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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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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윈스턴 처칠은 1874년 옥스퍼드셔에서 태어난 영국의 정치인이자 군인, 작가였다. 그는 보수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군인 및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다. 1900년 하원 의원에 당선된 후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기기도 했으며, 여러 내각에서 요직을 역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해군 장관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총리로 영국을 이끌며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했다. 전후에는 보수당 당수로서 야당을 이끌었으며,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제국주의적 성향과 인종주의적 발언으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뛰어난 웅변술과 리더십으로 2002년 BBC가 실시한 '역대 최고의 영국인' 여론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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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처칠, 67세, 양복을 입고 의자 뒤에 기대어 서 있다.
'으르렁거리는 사자', 1941년
존칭 접두사각하
이름경 윈스턴 처칠
존칭 접미사KG, OM, CH, TD, DL, FRS, RA
출생 이름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
출생일1874년 11월 30일
출생지잉글랜드 옥스퍼드셔 블레넘
사망일1965년 1월 24일
사망지잉글랜드 런던
안장 위치옥스퍼드셔 블래든 성 마틴 교회
정당보수당(1900–1904, 1924–1964)
다른 정당자유당(1904–1924)
배우자클레멘타인 호지어(1908년 9월 12일 결혼)
자녀다이애나 처칠, 랜돌프 처칠, 세라, 메리를 포함한 5명
부모랜돌프 처칠 경
제니 제롬
교육해로우 스쿨
샌드허스트 왕립 군사 대학
직업역사가
화가
정치인
군 장교
작가
수상전체 목록
서명Winston Churchill signature.svg
군 복무
소속영국 육군
영국 육군 예비역(1902년부터)
부대4대 여왕 소유 후사르
말라칸드 야전군
21대 랜서
남아프리카 경마병
여왕 소유 옥스포드셔 후사르
그레나디어 근위대
로열 스코츠 퓨실리어
복무 기간1893–1924년
계급전체 목록
지휘로열 스코츠 퓨실리어 6대대
전투북서 변경
마흐디스트 전쟁
제2차 보어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군 훈장전체 목록
의회 직책
국회영국 의회
하원 의원 선거구우드포드
임기 시작1945년 7월 5일
임기 종료1964년 9월 25일
이전'선거구 신설'
이후'선거구 폐지'
하원 의원 선거구 1에핑
임기 시작 11924년 10월 29일
임기 종료 11945년 6월 15일
이전 1레너드 라일
이후 1레아 매닝
하원 의원 선거구 2던디
동시 의원 2알렉산더 윌키
임기 시작 21908년 5월 9일
임기 종료 21922년 10월 26일
이전 2에드먼드 로버트슨
알렉산더 윌키
이후 2에드윈 스크림게오어
E. D. 모렐
하원 의원 선거구 3맨체스터 노스 웨스트
임기 시작 31906년 2월 8일
임기 종료 31908년 4월 12일
이전 3윌리엄 홀드스워스
이후 3윌리엄 조인슨 힉스
하원 의원 선거구 4올덤
임기 시작 41900년 10월 24일
임기 종료 41906년 2월 8일
이전 4월터 런시먼
이후 4존 앨버트 브라이트
주요 정치 직책
직책하원 원로
임기 시작1959년 10월 8일
임기 종료1964년 9월 25일
이전데이비드 그렌펠
이후랩 버틀러
직책 1야당 대표
총리 1클레멘트 애틀리
임기 시작 11945년 7월 26일
임기 종료 11951년 10월 26일
이전 1클레멘트 애틀리
이후 1클레멘트 애틀리
직책 2보수당 대표
임기 시작 21940년 10월 9일
임기 종료 21955년 4월 6일
이전 2네빌 체임벌린
이후 2앤서니 이든
장관 직책 (1939–1952)
직책국방부 장관
총리'본인'
임기 시작1951년 10월 28일
임기 종료1952년 3월 1일
이전매니 신웰
이후해럴드 알렉산더
총리 1'본인'
임기 시작 11940년 5월 10일
임기 종료 11945년 7월 26일
이전 1언리 채트필드(국방 조정 장관)
이후 1클레멘트 애틀리
직책 2해군본부 제1경
총리 2네빌 체임벌린
임기 시작 21939년 9월 3일
임기 종료 21940년 5월 11일
이전 2제임스 스탠호프
이후 2A. V. 알렉산더
장관 직책 (1908–1929)
직책재무부 장관
총리스탠리 볼드윈
임기 시작1924년 11월 6일
임기 종료1929년 6월 4일
이전필립 스노든
이후필립 스노든
직책 1식민지 장관
총리 1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임기 시작 11921년 2월 13일
임기 종료 11922년 10월 19일
이전 1앨프리드 밀너
이후 1빅터 캐번디시
직책 2공군 장관
총리 2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임기 시작 21919년 1월 10일
임기 종료 21921년 2월 13일
이전 2윌리엄 위어
이후 2프레데릭 게스트
직책 3육군 장관
총리 3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임기 시작 31919년 1월 10일
임기 종료 31921년 2월 13일
이전 3밀너 자작
이후 3래밍 워싱턴-에번스
직책 4군수 장관
총리 4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임기 시작 41917년 7월 17일
임기 종료 41919년 1월 10일
이전 4크리스토퍼 애디슨
이후 4앤드루 위어
직책 5랭커스터 공국 장관
총리 5H. H. 애스퀴스
임기 시작 51915년 5월 25일
임기 종료 51915년 11월 25일
이전 5에드윈 몬태규
이후 5허버트 새뮤얼
직책 6해군 본부 제1경
총리 6H. H. 애스퀴스
임기 시작 61911년 10월 24일
임기 종료 61915년 5월 25일
이전 6레지널드 맥케나
이후 6아서 밸푸어
직책 7내무부 장관
총리 7H. H. 애스퀴스
임기 시작 71910년 2월 19일
임기 종료 71911년 10월 24일
이전 7허버트 글래드스턴
이후 7레지널드 맥케나
직책 8통상위원회 의장
총리 8H. H. 애스퀴스
임기 시작 81908년 4월 12일
임기 종료 81910년 2월 14일
이전 8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이후 8시드니 벅스턴
음성 파일

