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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쿠라 가쓰시게 (15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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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타쿠라 가쓰시게는 1545년 이타쿠라 요시시게의 차남으로 태어나 정토진종 승려가 되었으나, 동생의 죽음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에 따라 환속하여 무사가 되었다. 그는 슨푸 정 봉행, 간토 다이칸, 에도 정 봉행을 거쳐 1601년 교토 정 봉행(후의 교토 쇼시다이)으로 임명되어 교토의 치안 유지와 조정 통제를 담당했다. 1603년 종5위하에 서임되었고, 고요제이 천황의 양위 문제, 오사카 전투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1620년 아들에게 교토 쇼시다이 직을 물려주고 1624년 79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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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쿠라 가쓰시게 (1545년)
기본 정보
이타쿠라 가쓰시게 초상 (초엔지 소장)
시대전국 시대 - 에도 시대 전기
출생덴분 14년 (1545년)
사망간에이 원년 4월 29일 (1624년6월 14일)
개명고요 소테쓰 (법명) → 가쓰시게
이명통칭: 시로에몬
계명종4위하 행 시종 겸 이가노카미 겐아손 가쓰시게 겐에이코지
묘소아이치현니시오시 가이부키초 이리 소재 초엔지
관위종5위하, 이가노카미, 종4위하, 시종
막부에도 막부 교토 쇼시다이
섬긴 주군도쿠가와 이에야스히데타다
씨족이타쿠라 씨
부모아버지: 이타쿠라 요시시게, 어머니: 혼다 미쓰쓰구 딸
형제다다시게, 가쓰시게, 사다시게
배우자정실: 아오 나가카쓰 딸
자녀시게무네, 시게마사, 시게토, 도다 미쓰마사 부인
가와무라 시게히사 부인, 마키 고다유 부인
안도 시게요시 정실 (후 도쿠야마 나오마사 부인)
양자: 시게요시
특기 사항가쓰시게의 부인은 선夫 나카지마 시게쓰구와의 아들 시게요시와 딸 2명을 데리고 재혼하여, 가쓰시게의 양자로 삼았다. 나카지마 요고로 시게요시는 후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허락을 얻어, 게이초 6년 (1601년)에 미카와국 아쓰미군 오사키에 607석을 받아 실부의 가계를 재흥하여, 교대 요리아이 하타모토 나카지마 요고로 (나카지마 요고로) 가문의 조상이 되었다. 나카지마 가문은 훗날 지행 1천석을 넘었다. 오다 가문에 속했던 나카지마 요고로 마사나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딸 오도쿠의 시집에 따라 도쿠가와 가문 가신이 되었다. 마사나리의 아들이자, 시게요시 실부인 나카지마 요고로 시게쓰구는 덴쇼 4년에 도토미국 사가라 앞바다에서 다케다 씨의 해적 무리와 교전하여 패사했다. 시게요시도 덴쇼 18년에는 도쿠가와 씨의 배팀 오가사와라 마사요시 (하즈 오가사와라 씨)의 추천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배알하여, 배팀 역할을 맡았다는 기록이 있다. 주어진 영지 오사키에서도 바다에 면한 오사키성터에 진야를 짓고, 장군의 상락 때는 미카와만의 해상 경비를 명받았다. 도쿠가와 씨에게 나카지마 가문은, 이타쿠라 씨의 추천이 없어도 미카와의 바다를 수비하기 위해 필요했을 수도 있다.
관직 및 직책
이타쿠라 씨 당주 임기1581년 ~ 1620년
야마시로국·오미국의 다이묘 (이타쿠라 가) 임기1609년 ~ 1620년
교토 쇼시다이임기: 1601년 ~ 1619년
대수: 2
교토 쇼시다이 전임오쿠다이라 노부마사
교토 쇼시다이 후임이타쿠라 시게무네

2. 생애

1545년, 이타쿠라 요시시게의 차남으로 미카와 국누카타 군 오미 촌[13]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정토진종 영안사의 승려 코요 소테쓰로 출가했다. 그러나 아버지 요시시게가 1561년 젠묘테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가문을 이은 동생 이타쿠라 사다시게 또한 1581년 다카텐진 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환속하여 무사가 되어 가문을 상속했다.

