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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빈 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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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빈 민씨는 강화도호부사 민사준의 딸로, 조선 선조의 후궁이다. 1580년 숙의로 입궁하여 소의, 귀인을 거쳐 정1품 빈에 봉해졌으며, 인성군을 포함하여 2명의 아들과 3명의 딸을 낳았다. 선조 사후 고질병을 앓았으며, 인목왕후가 편지를 보내 위로하기도 했다.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 천보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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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빈 민씨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정빈 민씨
靜嬪 閔氏
배우자선조
자녀2남 3녀
인성군 · 인흥군
정인옹주 · 정선옹주 · 정근옹주
아버지민사준
어머니신창 맹씨
작위조선 선조의 후궁
가문여흥 민씨

2. 생애

강화도호부사 민사준(閔士俊)의 딸이며, 성종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 민자방의 증손녀이다.[1][2] 1580년(선조 13년) 음력 5월 26일 종2품 숙의(淑儀)로 간택되어 입궁하였고,[3] 이후 소의, 귀인을 거쳐 정1품 빈(嬪)에 봉해졌다. 선조와의 사이에서 인성군을 비롯한 여러 자녀를 두었다.

선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사가(私家)에서 지냈으며, 이때부터 지병을 앓았다.[1] 1624년 장남 인성군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는 아픔을 겪었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차남 인흥군이 인조에게 형 인성군이 어머니를 만날 수 있도록 청하였고, 인조가 이를 허락하였으나[6] 1626년 11월 2일, 인성군이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7] 1627년 1월 17일 양주 탑곡에 예장(禮葬)되었다.

2. 1. 입궁과 후궁 생활

강화도호부사 민사준(閔士俊)의 딸이며, 성종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 민자방의 증손녀이다.[1][2]

1580년(선조 13년) 음력 5월 26일 종2품 숙의(淑儀)로 정식 간택되어 입궁하였다.[3] 당시 간원에서는 민씨가 성종의 외손 집안 출신이라는 이유로 선발에서 제외할 것을 요청했으나,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4] 이때 홍여겸(洪汝謙)의 딸(정빈 홍씨)과 정순희(鄭純禧)의 딸(숙의 정씨)도 함께 숙의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며, 민씨는 수진방(水眞坊)에 있는 궁으로 거처를 옮겼다.[5] 입궁 후 소의, 귀인을 거쳐 정1품 빈(嬪)의 품계에 올랐다. 선조와의 사이에서 장남 인성군을 비롯하여 아들 둘과 딸 셋을 더 낳았다.

선조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궁궐을 나와 사가에서 머물렀다. 이때부터 고질병을 앓았는데, 인목왕후가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위로하기도 했다.[1] 1624년에는 장남 인성군이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정빈 민씨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차남 인흥군은 인조에게 상소를 올려 형인 인성군이 어머니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1] 인조는 이를 허락하여 인성군을 풀어주었으나,[6] 1626년 11월 2일, 정빈 민씨는 인성군이 한성에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7] 1627년 1월 17일, 양주 탑곡에 예장(禮葬)되었다.

2. 2. 선조 사후

선조 승하 후에 사가(私家)에 머물렀는데, 이때부터 고질병을 앓아 인목왕후가 편지를 보내 안부를 묻고 위로하였다.[1]

장남인 인성군1624년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정빈 민씨가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인흥군은 인조에게 상소하여 형인 인성군이 어머니를 만나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1] 인조는 인성군이 민씨를 만날 수 있도록 풀어주었으나[6] 1626년 11월 2일, 민씨는 인성군이 한성에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7]

1627년 1월 17일, 양주 탑곡에 예장(禮葬)하였다.

2. 3. 인성군의 역모 연루와 죽음

장남인 인성군이 1624년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정빈 민씨가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아들 인흥군은 인조에게 상소하여 형 인성군이 어머니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하였다.[1] 인조는 인성군이 어머니 민씨를 만날 수 있도록 허락했으나,[6] 1626년 11월 2일, 민씨는 인성군이 한성에 도착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7]

3. 가족 관계


  • '''증조부''' : 여천위 민자방(驪川尉 閔子芳)
  • '''증조모''' : 경숙옹주(敬淑翁主, 1483 ~ ?)
  • '''조부''' : 민희열(閔希說, 1510 ~ ?)
  • '''조모''' : 전주 이씨 - 이의번(李義蕃)의 딸
  • * '''아버지''' : 민사준(閔士俊, 1537 ~ ?)
  • * '''어머니''' : 신창 맹씨(新昌 孟氏) - 맹익선(孟益善)의 딸
  • * '''서모''' : 귀옥(貴玉) - 양민 출신
  • ** '''이복 남동생''' : 민운경(閔雲慶, 1577 ~ ?)
  • ** '''이복 남동생''' : 민천경(閔天慶, 1584 ~ ?)


'''배우자 및 자녀'''
관계이름생몰년
배우자선조1552년 ~ 1608년
장남인성군 이공(仁城君 李珙)1588년 ~ 1628년
장녀정인옹주(貞仁翁主)1590년 ~ 1656년
차녀정선옹주(貞善翁主)1594년 ~ 1614년
3녀정근옹주(貞謹翁主)1599년 ~ 1613년
차남인흥군 이영(仁興君 李瑛)1604년 ~ 1651년


4. 묘소

묘소는 경기도 의정부시천보산에 있다. 아들 인성군, 손자 해원군, 증손자 화릉군ㆍ화창군ㆍ화춘군도 묻혀있다.

참조

[1] 문서 정빈여흥민씨묘지(靜嬪驪興閔氏墓誌)
[2] 서적 미수기언
[3] 조선왕조실록 선조 13년(1580 경진 / 명 만력(萬曆) 8년) 5월 26일(갑오) 1번째기사
[4] 조선왕조실록 선조 14권, 13년(1580 경진 / 명 만력(萬曆) 8년) 5월 27일(을미) 1번째기사
[5] 조선왕조실록 선조 14권, 13년(1580 경진 / 명 만력(萬曆) 8년) 5월 26일(갑오) 2번째기사
[6] 조선왕조실록 인조 14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11월 1일(경오) 2번째기사
[7] 서적 국역 국조인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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