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야하라 히로미치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야하라 히로미치는 일본 제국 육군의 군인으로,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군 제32군 참모로 활약했다. 1902년 돗토리현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으며, 미국 유학을 통해 미국의 군사력을 경험했다. 그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지구전을 펼치며 미군에 맞섰으나, 결국 포로가 되었고, 전후에는 농부와 행상으로 생활하며 1981년 사망했다. 그는 오키나와 전투의 경험을 담은 저서 《오키나와 결전》을 집필했으며, 미군에게 오키나와 전투 작전을 높이 평가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오키나와 전투 - 오에 겐자부로
    일본의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인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가진 아들의 탄생을 계기로 개인적 고뇌와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결합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작가로 성장, 199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평화주의 및 반핵 운동에도 참여했다.
  • 오키나와 전투 - 오타 미노루
    지바현 출신 일본 제국 해군 군인인 오타 미노루는 해군병학교 졸업 후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 오키나와 전투에서 해군 근거지대 사령관으로 격렬하게 전투를 지휘하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오키나와 현민의 고통을 호소하는 전보를 남기고 자결, 사후 해군 중장으로 추서되었다.
  • 포로 - 이마무라 히토시
    이마무라 히토시는 일본 제국의 군인이자 육군대장으로, 태평양 전쟁 중 네덜란드령 동인도 침공 작전을 지휘하여 자바섬을 점령하는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전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복역 후 전사자 유족을 위한 활동을 펼치는 등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 포로 - 고바야시 마사키
    일본의 영화 감독 고바야시 마사키는 전쟁과 사회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는 영화들을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구로사와 아키라 등과 교류하며 일본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돗토리현 출신 - 이쿠타 조코
    이쿠타 조코는 일본의 번역가, 문예 평론가, 소설가, 극작가로서, 서양 고전 및 철학 서적을 일본에 소개하고 여성 문학 운동을 지원했으며 사회주의, 무정부주의 사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 돗토리현 출신 - 아오야마 고쇼
    아오야마 고쇼는 1987년 데뷔하여 「명탐정 코난」, 「야이바」, 「마술쾌도」 등 인기 만화 시리즈를 통해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일본의 만화가이다.
야하라 히로미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야하라 히로미치
본명야하라 히로미치 (八原博通)
출생1902년 10월 12일
출생지돗토리현 요나고시
사망1981년 5월 7일
국적일본
군사 경력
소속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1923년 – 1945년
최종 계급[[File:帝國陸軍の階級―襟章―大佐.svg|35px]] 대좌
주요 지휘전략 교관
육군대학교
참전
전투제2차 세계 대전
오키나와 전투

2. 인물

돗토리현요나고시 카이케 출신으로, 양잠을 하는 자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야하라 우사부로는 리원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와 사별했다.[5]

요나고 중학교 시절 뛰어난 두뇌를 발휘하여 학과 과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으며, 졸업식에서는 수석으로 졸업생 총대로 선출되었다.[7]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군 학교 지원자가 감소했지만, 집안 형편을 고려하여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8]

육군사관학교에서도 학과 성적은 뛰어났으나, 검도나 마술 등 실기 과목은 평균 수준이었다.[9][10] 192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으며, 1929년에는 육군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은사 군도를 받았다.

1930년 육군성 인사국에서 근무했으며,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미국에 유학하여 미국 사회와 군사 훈련을 경험했다. 이때 미국 대학생들이 예비역 장교 훈련 과정에서 고도의 군사 훈련을 받는 것을 보고 일본 대학생들의 군사 훈련과 큰 차이를 느꼈으며, 미 육군의 화력 중시 전술을 파악하고 일본 육군의 미국 경시 풍조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11]

1935년 귀국 후 육군대학교 교관 등을 역임하였고, 1940년에는 대본영 참모(작전과) 및 태국 대사관 부속 무관 보좌관을 역임했다.

2. 1. 출생과 성장 배경

1902년 돗토리현에서 소규모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리원이었다.[5] 양잠을 하는 자작농 집안이었으며, 아버지는 촌장을 지내기도 했다.[6]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와 사별했다.[6]

요나고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영향으로 군 학교 지원자가 줄었지만, 집안 형편을 생각해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했다.[7][8] 육군사관학교에서 학과 성적은 뛰어났지만, 검도나 마술 등의 실기 과목은 평균 수준이었다.[9][10]

1923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1929년에는 육군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하고 은사 군도를 받았다.[11]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미국에 유학하여 미국 사회와 군사 훈련을 경험했다. 이때 미국 대학생들이 예비역 장교 훈련 과정에서 고도의 군사 훈련을 받는 것을 보고, 일본 대학생들의 군사 훈련과 큰 차이를 느꼈다. 또한, 미국 육군의 화력 중시 전술을 파악하고, 일본 육군의 미국 경시 풍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11]

