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함흥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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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원산-함흥 전투는 한국 전쟁 중 중공군의 공세에 맞서 UN군과 한국군이 함흥과 원산 지역에서 수행한 일련의 방어 및 철수 작전을 포괄한다. 이 전투는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작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한국 해병대는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원산 및 함흥 방어 작전에 참여했다. 해병대는 원산 방어, 함흥 방어, 철수 작전 지원 등의 역할을 수행하며 UN군의 안전한 철수를 도왔다. 이러한 노력은 중공군의 남진을 저지하고 UN군이 전력을 보존하는 데 기여했으며, 흥남 철수 작전에서의 민간인 구출은 인도주의적 작전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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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함흥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원산-함흥 전투 |
전체 분쟁 | 한국 전쟁 |
날짜 | 1950년 12월 3일 - 1950년 12월 15일 |
장소 | 함경남도 함흥시, 강원도 원산시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대한민국 |
교전국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고길훈 신현준 정만진 김광식 이봉출 고상하 염봉생 심포학 박성철 정광호 서정남 김윤근 민용식 종덕원 박동열 임동근 김대식 안창관 한예택 권석기 민용식 황 영 |
지휘관 2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중국 혼성부대 1개 사단 |
2. 장진호 전투 (1950.11.27 ~ 12.13)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함경남도 장진군 장진호 일대에서 미국 제1해병사단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과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압록강을 향해 북진하던 유엔군은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규모 공세에 직면하여 포위되었으나, 혹한 속에서 17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성공적으로 철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중공군 제9병단 역시 전투 능력을 상실할 정도의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유엔군 주력이 성공적으로 철수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2. 1. 전투 배경
1950년 11월 21일, 미 제10군단 예하의 미 제7사단이 혜산진을 점령하고, 미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까지 진격하여 압록강으로 나아갈 태세를 갖추면서 한국 전쟁의 승리와 통일이 임박한 듯 보였다. 그러나 중국인민지원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전세는 급변했다. 결국 12월 2일부터 미 해병 제1사단이 철수를 시작했으며, 동부전선의 한국군과 유엔군 역시 함흥과 원산 일대의 교두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장진호 전투가 벌어졌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 전쟁에 개입한 이후,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은 북한 북동부 지역으로 은밀히 침투했다. 1950년 11월 27일, 중국 제9병단은 장진호 지역에서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이 이끄는 미 제10군단을 기습 공격했다. 혹독한 겨울 날씨 속에서 17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올리버 P. 스미스 소장의 지휘 아래 약 30,000명의 유엔사령부 병력은 마오쩌둥의 직접적인 격파 지시를 받은 쑹스룬이 이끄는 약 120,000명의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다. 이러한 불리한 상황에서도 유엔군은 철수를 위한 격전을 벌이며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포위망을 돌파했다. 특히, 장진호 동쪽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낸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의 희생적인 역할 덕분에 서쪽의 미 해병대는 성공적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을 북한 동북부에서 몰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심각한 손실을 입었다. 제10군단의 흥남 철수 작전은 유엔군의 북한 철수의 마지막 단계였다.
한편, 신현준 준장이 이끄는 한국 해병대는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원산 방어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제3대대(대대장 김윤근 소령)는 원산 서쪽 45km 지점인 동양까지 진출했으나, 급변하는 전황에 따라 12월 2일 사령부와 제2, 제5대대는 함흥으로 이동했다. 제3대대는 12월 3일 마전리(원산 서쪽 26km)로 이동한 후 다시 원산으로 복귀하여 제1대대와 합류했다.