2. 생애

윈스턴 처칠은 말버러 공작 1세 존 처칠의 후손으로, 정치가를 많이 배출한 가문 출신이다.[102] 아버지 랜돌프 처칠은 보수당 소속의 유명한 정치인이었고, 어머니 제니 제롬 여사는 미국 사업가 레너드 제롬의 딸이었다.[82]



1874년 11월 30일, 잉글랜드 옥스퍼드셔주 우드스톡에 있는 블레넘 궁전에서 태어났다.[82] 유모 엘리자베스 에베레스트가 양육을 맡았으며, 처칠은 그녀를 "우머니"라고 부르며 따랐다.[82]

1876년, 아버지 랜돌프 경은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된 할아버지의 비서로 아일랜드로 부임했다. 처칠 가족은 더블린에서 살았고, 처칠은 훗날 아일랜드를 "기억하는 첫 번째 장소"라고 회고했다. 1880년에는 남동생 존 스트렌지가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랜돌프 경


어머니 재닛 제롬


어머니 재닛은 미국으로 이주한 티모시 제롬의 후손이다. 외할아버지인 레너드 제롬은 남북 전쟁 후 재건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제롬 가문은 뉴욕의 신흥 부자로 여겨졌고, 프랑스 파리로 이주하여 사교계 생활을 했다.

1880년 영국 총선에서 보수당은 대패했고, 할아버지 말버러 공도 아일랜드 총독직을 사임했다.

사관학교 시절의 처칠


해로 스쿨 입학시험에서 낙제했지만, 영문학역사 성적 덕분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103]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3수 끝에 입학하여 독서, 수영, 승마 등을 익혔다.[103]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어 전쟁에 참전했고,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기도 했다. 수단인도에서 주민들의 항쟁을 진압하는 일에도 가담했다.

1900년 하원 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1] 1904년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고,[1]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내각에서 무역장관, 내무장관 등 요직을 역임하며 사회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해군 장관이었으나, 갈리폴리 전투 실패의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났다.[104]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중령으로 참전했고, 1917년 군수장관으로 임명되어 전차 개발을 적극 추진했다.

1922년 총선에서 낙선한 후, 1924년 보수당에 복귀하여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다.[82] 1926년 총파업 당시 정부의 강경 대응을 주도했다.[82] 1930년대에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대한 경고와 인도 자치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82]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1940년 총리에 취임하여 전시 내각을 구성했다.[105]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며 연합국의 승리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등 연합국 지도자 회담을 주도하며 전후 세계 질서 구상에 참여했다.

1945년 총선에서 패배했지만, 1951년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 한국 전쟁에 영국군을 파병하고, 수소 폭탄 개발을 추진했다.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고, 1955년 건강상의 이유로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1964년 의원직에서 물러나 정계에서 은퇴했다.[109] 1965년 1월 24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처칠의 장례식은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참석했다. 유해는 블레넘 궁전 근처 세인트 마틴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처칠의 무덤

2. 1. 초기 생애

어머니 재닛과 동생 존과 함께


윈스턴 처칠은 말버러 공작 1세 존 처칠의 후손으로, 그의 가문은 유명한 정치가를 많이 배출했다.[102] 아버지 랜돌프 처칠은 재무장관을 역임한 유명한 보수당 정치인이었고, 어머니 제니 제롬 여사는 미국 사업가 레너드 제롬의 딸이었다.[82]

1874년 11월 30일 오전 1시 30분, 잉글랜드 옥스퍼드셔주 우드스톡에 있는 말버러 공작가 자택 블레넘 궁전에서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날은 성 안드류의 날이었고, 블레넘 궁전에서는 말버러 공작이 주최하는 무도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결혼 7개월 반 만에 장남을 얻게 된 것이다. 스펜서-처칠가의 전통에 따라 대부(할아버지 레너드 제롬)의 이름을 미들네임으로 받아 윈스턴 레너드로 명명되었다.[82]

처칠은 12월 27일 블레넘 궁전 예배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새해를 맞이하여 랜돌프 경 가족은 런던 자택으로 돌아왔고, 유모 엘리자베스 에베레스트가 양육했다. 처칠의 부모는 정계와 사교계 활동으로 매우 바빴기 때문에, 빅토리아 시대 상류층의 관습대로 아이 양육은 유모에게 맡겼다.

