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훈 (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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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훈은 후한 말, 삼국 시대 인물로, 랑야군 출신이며 조조와 친분이 있었다. 헌제 치세 중평 시대에 패군 건평현의 현장을 지냈고, 원술 휘하에서 로강군 태수가 되었다. 이후 손책과의 대립에서 로강군을 잃고 조조에게 귀순하여 정로장군에 임명되었으나, 교만하고 법을 어긴 죄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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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훈 (자대)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유훈 |
본관 | 낭야군 |
자 | 자대 |
작위 | 화향후 |
생년 | 미상 |
몰년 | 미상 |
출신지 | 서주낭야국 |
주요 활동 | 후한 말기 장군, 군벌 |
관직 | |
초기 관직 | 건평현장 |
주요 관직 | 여강태수 정로장군 하내태수 |
소속 세력 | |
초기 소속 | 원술 |
이후 소속 | 조조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왕송 사마씨 |
친척 | 형제 미상 유위 (조카) |
2. 생애
유훈은 랑야군(琅邪郡중국어) 출신으로, 지금의 린이시, 산둥성 일대이다.[1] 헌제 치세 중평(中平) 연간(184년 ~ 189년) 말, 패군(沛國중국어) 건평현(建平縣; 지금의 샤이현, 허난성 남서쪽)의 현장(長중국어)을 지냈다. 이때 조조와 알게 되었다.[2]
이후 군벌 원술의 장군으로 있었다. 194년, 원술은 손책에게 로강군(廬江郡; 지금의 루안시, 안후이성 일대)을 공격해 태수 육강에게서 빼앗도록 했다. 원술은 손책에게 새 태수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손책이 군을 정복한 후 유훈을 태수로 임명했다.[3]
197년, 원술은 헌제를 배반하고 황제를 자칭했다. 원술 토벌전으로 인해 조조, 여포, 손책 등 여러 군벌의 공격을 받았다. 199년 원술이 몰락하고 죽자, 친척 원윤(袁胤중국어) 등은 로강군 완(皖; 또는 완성 皖城; 지금의 첸산현, 안후이성)으로 달아나 유훈의 보호를 받았다.
199년경 유훈은 회하 남쪽 지역에서 상당한 군대를 거느린 군벌이었다. 손책은 유훈에게서 로강군을 빼앗기 위해 사자를 보내 상료(上繚; 지금의 수이현, 장시성 남동쪽) 공격에 도움을 요청했다. 유훈은 기뻐하며 돕기로 했으나, 유엽은 손책의 계략을 경고했다. 유엽의 경고를 무시하고 상료를 공격하러 간 사이, 손책은 로강군을 장악했다.
로강군을 잃은 후, 유훈은 동생과 추종자들을 데리고 조조에게 합류했다. 조조는 중앙 정부에 유훈을 후작으로 봉하고[4] 정로장군(征虜將軍중국어)으로 임명하도록 건의했다.
유훈은 조조와 오랜 지인이었기 때문에 거만하게 행동했다. 그는 법을 어기고 다른 사람들을 비방했으며, 리선성(李申成중국어)에게 고발당해 범죄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5]
2. 1. 초기 생애와 여강 태수 부임
조조와 친분이 있었다. 중평 말 패국 건평현장(建平―)을 지냈다.[1] 이 시기에 조조를 알게 되었다.[2] 원술의 부하 손책이 여강태수 육강을 2년간의 공성전 끝에 무찔렀고,[17] 원술은 유훈을 그 자리에 앉혔다.[3]199년(건안 4년)[18] 원술이 망하자, 그의 종제 원윤과 사위 황의(黃猗)는 원술의 처자와 부곡을 거느리고 유훈에게 의탁해왔다. 장훈과 양홍은 이전에 독립한 손책에게 귀순하려 하였으므로, 유훈은 그 무리를 습격해 모조리 사로잡고 보물들을 취했다.[19] 유엽은 양주(揚州)에서 준동하던 정보(鄭寶)를 죽이고 그 세력을 들어 귀부하니, 유훈의 기세가 매우 강해졌다.[20]
유훈은 랑야군(琅邪郡중국어) 출신으로, 현재의 린이시, 산둥성 일대에 해당한다.[1]
2. 2. 여강 세력 규합과 손책과의 대립
조조와 친분이 있었다. 중평 말에 패국 건평현장(建平―)을 지냈다. 원술의 부하 손책이 여강태수 육강을 2년간의 공성전 끝에 무찔렀다.[17] 원술은 유훈을 대신 그 자리에 앉혔다. 199년(건안 4년)[18] 원술이 망하자, 그의 종제 원윤과 사위 황의(黃猗)는 원술의 처자와 부곡을 거느리고 유훈에게 의탁해왔다. 장훈과 양홍은 이전에 독립한 손책에게 귀순하려 하였으나, 유훈은 그 무리를 습격해 모조리 사로잡고 보물들을 취했다.[19] 유엽은 양주(揚州)에서 준동하던 정보(鄭寶)를 죽이고 그 세력을 들어 유훈에게 귀부하니, 유훈의 기세가 매우 강해졌다.[20]손책은 모략을 꾸며 유훈과 거짓 동맹을 맺고 상료(上繚)를 치라고 충동하였다. 유훈은 신장된 세력에 비해 식량이 적었다. 예장태수 화흠에게 종제 유해(劉偕)를 보내 양식을 구하려 했지만, 화흠의 사정 역시 여의치 않았다. 따라서 상료의 풍부한 물자를 탐내 손책의 제안을 기뻐했다. 유엽은 상료는 견고해서 공략에 시일이 걸리는데, 그 틈에 손책이 후방으로 쳐들어오면 손을 쓸 수가 없다며 본거지를 비우지 말라고 진언했으나,[20] 유훈은 손책을 믿고 상료로 출진하였다. 해혼(海昏, 지금의 장시성 융슈 현)에 이르자 상료 사람들이 알아차리고 숨어버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2. 3. 조조 휘하에서의 활동과 몰락