원산 지역의 상황도 악화되고 있었다. 약 3,000명의 적군이 덕원군 일대에서 원산을 위협했고, 1개 사단 규모의 북한군과 중공군 혼성부대가 내륙 산악지대로부터 마식령(원산 서쪽 25km)까지 접근했다. 중공군의 계속된 남하로 적의 세력은 점점 커져갔다. 이에 따라 연합군은 포위되어 전멸될 위험에 처했으며, 원산과 함흥을 통해 해상으로 신속히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2. 2. 전투 과정
1950년 11월 21일, 미국 제10군단 예하의 미 제 7사단이 혜산진을 점령했고, 미 해병 제 1사단은 장진호까지 진출하여 압록강 방면으로의 진격 태세를 갖추었다. 이로써 북진통일이 가시화되는 듯했으나,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전황은 급변했다.11월 27일,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은 장진호 지역에서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이 이끄는 미국 제10군단을 기습 공격하며 장진호 전투가 시작되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17일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올리버 P. 스미스 소장이 지휘하는 약 30,000명의 유엔사령부 병력은 쑹스룬이 이끄는 약 120,000명의 중공군에게 포위되었다. 유엔군은 마오쩌둥의 격파 지시를 받은 중공군의 맹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사상자를 내면서도 포위망을 뚫고 철수를 감행했다. 특히 장진호 동쪽에서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낸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의 희생적인 방어는 서쪽의 미 해병대가 포위를 피하고 철수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장진호 전투는 12월 13일까지 이어졌으며, 유엔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성공적으로 흥남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을 북한 동북부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막대한 인명 손실을 겪었다.
장진호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12월 2일부터 미 해병 제 1사단은 철수를 시작했고, 동부 전선의 다른 한국군과 유엔군 부대들도 함흥과 원산 일대의 교두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신현준 준장이 이끄는 한국 해병대는 미 제 10군단에 배속되어 원산을 방어하고 있었다. 제 3대대(대대장 김윤근 소령)는 원산 서쪽 45km 지점인 동양까지 진출했으나, 급변하는 전황에 따라 12월 2일 해병대 사령부와 제 2, 제 5대대는 함흥으로 이동했다. 제 3대대는 12월 3일 마전리(원산 서쪽 26km)로 이동한 후 다시 원산으로 복귀하여 제 1대대와 합류했다.
한편 원산 지역에서는 약 3,000명의 적군이 덕원군 일대에서 원산을 위협했으며, 1개 사단 규모의 북한군과 중공군 혼성 부대가 내륙 산악지대를 통해 마식령(원산 서쪽 25km)까지 접근했다. 중공군의 계속된 남하로 적의 위협은 점점 커져갔고, 연합군은 포위되어 전멸될 위험에 처했다. 이에 따라 원산과 함흥을 통해 해상으로 신속히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3. 흥남 철수 작전 (1950.12.15 ~ 12.24)
한국 전쟁 중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지자, 미 제10군단과 대한민국 제1군단은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열흘간 흥남항을 통해 대규모 해상 철수 작전을 감행했다. 이는 장진호 전투 등 동부 전선에서의 격전 이후, 포위 위기에 놓인 유엔군 및 한국군 병력과 북한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 작전을 통해 약 10만 명의 군 장병과 약 10만 명의 피난민, 그리고 대량의 군수 물자와 차량이 성공적으로 남쪽으로 이동했다. 특히 피난민 철수 과정에서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는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인도주의적 노력이 빛났던 사례로 꼽힌다. 흥남 철수는 유엔군의 전력을 보존하고 차후 반격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3. 1. 철수 배경
1950년 11월 말, 미 제 7사단이 혜산진을 점령하고 미 해병 제 1사단이 장진호까지 진출하며 압록강 진격을 눈앞에 두는 듯했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의 한국 전쟁 개입으로 전황은 급변했다. 11월 27일,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 약 12만 명은 장진호 일대에서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이 지휘하는 미 제10군단 예하 부대를 기습 공격하며 장진호 전투가 시작되었다. 올리버 P. 스미스 소장이 이끄는 약 3만 명의 유엔사령부 병력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 17일간 포위된 채 격전을 벌였다.장진호 전투의 여파로 12월 2일부터 미 해병 제 1사단이 철수를 시작했고, 동부전선의 다른 한국군과 유엔군 부대들도 함흥과 원산 일대의 교두보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미 제10군단은 흥남 철수 작전을 통해 북한 지역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특히 해병대가 성공적으로 철수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동쪽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낸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의 희생이 있었다.
신현준 준장이 지휘하는 한국 해병대는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원산 방어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제3대대(김윤근 소령 지휘)는 원산 서쪽 45km 지점인 동양까지 진출했으나, 급변하는 전황에 따라 12월 2일 사령부와 제2, 제5대대는 함흥으로 이동했다. 제3대대는 12월 3일 마전리(원산 서쪽 26km)를 거쳐 다시 원산으로 복귀하여 제1대대와 합류했다.
