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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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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1993년 7월 18일에 실시되었으며, 55년 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선거로 평가받는다. 자유민주당의 장기 집권으로 인한 정치 개혁 요구, 거품 경제 붕괴로 인한 사회 불안이 선거의 배경이 되었고, 선거 과정에서 중의원 해산과 정치 개혁을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선거 결과 자민당은 과반 확보에 실패하며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신당들의 약진과 사회당의 참패가 두드러졌다. 이 선거는 호소카와 연립 내각의 출범과 붕괴, 정치 개혁 추진과 좌절, 자민당의 재집권으로 이어지는 일본 정치의 격변을 가져왔으며,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정세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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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지도 정보
선거구는 승자의 득표율에 따라 음영 처리됨
기본 정보
국가일본
선거 유형입법부
이전 선거1990년 일본 총선거
이전 선거 연도1990
다음 선거1996년 일본 총선거
다음 선거 연도1996
선출 의석중의원의 모든 511석
과반 의석256
투표율66.99% (6.32%p)
선거일1993년 7월 18일
주요 정당 및 지도자
제1당 지도자미야자와 기이치
제1당자유민주당
제1당 지난 선거 결과46.14%, 275석
제1당 의석수'223'
제1당 의석 변화52
제1당 득표수'22,999,646'
제1당 득표율'36.62%'
제1당 득표율 변동9.49%p
제2당 지도자야마하나 사다오
제2당일본사회당
제2당 지난 선거 결과24.35%, 136석
제2당 의석수70
제2당 의석 변화66
제2당 득표수9,687,588
제2당 득표율15.43%
제2당 득표율 변동8.96%p
제3당 지도자하타 쓰토무
제3당신생당
제3당 지난 선거 결과존재하지 않음
제3당 의석수55
제3당 의석 변화신생
제3당 득표수6,341,364
제3당 득표율10.10%
제3당 득표율 변동신생
제4당 지도자이시다 고시로
제4당공명당
제4당 지난 선거 결과7.98%, 45석
제4당 의석수51
제4당 의석 변화6
제4당 득표수5,114,351
제4당 득표율8.14%
제4당 득표율 변동0.16%p
제5당 지도자호소카와 모리히로
제5당일본신당
제5당 지난 선거 결과존재하지 않음
제5당 의석수35
제5당 의석 변화신생
제5당 득표수5,053,981
제5당 득표율8.05%
제5당 득표율 변동신생
제6당 지도자후와 데쓰조
제6당일본공산당
제6당 지난 선거 결과7.96%, 16석
제6당 의석수15
제6당 의석 변화1
제6당 득표수4,834,587
제6당 득표율7.70%
제6당 득표율 변동0.26%p
제7당 지도자오우치 게이고
제7당민주사회당
제7당 지난 선거 결과14석, 4.84%
제7당 의석수15
제7당 의석 변화1
제7당 득표수2,205,682
제7당 득표율3.51%
제7당 득표율 변동1.33%p
제8당 지도자다케무라 마사요시
제8당신당 사키가케
제8당 지난 선거 결과존재하지 않음
제8당 의석수13
제8당 의석 변화신생
제8당 득표수1,658,097
제8당 득표율2.64%
제8당 득표율 변동신생
제9당 지도자에다 사쓰키
제9당사회민주연합
제9당 지난 선거 결과4석, 0.86%
제9당 의석수4
제9당 득표수461,169
제9당 득표율0.73%
제9당 득표율 변동0.13%p
총리 정보
선거 전 총리미야자와 기이치
선거 전 총리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선거 후 총리호소카와 모리히로
선거 후 총리 소속 정당일본신당

2. 선거 배경

제1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의석을 획득한 일본신당과 선거 직전에 자민당에서 탈당한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신생당, 신당사끼가께가 약진하여 이른바 '''신당 붐'''이 일어났다. 자민당은 당내 분열로 과반 의석이 무너지고 있었고, 갑작스러운 총선거로 인해 신생당이나 신당 사키가케로 당적을 옮긴 의원들의 빈자리를 채울 후보(이른바 자객)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자민당은 공시 전 의석을 유지하는 데 그쳐 단독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한편, 일본 사회당은 '신당 붐'에 휩쓸려 55년 체제 이후 최소 의석을 기록했다. 일본 공산당이 1석 감소한 것을 제외하면 다른 정당들은 모두 의석을 유지하거나 늘렸지만, 사회당의 의석 감소는 두드러졌다. 자민당과 사회당 모두 목표 의석에 크게 미치지 못하면서, 기존 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드러났다.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등 5개 정당은 선거 전부터 연립정권 구성을 위한 협의를 진행했지만, 총 195석으로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자민당 역시 223석으로 과반수에 미달하면서, 일본신당신당 사키가케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양측의 협상 결과, 7개 정당과 민주개혁연합은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수립에 합의했다. 이로써 '''55년 체제가 붕괴'''되고, 일본신당 대표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수반으로 하는 호소카와 내각이 성립되었다.

자민당은 공시 전 의석을 유지하며 중의원 제1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창당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했다. 반면, 사회당은 좌우 통일 이후 최저 의석을 기록했음에도 제1여당으로서 중의원 의장과 4명의 국무 대신, 4명의 장관을 배출했다. 그러나 사회당에게는 타 정당과의 협력이 당의 존재 의의를 퇴색시키고 노선 변경을 강요하는 요인이 되어, 집권 여당임에도 불구하고 양대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는 치명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비자민 세력의 약진이 두드러졌지만, 투표율은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일본 신당에서 에다노 유키오, 마에하라 세이지, 노다 요시히코, 가이에다 반리 등 훗날 민주당 정권에 참여하는 정치인들이 처음 당선되었고, 자민당에서도 아베 신조, 시오자키 야스히사, 노다 세이코 등이 초선으로 당선되는 등, 여야를 불문하고 이후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인물들이 대거 등장했다.

