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일본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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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일본공산당은 1922년 7월 15일,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사회주의 운동이 활발해진 일본에서 결성된 공산주의 정당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를 받은 사회주의자들이 공산당 결성 운동을 시작하여, 1921년 준비위원회를 거쳐 창당되었다. 창당 이후 코민테른 일본 지부로 승인받고, 노동 운동 지원 등 활동을 펼쳤으나, 1923년 주요 당원들이 체포되는 1차 공산당 사건으로 인해 해산되었다.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로 재건 뷰로가 결성되었고, 1926년 제3회 당대회를 통해 일본공산당은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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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일본공산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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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존속 기간 | 1922년 7월 15일 ~ 1935년 |
해산 사유 | 코민테른의 지시, 내부 분열 및 탄압 |
이념 | 마르크스-레닌주의 공산주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반제국주의 |
정치적 위치 | 극좌 |
국제 제휴 | 코민테른 |
후신 정당 | 일본공산당 |
역사 | |
창립 | 1922년 7월 15일 |
지도부 | |
서기장 | 사카이 도시히코 (1922년-1923년) 도쿠다 규이치 (1923년-1924년)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1926년-1928년) 다나카 세이겐 (1928년-1930년) 가자마 조키치 (1931년-1932년) 야마모토 마사미 (1933년-1935년) |
주요 인물 | 야마카와 히토시 아라하타 간손 다카쓰 마사미치 곤도 에이조 하시우라 도키오 노사카 산조 요시카와 모리쿠니 우라타 다케오 아카마쓰 가쓰마로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 후쿠모토 가즈오 이치카와 쇼이치 미타무라 시로 시가 요시오 사노 후미오 다나카 세이겐 사노 히로시 젠노 젠시로 가자마 조키치 이와타 요시미치 곤노 요지로 야마모토 마사미 노로 에이타로 미야모토 겐지 헨미 시게오 하카마다 사토미 아키사사 마사노스케 |
조직 | |
청년 조직 | 일본공산청년동맹 |
노동조합 | 일본노동조합평의회,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
농민조합 | 전국농민조합전국회의파 |
학생 조직 | 학생연합회 |
기타 단체 | 전일본무산자운술연맹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 프롤레타리아과학연구소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 전국수평사청년동맹 대만 공산당 노동농민당 일본적색구원회 산업노동조사소 |
강령 및 정책 | |
주요 문서 | 22년 테제 상해 테제 27년 테제 31년 정치테제 초안 32년 테제 일본의 공산주의자에의 편지 |
주요 사건 | |
주요 사건 | 효민공산당 사건 극동제민족대회 제1차 일본공산당 검거사건 오타루 고상 군사교련 사건 3·15 사건 4·16 사건 (신)노농당 해소문제 카와사키 무장메이데이 사건 스파이M의 지도부 잠입 눌렌스 사건 윤기협 사살사건 당간부 탈환계획 적색깡패 사건 아타미 사건 고바야시 다키지 학살 노로 에이타로 고문치사 사노・나베야마 전향성명 일본공산당 스파이 사문사건 요코하마 사건 조르게 사건 키리시마 사건 |
분파 및 전향 | |
주요 분파 | 노농파 「해당파」 전협쇄신동맹 강좌파 「일국사회주의」그룹 다수파 |
전향 | 전향 |
기관지 | |
주요 기관지 | 『무산자신문』 『적기』(잡지) 『전위』(잡지) 『마르크스주의』(잡지) |
2. 역사적 배경
일본공산당 창당 이전은 아직 소수의 서클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복수의 사상 단체의 집합에 지나지 않았다. 1921년 4월,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등이 도쿄에서 '일본 공산당 준비회'(코민테른 일본 지부 준비회)를 발족했다.