가쓰시게는 주로 시정 면에 종사했다. 1586년 이에야스가 하마마쓰 성에서 슨푸 성으로 거처를 옮길 때 슨푸 정 봉행을 맡았다. 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이봉되자 무사시 국니자 군・도요시마 군에서 1000곡을 받아 간토 다이칸, 에도 정 봉행이 되었다. 1601년에는 교토 정 봉행(후의 교토 쇼시다이)으로 임명되어 교토의 치안 유지, 조정 장악, 도요토미 가문 감시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603년 이에야스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열었을 때 종5위하・이가노카미에 서임되었다. 1609년 이노쿠마 사건에서는 교토 쇼시다이로서 고요제이 천황과 이에야스의 의견 조정을 도모하여 조정 통제를 강화했다. 1610년 고요제이 천황의 양위 문제와 1612년 고요제이 상황의 서적 인도 문제 등에서 이에야스의 의향을 관철시키는 데 힘썼다. 1613년에는 공가중 법도 작성에 관여했다.

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의 발단이 된 호코지 범종 명문 사건에서는 강경책을 주장했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교토 방화 계획을 저지했다.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금중 및 공가 제법도 시행에 있어서 조정에 대한 지도와 감시에 임했다.

1619년 오요쓰 고료닌 사건으로 인한 고미즈노오 천황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1620년 도쿠가와 가즈코의 입내를 성사시켰다. 1620년 아들 이타쿠라 시게무네에게 교토 쇼시다이 직을 물려주었다.

1623년 종4위하로 승진하여 시지주에 임명되었다. 1624년 79세로 사망했다.

이타쿠라 가쓰시게의 묘인 조엔지 쇼에이도 (아이치현 지정 문화재)

2. 1. 출생과 가문 상속

1545년, 이타쿠라 요시시게의 차남으로 미카와 국누카타 군 오미 촌[13]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는 정토진종의 영안사 승려로 출가하여 코요 소테쓰가 되었으나, 1561년 아버지 요시시게가 젠묘테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1581년 가문을 이은 동생 이타쿠라 사다시게마저 다카텐진 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환속하여 무사가 되어 가문을 상속했다. 주로 시정 면에 종사했으며, 1586년 이에야스가 하마마쓰 성에서 슨푸 성으로 거처를 옮길 때 슨푸 정 봉행을 맡았다.

2. 2. 초기 활동 및 도쿠가와 가문에서의 역할

이타쿠라 가쓰시게는 1545년 이타쿠라 요시시게의 차남으로 미카와 국누카타 군 오미 촌에서 태어났다.[13] 어린 시절에는 정토진종 영안사의 승려 코요 소테쓰로 출가했다. 그러나 아버지 요시시게가 1561년 젠묘테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가문을 이은 동생 이타쿠라 사다시게 또한 1581년 다카텐진 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환속하여 무사가 되어 가문을 상속했다.

가쓰시게는 주로 시정 면에 종사했다. 1586년 이에야스가 하마마쓰 성에서 슨푸 성으로 거처를 옮길 때 슨푸 정 봉행을 맡았다. 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이봉되자 무사시 국니자 군・도요시마 군에서 1000곡을 받아 간토 다이칸, 에도 정 봉행이 되었다. 1601년에는 교토 정 봉행(후의 교토 쇼시다이)으로 임명되어 교토의 치안 유지, 조정 장악, 도요토미 가문 감시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603년 이에야스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열었을 때 종5위하・이가노카미에 서임되었다. 1609년 이노쿠마 사건에서는 교토 쇼시다이로서 고요제이 천황과 이에야스의 의견 조정을 도모하여 조정 통제를 강화했다. 1610년 고요제이 천황의 양위 문제와 1612년 고요제이 상황의 서적 인도 문제 등에서 이에야스의 의향을 관철시키는 데 힘썼다. 1613년에는 공가중 법도 작성에 관여했다.

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의 발단이 된 호코지 범종 명문 사건에서는 강경책을 주장했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교토 방화 계획을 저지했다.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금중 및 공가 제법도 시행에 있어서 조정에 대한 지도와 감시에 임했다.