199년경 유훈은 남쪽 회하 지역에서 상당한 군대를 거느린 소규모 군벌이었다. 손책은 유훈으로부터 로강군을 빼앗을 계획을 세우고 사자를 보내 상료 공격에 도움을 요청했다. 유훈은 기뻐하며 돕기로 했으나, 유엽은 손책의 계략을 경고했다. 유엽의 경고를 무시하고 상료를 공격하러 간 사이, 손책은 로강군을 장악했다.[3] 이때 손책은 주유와 함께 환성(皖城, 지금의 안후이성 첸산 현)을 손에 넣고 유훈의 부곡과 처자를 빼앗았다. 유훈은 급히 군을 돌렸지만 팽택(彭澤, 지금의 주장시 동부 장강 남안)에서 손분과 손보 형제에게 패하고 심양(尋陽, 지금의 후베이성 황메이 현)의 치마정(置馬亭)으로 퇴각하였다. 환은 이미 잃었기에 서새산(西塞山)의 유기(流沂)[21]로 들어가 최후의 보루를 쌓고 유표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강하태수 황조의 큰아들 황역이 원군으로 달려왔지만 끝내 손책에게 패했다.[3]로강군을 잃은 유훈은 동생, 추종자들과 함께 조조에게 합류했다. 조조는 중앙 정부에 유훈을 후작으로 봉하고[4]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임명하도록 건의했다.[3] 이후 화향후(華鄕侯)와 평로장군(平虜將軍)[22]에 하내태수를 겸했다. 20살에 가까운 딸의 창(瘡)을 화타가 치료해줬다.[23] 213년 위공(魏公)에 오르라는 헌제의 책명을 사양하는 조조에게 다른 여러 신하들과 같이 이를 받으라고 권하였다.[24]
유훈은 조조와의 오랜 인연을 믿고 거만하게 행동하며 법을 어기고 비방하는 말을 자주 했다. 빈객과 자제들도 수차례 범법 행위를 저질러 광평현령(廣平―) 사마지(司馬芝)에게 처벌받기도 하였다.[25] 법을 위반하고 비방하는 것이 도가 지나쳐 결국 이신성(李申成)에게 고발당하고 사형되었다. 형의 아들 유위(劉威)는 면직되었다.[5]
3. 가족 관계
유훈의 첫 번째 부인은 왕송(王宋)이었다. 왕송은 손책의 군대가 여강군을 정복했을 때 포로로 잡혔지만, 나중에 남편에게 돌아올 수 있었다.[29] 유훈은 왕송과 20년 넘게 결혼했지만, 부부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유훈은 산양군(현재 산둥성) 출신의 사마씨 성을 가진 첩을 총애하기 시작했고, 왕송과 이혼하고 첩으로 바꾸려는 의도를 품었다. 이에 왕송은 유훈을 떠났으며, 이후 자신의 심정을 묘사하는 두 편의 시를 썼다.[29]
유훈에게는 예주 자사(刺史)로 있던 형이 있었는데, 조조에게 투항할 즈음에 사망했다. 형이 병으로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유위(劉威)가 자사 직무를 대행했다.[6] 유위는 숙부 유훈이 죄로 처형된 후 면직되었다.[5]
참조
[1]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2
[2]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2
[3]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2
[4]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2
[5]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2
[6]
서적
Weilue annotation in Sanguozhi vol. 12
[7]
서적
『三国志』
[8]
서적
『三国志』魏志「司馬芝伝」が引く『魏略』
[9]
서적
『三国志』魏志「司馬芝伝」が引く『魏略』
[10]
서적
『三国志』呉志「孫破虜討逆伝」が引く『江表伝』
[11]
서적
『三国志』魏志「司馬芝伝」が引く『魏略』
[12]
서적
『三国志』「方技伝」が引く『華佗別伝』
[13]
서적
『後漢書』「献帝紀」
[14]
서적
『三国志』呉志「破虜討逆伝」
[15]
서적
『三国志』呉志「孫破虜討逆伝」が引く『江表伝』
[16]
문서
そのときの劉勲は「平虜将軍」と記されている。
[17]
서적
《후한서》31권 열전 제21 육강
[18]
서적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19]
서적
《삼국지》46권 오서 제1 손책
[20]
서적
《삼국지》14권 위서 제 14 유엽
[21]
문서
《강표전》에서는 기(沂)라 하였으나 《[[자치통감]]》63권 한기 제55 헌제 건안 4년을 따른다.
[22]
문서
〈사마지전〉에서는 정로장군(征虜―)이라 하였으나 〈무제기〉에 인용된 《위서》와 〈문제기〉에 인용된 《전론》(典論)을 따른다.
[23]
서적
《화타별전》
[24]
서적
《위서》
[25]
서적
《삼국지》12권 위서 제12 사마지
[26]
서적
《후한기》27권, 《삼국지》1권 위서 제1 무제 조조
[27]
서적
《후한서》9권 본기 제9 효헌제 유협 흥평 원년
[28]
서적
《오록》
[29]
서적
《[[옥대신영]]》2권 잡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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