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 전투 (15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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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강 전투 (1592년)는 1592년 임진왜란 중 일본군의 한양 점령 이후, 조선군이 임진강에서 일본군의 북진을 막기 위해 벌인 전투이다. 한강 방어에 실패한 김명원 대신 신할과 한응인이 임진강 방어를 맡았으나, 지휘 체계의 혼란과 신할의 무리한 공격으로 인해 조선군은 패배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임진강 방어선이 붕괴되었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하게 되었으며, 일본군은 개성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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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전투 (1592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분쟁 | 임진왜란 |
날짜 | 1592년 7월 6일 ~ 7일 (그레고리력); 1592년 5월 17일 ~ 18일 (음력) |
장소 | 임진강 |
결과 | 일본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
교전국 2 | 도요토미 일본 |
지휘관 및 지도자 | |
조선 | 김명원 이일 이양원 유극량 신할 |
일본 |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구로다 나가마사 모리 데루모토 우키타 히데이에 구키 요시타카 |
병력 규모 | |
조선 | 10,000명 또는 13,000명 |
일본 | 20,000명 또는 22,800여 명 |
사상자 규모 | |
조선 | 10,000명 이상 사망 |
일본 | 미미함 |
2. 배경
1592년 4월, 부산진 전투와 동래성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한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왜군의 한양 점령 및 북진을 막기 위해 조선 조정은 한강 방어에 실패한 김명원에게 임진강 방어를 명하였다. 선조는 한양 점령 이전에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피난했다.
한양을 점령한 일본군은 2주간 휴식을 취한 후, 6월 27일 다시 북진을 시작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 가토 기요마사의 제2군, 구로다 나가마사의 제3군이 임진강을 향해 진격했다.[5]
2. 1. 조선군의 방어 태세
선조는 한강 방어에 실패한 김명원에게 벌을 주는 대신 임진강 방어를 맡겼다.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의 동생 신할과 윤두수의 추천을 받은 한응인이 김명원을 지원하도록 하였다.[6] 신할은 용맹했지만 성격이 급했고, 한응인은 문관 출신으로 얼굴에 복이 많다는 이유로 추천되었다.김명원은 임진강에서 낙오병을 모으고 있었는데, 피, 이천, 변기(조방장)가 약 1천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합류했다. 여기에 경기도와 황해도에서 징집된 병사들이 추가되어, 여러 장수 20명과 총 7,000명 정도의 병력이 되었다.[3] 이양원은 이일, 신각, 김우개 등 여러 장수 10명과 병사 5,000명을 이끌고 대탄[4]에 주둔하고 있었다.[1]
이후 김명원은 임진강 북쪽에 1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했다.
3. 전투 과정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군은 조선군의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거짓으로 후퇴했다. 이에 속은 조선군 지휘관 신할은 즉시 강을 건너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유극량은 신할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자 어쩔 수 없이 공격에 참여했다. 여진 전술에 익숙했던 한응인의 부하들은 계략을 의심해 따르지 않으려 했지만, 처형당했다. 김명원은 공격이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했지만, 군대를 통제할 수 없었다.[5]
조선군이 강을 건너 일본군 야영지를 지나자, 일본군은 매복 공격을 시작했다. 조총 사격과 함께 조선군을 강으로 몰아넣고 학살했다. 유극량과 신할은 전사했다. 강 북쪽 둑에 있던 문관이 도주했는데, 병사들은 그를 김명원으로 착각하고 당황하여 도주, 방어선을 포기했다.[5]
이 참사에 한응인은 충격을 받아 기절했다. 박충간이 가장 먼저 도주했고, 병사들은 그를 김명원으로 오인해 도원수[6]가 도망쳤다고 소란을 피우며 탈주했다. 권징은 가평군으로 도망쳤고, 김명원과 한응인은 남은 병사 5,000여 명을 수습했다.
같은 날, 한성부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의 제1군 부대도 일본군의 습격 소식을 듣고 출격했지만, 가토 기요마사가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에 회군했다.