2. 2. 군 경력

1923년 7월, 육군사관학교(제35기)를 졸업하고, 같은 해 10월 보병소위로 임관했다. 보병 제63연대 부속 등을 거쳐, 최연소로 입학한 육군대학교(제41기)를 1929년 11월에 우등(5위)으로 졸업하여 은사 군도를 받았다.[10]

1930년 12월, 육군성인사국 부속 근무가 되었고, 인사국 과원(보임과)으로 이동했다. 1933년 10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육대 우등생의 특전으로 미국에 해외 유학을 갔다. 야하라는 미국 사회를 알기 위해 하숙집 이웃들을 불러 교류했는데, 미국 사회와의 교류 속에서 미국 대학생이 지원제인 예비역 장교 훈련 과정에서 고도의 군사 훈련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는 일본 대학생의 군사 훈련이 강제적이고 초보 훈련에 지나지 않는 것과는 큰 차이였다. 야하라는 유사시에 이러한 대학생과 졸업생이 우수한 장교로 군에 편입되기 때문에, 상비군은 일본 육군의 절반밖에 병력이 없는 미국군의 유사시의 실력을 통감했다. 또한, 1년에 걸쳐 노스캐롤라이나주 멀트리 요새에서 연대 부속 장교로 근무하며, 미국 육군 보병학교도 견학하여 미국 육군의 전술에 정통하게 되었다.[11]

당시 일본 육군은 대소련 전략을 기본으로 하였고, 미국군에 대해서는 "배금주의의 미국에서는 장교조차 허술하고, 전투가 시작되면 우왕좌왕할 뿐이다"와 같이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야하라는 이러한 시각에 대해 "미국군의 실력은 일본 육군이 생각하는 것처럼 달콤한 것이 아니다", "가장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화력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포문의 수는 큰 차이가 없더라도 쏘는 포탄의 양이 다르다. 일본의 야포는 기껏해야 하루 10발 정도일 것이지만, 미국의 공업력은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전시가 되면 군수 생산력은 엄청나게 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쏠 수 있다. 평시의 미국을 보고, 전시의 실력을 추측해서는 나라를 망친다"라고 반론했다. 하지만 작전 참모 주류 파벌에 속하는 장교들은 이후 미일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는 상황에서도 그의 식견을 부정했다.[11]

1935년 11월, 인사국 과원(보임과)이 되어 육대 교관으로 전임, 1937년 8월, 보병 소좌로 승진하여 제2군참모로 취임했다. 같은 해 12월, 제5군 참모가 되어 육대 교관으로 이동했다. 1939년 8월, 보병 중좌로 진급했다. 1940년 9월, 대본영 부속 명부, 대본영 참모(작전과), 태국 대사관 부속 무관 보좌관을 역임했다. 태국 대사관 부속 주재 무관이라는 것은 표면적인 직책이었고, 실제로는 다가올 영국과의 전쟁 준비를 위해 말레이시아나 버마의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 당시, 훗날 제32군 참모장으로 오키나와 전투를 함께 치르는 나가이소와 사이공에서 자주 해외 영화를 관람하고, 숙소인 마제스틱 호텔 근처 스키야키 집에서 술을 마셨다.[12]

전쟁이 시작되자, 제15군 참모로서 버마(현재 미얀마) 공략 작전을 담당했다. 적극적인 공세를 제시했고, 군 사령관 이다 쇼지로와 자주 대립했다. 그 후, 뎅기열에 걸려 내지로 귀환했다. 회복 후 육군대학교 교관으로 발령받았고, 1943년 3월, 육군 대좌로 승진했다. 1944년 3월 20일에 오키나와 방어를 담당하는 제32군의 고급 참모(작전 담당)가 되었다. 처음에는 수변에서의 적극적인 공세를 입안했지만, 방위 부대의 주력인 제9사단의 대만 이송 후에는 "전략적 지구전" 방침으로 변경하고, 미국군의 습격에 대비했다.