1922년 7월 15일 일본 공산당(제1차 공산당) 창립 당시 멤버는 사카이, 야마카와, 아라하타 칸손,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토쿠다 큐이치 등이다. 메이지 시대부터의 사회주의자 아래에서 중핵을 이룬 것은 신인회나 건설자 동맹, 효민회 등의 학생 운동 출신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야마카와 계열의 수요회를 기초로 만들어진 오모리 세포에는 건설자 동맹의 타도코로 테루아키가 참가했다. 효민회 계열의 인맥은 제1차 공산당의 큰 기초가 되었는데, 그 중 우라타 타케오는 '농민 운동' 그룹의 세포 중심이었으며, 여기에는 건설자 동맹의 이나무라 류이치가 참가했다. 이 외 건설자 동맹에서는 아사누마 이네지로도 제1차 공산당의 멤버가 되었다. 총동맹 안에도 공산당 그룹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며, 신인회의 아카마츠 카츠마로, 노사카 산조가 그 중심이었다.
2. 1. 러시아 혁명의 영향
1917년(다이쇼 6년) 러시아 제국에서 공산주의 혁명(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세계 혁명을 목표로 하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은 1919년(다이쇼 8년)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3 인터)을 설립하였다. 코민테른은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은 각국의 운동가 및 운동 단체에 영향을 미쳐 각국에 지부를 만들어갔다. 당시 일본에는 대역 사건 등 메이지 시대의 탄압으로 소수의 사회주의자만이 남아 있었고, 이들 역시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도 기존의 사회주의자 외에 젊은 사회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공산당 결성 운동이 활발해졌다.2. 2. 일본 내 사회주의 운동의 성장
1917년 러시아 제국에서 러시아 혁명으로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세계 혁명을 목표로 하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소비에트 연방: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은 1919년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3 인터)을 설립했다. 러시아 혁명은 각국의 운동가 및 운동 단체에 영향을 미쳐 각국에 지부를 만들어갔다. 당시 일본에는 대역 사건 등 메이지 시대의 탄압 결과, 소수의 사회주의자만이 남아 있었고, 이들 역시 엄격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도 기존의 사회주의자 외에 젊은 사회주의 운동가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당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공산당을 결성하려는 운동이 활발해진다.[1]1918년 쌀 소동 소식을 듣고 일본에서 공산당을 결성하여 혁명을 수행하겠다는 결심을 한 곤도 에이조는 1919년 귀국하여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아라하타 칸손 등 메이지 시대부터 활동해온 사회주의자들과 연락을 취하게 된다. 1920년 10월에는 코민테른의 사자가 접촉했다. 코민테른은 사카이와 야마카와에게 극동에서 사회주의자의 국제 조직을 만들기 위해 상하이로 갈 것을 희망했으나, 대역 사건의 기억 때문에 그들은 신중하게 판단하여 응하지 않았다.[1]
이에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가 상하이로 가게 되었다. 약간의 자금을 받아 귀국한 오스기는 1921년 1월, 곤도 등과 함께 주간 『노동 운동』을 창간했다. 1921년 5월 곤도는 운동 자금 6500JPY을 받아 귀국했다. 곤도는 귀국 후, 효민회의 멤버들을 중심으로 '일본 공산당'을 칭하며 활동 중, 11월과 12월에 일제 검거를 당해 효민회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은 중단되었다(효민공산당 사건).[1]