한편, 원산 지역에서는 북한군과 중공군 혼성부대가 마식령(원산 서쪽 25km)까지 접근하고, 덕원군 일대에서도 약 3,000명의 적군이 원산을 위협하는 등 중공군의 남하에 따라 위협이 커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중공군에게 포위되어 전멸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원산과 함흥을 통해 해상으로 신속하게 철수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3. 2. 철수 결과
한국 전쟁 중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미국 제10(X) 군단과 대한민국 제1군단은 1950년 12월 15일부터 12월 24일까지 흥남 철수 작전을 통해 흥남항에서 철수했다.김백일 1군단장과 당시 미국 제10군단 민사부 고문이었던 현봉학은 에드워드 알몬드 10군단장을 설득하여 군인뿐만 아니라 피난민까지 함께 철수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흥남 철수 작전의 마지막 배 중 하나가 되었고, 레너드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 있던 무기를 과감히 버리고 피난민 1만 4천여 명을 태우는 결단을 내렸다. 이 결정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가장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온양호는 마지막으로 흥남 부두를 떠난 배로 기록되었다.

흥남 철수 작전을 통해 성공적으로 철수한 규모는 다음과 같다.
구분 | 규모 |
---|---|
장병 | 100,000명 |
차량 | 17,000대 |
피난민 | 약 100,000명 |
군수품 | 350000ton |
이 성공적인 철수는 동해상으로 안전하게 이루어졌으며, 유엔군의 전력을 보존하고 중공군의 남진을 지연시키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4. 한국 해병대의 역할
중공군의 6.25 전쟁 개입으로 전황이 급변하면서 동부전선의 해병대(사령관 준장 신현준)는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원산과 함흥 지역에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원산 서쪽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전선이 불안정해지자 해병대는 원산 및 함흥 지역 방어와 연합군의 안전한 해상 철수를 지원하는 역할로 전환되었다.
원산에서는 주로 제3대대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방어 임무를 수행하며 연합군의 철수를 엄호했고, 함흥에서는 제2대대와 제5대대가 미 제3사단의 작전 통제 하에 함흥 교두보 남쪽 방어와 미군 부대 이동 엄호 등의 임무를 맡았다. 해병대는 중공군의 압박 속에서 방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연합군의 철수 작전을 효과적으로 지원하였다. 1950년 12월 중순, 해병대는 모든 임무를 마치고 진해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정비하고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4. 1. 원산 방어 작전 (1950.10.27 ~ 12.9)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급변하면서 동부전선의 해병대(사령관 준장 신현준)는 미 제10군단(군단장 소장 아몬드)에 배속되어 원산 방어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해병대 제3대대(대대장 소령 김윤근)는 초기에 원산 서쪽 45km 지점인 동양까지 전진하였으나, 변화하는 전황에 따라 12월 2일에는 해병대 사령부와 제2, 제5대대가 함흥으로 이동하였다. 제3대대는 12월 3일 원산 서쪽 26km 지점인 마전리로 이동한 후, 다시 원산으로 복귀하여 제1대대와 합류하였다.당시 원산 지역은 커져가는 위협에 직면했다. 덕원군 일대에서는 약 3,000명의 적군이 원산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북한군과 중공군의 혼성부대로 추정되는 1개 사단 규모의 병력이 내륙 산악지대를 통해 원산 서쪽 25km 지점인 마식령까지 접근하였다. 중공군의 지속적인 남하로 적의 세력은 더욱 커졌고, 이에 따라 연합군은 전멸을 피하기 위해 원산과 함흥을 통해 해상으로 신속히 철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원산 방어 임무를 맡은 해병 제3대대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분전하였다.
- 12월 7일: 원산 외곽의 주요 고지들이 적에게 점령당하고 원산 시내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시내에서는 게릴라 활동까지 나타나는 등 상황이 악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원산 북방 방어선을 지키던 제3대대는 미 제3사단의 지시에 따라 원산항 부두로 철수 명령을 받았다. 제9중대(중대장 중위 황영)는 대대 본대의 철수를 엄호하며 시내로 침투하는 적을 저지하던 중, 오전 11시경 박격포 등으로 무장한 약 1,000여 명의 적군과 조우했다. 중대원 111명은 4시간에 걸친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을 격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적 사살 15명, 부상 40명, 소총 20정 및 실탄 30발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피해는 부상 8명이었다.
