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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임시해병여단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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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임시해병여단(미국)은 필요에 따라 임시로 편성되었던 미국 해병대 부대로, 규모와 편성은 다양했다. 1912년 쿠바, 1941년 아이슬란드, 1944년 괌, 그리고 1950년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한국 전쟁 당시에는 제5해병연대를 중심으로 4,725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어 부산 교두보 전투, 마산 전투, 낙동강 방어선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이후 제1해병사단에 통합되어 해체되었다. 이 부대는 여러 전투에서 공로를 인정받아 다양한 부대 표창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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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임시해병여단 (미국)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부대 정보
명칭제1임시해병여단
별칭소방 여단
창설1912년 5월 ~ 7월
소속미국 해병대
종류보병, 임시 부대
규모여단
역할상륙전
대(對)전차전
기갑전
포병 관측
한랭지전
합동 무기
대포병 사격
병력 보호
화력 지원
간접 사격
정글전
기동전
군사 정보
군수 보급 관리
순찰
기습
정찰
지휘관존 마스턴
레뮤얼 C. 셰퍼드
에드워드 A. 크레이그
참전 전투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관련 이미지
여러 사람이 들것에 부상당한 사람을 옮기고 있다.
1950년 낙동강 방어선 전투 중 부상자를 들것에 싣고 이동하는 제1임시해병여단 소속 해병대원들.

2. 편성

제1임시해병여단은 창설될 때마다 그 규모와 구조가 달랐으며, 영구적인 편제 부대가 아닌 임시 부대로 운용되었다.[56] 이는 더 큰 규모의 미국 해병대 부대가 편성되는 동안 임시 전선 부대로 활동하기 위함이었다.[56] 일반적으로 여단은 본부 및 지원 중대, 임시 군사 경찰, 통신 및 기타 지원 중대와 소대로 구성되었다.[1] 본부 및 지원 중대는 표준 해병 여단의 해당 부대보다 규모가 작았다.[13] 이러한 임시 부대 창설은 미국 해병대에서 드문 일이 아니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두 개의 다른 임시 해병 여단이 창설되어 이후 사단으로 확대된 사례가 있다.[2][3]

여단의 구성은 창설 시기마다 크게 달랐다.

제1임시해병여단 창설 시기별 주요 구성 및 규모
창설 연도주요 구성 부대병력 규모비고
1912년2개 임시 연대1,200명
1941년제6 해병 연대 (1대대, 2대대, 3대대), 제10 해병 연대 (2대대), 제2 전차 대대 (A 중대), 제2 지원 대대 (A 중대) 등[4]4,095명[20]아이슬란드 파견 목적[4], 제5 해병 방어 대대 배속[5]
1944년제4 해병 연대, 제22 해병 연대, 임시 포병 대대 등[6]9,886명[6]제53 해군 건설 대대 배속[6]
1950년 (한국 전쟁)제5 해병 연대 (미국), 해병 항공 그룹 33 지원[56]4,725명[56]상세 내용은 #한국 전쟁 섹션 참조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에는 제5 해병 연대를 중심으로 4,725명의 병력으로 편성되었으며, 해병 항공 그룹 33의 지원을 받았다.[56] (자세한 내용은 #한국 전쟁 섹션 참조)

창설 목적에 따라 임무 완료 후 상위 부대에 합병되었다. 1941년에 창설된 여단은 1942년 제2 해병사단에, 1944년 창설된 여단은 제6 해병사단 창설의 기반이 되었으며,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창설된 여단은 새로 재활성화된 제1 해병사단의 선발대로 활동하다가 해당 사단에 합병되었다.[56]

2. 1. 한국 전쟁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7일, 미국 해병대캘리포니아주 펜들턴 해병기지에서 미 해병5연대를 주축으로 하여 제1임시해병여단을 긴급하게 편성했다. 당시 여단 병력은 4,725명이었다. 7월 12일, 이 부대 소속 장병 약 6,500여 명은 샌디에이고를 출발하여 20여 일간의 항해 끝에 8월 2일 부산에 도착했다.

