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훈 (197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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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상훈은 1970년생으로, 서울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를 졸업한 야구 선수이다. 1992년 LG 트윈스에 입단하여, 1994년 팀의 우승을 이끌며 최다승을 기록했다. 1995년에는 좌완 투수 최초로 20승을 달성하며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후 일본 주니치 드래건스, 미국 보스턴 레드삭스를 거쳐 2002년 LG 트윈스로 복귀했다. 2004년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된 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록 밴드 '왓!'의 보컬로 활동했으며, 야구 해설 위원과 코치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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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1970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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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상훈 |
로마자 표기 | I Sang-hun |
한글 | 이상훈 |
출생일 | 1971년 3월 11일 |
출생지 | 서울특별시 |
신체 | 키: 180cm 몸무게: 85kg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선수 경력 | |
KBO 리그 | LG 트윈스 (1993년–1997년) LG 트윈스 (2002년–2003년) SK 와이번스 (2004년) |
NPB | 주니치 드래건스 (1998년–1999년) |
MLB | 보스턴 레드삭스 (2000년) |
코치 경력 | |
수상 경력 | |
KBO 리그 | 한국시리즈 우승 (1994년) 골든글러브 (1995년) |
NPB | 센트럴 리그 우승 (1999년) |
국제 대회 | 2002년 아시안 게임 금메달 |
KBO 리그 기록 | |
통산 성적 | 승-패: 71승 40패 평균자책점: 2.56 탈삼진: 781개 세이브: 98개 |
MLB 기록 | |
통산 성적 | 승-패: 0승 0패 평균자책점: 3.09 탈삼진: 6개 |
NPB 기록 | |
통산 성적 | 승-패: 7승 5패 평균자책점: 3.30 탈삼진: 98개 세이브: 3개 |
프로 입단 | |
드래프트 | 1993년 KBO 1차 지명 (LG 트윈스) |
데뷔 | KBO: 1993년 4월 10일 NPB: 1998년 MLB: 2000년 6월 29일 |
최종 | KBO: 2004년 5월 18일 NPB: 1999년 MLB: 2000년 10월 1일 |
기타 정보 | |
영구 결번 | LG 트윈스 (47번) |
해설 | MBC 스포츠플러스 야구 해설위원 (2019년 ~ 현재) |
2. 선수 시절
서울고를 졸업하고 고려대로 진학했다. 고려대 4학년 시절 성균관대 타자들을 상대로 14타자 연속 탈삼진 신기록을 세웠다. 1992년 1차 드래프트 1순위로 LG 트윈스에 입단했으며, 당시 신인 선수 중 역대 최고액인 1억 8천 8백만 원의 계약금을 받았다.
1993년에 1차 지명을 받고 LG에 입단하였다. 1억 8천 8백 원(당시 환율로 약 2,000만 엔)의 계약금은 당시 신인 선수 중 역대 최고액이었다. 프로 입단 시의 등번호 '''47'''의 유래는 "([당시] 세이부의 47번을 다는 좌완 투수를 동경했다"고 본인이 밝혔다.
1993년, 루키 시즌이었던 이 해에는 9승 9패를 기록했지만, 8월 중순에 어깨 부상으로 도중 하차했다. 그 후 팀이 부진했던 원인이 되었다. 이 어깨 부상은 지병인 습관성 탈구에 의한 것으로, 왼팔의 혈행 장애와 함께 여러 번 그를 괴롭혔다.
1994년에 18선발승(최다)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으나 최다승[11] 이외의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해 정규시즌 MVP 경쟁에서 탈락했다. 1995년에 KBO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국내 좌완 20승 투수가 됐지만 9월 부진과 포스트시즌에서의 부진 탓인지[12] 정규시즌 MVP 경쟁에서 밀려났으나 그 해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2014년 밴 헤켄, 2017년 양현종이 그 기록 타이를 이루었으며[13] 밴 헤켄 양현종 외에도 1985년 김일융이 거둔 단일 시즌 좌완 선발 최다 승 기록과 타이).
1996년에 손가락 혈행 장애와 척추 분리증으로 인해 마무리로 보직을 변경했다. 1997년에 37세이브로 당시 KBO 리그 세이브 신기록을 세웠다. 1997년 말 해외 진출을 선언하여 메이저 리그 사무국에 포스팅 공시를 신청했으나, 최고 응찰액이 60만 달러(약 6억 5,000만원)에 그치며 메이저 리그 진출을 포기했다.