; 아일랜드에서의 유년기

7세 때의 처칠 (아일랜드 더블린)


1876년 아버지 랜돌프 경은 형과 왕세자 에드워드 앨버트의 애인 쟁탈전에 휘말려 왕세자의 미움을 사 영국 사교계에서 지위를 잃었다. 총리이자 보수당 당수 벤자민 디즈레일리의 권유로, 랜돌프 경은 아일랜드 총독으로 임명된 아버지 말버러 공의 비서로 1877년 1월 9일 아일랜드로 부임했다.

처칠 가족은 더블린의 피닉스 공원 근처 리틀 라트라에서 살았다. 처칠은 훗날 아일랜드를 "기억하는 첫 번째 장소"라고 회고했다.

아일랜드에서도 유모 에베레스트가 계속 양육을 맡았다. 처칠은 유모를 "우머니"라고 부르며 따랐고, 8살이 될 때까지 그녀 곁을 거의 떠나지 않았다. 처칠은 말년까지 그녀의 사진을 간직했고, 그녀의 말 "무분별한 곳에 감정은 없다(타인에게 냉담한 자는 지능이 약하다)"를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가정교사도 붙었지만, 처칠은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싫어했다고 한다. 1879년 대기근 이후 아일랜드의 정치 상황은 불안해졌고, 페니안의 폭력 활동이 활발해져 유모는 처칠의 안전을 항상 걱정했다.

1880년 2월 4일, 남동생 존 스트렌지가 더블린에서 태어났다. 처칠은 동생과 사이좋게 자랐지만, 장난감 병정 놀이를 할 때 백인 병사는 자신이 독점하고 동생에게는 적은 수의 흑인 병사만 주는 등 차별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어머니 재닛은 1709년경 잉글랜드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티모시 제롬의 후손이다. 처칠의 외할아버지인 레너드 제롬은 남북 전쟁 후 재건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레너드는 뉴욕주 의회 의원을 1년 동안 지낸 앰브로스 홀의 딸 클라리사 홀과 결혼했다. 홀 가문의 전승에 따르면 이로쿼이족의 피가 섞여 있다고 하나, 정확한 사실 여부는 불명확하다.

레너드와 클라리사 부부는 네 명의 딸을 두었는데, 그중 둘째 딸이 처칠의 어머니 재닛이었다. 제롬 가문은 뉴욕의 보수적인 상류층에서는 남북 전쟁으로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시골 출신의 신흥 부자로 여겨졌고, 다른 뉴욕의 신흥 부자들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뉴욕 명문가의 자제와의 결혼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재력만 있으면 출신에 관계없이 누구든 환영하는 파리로 이주하여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로부터 후대를 받았다. 그러나 돈벌이와 경마, 오페라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상류층에 들어가고자 하는 욕망도 없었던 레너드는 곧 파리를 떠났지만, 남편의 재력을 이용해 초고위층 귀족과 자신의 딸들의 혼사를 꿈꾸던 야심차고 허영심 많은 클라리사와 딸들은 돈만 있으면 외국인이라도 차별받지 않고 상류층으로 대접받는 파리에서 계속 살았고, 재닛도 파리에서 자랐다. 모녀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프랑스를 떠났지만, 전쟁 후 파리로 돌아왔다.

1880년 영국 총선에서 랜돌프 경은 재선에 성공했지만, 보수당은 대패했다. 디즈레일리 내각은 총사퇴했고, 말버러 공도 아일랜드 총독직을 사임했다.

라틴어 성적이 좋지 않았던 처칠은 해로 스쿨 입학시험에서 낙제했지만,[103] 독서를 좋아해 문학역사에 소질을 보여 영문학역사 성적 덕분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103] 결국 그는 브라이튼 학교로 옮겨 학업에 흥미를 느꼈고, 아버지의 권유로 3수 끝에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관학교에서 독서, 수영, 승마 등을 익히며 리더십과 공동체 규칙 존중을 배웠다.[103]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 어깨가 좋지 않아 세이버 대신 마우저 C96 권총을 사용했다.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하다 탈출,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로 변장하여 영국인의 도움으로 숨어 지내기도 했다. 수단인도 말란칸트에서 주민들의 항쟁을 진압하는 일에도 가담했다.

2. 2. 군인 및 종군기자 시절

Winston Churchill영어은 1895년 제4 경기병 연대에 소위로 임관하여 군 생활을 시작했다.[103] 쿠바 독립 전쟁, 인도 북서 변경 지역에서의 전투, 수단 전쟁 등에 참전하며 군사 경험을 쌓았다. 특히, 보어 전쟁에서는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고,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한 경험은 그를 전쟁 영웅으로 만들었다.[2] 군 복무와 종군기자 활동을 통해 글쓰기 능력을 발전시켰고, 『말라칸드의 야전군 이야기』, 『강가의 전쟁』 등 여러 저서를 출간했다.