한편 1921년 4월,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곤도 에이조, 하시우라 토키오, 와타나베 미쓰조, 다카쓰 마사미치 등은 도쿄 오모리역 근처에서 회합하여, '일본 공산당 준비위원회'('코민테른 일본 지부 준비회')를 비밀리에 발족시켰다.[1]
같은 해 10월, 코민테른에서 장태뢰가 방일하여 사카이, 야마카와, 곤도 등과 연락, 이듬해 1922년 1~2월의 '극동 민족 대회'에 일본 대표(7명, 아나키스트 5명 포함)를 파견했다. 여기에는 전 효민회의 다카세 기요시, 수요일회의 도쿠다 규이치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 회의에서 일본 대표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일본 공산당 창설 지도와 활동 자금을 받고, 스탈린 등으로부터 일본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지시를 받아 귀국하여 일본 지부 준비회에 보고한 뒤, 당 창설 준비를 시작했다.[1]
3. 창립 과정
1922년 7월 15일, 사카이, 야마카와, 곤도 등 8명이 시부야의 타카세 키요시 셋방에서 치안 경찰법 위반으로 비합법 정당인 일본공산당(제1차 공산당)을 창립했다.[1][2]
당시 일본공산당은 60명 안팎의 공산주의자 서클 연합체와 비슷했으며, 중앙 집권적인 조직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모리 세포 (야마카와 그룹), 고지마치 세포 (사카이 그룹) 등 리더의 주소로 불리는 조직이 있었다. 메이지 시대부터 사회주의 운동을 해온 신인회, 건설자 동맹, 효민회 등의 학생 운동 출신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1]
예를 들어 야마카와 계열의 수요회를 기반으로 한 오모리 세포에는 건설자 동맹의 타도코로 테루아키가 참여했다. 효민회 출신 중에서는 우라타 타케오가 '농민 운동' 그룹 세포의 중심이었고, 이나무라 류이치가 여기에 참여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모리사키 겐키치도 건설자 동맹 출신으로 제1차 공산당원이었다.[1]
총동맹 내에도 공산당 그룹이 있었으며, 신인회의 아카마츠 카츠마로, 노사카 산조가 중심이었다. 사노 마나부와 코이와이 쿄도 신인회 출신으로, 각각 재건 공산당과 간사이 지역에서 활동했다.[1]
같은 해 11월, 코민테른 제4회 대회에 일본 공산당 대표를 파견하여 '코민테른 일본 지부'로 정식 승인받았다. 그러나 1923년 6월, 아라하타를 제외한 당 지도부 전원이 검거되면서 1924년 2월 해산되었다.[1]
3. 1. 준비 모임 결성
1921년 4월,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곤도 에이조, 하시우라 토키오, 타카츠 마사미치 등은 도쿄에서 '일본 공산당 준비회'(코민테른 일본 지부 준비회)를 비밀리에 발족했다.[1] 이는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일본 내 공산주의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পদক্ষেপ이었다.3. 2. 코민테른과의 관계
1921년 4월,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곤도 에이조 등이 도쿄에서 '일본 공산당 준비회'(코민테른 일본 지부 준비회)를 발족했다.[1]1922년 7월 15일 일본공산당 창립대회에서 코민테른 제4회 대회에 일본 공산당 대표를 파견하여 '코민테른 일본 지부'로 정식 승인되었다.[1]
1920년 10월, 코민테른은 사카이와 야마카와에게 극동에서 사회주의자 국제 조직을 만들기 위해 상하이로 갈 것을 요청했지만, 대역 사건의 기억 때문에 신중하게 판단하여 응하지 않았다.[1]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 사카에가 상하이에 가게 되었고, 통신 연락 위원회를 만드는 데에는 동의했다. 약간의 자금을 받아 귀국한 오스기는 1921년 1월, 곤도 등과 함께 주간 『노동 운동』을 창간했다.[1]
1921년 5월, 곤도가 상하이에 가 운동 자금 6500JPY을 받아 귀국했다.[1]