여단은 1950년 8월 7일, 부산에서 약 80km 떨어진 진동리에서 북한군과 처음으로 교전을 벌였고, 이후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 전쟁 당시 여단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제1임시해병여단 (한국 전쟁 당시)'''[56][7]
구분부대명
주축 부대제5 해병 연대 (미국)
병력4,725명
항공 지원해병 항공 그룹 33
기타 포함 부대군사 경찰, 정찰 및 정보 중대
공격 부대제1 대대 5연대
제2 대대 5연대
제3 대대 5연대
지원 부대제1 전투 공병 대대
제1 의무 대대
제1 수송 대대
제1 병기 대대
제1 지원 대대
제1 상륙 지원 대대
제1 통신 대대
제1 전차 대대
제1 수륙양용 트랙터 중대
제1 전투 지원 그룹의 지원 중대



제1임시해병여단은 영구적인 편제 부대가 아닌, 더 큰 규모의 미국 해병대 부대 편성을 위한 임시 전선 부대였다.[56] 낙동강 방어선 전투 이후, 여단은 다시 해병5연대로 재편되었고, 새로 재활성화된 제1 해병사단 (미국)의 선발대로 활동하다가 해당 사단에 합병되었다.[56]

3. 역사

제1임시해병여단은 특정 임무 수행을 위해 여러 차례 임시로 편성되었던 미국 해병대의 여단급 부대이다. 각 시기별로 편성 목적과 활동 지역이 달랐으며, 임무 완료 후에는 해산되어 구성원들이 다른 부대로 재배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 쿠바 (1912): 쿠바에서 발생한 흑인 반란 진압을 지원하기 위해 처음 창설되었다.[9] 여단은 오리엔테 주를 점령하고 미국 사탕수수 농장 등 자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한 뒤, 반란이 진압되자 해산되었다.[8][9]
  • 제2차 세계 대전 (1941-1944): 제2차 세계 대전 중 두 차례 편성되었다.
  • 1941년에는 아이슬란드 방어를 위해 편성되어 영국군을 대신해 주둔 임무를 수행했다.[13] 진주만 공격 이후 태평양 전쟁 참전을 위해 1942년 해산되었다.[31][13]
  • 1944년에는 괌 전투를 위해 재편성되어 작전에 참여했으며,[6] 전투 종료 후 해산되어 제6해병사단 창설의 기반이 되었다.[56]
  • 이 부대는 이름이 유사한 다른 부대, 예를 들어 제1해병사단의 전신인 "제1해병여단"이나 전후 창설된 제1해병원정여단과는 계보상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10][11][12]
  • 한국 전쟁 (1950): 한국 전쟁 발발 직후 긴급히 편성되어 부산 교두보 전투에 투입되었다.[56] 여단은 진동리 전투, 마산 전투, 낙동강 돌출부 전투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56] 이후 인천 상륙 작전을 위해 제1해병사단에 통합되면서 1950년 9월 13일 해산되었다.[56][135]
  • 전후 (1947): 에서 잠시 재편성되어 태평양 지역 위기대응군 임무를 맡았으나, 전후 군비 감축으로 인해 곧 규모가 축소되어 제1임시포병대대로 재편성되었다.[54][55]

3. 1. 쿠바

제1 임시 해병 여단은 1912년 쿠바 주둔 임무를 위해 처음 창설되었다. 그 해 초, 쿠바 전역에서 과거 흑인 노예들을 중심으로 흑인 반란이 일어났다.[9] 이에 따라 미 육군 대령 링컨 카마니 휘하의 450명으로 구성된 제1 임시 해병 연대가 5월 22일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에서 소집되었다. 동시에 제임스 마호니 대령 휘하의 750명으로 구성된 제2 임시 해병 연대가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서 소집되었다.