졸업 후 기병 소위로 임관하여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 병과가 기병임에도 어깨가 좋지 않아 기병용 검인 세이버를 휘두르지 못했고, 사비로 마우저 C96 권총을 구입해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로 잡혀 수용소 생활을 했는데, 수용소에서 탈출한 처칠은 로마 가톨릭 교회 신부로 변장하여 영국인의 도움으로 숨어 지낼 수 있었다. 수단인도 말란칸트에서 주민들이 영국의 식민 통치에 반항하여 일으킨 항쟁을 진압하는 일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제2차 보어 전쟁 발발을 예상하여, 처칠은 ''모닝 포스트''의 기자로 남아프리카로 향했다.[2] 레이디스미스 근처 전투 지역으로 이동했는데, 당시 보어 군대에 포위되어 있었다. 이후 콜렌소로 향했다. 치브리 전투에서 그의 열차는 보어 포병의 포격으로 탈선되었고, 포로로 붙잡혀 포로 수용소프리토리아에 수감되었다. 12월, 처칠은 화물 열차에 몸을 숨기고 광산에 숨어 도주하여 포로들을 피했다.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에서 안전하게 도착했으며, 그의 탈출은 많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1900년 1월, 남아프리카 경기병 연대 중위로 잠시 군대에 복귀하여 레드버스 불러의 레이디스미스 포위전 해제 및 프리토리아 점령 작전에 참여했다. 그는 두 곳 모두에 처음 진입한 영국군 중 한 명이었다. 그와 그의 사촌인 말버러 공작 찰스 스펜서-처칠은 52명의 보어 포로 수용소 경비병의 항복을 요구하고 받아들였다. 전쟁 내내 공개적으로 반보어 편견을 비난하며 그들에게 "관용과 너그러움"으로 대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이후 영국이 승리에서 관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7월, 중위직에서 사임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모닝 포스트'' 기사는 ''프리토리아 경유 런던에서 레이디스미스까지''로 출판되어 잘 팔렸다.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 사관학교에서 기병연대에 소속되어 제2차 쿠바 전쟁을 참관하고,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파슈툰족 반란 진압전, 수단 침공,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

2. 3. 정치 입문

1900년, 처칠은 보수당 소속으로 하원 의원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1] 자유무역을 지지했던 그는 보호무역을 주장하는 조지프 체임벌린과 대립했고, 1904년 자유당으로 당적을 옮겼다.[1]

헨리 캠벨-배너먼 자유당 정권에서 처칠은 식민지성 정무차관을 맡아 영국령 남아프리카 문제에 관여했다.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내각에서는 무역장관, 내무장관 등 요직을 역임하며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 함께 실업보험 제도 도입 등 사회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2. 4. 제1차 세계 대전

처칠은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해군 장관이었다. 전쟁 전부터 군함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는 등 해군력 강화에 힘썼으나, 독일의 잠수함 개발로 인해 개혁은 실패했다.[104] 갈리폴리 전투에서 오스만 제국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영국군을 파병했지만,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을 낳아 실패로 끝났다.

작전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난 처칠은 처제의 권유로 수채화를 그리며 우울증을 달랬다.[104]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에 중령으로 참전하여, 유머를 활용하고 복지를 개선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모든 장병들에게 목욕을 시켜 피부병을 치료하고, "겁먹지 말게. 전쟁은 웃으면서 하는 것이야."라며 정신적 고통을 진정시켰다.[104] 또한 어린 시절 친구였던 알렉산더 플레밍을 도왔다.[104]

1915년 11월 19일, 서부전선 참전을 위해 프랑스로 떠났고, 존 프렌치 장군으로부터 육군 소령 계급과 로열 스코츠 퓨실리어스 연대 제6대대장 직위를 받았다. 그러나 "정치가 출신 군인"이라는 비판이 거셌고, 1916년 4월, 대대가 다른 대대와 합병되면서 대대장에서 해임되었다.

1916년 12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내각이 출범하면서 처칠은 재입각을 희망했지만, 보수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917년 3월, 다르다넬스 조사위원회 보고서에서 처칠의 책임이 일부 경감되면서, 1917년 7월, 로이드 조지 내각의 군수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처칠은 전차 개발을 적극 추진하여 캉브레 전투에서 그 유용성을 입증했고, '전차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얻었다.

1918년 3월부터 독일군의 춘계 공세가 있었지만, 7월부터 미군의 본격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었다.

1919년 1월부터 처칠은 전쟁장관 겸 항공장관(공군장관)을 역임했다. 첫 임무는 동원 해제였는데, 병사들의 불만을 고려하여 입대 순서대로 동원 해제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또한 글래스고에서 발생한 총파업을 군대와 전차를 동원하여 진압했다.