1619년 오요쓰 고료닌 사건으로 인한 고미즈노오 천황과의 갈등을 해결하고, 1620년 도쿠가와 가즈코의 입내를 성사시켰다. 1620년 아들 이타쿠라 시게무네에게 교토 쇼시다이 직을 물려주었다.

1623년 종4위하로 승진하여 시지주에 임명되었다. 1624년 79세로 사망했다.

2. 3. 교토 쇼시다이 임명과 조정 통제

이타쿠라 가쓰시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환속하여 무사가 된 후, 주로 시정 면에서 활약했다. 1586년 이에야스가 하마마쓰 성에서 슨푸 성으로 거처를 옮길 때 슨푸 정 봉행을 맡았고, 1590년 이에야스가 간토로 이봉되자 무사시 국니자 군・도요시마 군에서 1000곡을 받아 간토 다이칸, 에도 정 봉행이 되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다음 해인 1601년, 5600곡이 가증되어 6600곡을 영유함과 동시에 교토 정 봉행(후의 교토 쇼시다이)으로 임명되어, 교토의 치안 유지, 조정 장악, 도요토미 가문 감시에 임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유모를 공모하여 가스가노 쓰보네가 응모했다는 설이 있는데, 사나다 조요의 『묘료코 한』에 따르면, 교토 아와타구치에서 유모 공모 방을 세운 곳에 상경한 후쿠(후의 가스가노 쓰보네)가 가쓰시게에게 출사를 요청하여 채용되었다고 한다.

1603년 이에야스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열었을 때 종5위하・이가노카미에 서임되었고, 1609년 오미 국・야마시로 국에 영지를 가증받아 1만 6600곡을 지행, 다이묘에 올랐다. 같은 해 이노쿠마 사건에서는 교토 쇼시다이로서 고요제이 천황과 이에야스의 의견 조정을 도모하여 처분을 결정하고 조정 통제를 강화했다.

1610년 고요제이 천황의 양위 문제로 무가 덴소인 히로하시 가네카쓰・칸슈지 미쓰토요와 상담하고, 천황과 이에야스가 대립하자 고노에 노부타다 등에게 공작을 펼쳐 양위를 연기시켰다. 1612년에는 고미즈노오 천황에게 서적 인도를 거부하는 고요제이 상황에 대해 인도를 설득했고, 1613년에는 공가중 법도 작성에 관여했다.

오사카 전투의 발단이 된 호코지 범종 명문 사건에서는 혼다 마사즈미 등과 함께 강경책을 상주했고, 1615년 여름 전투에서는 기무라 무네키의 교토 방화 계획을 저지했다. 금중 및 공가 제법도 시행 후에는 조정이 이를 게을리하지 않도록 지도와 감시에 힘썼다.

1618년부터 도쿠가와 가즈코의 입내 이야기가 있었지만, 1619년 오요쓰 고료닌 사건으로 천황이 태도를 굳히자 주선에 나서 1620년에 입내가 결정되었고, 처벌받은 공가도 사면되었다. 1620년, 시게무네에게 교토 쇼시다이 직을 양보했다.

2. 4. 오사카 전투와 이후 활동

이타쿠라 가쓰시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환속하여 무사가 된 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어 교토의 치안 유지와 조정 장악, 도요토미 가문 감시에 임했다. 도쿠가와 이에미쓰유모 공모에 관여하여 가스가노 쓰보네를 추천했다는 설이 있다.

1603년 이에야스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열었을 때 종5위하・이가노카미에 서임되었고, 이노쿠마 사건에서는 고요제이 천황과 이에야스의 의견 조정을 통해 조정 통제를 강화했다. 고미즈노오 천황 즉위 과정에서 양위 문제로 대립하는 천황과 이에야스 사이를 중재하고, 공가중 법도 작성에 관여하는 등 조정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오사카 전투의 발단이 된 호코지 범종 명문 사건에서는 혼다 마사즈미 등과 함께 강경책을 주장했다. 오사카 전투 후에는 금중 및 공가 제법도 시행에 있어 조정에 대한 지도와 감시를 맡았다.