두 연대는 USS ''Prairie''를 타고 쿠바로 향했다. 제2 연대 제1대대는 아바나에 상륙했고, 나머지 병력은 관타나모에 상륙했다.[9] 이들은 6월 초 관타나모에서 카마니의 지휘 하에 제1 임시 해병 여단을 결성했다. 여단은 오리엔테 주로 이동하여 26개 마을을 점령하고 해당 지역의 모든 철도 교통을 통제했다.[8] 해병대는 쿠바의 시보니와 엘 코브레에 있는 미국 사탕수수 농장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7월 말, 쿠바 정부가 반란을 진압하자 해병대는 관타나모로 철수하여 여단을 해산하고 미국으로 귀국했다.[9]

3. 2.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제1임시해병여단은 두 차례 임시로 편성되어 활동했다. 첫 번째는 1941년 아이슬란드 방어를 위해 편성되었으며, 1942년 해산 후 부대원들은 태평양 전쟁에 투입되었다. 두 번째는 1944년 괌 전투를 위해 재편성되었고, 전투 종료 후인 1944년 9월 9일 과달카날에서 해산되었다. 해산된 여단 병력은 새로 창설되는 제6해병사단에 합류하여 사단 창설의 기반이 되었다.[56]

이 부대는 이름이 유사한 다른 부대들과는 계보상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예를 들어, 1913년 창설된 제1전진 부대 여단을 계승하여 1935년 재지정된 후 1941년 제1해병사단으로 개편된 "제1해병여단"[10][11]이나, 전후인 1956년 창설되어 이후 제1해병원정여단으로 이어진 제1해병여단[12]과는 구별된다. 제1임시해병여단과 달리 이들 부대는 '임시' 부대로 간주되지 않았다.

3. 2. 1. 아이슬란드

영국 49 (West Riding) 보병 사단의 휘장이 제1임시해병여단에 의해 아이슬란드에서 잠시 착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은 아이슬란드 침공을 감행했다. 이는 영국 정부중립국이었던 아이슬란드가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인데, 독일은 이미 베저 연습 작전으로 덴마크노르웨이를 점령한 상태였다. 영국군은 4척의 영국 해군 군함과 함께 아이슬란드에 상륙했으며, 아이슬란드 정부가 저항하지 않아 무혈로 점령했다.[15] 미국이 전쟁에 참전한 후, 아이슬란드는 미국 연방 정부와 방위 협정을 체결하여 연합군 점령 기지로서 미군이 섬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했다.

미국 해병대는 이 협정의 일환으로 아이슬란드 파견을 위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에서 제1임시해병여단을 급히 편성했다. 이 여단은 1941년 7월 14일에 공식적으로 발족했다.[13] 여단 구성원은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의 해병대 신병훈련소 샌디에이고와 캠프 엘리엇에서 훈련 중이던 제2해병사단에서 차출되었다.[14] 이를 통해 여단 병력은 4,095명으로 늘어났다.[15][16] 이들은 미국 육군 소장 홀랜드 M. 스미스와 그의 제1해병사단 병력과 함께 아이슬란드를 점령할 28,000명의 미군 중 첫 부대였다. 초기 계획은 제1해병사단이 병력을 증강하는 동안 임시 여단이 아이슬란드를 방어하는 것이었으나, 곧 우선순위가 변경되어 제1해병사단은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제1임시해병여단은 대신 미국 육군 부대와 합류하게 되었다.[17]

군복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습니다
제1임시해병여단의 장교들이 1941년 아이슬란드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미국 해병 준장 존 마스턴과 대령 레오 D. 허믈의 지휘 아래, 여단은 공격 수송선 USS 헤이우드, USS 풀러, USS 윌리엄 P. 비들을 타고 샌디에이고에서 찰스턴으로 이동했다.[18] 찰스턴에서 이들은 보급품을 실은 추가 선박들과 여단의 나머지 병력인 제5해병방어대대와 합류했다.[19] 이 수송선단에는 6월 27일 USS 오리자바, USS 아크투루스, USS 해멀이 추가되었다.[20] 이들은 전함 USS 아칸소와 USS 뉴욕, 순양함 USS 브루클린과 USS 내슈빌을 포함한 25척의 미국 해군 군함으로 구성된 태스크 포스 19의 호위를 받았다.[21] 부대는 뉴펀들랜드에 잠시 정박한 후 아이슬란드로 계속 이동하여 7월 7일 레이캬비크에 상륙했다.[22] 그곳에서 그들은 영국 육군 49 (West Riding) 보병 사단으로부터 아이슬란드 일부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넘겨받았고, 영국군은 나머지 지역을 계속 관리했다.[23]