2002년 시즌 도중부터 출전하게 된 2002년이지만, 7승 2패 18 세이브, 평균 자책점 1.68로 팀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2승 3패로 맞이한 시리즈 6차전, 3점 리드의 9회말에 등판하여,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맞아 강판되었다.
2003년에는 4승 4패 30세이브를 기록했지만, 구위 저하로 인해 구원 실패도 눈에 띄기 시작하여 평균 자책점 3.34로, 이전의 안정감을 잃었다.
1998년 4월 14일 LG 트윈스와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팀 주니치 드래건스 간의 임대 계약 협상을 통해 이적해[14] 1999년까지 활동했다. 당시 등록명은 그의 별명을 딴 '삼손 리'(Samson Lee)였다.
1998년, 주니치 드래건스 (NPB<센트럴 리그>)에 입단했다. 등번호는 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17번. 삼성의 입단에 따라, 그 전까지 17번을 달았던 히라타 히로시는 등번호를 박탈당했다.[6] 당시 주니치에는 선동열・이종범이 재적하고 있어, 삼성을 더한 한국인 선수 3명을 "3총사"라고 불렀다. 상술한 메이저 진출 소동으로 인해 문제가 생겨, 계약이 4월로 늦어진 탓에 캠프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해 얻어맞는 경우가 많았다.[7] 5월 9일의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도쿄 돔)에서, NPB 첫 등판을 했지만, 모토키 다이스케에게 던진 1볼 2스트라이크로부터의 5구째를 홈런으로 맞았다. 6월 6일의 같은 경기에서는, 또다시 모토키에게 1사 만루에서 주자 일소 3루타를 맞았다.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로부터 시즌 도중에 2군 강등을 명령받았고, 지병이었던 허리 통증과 혈행 장애의 재발도 겹쳐, 1년차에는 1승에 그쳤다.[8]
1999년에는, 당초 선발 투수로 기용되었지만, 혈행 장애 및 대학교 시절부터의 지병인 습관성 탈구의 영향으로, 후반에는 구원 투수로 전향하여, 이와세 히토키, 오치아이 에이지와 함께 활약했다. 6승을 거두어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팔꿈치 부상으로 출전 선수 등록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일본 시리즈를 앞두고 언론에 다음 해의 메이저 진출 의향을 밝혔다. 같은 해 오프에 주니치를 퇴단하고,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1999년 오프에 주니치 드래건스를 퇴단하고,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이로써 한국・일본・미국 3개국의 프로 리그를 경험하는 선수가 되었다. 이상훈 이전에는 스콧 쿨보, 후에 훌리오 프랑코, 구대성, 고츠 신고 등도 이에 해당한다.[8] 2000년 구원 투수로서 메이저 리그에 승격하여 등판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메이저 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산하 마이너 리그 팀인 포터킷 레드삭스에서 주로 활동했다. 메이저 리그에는 9경기를 등판했다.
2002년 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인 새크라멘토 리버 캣츠로 이적했으나, 그 해 4월에 방출되었다.[15] 방출 후 한국 복귀 의사를 전했고, 당시 LG 트윈스 감독이었던 김성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2002년 5월 18일 KIA전을 통해 복귀했다.[16] 그 해 부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해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허용하며 블론 세이브를 기록했고, 이로 인해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머무르는데 빌미를 제공했다.
2003년에 30세이브를 거두면서 마무리 투수로 굳건했던 이상훈은 당시 감독이었던 이순철과의 갈등으로 시즌 직전인 2004년 1월 14일 외야수 양현석과 투수 오승준을 상대로 SK 와이번스에 트레이드되었다.[17] 그러나 성적 부진에 빠진 그는 승리 없이 3패, 3세이브,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심리적인 부담으로 2군에 내려간 후, 그 해 6월 2일 당시 감독이었던 조범현에게 은퇴 의사를 밝혔다.[18]
2. 1. 아마추어 시절
이상훈은 서울고를 졸업하고 고려대로 진학했다. 고려대 4학년 시절 성균관대 타자들을 상대로 14타자 연속 탈삼진 신기록을 세웠다. 1992년 1차 드래프트 1순위로 LG 트윈스에 입단했으며, 당시 신인 선수 중 역대 최고액인 1억 8천 8백만 원의 계약금을 받았다.2. 2. 한국 프로야구 시절
1993년에 1차 지명을 받고 LG에 입단하였다. 1억 8천 8백 원(당시 환율로 약 2,000만 엔)의 계약금은 당시 신인 선수 중 역대 최고액이었다. 프로 입단 시의 등번호 '''47'''의 유래는 "([당시] 세이부의 47번을 다는 좌완 투수를 동경했다"고 본인이 밝혔다.1993년, 루키 시즌이었던 이 해에는 9승 9패를 기록했지만, 8월 중순에 어깨 부상으로 도중 하차했다. 그 후 팀이 부진했던 원인이 되었다. 이 어깨 부상은 지병인 습관성 탈구에 의한 것으로, 왼팔의 혈행 장애와 함께 여러 번 그를 괴롭혔다.
