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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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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운은 상산군 출신으로, 처음에는 원소 휘하에 있다가 공손찬에게 의탁했으며, 유비와 가까워져 그의 부하가 되었다. 그는 창술(槍術)에 능하고 용맹하여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특히 조조에게 쫓기는 유비를 따라 어린 아들 유선을 구출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유비 사후에는 제갈량과 함께 북벌을 준비했으나 기곡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후 진군장군으로 강등되었다. 조운은 강직하고 충성스러운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사후에는 대장군 순평후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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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 (촉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운의 청나라 삽화
청나라 시대 조운 삽화
이름조운
로마자 표기Zhao Yun (자오윈)
간체자赵云 (자오윈)
자룡 (Zilong, 쯔룽)
출생(알 수 없음)
출생지하북성 정딩현
사망229년
자녀조통
조광
직업장군
시호순평후
작위영창정후
관직
군사 호위 장군227년 – 229년
동쪽을 진압하는 장군220년대 초 – 227년
남쪽을 정벌하는 장군223년 – 220년대 초
군대를 돕는 장군214년 – 220년대 초 (유비 휘하)
계양의 행정관209년경 – 214년 (유비 휘하)
부장군209년경 – 214년 (유비 휘하)
표준의 장군208년 – ? (유비 휘하)
기타 정보
섬긴 군주공손찬
유비
유선

2. 생애

조운에 대한 기록은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에 처음 등장하며, 본래 346자의 짧은 분량이었다. 5세기에 배송지가 《삼국지》 조운전에 《조운별전》(趙雲別傳)의 주석을 추가하여, 조운의 생애를 보다 자세하게 기록했으나 여전히 불완전한 부분이 있다.

조운이 공손찬 앞에서 용맹함을 떨치는 모습,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청나라 판 삽화


조운은 정정현 상산군 출신으로,[1] 《조운별전》에 따르면 키가 8척(약 1.84미터)이고 위엄 있는 외모를 지녔다.[2] 상산군 태수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선 조운은 의용군을 이끌고 유주의 군벌 공손찬에게 합류했다.[3] 당시 원소의 명성이 높아 공손찬은 많은 이들이 원소를 섬길 것을 우려했다.[4]

조운이 나타나자 공손찬은 "듣자니, 그대 고향 사람들은 모두 원소를 섬기려 했다는데, 어찌 마음을 바꿔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는가?"라고 조롱했다.[5] 조운은 "천하가 혼란하여 백성들이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제 고향 사람들은 어짊으로 다스리는 군주를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원소 대신 장군님을 섬기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답했다.[6] 이후 조운은 공손찬의 편에서 전투에 참전했다.

190년대 초, 조운은 유비를 만나 가까워졌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자 했다.[7] 공손찬이 유비를 전해를 돕기 위해 원소와의 전투에 파견했을 때, 조운은 기병 장교로 유비를 섬겼다.[8] 조운은 형의 죽음으로 잠시 휴가를 요청했고, 유비는 조운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작별 인사를 했다. 조운은 유비에게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9]

200년 초,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고 원소에게 의탁한 후, 조운은 업에서 유비와 다시 만났다. 조운과 유비는 같은 방을 사용했다.[10] 유비는 조운에게 비밀리에 사람들을 모아 좌장군 휘하에서 복무한다고 주장하게 했다.[11] 원소는 이 사실을 몰랐다. 조운은 유비와 함께 원소를 떠나 형주 자사 유표에게 합류했다.[12]

베이징 이화원의 장랑 안에 있는 장판 전투에서 조운을 묘사한 벽화. 흰색 옷을 입은 기수는 조운이다.


유비가 장판 전투에서 조조에게 패주할 때, 조운은 유비의 아들 유선과 감부인을 보호하여 아문장군으로 승진했다.[17] 장비가 조운의 배신을 의심했으나, 유비는 조운을 신뢰했다.[18]

202년, 조조가 북방 원정을 떠난 틈을 타 유비가 조조를 공격했을 때, 조운은 하후란을 사로잡아 유비에게 군사 재판관으로 추천했다.[13][14] 조운은 하후란과 공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15]

208년 유표 사후 유총이 형주를 조조에게 넘기자, 유비는 하구로 향했다.[16] 조조는 유비를 추격하여 장판 전투에서 패배시켰으나, 조운은 유선과 감부인을 구출하고 아문장군으로 승진했다.[17] 208-209년 겨울, 유비-손권 연합군은 적벽 전투에서 조조를 격파하고, 조운은 형주 남부 4개 군 정복에 기여하여 편장군으로 승진, 계양군 태수가 되었다.[19] 조운은 조범의 형수와의 혼인을 거절하며, 그의 의도를 의심하고 세상에 다른 여자가 많다고 말했다.[20][21]

211년, 유비는 익주의 유장을 지원하러 가고, 조운은 형주에 남았다.[22] 유비는 손부인의 오만함을 경계하여 조운에게 형주 내정을 감독하게 했다.[24] 손권이 손부인을 통해 유선을 데려가려 하자, 조운과 장비가 저지했다.[25] 212년, 유비와 유장이 대립하자 조운은 제갈량, 장비 등과 익주로 진격하여 성도에서 유비와 합류, 보군장군이 되었다.[27][28][29][30] 유비는 익주 점령 후 토지 분배에 대한 조운의 반대에 따랐다.[31][33]

217년 한수 전투에서 황충하후연을 죽인 후,[34] 조운은 황충을 구출하고 조조군을 격퇴하여 "호위장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35][36][37][38][39] 219년, 관우여몽에게 죽고, 220년 조조 사후 조비가 헌제를 폐위시키고 조위를 건국하자, 221년 유비는 촉한을 건국했다.[40] 유비는 손권을 공격하려 했으나 조운은 반대했다.[40][42] 222년, 유비는 샤오팅 전투에서 패배하고, 조운은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했다.[43]

223년 유선 즉위 후 조운은 중호군, 정남장군, 영창정후, 진동장군으로 임명되었다.[44] 227년 조운은 제갈량을 따라 한중군에 주둔하고, 228년 제갈량의 1차 북벌에 참전하여 조진에게 패했으나 피해를 최소화했다.[47][48][49] 조운은 패전 책임을 지고 군수품을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창고에 보관하여 겨울에 하사받도록 했다.[50][51][52][53]

2. 1. 초기 생애와 유비와의 만남

조운은 기주 상산군 진정현(眞定縣) 사람이다.[1] 처음에는 원소 휘하에서 졸백(卒伯, 현재의 분대장급)으로 임관했으나, 원소의 그릇이 크지 않음을 간파하고 공손찬에게 갔다.[3] 그는 키가 8척(약 1.84미터)이고, 위엄 있고 인상적인 외모를 지녔다고 묘사된다.[2]