영국 지휘관들은 제1임시해병여단을 레이캬비크 주변의 캠프에 분산 배치하여, 독일의 침공 시 신속하게 대응할 수 있는 비상 부대로 운용했다.[16] 영국군은 여단에게 자신들의 사단 휘장을 수여했고, 해병대원들은 아이슬란드 주둔 기간 동안 이 휘장을 착용했다.[25] 1941년 8월에는 미 육군 부대와 미국 육군 항공대 부대가 해병대와 합류했다.[26] 제1임시해병여단 병력은 잠재적인 독일 공격에 대비하여 아이슬란드를 요새화하기 위한 기반 시설과 기지 건설에 많은 시간을 투입했다.[27] 9월 22일, 영국 사단은 아이슬란드를 떠났고 지휘권은 미 육군에게 이양되었다.[16][28] 1941년에서 1942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동안 여단은 전투를 치르지 않았지만, 보급품 부족, 통신 장비 부족, 수송 문제, 악천후 등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요새 건설과 전투 훈련에 매진했다.[29] 가끔 독일 정찰기가 출현하는 것 외에는 독일군의 직접적인 위협은 없었다.[30]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격 이후, 여단 병사들은 1942년 초 아이슬란드에서 재배치되어 태평양 전쟁에 투입될 가능성이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31] 1942년 1월부터 여단은 대대 단위로 아이슬란드에서 미국으로 철수를 시작했다.[32][33] 여단의 병력은 점차 미 육군 부대로 교체되었고, USS 맥콜리와 미 육군 수송선 ''보린켄''을 타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1942년 3월까지 여단 전체가 뉴욕에 도착했다.[16][34] 여단은 1942년 3월 25일 뉴욕 시에서 공식적으로 해산되었고, 소속 부대원들은 제2해병사단에 재배속되었다.[13] 이들 중 대부분은 즉시 캘리포니아로 파견되었으며, 그해 말에는 상당수가 과달카날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34]

3. 2. 2. 괌

1944년 탈환 작전을 위해 과달카날에서 재편성된 제1임시해병여단은 제4해병연대와 제22해병연대를 중심으로 임시 본부, 군사 경찰, 통신 중대 및 임시 포병 대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병력은 9,886명에 달했다.[6] 괌에서의 작전 이후, 1944년 9월 9일 여단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고, 그 구성원들은 새로 창설되는 제6해병사단에 합류하였다.[56] 이 여단은 제6해병사단 창설의 기반이 되었다.[56]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47년 6월 1일, 여단은 제11해병연대 제1대대를 증편하여 의 Camp Witek|캠프 위텍영어에서 다시 편성되었다.[54] 이때 여단은 태평양 지역의 위기대응군 역할을 부여받았으나, 전후 군비 감축으로 인해 실제 병력은 부족하여 명목상의 부대("서류상 부대")에 가까웠다.[55] 결국 여단 규모를 유지하지 못하고 1947년 10월 1일 제1임시포병대대로 재편성되며 다시 축소되었다.[54]

3. 3. 한국 전쟁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7일, 미국 해병대 제5해병연대를 주축으로 한 제1임시해병여단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펜들턴 해병기지에서 긴급히 편성되었다. 창설 당시 병력은 4,725명이었다.[56] 여단은 제5해병연대 예하 제1대대, 제2대대, 제3대대를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해병 항공 그룹 33과 군사 경찰, 정찰, 정보 중대 및 각종 전투 지원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7]

7월 12일, 여단 소속 장병 6,500여 명은 샌디에이고를 출발하여 20여 일간의 항해 끝에 8월 2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8월 7일, 여단은 부산 서쪽 약 80km 떨어진 진동리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치렀다. 이후 마산 전투와 낙동강 돌출부 전투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활약했다.[56]

제1임시해병여단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 이후, 새로 재편성되는 제1해병사단에 합류하기 위해 이동하였다. 여단은 제1해병사단의 선발대 역할을 수행한 후, 1950년 9월 13일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제1해병사단에 통합되었다.[56][135]

3. 3. 1. 진동리 전투

6.25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7일, 미 해병 5연대를 중심으로 제1임시해병여단이 미국 캘리포니아주 펜들턴 해병기지에서 긴급 편성되었다. 여단 장병들은 7월 12일 샌디에이고를 출발하여 8월 2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1950년 8월 7일, 여단은 부산에서 약 80km 떨어진 진동리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치렀다. 이 전투 이후 여단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 등에서 활동하였다.

