구술 증언도 사용했으며, 구술 증언의 진정성에 대한 비판적인 고려와 함께 사용했다.
『앵글인의 교회사』는 명확한 논쟁과 교훈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베다는 잉글랜드의 역사를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 정치와 종교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자 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그는 자신의 고향인 노섬브리아를 지지하며, 잉글랜드 역사에서 노섬브리아의 역할을 남부의 강력한 경쟁국인 머시아보다 더 강조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Bede
Oxford 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Historia Ecclesiastica
[9]
서적
Monkwearmouth (or Wearmouth) and Jarrow
[10]
서적
[11]
서적
Gildas
[12]
서적
Bede
Speculum
[13]
서적
Bede
Speculum
[14]
서적
Nothhelm
[15]
서적
Bede's Ecclesiastical History
[16]
서적
Historia Ecclesiastica
[17]
서적
Narrators
[18]
서적
From British to English Christianity
Conversion and Colonization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From British to English Christianity
Conversion and Colonization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From British to English Christianity
Conversion and Colonization
[26]
서적
[27]
서적
Narrators
[28]
서적
Narrators
[29]
서적
Narrators
[30]
서적
Theodore
Archbishop Theodore
[31]
서적
[32]
서적
[33]
간행물
A Sparrow in the Temple? The Ephemeral and the Eternal in Bede’s Northumbria
Springer, Cham
[34]
간행물
Bede’s Sparrow and the Psalter in Anglo-Saxon England
[35]
간행물
How Coifi Pierced Christ’s Side: A Re-Examination of Bede’s Ecclesiastical History, II, Chapter 13
[36]
서적
Kings and Kingdoms
[37]
논문
[38]
논문
[39]
논문
[40]
문서
HE
[41]
인용
[42]
논문
[43]
논문
[44]
서적
The Oxford Companion to the Year: an exploration of calendar customs and time-reckoning
Oxford University Press
[45]
서적
English Historical Documents
[46]
서적
The Old English Version of Bede's Ecclesiastical History of the English People
Trübner
[47]
서적
The Old English Version of Bede's Historia ecclesiastica
D.S. Brewer
[48]
논문
[49]
논문
[50]
논문
[51]
서적
Companion to Bede
[52]
서적
Narrators
[53]
서적
Narrators
[54]
서적
De pontificibus et sanctis Ecclesiae Eboracensis, The Bishops, Kings, and Saints of York
Clarendon Press
[55]
논문
[56]
논문
[57]
간행물
Origins of Kingship
[58]
뉴스
Why Even Atheists Think Like Christians
https://www.newstate[...]
2019-09-04
[59]
서적
Bede's Ecclesiastical History
[60]
서적
Bede's Ecclesiastical History
[61]
서적
Bede's Ecclesiastical History
[62]
서적
A Hand-List of Bede Manuscripts
Cornell U. P.
[63]
서적
Bede's Ecclesiastical History
[64]
서적
Bede's Ecclesiastical History
[65]
웹사이트
(Re-)Reading Bede: The Ecclesiastical History in Context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06-11-22
[66]
서적
The Humane Medievalist and other Essays in English Literature and Learning from Chaucer to Eliot
https://books.google[...]
Ed. di Storia e Letteratura
[67]
서적
Bede, The Reckoning of Time
https://books.google[...]
Liverpool University Press
1999-01-01
[68]
서적
The Old English Version of Bede's Historia Ecclesiastica
https://books.google[...]
Boydell & Brewer Ltd
[69]
서적
English Scholars
Jonathan Cape
[70]
논문
[71]
서적
Baedae Historia Ecclesiastica a gloriosissimo veterum Anglo-Saxonum rege Aluredo Saxonice reddita
Trübner
172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