상산군 태수의 추천으로 관직에 나선 조운은 소수의 의용군을 이끌고 유주의 군벌 공손찬에게 합류했다.[3] 조운이 의용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공손찬은 "듣자니, 그대 고향 사람들은 모두 원소를 섬기려 했다는데, 어찌 마음을 바꿔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는가?"라고 비웃으며 물었다.[5] 조운은 "천하는 혼란에 빠져 옳고 그름을 분간하기 어렵고, 백성들은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제 고향 사람들은 심사숙고한 끝에 어짊으로 다스리는 군주를 따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원 공(公) 대신 장군님을 섬기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6]

190년대 초, 조운은 당시 공손찬의 보호를 받고 있던 유비를 만났다. 조운은 유비와 매우 가까워졌고 유비에게 충성을 바치기를 원했다.[7] 유비 또한 조운을 높이 평가하게 되고 서로 깊은 유대를 맺었다. 공손찬이 유비를 그의 동맹인 전해를 돕기 위해 원소와의 전투에 파견했을 때, 조운은 유비를 따라 기병 장교로 유비를 섬겼다.[8]

그 뒤 조운은 형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잠시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절대로 당신의 은덕을 잊지 않겠다" 고 유비에게 이별을 고했다.[9] 유비는 조운이 떠나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조운의 손을 잡고 작별 인사를 했다. 이는 조운이 공손찬 밑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을 암시하는데, 유비 또한 그것을 깨닫고 조용히 전송했다고 한다.

2. 2. 유비의 신하로서 활약

201년, 조운은 여남에서 패배한 유비를 따라 신야(新野)로 갔다.[12] 207년, 형주에서 유표가 사망하고 후계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자, 조조가 침공을 시작했다. 유비가 피난길에 당양현 장판에서 조조군의 습격을 받고 도주할 때, 조운은 유비의 어린 아들 아두(후주 유선의 아명)와 아내 미부인(糜婦人)을 조조의 대군으로부터 구출하여 아문장군(牙門將軍)으로 승진했다.[17] 이 전투 중에 장비가 “조운이 아군을 배신하고 조조에게 항복했다.”고 보고했으나, 유비는 “조운은 결코 그럴 위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18]

202년, 조조가 화북에서 원정을 떠났을 때, 유비는 조조가 부재한 틈을 타 중원 지역의 조조 영토를 공격했다. 조조는 하후돈 등을 보내 유비에 대항하게 했다.[13] 전투 중에 조운은 옛 친구 하후란(夏侯蘭)을 사로잡았다. 그는 유비에게 하후란의 목숨을 살려줄 것을 요청했고, 하후란이 법률에 정통하다는 것을 알고 군사 재판관으로 등용할 것을 추천했다.[14] 조운은 그들의 우정에도 불구하고 하후란과 전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신중하고 세심한 모습을 보여 칭찬을 받았다.[15]

208년 유표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유총이 형주 자리를 승계했다. 같은 해 조조가 중국 남부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시작하자 유총은 항복하고 형주를 그에게 넘겨주었다. 유비와 그의 추종자들은 신야현의 거점을 버리고 하구로 남쪽으로 향했는데, 그곳은 유표의 장남 유기가 지키고 있었고 조조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16]

조조는 5,000명의 정예 기병 부대를 직접 이끌고 유비를 추격했다. 그들은 장판에서 유비를 따라잡아 그의 군대에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유비는 가족을 버리고 도망쳤지만,[16] 조운은 유비의 어린 아들 유선을 데리고 전투 중에 유비의 부인 감부인 (유선의 어머니)을 보호하여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했다. 그는 후에 그의 노력으로 아문장군(牙門將軍)의 지위로 승진했다.[17]

208–209년 겨울, 유비는 군벌 손권과 동맹을 맺고 결정적인 적벽 전투에서 조조를 격파했다. 조조가 패배 후 북쪽으로 후퇴하자 유비와 손권은 진격하여 조조의 통제를 받던 남군을 정복했다.[19] 조운은 이후 형주 남부의 4개 군(장사, 영릉, 무릉, 계양) 정복에 기여한 공로로 편장군(偏將軍)으로 승진했다. 계양군 점령 후, 유비는 조운을 조범의 후임 계양군 태수로 임명했다.[19]

조범에게는 미모로 유명한 과부인 형수가 있었다. 그는 조운과 관계를 맺기 위해 그녀를 조운과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조운은 이 제안을 거절하며 조범에게 말했다. "우리는 같은 성을 사용합니다. 형님도 저에게는 형님과 같습니다."[20] 다른 사람들도 조운에게 결혼을 수락하라고 권했지만 조운은 단호히 거절하며 말했다. "조범은 상황 때문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의도는 불분명하고 의심스럽습니다. 게다가 세상에는 다른 여자들이 많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범은 도주했고, 조운은 결혼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와 연루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21]

211년경, 유비는 군대를 이끌고 서쪽 익주로 가서 경쟁 세력인 한중군장로에 대항하는 익주 자사 유장을 지원했다. 조운 등은 남아서 형주를 지켰다.[22]

209년경, 유비는 손권의 여동생 손부인과 결혼하여 손-유 동맹을 강화했다. 손부인 또한 유비가 익주로 떠났을 때 형주에 머물렀다. 손부인은 스스로 강력한 군벌의 여동생이라고 생각하여 오만하고 방자하게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호위병과 개인 수행원들이 형주에서 불법적인 행동을 하도록 허용했다. 이 때문에 유비는 진지하고 양심적인 인물이라고 여겨지는 조운을 특별히 임명하여 형주의 내정을 감독하고 자신이 부재한 동안 법과 질서를 유지하도록 했다.[24] 손권은 유비가 익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여동생을 집으로 데려가기 위해 배를 보냈다. 손부인은 유비의 아들 유선을 데려가려고 했지만, 조운과 장비가 병력을 이끌고 막아 유선을 되찾았다.[25]

유비와 유장은 처음에는 서로 우호적인 관계였으나, 212년 말 무렵 무력 충돌 직전까지 긴장이 점차 고조되었다. 유비는 처음에는 가맹관(葭萌關; 현재의 쓰촨성, 광위안시, 자오화 구)에 주둔하며 유장을 도와 장로로부터 그 지역을 방어했다. 그러나 이후 유장을 배신하고 공격했다.[27] 그는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을 시켜 형주에서 익주로 증원을 이끌도록 했으며, 관우는 형주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27]