1994년에 18선발승(최다)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으나 최다승[11] 이외의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해 정규시즌 MVP 경쟁에서 탈락했다. 1995년에 KBO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국내 좌완 20승 투수가 됐지만 9월 부진과 포스트시즌에서의 부진 탓인지[12] 정규시즌 MVP 경쟁에서 밀려났으나 그 해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2014년 밴 헤켄, 2017년 양현종이 그 기록 타이를 이루었으며[13] 밴 헤켄 양현종 외에도 1985년 김일융이 거둔 단일 시즌 좌완 선발 최다 승 기록과 타이).
1996년에는 시즌 초반 어깨 부상 및 허리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이에 따라 팀 성적이 부진했고, 감독인 이광환의 시즌 중도 해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97년에는 어깨 부상의 영향으로 한 경기에 많은 투구를 할 수 없어 마무리로 전향하여 최우수 구원 투수를 획득했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당시 메이저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한 박찬호의 영향으로, 구단 승인 하에 포스팅 시스템에 의한 메이저 이적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프로 야구의 수준이 해외에 알려지지 않아, 최소 200만 달러의 이적료를 기대한 구단 측의 의도와 달리 보스턴 레드삭스는 60만 달러에 낙찰했다.
2002년 시즌 도중부터 출전하게 된 2002년이지만, 7승 2패 18 세이브, 평균 자책점 1.68로 팀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2승 3패로 맞이한 시리즈 6차전, 3점 리드의 9회말에 등판하여,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맞아 강판되었다.
2003년에는 4승 4패 30세이브를 기록했지만, 구위 저하로 인해 구원 실패도 눈에 띄기 시작하여 평균 자책점 3.34로, 이전의 안정감을 잃었다.
1998년 4월 14일 LG 트윈스와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팀 주니치 드래건스 간의 임대 계약 협상을 통해 이적해[14] 1999년까지 활동했다. 당시 등록명은 그의 별명을 딴 '삼손 리'(Samson Lee)였다.
1998년, 주니치 드래건스 (NPB<센트럴 리그>)에 입단했다. 등번호는 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17번. 삼성의 입단에 따라, 그 전까지 17번을 달았던 히라타 히로시는 등번호를 박탈당했다.[6] 당시 주니치에는 선동열・이종범이 재적하고 있어, 삼성을 더한 한국인 선수 3명을 "3총사"라고 불렀다. 상술한 메이저 진출 소동으로 인해 문제가 생겨, 계약이 4월로 늦어진 탓에 캠프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해 얻어맞는 경우가 많았다.[7] 5월 9일의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도쿄 돔)에서, NPB 첫 등판을 했지만, 모토키 다이스케에게 던진 1볼 2스트라이크로부터의 5구째를 홈런으로 맞았다. 6월 6일의 같은 경기에서는, 또다시 모토키에게 1사 만루에서 주자 일소 3루타를 맞았다.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로부터 시즌 도중에 2군 강등을 명령받았고, 지병이었던 허리 통증과 혈행 장애의 재발도 겹쳐, 1년차에는 1승에 그쳤다.[8]
1999년에는, 당초 선발 투수로 기용되었지만, 혈행 장애 및 대학교 시절부터의 지병인 습관성 탈구의 영향으로, 후반에는 구원 투수로 전향하여, 이와세 히토키, 오치아이 에이지와 함께 활약했다. 6승을 거두어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팔꿈치 부상으로 출전 선수 등록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일본 시리즈를 앞두고 언론에 다음 해의 메이저 진출 의향을 밝혔다. 같은 해 오프에 주니치를 퇴단하고,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2. 2. 1. LG 트윈스 시절
1993년에 1차 지명을 받고 LG에 입단하였다. 1994년에 18선발승(최다)으로 팀의 우승을 이끌었으나 최다승[11] 이외의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해 정규시즌 MVP 경쟁에서 탈락했다. 1995년에 KBO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국내 좌완 20승 투수가 됐지만 9월 부진과 포스트시즌에서의 부진 탓인지[12] 정규시즌 MVP 경쟁에서 밀려났으나 그 해 투수 부문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2014년 밴 헤켄, 2017년 양현종이 그 기록 타이를 이루었으며[13] 밴 헤켄 양현종 외에도 1985년 김일융이 거둔 단일 시즌 좌완 선발 최다 승 기록과 타이). 1996년에 손가락 혈행 장애와 척추 분리증으로 인해 마무리로 보직을 변경했다. 1997년에 37세이브로 당시 KBO 리그 세이브 신기록을 세웠다. 1997년 말 해외 진출을 선언하여 메이저 리그 사무국에 포스팅 공시를 신청했으나, 최고 응찰액이 60만 달러(약 6억 5,000만원)에 그치며 메이저 리그 진출을 포기했다.1차 드래프트 1순위로 LG 트윈스에 입단했다. 1억 8천 8백 원(당시 환율로 약 2,000만 엔)의 계약금은 당시 신인 선수 중 역대 최고액이었다. 프로 입단 시의 등번호 '''47'''의 유래는 "([당시] 세이부의 47번을 다는 좌완 투수를 동경했다"고 본인이 밝혔다.