1945년 6월 18일, 오키나와 본섬 남부 마부니의 동굴로 몰린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은, 자신의 최후를 깨닫고 초 이사무 참모장을 제외한 야하라 등 참모들에게 일본 본토로 귀환하여 전훈을 전파하는 것과 미국군 후방에 잠입하여 유격전을 벌이는 임무를 부여했다. 그리고 자신과 초는 자결을 결심했다. 야하라는 다른 2명의 참모와 함께 일본 본토로 귀환하는 임무를 명령받았다. 그날 밤에는 남은 얼마 안 되는 통조림 등 식량으로 제32군 사령부 마지막 연회가 열렸다. 6월 21일, 오키나와 전투의 미국군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 주니어 중장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했지만, 다음날인 22일에는 사령부 동굴 주변에 미국군이 진출하여 격렬한 공격을 가했다. 결국 6월 23일, 우시지마와 초는 자결하고, 제32군은 실질적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종료했다.[13]

야하라는 우시지마와 초의 자결을 지켜본 후, 우시지마의 명령대로 일본 본토에 전훈을 전달하기 위해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탈출을 시도했다. 6월 25일, 민간인과 패잔병 수십 명이 갇힌 구시토의 동굴에 들어갔다가 미국군에게 포위되었다. 2년간의 유학 경험으로 미국인을 잘 알고 있던 야하라는 미국군이 민간인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옥쇄를 결심한 패잔병들을 설득하여 영어로 미국군에 투항을 신청, 민간인 수십 명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14] 야하라는 훗날 수기에서 투항 당시의 상황을 "아름다운 장면이다. 이제 적도 아군도 없다. 인간애로 가득 찬 광경이다. 옛날 호우가 쏟아지던 밤, 필라델피아 남쪽 교외에서 자동차를 길 밖으로 폭주시켜 곤란했던 때, 근처에 사는 젊은이들이 비를 무릅쓰고 달려와 도와주었던 것을 문득 떠올렸다"라고 회상했다.[15]

미국군 수용소에서도 가명을 쓰고 신분을 교사로 위장하여 민간인으로서 작업에 종사했지만, 7월 23일 오키나와 현청의 전 과장으로 미국군 관리관을 하던 일본인 남성에게 조사를 받던 중 신원이 드러났다. 야하라는 그대로 미국군에 인도되었고, 이후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단독 주택 농가를 제공받는 등 고급 장교 포로로 취급받았고, 일본 태생으로 일본어에 능통한 미국군 연락 장교가 배정되었으며, 전 일본군 병사 당번병도 붙었다. 야하라는 미국군 기관지 『버크너』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일본에 대한 원자 폭탄 투하와 포츠담 선언 수락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에도 미국 육군 제10군 참모장 등과 오키나와 전투에 대해 논의하면서 포로 생활을 하다가 12월 30일까지 지낸 후, 1946년 1월에 복원했다.[16]

3. 오키나와 전투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조 이사무 중장이 마부니 동굴에서 자결을 결심했을 때, 야하라는 함께 자결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지만, 우시지마는 "오키나와 전투의 진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1] 조는 야하라에게 미군 전선을 통과하여 오키나와 북부로 가서 도쿄에 보고하라고 지시하며 500JPY을 주었다.[2]

두 장군이 자결한 후, 야하라는 다른 참모 장교들과 함께 동굴에 숨어 탈출 기회를 기다렸다. 민간인으로 변장한 그는 마후니 언덕을 내려가 다른 군인들과 합류했고, 민간인 그룹에 합류했다. 이 그룹은 미국인에게 발견되어 항복했다. 야하라는 일본어 영어 교사로 오인받아 구금 캠프로 이송되기 전 치넨 반도의 한 집에서 다른 민간 난민들과 생활했다. 3주 후 그의 신분이 미군에 의해 밝혀졌고, 포로로서 제10군 사령부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1945년 6월 18일, 오키나와 본섬 남부 마부니의 동굴로 몰린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은 야하라 등에게 일본 본토로 귀환하여 전훈을 전파하고, 미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임무를 부여하고 자신과 조 이사무 참모장은 자결을 결심했다. 야하라는 다른 2명의 참모와 함께 일본 본토로 귀환하는 임무를 명령받았다. 6월 23일, 우시지마와 조는 자결하고, 제32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종료했다.[13]

야하라는 우시지마의 명령대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탈출을 시도했지만, 6월 25일 미국군에 포위되었다. 2년간의 유학 경험으로 미국인을 잘 알고 있던 야하라는 미국군이 민간인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패잔병들을 설득하여 영어로 투항을 신청, 민간인 수십 명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14]

미군 수용소에서도 가명을 쓰고 교사로 위장했지만, 7월 23일 신원이 드러났다. 이후 미국군으로부터 고급 장교 포로로 취급받으며 심문을 받았고, 일본에 대한 원자 폭탄 투하와 포츠담 선언 수락을 알게 되었다. 12월 30일까지 포로로 지낸 후, 1946년 1월에 복원했다.[16]

전쟁이 끝난 후 야하라는 1946년 1월에 일본으로 송환되었다.[2]