- 12월 8일: 적 병력이 원산 서쪽으로 침입하여 시내를 점령하였다. 제3대대는 원산 비행장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하고 적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아군 부대의 항공기 이륙을 엄호하고 비행장 시설 철수 작업을 지원했다. 이날 저녁 6시경에는 제3대대 소속 수색분대와 제3중대의 1개 소대가 적이 점령한 원산 시내로 과감히 진입하여 적을 교란시키는 수색 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 12월 9일: 갈마반도의 비행장에서 마지막 아군 부대가 철수를 완료함에 따라 제3대대의 원산 방어 임무는 종료되었다. 저녁 8시부터 제1중대는 LST 898함에, 제2, 제3, 화기중대 및 대대본부는 LST 973함에 각각 승선하여 저녁 8시 30분, 원산항을 최종적으로 출항하였다.
같은 시기, 장진호 전투에서 극심한 고전을 치른 미 해병 제1사단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함흥 지역으로 철수하는 데 성공하였다.
4. 2. 함흥 방어 작전 (1950.12.3 ~ 12.15)
1950년 12월 3일, 해병대는 함흥에 사령부와 제2, 제5대대, 원산에 제1대대, 마전리에 제3대대가 각각 배치된 상태였다. 당시 해병대는 미 제10군단의 예비대로서 일선 주보급로와 군단 후방 지역을 방어하던 미 제3사단의 작전 통제를 받고 있었다.함흥으로 전진한 해병대의 임무는 미 제3사단의 작전 통제 하에 함흥 교두보의 남쪽을 방어하고, 미 제3사단 예하 제7연대의 이동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이때 함흥으로 이동 중이던 미 제7연대는 이미 흑수리(함흥 서북쪽 25km) 부근에서 중공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신현준 해병대 사령관(준장)은 교전 중인 미 제7연대를 우선 1개 대대로 지원하고, 다른 1개 대대는 지경(함흥 서남쪽 10km)에 배치하여 지경-흑수리 간 남쪽 기동로를 방어한다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작전명령 제44호로 하달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부대는 미 제7연대를 증원하고, 미 제3사단과 합동으로 지경-흑수리 간의 남쪽 기동로를 방어한다.
- 제2대대는 지경으로 이동하여 부여된 지역을 방어한다.
- 제5대대는 흑수리로 이동하여 미 제7연대장의 지휘를 받는다.
- 사령부는 지경국민학교에 위치한다.
4. 3. 철수 작전 지원
- 12월 13일, 해병대는 부대 이동을 위한 준비 명령을 받고 철수 준비에 착수했다. 작전명령 제 46호에 따라 부대는 현 방어진지를 미 제7연대에 인계하고 연포 부근으로 이동하여 후방 기동을 준비하도록 지시받았다. 제2대대는 12월 14일 12시까지 연포 서쪽 방어진지를 점령하고 항공 이동 준비를, 사령부는 같은 시간 이후 연포비행장에 위치하도록 계획되었다.
- 12월 14일, 제2대대는 미 제7연대에 진지를 인계하고 오후 2시경 연포 서쪽 2km 지점인 서흥리로 이동하여 방어진지를 점령했다. 사령부 역시 연포비행장으로 이동하여 기동을 준비했다. 오후 4시경에는 선발대로 황영식 소위 이하 21명이 먼저 배편으로 진해를 향해 출발했다.
- 12월 15일 오후 12시경, 함흥에 있던 제5대대가 미 제3사단의 지휘를 벗어나 진해로 복귀하기 위해 연포비행장에 도착했다.
- 연포비행장을 이륙한 해병대는 12월 16일 항공편으로 부산을 거쳐 진해에 도착했다. 이후 부대를 정비하고 교육과 훈련을 실시하면서 다음 작전을 준비했다. 해병대는 10월 27일 원산 상륙 이후 12월 15일 연포를 떠날 때까지 적 사살 715명, 부상 315명, 포로 18명 등의 전과를 올렸다.
5. 의의 및 평가
중공군은 포위한 미 10군단을 섬멸하고 38선 이남까지 진출하여 전쟁을 조기에 끝내려 하였다. 이를 위해 흥남 포위망을 직접 공격했으나, 오히려 유엔군의 성공적인 흥남 철수 작전으로 인해 중공군의 대규모 병력이 이 지역에 묶이는 결과를 낳았다. 결과적으로 유엔군은 큰 혼란 없이 다음 작전을 준비할 수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 해병대의 헌신적인 역할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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