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96년 10월 20일에 실시되었으며, 1994년 선거법 개혁으로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가 도입된 후 처음 치러진 선거였다. 이번 선거는 38년간의 자민당 장기 집권 이후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고 경제 회복을 이루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선거 결과, 자민당이 의석을 늘렸지만 과반수 확보에는 실패했고, 신진당, 민주당 등 다른 정당들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선거 이후 중복 입후보, 보궐선거 증가, 사표 발생 등의 문제점이 지적되었으며, 새로운 선거 제도가 정치 시스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이루어졌다.

2. 선거 배경

1996년 10월 20일에 실시된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94년 일본 선거법 개혁 이후 처음 치러진 선거였다. 이전의 중선거구제에서는 한 선거구에서 여러 명의 의원을 선출했기 때문에 같은 정당 내에서도 경쟁이 심했고, 이는 부정부패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새로운 선거 제도에서는 소선거구제와 정당명부 비례대표제를 도입하여, 유권자는 후보자 개인과 지지 정당에 각각 투표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 중의원의 의석 배분이 실제 정당 득표율에 더 가깝게 반영되어, 대표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1993년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이 38년간의 장기 집권을 마감한 이후, 일본 정치는 여러 연립 정부가 나타나면서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1996년 총선은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을 해소하고 안정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 속에 치러졌다.

당시 제1차 하시모토 내각자유민주당, 사회민주당, 신당 사키가케의 연립 내각이었다.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주택금융전문회사 부실채권 처리, 오키나와현 후텐마 비행장 반환 협상 등 어려운 과제를 안고 있었다.

주요 정당으로는 하시모토 류타로가 이끄는 자유민주당,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신진당, 하토야마 유키오간 나오토가 공동 대표로 있던 민주당, 도이 다카코가 이끄는 사회민주당, 후와 테츠조가 위원장으로 있던 일본 공산당, 이데 마사이치가 대표로 있던 신당 사키가케 등이 있었다.

하시모토 총리는 1996년 9월 27일, 제137회 국회 시작과 함께 중의원을 해산하고 조기 총선을 결정했다. 이는 소비세 인상 문제 등으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 정국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으로 여겨졌다.[1]

3. 선거 제도

이번 총선거는 소선거구 비례 대표 병립제에 따라 치러졌다.


  • 소선거구제: 각 선거구에서 최다 득표를 얻은 후보 1명이 당선된다.
  • 비례대표제: 전국 11개 권역별로 정당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한다.


유권자는 1인 2표를 행사하여 소선거구 후보에게 1표, 비례대표 정당에 1표를 각각 투표한다. 선거권은 만 20세 이상 일본 국민에게 주어지며, 일본 중의원 의원 입후보는 만 25세 이상이어야 가능하다.[2]

총 의석수는 500석으로, 소선거구 300석과 비례대표 200석으로 구성된다.

4. 선거 운동

당시는 인터넷이 일반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던 시기였다. 인터넷을 선거 활동에 이용하는 것을 공직선거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규정을 개정해야 하는지 문제가 되었다. 특히 인터넷을 선거에 이용하는 것이 공직선거법에서 금지하는 문서 도화의 배부에 해당하는지 여부가 쟁점이 되었다.[6]

선거 전에는 정당의 난립과 붕괴가 잇따랐고, 국민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저하되고 있었다. 그러나 국민의 관심을 끈 몇 가지 선거 공약으로는 선거 제도 개혁, 소비세 인상 가능성, 그리고 거대 연립 정권의 향방 등이 있었다. 유권자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소비세 인상 가능성이었다. 미야케 이치로(宮家一郎) 학자에 따르면, 유권자의 여론 보유율, 당의 입장 인식률, "증세"의 개인적 중요도 인식률은 "정권 교체"보다 높았다.[6]

각 정당의 주요 공약은 다음과 같았다.[7]

정당주요 공약
자유민주당
신진당
민주당
일본공산당
사회민주당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았다.



각 정당의 선거 슬로건은 다음과 같았다.