3. 1. 오키나와 방어 전략 수립

야하라 히로미치는 육군대학교에서 전략을 가르치다가 미국의 침공이 예상되자 오키나와에 배치되어 방어 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미군 침략자들과의 전투를 최대한 오래 끌어 소모전을 펼치는 전략을 제안했다. 이는 미국의 규슈 침공을 지연시켜 규슈 방어군이 방어 태세를 갖출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11]

오키나와 침공이 시작되자, 야하라는 일본군에게 적극적인 공격보다는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육군 참모장인 조 이사무 중장은 소극적인 전황에 좌절하여 반자이 돌격을 건의했다. 야하라는 이에 반대했지만, 결국 조의 건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

조의 사무라이식 돌격 방식은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일본 보병의 막대한 사상자와 영토 손실을 초래했다. 이 결과가 명확해지자 조는 물러섰고, 야하라는 계속해서 전술 및 작전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야하라는 미군과 정면으로 싸울 화력이 없고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오랫동안 동굴에서 싸우다가 동굴이 함락되면 후퇴하고 방어하는 방식을 반복하여 더 이상 후퇴할 공간이 없어질 때까지 버티는 전술을 사용했다.[11]

3. 2. 오키나와 전투의 전개

야하라 히로미치는 육군대학교에서 전략을 가르치다가 미국의 침공에 대비해 오키나와에 배치되어 방어 전략을 수립했다. 그는 미군을 최대한 오래 묶어두는 소모전(지구전, 持久戦)을 통해 규슈 침공을 지연시키고 규슈 방어군이 방어 태세를 갖출 시간을 벌고자 했다.

오키나와 침공이 시작되자 야하라는 방어적인 자세를 유지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육군 참모장 조 이사무 중장은 소극적인 전황에 좌절하여 반자이 돌격을 건의했다. 야하라는 반대했지만, 조의 돌격 방식은 일본군에 막대한 사상자와 영토 손실을 초래했다. 결국 조는 물러서고 야하라가 전술 및 작전 결정을 계속 내리도록 했다.

야하라는 미군과 정면으로 싸울 화력이 없음을 인지하고, 동굴에서 최대한 버티다가 후퇴하는 방식을 반복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조 중장이 마부니 동굴에서 자결을 결심했을 때, 야하라는 함께 자결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지만, 우시지마는 "오키나와 전투의 진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라며 거절했다.[1] 조는 야하라에게 미군 전선을 통과하여 오키나와 북부로 가서 도쿄에 보고하라고 지시하며 500엔을 주었다.[2]

두 장군이 자결한 후, 야하라는 다른 참모 장교들과 함께 동굴에 숨어 탈출 기회를 기다렸다. 민간인으로 변장한 그는 마후니 언덕을 내려가 다른 군인들과 합류했고, 민간인 그룹에 합류했다. 이 그룹은 미국인에게 발견되어 항복했다. 야하라는 일본어 영어 교사로 오인받아 구금 캠프로 이송되기 전 치넨 반도의 한 집에서 다른 민간 난민들과 생활했다. 3주 후 그의 신분이 미군에 의해 밝혀졌고, 포로로서 제10군 사령부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 야하라는 1946년 1월에 일본으로 송환되었다.[2]

1944년 3월 20일, 야하라는 오키나와 방어를 담당하는 제32군의 고급 참모(작전 담당)가 되었다. 처음에는 수변에서의 적극적인 공세를 계획했지만, 제9사단의 대만 이동 후 "전략적 지구전" 방침으로 변경하고 미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1945년 6월 18일, 오키나와 본섬 남부 마부니의 동굴로 몰린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은 야하라 등에게 일본 본토로 귀환하여 전훈을 전파하고, 미군 후방에서 유격전을 벌이는 임무를 부여하고 자신과 조 이사무 참모장은 자결을 결심했다. 야하라는 다른 2명의 참모와 함께 일본 본토로 귀환하는 임무를 명령받았다. 6월 23일, 우시지마와 조는 자결하고, 제32군은 조직적인 저항을 종료했다.[13]

야하라는 우시지마의 명령대로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탈출을 시도했지만, 6월 25일 미국군에 포위되었다. 2년간의 유학 경험으로 미국인을 잘 알고 있던 야하라는 미국군이 민간인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패잔병들을 설득하여 영어로 투항을 신청, 민간인 수십 명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14]

미군 수용소에서도 가명을 쓰고 교사로 위장했지만, 7월 23일 신원이 드러났다. 이후 미국군으로부터 고급 장교 포로로 취급받으며 심문을 받았고, 일본에 대한 원자 폭탄 투하와 포츠담 선언 수락을 알게 되었다. 12월 30일까지 포로로 지낸 후, 1946년 1월에 복원했다.[16]

