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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이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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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 이사무는 일본 제국의 군인으로,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동군에서 정치 군인들의 영향을 받아 정치화되었다. 그는 사쿠라회 결성에 참여하여 국가주의적 전체주의 정부 수립을 시도했으며,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특히 난징 대학살 당시 처형을 명령했다는 의혹과 오키나와 전투에서 제32군 참모장으로 미군에 대한 공격적인 전략을 펼친 것이 비판받는다. 그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자결했으며, 사후 고향에 묘비와 흉상이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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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이사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 이사무
출생일1895년 1월 19일
출생지후쿠오카, 일본
사망일1945년 6월 22일
사망지오키나와, 일본
소속대일본제국 육군
복무 기간1913년–1945년
최종 계급육군 중장
경력
지휘제10보병사단
참전
주요 참전 전투/전쟁중일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2. 초기 생애 및 교육

2. 1. 출생 및 가계

조 이사무는 1896년 1월 26일 일본 후쿠오카현 가스야군 가스야정에서 농업가인 나가소 세이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10] 조씨 집안은 가가번의 가로(가가 팔가 중 하나)로 메이지 유신 이후 화족이 되어 남작 작위를 받았다는 주장이 있으나, 일본 중세사를 전공하는 역사가 혼고 가즈토는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11]

2. 2. 군사 교육

3. 군 경력 및 정치 활동

조 이사무는 후쿠오카현 출신으로, 1916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28기)를 졸업하고 12월에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병 제56연대에 배속되었다. 육사 동기로는 시라가네 시게지, 모리 타케시, 나카니시 료스케, 곤도 신파치, 미야자키 슈이치, 이치키 키요나오 등이 있다.

첫 부임지는 관동군이었는데, 이곳은 일본 내 정치에 관심이 많은 정치 군인들이 많아 조 이사무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정치화되었다. 1928년 일본 육군대학 (40기)을 졸업한 후, 1929년 1월 보병 제48연대 중대장을 거쳐 참모본부 부속 근무(지나과)를 맡았다.

1930년 하시모토 긴고로 등과 함께 군내 비밀결사인 사쿠라회를 결성하여, 민주제를 부정하고 국가주의적인 전체주의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 1931년 3월 사건과 10월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으나, 가벼운 징계만을 받고 계속 현역으로 근무하였다. 황도파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인 2.26 사건과 달리, 그는 가벼운 징계만으로 현역에 남을 수 있었다.

1937년 8월,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조 이사무는 상하이 파견군 참모로 참전했다. 중지나 방면군이 편성되자 동 방면군 참모를 겸임했다. 같은 해 12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지휘 하 정보 주임 참모로서 난징 공략전에 참가했다. 난징성 밖의 양쯔강 하항 지역에 난민 약 13만 명이 강 건너로 가지 못하고 남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해치워 버려"라고 처형을 명령했고, 이를 안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 마츠이 이와네 대장에게 질책을 받아 지시를 취소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확인 전화에서 다시 "해치워 버려"라고 명령했다는 일화가 있다. 난징 대학살 당시 그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친왕의 부관이었으며, 난징 대학살 명령에 연루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친왕의 명령을 따랐는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행동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조 이사무는 1938년 조선군 예하 보병 제74연대장이 되어 장고봉 사건에 참전했다. 1939년에는 제26사단 참모장을 맡았고, 1940년에는 대만군 사령부 부속, 인도차이나 파견군 참모장을 거쳐 제25군 참모 부장을 역임했다. 1941년에는 일본 육군성 군무국 부속을 거쳐 남방군 사령부 부속(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기관장)이 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3. 1. 초기 군 경력

조 이사무는 후쿠오카현 출신으로, 1916년 5월 일본 육군사관학교 (28기)를 졸업하고 12월에 육군 보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병 제56연대에 배속되었다. 육사 동기로는 시라가네 시게지, 모리 타케시, 나카니시 료스케, 곤도 신파치, 미야자키 슈이치, 이치키 키요나오 등이 있다.