증원군은 양쯔 강을 따라 진격하여 주변의 군과 현을 정복했다.[28] 강주에 도착했을 때 제갈량은 조운에게 별동대를 이끌고 강양군(江陽郡; 현재의 쓰촨성, 내이장)을 공격하여 다른 길로 가도록 명령한 뒤 익주 수도인 성도 밖에서 유비 및 다른 군대와 합류하도록 했다.[29] 214년, 유장은 저항을 포기하고 유비에게 항복했으며, 유비는 익주를 장악했다.[30] 조운은 보군 장군(翊軍將軍중국어)으로 임명되었다.[30]

익주를 점령한 후 유비는 성도와 성 밖의 토지를 부하들에게 어떻게 분배할지에 대한 논의를 열었다. 그는 이 원정에 대한 그들의 노고에 보상하고 싶었다.[31] 조운은 반대했다. 유비는 조운의 충고를 따랐다.[33]

217년, 유비는 한중군을 조조로부터 빼앗기 위해 한수 전투를 시작했다. 한중은 익주로 들어가는 북쪽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유비의 장수 황충은 218~219년의 정군산 전투에서 조조의 장수 하후연을 죽였다.[34]

하후연의 패배 후, 황충은 적군이 인근에서 식량 보급품을 수송한다는 소식을 듣고, 별동대를 이끌고 호송대를 공격하여 보급품을 탈취했다.[34] 황충이 제때 진영으로 돌아오지 않자, 조운은 수십 명의 기병을 이끌고 황충을 찾으러 나섰다.[35]

당시 조조는 유비의 진지를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조운은 조조의 선봉 부대와 마주쳐 전투를 벌였고, 조조의 주력이 나타나 그를 포위할 때까지 싸웠다. 압도적인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조운은 적의 진형을 돌파하기 위해 돌격하려 했고, 싸우다 후퇴하기를 반복했다. 조조의 군대는 재정비하여 다시 진형을 갖추고 조운을 포위했다. 조운은 어쩔 수 없이 길을 뚫고 진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전투 중 조운의 부관인 장저(張著)가 부상을 입었지만, 조운은 돌아서서 그를 구출하여 진영으로 데려왔다.[36]

조조의 군대는 조운이 진영으로 후퇴하는 것을 추격했다. 적의 접근을 본 조운의 부하인 장익은 진영의 문을 닫고 군대에게 자리를 지키게 하려 했다. 그러나 조운은 문을 열고 모든 깃발과 깃발을 숨기고, 전투 북을 멈추게 하여 빈 진영의 환상을 만들라고 명령했다.[37] 조조의 군대는 조운의 진영 안에 매복이 있다고 생각하고 물러났다. 그들이 후퇴하는 순간, 조운은 반격을 시작했고, 그의 부하들은 큰 소리로 전투 북을 치고 적에게 화살을 쏘았다. 조조의 병사들은 충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그들 중 일부는 당황하여 서로 짓밟고 도망쳤고, 많은 사람들이 한강에 빠져 익사했다.[38]

다음 날, 유비는 조운의 진영을 시찰하고 전장을 살피러 왔을 때, "자룡은 용기가 넘치는구나."라고 말했다. 그는 조운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열었고, 그들은 밤까지 즐겁게 놀았다. 조운은 또한 "호위장군"(虎威將軍)이라는 별명을 얻었다.[39]

219년 말, 손권은 장수 여몽을 보내 유비의 남부 형주를 기습 공격하게 하여 손-유 동맹을 깨뜨렸는데, 당시 관우는 조조 군과의 번성 전투에 참전 중이었다. 관우는 나중에 매복에 걸려 사로잡혔고, 항복을 거부하자 손권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40]

220년 3월 조조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인 계승자 조비는 그해 말 헌제로부터 황위를 찬탈하여 후한을 멸망시키고, 스스로 새로운 황제가 되어 조위를 건국했다. 221년, 유비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촉한을 건국하여 위의 정통성에 도전했다. 같은 해, 손권은 조비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위의 봉신이 되는 데 동의했다. 그 대가로 조비는 그에게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40]

유비는 형주를 잃은 것에 대해 손권에게 앙심을 품고 손권을 공격하려 했다.[40] 조운은 유비를 설득하려 했다. 유비는 조운의 충고를 무시하고 손권에게 복수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그는 조운을 강주에 남겨 방어하게 했다.[42]

222년 10월, 유비는 샤오팅 전투에서 손권의 군대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했고, 백제성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조운이 용안에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 손권의 군대는 유비를 추격하는 것을 포기하고 오나라로 물러갔다.[43]

2. 3. 유비 사후와 북벌

223년 유선이 즉위하자 조운은 중호군(中護軍)·정남장군(征南將軍)이 되고, 이후 영창정후(永昌亭侯)·진동장군(鎮東將軍)으로 위임되었다.[44] 227년 조운은 제갈량을 따라 한중군에 주둔하고, 228년 제갈량과 함께 위나라로 출병했다. 제갈량은 사곡도(斜谷道)를 통과한다고 크게 선전하고, 조운과 등지에게 위나라 조진을 상대하도록 명령한 다음 그 틈에 기산을 공격했다.[47][48] 가정 전투에서 마속이 이끄는 촉군이 패배했다.

애당초 의군(疑軍)이었던 기곡(箕谷)의 조운 또한 조진에게 패하였으나, 부장인 등지와 함께 손수 후위를 맡아 솔선수범해 피해를 줄였다.[49] 제1차 북벌이 실패로 돌아가고 참전했던 제갈량 이하 모든 장수들이 강등되면서 조운은 진군장군(鎮軍將軍)으로 좌천되었다.[50]

제갈량이 “퇴각하면서 장병의 단결이 전혀 흐트러지지 않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묻자, 등지는 “조운이 직접 후방 부대를 맡아 군수 물자를 거의 버리지 않고 마무리할 수 있었으므로 장병들은 흐트러짐 없이 퇴각할 수 있었다” 고 대답했다.[51][52] 제갈량은 조운에게 남은 군수품 견사(명주실)를 그의 장병들에게 나눠주게 했지만, 조운은 “전쟁에 진 자가 어찌 하사품을 받을 수 있겠는가. 군수 물자는 모두 창고에 모아 10월에 겨울 준비 물품으로 하사받을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해, 규율을 지켜 패전 책임을 분명히 했다.[53] 제갈량은 이를 보고 "살아 선제께서 말씀하시길 자룡은 군자라 하였는데, 그 말이 헛되지 않도다" 라고하며 더욱 조운을 존경했다고 한다.

3. 평가

조운은 학식, 통찰, 무예를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그의 창술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으며, 수많은 전투에서 맹활약했다. 무장이면서도 지혜가 풍부하고 통찰력이 뛰어났는데, 관우가 사망했을 당시 조비를 공격하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조운은 위나라 내부에서 황실을 추종하는 무리들이 봉기를 일으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국제 정세를 파악했다. 하지만 유비관우의 죽음에만 연연하여 조운의 조언을 묵살했다.[54][55]

배잠론(裴潛論)에서는 조운을 용맹하고 임기응변을 갖추고 있으며 지휘력과 통솔력이 높은 무장이라고 평가했다.