도쿠가와 가즈코의 입내 과정에서 오요쓰 고료닌 사건으로 인한 갈등을 중재하고, 1620년 입내가 성사되도록 주선했다. 1620년 아들 이타쿠라 시게무네에게 교토 쇼시다이 직을 물려주었다. 1623년 종4위하로 승진하여 시지주에 임명되었다. 1624년 사망했으며, 향년 79세였다.

빗추 마쓰야마 번의 제4대 번주 이타쿠라 가쓰마사에 의해 빗추 마쓰야마 성 아래에 가쓰시게・시게무네 부자의 영을 모신 야에가키 신사가 건립되었다.[14][15][16]

2. 5. 말년

이타쿠라 가쓰시게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환속하여 무사가 된 후, 주로 시정 분야에서 활약했다. 하마마쓰 성에서 슨푸 성으로 거처를 옮길 때 슨푸 정 봉행을 맡았고, 간토로 이봉되자 간토 다이칸, 에도 정 봉행이 되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1601년에는 교토 정 봉행(후의 교토 쇼시다이)에 임명되어 교토의 치안 유지, 조정 장악, 도요토미 가문 감시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1603년 이에야스가 세이이타이쇼군에 취임하여 에도 막부를 열었을 때 종5위하・이가노카미에 서임되었고, 1609년 오미 국・야마시로 국에 영지를 추가로 받아 다이묘 반열에 올랐다. 같은 해 이노쿠마 사건에서는 고요제이 천황과 이에야스의 의견 조정을 통해 처분을 결정하고 조정 통제를 강화했다. 1610년 고요제이 천황의 양위 문제로 칙사와 무가 덴소인 히로하시 가네카쓰・칸슈지 미쓰토요와 상담하고, 천황과 이에야스의 대립 속에서 천황을 설득하기 위해 고노에 노부타다 등에게 공작을 펼쳐 양위를 연기시키고 1611년 고미즈노오 천황 즉위에 기여했다. 1612년에는 고미즈노오 천황에게 서적 인도를 거부하는 고요제이 상황에 대해 이에야스의 의향을 전달하고, 1613년에는 히로하시 가네카쓰와 함께 공가중 법도 작성에 관여했다.

1614년부터 시작된 오사카 전투의 발단이 된 호코지 범종 명문 사건에서는 혼다 마사즈미 등과 함께 강경책을 주장했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는 기무라 무네키의 교토 방화 계획을 저지했다. 오사카 전투 이후 금중 및 공가 제법도 시행에 있어서 조정에 대한 지도와 감시를 담당했다.

1618년부터 가즈코의 고미즈노오 천황 뇨고 입내 이야기가 진행되었으나, 1619년 오요쓰 고료닌 사건 등으로 천황이 태도를 굳히자, 도도 다카토라 등과 함께 주선하여 1620년 입내를 성사시키고 처벌받은 공가도 사면시켰다. 1620년 아들 시게무네에게 교토 쇼시다이 직을 물려주었다. 1623년 종4위하로 승진하여 시지주에 임명되었다.

1624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유령은 시게무네와 시게마사에게 분할 상속되었다. 1793년 이타쿠라 가쓰마사에 의해 야에가키 신사가 건립되었다.[14][15][16]

3. 문화 활동

이와사 마타베가 그린 『낙중낙외도 병풍』(후나키본)에는 이타쿠라 가쓰시게가 묘사되어 있는데, 이는 역사학자 쿠로다 히데오에 의해 밝혀졌다. 좌측의 니조 성에서 소송을 주재하고 여인의 호소를 듣고 있는 인물은 하오리의 문양(구요몬)으로 보아 가쓰시게로 특정되었다. 니조 성의 오테문을 통과하려는 공가는 게이초 18년(1613년) 7월 3일, 공가중 법도의 작성에 함께 힘쓴 가쓰시게로부터 대접을 받은 가네카쓰로 특정되었다.