1921년 1월, 처칠은 식민지 장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2. 5. 전간기 활동

1922년 총선에서 낙선한 처칠은 자유당을 탈당하고, 1924년 보수당에 복귀하여 스탠리 볼드윈 내각의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다.[82] 재무장관 재임 시절, 처칠은 금본위제 복귀를 추진했으나, 이는 경제 불황과 실업 문제 심화로 이어져 존 메이너드 케인스를 비롯한 많은 경제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82]

1926년 총파업 당시, 처칠은 정부의 강경 대응을 주도하며 노동 운동과의 갈등을 빚었다.[82] 그는 정부 기관지 '브리티시 가제트'를 창간하여 총파업이 불법임을 주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파업 진압에 나섰다.[82]

1930년대에는 정치적 침체기를 겪었으나, 나치 독일의 위협에 대한 경고와 인도 자치에 대한 반대 입장을 고수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82] 특히, 아돌프 히틀러의 독재 정권에 대한 유화 정책에 반대하며, 독일의 재군비에 대한 영국의 군비 증강 필요성을 역설했다.

2. 6.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처칠은 네빌 체임벌린 내각의 해군 장관으로 복귀했다.[105] 1940년 5월, 독일군의 서부 전격전으로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고, 체임벌린 내각은 붕괴 위기에 처했다.

1940년 5월 10일 오후 6시, 조지 6세의 승인을 받아 처칠은 총리에 취임하여 전시 내각을 구성했다.[105] 노동당도 연립내각 참여를 승낙하여, 클레멘트 애틀리를 포함한 노동당 의원 2명이 전시 내각에 합류했다.[105]

5월 13일, 처칠은 하원에서 "피와 땀과 눈물" 연설로 유명한 취임 연설을 했다. 그는 "우리의 목적은 오직 승리뿐이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길이 아무리 길고 험난하더라도 승리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국민들의 항전 의지를 고취시켰다.[105]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처칠은 독일 공군의 공세를 막아내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미국의 지원을 이끌어내며 연합국의 승리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1943년 11월 22일 카이로 회담에서 처칠은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중화민국장제스와 함께 3국 수뇌 회담을 가졌다. 카이로 회담 직후, 루스벨트와 처칠은 테헤란 회담에서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을 만났다. 처칠은 영국이 폴란드의 독립 국가 복원에 큰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영국은 이 문제가 연합국 간의 마찰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폴란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꺼렸다. 처칠은 스탈린을 혐오스러운 체제를 이끄는 "악마" 같은 폭군이라고 생각했다.

처칠은 루스벨트, 스탈린과 함께 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등 연합국 지도자 회담을 주도하며 전후 세계 질서 구상에 참여했다.

2. 7. 전후 활동

1945년 7월 총선에서 클레멘트 애틀리가 이끄는 노동당에 패배하여 수상직에서 물러났지만, 보수당 당수로서 야당을 이끌었다.[1] 1946년, 철의 장막 연설을 통해 소련의 팽창주의를 경고하며 냉전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1951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다시 총리직에 복귀했다. 재임 기간 동안 한국 전쟁에 영국군을 파병하고, 수소 폭탄 개발을 추진하는 등 냉전 시대의 반공주의적 정책을 이어갔다. 영국은 미국, 소련에 이어 세 번째 핵 보유국이 되었다.

195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처칠은 노벨 평화상을 원했기에 문학상 수상에는 실망했다고 한다. 1955년, 건강상의 이유로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후임은 앤서니 이든이었다.

2. 8. 은퇴 이후

1953년 여러 저술 활동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으며,[108] 1955년앤서니 이든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하원 의원으로 남았다. 1964년에 의원직에서 물러나 정계에서 은퇴했다.[109]

말년의 처칠은 심하게 노쇠하여 자주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도 처칠의 인기는 여전하여 매년 처칠의 생일에 하이드 파크 게이트 저택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처칠도 저택 창문에 서서 모인 사람들에게 V자 사인을 보냈다. 1964년 11월 29일에도 처칠은 건강한 모습을 군중에게 보여주었지만, 이것이 대중에게 보여진 처칠의 생전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1965년 1월 8일 뇌졸중으로 왼쪽 반신이 마비되었고, 1월 24일 오전 8시경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9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마지막 말은 없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아버지 랜돌프의 기일이었다.

처칠의 유해를 담은 관은 3일 동안 웨스트민스터 홀에 안치되었다. 국민의 조문이 허용되어 3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방문했다. 그 후, 처칠의 관은 국장으로 세인트 폴 대성당까지 운구되었다. 사망 6일 후인 1월 30일에 거행된 세인트 폴 대성당 장례식에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참석했다. 영국에는 "군주는 신하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관례가 있으며, 이는 그 관례가 처음으로 깨진 사례였다.

유해는 블레넘 궁전 근처 Bladon|블래던영어의 세인트 마틴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곳은 처칠의 부모가 묻힌 묘지이며, 처칠도 부모의 묘 근처에 안장되었다.