오키나와 전투에서 야하라는 지구전을 제안했다. 대본영의 잘못된 판단으로 방위 전략을 재검토해야 했고, 본토 결전을 연기하기 위한 시간 벌이의 버림돌이 되도록 하라는 대본영의 요청에 대해 지구전으로의 방침 전환이 가장 견실한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야하라는 끈기 있는 지구전으로 미국의 여론을 염전 기분으로 몰아가 일본에 유리하게 만들려는 생각이 있었다.[20]

야하라는 견고한 동굴 진지를 구축하여 철저한 전략적 지구전을 펼치는 "누르기 전법"만이 대항 수단이라고 생각하여 제32군에게 철저한 진지 구축을 명령했다. 오키나와의 지반은 굳은 산호초로 되어 있어 함포 사격이나 대형 폭탄에 견딜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그 진지를 활용하여 미군을 유인한 후 격파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미군은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 없이 가데나에 상륙했지만, 이후 일본군의 지구 전략에 큰 희생을 강요받았다. 대본영의 공격 재촉으로 지구전에서 야간 돌격으로 전환되기도 했으나, 야하라가 예상한 대로 큰 손해를 입었다. 그 후 우시지마 중장은 야하라의 전략을 채택하여 철저한 방어전을 통해 가즈 고지 방어전, 슈가로프 전투, 슈리성 공방전에서 선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손실도 커서 야하라는 전군을 오키나와 남단부까지 철수시켜 방어전의 지속을 제안했고, 우시지마도 채택하여 마부니 고지로 철수했다. 이후에도 지구전으로 미군에게 막대한 사상자를 냈고, 최고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 주니어 중장을 전사시키는 등 큰 손해를 입혔다.[23]

야하라는 자신이 거주했던 미국을 잘 이해한 후 작전 계획을 세웠다. 미국군은 야하라의 작전 계획을 높이 평가했다.[20][25]

3. 3. 탈출과 포로 생활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과 조(趙) 중장이 마부니 동굴에서 자결을 결심했을 때, 야하라는 함께 할복할 수 있도록 허락을 요청했지만, 우시지마는 "당신이 죽으면 오키나와 전투의 진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을 것입니다. 일시적인 수치를 견뎌내십시오. 이것은 당신의 군 사령관의 명령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1] 조는 야하라에게 미군 전선을 통과하여 오키나와 북부로 가서 도쿄에 일어난 일을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여행 경비로 500JPY을 주었다.[2]

두 장군이 자결한 후, 야하라는 다른 몇몇 참모 장교들과 함께 입구를 돌로 막은 작은 동굴에 숨어 탈출할 기회를 기다렸다. 민간인으로 변장한 그는 마후니 언덕을 내려가 결국 다른 두 명의 군인과 합류했고, 그들 셋은 약 50명의 민간인이 피신해 있는 큰 그룹에 합류했다. 이 그룹은 미국인에게 발견되었고 동굴에 대한 공습 이후 그룹을 설득하여 항복시켰다. 야하라는 그들을 이끌고 나왔고, 실수로 일본어 영어 교사로 판단되었다. 그는 구금 캠프로 이송되기 전에 치넨 반도의 한 집으로 이송되어 다른 30명의 민간 난민과 함께 생활했다. 그는 나중에 작업반에 합류했고, 결국 32군 사령부에서 탈출한 지 3주 후에 그의 진정한 신분이 미군에 의해 밝혀졌다. 이제 섬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계급의 일본군 장교로서 특권을 가진 포로가 된 그는 제10군 사령부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았다.

1945년 6월 18일, 오키나와 본섬 남부 마부니의 동굴로 몰린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은 자신의 최후를 깨닫고 야하라 등 참모들에게 일본 본토로 귀환하여 전훈을 전파하는 것과 미군 후방에 잠입하여 유격전을 벌이는 임무를 부여하고, 자신과 조는 자결을 결심했다. 야하라는 다른 2명의 참모와 일본 본토로 귀환하는 임무를 명령받았다. 6월 23일, 우시지마와 조는 자결하고 제32군은 실질적으로 조직적인 저항을 종료했다.[13]

야하라는 우시지마와 조의 자결을 지켜본 후, 우시지마의 명령대로 일본 본토로의 전훈 전달을 위해 민간인으로 위장하여 탈출을 시도했지만, 6월 25일에 민간인과 패잔병 수십 명이 갇힌 구시토의 동굴에 들어간 곳에서 미군에게 포위되었다. 2년간의 유학 경험으로 미국인을 잘 알고 있는 야하라는 미군이 민간인을 살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옥쇄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패잔병들을 설득하여 영어로 미군에 투항을 신청하여 민간인 수십 명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14]