유선은 조운에게 "순평후"(順平侯|Shùnpíng hóu중국어)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당시 시호를 받는 것은 매우 큰 영광이었다.[56] 조운에게 시호를 내리는 유선의 조서는 다음과 같았다.

"조운은 선주를 따라 뛰어난 공헌을 했다. 짐이 어렸을 적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의 충성과 성실함에 의지하여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공로를 기리고, 또한 주변의 조언에 따라 이 시호를 내린다."[57]

조운의 시호는 강유 등이 제안한 것으로, '순'(順|shùn중국어)은 그가 덕이 있고 어질었기 때문이며, '평'(平|píng중국어)은 그가 자신의 임무를 훌륭히 수행하고 혼란을 극복했기 때문에 "순평"이 되었다.[58]}}[59]

조운(중앙)이 조조의 장수들에게 포위된 모습. 장판 전투를 묘사한 2015년 경극 공연.


진수는 《삼국지》에서 조운에 대해 "황충과 조운은 맹렬하고 용맹한 무장으로 마치 손톱과 이빨과 같았다. 그들이 관영하후영의 뒤를 이을 자들이 아니었던가?"라고 평가했다.[62]

《정사》에 따르면 261년, 조운은 ''''순평후(順平侯)''''라는 시호를 추증받았다.[230] 당시 촉한에서 두 글자 시호를 받은 것은 제갈량(충무)[232], 관우(장묘)[233], 조운(순평) 3명뿐이었다.[234]

《별전》에 따르면, 유선은 조서를 통해 "조운은 선제(先帝)를 따라 그 공적이 뚜렷하다. 짐은 어릴 적 어려움에 직면했으나, 그의 충성과 순종에 의지하여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235] 대장군 강유 등은 회의를 열고 조운에게 '순평후'라는 시호를 칭해야 한다고 상주했다.[236]

정사 「조운전」과 『조운별전』을 바탕으로, 연구자들은 다음과 같이 추론한다.

  • '''사마광''': 『자치통감』 편찬 시 『조운별전』의 기술을 채용했다.
  • '''하탁''': 《조운별전》의 기술을 비판했다.[300]
  • '''이광지''': "조운의 미덕은 모두 '별전'에 나타나 있는데, 본전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왜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302]


성도 무후사의 청나라 시대 조운 소상 (왼쪽은 손건)


후세에 중국에서는 조운을 문관적인 지성과 대신의 기질을 가진 유능한 장수로 높이 평가했다. 성도 무후사의 '유비전' 서쪽에 있는 '무장랑'의 조운 소상이 문관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 '''유비''': "자룡의 일신은 모두 이것이 간이다."[308]
  • '''양희''': "정남(조운)은 후중하고, 정서(진도)는 충성스럽고 굳세어, 모두 선발된 병사를 지휘하여 훈공을 세운 맹장이었다."[311]
  • '''주보''': "(오나라와의 전쟁에 대한 간언에 대해) 그것은 깊고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천하의 전체를 알고 있다."[312]
  • '''노필''': "절세 미녀 번씨를 조운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관우진의록의 아내와의 결혼을 간청한 것에 대해 현명한 행위이다."[313]
  • '''학경''': "조운은 충성을 다하고 군주에 대한 애정이 깊었으며,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켰다."[314]
  • '''양시위''': "자룡의 마음은 금석을 관통하고, 그 의리는 관장에게 뒤지지 않는다."[316]
  • '''범광주''': "조운의 일관된 견해는 대신의 그릇이며, 단지 명장이 아니다."[317]
  • '''황팽년''': "조운은 수십 기로 적을 만났고, 문을 열고 깃발을 엎고 전고를 멈추었으며, 용기를 보였다."[318]
  • '''왕복례''': "순평(조운)은 바로 유학자 출신 장군이었다."[329]
  • '''왕부지''': "조운처럼 공(제갈량)의 뜻에 공감하는 노장도 없어졌다."[331]
  • '''동치계양직례주기''': "순평(조운)은 용맹한 신하, 토지를 평정하고 성채를 지켰다. 혼인을 거절하고 전택을 사퇴, 단호한 뜻은 더욱 용기로 분발한다."[350]


다음은 『연의』에 나타난 조운과 그의 행적에 대한 평가이다.

  • '''구진성''': "조운은 용감무쌍한 영웅인 동시에 정치 수완이 뛰어난 정치가이기도 하다."[405]
  • '''박근혜''': "초등학생 시절, 나는 전쟁 이야기가 나오는 역사 소설을 좋아했다. 특히 조자룡을 좋아했다. 나의 첫사랑 상대는 조자룡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정도로, 등장할 때마다 가슴이 설렜다."[407]
  • '''마사코 코야''': "제게 조운의 이미지는 한마디로 '한 줄기 바람'입니다."[408]

4. 가족 관계

관계이름
장남조통 - 조운이 죽자 후사를 이었다.[60]
차남조광 - 조통이 죽자 후사를 이었다. 아문장(牙門將)으로 복무했으며, 강유의 북벌에 참전하여 타중(沓中, 현재 간쑤성 주거현 북서쪽) 전투에서 전사했다.[61]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아내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조씨 - 관우의 장남 관평의 아들 관월을 낳았다고 여겨지나, 정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5. 대중문화 속 조운

민속극에서 사용된 조운의 가면


조운은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뛰어난 전투 기술, 변함없는 충성심, 용기, 지략, 차분한 카리스마를 지닌 거의 완벽한 전사로 묘사된다. 이러한 특성은 오늘날까지 조운에 대한 거의 모든 현대 자료에 반영되고 있다.

조운은 삼국 시대의 영웅으로, 그의 무용담은 민간 설화로 전해져 내려왔다. ''삼국지연의''의 인기로 대중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중국과 일본의 대중문화, 문학, 예술, 일화에 두드러지게 등장한다. 허난성의 중국 사찰과 도교 사찰에서는 마초와 함께 문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여러 삼국지 관련 매체에서 조운은 흰색과 강하게 연관되는데, 이는 《삼국지연의》에 묘사된 그의 외모와 관련이 있다. 하계궁에는 장판파 전투에서의 그의 영웅적인 행적을 그린 그림이 있다. 흰색은 정직, 미덕, 순수함 등 긍정적인 특성과 연결되며, 조운이 아끼던 말 '백룡구'(白龍駒)와 관련된 신화 때문일 수도 있다.