1993년, 루키 시즌이었던 이 해에는 9승 9패를 기록했지만, 8월 중순에 어깨 부상으로 도중 하차했다. 그 후 팀이 부진했던 원인이 되었다. 이 어깨 부상은 지병인 습관성 탈구에 의한 것으로, 왼팔의 혈행 장애와 함께 여러 번 그를 괴롭혔다.
1994년에는 18승, 1995년에는 20승으로 2년 연속 최다승을 기록했다. 연간 20승은 한국 프로 야구에서 5년 만의 기록이었다.
1996년에는 시즌 초반 어깨 부상 및 허리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했다. 이에 따라 팀 성적이 부진했고, 감독인 이광환의 시즌 중도 해임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97년에는 어깨 부상의 영향으로 한 경기에 많은 투구를 할 수 없어 마무리로 전향하여 최우수 구원 투수를 획득했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당시 메이저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한 박찬호의 영향으로, 구단 승인 하에 포스팅 시스템에 의한 메이저 이적을 시도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프로 야구의 수준이 해외에 알려지지 않아, 최소 200만 달러의 이적료를 기대한 구단 측의 의도와 달리 보스턴 레드삭스는 60만 달러에 낙찰했다.
2002년 시즌 도중부터 출전하게 된 2002년이지만, 7승 2패 18 세이브, 평균 자책점 1.68로 팀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2승 3패로 맞이한 시리즈 6차전, 3점 리드의 9회말에 등판하여,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맞아 강판되었다.
2003년에는 4승 4패 30세이브를 기록했지만, 구위 저하로 인해 구원 실패도 눈에 띄기 시작하여 평균 자책점 3.34로, 이전의 안정감을 잃었다.
2. 2. 2. 주니치 드래건스 시절
1998년 4월 14일 LG 트윈스와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팀 주니치 드래건스 간의 임대 계약 협상을 통해 이적해[14] 1999년까지 활동했다. 당시 등록명은 그의 별명을 딴 '삼손 리'(Samson Lee)였다.1998년, 주니치 드래건스 (NPB<센트럴 리그>)에 입단했다. 등번호는 한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17번. 삼성의 입단에 따라, 그 전까지 17번을 달았던 히라타 히로시는 등번호를 박탈당했다.[6] 당시 주니치에는 선동열・이종범이 재적하고 있어, 삼성을 더한 한국인 선수 3명을 "3총사"라고 불렀다. 상술한 메이저 진출 소동으로 인해 문제가 생겨, 계약이 4월로 늦어진 탓에 캠프에 제대로 참가하지 못해 얻어맞는 경우가 많았다.[7] 5월 9일의 대 요미우리 자이언츠전 (도쿄 돔)에서, NPB 첫 등판을 했지만, 모토키 다이스케에게 던진 1볼 2스트라이크로부터의 5구째를 홈런으로 맞았다. 6월 6일의 같은 경기에서는, 또다시 모토키에게 1사 만루에서 주자 일소 3루타를 맞았다. 감독이었던 호시노 센이치로부터 시즌 도중에 2군 강등을 명령받았고, 지병이었던 허리 통증과 혈행 장애의 재발도 겹쳐, 1년차에는 1승에 그쳤다.[8]
1999년에는, 당초 선발 투수로 기용되었지만, 혈행 장애 및 대학교 시절부터의 지병인 습관성 탈구의 영향으로, 후반에는 구원 투수로 전향하여, 이와세 히토키, 오치아이 에이지와 함께 활약했다. 6승을 거두어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팔꿈치 부상으로 출전 선수 등록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일본 시리즈를 앞두고 언론에 다음 해의 메이저 진출 의향을 밝혔다. 같은 해 오프에 주니치를 퇴단하고,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2. 3. 미국 프로야구 시절
1999년 오프에 주니치 드래건스를 퇴단하고,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했다. 이로써 한국・일본・미국 3개국의 프로 리그를 경험하는 선수가 되었다. 이상훈 이전에는 스콧 쿨보, 후에 훌리오 프랑코, 구대성, 고츠 신고 등도 이에 해당한다.[8] 2000년 구원 투수로서 메이저 리그에 승격하여 등판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메이저 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산하 마이너 리그 팀인 포터킷 레드삭스에서 주로 활동했다. 메이저 리그에는 9경기를 등판했다.2. 3. 1. 보스턴 레드삭스 시절