미군 수용소에 들어가서도 가명을 쓰고 신분을 교사로 위장하여 민간인으로서 작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7월 23일에 오키나와 현청의 전 과장으로, 미군의 관리관을 하고 있던 일본인 남성으로부터 조사를 받던 중에 신원이 드러났다. 야하라는 그대로 미군에 인도되었고, 그 후에는 미군으로부터 심문을 받았지만, 주거지로 단독 주택의 농가를 제공받는 등 고급 장교의 포로로 취급받았고, 일본 태생으로 일본어에 능통한 미군 연락 장교를 배정받았으며, 전 일본군 병사의 당번병도 붙었다. 야하라는 미군의 기관지 『버크너』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고, 『버크너』 지면에서 일본에 대한 원자 폭탄 투하와 포츠담 선언 수락을 알게 되었다. 그 후에도 미 육군 제10군의 참모장 등과 오키나와 전투에 대해 논의하면서 포로로서 12월 30일까지 지낸 후, 1946년 1월에 복원했다.[16]

4. 전후 활동 및 평가

"조용하고 수수하지만, 예리한 지성과 뛰어난 판단력을 갖춘 야하라 히로미치 대령은 모든 보고에 따르면 매우 유능한 장교이며, 일부 포로들은 그를 제32군 '두뇌'라고 묘사했다."[3]

4. 1. 전후 활동

야하라는 전쟁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기록을 썼다. 1973년 일본에서 처음 출판된 그의 저서 《오키나와 결전》(沖縄決戦)은 오키나와 침공 당시 일본군 작전을 지휘했던 그의 직접적인 경험을 기록한 것이다.

내지로 복귀 후 고향으로 돌아가 친아버지의 농지를 빌려 농부로 일했지만, 군이 소멸하여 현금 수입이 끊기면서 곤궁에 처했을 때, 군의 잔무 정리국에서 연락이 와서 잠시나마 직장을 얻어 혼자 상경했다. 그러나 1947년에 복귀가 일단락되자 다시 직장을 잃게 되었고, 장인인 시미즈 기주 전 중장에게도 취업 알선을 의뢰했지만, 진척이 없었다. 여기서 야하라는 직업 군인으로서 가족을 돌보지 않았던 반생을 되돌아보고, 앞으로는 가족과 함께 생활하겠다고 생각하여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에서 농사일 곁들여 옷감 행상을 시작하여 극빈 속에서도 어떻게든 현금 수입의 길을 찾았다.[17] 1950년에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자, 구 일본군 고급 군인이었던 야하라에게도 입대 권유가 있었지만 "다시는 타인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며 거절했다. 이후, 고도 경제 성장이 시작되었지만, 야하라 가문은 그 혜택을 별로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에게 고등 교육을 받게 하려고 교육비에는 아낌없이 투자했다.[17]

이후 자녀들이 독립하자, 행상을 그만두고 장남과 동거하며 비로소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본인은 85세까지 살 것이라고 말했지만, 1981년 5월 7일에 78세로 영면했다. 아침에 아내가 상태를 보러 갔을 때, 이불 속에서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야하라는 경찰 예비대의 권유를 거절한 후에도, 구 일본군들과 거리를 두었으며, 유일하게 육사 동기생 모임에 참석했을 뿐이었다. 또한, 구 일본군 중에서도 스스로 미군 포로가 되어 생환한 야하라를 "야하라는 군인의 수치다"라고 백안시하는 사람도 많아,[18] 장례식에 참례한 구 일본군 관계자는 단 5명뿐이었다고 한다.[19]

4. 2.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평가

야하라 히로미치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제32군 참모로서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 중장을 보좌하여 지구전을 제안했다. 처음에는 항공 지원 하에 수변 격멸전을 중시했지만, 대본영의 잘못된 판단으로 방위 전략을 재검토해야 했다. 핵심 전력이었던 제9사단이 타이완으로 빠지고, 약속된 보충 사단도 오지 않아, 본토 결전을 늦추기 위한 시간 벌이의 '버림돌'이 되라는 대본영의 요청에 대해, 지구전으로의 방침 전환이 가장 확실한 작전이라고 판단했다.[20]

야하라는 단순히 병력이 부족해서 지구전을 제안한 것이 아니었다. 끈질긴 지구전으로 미국 측에 장기간 출혈을 강요하면, 미국 여론이 전쟁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 일본에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20] 그는 일본 유도가가 미국의 권투 선수를 누르기로 이긴 이종 격투기 경기를 떠올리며, 압도적인 화력을 가진 미군을 상대로는 견고한 동굴 진지를 구축하고 철저한 지구전을 펼치는 "누르기 전법"만이 유일한 대항 수단이라고 판단했다.[21]