3. 사상 및 평가

윈스턴 처칠은 뛰어난 웅변과 리더십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영국을 이끌며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불굴의 의지와 결단력은 전쟁 중 영국 국민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 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에서, 거리에서,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와 같은 그의 연설들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하지만 처칠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적 성향과 식민지 지배 옹호는 비판의 대상이다. 대영제국 유지를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식민지 민족들의 독립 요구를 억압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인도 독립에 대한 강경한 반대 입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인도인들은 스스로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며 인도 독립 운동을 탄압했다.

또한 처칠은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도 논란이 되었다. 백인 우월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인종에 대한 멸시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발언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부적절하며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국의 관점에서는 처칠에 대한 평가가 더욱 복잡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와 한국 독립에 대한 소극적인 입장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으며, 한국의 독립 요구를 외면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윈스턴 처칠은 뛰어난 지도자였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가진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의 업적과 과오를 균형 있게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3. 1. 정치 사상

처칠은 자유 무역과 사회 개혁을 옹호하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보였으나, 제국주의군주제에 대한 강한 신념을 가진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1] 그는 노동자 계층의 권익 보호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사회주의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강경한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특히,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반공주의를 자신의 정치적 신념의 핵심으로 삼고,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정치인으로서 처칠은 정치적 원칙보다는 개인적 야망에 따라 움직이는 인물로 인식되기도 했다. 초기 경력 동안 그는 도발적이고 논쟁적인 언행으로 의회 내에서 적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가족과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특별한 충성심을 보이는 정직한 정치인으로 여겨졌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처칠은 두 번의 당적 변경으로 인해 "불신과 반감"을 샀다. 그의 정치 이념은 "근본적으로 보수적"이면서도, "진보적인 관점"을 가졌으며, "당적 소속에 구애받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국가 계획에 대한 성향과 자유 시장에 대한 신념 때문에 사회주의에 반대했지만, 전시 연립 정부 시절에는 노동당 동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예외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처칠은 오랫동안 노동 계급의 적으로 여겨졌으며, 론다 계곡 소요 사태에 대한 대응과 반사회주의적 발언은 그를 반동으로 보는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총파업에 반대한 그의 역할은 파업 참가자들과 노동 운동 구성원들의 적개심을 샀다. 역설적이게도 처칠은 사회주의의 "반의"로 보았던 노동 조합주의를 지지했다.

반면, 비판자들은 처칠의 국내 개혁을 고려하지 않았는데, 그는 여러모로 급진적 개혁가였지만, 항상 기존의 사회 구조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3. 2. 제국주의와 식민지 문제

처칠은 확고한 제국주의자이자 군주제 지지자였다. 그는 영국 제국주의를 식민지 백성들에게 이익이 되는 이타심의 한 형태로 보았으며,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로 묘사되기도 한다.[29] 그는 아프리카, 호주, 카리브해, 아메리카 대륙 및 인도에서 흑인이나 원주민의 자치를 반대하며, 영국 제국이 식민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복지를 유지했다고 믿었다.[29]

처칠은 영연방 출신의 이민에 반대했다. 그는 반유대주의에 반대했지만, 1920년대에는 시온주의를 지지하면서도 공산주의는 국제 유대인 음모의 산물이라고 믿었다.[58]

처칠은 비백인 민족에 대해 비난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1943년 벵골 기근에 대한 대응은 느리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인도인들이 "토끼처럼 번식"하기 때문에 지원이 불충분할 것이라는 발언은 논란을 일으켰다.[59][60] 1947년 인도의 독립 이후에도 처칠은 제국주의적 수사를 계속 사용했다. 그러나 총리로서의 두 번째 임기 동안에는 말레이시아와 케냐에서 무력 반란 진압에 대한 영국의 입장을 완화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여겨진다.[59]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 사관학교에서 기병연대에 소속되어 제2차 쿠바 독립 전쟁을 참관하고,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파슈툰족 반란 진압전, 수단 침공,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했다. 1900년 영국 총선거에서 보수당 후보로 초선(당시 25세)되었으나, 조지프 체임벌린보호무역론을 주장하자, 자유무역주의자로서 반발하여 보수당에서 자유당으로 이적했다. 헨리 캠벨-배너먼 자유당 정권이 출범하자, 식민지성 정무차관으로서 영국에 합병된 보어인과의 화해 정책과 중국인 노예 문제 처리 등 영국령 남아프리카 문제에 대처했다.

1930년대에는 인도 자치 정책에 반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애틀리 노동당 정권이 인도 등의 식민지를 포기해 가는 것을, 제국주의의 입장에서 비판하고 식민지 독립 저지에 힘썼다.

영국은 미국과 소련과 함께 승전국의 지위를 얻었지만, 대영제국은 식민지의 거의 전부를 잃고 소멸하게 되어, 세계 제일의 식민지 대국의 자리를 잃고 미·소의 뒤를 따르는 나라로 전락했다.