이러한 선거 배경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작용했다.


  • 자민당 장기 집권의 폐해: 1955년 체제 하에서 자민당의 일당 지배 체제가 장기화되면서 정경유착, 파벌 정치, 관료주의 심화, 세습 정치 조장, 경기 침체 대응 실패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 정치 개혁 요구: 1988년 리쿠르트 사건, 1992년 사가와 택배 사건 등 대형 정치 스캔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 정치 개혁 요구가 높아졌다. 카네마루 신의 불법 자금 모금 문제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가이후 도시키 총리와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정치 개혁을 약속했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아 국민들의 불신이 커졌다.
  • 거품 경제 붕괴와 사회 불안: 1980년대 후반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발생한 거품 경제가 붕괴하면서 일본 경제는 침체에 빠졌고, 이는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

2. 1. 자민당 장기 집권의 폐해

1955년 체제는 자민당의 일당 독재와 여러 다른 정당들의 만년 야당화를 특징으로 한다.[11] 수년간의 스캔들 이후 나온 역사적인 결과로, 자민당은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총리직을 잃게 되었다. 자민당 패배의 근본적인 원인은 핵심 정치인들의 당 탈당과 그에 따른 두 개의 분당이었다.

자민당 장기 집권의 폐해는 다음과 같이 분석될 수 있다.

  • 정경유착: 자민당 후보자들은 일본 기업과의 광범위한 접촉을 통해 더 많은 물질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었다. 이는 자민당에 엄청난 이점을 제공했지만, 동시에 부패의 유혹을 증가시켰다.[33] 부패 문제는 일본 정치에서 점점 더 두드러지는 문제였으며, 이는 선거 제도 때문으로 여겨진다.[30]
  • 파벌 정치: 자유민주당(LDP)은 매우 분열되고 분권화된 정당으로, 파벌과 전문 분야에서 전문성, 경험 및 인맥을 쌓은 베테랑 정치인인 '조쿠'(政策部族)에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두고 있었다.[18]
  • 관료주의 심화: 재정 중앙 집권화는 물질적 이득을 위한 표 매수의 배경을 제공했다.[12] 일본의 농촌 현들은 상당한 재정 자원에 접근하는 것이 드물며, 대신 중앙 정부에 의존한다.[23][24] 지방 자치 단체의 수입 중 70%가 중앙 정부로부터 나왔다.[25] 결과적으로 47개 현 정부는 중앙 정부의 재정으로부터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끊임없는 경쟁에 놓였다. 따라서 국회의원들은 단순히 자신들의 선거구민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국고와 각 현을 잇는 “파이프라인” 역할을 했다.[12]
  • 세습 정치 조장: 세습 정치를 조장하는 구조적 요인으로는 재정 중앙 집권화, 1994년 이전 선거 제도, 그리고 선거구 인구 불균형이 있다.[12] 대규모 족벌주의는 개별 후보가 자신의 '고엔카이'(後援会)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당 대표나 당의 명칭과 무관하게 표를 얻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타났다.[18] 이러한 기계 정치의 결과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세습 정치인" 국회의원을 배출했다.[18]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는 록히드 사건 연루 사실이 밝혀진 후 사임해야 했다.[22] 그의 사임 후에도 니가타 지역의 그의 선거 조직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의 딸인 다나카 마키코는 1993년 니가타 선거구 제3구(5명 선출)에서 1위로 중의원에 당선되었다.
  • 경기 침체 대응 실패: 1980년대 후반의 부동산 버블로 인한 경기 침체와 자민당의 부적절한 대응 실패는 자민당의 명성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고 55년 체제가 붕괴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2. 2. 정치 개혁 요구

1988년 리쿠르트 사건과 1992년 사가와 택배 사건 등 대형 정치 스캔들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국민들 사이에서는 정치 개혁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4][5] 특히 카네마루 신의 불법 자금 모금 문제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7] 가이후 도시키 총리와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정치 개혁을 약속했지만,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서 국민들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6]

이러한 상황에서 하타 쓰토무오자와 이치로 등은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당을 창당하는 등 정치 개혁을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정치 개혁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중의원 선거 제도 개혁: 기존의 중선거구제는 같은 정당 후보 간에도 경쟁이 치열해져, 정책 중심의 선거보다는 개인의 인맥이나 지역 이익을 위한 활동에 치중하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30][18][31] 이를 해결하기 위해 소선거구제비례대표제를 혼합한 제도를 도입하여, 정당 중심의 정책 경쟁을 유도하고자 했다.
  • 정치자금규제법 강화: 당시 정치자금규제법은 여러 허점이 있어, 정치인들이 기업이나 단체로부터 거액의 정치 자금을 받는 것을 막지 못했다.[33] 이를 개선하기 위해 기업 및 단체의 헌금을 금지하고, 정치 자금의 투명성을 높이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 표의 가치 불균형 해소: 당시 선거구는 농촌 지역에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어, 도시 지역 유권자들의 표 가치가 상대적으로 낮았다.[18][27] 일본 최고재판소는 이러한 불균형이 위헌적인 상태라고 판결했으며, [28] 이를 시정하기 위한 선거구 재획정이 필요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연립 내각은 이러한 내용을 담은 정치 개혁 법안을 제출했고, 자민당도 자체적인 법안을 제출했다.[6] 이 법안들은 국회에서 논의를 거쳐 수정되었고, 1994년 3월에 최종적으로 통과되었다.[6]

2. 3. 거품 경제 붕괴와 사회 불안

1980년대 후반 일본에서는 플라자 합의 이후 엔화 가치가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주식과 토지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오르는 "거품 경제" 현상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자본 투자와 소비가 급증하고 자산 가격이 폭등했다.[34]

그러나 정부가 통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주식 및 토지 가격이 하락했고, 이는 금융 기관, 특히 증권 회사에 큰 손실을 안겨주었다. 1991년 이후 일본 경제는 정부의 자유화 조치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경기 회복은 더디게 진행되었다.[34] 이러한 경제 상황은 "거짓말쟁이 해산" 또는 정치 개혁 해산으로 불리는 정치적 변화 요구로 이어졌다.