야하라는 일본군 참모들이 흔히 저지르는 자군 전력 과대평가를 하지 않았다. 제32군의 전력을 2.5개 사단으로, 미군은 6~10개 사단(실제로는 8개 사단)으로 정확히 예상했고, 화력 차이와 함포 사격, 공습을 포함하면 전력 차이가 30배 이상이라고 분석했다. 이 전력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오키나와의 자연 지형을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21]

오키나와의 지반은 단단한 산호초가 많아 굴착을 통해 함포 사격과 대형 폭탄에도 견딜 수 있는 진지를 구축할 수 있었다. 야하라의 지휘 아래 지형에 맞춘 동굴 진지, 포상, 참호가 만들어졌고, 지하 터널로 연결되었으며 교묘하게 위장되었다. 산비탈에는 전면뿐 아니라 후방 사면에도 진지를 만들어(반사면 진지, reverse slope defense) 미군의 포격에 견딜 수 있게 했다.[22] 일본군은 이 진지를 활용해 미군을 유인한 후, 기관총 등으로 공격하고, 전차와 보병을 분단시킨 뒤 대전차포, 지뢰, 육탄 공격 등으로 격파했다.

미군은 가데나에 무혈 상륙했지만, 이후 일본군의 지구 전략에 큰 희생을 치르게 된다. 야하라의 전략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대본영의 공격 재촉과 나가이소 참모장의 경직된 사고로 인해, 야하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구전에서 무모한 야간 돌격으로 전환되었다. 예상대로 전선의 병력은 큰 손해를 입었고, 포병 부대의 탄약은 거의 소진되었다. 이후 우시지마 중장은 야하라의 전략을 전면 채택, 철저한 방어전을 통해 가즈 고지 방어전, 슈가로프 전투, 슈리성 공방전에서 선전했다. 미국의 언론은 미군의 큰 손실과 느린 진격 속도에 미군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 주니어 중장을 비난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손실도 컸고, 야하라는 미군을 더 오래 묶어두기 위해 전군을 오키나와 남단부까지 철수시켜 방어전을 계속할 것을 제안했다. 우시지마도 이를 채택, 우천을 이용해 마부니 고지로 철수했다. 이후에도 지구전으로 미군에 막대한 사상자를 냈고, 최고 사령관 사이먼 B. 버크너 주니어 중장을 전사시키는 등 큰 손해를 입혀 1개월 동안 미군을 묶어두었다.[23] 버크너 사령관의 전사는 미군 역사상 사령관급 최초의 전사였고, 미국 국내 여론은 술렁였다.

야하라는 만약 제9사단이 빠지지 않고 자신이 예상한 대로 철저한 지구전을 펼쳤다면, 종전까지 슈리에서 버틸 수 있었고 우시지마 사령관도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상했다.[24]

야하라 자신은 미국을 잘 이해한 후 작전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야하라를 평가한 것은 적수인 미군이었다. 미군은 야하라의 작전 계획을 높이 평가했다.[20][25] 작가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패전 후 포로 수용소에서 미군 장병들이 "오키나와의 일본군 작전은 스마트했다", "저렇게 철저하게 당했더라면 질 뻔했다"고 평가했다고 기록했다.[20][26] 미 육군 전사 "최후의 전투"에서도 "오키나와에서의 일본군은, 정말 훌륭한 계획과 훌륭한 책략으로, 우리의 진공에 맞섰다"고 언급하고 있다.

지구전을 동반한 오키나와 전투로 많은 현민이 희생되었다. 특히, 일본군이 전투력 대부분을 잃은 후의 슈리 포기・남부(마부니 고지) 철수에 의한 지구 작전 지속은, "한 뼘의 땅이라도 남은 한 싸우라"는 대본영의 방침을 따르는 것이었다. 미군으로부터는 "훌륭하게 슈리를 철수하고, 때를 놓치지 않고 남부에 새로운 전선을 확립했다", "미군이 전력을 다해 집중 공격을 가해도, 전투를 끝내기까지 3주 이상을 요했다"고 높이 평가받았지만,[23] 오키나와 현민의 생명 보호를 중시하는 시마다 에이 오키나와 현 지사 등의 반대 의견을 묵살하고, 군의 승리를 믿고 남부에 피난해 있던 오키나와 현민의 막대한 피해를 초래한 점에서 오늘날에도 비판이 있다.[27] 야하라 자신도 자신의 작전으로 인한 오키나와 현 주민 희생에 대한 책임을 강하게 느꼈고, 전후에 오키나와를 방문하지 않았다.[20]