3. 3. 인종주의적 관점

처칠은 인도인에 대해 인종차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을 경멸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92] 당시 내각의 인도 담당 장관이었던 레오 아메리는 처칠에게 "수상과 히틀러의 사상에 그다지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92]

이러한 인도인에 대한 증오는 처칠의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92] 그는 당시 인도의 식량난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고, 여러 차례의 식량 지원 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부했다.[92] 이러한 결정은 1943년 벵골 기근을 초래했으며, 이 기근으로 인해 수백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92]

3. 4. 평가

윈스턴 처칠은 뛰어난 웅변과 리더십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영국을 이끌며 연합국의 승리에 기여한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의 불굴의 의지와 결단력은 전쟁 중 영국 국민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특히,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 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에서, 거리에서,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와 같은 유명한 연설들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하지만, 처칠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제국주의적 성향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옹호는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는 대영제국의 유지를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식민지 민족들의 독립 요구를 억압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인도 독립에 대한 그의 강경한 반대 입장은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는 "인도인들은 스스로를 다스릴 능력이 없다"고 주장하며, 인도 독립 운동을 탄압했다.

또한, 처칠은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도 논란이 되었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인종에 대한 멸시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발언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부적절하며, 비판받아 마땅하다.

한국의 관점에서는 처칠에 대한 평가가 더욱 복잡하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한국 독립에 대한 소극적인 입장으로 인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처칠은 일본의 침략 행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으며, 한국의 독립 요구를 외면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윈스턴 처칠은 뛰어난 지도자였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면모를 가진 복잡한 인물이었다. 그의 업적과 과오를 균형 있게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4. 저술 활동

처칠은 뛰어난 저술가로도 명성을 얻었다. 그의 저술 활동은 정치적 입장과 신념을 반영하는 동시에, 역사적 사건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1953년에는 "역사 및 전기 묘사의 탁월함"과 웅변술을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53] 그는 미국 소설가 윈스턴 처칠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윈스턴 S. 처칠" 또는 "윈스턴 스펜서 처칠"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54]

처칠의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제목출판 연도내용
『말라칸드의 야전군 이야기』(The Story of the Malakand Field Force)1898년인도 파슈툰족 반란 진압전 경험담
『강가의 전쟁』(The River War)1899년수단 재정복에 관한 역사적 기록
『사브롤라』(Savrola)1900년소설
『프레토리아 경유 런던에서 레이디스미스까지』(London to Ladysmith via Pretoria), 『해밀턴 장군의 행군』(Ian Hamilton's March)1900년보어 전쟁 종군기
『랜돌프 처칠 경』(Lord Randolph Churchill)1906년아버지 랜돌프 처칠 경의 전기
『나의 아프리카 여정』(My African Journey)1908년아프리카 여행기
『세계의 위기』(The World Crisis)1923년 - 1929년제1차 세계 대전사 (전5권)
『나의 어린 시절』(My Early Life)1930년자서전
『말버러: 그의 생애와 시대』(Marlborough. His Life and Times)1933년 - 1938년말버러 공작의 전기
『위대한 동시대인들』(Great Contemporaries)1937년동시대 주요 인물들에 대한 평전
『제2차 세계 대전』(The Second World War)1948년 - 1954년제2차 세계 대전 회고록 (전6권)
『영어권 민족사』(A History of the English-Speaking Peoples)1956년-1958년영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의 역사 (전4권)



특히, 『제2차 세계 대전』은 처칠의 구술 방식으로 쓰여진 대작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어 그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이 책은 처칠의 자화자찬과 클레멘트 애틀리 등 노동당 정치인들에 대한 과소평가가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역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는 높게 평가받는다. 『영어권 민족사』는 카이사르의 브리타니아 정복부터 처칠이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할 때까지를 다루며, 영미 양국의 연대 강화를 염두에 두고 쓰여졌다.

5. 가족 관계



윈스턴 처칠과 그의 아내 클레멘타인 처칠 (1915년)


가터 훈장을 착용한 처칠, 아들 랜돌프 처칠, 손자 윈스턴 처칠 (1940년생) (1950년대)


윈스턴 처칠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102]

관계이름출생 - 사망비고
아버지랜돌프 처칠 경1849년 2월 13일 ~ 1895년 1월 24일재무장관 역임
어머니제니 제롬1854년 1월 9일 ~ 1921년 6월 29일미국 출신
배우자클레멘타인 처칠1885년 4월 1일 ~ 1977년 12월 12일1908년 9월 결혼, 57년간 결혼 생활
장녀다이애나 처칠1909년 7월 11일 ~ 1963년 10월 20일
장남랜돌프 처칠1911년 5월 28일 ~ 1968년 6월 6일
차녀사라 처칠1914년 10월 7일 ~ 1982년 9월 24일
삼녀마리골드 처칠1918년 11월 15일 ~ 1921년 8월 23일
사녀메리 처칠1922년 9월 15일 ~ 2014년 5월 31일



처칠의 아버지 랜돌프 처칠 경은 재무장관을 역임한 유명한 정치인이었고, 어머니 제니 제롬은 미국 출신이었다. 처칠은 1908년 9월 클레멘타인 처칠과 결혼하여 57년간 결혼 생활을 했다. 슬하에 장녀 다이애나 처칠, 장남 랜돌프 처칠, 차녀 사라 처칠, 삼녀 마리골드 처칠, 사녀 메리 처칠의 다섯 자녀를 두었다.