2000년에 구원 투수로서 메이저 리그에 승격하여 등판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8] 2000년부터 2001년까지 메이저 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산하 마이너 리그 팀인 포터킷 레드삭스에서 주로 활동했다. 메이저 리그에는 9경기를 등판했다.2. 4. 한국 프로야구 복귀
2002년 시즌 개막 전, 레드삭스로부터 웨이버 공시에 걸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3A 팀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당시 애슬레틱스는 메이저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투수진을 보유하고 있어, 메이저 승격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그 후, LG 트윈스로부터의 요청을 받아 옛 소속팀으로 복귀했다. 한국 구계로 복귀할 때에는 원래 소속팀으로 무조건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해외 이적을 용인했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한다. 시즌 도중부터 출전하게 된 2002년이지만, 7승 2패 18 세이브, 평균 자책점 1.68로 팀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2승 3패로 맞이한 시리즈 6차전, 3점 리드의 9회말에 등판하여,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맞아 강판되었다. 삼성의 뒤를 이은 최원호는, 곧바로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아, 팀은 그대로 패배했다. 한국 시리즈에서의 끝내기 패배는 사상 처음이었다.2. 4. 1. LG 트윈스 복귀
2002년 초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인 새크라멘토 리버 캣츠로 이적했으나, 그 해 4월에 방출되었다.[15] 방출 후 한국 복귀 의사를 전했고, 당시 LG 트윈스 감독이었던 김성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2002년 5월 18일 KIA전을 통해 복귀했다.[16] 그 해 부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해 금메달을 획득했다. 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허용하며 블론 세이브를 기록했고, 이로 인해 한국시리즈 준우승에 머무르는데 빌미를 제공했다.2002년 시즌 개막 전, 레드삭스로부터 웨이버 공시에 걸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3A 팀으로 이적했다. 하지만 당시 애슬레틱스는 메이저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투수진을 보유하고 있어, 메이저 승격은 거의 절망적이었다. 그 후, LG 트윈스로부터의 요청을 받아 옛 소속팀으로 복귀했다. 한국 구계로 복귀할 때에는 원래 소속팀으로 무조건 돌아가는 것을 전제로 해외 이적을 용인했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한다. 시즌 도중부터 출전하게 된 2002년이지만, 7승 2패 18 세이브, 평균 자책점 1.68로 팀이 한국 시리즈에 진출하는 주역이 되었다. 그러나 2승 3패로 맞이한 시리즈 6차전, 3점 리드의 9회말에 등판하여, 이승엽에게 동점 3점 홈런을 맞아 강판되었다. 삼성의 뒤를 이은 최원호는, 곧바로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아, 팀은 그대로 패배했다. 한국 시리즈에서의 끝내기 패배는 사상 처음이었다.
2. 4. 2. SK 와이번스 시절
2003년에 30세이브를 거두면서 마무리 투수로 굳건했던 이상훈은 당시 감독이었던 이순철과의 갈등으로 시즌 직전인 2004년 1월 14일 외야수 양현석과 투수 오승준을 상대로 SK 와이번스에 트레이드되었다.[17] 그러나 성적 부진에 빠진 그는 승리 없이 3패, 3세이브, 5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심리적인 부담으로 2군에 내려간 후, 그 해 6월 2일 당시 감독이었던 조범현에게 은퇴 의사를 밝혔다.[18]3. 야구선수 은퇴 후
2004년,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었으나 부진으로 시즌 도중인 6월 7일에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WHAT!"이라는 밴드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로 한국에서 활동했다.[https://japanese.joins.com/JArticle/96362] 또한 서울에서 이발소 등을 경영했다.