조운은 창, 흔히 긴 창을 휘두르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 전설에 따르면 그의 창은 '애각창'(涯角槍)으로 불리며, 《삼국지평화》에는 이름 없이 등장한다. "하늘의 별바다에서도 그것을 능가하는 것은 없다"는 의미를 지닌 이 창은 3m 길이에 달하며, 조운은 훌륭한 솜씨로 이 창을 휘둘렀다고 한다. 장비와의 결투에서 승리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며, 《삼국지연의》에서 조조의 쌍검 중 하나와 연관되어 아두를 구출하면서 하후은을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운의 죽음에 대한 중국 민담은 《삼국지연의》에는 언급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에서 조운은 전투에서 한 번도 부상을 입은 적이 없어 몸에 상처가 없었다. 어느 날 목욕을 하던 중 아내가 장난으로 재봉 바늘로 찔렀는데, 피를 많이 흘려 충격으로 사망했다는 내용이다.

5. 1. 게임

조운은 중국과 일본의 대중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영웅이다.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의 인기로 인해 더욱 대중적인 인물이 되었다.

NES 롤플레잉 게임 ''Destiny of an Emperor''에서 조운은 플레이어가 영입해야 하는 오호대장군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코에이의 ''진 삼국무쌍''과 ''무쌍 오로치'' 비디오 게임 시리즈에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하며, 각 게임의 표지에 자주 등장하고 개발자가 홍보 자료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캐릭터이다. 코에이의 전략 게임 시리즈 ''삼국지''의 모든 작품에도 등장한다.

MOBA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의 챔피언 신 짜오는 조운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로스트사가'', ''히어로즈 이볼브드'', ''모바일 레전드: 뱅 뱅''에도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하며, 후자에서는 "질롱"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2019년 그랜드 전략 게임 토탈 워: 삼국에서 영웅으로 등장한다.

2023년 비디오 게임 페이트/사무라이 렘넌트에서 떠돌이 라이더 클래스 서번트로 등장하며, 특히 세 번째 DLC인 "백룡과 붉은 악마"에 등장한다. 그의 보구 "장판파의 고독한 돌격"은 장판파 전투에서의 그의 활약을 바탕으로 한다.

5. 2. 드라마

제목방영 연도배우
삼국지1994년장산, 양범, 후영생
삼국2010년섭원
종극삼국2010년왕동성
무신 조자룡2016년임경신


5. 3. 영화

영화
2008년 홍콩 영화 《삼국지: 용의 부활》은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조운 관련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이인항이 감독하고 홍콩 배우 유덕화가 "조자룡" 역을 맡았다.
중국 배우 호군오우삼 감독의 적벽에서 조운 역을 연기했는데, 이 영화는 적벽 전투를 소재로 한 2부작 대서사시 전쟁 영화이다.



텔레비전 드라마
1994년작 《삼국지》의 장산
2010년작 《삼국》의 섭원
2010년작 《종극삼국》의 왕동성
2016년작 《무신 조자룡》의 임경신


6. 기타

정사에는 조운이 어디에 묻혔는지 기록이 없지만[189], 조운의 묘라고 전해지는 묘가 3곳 있다.


  • '''다이현 조운 묘''':중국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는 묘.

쓰촨성청두시다이현에 있는 은병산(銀屛山) 남쪽에 위치한다.[280][281] 조운이 만년에 강족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이 땅에 주둔했다는 일화가 다이에 전해진다. 정혜산에는 조운이 토성과 강족을 감시하는 대(망강대)를 쌓아 강족의 침입을 막았다고 전해지는 유적이 여러 곳 남아 있었다.[282] 그 후 조운이 사망하자 이 땅에 묻혔다고 한다. 묘 앞에 세워진 자룡묘는 말의 전쟁으로 파괴되었다.[189]

1665년, 다이 현령 이덕요가 조운 묘를 위해 사당과 비석을 세웠고,[284] 그 후에도 몇 차례의 개수 및 확장 공사가 진행되었으며, 1891년 5월에는 문장공이 주청하여 조운을 사전에 올리고, 이후 해당 지방관이 춘추에 제사를 지냈다.[285]

1930년에는 다이 현장인 해여상이 현민과 함께 자룡묘를 확장하여 전전, 본전, 배전 등으로 구성된 웅장한 건물이 되었다. 청나라 시대부터 매년 봄이 되면 자룡묘 근처에서 성대한 묘회가 열려 조운에 대한 존경을 표했으며, 근처의 읍과 마을에서 상인과 주민들이 모여 차집과 술집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고, 묘 밖에는 노점상이 줄지어 서서 노래와 춤을 선보이는 등 매우 번성했다고 한다.

1949년 이후에도 서민들의 휴식 공간이었으나, 그 후 문화 대혁명으로 파괴되었다. 2011년에 묘의 수리가 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실수로 묘도를 발견했지만, 최종적으로 채굴을 중단하고 현 상태로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그 후, 쓰촨 지진이 발생하여 공사가 중단되었지만, 현재 정부에 의해 수리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2025년에 일반 공개될 예정이다.[286]

1961년, 현급 문물 보호 단위 지정, 1985년, 시급 문물 보호 단위 지정, 1996년, 성급 문물 보호 단위 지정, 2005년에는 "다이 조자룡 문화 연구회"가 설립되어, 조운의 고향인 정정현의 "허베이성 조자룡 문화 연구회" 및 대만의 "자이 자룡묘 영창궁"과 적극적인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다음은 시대의 지방지에 약간 기록되어 있다는 "조운이 다이에 묻힌 이유"로 여겨지는 내용이다.

  • '''묘의 발견''':

다이의 조운 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명나라 말기 이 기록한 『촉중광기』108권 중 13권에서, "'''본지'''에 이르기를, 정혜산, 일명 동산…(생략)"이라고 쓰여 있다. 이 『본지』에 대해 다이 지역 학자 위복화의 설에 따르면, 명나라 판 『다이현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며, 또한 양신이 편찬한 『궁주지』에도 당시 다이현이 궁주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다이현에 관한 기술, 나아가 조운 묘에 관한 당시 상황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추측할 수 있지만, 이러한 귀중한 사료는 전란이나 유적에 의한 파괴로 소실되었고, 청나라 시대에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른 현존하는 사료에서는 『대명일통지』에 남양의 조운묘가 기록되어 있지만, 다이의 이름은 없고, 엽위신은 명나라 중기 이후 처음으로 다이의 조운묘와 묘가 발견되었거나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 '''산의 이름''':