3. 3. 2. 마산 전투 (킨 특수임무부대)

제1임시해병여단은 부산 교두보의 서쪽 측면인 마산으로 즉시 이동했다. 이곳은 미국 제8군이 북한군의 공세로부터 UN군 전선을 지키기 위해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던 중요 지역이었다. 여단은 윌리엄 B. 킨 소장이 지휘하는 미국 제25보병사단과 미국 제5연대 전투단에 합류하여, 이 세 부대는 약 2만 명 규모의 '킨 특수임무부대'를 구성했다.[58]

워커 미 제8군 사령관은 8월 6일을 목표로 UN군이 한국 전쟁에서 처음으로 수행하는 반격 작전을 준비했다. 이 작전은 미군 예비 부대가 마산 지역에서 서쪽으로 공격하여 북한 제6사단으로부터 진주를 확보하고, 이후 중순경에는 금강까지 전반적인 공세를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59][60] 워커는 이를 통해 대구 방면으로 집중될 것으로 예상되는 북한군 주력을 남쪽으로 분산시키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었다.[61] 8월 6일, 제8군은 킨 특수임무부대의 공격에 대한 작전 지침을 하달했다.[61] 공격 계획은 마산 인근에서 점령한 지점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진주 고개를 점령하고, 남강까지의 지역을 확보하는 것이었으며,[62] 이는 미국 제2보병사단 전체와 미국 본토에서 출발한 미군 전차 3개 대대의 도착을 전제로 했다.[63]

킨 특수임무부대는 8월 7일 마산에서 공격을 개시했다.[64] 제1임시해병여단은 반송동으로 신속히 돌격하여 북한군 제6사단 본부를 점령하고 북한군에게 350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65] 그러나 킨 특수임무부대의 다른 부대들은 북한군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진격 속도가 늦춰졌다.[66] 부대는 진동면 지역으로 진격했으나, 병력이 분산되어 공중 공격과 공중 보급에 의존해야 하는 혼란스러운 전투 양상을 보였다.[67] 킨 특수임무부대의 공세는 북한 제6사단이 동시에 수행하던 공세와 정면으로 충돌했다.[74][68]

이 지역에서는 3일 동안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8월 9일까지 킨 특수임무부대는 진주를 탈환할 태세를 갖추었다.[69] 미 공군의 지원을 받은 킨 특수임무부대는 초반에는 빠르게 진격했지만 북한군의 저항은 거셌다.[70] 8월 10일, 해병대는 진격을 계속하던 중 의도치 않게 북한 제105기갑사단 예하 제83기동연대와 마주쳤다. 기습을 당한 북한군 연대는 후퇴를 시도했으나, 제1해병 항공단 소속 F4U 콜세어 전투기들이 후퇴하는 부대를 반복적으로 공격하여 2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약 100대의 연대 장비를 파괴했다.[72][73] 그러나 제1임시해병여단은 8월 12일, 낙동강 방어선의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 명령을 받아 더 이상 공격을 이어가지 못했다.[74][75] 킨 특수임무부대의 나머지 부대들은 야전 포병의 지원을 받으며 계속 전진하여 천동리 인근 지역을 점령했다.[76] 당시 제8군은 여러 부대를 대구로 재배치하여 전선의 다른 지역, 특히 낙동강 돌출부에 투입할 것을 요청한 상황이었다.[75][84]

8월 14일 반격 작전이 종료되었을 때, 킨 특수임무부대는 북한군을 남쪽으로 분산시키고 진주 고개를 확보하려던 초기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77][78] 북한 제6사단은 병력이 3,000명 또는 4,000명 수준으로 크게 감소하여 안동에서 한국인 징집병으로 병력을 보충해야 했으나,[79] 이 지역에서의 전투는 그 달의 나머지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80]

3. 3. 3. 1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

(내용 없음 -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1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에 해당하는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는 '용산 전투' 또는 '2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의 일부를 다루고 있습니다.)