3. 1. 지휘권 혼란
선조는 한강 방어에 실패한 김명원에게 죄를 묻는 대신, 한응인과 신할을 보내 임진강 방어를 명했다. 신할은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신립의 동생으로, 형처럼 용맹했지만 성격이 급했다. 한응인은 문관 출신으로, 윤두수가 얼굴에 복이 가득하다는 이유로 추천했다. 그러나 김명원이 잘못된 보고로 신각을 죽게 하는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이자, 선조는 한응인과 신할에게 김명원의 지휘를 따르지 말라고 명했다.가토 기요마사의 부대가 후퇴하는 척하자, 신할과 한응인은 추격을 주장했다. 김명원은 적의 유인책이라 판단했지만, 지휘권이 없어 막을 수 없었다. 유극량 등 경험 많은 장수들이 반대했지만, 신할과 한응인은 이들을 겁쟁이라며 처형하려 했다. 유극량은 "제가 어찌 죽음을 피하려는 것이겠습니까? 단지 나랏일을 그르칠까 두려웠을 따름입니다."라고 말하며 먼저 강을 건넜고, 신할도 뒤따랐다. 그러나 이는 왜군의 함정이었고, 신할과 유극량은 전사했다. 이로 인해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졌고, 선조가 의주파천을 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해 소규모로 강을 건너는 일본군을 쉽게 격퇴할 수 있었지만, 명확한 지휘 체계가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방어군 중 일부는 김명원의 지휘를 받지 않았는데, 여기에는 한응인 휘하의 3,000명 북부 조선 병사도 포함되었다.
일본군이 거짓 후퇴를 하자, 경험이 부족한 신할은 즉시 공격을 명령했다. 유극량은 그를 설득할 수 없었고,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자 직접 공격을 지휘했다. 여진 전술에 익숙한 한응인의 일부 베테랑들은 계략을 의심해 따르지 않았지만 처형당했다. 김명원은 공격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군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어 막을 수 없었다.[7]
3. 2. 조선군의 패배
왜군은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거짓으로 후퇴하였고, 조선군은 이에 속았다. 경험이 부족한 지휘관 신할은 즉시 부하들에게 강을 건너 일본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더 경험이 많은 지휘관 유극량은 그를 설득할 수 없었고, 결국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자 직접 공격을 지휘하게 되었다. 여진 전술에 익숙한 한응인의 일부 병사들은 이를 계략으로 의심하여 따르기를 꺼렸지만, 처형당했다.조선군 일부가 강을 건너 버려진 일본군 야영지를 지나 매복으로 돌진하자, 일본군은 조총으로 사격했고, 조선군을 강까지 쫓아가 학살했다. 유극량과 신할은 모두 사망했다. 강 북쪽 둑에 있던 문관이 도주했는데, 주변 군인들은 그가 김명원이라고 생각하고 당황하여 도주했고, 방어선을 포기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돌파되자 김명원과 이양원은 평양을 향해 퇴각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개성을 점령했고, 김교역에서 제2부대가 함경도로 향했으며, 제1부대와 후속 부대인 제3부대가 평양을 향해 추격을 계속했다.
4. 결과 및 영향
임진강 전투에서 조선군이 패배하면서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졌다. 이로 인해 선조는 의주로 피난(의주파천)을 가게 되었다.
왜군은 7월 7일 개성에 무혈 입성한 뒤, 세 부대로 나뉘어 진격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북쪽 평양으로, 구로다 나가마사는 서쪽 황해도로, 가토 기요마사는 북동쪽 함경도로 향했다.
선조는 평양을 포기하고 영변으로 이동할 준비를 시작했고, 7월 16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봉대가 대동강 남쪽에 도착하여 평양 성벽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임진강 방어선이 돌파되자 김명원과 이양원은 평양으로 퇴각했다. 일본군은 개성을 점령하고, 제2부대는 함경도로, 제1부대와 제3부대는 평양을 향해 추격을 계속했다.
당초 조선 국왕은 승리를 낙관했지만, 김명원의 패배 소식에 안색이 변했다. 신성군과 정원군을 녕변으로 먼저 피신시키고, 윤두수를 평양 수비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원익 등이 윤두수의 지휘 하에 합류했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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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이 전투는 액티비전의 비디오 게임 ''쇼군: 토탈 워''에서 "임진"으로 묘사된다. 게임에서 한국군은 보병만 보유하고, 일본군은 균형 잡힌 혼합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과, 20세기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다리를 강에 묘사하고 있다는 점은 역사적 오류이다.
참조
[1]
기타
[2]
기타
[3]
기타
[4]
기타
[5]
기타
[6]
기타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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