1921년 10월, 코민테른에서 장태뢰가 방일하여, 사카이, 야마카와, 곤도 등과 연락하여, 이듬해 1922년 1월부터 열리는 극동 민족 대회(모스크바)에 일본으로부터의 대표 파견을 요청한다.[1] 이 요청에 따라 1922년 1~2월의 '극동 민족 대회'에 다른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그룹과 함께 일본 대표 7명(아나키스트 5명 포함)을 파견했다. 여기에는, 전 효민회의 타카세 키요시, 수요일회의 토쿠다 큐이치 등이 참여하고 있다.[1]
일본 대표는 코민테른으로부터 일본 공산당 창설의 지도와 활동 자금을 받고, 스탈린 등으로부터 일본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지시를 받아 귀국하여, 일본 지부 준비회에 보고, 귀국 후에는 당 창설 준비를 시작했다.[1]
코민테른은 제5회 대회에 참석한 사노 마나부, 곤도 에이조에게 당 재건의 지시를 내렸고, 귀국한 사노를 중심으로 1925년 여름에 "재건 뷰로"가 결성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1926년 12월에는 "제3회 당대회"가 개최되어 공산당은 재건되었다(제2차 공산당).[1]
3. 3. 창당 대회
1921년 4월,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등은 도쿄에서 '일본 공산당 준비회'(코민테른 일본 지부 준비회)를 발족했다.[1]1922년 7월 15일, 시부야에 있는 타카세 키요시의 셋방에서 치안 경찰법 위반으로 비합법 정당인 일본 공산당(제1차 공산당)을 창립했다. 당시 창립 멤버는 사카이, 야마카와, 아라하타 칸손,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토쿠다 큐이치, 사노 마나부, 나베야마 사다치카, 노사카 산조 등이다.[1][2] 창립 대회에서 위원장은 사카이, 중앙위원은 사카이, 야마카와, 아라하타 칸손, 콘도, 타카츠, 하시우라, 토쿠다 큐이치 7명으로 선출되었다. 현재 일본 공산당은 이 회합을 창립 대회(제1회 당 대회)이자 창립 기념일로 지정하고 있다.
창립 직후, 야마카와는 1922년 8월 전위에 '무산계급 운동의 방향 전환'이라는 논문을 기고했다. 이 논문은 소수 엘리트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 대중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이를 야마카와이즘이라고 한다.[1]
4. 초기 활동과 탄압
1921년 4월,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등은 도쿄에서 '일본 공산당 준비회'('코민테른 일본 지부 준비회')를 발족했다.[1] 1922년 7월 15일, 시부야에서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아라하타 칸손,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토쿠다 큐이치 등이 모여 치안경찰법 위반에 해당하는 비합법 정당으로서 일본 공산당(제1차 공산당)을 창립했다.[1]
당시 일본공산당은 60명 안팎의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된 여러 서클의 연합체와 같았다.[1] 메이지 시대부터의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신인회나 건설자 동맹, 효민회 등의 학생 운동 출신자들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1] 야마카와 계열의 수요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모리 세포에는 건설자 동맹의 타도코로 테루아키가, 효민회 계열의 우라타 타케오는 '농민 운동' 그룹 세포의 중심에 있었으며 건설자 동맹의 이나무라 류이치가 참가했다.[1] 이 외에도 건설자 동맹의 아사누마 이네지로, 모리사키 겐키치도 제1차 공산당원이었다.[1] 총동맹 안에도 공산당 그룹이 있었고, 신인회의 아카마츠 카츠마로, 노사카 산조가 그 중심이었다.[1]
일본공산당은 창당 후, "과격 사회 운동 단속법", "노동 조합법", "소작 쟁의 조정법" 제정 반대 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다.[1] 또한, 청년 조직인 "일본 공산 청년 동맹"(공청)과 노동자 조직인 "레프트"도 결성했다.[1] 그러나 1923년 6월, 일제에 의해 주요 간부들이 검거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1]