3. 3. 4. 2차 낙동강 돌출부 전투 및 용산 전투

이날 오후, 미 제2사단 지휘소에서 미국 제8군, 제2사단, 제1임시해병여단 지휘관들이 참석한 회의가 열렸다.[121] 회의 결과, 해병대는 9월 3일 오전 8시에 용산-낙동강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공격하고,[122] 미 육군은 해병대 북서쪽으로 공격하여 미국 제23보병연대와 다시 연결을 시도하며,[121] 미국 제2공병대대는 제1대대, 제9보병연대 잔여 병력, 제72전차대대 병력과 함께 해병대의 남쪽으로 공격하여 제25사단과 다시 연결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123]

병사들이 1950년 9월 용산 서쪽에서 공격하는 동안 논밭을 건너고 있다.


용산 서쪽 첫 번째 언덕의 방어선은 도로 북쪽에 제9보병연대 G중대, 도로 남쪽에 제2공병전투대대 A중대, 그리고 그 아래에 제9보병연대 F중대가 맡고 있었다.[124] 9월 3일 오전 3시에서 4시 30분 사이, 제1임시해병여단은 전방 집결지로 이동했다.[122] 제2대대 5연대는 용산 북쪽에, 제1대대 5연대는 그 남쪽에 집결했다. 제3대대 5연대는 용산 남서쪽에서 접근하는 경로에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121][124]

전투는 9월 2일 밤에 시작되었고,[123] 9월 3일 새벽 미군은 해병대 공격 개시선 일부인 고지를 점령했다.[122][124] 해병대 전차의 지원을 받은 G중대는 격렬한 저항을 물리쳤으나, 이른 아침의 전투로 인해 계획된 공격은 지연되었다.[131] 해병대의 공격은 북한군이 점령한 서쪽 약 0.80km 지점을 향해 오전 8시 55분에 시작되었다.[123] 도로 남쪽의 제1대대 5연대는 북한군이 공습에 무너지면서 목표를 달성했다.[122] 공습, 포병 집중 사격, 제1대대의 기관총 및 소총 사격은 두 번째 능선에서 올라오던 북한군 증원 부대를 탁 트인 논밭에서 제압하여 대부분을 사살했다. 오후에 제1대대는 91고지로 진격했다.[131]

병사들이 전차에 앉아 낙동강을 건너는 병력 대열 사이에서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미국 제9보병연대 병사들이 9월 3일 낙동강을 건너는 북한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다.


도로 북쪽의 제2대대는 용산 서쪽으로 약 3.22km 떨어진 116고지 북쪽 끝에 도달했을 때 북한군의 맹렬한 사격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다.[122] 북한군은 그날 그 고지를 점령했고, 밤에는 제5해병대 D중대가 고립되었다.[131] 용산 서쪽 전투에서 해병대 장갑차는 북한군 T-34 전차 4대를 격파했으며, 북한군 승무원들은 다섯 번째 전차를 버리고 도주했다.[123] 그날 밤 해병대는 용산 서쪽 약 3.22km 지점에 참호를 구축했다. 제2대대는 이날 18명이 사망하고 77명이 부상을 입었는데, 대부분 D중대 소속이었다. 9월 3일 해병대의 총 사상자는 34명 사망, 157명 부상이었다. 해병대의 공격에 맞춰 제9보병연대도 북쪽으로 함께 진격했다.[131]

자정 직전, 제3대대 5연대는 제2대대를 통과하여 다음 날 아침 공격을 이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122] 그날 밤 폭우가 쏟아져 병사들이 힘든 시간을 보냈다. 북한군은 이례적으로 조용했으며 순찰이나 공격 시도가 거의 없었다. 9월 4일 아침에는 날씨가 맑아졌다.[131][125] 미군의 반격은 9월 4일 오전 8시에 재개되었고, 처음에는 큰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다.[126] 도로 북쪽에서 제2대대는 밤사이 북한군이 철수한 116고지를 신속히 점령했다. 도로 남쪽의 제1대대는 북한군 제9사단의 지휘소로 추정되는 곳을 점령했다. 그곳에는 텐트가 그대로 있었고 장비들이 흩어져 있었으며, 양호한 상태의 T-34 전차 2대가 버려져 있었다. 도로를 따라 진격하던 전차와 지상군은 곳곳에 널린 북한군 시신과 파괴되거나 버려진 장비들을 발견했다. 밤이 되자 미군은 약 4.83km를 더 진격했다.[131]

