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농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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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농파는 1927년 잡지 『노농』을 창간하며 형성된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 흐름이다. 야마카와 히토시, 아라하타 간손 등이 주도했으며, 코민테른의 노선과 차별성을 보이며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한 사회주의 혁명론을 주장했다. 이들은 일본 자본주의를 불철저한 부르주아 혁명의 결과로, 천황제를 부르주아 군주제로 파악하고, 볼셰비즘 외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발전을 인정했다. 또한, 대중적 합법정당 건설과 노동조합 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1938년 제2차 인민전선사건으로 많은 구성원이 체포되었으며, 전후에는 사회주의협회에 계승되어 일본 사회당 등 일본형 사회민주주의 노선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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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농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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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노파 (노농파) | |
약칭 | 로노하 |
분류 | 일본공산당의 분열 정파 |
역사적 배경 | |
형성 배경 | 1920년대 일본공산당 내부에서 발생한 대립 코민테른의 27년 테제에 대한 입장 차이 |
주요 노선 차이 | 로노파: 농민과 노동자의 계급적 연대를 통한 사회주의 혁명 추구 후쿠모토파: 지식인 중심의 혁명 엘리트주의 |
주요 활동 |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 (전협) 결성 (1928년) 전국농민조합 (전농) 결성 (1927년) 대중 조직을 통한 세력 확장 |
탄압 | 삼일오 사건 (1928년) 이후 대대적인 탄압 주요 간부 체포, 조직 와해 |
이후 | 대부분 전향하거나 지하 활동 전후 일부 세력은 사회주의 운동 재건에 참여 |
주요 인물 | |
이론가 | 야마카와 히토시 구시로 시게오 오모리 요시타로 |
활동가 | 와타나베 마사노스케 오노데라 히로시 오오타 키요시 |
이념 및 특징 | |
마르크스주의 | 마르크스주의를 기반 |
계급 연대 | 노동자, 농민의 계급 연대를 강조 |
대중 운동 | 대중 조직을 통한 사회주의 운동 추구 |
반제국주의 | 반제국주의 노선 표방 |
비판 | |
내부 비판 | 후쿠모토파로부터 이론적 미숙, 대중 운동의 한계 비판 |
외부 비판 | 일본공산당 주류로부터의 분파주의 비판 |
2. 형성 과정
일본공산당은 1922년 7월 창립되었다(제1차 일본공산당). 사카이 토시히코, 야마카와 히토시, 아라하타 간손 등 메이지 시대부터 활동해 온 고참 운동가들이 참여하여 제1차 일본공산당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당원 대다수는 1924년 2~3월경 당시 일본에는 공산당 결성 조건이 미비하다고 판단하여 해산을 결정했다. 아라하타 간손은 해산에 반대하며 사후 처리를 위한 소수 인원의 위원회(뷰로) 설치를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노농파는 현대적인 의미에서 네트워크와 같은 형태로 조직된 집단으로, 명확한 중앙 조직이나 지도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구성원들 사이에는 공통된 인식이 형성되어 있었다. 노농파의 주요 이론적 입장은 『사회주의협회 테제』에 수록된 좌담회 「『사회주의협회 테제』 학습을 위하여」 제1장 「노농파와 강좌파」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야마카와 히토시 등은 대중과 유리된 소수 혁명 정당이 아닌, 모든 반(反)부르주아 계급과 계층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무산계급 정당을 조직하고, 대중운동의 성장을 통해 전위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야마카와이즘)을 견지했다. 이들은 합법 잡지 등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적극적으로 전파했다. 뷰로는 1924년 5월 합법 연구지 『마르크스주의』를 창간했다. 후쿠모토 카즈오는 『마르크스주의』에 「결합 전의 분리론」(후쿠모토이즘)에 입각한 논문들을 기고하며 야마카와 히토시 등을 강하게 비판했고, 이는 당시 지식인과 학생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후쿠모토이즘은 이후 코민테른의 비판을 받아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그 영향력은 이후 일본공산당 내에 강하게 남았다. 야마카와 등은 처음에는 『마르크스주의』에 협력했으나, 후쿠모토의 비판이 거세지자 공개적으로 반론하며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했다.