3. 선거 과정

1993년 총선은 7월 4일 공시되어 7월 18일에 투표가 실시되었다. 당초 정부는 7월 7일부터 9일까지 예정된 도쿄 서미트를 고려하여 "7월 11일 공시, 25일 투표"를 희망했다. 그러나 자민당은 간마루 신 탈세 사건 첫 공판(7월 22일 예정)이 선거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여 "4일 공시, 18일 투표"를 요구했고, 결국 당의 요구대로 일정이 결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의 리더십이 약화되었다는 인상을 남겼다.[1]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투표는 1993년 7월 18일에 실시되었다. 투표율은 67.26%로,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했다.[1] 이는 기존 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정당후보자득표수득표율(%)의석수의석 증감의석률(%)
자유민주당28522,999,64636.62223-5243.64
일본 사회당1429,687,58815.4370-6613.70
신생당696,341,36410.1055+5510.76
공명당545,114,3518.1451+69.98
일본신당575,053,9818.0535+356.85
일본 공산당1294,834,5877.7015-12.94
민사당282,205,6823.5115+12.94
신당 사키가케161,658,0972.6413+132.54
사회민주연합4461,1690.73400.78
기타 정당62143,4860.230-10.00
무소속1094,304,1886.7730+95.87
합계95562,804,14598.83511-1100
기권/무효743,6741.17
등록 유권자/투표율94,477,81667.26



일본신당,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등 신당들이 약진하는 이른바 "'''신당 붐'''"이 일어났다. 자민당은 후보자 난립과 신당으로의 이탈 등으로 인해 의석수가 크게 줄어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반면 일본 사회당은 "신당 붐"에 휩쓸려 55년 체제 이후 최소 의석을 기록하며 참패했다. 일본 공산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은 모두 의석이 증가하거나 유지되어, 사회당의 몰락이 두드러졌다.

결과적으로 자민당과 사회당 양대 정당 모두 목표 의석에 크게 미달하여, 기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임이 확인되었다.

자민당은 1955년 이후 세 차례(1976년, 1979년, 1983년) 중의원에서 다수당 지위를 잃었지만, 근소한 차이였다.[9] 1993년에는 자민당에 합류하려는 독립 의원이 충분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소규모 정당은 자민당과의 연정을 거부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비자민당 연립 정부가 가능하게 되었다.[8]

3. 1. 중의원 해산

1993년,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가 이끌던 미야자와 개조내각은 정치 개혁 법안 처리에 실패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자민당 내부에서는 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 등 개혁파 의원들이 정치 개혁을 강력히 요구하며 당내 갈등이 심화되었다.[3]

1955년 체제 하에서 장기 집권해 온 자민당은 리쿠르트 사건, 사가와 택배 사건 등 각종 비리 사건으로 국민들의 불신을 받고 있었다.[4][5] 특히 카네마루 신의 불법 자금 모금 문제는 "킹메이커"로 불리던 유력 정치인의 부패를 드러내며 정치 개혁의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켰다.[7]

미야자와 총리는 전국 방송을 통해 부정부패 방지 대책을 약속했지만, 당내 반발과 개혁 의지 부족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6] 이에 야당은 내각 불신임안을 제출했고, 자민당 내 개혁파 의원 39명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불신임안이 가결되었다.[3] 이는 자민당 창당 이후 두 번째로 불신임안이 가결된 사례였다.[3]

결국 미야자와 총리는 6월 18일 중의원을 해산하고 7월 18일에 총선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3] 이 해산은 정치 개혁 실패와 내각 불신임안 가결이라는 상황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거짓말쟁이 해산' 또는 '정치 개혁 해산'으로 불렸다.

3. 2. 선거 운동

政治改革일본어 (정치 개혁) 문제가 불신임 투표의 핵심이었다. 1988년 리쿠르트 사건과 1992년 사가와 택배 사건 등 일련의 사건 이후,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는 부정부패 방지 대책을 약속했지만, 당내 갈등으로 이행하지 못했다.[5][6]

이에 국민과 개혁 성향의 자민당 의원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졌다. 하타 쓰토무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파벌은 자민당을 탈당하여 신생당(JRP)을 결성했고,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 9명의 젊은 의원들은 신당 사키가케(Shinto Sakigake)를 창당했다.[8][4]

일본신당(JNP)은 1992년 5월 호소카와 모리히로에 의해 결성되었다.[8][4] 2주간의 공식 선거 운동 기간 동안, 거의 모든 후보가 정치 개혁을 언급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변화"는 핵심 키워드였으며, 부패 관행과 자민당(LDP)의 집권 체제 변화를 의미했다.[35]

언론들은 자민당의 과반 의석 상실을 예측했다. 1993년 6월 25일부터 27일까지 니케이(Nikkei)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민당 지지율은 43.8%에서 28.6%로 하락했다.[36]

자민당의 선거 슬로건은 안정적인 일당 체제였다. 자민당 사무총장 가지야마 세이로쿠(梶山静六)는 "안보 및 외교 문제에 대한 의견이 다른 세력의 연립 정권 하에서는 일본의 정치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36]

비자민당 연립 정부는 보수, 중도, 좌파 야당들의 합의에서 비롯되었다. 주요 쟁점은 선거 제도 개혁이었다. 경제 성장을 위한 감세와 부정부패 방지 대책도 합의되었다. 일본 사회당(JSP)은 일본 자위대 합헌성 인정, 한반도 평화 조약 수용 등 기존 입장을 완화했다.[36]

야당들은 무역 자유화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신생당(JNP)만이 일본의 쌀 시장 개방을 찬성했다.[36][38] 각 당의 선거 공약은 모호한 경향이 있었다.