9월 5일 아침, 10분간의 포병 준비 사격 후 미군은 반격 3일째 진격을 시작했다.[127] 이날은 비가 내렸다. 공격이 진행되면서 해병대는 오봉산 능선에, 제9보병연대는 한 달 전 제1차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치열하게 싸웠던 클로버리프 언덕에 접근했다.[122] 오전 중, 전방 고지에서 참호를 파는 북한군이 관측되었다. 해병대는 두 언덕 사이의 고개로 접근하여 북한군이 점령한 고지 앞에 자리를 잡았다.[128] 오후 2시 30분경, 약 300명의 북한군 보병이 두곡 마을과 은폐된 진지에서 나와 도로 북쪽 125고지에 있던 B중대를 공격했다.[122] 북한군 T-34 전차 2대가 기습하여 선두에 있던 해병대 M26 퍼싱 전차 2대를 격파했다. 파괴된 퍼싱 전차가 사격 경로를 막자 다른 4대의 퍼싱 전차는 더 유리한 위치로 후퇴했다.[128] B중대와 제1대대의 공격조는 3.5인치 로켓 발사기로 돌격하여 T-34 전차 2대와 뒤따르던 장갑 수송차까지 모두 파괴했다.[122] 북한군 보병의 공격은 격렬하여 B중대에서 2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A중대의 증원과 육군 포병 및 해병대 81 mm 박격포 지원으로 격퇴되었다.[128][129] 9월 5일은 부산 교두보 전체에서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날이었다.[130] 미 육군은 102명 사망, 430명 부상, 587명 실종으로 총 1,119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해병대는 35명 사망, 91명 부상, 실종자 없음으로 총 126명의 전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날 미군의 총 전투 사상자는 1,245명이었다.[128]

역사가들에 따르면, 용산 서쪽에서 9월 3일부터 5일까지 이어진 미군의 반격은 북한군 사단에게 전쟁 중 가장 참혹한 재앙 중 하나를 안겨주었다.[131] 북한군 제9사단의 잔존 병력과 약화된 북한군 제4사단은 9월 6일에도 오봉산 능선, 클로버리프 언덕, 그리고 그 사이 낙동강까지 이어지는 지점을 점령하고 있었으나, 미군 반격이 끝날 무렵 이들 사단의 공격력은 완전히 소진되었다.[130] 북한군 제9사단과 제4사단은 더 이상 공세를 이어갈 수 없었다.[131]

3. 3. 5. 해산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활약한 제1임시해병여단은 이후 미 제1해병사단에 합류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1950년 9월 4일 20시,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제2보병사단의 작전 통제 하에 있던 제1임시해병여단을 해제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 명령은 9월 5일 자정부터 발효되었다.[130] 9월 6일 0시 15분, 해병대는 오봉리 능선에서 철수하여 부산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새로운 제1해병사단을 구성하기 위해 제1해병연대 및 제7해병연대와 합류하기 위함이었다.[128]

워커 장군은 부산 교두보 방어를 위해 여단 병력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여 여단 해체에 반대했다.[130] 이 결정은 현장 지휘관인 워커와 유엔군 최고사령관 맥아더 사이에 심각한 의견 충돌을 야기했다. 워커는 예비 병력인 해병대 없이는 부산 교두보를 지키기 어렵다고 주장했고, 맥아더는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해병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맞섰다.[129]

맥아더는 제3보병사단 소속으로 새로 도착한 제17보병연대와 제65보병연대를 워커의 예비대로 배속시키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워커는 이들 부대가 전투 경험이 부족하여 북한군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으며, 이러한 병력 전환이 자칫 부산 교두보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132][133]

결국 제1임시해병여단은 일본으로 이동하여 제1해병사단과 통합되었고,[134] 1950년 9월 13일부로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135]

3. 4. 전후

1947년 6월 1일, 제11해병연대 제1대대를 증편하여 여단이 다시 소집되었다. 이때 여단은 의 Camp Witek|캠프 위텍영어에 본부를 두고 태평양 지역의 위기대응군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진행된 동원해제에 따른 군대 규모 축소로 인해 여단 편제를 유지하기 어려워졌고, 결국 같은 해 10월 1일에 제1임시포병대대로 다시 축소되었다.