6. 서훈

수여 년도훈장 및 메달
1922년컴패니언 오브 아너 훈장(CH)[85]
1946년오더 오브 메리트 훈장(OM)[85]
1953년가터 훈장(KG)[85]
1898년인도 훈장 (클래스프 첨부, 펀자브 국경 1897~98)[85]
1899년수단 여왕 훈장, 1896~98[85]
1901년남아프리카 여왕 훈장, 1899~1902, 클래스프 6개 첨부[85]
1919년1914-1915년 스타 훈장[85]
1919년영국 전쟁 훈장 1914-1918년[85]
1920년승리 훈장(영국) 1914~1919[85]
1945년1939-1945년 스타 훈장[85]
1945년아프리카 스타 훈장[85]
1945년이탈리아 스타 훈장[85]
1945년프랑스·독일 스타 훈장[85]
1945년방위 훈장(영국)[85]
1945년전쟁 훈장 1939-1945[85]
1911년조지 5세 즉위 기념 훈장[85]
1935년조지 5세 은혼 기념 훈장[85]
1937년조지 6세 즉위 기념 훈장[85]
1953년엘리자베스 2세 즉위 기념 훈장[85]
1924년영토 방위 훈장[85]
1895년군공 십자훈장 적색 리본(전쟁 공로)(스페인)[85]
1945년레오폴드 훈장 대수장(종려 훈장)(벨기에)[85]
1946년네덜란드 사자 훈장 대십자훈장(네덜란드)[85]
1946년오크 왕관 훈장 대십자훈장(룩셈부르크)[85]
1948년성 올라프 훈장 대십자훈장(목걸이)(노르웨이)[85]
1950년코끼리 훈장 기사작위(덴마크)[85]
1958년프랑스 해방 훈장 동료(프랑스)[85]
1961년네팔 별 훈장 1등급(네팔)[85]
1962년무함마드 이븐 알리 알 사누시 고등 훈장 대띠(리비아)[85]
2014년백색 사자 훈장 1등급(민간)(체코, 추서)[87][88]
1945년왕립예술협회 알버트 메달
1963년미국 명예시민



분류:윈스턴 처칠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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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서적 Everyman's Encyclopaedia Volume Nine: Maps to Nyasa https://archive.org/[...] J.M. Dent & Sons Ltd 2020-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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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서적 Guide to Blenheim Palace The Blenheim Estate Office
[5] London Gazette 1916-09-16
[6] 뉴스 Churchill's torment over death of two year old daughter laid bare https://www.thetimes[...] 2016-02-28
[7] London Gazette 1922-11-10
[8] 서적 Churchill and Ireland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64-01-01
[9] 웹사이트 Meeting Hitler, 1932 https://winstonchurc[...] Hillsdale College 2015-03-05
[10] 웹사이트 The International Situation https://api.parliame[...] House of Commons 1935-10-24
[11] 웹사이트 The International Situation https://api.parliame[...] House of Commons 1935-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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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웹사이트 Churchill's speech impediment https://winstonchurc[...] Bloomsbury Publishing plc 2008-08-29
[15] 웹사이트 Blood, Toil, Tears and Sweat https://winstonchurc[...] Bloomsbury Publishing plc 1940-05-13
[16] 간행물 His Majesty's Government https://api.parliame[...] House of Commons 1940-06-04
[17] 웹사이트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https://winstonchurc[...] Bloomsbury Publishing plc 1940-06-04
[18] 간행물 War Situation – Churchill https://api.parliame[...] House of Commons 1940-06-04
[19] 간행물 War Situation – Churchill https://api.parliame[...] House of Commons 1940-06-18
[20] 웹사이트 Their Finest Hour https://winstonchurc[...] Bloomsbury Publishing plc 1940-06-18
[21] 서적 The Mediterranean and Middle East: The Early Successes Against Italy (to May 1941) Naval & Military Press
[22] 웹사이트 The Few http://www.churchill[...] The Churchill Society, London 1940-08-20
[23] 간행물 War Situation – Churchill https://api.parliame[...] House of Commons 1940-08-20
[24] 학술지 Churchill Offers Toil and Tears to FDR http://www.americanh[...] 2008-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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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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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뉴스 Bengal famine of 1943 caused by British policy failure, not drought: Study https://economictime[...] Bennett, Coleman & Co. Ltd 2019-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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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기술보고서 Famine in the twentieth century http://www.eldis.org[...] Institute of Development Studies
[32] 뉴스 Roosevelt, Churchill Map 1943 War Strategy At Ten-Day Conference Held In Casablanca; Giraud And De Gaulle, Present, Agree On Aims 1943-01-24
[33] 학술지 Stalin at the Tehran, Yalta, and Potsdam Conferences MIT Press 2007-09-01
[34] 웹사이트 Were "Soft Underbelly" and "Fortress Europe" Churchill Phrases? https://winstonchurc[...] Hillsdale College 2016-04-01
[35] 학술지 What Really Happened at Anzio http://www.jstor.org[...] 1985-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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