  • 자유민주당 (自由民主党) : '''열린 마음으로.'''[15]
  • 신진당 (新進党) : '''여러분 한 표 한 표가 우리와의 계약입니다.'''・'''일본을 근본부터 바꿉니다.'''
  • 민주당 (民主党) : '''미래로부터 부는 바람이 되고 싶습니다.'''
  • 일본공산당 (日本共産党) : '''지금, 여러분의 힘으로 정치는 바뀔 수 있습니다.'''
  • 사회민주당 (社会民主党) : '''시민과의 유대'''
  • 신당사키가케 (新党さきがけ) : '''정도를 걷겠습니다.'''
  • 자유연합 (自由連合) :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정당'''

5. 선거 결과

이번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처음으로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가 함께 도입되었다. 이로 인해 유권자들은 지역구 후보와 정당에 각각 투표하게 되었다.

총 투표율은 소선거구 59.65%, 비례대표 59.62%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는 이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67.26%보다 크게 낮아진 수치이다.

정당별 의석수는 다음과 같다.

정당소선거구비례대표합계
자유민주당16970239
신진당9660156
민주당173552
일본 공산당22426
사회민주당41115
신당 사키가케202
민주 개혁 연합101
기타000
무소속9-9
총계300200500



자유민주당은 239석을 얻어 제1당이 되었지만,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총재, 가토 고이치 간사장, 야마자키 타쿠 정무조사회장 등 주요 인물들이 당선되었다.

신진당은 156석을 얻어 제2당이 되었지만, 오자와 이치로 당수의 비례대표 중복 입후보 불허 방침으로 인해 많은 후보들이 낙선했다.

민주당은 52석을 얻어 선전했지만, 선거 직전 창당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의석수를 크게 늘리지 못했다. 간 나오토 대표와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가 당선되었다.

일본 공산당은 26석을 얻어 약진했다. 후와 테츠조 위원장 등이 당선되었다.

사회민주당은 15석으로 참패했고, 신당 사키가케는 2석으로 대패했다. 도이 다카코 사민당 당수, 이데 쇼이치 신당 사키가케 대표 등이 당선되었다.

400px

5. 1. 선거 결과의 문제점

1996년 첫 선거 이후 새로운 선거 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특히 다음 두 가지 문제점이 부각되었다.

  • 법정 득표수 미달 후보의 비례대표 부활 문제: 법정득표수(유효투표 총수의 6분의 1) 미만, 심지어 '''공탁금 몰수점'''(유효투표 총수의 10분의 1) 미만의 득표를 얻은 후보가 비례대표로 부활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이는 제도적 문제점으로 지적되었고, 2000년 제42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부터는 공탁금 몰수점 미만 득표자는 비례대표 부활이 불가능하도록 개선되었다.[9]

  • 사표 발생 문제: 소선거구제 도입으로 인해 낙선자의 득표율이 높음에도 불구하고, 사표가 대량으로 발생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 신진당은 비례대표와의 중복입후보를 원칙적으로 하지 않아 낙선자가 속출했다. 자유민주당 역시 코스타리카 방식으로 비례 단독 출마자를 늘려 부활 당선 기회가 줄어들면서 낙선자가 많이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는 다음 총선거에서도 계속되었다.[9]