4. 다른 "제1해병여단"

미국 해병대 역사상 "제1해병여단"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부대는 여러 개가 있었으며, 이들은 제1임시해병여단과는 별개의 부대이다.

첫 번째로 "제1해병여단"으로 불린 부대의 기원은 1913년에 창설된 제1전진기지여단이다.[11] 이 부대는 1914년에 "제1여단"으로 개명되었고,[11] 같은 해 푸에르토리코와 멕시코에서 활동했으며, 1916년에는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활동했다.[12] 1915년부터 1934년 해체될 때까지 아이티에 상설 부대를 유지했다.[12] 1935년, 이 부대는 "제1여단"으로 재활성화된 후 함대해병군 소속 "제1해병여단"으로 재지정되었다.[10] 1940년에는 쿠바에서 활동했으며,[10] 1941년에는 제1해병사단으로 증강 및 재편성되었다.[10][11] 이 부대는 "임시" 부대가 아니었으며,[11] 제1임시해병여단과는 계보상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10]

두 번째로, 1956년 하와이에서 미국 해병대의 첫 상설 여단으로 새로운 "제1해병여단"이 창설되었다.[136][137] 이 부대는 1985년에 제1해병상륙여단(1st MAB)으로 개명되었고, 1988년에는 제1해병원정여단으로 다시 재편성되었다.[136][137] 이 여단 역시 제1임시해병여단과는 계보를 공유하지 않는 별개의 조직이다.[138]

5. 부대 표창

제1임시해병여단은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서의 활약을 통해 미국대한민국으로부터 여러 부대 표창과 기장을 수여받았다.[139][140][141][142][143][144]

5. 1. 미국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7일, 미 해병 5연대를 주축으로 미 제1임시해병여단(병력 4,725명)이 캘리포니아주 펜들턴 해병기지에서 긴급 편성되었다.

7월 12일, 이 부대 소속 장병 6,500여 명은 샌디에이고를 떠나 20여 일의 항해 끝에 8월 2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8월 7일, 부산에서 약 80km 떨어져 있는 진동리에서 북한군과 처음으로 전투를 치렀다.

그 후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큰 활약을 펼쳤으며, 이후 제1임시해병여단은 다시 해병 5연대로 재편되면서 제1해병사단 (미국)의 예하 부대가 되었다.

제1임시해병여단은 "정규" 부대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임무 수행에 따라 캠페인 기장을 수여받았으며, 이는 부대의 계보를 형성했다.[139] 이 기장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포함된다:

기장수훈연도추가 정보
대통령 부대 표창 기장1950부산 교두보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1950부산 교두보[139]
해군 부대 표창1944, 마리아나 제도[140]
아시아-태평양 전역 메달1944[141]
제2차 세계 대전 승리 메달1945태평양 전쟁[142]
국가 방위 복무 메달1950한국 전쟁[143]
한국 전쟁 참전 메달1950한국 전쟁[144]


5. 2. 대한민국

한국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7일, 미 해병5연대를 중심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펜들턴 해병기지에서 제1임시해병여단(병력 4,725명)이 긴급 편성되었다. 7월 12일, 여단 소속 장병 6,500여 명은 샌디에이고를 출발하여 20여 일간의 항해 끝에 8월 2일 부산에 도착하였다.

8월 7일, 여단은 부산에서 약 80km 떨어진 진동리에서 북한군과 첫 전투를 치렀다. 이후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전투 후 제1임시해병여단은 다시 해병5연대로 재편되어 미 제1해병사단 예하 부대로 편입되었다.

제1임시해병여단은 임무 수행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기장을 수여받았으며, 이는 부대의 역사에 기록되었다.[139]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받은 표창은 다음과 같다.

기장수훈연도추가 정보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 기장1950부산 교두보[139]
한국 참전 기장1950한국 전쟁[1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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