청나라 시대 이후의 문헌·사료에서는 "다이에 조운 묘가 있다"는 사실과 묘가 있는 장소(산의 이름)로, 거기에서 처음으로 『'''은병산'''』의 이름이 확인되므로, 엽위신은 은병산의 이름은 청나라 시대에 붙여졌을 가능성을 지적하며, 더 나아가 원말에서 명초 무렵에 성립된 『삼국지연의』에는 조운의 묘의 장소로 『'''금병산'''』의 이름이 나오지만, 다이의 어떤 지서에도 금병산의 이름은 보이지 않으므로, 청나라 시대의 은병산 명칭은 『연의』의 금병산과 결부되어 이름 붙여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금병산의 이름은 『연의』의 작가인 나관중이 어떤 사료를 바탕으로 이름을 붙였을 가능성이 있지만,『연의』내에서 금병산은 "조운의 묘"의 장소 외에도 이야기 중에 두 번 등장하며, 하나는 유장의 부하인 장임 등이 금병산을 지나 자허상인에게 길흉을 묻는 장면, 다른 하나는 유선이 금병산이 무너지는 꿈을 꾼 직후 제갈량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는다는 장면에서, 이 금병산은 촉의 인물이나 정권 등의 죽음과 멸망에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으며, 나관중의 창작이거나, 혹은 당시의 민간 전승에 기초하여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 '''남양 조운 묘''':남양시 남쪽 30리에 존재했던 묘. 조운의 묘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明)의 천순 5년(1461년) 『대명일통지』에 기재되어 있다.[288] 도굴당했으며, 현재는 비문의 탁본이 남아있다. 다음은 묘와 관련된 전설이다.

  • '''린청 조운 묘''':발견된 지 가장 오래되지 않은 묘. 2005년 5월 19일, 허베이성싱타이시린청현치린강에서 광서·무술 (24년(1898년))의 『한 순평후 조운 고리』의 비석이 발견되었고, 2009년에 허베이성 정부에 의해 무형 문화 유산 목록에 포함되었다. 이 린청현의 움직임은 정정현과의 조운의 고향을 둘러싼 논쟁을 일으켰고, 학계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현지 전설에 따르면, 린청현에는 세 개의 조운 고리의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린청 조운 묘에 대해서는, 1982년에 린청현 문화 관리국이 실시한 문화재 조사 시 린청현 청디촌의 서쪽 1.3킬로미터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그러나 다이현 조운 묘나 난양 조운 묘가 명대에 거슬러 올라가는 『대명일통지』나 현지 연대기에 기록되어 있는 반면, 린청 조운 묘는 연대기나 역사서에는 나타나지 않아, 연구자들은 조운의 묘일 가능성은 낮다고 보고 있다. 민간 전승에 따르면, 조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 묘 앞에서 천 년 이상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지만, 묘석이나 기념비는 없으며, 묘 근처에 사당도 세워져 있지 않다. 다음은 그 이유로 여겨진다.


고적에 얽힌 물건은 남송 이전부터 존재하지만, 그 외 민간 전승은 주로 청대 이후의 것이 많으며, 내용 또한 『삼국지연의』와 경극의 영향을 짙게 보인다.

  • '''초선''':『연의』에 등장하는 가공의 여성. 민간 전승 '초선개가가'라는 이야기에서 조운의 아내가 된다. "여포가 죽은 후, 초선은 곽가의 도움을 받아 조조로부터 도망치지만, 조조의 친위대에 붙잡힐 뻔한 것을 우연히 정찰을 온 조운에게 구출되어 그에게 반하게 된다. 곽가는 두 사람의 인연을 맺어주려 하지만, 조운이 유비 군에 속해 있어 이야기가 진전되지 않는다. 곽가가 죽은 후, 장료가 뒤를 이어 장판파 전투의 혼란을 틈타 조운에게 접근하여 초선과의 혼담을 제안한다. 헤어진 후에도 초선을 마음에 두고 있던 조운은 이를 받아들이고, 장료가 조조에게 조운의 생포를 헌책한 것으로 인해 조조군은 화살을 쏘는 것을 멈췄고, 조운은 포위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 후, 장료와 곽가의 아내는 초선을 조운에게 보내 두 사람은 결혼했다. 초선은 곽가의 여동생 ''''곽혜'''''라고 속이고 주위에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채 행복하게 살았다"라는 결말을 맞이한다.
  • '''손연아''':민간 전승에 등장하는 조운의 아내. 전장에서 한 번도 부상을 입은 적이 없는 조운을 장난으로 바늘로 찌르자, 조운은 피가 멈추지 않아 죽고 말았다. 영화 『삼국지 (2008년)』에서 연아의 이름이 채용되었고, 쓰카모토 세이지의 소설 『조운전』에서는 정실 부인의 이름으로 채용되었다.[431]
  • '''관은병''':관우의 딸을 모델로 한 인물. 조운에게 사사하여 무술을 배운다.
  • '''백룡'''(白龍): 백룡구(白龍駒)라고도 불리는 흰 준마를 애마로 했다고 한다. 『자룡지(子龍池)』라는 이야기에서는 이 말은 낮에는 천 리를, 밤에는 오백 리를 달릴 수 있으며, 조운과는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할 정도로 사랑받았다고 한다. 『백룡(구)』이라는 이름은 1980년대 전후의 창작으로, 『삼국지평화(三國志平話)』, 『연의(演義)』에서는 흰 말을 타는 조운의 모습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경극에서 확립된 조운의 '백(白)'의 이미지가 민간 전승이나 창작 작품에 영향을 미쳐 조운의 애마 = 백마가 되었고, 『백룡(구)』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져 널리 퍼졌다고 생각된다. 백룡 이야기는 영화 적벽대전에서 채용되었다.

  • '''자룡지'''(子龍池): 세마지(洗馬池), 자룡세마지(子龍洗馬池)라고도 한다. 사천성 성도에 한때 존재했던, 조운이 살았다고 전해지는 관저 뒤에 있던 연못. 백룡과 함께 조운이 상처를 치료했다고 한다. 그 후 저택의 소유자가 여러 번 바뀌고, 그때마다 개축 등을 거쳐 1950년경에는 연못이 매립되어 '자룡당가(子龍塘街)'에서 현재의 '화평가(和平街)'로 개명되었다. 그 자리에는 화평가 소학교에 '한순평후세마지(漢順平侯洗馬池)'의 비석이 있다. 다음은 자룡지에 얽힌 전승이다.