낙선율 90% 이상의 낙선자
선거구후보자 이름정당신구낙선율비례중복당선자당선자 정당비고
지바 4구노다 요시히코신진당99.86없음타나카 쇼이치자유민주당
후쿠시마 5구타나카 나오키자유민주당99.57없음사카모토 고우스케신진당
미야기 6구오이시 마사미츠신진당99.08없음키쿠치 후쿠지로자유민주당
아오모리 2구미무라 신고신진당98.80없음에토 아키노리자유민주당
사이타마 14구야마다 에이스케신진당98.53없음밋쓰하야시 야타로자유민주당
쿠마모토 3구우오스미 히로히데신진당98.43없음마츠오카 토시카츠자유민주당
가나가와 12구에사키 요이치로신진당98.35없음사쿠라이 이쿠조자유민주당
도쿄 20구시미즈 세이이치로자유민주당98.24도쿄오오노 유리코신진당
도쿄 12구사와타 마키신진당98.09없음야시로 에이타자유민주당
이시카와 3구야타토미 로무소속97.82없음카와라 츠토무자유민주당
야마구치 2구마츠오카 마스오신진당97.33없음사토 신지자유민주당
아이치 8구모리타 유스케신진당96.83없음쿠노 토이치로자유민주당
미에 4구노로 아키히코신진당96.70없음타무라 노리히사자유민주당
가고시마 2구토쿠다 토라오자유연합96.54규슈소노다 슈코자유민주당
미야자키 1구요네자와 타카시신진당96.17없음나카야마 나리아키자유민주당
도쿄 14구마츠시마 미도리자유민주당96.04도쿄니시카와 타이치로신진당
니가타 6구츠츠이 노부타카무소속96.03없음타카토리 오사무자유민주당
효고 10구와타라이 키사부로신당 사키가케95.76킨키시오타 스스무신진당
사이타마 12구코지마 토시오자유민주당95.69호쿠칸토마스다 토시오신진당1999년 1월 추가 당선
오사카 15구키타카와 슈지신진당95.43없음타케모토 나오카즈자유민주당
도쿠시마 3구미키 신조자유민주당95.13시코쿠이와아사 유키오신진당
에히메 1구나카무라 토키히로신진당95.00없음세키야 카츠츠구자유민주당
홋카이도 3구아라이 사토시민주당94.85홋카이도이시자키 가쿠자유민주당
홋카이도 7구사쿠라바 야스키민주당94.84홋카이도카네다 에이코자유민주당
니가타 2구콘도 모토히코무소속94.52없음사쿠라이 신자유민주당
기후 1구마츠다 이와오신진당94.48없음노다 세이코자유민주당
지바 9구미즈노 켄이치자유민주당94.37난칸토지츠카와 유키오신진당1999년 3월 추가 당선
효고 11구고토마 타케시신진당94.28없음토이다 토오루자유민주당
사이타마 8구아라이 마사노리자유민주당94.23호쿠칸토나미키 마사요시신진당
사이타마 1구하마다 타쿠지로신진당93.915없음마츠나카 히카루자유민주당
지바 5구카노우 마사루자유민주당93.912난칸토타나카 코민주당
홋카이도 3구미츠이 벤유신진당93.79없음이시자키 가쿠자유민주당3위 낙선
가나가와 2구우에다 아키히로신진당93.54없음스가 요시히데자유민주당
후쿠시마 4구사이토 후미아키자유민주당93.28없음와타나베 코우스케신진당
후쿠이 3구타카기 츠요시자유민주당92.93호쿠리쿠신에쓰츠치카스 히코민주당
돗토리 2구야마우치 오사무신진당92.70없음아이사와 히데유키자유민주당
도쿄 3구마츠하라 진신진당92.61없음쿠리모토 신이치로자유민주당
도쿄 13구콘도 노부요시자유민주당92.212도쿄카모시타 이치로신진당
니가타 1구세키야마 노부유키무소속92.206없음요시다 로쿠자에몬자유민주당신진당·민주당 추천 무소속
시즈오카 6구사쿠라다 미츠오무소속92.13없음와타나베 슈민주당사회민주당 지지 무소속
미야기 5구도이 키미오신진당91.91없음안주 준민주당
미야기 2구지바 쿠니오신진당91.78없음나카노 마사시자유민주당
오사카 13구시오카와 마사시로자유민주당91.71없음니시노 아키라신진당
가나가와 1구오카베 마사히사신진당91.55없음마츠모토 준자유민주당3위 낙선
가나가와 6구츠치다 류지신진당91.53없음이케다 모토히사민주당
홋카이도 4구스즈키 코우스케신진당91.37없음사토 시즈오자유민주당
쿠마모토 5구와타세 노리아키자유민주당91.05규슈야카미 마사요시신진당1998년 8월 1일 사망
후쿠시마 1구이시하라 켄타로무소속90.67없음사토 타츠오자유민주당
교토 3구야마나 야스히데신진당90.43없음테라마에 이와오일본 공산당3위 낙선
도쿄 8구야마다 히로시신진당90.40없음이시하라 노부테루자유민주당
고치 1구이시다 이와토시신진당90.33없음야마하라 켄지로일본 공산당3위 낙선
토치기 5구신도 하츠히로신진당90.224없음모테키 토시미츠자유민주당
지바 8구나카하마 히로유키신진당90.223없음사쿠라다 요시타카자유민주당
오이타 4구이와야 타케시신진당90.19없음요코미츠 카츠히코사회민주당