신생당(JNP)의 강령은 (1) 정치 윤리, 정치 개혁, (2) 국제적 기여, (3) 헌법, (4) 외교, 국방, (5) 경제, 조세 제도, (6) 농업 정책, (7) 환경, (8) 교육, 복지 등을 다루었다.[36]

3. 3. 투표 및 개표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투표는 1993년 7월 18일에 실시되었다. 투표율은 67.26%로,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저 투표율을 기록했다.[1] 이는 기존 정당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정당후보자득표수득표율(%)의석수의석 증감의석률(%)
자유민주당28522,999,64636.62223-5243.64
일본 사회당1429,687,58815.4370-6613.70
신생당696,341,36410.1055+5510.76
공명당545,114,3518.1451+69.98
일본신당575,053,9818.0535+356.85
일본 공산당1294,834,5877.7015-12.94
민사당282,205,6823.5115+12.94
신당 사키가케161,658,0972.6413+132.54
사회민주연합4461,1690.73400.78
기타 정당62143,4860.230-10.00
무소속1094,304,1886.7730+95.87
합계95562,804,14598.83511-1100
기권/무효743,6741.17
등록 유권자/투표율94,477,81667.26



이 선거에서는 일본신당,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등 신당들이 약진하는 이른바 "'''신당 붐'''"이 일어났다. 자민당은 후보자 난립과 신당으로의 이탈 등으로 인해 의석수가 크게 줄어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반면 일본 사회당은 "신당 붐"에 휩쓸려 55년 체제 이후 최소 의석을 기록하며 참패했다. 일본 공산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은 모두 의석이 증가하거나 유지되어, 사회당의 몰락이 두드러졌다.

결과적으로 자민당과 사회당 양대 정당 모두 목표 의석에 크게 미달하여, 기존 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임이 확인되었다.

4. 선거 결과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일본 정치사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자민당은 1955년 창당 이후 처음으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야당으로 전락했으며, 사회당은 55년 체제 이후 최소 의석을 기록하는 등 기존 양대 정당 모두 국민의 불신을 확인하는 결과를 얻었다.

전년도 참의원 선거에서 약진한 일본신당과 선거 직전 자민당 탈당파 의원들이 결성한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등이 돌풍을 일으키며, 이른바 "신당 붐"이 일어났다. 그러나 자민당은 분열과 갑작스러운 선거로 인해 후보자 공천에 어려움을 겪으며 의석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사회당은 "신당 붐"에 휩쓸려 의석수가 크게 감소했다. 일본 공산당을 제외한 다른 정당들은 모두 의석을 유지하거나 늘려, 사회당의 패배가 더욱 두드러졌다.

선거 결과, 자민당은 223석, 사회당은 70석, 신생당은 55석, 공명당은 51석, 일본신당은 35석, 공산당은 15석, 민사당은 15석, 신당 사키가케는 13석, 사회민주연합은 4석을 얻었다. 무소속 의원도 30석이나 되었다.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등 5개 정당은 연립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를 시작했지만, 이들 정당의 의석수는 과반에 미치지 못했다. 자민당 역시 과반수 확보에 실패하면서, 일본신당신당 사키가케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결국 7개 정당과 민주개혁연합이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수립에 합의하면서 55년 체제가 붕괴되고,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호소카와 내각이 성립되었다.

자민당은 제1당 지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야당이 되었고, 사회당은 제1 여당으로서 중의원 의장과 여러 장관직을 얻었지만, 당의 노선 변화와 역할 상실이라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이 선거는 비자민 세력의 약진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67.26%로 당시 기준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는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과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는 동시에, 일본 사회의 보수적인 성향과 정치적 연속성을 보여주는 결과이기도 했다.

이 선거를 통해 에다노 유키오, 마에하라 세이지, 노다 요시히코, 가이에다 반리 등 훗날 민주당 정권의 주요 인물들이 처음 당선되었고, 자민당에서도 아베 신조, 시오자키 야스히사, 노다 세이코 등이 초선 의원이 되는 등, 이후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했다.

4. 1. 정당별 의석 분포

--|]]
정당후보자득표의석
득표수%±의석±%
width="1" style="background-color:;" |자유민주당28522,999,64636.6222343.64
width="1" style="background-color:;" |일본 사회당1429,687,58815.437013.70
width="1" style="background-color:;" |신생당696,341,36410.105510.76
width="1" style="background-color:;" |공명당545,114,3518.14519.98
width="1" style="background-color:;" |일본신당575,053,9818.05356.85
width="1" style="background-color:;" |일본 공산당1294,834,5877.70152.94
width="1" style="background-color:;" |민사당282,205,6823.51152.94
width="1" style="background-color:;" |신당 사키가케161,658,0972.64132.54
width="1" style="background-color:;" |사회민주연합4461,1690.734±00.78
width="1" style="background-color:gray" |기타62143,4860.2300.00
width="1" style="background-color:;" |무소속1094,304,1880.73305.87
유효62,804,14598.83colspan=4 |
기권/무효743,6741.17colspan=4 |
합계95563,547,8191000511100
colspan="9" style="background:#E9E9E9;"|
등록유권자/투표율94,477,81667.26colspan=4 |



자유민주당(자민당)은 1976년, 1979년, 1983년에 중의원에서 다수당 지위를 상실했지만, 그 차이는 매우 미미했다.[9] 그러나 1993년에는 자민당에 합류하려는 독립 의원이 충분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소규모 정당은 자민당과의 연정을 거부하여, 자민당이 아닌 연립 정부가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8]

자민당은 파벌과 전문 분야에서 전문성과 경험, 인맥을 쌓은 베테랑 정치인인 '조쿠'(政策部族)에 독립적인 권력 기반을 둔 매우 분열되고 분권화된 정당이었다. 대규모 파벌주의는 개별 후보가 자신의 '고엔카이'(後援会)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당 대표나 당의 명칭과 무관하게 표를 얻을 수 있는 능력에서 나타났다.[18]

자민당은 1983년 이후 처음으로 전체 의석 과반을 잃었으며, 1955년 이후 처음으로 정부 구성에도 실패했다. 자민당이 획득한 하원 의석수 223석은 한 달 전 보유 의석보다 52석 적었고, 511석 의회에서 과반(256석) 확보에 33석이 부족했다.[39] 신생당사키가케를 결성한 50명 이상의 자민당 의원들이 과반 확보를 저지했다.