첫 부임지는 관동군이었는데, 이곳은 일본 내 정치에 관심이 많은 정치 군인들이 많아 조 이사무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정치화되었다.[1] 1928년 일본 육군대학 (40기)을 졸업한 후, 1929년 1월 보병 제48연대 중대장을 거쳐 참모본부 부속 근무(지나과)를 맡았다.

3. 2. 사쿠라회 결성 및 쿠데타 가담

조 이사무는 후쿠오카 출신으로 1916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28년 일본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1] 관동군의 영향을 받아 정치화되었으며, 현역 군인의 신분으로 여러 정치적인 일에 간여하였다.[1]

1930년 하시모토 긴고로 등과 함께 군내 비밀결사인 사쿠라회를 결성하여, 민주제를 부정하고 국가주의적인 전체주의 정부 수립을 기도했다.[1] 1931년 3월 사건과 10월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었으나, 가벼운 징계만을 받고 계속 현역으로 근무하였다.[1] 황도파 장교들에 의한 쿠데타인 2.26 사건과 달리, 그는 가벼운 징계만으로 현역에 남을 수 있었다.

3. 3. 중일 전쟁 참전

1937년 8월,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하자, 조 이사무는 상하이 파견군 참모로 참전했다.[8] 중지나 방면군이 편성되자 동 방면군 참모를 겸임했다. 같은 해 12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왕 지휘 하 정보 주임 참모로서 난징 공략전에 참가했다.[8] 난징성 밖의 양쯔강 하항 지역에 난민 약 13만 명이 강 건너로 가지 못하고 남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해치워 버려"라고 처형을 명령했고, 이를 안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 마츠이 이와네 대장에게 질책을 받아 지시를 취소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확인 전화에서 다시 "해치워 버려"라고 명령했다는 일화가 있다.[8] 난징 대학살 당시 그는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 친왕의 부관이었으며, 난징 대학살 명령에 연루된 것으로 생각되지만, 친왕의 명령을 따랐는지 아니면 독자적으로 행동했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3]

3. 4. 태평양 전쟁 참전

조 이사무는 1938년 조선군 예하 보병 제74연대장이 되어 장고봉 사건에 참전했다. 1939년에는 제26사단 참모장을 맡았고, 1940년에는 대만군 사령부 부속, 인도차이나 파견군 참모장을 거쳐 제25군 참모 부장을 역임했다. 1941년에는 일본 육군성 군무국 부속을 거쳐 남방군 사령부 부속(프랑스령 인도차이나 기관장)이 되어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다.

4. 오키나와 전투

1944년 7월, 조 이사무는 오키나와 방위를 담당하는 제32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1945년 3월에는 중장으로 승진하였다.[5] 초기 제32군은 슈리산 근처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지구전을 펼치려 했으나, 조 이사무는 미군에 대한 강력한 공세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 공세는 미군의 반격으로 분쇄되어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결과적으로 제32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5] 그는 슈리성 주변에 정교한 지하 요새를 설계했지만, 소극적인 방어보다는 미국의 침공에 대한 매우 공격적인 대응을 선호했다. 그는 우시지마 미쓰루 장군을 설득하여 1945년 5월 5일 참혹한 반격 작전을 감행하도록 했다.[5]

6월 중순까지 제32군은 사실상 구니시 능선 아래의 요새 하나와 언덕 89 내부의 사령부 두 곳을 점령하는 수준으로 축소되었다.[5]

조 이사무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제32군 참모장으로 슈리성 주변에 정교한 지하 요새를 설계했다.[5] 1945년 6월 23일(22일이라는 설도 있음) 오키나와섬 남부 마부니 언덕의 제32군 사령부 동굴에서 우시지마 미쓰루 사령관과 함께 자결했다.[5]

조 이사무와 우시지마 미쓰루는 세푸쿠(할복)를 결심하고, 사령부가 있는 동굴에서 연회를 열었다.[5] 6월 22일 새벽, 조 이사무는 "길이 어두울 수 있다"며 먼저 가겠다고 자원했지만, 우시지마가 자신이 먼저 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바깥쪽 벼랑에 퀼트 위에 흰 천이 놓여 있었고, 조수가 건네준 칼을 받은 우시지마는 함성을 지르며 복부에 깊은 수직 칼집을 냈고, 사카구치 대위가 칼로 그의 머리를 베었다. 조 이사무는 우시지마를 따라갔고, 두 사람의 시신은 세 명의 부관에 의해 얕은 무덤에 매장되었다.[5] 그들의 시신은 1945년 6월 27일, 그들이 죽은 동굴 근처에서 미군의 감독하에 매장되었다.[6]

조 이사무의 기모노 뒤에는 그가 지은 시가 있었다.