주문자는 이타쿠라 가문이나 이타쿠라 가문과 깊은 관계가 있는 인물로 예상되었지만, 쿠로다는 자료 수집과 정밀한 판독을 통해 주문자는 시모교 무로마치의 옷감상으로, 가쓰시게의 옷감 상인이었던 "사사야(한시로)"로 특정하였다. 하지만 헤이세이 29년(2017년) 간행된 『별책 태양』에 게재된 사토 야스히로와 쓰지 노부오의 대담에서 사토는 사사야 주문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사사야가 병풍을 주문할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들어 무가가 주문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쓰지는 가쓰시게가 주문자였지만 돈은 사사야가 냈기 때문에 후나키본에서 사사야를 그리게 했다고 추측했다.

혼아미 고에쓰와 마쓰나가 데이토쿠·샤쿠고 부자, 안라쿠안 사쿠덴 등 간에이 문화를 대표하는 문화인들과 교류가 있었으며, 이에야스에게 고에쓰의 이주지 제공을 진언하여 다카가미네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또한 사쿠덴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된 것이 『세스이쇼』의 권말에 실렸으며, 가쓰시게에 관한 설화도 8편 게재되어 그가 공정한 교토 쇼시다이로서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4. 평가 및 일화


  • 도쿠가와 이에야스슨푸 마치부교(駿府町奉行)로 임명했을 때, 가쓰시게는 아내와 상의 후 부교직을 수락했다. 아내는 가쓰시게에게 소송에 관여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 일화는 교토 쇼시다이 취임 전의 일이라고도 한다.
  • 시모교의 지슈 사찰 부근에서 도박으로 은 3관을 잃은 자가 가쓰시게에게 소송을 제기했다. 가쓰시게는 이긴 자와 잃은 자 양쪽을 100일간 감옥에 가두고 이긴 자에게 돈을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이후 교토 시내와 교외에 도박을 금지하는 포고를 내렸고, 도박은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 이에야스가 가신 히코사카 미쓰마사에게 슨푸 마치부교를 맡기려 했으나, 미쓰마사는 거절하려 했다. 가쓰시게는 미쓰마사에게 청렴과 뇌물 수수를 하지 않으면 된다고 조언했다. 미쓰마사는 결국 부교직을 수락했다. 명장언행록에서는 가쓰시게가 뇌물을 받은 경험을 고백하며 소송의 핵심은 부교에게 물건을 증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 마쓰바라 히가시도인 모퉁이 저택 경계 분쟁 소송에서 가쓰시게는 지인으로부터 흰 오이를 받았다. 가쓰시게는 현장에서 오이를 받은 사실을 공개하고, 지인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려 이중으로 체면을 잃게 만들었다.
  • 이케다 미쓰마사가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묻자, 가쓰시게는 "네모난 그릇에 된장을 넣고 둥근 국자로 뜨도록 하시오"라고 답하며, 구석구석까지 다 떠내면 대국을 다스릴 수 없다고 말했다.

4. 1. 긍정적 평가

4. 2. 부정적 평가

4. 3. 주요 일화

이타쿠라 가쓰시게는 슨푸 마치부교(駿府町奉行)로 임명될 당시 아내와 상의하여 청렴과 공정함을 맹세한 일화가 전해진다. 그는 아내에게 판관의 실패는 내연관계나 뇌물에서 비롯되므로, 소송에 관여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참견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아내가 바지 허리가 꼬인 것을 지적하자 "참견하지 말라"고 꾸짖어 아내를 당황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그의 강직한 성품을 보여준다. 이 일화는 교토 쇼시다이 취임 전의 일이라고도 한다.

시모교의 지슈 사찰 부근에서 도박으로 돈을 잃은 사람이 소송을 제기하자, 가쓰시게는 이긴 자와 잃은 자 모두를 100일간 감옥에 가두고 이긴 자에게 돈을 돌려주라고 명령했다. 이후 도박을 금지하는 포고를 내려 도박을 근절시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신 히코사카 미쓰마사에게 슨푸 마치부교를 맡기려 할 때, 미쓰마사는 가쓰시게에게 조언을 구했다. 가쓰시게는 "청렴하고 뇌물을 받지 않으면 된다"고 조언했고, 미쓰마사는 부교직을 수락했다. 명장언행록에는 가쓰시게가 뇌물을 받은 경험을 고백하며 소송의 핵심은 부교에게 뇌물을 주는 것이라고 크게 웃었다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교토 마쓰바라 히가시도인의 경계 분쟁 소송에서 가쓰시게는 지인으로부터 흰 오이를 선물 받았지만, 공개적으로 오이를 받았음을 밝히고 불리한 판결을 내려 청렴함을 과시했다.