  • '''애각창(涯角槍)''':『삼국지평화(三国志平話)』에 쓰여 있다. "바다 모퉁이와 하늘 모퉁이에도 대적할 자가 없다"는 뜻으로 명명되었으며, 장비의 창에 이은 명창으로 여겨진다.[433] 같은 설화에서는 이 창으로 장비와 호각으로 일기토를 벌이고 있다.[434] 『연의(演義)』에서는 채용되지 않았다. 원잡극에서는 '''아각창(牙角槍)''' 또는 '''아각장창(牙角長槍)''', '''아각장창(鴉脚長槍)'''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아각(牙角)'은 진수가 조운을 평한 "'''강지장맹(強摯壮猛), 병작조아(併作爪牙)'''"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되며, "아각(鴉脚)"은 창의 모양을 가리키며, "애각(涯角)", "아각(牙角)", "압각(鴨脚)"은 모두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에, '애각창(涯角槍)'이라는 호칭은 당시 민간의 구전으로 퍼진 것이, 설화자나 잡극 작가들이 각각 표기나 해석을 더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 '''량은창(亮銀槍)''':애각창(涯角槍) 외에 근대의 민간 전승에서 일반적이 된 창의 명칭. 경극의 은창(銀槍)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민간 전승과 예술 분야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조운의 표준 무기로서 은창의 이미지가 정착되었다. 조운의 무술 스승의 이야기에 관련되어 있으며, 정정현(正定県)・임성현(臨城県)・기타 민간 전승을 다룬 서적에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 '''정정판(正定版)''':이야기꾼이 다른 2개의 이야기 ① "조자룡학예(趙子龍学芸)" ② "조운학예(趙雲学芸)"가 존재하며, 내용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조운이 부모님께 작별을 고하고 태행산맥에서 무술 스승(노인)을 며칠에 걸쳐 찾아내지만, 노인은 큰 나무 위에서 코를 골며 잠들어 있고, 조운은 끈기 있게 무릎을 꿇고 기다린다. 잠에서 깬 노인은 그 성의에 감동하여 제자 삼는 것을 허락하고, 조운은 3년 동안 무예를 배운다. 스승은 조운에게 은색 창(량은창)을 주고, 세상의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떠나라고 말한다"와 같은 내용. 공통점은 조운이 두 종류의 무술을 습득하여 조군과 싸울 때 각각의 무술을 구사하고, 하나는 스승에게 받은 '량은창'을 사용하여 장판파 전투에서 활약하여 "산처럼 쌓인 조군의 시체의 피가 강처럼 흘렀다"고 쓰여 있고, 다른 하나는 '''파견권(破堅拳)'''이라는 권법으로 "한중 전투에서 조군을 처참하게 무너뜨렸다"고 쓰여 있다. ①②의 특징으로, 스승이 '량은창'을 증정하는 과정이 자세히 쓰여 있고, 스승이 조운에게 무기로서 대도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로 "붉은 얼굴(관우)이 이미 대도를 습득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되어, 관우와 조운이 형제 제자임이 시사되고 있다.

: '''임성판(臨城版)''':조운이 창을 얻는 이야기가 여러 개 있으며, 공통적으로 "조운이 긴 뱀을 발견하고, 그 뱀을 잡고 휘두른 결과, 창으로 변했다"와 같은 내용으로, 장비의 사모의 전승(장비가 수행 중에 큰 뱀을 발견하고, 꼬리를 99번 휘두르자 사모가 되었다)와 유사하다. 장비의 사모의 전승은 예로부터 잘 알려져 있으며, 이 전승을 바탕으로 조운으로 대체되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되고 있다.

: '''기타 서적''':제자가 되는 과정, 스승의 이름 등이 정정(正定)의 이야기에 유래하고 있으며, 이들은 처음에 정정(正定)에서 퍼진 이야기가 다른 전승에 영향을 주어, 발전했다고 생각된다.

  • '''청강검'''(청강검):《삼국지연의》에 등장한다. 원래는 조조가 소유한 한 쌍의 보검(의천검과 청강검) 중 하나이다. 적장인 하후은이 조조에게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조운이 빼앗았다.[439] 이야기 속에서는 유선의 위기 상황에서만 사용된다.
  • '''금우산의 검''': 도홍경 저.《[https://zh.wikisource.org/wiki/%E5%8F%A4%E4%BB%8A%E5%88%80%E5%8A%8D%E9%8C%84 고금도검록]》에 기록되어 있다. 장무 원년(221년) 유비가 금우산에서 철을 채취하여 길이 3척 6촌의 검 8자루를 주조했는데, 그 중 한 자루를 조운에게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440]

  • '''상산전고'''(常山戦鼓): (군대 북) 전국 시대에 시작되어 명 시대에 번성했다. 정정의 사람들에게 널리 유통되었다. 정정현은 역사적으로 "상산"으로 불렸기 때문에 '상산전고'라고 불린다. 현재는 퍼포먼스에 사용된다. 전승에 따르면 조운이 출진할 때 상산의 북을 전장에서 쳐서 사기를 높이고 병사들을 고무하여 항상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에 '상산전고'라고 불렸다고 한다(동영상).[441] 2008년, 국가 무형 문화 유산으로 등록.
  • '''반지'''
    조운이 반지를 착용하는 문화를 퍼뜨렸다는 전승이 있다. 『익주』와 『형주』에서 몇 가지 다른 이야기가 있는 외에도 조운의 고향인 허베이성 정정 출신의 이야기꾼 저우쓰청의 『조자룡과 반지』에 나오는 내용에서는 『익주』의 이야기에 경극이나 다른 이야기꾼들에게서 볼 수 있는 「서서가 조운을 구하는」 에피소드가 더해져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 '''익주판''':조운이 장판교 전투에서 유선을 구출하여 포위를 돌파했을 때 장합조홍에게 약지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상처는 상당히 눈에 띄고 흉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조운은 장인에게 상처를 가리기 위한 금반지(덮개 반지)를 만들게 했다.

: '''형주판''':형주판은 2가지 종류가 있는데, 공통점으로는 「조운의 사후, 그의 생전의 옷차림을 한 조각상이 만들어졌고, 그 손가락에는 금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따라 착용했고, 그 습관이 오늘날 반지로서 민간에 퍼졌다」고 한다. 상이점은 조각상의 유래가 『반지 착용의 내력』에서는 「후주 유선은 조운이 생명을 구해준 것에 감사하여 조자룡의 조각상을 만들었다」고 쓰여 있다는 점과 『형주인이 반지를 착용한 내력』에서는 「형주의 관제묘에 있는 조운의 조각상」에 근거하고 있다.