6. 선거 이후

1996년, 무라야마 내각을 계승한 하시모토 내각은 주택금융전문회사(주택금융전문회사)의 부실채권 처리와 오키나와현푸텐마 비행장의 반환 협상 등 여러 과제를 안고 있었다. 제136회 임시국회에서 주택금융전문회사 특별조치법은 여론의 비판 속에서도 성립되었고, 푸텐마 비행장 반환 합의도 이루어졌다. 하시모토 총리는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제137회 임시국회 개회와 함께 중의원을 해산했다.[14]

선거 결과, 자민당은 239석을 얻어 의석 수를 늘렸지만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했다. 사회민주당과 신당 사키가케는 의석 수가 크게 줄어 참패했다. 신진당오자와 이치로 당수의 방침으로 중복입후보를 제한하여 소선거구에서 의석을 얻지 못하고 비례대표 부활도 거의 없어 의석이 감소했다. 민주당은 신당 붐을 일으키지 못하고 현상 유지에 그쳤다. 일본 공산당은 의석을 크게 늘려 법안 제출권을 획득하고, 소선거구에서도 2석을 얻었다.

선거 후, 제2차 하시모토 내각이 출범했다. 자민당은 단독 내각을 구성했지만, 사민당과 신당 사키가케는 각외협력으로 참여했다.

; 제138회 국회(임시회) 주요 결과[67]



; 제143회 국회(임시회) 주요 결과

; 제147회 국회(정기회) 주요 결과

자민당은 단독 과반수를 회복하기 위해 신진당 의원들을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그 결과, 1997년 9월에는 총선거를 거치지 않고 과반수를 회복했다. 제42회 총선 직전에는 의석 수가 271석까지 증가했다.

한편, 정권 탈취에 실패한 신진당은 탈당자가 속출하고 당내 대립이 격화되어 1997년 12월 해산되었다.

; 보궐선거

월일선거구신구별당선자소속 정파결원소속 정파결원 사유
199712.14미야기현 제6구오노데라 고텐(小野寺五典)자유민주당키쿠치 후쿠지로(菊池福治郎)자유민주당1997.10.31 사직[44]
19982.1이바라키현 제5구오카베 히데오(岡部英男)자유민주당츠카하라 슌페이(塚原俊平)자유민주당1997.12.19 사망
2.22나가사키현 제4구미야지마 다이텐(宮島大典)자유민주당카네코 겐지로(金子原二郎)자유민주당1998.1.23 사직[45]
3.15나가사키현 제1구쿠라나리 마사카즈(倉成正和)자유민주당니시오카 타케오(西岡武夫)신진당1998.2.3 사직[45]
3.29도쿄도 제4구모리타 켄사쿠(森田健作)자유민주당아라이 마사요시(新井将敬)자유민주당1998.2.19 사망
6.14구마모토현 제1구이와시타 에이이치(岩下栄一)자유민주당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민주당1998.5.7 사직[46]
8.23도야마현 제2구미야고시 미쓰히로(宮腰光寛)자유민주당스미 히로시(住博司)자유민주당1998.7.11 사망
이시카와현 제1구오쿠다 켄(奥田建)민주당오쿠다 케이와(奥田敬和)민주당1998.7.16 사망
19994.11도쿄도 제2구나카야마 요시아키(中山義活)민주당하토야마 쿤후(鳩山邦夫)민주당1999.3.2 사직[47]
도쿄도 제15구키무라 츠토무(木村勉)자유민주당카키자와 히로지(柿澤弘治)자유민주당1999.3.25 퇴직[47]
시즈오카현 제8구시오야 타츠(塩谷立)자유민주당키타와키 야스유키(北脇保之)민주당1999.3.2 사직[48]
20002.27미야기현 제6구오이시 마사미쓰(大石正光)민주당오노데라 고텐(小野寺五典)자유민주당2000.1.20 사직[49]
align="right" |군마현 제5구(실시하지 않음)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자유민주당2000.5.14 사망
출전:[https://dl.ndl.go.jp/view/download/digidepo_999859_po_065905.pdf?contentNo=1 전후 보궐선거]