일반적인 연정 구성 과정에서 자민당은 최대 정당으로서 민사당을 제외한 어떤 정당과도 연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변화를 요구하는 불만스러운 유권자들의 기대에 압도되어, 당시 집권당인 자민당과의 동맹을 거부했다.[40]

자민당은 득표수와 획득 의석수 모두에서 가장 강력한 정당으로 남았지만, 대의원 의석 과반을 확보하지 못했다. 511석 중 223석을 차지한 자민당은 실질적인 야당 역할을 할 기회를 얻었는데, 이는 과거 38년 동안 최대 야당이었던 사회당이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의석을 보유한 것과는 매우 다른 상황이었다.[41] 공명당, 민사당, 신사회당, 일본 공산당은 기존 의석을 유지했다.

가장 큰 패배자는 의석의 절반 가까이를 잃은 사회당이었고, 가장 큰 승자는 신당진보당이었다.[42] 해산 전 134석이었던 사회당은 70석으로, 1955년 통합 정당 출범 이후 최저치였다. 이전에 자민당에 대한 반발로 사회당에 투표했던 유권자들은 이제 자민당 이외의 세 개의 보수 정당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41]

이 선거는 일본 사회의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성격, 개인적인 영지(fiefdoms)의 지속, 보수 및 중도 세력의 강화, 좌파 정당의 약화를 반영하며 상당한 정도의 연속성을 보여주었다.[41][42] 정치적 변화는 야당의 힘보다는 자민당의 약점과 내부 분열, 여러 파벌을 하나로 묶는 지도자의 무능함의 결과였다. 자민당은 오랫동안 실천해 온 유연한 입장을 취할 수 없었고, 오히려 엄격한 입장이 약점을 드러내 자민당에서 이탈한 보수파의 강점이 되었다.[41]

4. 2. 55년 체제의 붕괴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등 5개 정당은 선거 전부터 연립정권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고 있었지만, 총 195석에 그쳐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다. 자민당도 223석에 그쳐 과반에 미달했기 때문에, 일본신당신당 사키가케캐스팅보트를 잡았다. 쌍방 교섭의 결과, 위 7개 정당과 민주개혁연합은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수립에 합의하였다. 이 결과 '''55년 체제가 붕괴'''되고, 일본신당 대표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수반으로 하는 호소카와 내각이 성립했다.[1]

자민당은 공시 전 의석을 유지해, 중의원 제1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창당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했다. 한편, 사회당은 좌우 통일 이래 최저 의석수를 기록했지만, 제1 여당으로서 중의원 의장과 4명의 국무 대신 그리고 4명의 장관을 획득했다. 사회당에게는 타 당과의 협조가 당의 존재 의의를 퇴색시키거나 노선 변경을 강요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에, 집권 여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양대 정당의 실력자로서 역할을 상실한 치명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전년도 제16회 참의원 선거에서 의석을 획득한 일본신당과 선거 직전 자민당에서 탈당한 의원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신생당신당 사키가케가 약진하여 "'''신당 붐'''"이 일어났다. 자민당은 당의 분열로 선거 전부터 과반수를 밑돌았을 뿐 아니라, 갑작스러운 해산으로 신생당이나 신당 사키가케로 이적한 전직 의원의 공백을 메울 후보(소위 刺客)를 옹립하지 못해 현유 의석을 유지하는 데 그쳤다. 사회당은 "신당 붐"에 묻히는 형태로 55년 체제 이후 최소 의석수를 기록했다. 일본 공산당이 1석 감소한 것을 제외하고 다른 정당은 모두 현상 유지 또는 의석 증가였기에 사회당의 "홀로 패배"가 두드러졌다. 양대 정당 모두 목표 의석을 크게 하회하여 국민의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을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이 선거는 비자민당 세력의 대약진으로 주목을 받았지만, 투표율은 당시 기준으로 최저치인 67.26%에 그쳤다.

이는 1955년 체제 하에서 여당 연합이 패배하고 자유주의자, 중도파, 개혁가들의 연합으로 대체된 최초의 사례였다. 정권 교체는 세대 정치와 정치 행태의 변화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 선거는 부패, 예산낭비 및 과도한 관료주의에 대한 반발로 널리 여겨졌다.[1]

4. 3. 호소카와 연립 내각 출범과 붕괴

55년 체제가 붕괴하면서 일본신당 대표인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수반으로 하는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했다.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등 5개 정당은 선거 전부터 연립정권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고 있었지만, 총 195석에 그쳐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였다. 자민당도 223석에 그쳐 과반에 미달했기 때문에, 일본신당신당 사키가케캐스팅보트를 잡았다. 쌍방 교섭의 결과, 위 7개 정당과 민주개혁연합은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수립에 합의하였다.

자민당은 공시 전 의석을 유지해, 중의원 제 1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창당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했다. 한편, 사회당은 좌우 통일이래의 최저 의석 수면서, 제 1 여당으로서 중의원 의장과 5명의 국무 대신 자리를 획득했다.