이케다 미쓰마사가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묻자, 가쓰시게는 "네모난 그릇에 된장을 넣고 둥근 국자로 뜨도록 하시오"라고 답하며, 구석구석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여유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5. 가족 관계


  • 아버지: 이타쿠라 요시시게
  • 어머니: 혼다 미쓰쓰구의 딸
  • 아내: 아오 나가카쓰의 딸
  • 자녀:
  • * 이타쿠라 시게무네
  • * 이타쿠라 시게마사
  • * 이타쿠라 시게오
  • * 딸, 도다 미쓰마사와 결혼
  • * 딸, 가와무라 시게히사와 결혼
  • * 마키 고다유
  • * 딸, 안도 시게요시와 결혼

6. 등장 작품


  • 풍신의 문(NHK, 1980년) 배우: 테라다 미노루
  • 도쿠가와 이에야스(NHK, 1983년) 배우: 야마모토 와타루
  • 사나다 태평기(NHK, 1985년) 배우: 마스다 준지
  • 풍운! 사나다 유키무라(TV 도쿄, 1989년) 배우: 미조타 시게루
  •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NHK, 2000년) 배우: 스즈키 미즈호

참조

[1] 웹사이트 Gouverneure von Kyôto in der Edo-Zeit. https://uni-tuebinge[...] 2008-04-11
[2] 서적 Japan encyclopedia, p. 403. https://books.google[...] 2012-05-24
[3] 문서 Nobiliare du Japon -- Itakura, pp. 16–17 http://www.unterstei[...]
[4] 서적 A History of Japan, p. 10. https://books.google[...]
[5] 웹사이트 Gouverneure von Kyôto in der Edo-Zeit. https://uni-tuebinge[...] 2008-04-11
[6] 서적 State and Diplomacy in Early Modern Japan: Asia in the Development of the Tokugawa Bakufu, p. 69. https://books.google[...]
[7] 서적 https://books.google[...]
[8] 서적 Secret Memoirs of the Shoguns: Isaac Titsingh and Japan, 1779-1822
[9] 서적 Treasures among Men
[10] 간행물 Tokugawa Ieyasu's Regulations for the Court: A Reappraisal https://www.jstor.or[...]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 1994-12
[11] 웹사이트 Nijō Castle construction http://www.columbia.[...]
[12] 문서 勝重妻は先夫・[[中嶋重次]]との息子・重好と娘の2人を連れて再婚し、勝重の養子とした。中島与五郎重好は後に徳川家康の許しを得て、慶長6年(1601年)に三河国渥美郡大崎に607石を与えられ実父の家系を再興し、[[交代寄合]]旗本中島与五郎(中嶋與五郎)家の祖となった。中島家はのちに知行1千石を越える。織田家に属していた中島与五郎政成が織田信長の娘の五徳の輿入れに従って徳川家家臣となった。政成の子で、重好実父の中島与五郎重次は天正4年に遠江国相良沖で武田氏の海賊衆と交戦して敗死している。重好も、天正18年には徳川氏の船手衆[[小笠原正吉]](幡豆小笠原氏)の推挙で徳川家康に拝謁し、船手役を勤めていたとする記録がある。与えられた領地大崎でも海に面した大崎城跡に陣屋を構え、将軍の上洛時は三河湾の海上警備を命じられている。徳川氏にとって中島家は、板倉氏の推挙が無くても三河の海を守備するために必要だったとも考えられる。
[13] 문서 現在の[[愛知県]][[岡崎市]][[小美町]]。
[14] 웹사이트 八重籬神社 http://www.city.taka[...] 高梁市 2018-09-02
[15] 웹사이트 八重籬神社 https://www.okayama-[...] 岡山県神社庁 2018-09-02
[16] 웹사이트 八重籬神社 https://www.takahash[...] 高梁商工会議所 2018-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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