4. 3. 저술 활동

야하라는 전쟁 이후 오키나와 전투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1973년 일본에서 처음 출판된 그의 저서 《오키나와 결전》(沖縄決戦|오키나와 결전일본어)은 오키나와 침공 당시 일본군 작전을 지휘했던 그의 직접적인 경험을 기록한 것이다.[1]

5. 연표

연도내용
1902년돗토리현 출생. 소규모 지주 아들.
1923년육군사관학교 졸업. 제54보병연대에 배속.
1925년제63보병연대에 배속.
1926년육군대학교 입학.
1929년육군대학교 졸업. 제63연대로 복귀.
1930년육군성 인사부에 배속.
1933년교환 장교로 미국에 파견. 델라웨어주 윌밍턴,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워싱턴 D.C.를 여행.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포트 몰트리에서 6개월 동안 제8보병연대에 배속.
1935년육군성 인사부 복귀.
1937년육군대학교 교관(전략 및 전술)으로 임명. 2차 육군(북중국 파견군) 참모 장교로 중국에서 3개월 근무.
1938년육군대학교 교관으로 복귀.
1940년9월: 타이, 버마, 말라야에 일본 첩보원으로 배속. 11월~12월: 동남아시아 전문가로 참모 본부에 보고.
1941년7월: 방콕에 부무관으로 부임. 11월 15일: 제15군 참모(사이공)로 비밀 명령을 받음. 방콕에 남아 타이의 평화적 점령을 위한 협상에 참여. 그 후 제15군과 함께 버마 작전에 참여.
병에 걸려 일본으로 귀국. 다시 육군대학교 교관으로 배속.
1944년3월 16일: 오키나와섬에 제국 참모의 고문으로 배속. 곧 제32군 사령부(1944년 3월 22일)가 형성되어 선임 참모 장교로 임명.
1945년7월 15일: 야키부 민간인 수용소에서 미군에 포로로 잡힘.
1981년사망.


6. 가족

야하라 히로미치|야하라 히로미치일본어의 아내는 시미즈 요시시게 육군 중장의 딸 마사코이며, 슬하에 6명의 자녀를 두었다.

7. 야하라 히로미치를 연기한 배우


  • 나카다이 타츠야 - 격동의 쇼와사 오키나와 결전(1971년)
  • 미즈하시 겐지 - 섬 지킴이의 탑(2022년)

참조

[1] 서적 The Rising Sun: The Decline and Fall of the Japanese Empire 1936–1945 Random House 1970
[2] 서적 Bloody Okinawa Hachette 2020
[3] 보고서 U.S. Tenth Army Interrogation Report #28 1945-08-06
[4] 서적 Okinawa The Last Battle 光人社 2006
[5] 서적 沖縄悲遇の作戦 異端の参謀八原博通
[6] 서적 沖縄悲遇の作戦 異端の参謀八原博通
[7] 서적 沖縄悲遇の作戦 異端の参謀八原博通
[8] 서적 沖縄悲遇の作戦 異端の参謀八原博通
[9] 서적 沖縄悲遇の作戦 異端の参謀八原博通
[10] 서적 沖縄悲遇の作戦 異端の参謀八原博通
[11] 서적 沖縄悲遇の作戦 異端の参謀八原博通
[12] 서적 沖縄決戦 - 高級参謀 の手記 読売新聞社 1972
[13] 서적 沖縄決戦 - 高級参謀 の手記 読売新聞社 1972
[14] 서적 沖縄決戦 - 高級参謀 の手記 読売新聞社 1972
[15] 서적 沖縄決戦 - 高級参謀 の手記 読売新聞社 1972
[16] 서적 沖縄決戦 - 高級参謀 の手記 読売新聞社 1972
[17] 서적 沖縄悲遇の作戦 異端の参謀八原博通
[18] 서적 沖縄悲遇の作戦 異端の参謀八原博通
[19] 서적 日本陸軍指揮官列伝 宝島社 2009
[20] 서적 沖縄悲遇の作戦 異端の参謀八原博通
[21] 서적 沖縄決戦 - 高級参謀 の手記 読売新聞社 1972
[22] 서적 Okinawa The Last Battle 光人社 2006
[23] 서적 米陸軍省戦史局 2006
[24] 서적 沖縄決戦 - 高級参謀 の手記 読売新聞社 1972
[25] 서적 帝国陸軍の最後 光人社NF文庫
[26] 서적 一下級将校の見た帝国陸軍
[27] 웹사이트 沖縄戦の実相 https://www.city.oki[...] 沖縄市役所 平和・男女共同課 2020-01-2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