4. 1. 코민테른 일본 지부 승인
1922년 11월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 대표 2명을 파견하여 당의 결성을 보고하고, "'''코민테른 일본 지부'''"로 승인받았다.[1] 1923년 2월, 지바현 이치카와시의 요정에서 제2차 당 대회를 열고, 코민테른의 표준 규약을 바탕으로 한 당 규약을 결정했다.[1] 같은 해 3월, 기타토요시마군 샤쿠지이촌(현 네리마구 샤쿠지이)에서 임시 당 대회(샤쿠지이 회의)를 개최하여, 부하린이 기초한 "당 강령 초안"(부하린 강령 초안)을 검토했지만, "군주제 폐지"(일본에서의 황실·천황제 폐지)의 슬로건이 포함되어 있어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강령은 결정되지 않았다.[1] 문제가 된 "군주제 폐지" (천황제 폐지론)에 대해, 오래된 사회주의자들은 강하게 반대했다.[1] 그 결과, 코민테른에는 부하린 강령을 채택한 것처럼 보고하고, 내부적으로는 어디에도 싣지 않기로 했다("22년 테제". 이 시점에서는 작성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1]4. 2. 제2차 당대회와 임시 당대회
1923년 2월, 지바현 이치카와시의 요정에서 제2차 당 대회를 열고, 코민테른의 표준 규약을 바탕으로 한 당 규약을 결정했다.[1] 같은 해 3월, 기타토요시마군 샤쿠지이촌(현 네리마구 샤쿠지이)에서 임시 당 대회(샤쿠지이 회의)를 개최하여, 부하린이 기초한 "당 강령 초안"(부하린 강령 초안)을 검토했지만, "군주제 폐지"(일본에서의 황실·천황제 폐지)의 슬로건이 포함되어 있어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강령은 결정되지 않았다.[1] 문제가 된 "군주제 폐지" (천황제 폐지론)에 대해, 오래된 사회주의자들은 강하게 반대했다.[1] 그 결과, 코민테른에는 부하린 강령을 채택한 것처럼 보고하고, 내부적으로는 어디에도 싣지 않기로 했다("22년 테제". 이 시점에서는 작성되지 않았다는 견해도 있다).[1]4. 3. 일제 검거와 해산
1922년 7월 15일, 시부야의 타카세 키요시 셋방에서 치안 경찰법 위반으로 일본 공산당(제1차 공산당)이 비합법 정당으로 창립되었다.[1] 1923년 6월, 일제에 의해 주요 간부들이 검거되었고, 아라하타 칸손을 제외한 당 지도부 전원은 1924년 2월까지 당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1]당시 일본공산당은 소수의 서클적인 성격을 띤 여러 사상 단체의 집합체였으며,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코민테른 일본 지부'로 정식 승인받았으나, 1923년의 일제 검거로 인해 조직이 와해될 위기에 처했다.[1]
1923년 2월, 지바현 이치카와시의 요정에서 제2차 당 대회를 열어 코민테른의 표준 규약을 바탕으로 당 규약을 결정했다.[1] 같은 해 3월, 기타토요시마군 샤쿠지이촌(현 네리마구 샤쿠지이)에서 임시 당 대회(샤쿠지이 회의)를 개최하여 부하린이 기초한 "당 강령 초안"(부하린 강령 초안)을 검토했지만, "군주제 폐지" 슬로건 때문에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강령은 결정되지 않았다.[1]
5. 재건과 이후의 활동
1923년 6월 일제 검거 사건으로 1924년 2월 해산된 일본공산당은[1] 이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사노 마나부를 중심으로 재건 뷰로가 결성되었고, 1926년 제2차 공산당이 재건되었다.
5. 1. 재건 뷰로와 제2차 공산당
1921년 4월,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등은 도쿄에서 '일본 공산당 준비회'(코민테른 일본 지부 준비회)를 발족했다.[1] 1922년 7월 15일, 시부야에서 비합법(치안경찰법 위반) 정당으로서 일본 공산당(제1차 공산당)을 창립했다.[1] 같은 해 11월, 코민테른 제4회 대회에 대표를 파견하여 '코민테른 일본 지부'로 정식 승인받았으나,[1] 1923년 6월 일제 검거로 1924년 2월 해산했다.[1]이후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사노 마나부를 중심으로 재건 뷰로가 결성되었고, 1926년 제2차 공산당이 재건되었다.