2012년 가을, 김성근 (LG 재직 시 감독)의 권유로 독립 구단 "고양 원더스"의 투수 코치로 취임했다. 그 때 트레이드 마크였던 금발 롱 헤어를 짧게 잘랐다.
2015년, 원더스 해산에 따라 두산 베어스의 2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
2016년부터는 옛 소속팀 LG 트윈스의 2군・3군 투수 아카데미 담당이 되었고, 2018년에 퇴임했다.
2019년부터 한국의 스포츠 텔레비전 방송에서 야구 해설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3. 1. 가수 시절
이상훈은 은퇴 후 2004년 록 밴드 '왓!'을 통해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19] 2010년 10월 3일 록 페스티벌 공연 중에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비난하는 발언을 해 공연이 중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19]3. 2. 코치 시절
2009년 7월에는 LG 트윈스의 프런트로부터 코치 제의를 받았으나 무산되었고, 2010년 4월에는 자신의 인격권과 퍼블리시티권을 구단이 무단 도용했다며 LG 트윈스의 팬 게시판에 글을 올려 큰 파문을 일으켰다.[21] LG 트윈스 팬들은 잠실 더비 때 구단에 항의하는 뜻으로 그를 응원하는 현수막을 올리는 등, 팬들 사이에서도 큰 파장이 일었다.[22] 현수막 사건 이후 그는 한 발 물러섰고, 팬들에게는 현수막을 내리라는 뜻을 전한 후 구단과의 종전을 선언했다.[23] 2011년 경기도 하남시 초이동에 전승남과 함께 야구 클리닉을 운영했다.[24] 2012년 11월 6일 고양 원더스의 투수코치로 부임하며 8년 만에 야구계에 복귀했다.[25] 고양 원더스 해체 후 한화 이글스 코치로 이동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26] 두산 베어스에 갓 취임한 김태형 감독의 부름을 받아 두산 베어스의 2군 투수코치로 선임됐다.[27] "좌완 투수 불모지"라고 불렸던 두산 베어스에서 좌완 투수 육성을 위해 영입되었고, 투수코치로서 두산 베어스 팬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28] 2015 시즌 후 LG 트윈스의 부름을 받아 정식으로 코치 계약을 맺고 친정 팀에 복귀, 유망주 투수들의 체계적인 성장을 돕기 위해 LG 트윈스 구단 자체에서 이천 2군에 개설한 피칭 아카데미의 초대 원장을 맡았다.[29] 2012년 가을, 김성근의 권유로 독립 구단 "고양 원더스"의 투수 코치로 취임했다. 2015년에는 원더스 해산에 따라 두산 베어스의 2군 투수 코치를 맡았다. 2016년부터는 옛 소속팀 LG 트윈스의 2군・3군 투수 아카데미 담당이 되었고, 2018년에 퇴임했다.3. 3. 해설자
2018 시즌이 끝나고 LG 트윈스의 피칭 아카데미가 사라지고 코치직을 사임한 후, 2019 시즌부터 MBC 스포츠플러스의 야구 해설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차명석 LG 단장은 이상훈 코치의 사임 이후 47번을 비워 놓을테니 언제든 기다리겠다고 밝혔다.4. 기타
긴 머리와 역동적인 투구폼 때문에 '야생마'라고 불린다. '47'번은 1993년 ~ 1997년, 2002년 ~ 2004년, 2016년 ~ 2018년에 LG 트윈스와 SK 와이번스에서, 2013년 ~ 2014년에는 고양 원더스에서 사용한 등번호이다. 1998년 ~ 1999년에는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17'번, 2000년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는 '40'번, 그리고 2015년 두산 베어스에서는 '85'번을 달았다. 처남은 속사포 래퍼인 아웃사이더이다. 두 사람은 장르가 다르지만 같은 음악인으로 활동한 적이 있으며, 아웃사이더는 LG 트윈스 응원가 중 하나인 '엘(L)팬의 북소리'를 만들어 헌정했을 정도로 LG 트윈스의 열렬한 팬이다. "삼성(Samson)"이라는 애칭은 투수진의 든든한 기둥으로서 팀을 지탱하는 모습이,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장발의 사사인 삼손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한국 스포츠 신문이 붙였다.
5. 출신 학교
6. 통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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