; 제127회 국회(특별회)[54][55]

  • '''중의원 의장 선거'''(1993년 8월 6일 투표자 수: 511, 과반수: 256)

후보자소속 정당득표수
도이 다카코사회당264
오쿠노 세이스케자민당222
야마하라 겐지로공산당15
무효(기권)2


  • '''중의원 부의장 선거'''(1993년 8월 6일 투표자 수: 506, 과반수: 254)

후보자소속 정당득표수
구지라오카 효스케자민당477
무효(기권)29


  • '''내각 총리대신 지명 선거'''(1993년 8월 6일)

: '''중의원 의결'''(투표자 수: 511, 과반수: 256)

후보자소속 정당득표수
호소카와 모리히로일본 신당262
고노 요헤이자민당224
후와 데쓰조공산당15
야마하나 사다오사회당2



; 제129회 국회(상회)

: 회기: 1994년 1월 6일 - 6월 29일


  • '''내각 총리대신 지명 선거'''(1994년 4월 25일)

: '''중의원 의결'''(투표자 수: 502, 과반수: 252)

후보자소속 정당득표수
하다 쓰토무신생당274
고노 요헤이자민당207
후와 데쓰조공산당15
무효6


  • '''내각 총리대신 지명 선거'''(1994년 6월 29일)

: '''중의원 의결'''(투표자 수: 504, 과반수: 253)

후보자소속 정당득표수
무라야마 도미이치사회당241
가이후 도시키무소속220
후와 데쓰조공산당15
고노 요헤이자민당5
무효23



: '''중의원 결선 투표'''(투표자 수: 504, 과반수: 253)

후보자소속 정당득표수
무라야마 도미이치사회당261
가이후 도시키무소속214
무효29



; 제135회 국회(상회)[56]


  • '''내각 총리대신 지명 선거'''(1996년 1월 11일)

: '''중의원 의결'''(투표자 수: 489, 과반수: 245)

후보자소속 정당득표수
하시모토 류타로자민당288
오자와 이치로신진당167
후와 데쓰조공산당15
가이에다 반리시민리5
야타베 오사무신사회당2
사사노 사다코민개연2
고지마 게이조자유 연합1
무효9


5. 선거 이후 일본 정치

1993년 총선은 일본 정치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자민당은 1955년 창당 이후 처음으로 야당이 되었고, 사회당은 55년 체제 이후 최소 의석을 기록하며 몰락했다. 일본신당, 신생당, 신당사끼가께 등 신당들이 약진하며 '신당 붐'을 일으켰다.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등 5개 정당과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 민주개혁연합이 연합하여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인 호소카와 내각을 수립하면서 '''55년 체제가 붕괴'''되었다.

자민당은 중의원 제1당이었음에도 야당이 되었고, 사회당은 제1 여당이었지만 중의원 의장과 국무 대신 자리를 얻는 데 그쳤다. 사회당은 타 정당과의 협력으로 인해 오히려 양대 정당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는 치명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이후 민주당 정권의 주요 인물들인 에다노 유키오, 마에하라 세이지, 노다 요시히코, 가이에다 반리 등이 처음 당선되었고, 자민당에서도 아베 신조, 시오자키 야스히사, 노다 세이코 등이 초선 의원이 되는 등, 이후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했다.

총선 이후, 국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사건들이 있었다.

회기주요 사건
제127회 국회(특별회)[54][55]
제129회 국회(상회)
제135회 국회(상회)[56]



호소카와 내각은 높은 지지율을 얻었지만, 연립 정부는 불안정했고, 결국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의 연정 이탈로 10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이후 사회당은 자민당과 대연정을 통해 무라야마 내각을 구성하여 자민당의 재집권을 이끌었다.

5. 1. 정당 구도 재편

제1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의석을 획득한 일본신당과 선거 직전에 자민당으로부터 탈당한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신생당이나 신당사끼가께가 약진해 이른바 「'''신당 붐'''」이 일어났다. 당의 분열로 과반 의석이 무너지고 있던 중 치러진 총선거였기 때문에, 신생당이나 신당 사키가케로 당적을 바꾼 전직 의원의 빈자리를 메울 후보자(이른바 자객) 선출이 늦었던 자민당은 공시 전 의석을 유지하는 것에 그쳐 단독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다.[39] 한편, 일본 사회당은 「신당 붐」에 매몰되는 형태로 55년 체제 이후 최소 의석 수가 되었다. 일본 공산당이 1석 감소한 것 외에, 타 당은 모두 동일하거나 의석이 늘어 사회당의 의석 수 감소가 두드러졌다. 양 당이 모두 목표 의석을 큰 폭으로 밑돌아, 기존 정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감을 증명하는 결과가 되었다.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등 5개 정당은 선거 전부터 연립정권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고 있었지만, 총 195석에 그쳐 과반수에는 미치지 못하였고, 자민당도 223석에 그쳐 과반에 미달했기 때문에, 일본신당신당 사키가케캐스팅보트를 잡았다. 쌍방 교섭의 결과, 위 7개 정당과 민주개혁연합은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수립에 합의하였다. 이 결과 '''55년 체제가 붕괴'''되고, 일본신당 대표인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수반으로 하는 호소카와 내각이 성립했다.

자민당은 공시 전 의석을 유지해 중의원 제1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창당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했다.[41] 한편, 사회당은 좌우 통일 이래 최저 의석 수면서 제1 여당으로서 중의원 의장과 4명의 국무 대신 그리고 4명의 장관을 획득했다. 사회당에 있어서는, 타 당과의 협조가 당의 존재 의의를 퇴색시키거나 노선 변경을 강요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에, 집권 여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양대 정당의 실력자로서 역할을 상실한 치명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비자민당세의 대약진으로 주목을 끈 선거이지만, 투표율은 과거를 통틀어 가장 낮았다.