5. 2. 노농파와의 관계
1922년 7월 15일 창립된 제1차 일본공산당은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등 메이지 시대부터의 사회주의자들과 신인회 등 학생 운동 출신자들이 중핵을 이루었다.[1] 그러나, 제1차 일본공산당은 1923년 6월 일제 검거 사건으로 1924년 2월 해산되었고, 이후 야마카와 등은 노농파를 형성하였다.[1]6. 같이 보기
=== 관련 인물 ===
- 사카이 토시히코
- 야마카와 히토시
- 곤도 에이조
- 하시우라 토키오
- 타카츠 마사미치
- 아라하타 칸손
-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 토쿠다 큐이치
- 사노 마나부
- 나베야마 사다치카
- 노사카 산조
- 타카세 키요시
- 요시카와 모리쿠니
- 우라타 타케오
- 아사누마 이네지로
- 아카마츠 카츠마로
- 코이와이 쿄
=== 관련 단체 ===
=== 관련 사건 ===
- 효민공산당 사건
- 전위
6. 1. 관련 인물
- 사카이 토시히코
- 야마카와 히토시
- 곤도 에이조
- 하시우라 토키오
- 타카츠 마사미치
- 아라하타 칸손
-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 토쿠다 큐이치
- 사노 마나부
- 나베야마 사다치카
- 노사카 산조
- 타카세 키요시
- 요시카와 모리쿠니
- 우라타 타케오
- 아사누마 이네지로
- 아카마츠 카츠마로
- 코이와이 쿄
6. 2. 관련 단체
제1차 일본공산당은 여러 단체들의 연합체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주요 관련 단체는 다음과 같다.- 오모리(大森) 세포: 야마카와 히토시 계열의 수요회를 기초로 만들어졌으며, 건설자 동맹의 타도코로 테루아키가 참가했다.
- 고지마치(麹町) 세포: 사카이 토시히코 그룹.
- 농민 운동 그룹: 효민회 계열로, 우라타 타케오가 중심이었으며, 건설자 동맹의 이나무라 류이치가 참가했다.
- 신인회 그룹: 아카마츠 카츠마로, 노사카 산조가 중심이었다. 간사이에서는 코이와이 쿄가 가담했다.
- 기타: 건설자 동맹에서는 아사누마 이네지로, 모리사키 겐키치도 제1차 일본공산당의 멤버가 되었다.
이 외에도 총동맹 안에도 공산당 그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 3. 관련 사건
제1차 일본공산당은 여러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효민공산당 사건: 1921년 5월, 곤도 에이조는 상하이에서 운동 자금 6500JPY을 받아 귀국했다. 귀국 후, 효민회 멤버들을 중심으로 '일본 공산당'을 칭하며 활동하던 중, 11월과 12월에 일제 검거를 당해 효민회를 중심으로 하는 운동은 중단되었다.[1]
- 일본 공산당 준비위원회 발족: 1921년 4월,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곤도 에이조, 하시우라 토키오, 와타나베 미쓰조, 타카츠 마사미치 등이 도쿄 오모리역 근처에서 '일본 공산당 준비위원회'('코민테른 일본 지부 준비회')를 비밀리에 발족시켰다.[2]
- 극동 민족 대회 참가: 1922년 1월~2월, 코민테른의 요청으로 일본 대표(7명, 아나키스트 5명 포함)를 파견했다. 대표단은 코민테른으로부터 일본 공산당 창설 지도와 활동 자금을 받고, 스탈린 등으로부터 일본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지시를 받아 귀국했다.[2]
- 일본 공산당 결성: 1922년 7월 15일, 도쿄부도요타마군 시부야町(현재의 시부야구에비스)의 타카세 키요시 하숙집에서 치안경찰법 위반의 비합법 정당으로 일본 공산당을 결성했다. 당시 당원 수는 100명 남짓이었다.[1][2]
- 무산계급 운동의 방향 전환: 야마카와는 『전위』 1922년 8월호에 '무산계급 운동의 방향 전환'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소수의 자기만족적인 운동이 아니라, 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야마카와이즘).[2]
참조
[1]
서적
日本共産党の八十年
日本共産党中央委員会出版局
2003
[2]
서적
日本共産党の研究
講談社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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