블록신구별당선자명부정당명결원결원사유
199711중국나카바야시 가즈코(中林佳子)일본 공산당마사모리 세이지(正森成二)1997년 11월 6일 사퇴[61]
19983규슈히가시 준지(東順治)[62]신진당아이노 고이치로(愛野興一郎)1998년 3월 20일 사망
11긴키오쿠타니 도루(奥谷通)자유민주당노다 미노루(野田実)1998년 11월 17일 실직[63]
19991중국지쿠마 니사코(竹 നാട്ടുവೈద్యம்)사회민주당아키바 다다토시(秋葉忠利)1999년 1월 11일 사퇴[64]
북칸토고지마 도시오(小島敏男)자유민주당나카지마 요지로(中島洋次郎)1999년 1월 12일 사퇴[65]
3남칸토미즈노 겐이치(水野賢一)자유민주당이시바시 가즈야(石橋一弥)1999년 3월 5일 사망
6규슈하야시다 다케시(林田彪)자유민주당히가시야 요시유키(東家嘉幸)1999년 6월 17일 사퇴[61]
7도쿄시부야 오사무(渋谷修)민주당야마하나 사다오(山花貞夫)1999년 7월 12일 사망
20002도카이기쿠치 다카시(菊池董)사회민주당마에지마 히데유키(前島秀行)2000년 2월 10일 사망
3시코쿠시치조 아키라(七条明)자유민주당오치 이헤이(越智伊平)2000년 3월 24일 사망
4도카이한다 젠조(半田善三)[66]신진당후쿠오카 소야(福岡宗也)2000년 4월 11일 사망


7. 평가 및 영향

새로운 선거 제도는 소선거구제비례대표제를 혼합하여 도입되었는데, 이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소선거구제를 통해 각 지역구의 대표성을 강화하고,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통해 정당 득표율에 따른 의석 배분의 비례성을 높이고자 했다.[2] 그러나 중복 출마 허용으로 인해 소선거구에서 낙선한 후보가 비례대표로 '부활'하는 현상이 발생하여 '좀비 국회의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10] 또한, 소선거구제 도입으로 인해 보궐선거 횟수가 증가하는 문제점도 나타났다.[9]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2000년 선거법 개정을 통해 소선거구에서 일정 득표율 미만 후보는 즉시 실격되도록 하여 중복 출마 문제를 일부 완화했다.[9] 또한, 보궐선거 횟수 증가에 대응하여 매년 두 차례 상원과 하원의 보궐선거를 같은 날 실시하도록 하였다.[9]

장기적으로 새로운 선거 제도는 당초 기대했던 양당제 의회 제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9] 중복 후보 시스템과 개정되지 않은 선거운동 제한으로 인해, 후보들은 여전히 지역구 서비스 및 혜택 제공을 통해 표를 동원할 수 있었다.[9] 한편, 자유민주당은 '최고 낙선자 규정'을 도입하여 후보들이 비례대표 단계에 진출하기 위해 일정 수의 개인 표를 얻도록 장려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엔카이(後援会)의 힘은 약해졌는데, 이는 유권자들이 정치인들의 혜택 제공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엔카이에 가입하는 것에 점점 덜 관심을 갖고, 대신 부동층 또는 무소속 유권자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10] 자유민주당 내부의 파벌 영향력은 점진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10]

결과적으로, 정책 연구 위원회(PARC)는 새로운 선거 제도에서도 표를 얻는 데 사용될 수 있도록 수정되었다.[10] 연정은 1996년 이후 자유민주당의 장기 집권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특히 공명당과의 연정은 2012년과 2014년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의 압승에 크게 기여했다.[11]

국회는 선거 운동에 대한 공적 자금 지원을 확대하고, 개별 정치인이나 파벌에 대한 기부금에 대한 엄격한 제한을 부과하는 선거 자금법을 통과시켰다.[9] 또한 젊은 국회의원들이 파벌 지도자에게 덜 충성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9]

8. 각주


  • 아사히 신문 선거 본부편 「아침해 선거 대관 제41회 중의원 총선거 제17회 참의원 통상 선거」(아사히 신문 1997년).