1990년대 정당의 분열과 통합


1994년 5월, 사민련이 해산하고 소속 의원들은 신진당 등으로 이적했다. 신생 공명당, 신진당, 민사당 등 사회당과 사키가케를 제외한 호소카와·하타 내각의 구 연립 각당은 같은 해 12월에 신진당을 결성했다.

사회당은 무라야마 내각 발족 후, 야마하나 사다오 등 구 연립의 틀을 지향하는 의원들을 중심으로 민주 리베럴 세력의 결집을 목표로 했지만, 1995년 1월 한신·아와지 대지진 발생으로 좌절되었다. 또한 신진당의 후나타 겐과 사키가케하토야마 유키오 등이 제3극의 세력 결집을 목표로 하는 움직임을 진행했지만 역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한편 사회당 좌파의 야타베 오사무 등 소선거구제 도입에 반대하는 의원들은 탈당하여 신당 고헌 리베럴이나 신사회당 등 고헌 정당을 결성했다.

1996년, 사회당은 사회민주당으로 당명을 변경했지만, 제3극을 지향하는 세력은 양당의 집행부를 배제하고 민주당을 결성했다.

5. 2. 정치 개혁 추진과 좌절

1988년 리쿠르트 사건과 1992년 [https://www.nakasendoway.com/glossary/sagawa-kyubin-scandal/ 사가와 택배 사건], 카네마루 신의 불법 자금 모금 과다 문제[5] 등으로 인해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는 정치 개혁을 약속하고 부정부패 방지 대책을 최우선 과제로 삼겠다고 전국 방송에서 주장했지만, 이행하지 못했다.[6] 이러한 상황은 국민들과 개혁 성향의 자민당 정치인들에게 불만을 야기했고, 하타 쓰토무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파벌은 자민당을 탈당하게 되었다.

정치 개혁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농어촌 불균형과 표 가치 불균형을 해소하는 것이었다. 1994년 이전 선거 제도는 농촌 지역에 유리하게 작용했는데, 이는 자민당의 지지 기반이 강했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지역 지지 단체(고엔카이(koenkai))와 부락회(「burakukai」)가 보수 후보에게 집단 투표를 제공하여 자민당의 권력 장악을 보장했다.[26][18]

1964년 이후 도시 선거구 유권자들은 더 공정한 국회 의석 분배를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고, 최고재판소는 1992년 선거에서 6.59 대 1의 비율은 “위헌적인 상태”라고 판결했다.[28] 1993년 이전 조정으로 농촌 의석 10석을 줄이고 도시 의석 9석을 추가했지만, 여전히 1:2.84의 비율로 불균형적인 상태였다.[18][27]

정치 개혁의 다른 측면은 부패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중의원 선거구에서는 동일 선거구에서 2~6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는데, 이는 정당 내 경쟁을 심화시키고, 후보 중심 투표와 pork-barrel 정책(지역 편중 예산)에 의존하게 만들었다.[18][30][31] 또한, 정치 자금은 또 다른 논란거리였는데, 정치자금규제법의 허점을 이용해 불법 자금이 조성되는 경우가 많았다.

호소카와 모리히로 연립 내각은 1993년 9월 17일 정치 개혁을 제시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중의원 선거 제도 변경: 소선거구제비례대표제를 결합한 혼합 선거 제도 도입
  • 정치 자금 규제 강화
  • 정당 활동의 공적 자금 지원
  • 선거구 획정 위원회 설치


자유민주당(LDP)도 10월 5일 국회에 자체 정치 개혁 법안을 제출했다.[6]

이 법안은 1993년 11월 18일 수정을 거쳐 중의원을 통과했지만, 1994년 1월 22일 참의원에서 부결되었다. 그러나 1994년 1월 29일, 6년 동안 일본 정계에서 논의되어 온 정치 개혁 법안이 고노 요헤이와 호소카와 총리 간의 극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양원을 최종 통과했다. 수정된 법안은 3월 1일 일본 공산당(JCP)을 제외하고 중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1994년 3월 4일 참의원에서 통과되었다.[6]

5. 3. 자민당의 재집권

제16회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에서 의석을 획득한 일본신당과 선거 직전에 자민당에서 탈당한 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신생당 및 신당사끼가께가 약진하여 이른바 「'''신당 붐'''」이 일어났다.[39] 당의 분열로 인해 과반 의석이 무너지고 있던 중, 갑작스럽게 치러진 총선거였기 때문에 신생당이나 신당 사키가케로 당적을 바꾼 전직 의원의 빈자리를 메울 후보자(이른바 자객) 선출이 늦었던 자민당은 공시 전 의석을 유지하는 것에 그쳐 단독 과반수 획득에는 실패했다. 한편, 일본 사회당은 「신당 붐」에 매몰되는 형태로 55년 체제 이후 최소 의석 수를 기록했다. 일본 공산당이 1석 감소한 것을 제외하고 다른 당은 모두 의석 수가 동일하거나 증가하여 사회당의 의석 수 감소가 두드러졌다. 양당 모두 목표 의석을 크게 밑돌아 기존 정당에 대한 국민의 불신을 드러냈다.[40]

사회당, 신생당, 공명당, 민사당, 사회민주연합 등 5개 정당은 선거 전부터 연립정권을 위한 협의를 시작하고 있었지만, 총 195석에 그쳐 과반수에 미치지 못했고, 자민당도 223석에 그쳐 과반수에 미달했기 때문에 일본신당신당 사키가케캐스팅보트를 쥐게 되었다. 양측의 교섭 결과, 위 7개 정당과 민주개혁연합은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 수립에 합의하였다. 이 결과 '''55년 체제가 붕괴'''되고, 일본신당 대표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하는 호소카와 내각이 성립되었다.[40]

자민당은 공시 전 의석을 유지하여 중의원 제1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창당 이후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했다.[41] 한편, 사회당은 좌우 통일 이래 최저 의석 수였지만, 제1 여당으로서 중의원 의장과 4명의 국무 대신 그리고 4명의 장관을 획득했다. 사회당에게는 타 당과의 협조가 당의 존재 의의를 퇴색시키거나 노선 변경을 강요하는 요인이 되었기 때문에, 집권 여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양대 정당의 실력자로서 역할을 상실한 치명적인 전환점이 되었다.[42]

비자민당 세력의 약진으로 주목받은 선거였지만, 투표율은 과거를 통틀어 가장 낮았다.