"용감하게 국가에 헌신했네.
충성심으로 내 삶을 바치리."[5]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는 자결하려는 상관으로부터 "야하라, 후학을 위해 나의 마지막을 보라"는 말을 듣고 자결의 전 과정을 지켜봤다고 말했다. (단, 다른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러한 발언은 없었다고 한다.)[9]

오타 마사히데 오키나와현 지사는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한 미군 문서와 조 이사무로 추정되는 유해가 찍힌 사진을 근거로, 할복 자결이 아닌 청산가리에 의한 복독 자살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청산가리는 각 장병에게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결은 자결 또는 권총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9]

6월 25일, 오키나와 헌병대 부관 하기노우치 중위는 미군의 요청에 의해, 마부니의 군 사령부 참호에서 우시지마 군 사령관과 장 참모장의 유해를 확인했다[9]

4. 1. 제32군 참모장 임명

1944년 7월, 조 이사무는 오키나와 방위를 담당하는 제32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3월에는 육군 중장으로 진급했다. 제32군은 슈리산 근처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지구전을 펼치려 했으나, 조 이사무는 미군에 대한 강력한 공세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는 미군의 반격으로 분쇄되어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4. 2. 전투 지휘 및 전략

1944년 7월, 조 이사무는 오키나와 방위를 담당한 제32군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1945년 3월에는 중장으로 승진하였다.[5] 초기 제32군은 슈리산 근처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지구전을 펼치려 했으나, 조 이사무는 미군에 대한 강력한 공세를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그러나 이 공세는 미군의 반격으로 분쇄되어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고, 결과적으로 제32군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5] 그는 슈리성 주변에 정교한 지하 요새를 설계했지만, 소극적인 방어보다는 미국의 침공에 대한 매우 공격적인 대응을 선호했다. 그는 우시지마 미쓰루 장군을 설득하여 1945년 5월 5일 참혹한 반격 작전을 감행하도록 했다.[5]

4. 3. 최후

조 이사무는 오키나와 전투에서 제32군 참모장으로 슈리성 주변에 정교한 지하 요새를 설계했다.[5] 1945년 6월 23일(22일이라는 설도 있음) 오키나와섬 남부 마부니 언덕의 제32군 사령부 동굴에서 우시지마 미쓰루 사령관과 함께 자결했다.[5]

조 이사무와 우시지마 미쓰루는 세푸쿠(할복)를 결심하고, 사령부가 있는 동굴에서 연회를 열었다.[5] 6월 22일 새벽, 조 이사무는 "길이 어두울 수 있다"며 먼저 가겠다고 자원했지만, 우시지마가 자신이 먼저 가야 한다고 고집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바깥쪽 벼랑에 퀼트 위에 흰 천이 놓여 있었고, 조수가 건네준 칼을 받은 우시지마는 함성을 지르며 복부에 깊은 수직 칼집을 냈고, 사카구치 대위가 칼로 그의 머리를 베었다. 조 이사무는 우시지마를 따라갔고, 두 사람의 시신은 세 명의 부관에 의해 얕은 무덤에 매장되었다.[5] 그들의 시신은 1945년 6월 27일, 그들이 죽은 동굴 근처에서 미군의 감독하에 매장되었다.[6]

조 이사무의 기모노 뒤에는 그가 지은 시가 있었다.