: '''정정판''':

  • '''육완자''':미트볼. "재회"를 의미하는 계양의 명물 미트볼 요리. 계양 설날 3대 요리 중 하나. 전승에 따르면, 조운이 계양을 점령했을 때 이끈 병사들이 통솔력이 뛰어나 백성을 어질게 대했기 때문에 계양 사람들은 조운을 칭찬하며 환영했다. 달려온 유비 일행과 조운은 재회를 기뻐하며 축연이 열렸고, 계양 사람들은 황금색 둥근 튀긴 완자를 바쳤다. 이를 먹은 조운 등은 손뼉을 치며 극찬했고, 그 이후 계양 사람들의 축제를 축하하는 명물 요리가 되었다. 이 외에도 '육완자'와 매우 유사한 전승을 가진 ''''자룡군 단자육'''' (계양 단자육)이라는 계양 명물의 육류 요리가 있는데, 계양 사람들이 이 요리를 바쳤고, 마음에 든 조운이 유비에게도 바쳤으며, 유비가 '자룡군 단자육'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 '''자룡편''':얇게 썬 건조 죽순. 계양의 관구・영반령 지역에서 이렇게 불린다. 전승에 따르면,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겨울부터 봄까지 식량이 부족한 시기에 죽순을 캐서 먹는 습관이 생긴 조운이, 보존이 가능하도록 햇볕에 말렸고, 사람들은 이를 따랐다. 조운이 이 땅을 떠난 후 건조된 죽순을 '자룡 죽순', '자룡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자룡탈포''':장어 요리. 후난성을 대표하는 장어를 사용한 전통 향토 요리. 샹차이(중국 8대 요리 중 하나. 사천 요리와 함께 맵고 얼얼한 중국 요리의 대표)의 일종. 별칭 ''''자룡탈포'''', '류초산쓰'. 껍질을 벗기고 뼈와 머리를 제거한 장어를 달걀 흰자, 감자 전분으로 버무리고, 백합 뿌리, 말린 표고버섯, 고추, 고수, 차조기와 함께 볶는다.[445][446] 고소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특징. 이름의 유래는 여러 설이 있는데, '장어가 작은 용('''자룡''')으로 보이는 것과, 껍질을 벗기는 것을 "'''포를 벗는'''" 것에 비유했다'거나, '장어 껍질을 깨끗하게 벗긴 모습을 "'''자룡'''"에 비유하여 이름을 지었다'는 설, '샹추 지방의 요리사가 조운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조운이 전포를 풀고 아두를 품에 안은 것에서 이 요리를 고안했고, 장어를 조운에 비유하여 이름을 지었다'는 설이 있다. 이 외에도, 정정현에는 이 요리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민간 전승이 존재한다.

  • '''조자룡(술)''':술 브랜드명. 후난성 창사시 닝샹시에 있는 부용산에 조운이 팠다고 전해지는 우물 ''''팔각정''' (몽천)'의 전승과 관련된. 1952년, 계양현 정부가 몽천 근처에 '샹난 조자룡 주창'(국영 기업)을 설립하고, ''''조자룡'''' 브랜드의 중국 술 제조를 시작, 2005년에 류페이훙이 브랜드를 인수하고, 2011년에 '천저우 조자룡 주업 유한공사'를 설립. 현재도 홍국주와 화조주 등이 제조 판매되고 있다.[447][448]
  • '''장판파화반''':볶음밥. 조운 유래의 당양 명물. 전승에 따르면, 당・송 시대에 장판파의 이야기꾼이 조운이 아두를 구한 이야기를 말했고, 그 옆에서 볶음밥 노점상들이 조운의 창이나 칼 솜씨를 뒤집개로 바꿔, ''''칠진칠출'''을 일곱 번의 작업 과정으로 비유하여 조리한 데서 유래했다.[449]
  • '''기타 음식''':(생강 전승). '자룡편'의 관구에서의 전승. 조운이 관구를 순찰할 때 감기가 유행하여, 늙은 생강을 잘라 몸을 닦게 하거나, 숯으로 생강차를 끓여 마시게 하여 병을 고쳤다. 감격한 관구 사람들은 숯 굽는 법과 생강 재배법을 조운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 - --

  • '''부스피아오서''' (浮石飄色): 타거(抬閣)의 일종. 타거는 중국 전통 축제 때 열리는 민속 퍼레이드의 일종이다. 고대 중원 지역에서 신을 맞이하는 의식이 유행한 데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광둥 성(广东省) 타이산 시(台山市) 부스촌에서는 ''''피아오서''''라고 불린다. 당송 시대에 연극과 담론이 유행하면서 어른과 아이들이 연극 등장인물로 분장하여 거리를 행진하는 풍습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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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 서적 三国演義縦横談 漓江出版社
[406] 서적 三国大観 上海古籍出版社
[407] 서적 絶望は私を鍛え、希望は私を動かす【朴槿恵自叙伝】 晩聲社
[408] 서적 三国志(愛蔵版)第二十四巻 潮出版社
[409] 서적 三国演義懸案解読 四川人民出版社
[410] 문서 京劇『甘露寺』な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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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7] 문서 『八扇屏』「莽撞人」在想当初,後漢三国有一位莽撞人。自従桃園結義以来,大爺姓劉名備字玄徳,家住大樹楼桑。(中略)後続四弟,姓趙名雲字子龍,家住真定府常山県,百戦百勝,後封為常勝将軍。(中略)曹孟徳山頭之上見一穿白小将,白盔、白甲、白旗靠、坐騎白龍馬手使亮銀槍,実乃一員勇将。
[418] 서적 京劇三国志スペシャル「龍鳳呈祥」パンフレット 有限会社楽戯舎(発行・製作・編集)
[419] 문서 元雑劇『陽平関五馬破曹』「幼年販馬走西戎,南征討顕英雄。鴉脚長槍黄膘馬,則我是真定常山趙子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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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 기타 杜斌講述、鄒萍秀捜集整理「趙子龍的洗馬池」『中国民間文学集成四川巻:成都市西城区巻』成都市西城区民間文学集成編委員、1989年
[433] 기타 『三國志平話』巻中「趙雲使一条槍名曰涯角槍,海角天涯無対。「三国志」除張飛,第一条槍。」
[434] 기타 『三國志平話』巻中「両陣相対。張飛曰:「甚人搦戦?」趙雲出馬持槍。張飛大怒,使丈八鋼矛,却取趙云。二馬相交,両条槍来往如蟒,硬戦三十合。張飛怒曰:「曾見使槍的這漢真個強!」」
[435] 기타 『三國志』巻三十六「関張馬黃趙伝」《評》黄忠、趙雲強摯壮猛,併作爪牙,其灌、滕之徒歟?
[436] 서적 中国民間故事集成・河北巻《伝説・人物伝説》 中国民間文学集成全国編輯委員会
[437] 서적 「三国演義」的伝説 南海出版公司
[438] 서적 「三国演義」的伝説 南海出版公司
[439] 기타 『三國演義』第四十一回「劉玄徳携民渡江 趙子龍単騎救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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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1] Youtube 鼓点就是信号,常山戦鼓完美诠釈"兵者詭道也"!康輝不僅是行走的字典,連鼓点暗号也能一猜就中 https://www.youtube.[...] CCTV中国中央電視台 YouTube 2024-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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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 웹사이트 桂陽壇子肉 http://shop.bytravel[...] ウェイバックマシン(博雅地名網) 2011-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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