정당득표수의석수의석 변동
자유민주당22,999,646223–52
일본 사회당9,687,58970–66
일본 혁신당6,341,36555신설
공명당5,114,35151+6
일본 신당5,053,98135신설
일본 공산당4,834,58815–1
민사당2,205,68315+1
사키가케 신당1,658,09813신설
사회민주연합461,16940
기타 정당143,4860
무소속4,304,18930+9
총 의석 변동–1
무효표743,674
유권자 수94,866,020



호소카와 내각은 일본 역사상 신내각으로는 최고의 지지율(약 70%)을 기록했지만, 연립 정부는 불안정하고 단기적인 것으로 보였다.[42] 사회당 야마하나 위원장은 연립 정부가 정치 개혁이라는 과제 완수를 목표로 하는 "긴급 정부"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발표하여, 10개월 후로 예상되는 조기 총선 가능성을 더욱 강화했다. 호소카와는 선거 제도 개혁이 연말까지 이루어지지 않으면 "책임을 지겠다"(즉, 사임하겠다)고 밝혔고, 개혁이 이루어지면 새로운 제도에 따라 새 총선이 치러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가 연정에서 이탈하면서 10개월 만에 연립 정부는 붕괴되었다. 사회당은 1994년 자유민주당(LDP)과 대연정 정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하여, 자민당을 다시 집권하게 만들었다.

6. 한국에 미친 영향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일본 정치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한국에도 여러 영향을 미쳤다.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끝나고 사회당 등 야당이 약진하면서,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했다. 이는 한일 관계, 동아시아 정세, 한국 정치에 영향을 주었다.


  • 한일 관계에서는 호소카와 총리가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사과하면서, 과거사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
  • 동아시아 정세에서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공조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 한국 정치에는 정치 개혁, 연립 정치, 국민 참여, 보수 정치의 한계 등 여러 교훈을 제시했다.

6. 1. 한일 관계 변화 모색

細川 護熙|호소카와 모리히로일본어 내각 출범으로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끝나고 일본 정치에 변화가 찾아오면서, 한일 관계에도 새로운 국면이 열릴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 과거사 문제 해결 기대: 호소카와 총리가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 사과하면서, 과거사 문제 해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다.[1]
  • 미래지향적 관계 모색: 무라야마 총리 역시 과거사 반성을 언급하며, 미래지향적인 한일 관계 발전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1]
  • 경제 및 안보 협력: 양국은 경제 협력과 한반도 안보 문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했다.

6. 2. 동아시아 정세 변화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일본 정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이는 동아시아 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955년 이후 장기 집권해 온 자민당이 과반수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사회당을 비롯한 여러 야당이 약진하면서 일본 정치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1]

이러한 변화는 동아시아 지역의 안보 및 경제 질서에도 영향을 주었다.

  • 첫째, 다자 협력 강화의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일본 국내 정치의 변화는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쳐,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 및 다자간 협력 강화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 둘째,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공조의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북한의 핵 개발 문제는 동아시아 지역의 안보를 위협하는 주요 요인이었으며, 일본의 정권 교체는 이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공조 강화의 계기가 되었다.
  • 셋째, 역사 갈등 해소의 과제가 제기되었다. 위안부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 과거사 문제는 한일 관계를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 간의 갈등 요인이었다. 일본 정치의 변화는 이러한 역사 갈등을 해소하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하는 과제를 안겨주었다.


이처럼 1993년 일본 총선은 동아시아 정세에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곧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제시하는 것이었다.

6. 3. 한국 정치에 주는 교훈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는 일본 정치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으로, 한국 정치에도 여러 가지 교훈을 제시한다.
1. 정치 개혁의 중요성1993년 일본 총선은 장기간 지속된 자민당 1당 지배 체제가 붕괴하고, 비자민당 8개 정당 연립 정권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유권자들이 변화와 개혁을 강력하게 요구했음을 보여준다. 한국 정치 역시 특정 정당의 장기 집권에 대한 견제와 균형의 필요성이 제기될 수 있으며, 유권자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 개혁이 중요함을 시사한다.
2. 연립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일본의 비자민당 연립 정권은 다양한 정당들이 연합하여 정권을 획득한 사례로, 한국 정치에도 연립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본의 연립 정권은 짧은 기간에 붕괴되었는데, 이는 연립 정권의 불안정성과 정책 추진의 어려움을 드러낸다. 더불어민주당을 지지하는 관점에서 볼 때, 연립 정치는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고 국민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동시에 정치적 불안정성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3. 국민의 정치 참여 확대일본 총선에서 유권자들은 적극적인 투표 참여를 통해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는 국민의 정치 참여가 정치 변화의 핵심 동력임을 보여준다. 한국 정치 역시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고,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특히, 젊은 세대의 정치 참여를 유도하고, 다양한 계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4. 보수 정치의 한계자민당의 장기 집권은 일본 사회의 보수화를 심화시키고, 정치 개혁을 더디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는 한국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 정당 역시 장기 집권의 폐해를 경계하고, 시대 변화에 발맞춘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 자민당처럼 국민의 심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1993년 일본 총선은 정치 개혁, 연립 정치, 국민 참여, 보수 정치의 한계 등 한국 정치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한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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