"용감하게 국가에 헌신했네.
충성심으로 내 삶을 바치리."[5]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는 자결하려는 상관으로부터 "야하라, 후학을 위해 나의 마지막을 보라"는 말을 듣고 자결의 전 과정을 지켜봤다고 말했다. (단, 다른 목격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러한 발언은 없었다고 한다.)[9]

오타 마사히데 오키나와현 지사는 미국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한 미군 문서와 조 이사무로 추정되는 유해가 찍힌 사진을 근거로, 할복 자결이 아닌 청산가리에 의한 복독 자살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청산가리는 각 장병에게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결은 자결 또는 권총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9]

6월 25일, 오키나와 헌병대 부관 하기노우치 중위는 미군의 요청에 의해, 마부니의 군 사령부 참호에서 우시지마 군 사령관과 장 참모장의 유해를 확인했다[9]

5. 성격 및 일화

조 이사무는 참모 경험이 풍부하면서도 호쾌한 성격의 저돌적인 군인으로, 전시 국제법(비전투원의 보호)을 경시했다.[12] 난징 공략전 직후, 피겨 후지타 이사무에게 "난징성 한쪽에서 양쯔강을 따라 여자·아이들을 포함한 시민의 대군이 파도처럼 도망쳐간다", "그 안에 다수의 중국군이 섞여 있다", "그래서 기관총을 갖춘 병사에게 쏘라고 명령했지만, 병사는 망설여서 쏘지 않았다", "그래서 격노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렇게 하는 거다'라며 군도로 그 병사를 덮어 베어 죽였다", "놀란 다른 병사들이 일제히 기관총을 발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고, 후지타는 '나가, 그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말아라'라고 입단속했다는 이야기가 도쿠가와 요시치카의 만년 회상록에 나온다.[14]

몽유병이 있어, 잠을 자면서 "엄마 아파요!"라며 어린 시절 친모에게 매를 맞는 꿈을 꾸며 외치거나, "돌격! 돌격!!" "이 멍청이!"라고 큰 소리로 고함치기도 하여, 참모들로부터 "자나 깨나 시끄러운 사람"이라고 뒷말을 들었다고 한다.

1944년, 오키나와 현에 배치된 병사에 의한 강간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현 당국의 항의에 대해 "이러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위안소가 없기 때문이다"라며 위안소 설치를 제안했다.[16]

제32군 사령부·관리부 부속 위병 사령의 하마카와 마사야 군조(오키나와 출신)의 증언에 따르면, 1945년 6월 21일, 미군이 다가오는 마부니의 사령부 참호에서, 옆에 있는 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에게 "아아- 각하,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정말 잘 해줬다. 일본국의 어느 곳이 전장이 되더라도, 이만큼 주민들이 협력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헤야 섬에 아마노이와토가 있다고 하는데, 이 오키나와야말로, 바로 다카마가하라의 나라다. 야마토의 나라 발상지에서 생애를 마치다니 행복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7]

6. 논란 및 비판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이사무는 상하이 파견군 휘하의 제74연대의 연대장을 맡아 참전하였다. 그는 부사령관을 맡고 있던 아사카 야스히코 중장의 부관으로서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아사카가 직접 그러한 명령을 내렸는지, 혹은 조가 상관의 이름을 빌려 명령을 내렸는지는 논란이 있다. 이러한 독단적인 행동으로 그는 사령관인 마쓰이 이와네 대장에게 크게 질책을 들었다.

이후 1939~1940년에는 조선 주둔의 26사단의 참모장에 임명되어 두만강 근처의 국경 부근에서 소련군과 대결한 장고봉 사건에 참전하였다. 이후 타이완 군 사령부를 거쳐 1940~1941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하기 위한 인도차이나 원정군의 참모장을 맡았다.

이후 일본에 돌아와 1941년 소장으로 진급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전야에 일본 육군성의 군무국에서 동남아 침공작전을 입안하였다. 개전과 함께 남방총군과 함께 동남아시아로 진격하여 필리핀 작전에 참가하였다.

1942~1944년 그는 다시 만주로 돌아가 제10사단의 사단장이 되었고, 이후 관동군 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제1기계화여단의 여단장이 되었다.