참조

[1] 간행물 Japan Parliamentary Chamber: Shugiin - Elections held in 1996 http://archive.ipu.o[...] Inter-Parliamentary Union 1996
[2] 논문 The 1996 General Election in Japan 1997
[3] 서적 The logic of Japanese politics : leaders, institutions, and the limits of change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9
[4] 웹사이트 Liberal-Democratic Party of Japan https://www.britanni[...] 2017-12-17
[5] 서적 Contemporary Japanese politics : institutional changes and power shift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3-09-24
[6] 논문 Incomplete Policy Voting 1999-02-28
[7] 웹사이트 1996 House of Representatives Election (1996年衆議院選挙) http://www.pac.sfc.k[...] 2017-12-18
[8] 서적 MITI and the Japanese miracle : the growth of industrial policy, 1925-1975 https://archive.org/[...]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2
[9] 서적 The politics of electoral systems Oxford University Press 2005
[10] 서적 The rise and fall of Japan's LDP : political party organizations as historical institutions https://archive.org/[...] Cornell University Press 2011
[11] 서적 The Routledge handbook of Japanese politics Routledge 2011
[12] 서적 Japan's security renaissance : new policies and politics for the twenty-first century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7
[13] 서적 The Japanese way of politics https://archive.org/[...] Columbia University Press 1988
[14] 논문 衆議院の「解散・総選挙」-解散の特色と「類型」 https://meiji.repo.n[...] 明治大学政治経済研究所 1999-12-30
[15] 논문 '96衆院選広告総まくり マドラ出版 1996-11-01
[16] 문서 신진당 해당 후, 신당 평화를 거쳐 공명당 결성에 참가.
[17] 문서 신진당 탈당 후, 자민당에 입당.
[18] 문서 신진당 해당 후, 개혁 클럽을 거쳐 자민당에 입당.
[19] 문서 신진당 해당 후, 자유당 결성에 참가.
[20] 문서 신진당 해당 후, 자유당을 거쳐 보수당 결성에 참가.
[21] 문서 중의원 의장 취임에 따라, 당적 이탈.
[22] 문서 신진당 해당 후, 국민의 소리, 민정당을 거쳐 민주당 결성에 참가.
[23] 문서 당선 후, 자유의 회를 거쳐, 자민당에 입당.
[24] 문서 부의장 취임 후, 당적 이탈. 신진당 해당 후, 무소속의 회 입당.
[25] 문서 자민당에 입당.
[26] 문서 신진당 해당 후, 개혁 클럽 결성에 참가.
[27] 문서 신진당 탈당 후, 프롬 파이브, 민정당을 거쳐 민주당 결성에 참가.
[28] 문서 무소속의 회에 입당.
[29] 문서 신진당 해당 후, 신당 우애를 거쳐 민주당 결성에 참가.
[30] 문서 신진당 해당 후, 무소속의 회 입당.
[31] 문서 신진당 해당 후, 개혁 클럽을 거쳐 민주당에 입당.
[32] 문서 신진당 탈당 후, 태양당, 민정당을 거쳐 민주당에 입당.
[33] 문서 신진당 해당 후, 무소속의 회를 거쳐 무소속.
[34] 문서 신진당 탈당 후, 태양당, 민정당을 거쳐, 자민당에 입당.
[35] 문서 신진당 탈당 후, 자유당을 거쳐 민주당 결성에 참가.
[36] 정치
[37] 정치
[38] 정치
[39] 정치
[40] 정치
[41] 정치
[42] 정치
[43] 정치
[44] 정치
[45] 정치
[46] 정치
[47] 정치
[48] 정치
[49] 정치
[50] 정치
[51] 정치
[52] 정치
[53] 정치
[54] 정치
[55] 정치
[56] 정치
[57] 정치
[58] 정치
[59] 정치
[60] 정치
[61] 정치
[62] 정치
[63] 정치
[64] 정치
[65] 정치
[66] 정치
[67] 웹사이트 『官報号外』平成8年11月7日 第138回国会衆議院会議録第1号 https://kokkai.ndl.g[...]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