뷰로는 코민테른의 지도에 따라 1925년 1월 공산당 재건 방침을 결정했고, 1926년 12월 제2차 일본공산당을 공식적으로 재건했다. 코민테른이 1927년에 결정한 일본공산당 강령(27년 테제)은 후쿠모토이즘과 야마카와이즘을 모두 비판하면서 양측의 대립은 더욱 선명해졌다. 아라하타 간손 또한 제1차 공산당 시절 이상의 섹트주의에 반발하여 뷰로를 떠났고, 제2차 공산당에 참여하지 않은 야마카와와 행동을 같이했다. 야마카와와 아라하타 등은 자신들의 활동 거점으로서 1927년 12월 잡지 『노농』을 창간했으며, 이를 계기로 노농파가 형성되었다.
일본공산당은 1928년 2월 야마카와 히토시와 아라하타 간손의 제명을 결정했다. 그러나 노농파 측에서는 자신들이 애초에 제2차 공산당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명 결정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반박했다.
3. 이론 내용
3. 1. 일본 자본주의의 성격
메이지 유신은 불철저한 부르주아 혁명이며, 천황제는 부르주아 군주제로 보았다. 따라서 1927년 당시 정치 투쟁의 주요 대상은 금융자본과 독점자본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적 부르주아 계급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분석에 따라, 노농파가 지향해야 할 혁명의 성격은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주장했다.
3. 2. 볼셰비즘, 코민테른의 평가
레닌주의(볼셰비즘)는 러시아의 특수한 조건 속에서 발전한 이론이며,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유일한 사상으로 볼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독일식 사회민주주의나 러시아식 공산주의를 단순히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현실적인 상황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혁명 운동이 코민테른과 같이 세계적으로 단 하나의 중심 기구로부터 지도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3. 3. 정당론
일반 대중에게 있어 자본주의인가 사회주의인가는 당면 문제가 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부르주아지에 대립하는 모든 사회 계층을 결집하는 대중적·합법적인 정당을 조직해야 한다. 이 정당은 공동전선적 성격을 가진 단일 무산정당이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러한 정당의 결집과 성장에 적극적인 역할을 발휘하면서, 그 안에서 지도력을 확대하는 것이다.
3. 4. 노동조합론
노동조합은 정당의 대치물이 아니며, 조합 운동도 통일되어야 한다. 사회주의 혁명을 목표로 하는 투쟁과 일상생활 개선을 위한 투쟁을 기계적으로 구분하고 후자를 경시하거나 부정해서는 안 된다.
4. 그 후
노농파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은 1938년 2월 제2차 인민전선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전후 노농파는 사회당 좌파의 이론 집단인 사회주의협회로 계승되었고, 이는 일본사회당과 총평의 노선, 이른바 일본형 사회민주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5. 주요 인물
(내용 없음)
5. 1. 경제학자
5. 2. 사회운동가·정치가
- 사카이 토시히코: 메이지 시대부터 활동한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제1차 일본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노농파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 야마카와 히토시: 제1차 일본공산당 창립 멤버이자 노농파의 이론적 지도자였다. 대중과 결합된 광범위한 무산계급 정당 조직을 주장하는 야마카와이즘을 내세웠으며, 잡지 『노농』 창간을 주도하여 노농파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 야마카와 키쿠에
- 에다 사부로
- 스즈키 시게사부로
- 아라하타 칸손: 메이지 시대부터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로, 제1차 일본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이후 야마카와 히토시와 함께 『노농』을 창간하며 노농파 형성에 기여했다.
- 쿠로다 토시오
- 다이마 타다유키
5. 3. 문학자
- 하야마 요시키
- 아오노 스에키치
- 히라바야시 타이코
- 코마키 오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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