  • 참모 경험이 풍부하면서도 호쾌한 성격의 저돌적인 군인으로, 전시 국제법(비전투원의 보호)을 경시했다[12]
  • 위 난징에서의 약 13만 명의 난민 처형 명령으로 생각되지만, 다나카 류키치는 그의 저서에서 나가유 자신이 "일본군이 전진했을 때 약 30만 명의 중국군이 항복했기 때문에 처형했다", "이것으로 통주 사건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13].(사령관 마쓰이 이와네는 난징 도시 포위 완료 후, 휴양지로 알려진 탕수진에 머물렀고, 나가유도 거기에 있었다. 탕수진은 난징 행정 구역 안이지만 난징 도시보다 진강시에 가까운 곳에 있다. 나가유 자신이 진강에 갔을 때, 약 13만 명의 병사·시민 등을 처형한 것은 다나카의 기억 착오일 수도 있다.)
  •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 제19대 당주인 도쿠가와 요시치카의 만년 회상록에, 난징 공략전 직후 나가유가 후지타 이사무에게 말한 이야기로 "난징성 한쪽에서 양쯔강을 따라 여자·아이들을 포함한 시민의 대군이 파도처럼 도망쳐간다", "그 안에 다수의 중국군이 섞여 있다", "그래서 기관총을 갖춘 병사에게 쏘라고 명령했지만, 병사는 망설여서 쏘지 않았다", "그래서 격노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렇게 하는 거다'라며 군도로 그 병사를 덮어 베어 죽였다", "놀란 다른 병사들이 일제히 기관총을 발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다"고 있으며, "나가(나가유)는 자랑스럽게 이 이야기를 후지타에게 했고, 후지타는 '나가, 그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하지 말아라'라고 입단속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14]
  • 오키나와 전투에서, 제32군 고급 참모인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가 입안하고, 군 사령관의 결재를 얻었던 지구전에 철저히 임하는 방침을 전환하여, 가데나 및 요미탄 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산발적인 돌격을 반복 실행하게 하여, 제32군의 전력을 크게 깎는 결과를 낳았다[15]
  • 몽유병이 있었다. 자면서 "엄마 아파요!"라고 어린 시절의 친모에게 매를 맞는 꿈을 꾸며 외치거나, "돌격! 돌격!!" "이 멍청이!"라고 큰 소리로 고함치기도 하여, 참모들로부터 "자나 깨나 시끄러운 사람"이라고 뒷말을 들었다고 한다(나가의 이 버릇은 영화 『격동의 쇼와사 오키나와 결전』에서도 묘사되어 있다).
  • 1944년, 오키나와현에 배치된 병사에 의한 강간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현 당국의 항의에 대해, 제32군 참모장인 나가유는 "이러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위안소가 없기 때문이다"라며, 위안소 설치를 제안했다[16]。하지만 오키나와 현 지사 이즈미 모리키가 "여기는 만주나 남방이 아니다. 적어도 황토의 일부이다. 황토 안에 그런 시설을 만드는 것은 할 수 없다"라고 거부한 것이, 군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로 간주되어 이즈미가 오키나와 전투 직전에 전임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16]。그러나 실제 오키나와 전투 직전의 전임은 이즈미 본인의 전임 공작에 의한 것이다. 이즈미는 오키나와 현 지사의 일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으며, 재임 중 약 1년 반 초의 약 3분의 1의 기간을 출장 등의 명목으로 오키나와를 비웠다. 또한, 대장성 간부를 맡았던 친형 등 친족 및 가까운 지인 간부들에게 은밀히 전임 공작을 의뢰했으며, 오키나와 전투가 시작되기 2개월 전인 1945년 1월에 가가와 현 지사로 이동했다. 이 때문에 "목숨을 아끼려고 현민을 버리고 도망간 비겁자"라고 멸시받기도 한다.
  • 제32군 사령부·관리부 부속 위병 사령의 하마카와 마사야 군조(오키나와 출신)의 증언에 따르면, 6월 21일, 미군이 다가오는 마부니의 사령부 참호에서, 옆에 있는 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쓰루에게 말을 건 나가유는, "아아- 각하, 「오키나와의 주민들은 정말 잘 해줬다. 일본국의 어느 곳이 전장이 되더라도, 이만큼 주민들이 협력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헤야섬아마노이와토가 있다고 하는데, 이 오키나와야말로, 바로 다카마가하라의 나라다. 야마토의 나라 발상지에서 생애를 마치다니 행복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7]

6. 1. 난징 대학살 관여

조 이사무는 중일 전쟁 발발 직후 상하이 파견군 휘하 제74연대장으로 참전, 아사카 야스히코 중장의 부관으로서 포로 처형 명령을 내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12] 아사카가 직접 명령을 내렸는지, 아니면 조 이사무가 상관의 이름을 빌려 명령을 내렸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12] 다나카 류키치는 그의 저서에서 조 이사무가 "일본군이 전진했을 때 약 30만 명의 중국군이 항복했기 때문에 처형했다", "이것으로 통주 사건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13]

도쿠가와 요시치카의 만년 회상록에는 난징 공략전 직후 조 이사무가 후지타 이사무에게 "난징성 한쪽에서 양쯔강을 따라 여자·아이들을 포함한 시민의 대군이 파도처럼 도망쳐간다", "그 안에 다수의 중국군이 섞여 있다", "그래서 기관총을 갖춘 병사에게 쏘라고 명령했지만, 병사는 망설여서 쏘지 않았다", "그래서 격노하여 '사람을 죽이는 것은 이렇게 하는 거다'라며 군도로 그 병사를 덮어 베어 죽였다", "놀란 다른 병사들이 일제히 기관총을 발사하여 대살육이 벌어졌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는 내용이 나온다.[14]

6. 2. 오키나와 전투 지휘 관련

오키나와 전투에서 제32군 고급 참모인 야하라 히로미치 대좌가 입안하고 군 사령관의 결재를 얻었던 지구전에 철저히 임하는 방침을 전환하고, 가데나 및 요미탄 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산발적인 돌격을 반복 실행하게 하여, 제32군의 전력을 크게 소모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15]

1944년, 오키나와 현에 배치된 병사에 의한 강간 사건이 발생했을 때, 현 당국의 항의에 대해 조 이사무는 "이러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은 위안소가 없기 때문이다"라며 위안소 설치를 제안했다.[16] 하지만 오키나와 현 지사 이즈미 모리키가 "여기는 만주나 남방이 아니다. 적어도 황토의 일부이다. 황토 안에 그런 시설을 만드는 것은 할 수 없다"라고 거부한 것이, 군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로 간주되어 이즈미가 오키나와 전투 직전에 전임되는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16]

7. 사후

1951년, 조 이사무의 출신지인 후쿠오카현 가스야군 가스야정에 묘비와 흉상이 건립되었다.[10] 후쿠오카현 가스야군 가스야정의 조씨 집안은 가가번의 가로(가가 팔가 중 하나)로 메이지 유신 후에 화족이 되어 남작에 서임된 조씨 일족으로 여겨지지만, 일본 중세사를 전공하는 역사가 혼고 가즈토는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11]

참조

[1] 서적 Japanese Political History Since the Meiji Renovation, 1868-2000 C. Hurst 2001
[2] 서적 Shokan: Hirohito's Samurai https://archive.org/[...] Arms and Armor
[3] 백과사전 Cho, Isamu http://pwencycl.kgbu[...] 2021-11-18
[4] 웹사이트 Cho, Isamu http://www.generals.[...] 2021-11-18
[5] 서적 Bloody Okinawa Hachette 2020
[6] 뉴스 Jap Officers Buried By U. S. Forces Florence Morning News 1945-06-28
[7] 서적 『昭和史の軍人たち』「長勇」
[8] 기타
[9] 웹사이트 [125 32軍司令部壕(10)]牛島中将の遺体確認 https://ryukyushimpo[...] 琉球新報 2010-01-27
[10] 웹사이트 NTT労働組合 西日本本部 » 長勇(ちょういさむ)の墓 http://www.ntt-union[...] NTT労働組合 西日本本部 2018-08-23
[11] 서적 2015
[12] 웹사이트 読谷村史「日中戦争」 http://www.yomitan.j[...]
[13] 서적 裁かれる歴史 新風社
[14] 서적 最後の殿様 -徳川義親自伝 講談社
[15] 서적
[16] 서적 汚名 第二十六代沖縄県知事 泉守紀 講談社
[17] 서적 私の沖縄戦記 第三十二軍司令部秘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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