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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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익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36년에 태어나 1499년에 사망했다. 145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65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하고, 남이·강순의 옥사 처리에도 관여하여 익대공신에 녹선되었다.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망아지를 하사받았으며,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특히 암행어사 파견을 성종에게 건의하여 시행하게 했으며, 명나라에 성절사로 다녀오기도 했다. 말년에는 춘추관동지관사로 성종실록 감수에 참여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사후에는 공숙(恭肅)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외모가 수려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1436년 태어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아버지는 병조참판에 추증된 조온지(趙溫之)이며, 증조부는 고려 문하 시중 이암(李巖)의 사위인 조신(趙愼)이다.
2. 생애
1453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46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세조 대에는 동국통감과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468년 남이(南怡)와 강순(康純)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성종 대에는 사헌부 대사헌, 이조참판, 한성부좌윤, 호조참판, 강원도 관찰사, 병마절도사 등 중앙과 지방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그는 지방관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기 위한 방안으로 암행어사 파견을 적극적으로 건의하여 성사시켰는데, 이는 신숙주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시행된 개혁적인 조치였다. 또한 문장력이 뛰어나 성종 시대 문예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1489년에는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1495년(연산군 1년) 이후 한성부좌윤, 공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1499년 춘추관 동지관사로서 성종실록 감수 작업에 참여하던 중 사망하였다. 외모가 수려하고 특히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2. 1. 초기 생애
1436년 10월 9일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용진 현령(龍津縣令)을 지내고 사후 순충보조공신 병조참판에 추증되어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진 조온지(趙溫之)이고, 어머니는 예빈시 판사 오축(吳軸)의 딸인 해주 오씨이다. 증조부는 회양부사(淮陽府使) 조신(趙愼)이며, 증조모는 고려 문하 시중(門下侍中) 이암(李巖)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공조좌랑을 지내고 사후 병조참의에 추증된 조안평(趙安平)이다.
1453년(단종 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65년(세조 11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1466년 7월에는 동국통감 편찬에 수찬낭관으로 참여하였다. 1467년(세조 13년) 동료들의 추천으로 예문관 한림(翰林)에 선발되었으며, 이후 승정원 주서, 예문관 봉교, 승정원 주서를 차례로 역임하였다. 1468년(세조 14년) 1월에는 종묘서(宗廟署)에 임명되어 제기(祭器)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같은 해(예종 즉위년) 10월에는 남이(南怡)와 강순(康純)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469년(예종 1년) 2월 세자시강원 문학,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거쳐 그해 3월 봉렬대부(奉列大夫)로 승진하며 다시 행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었다. 또한 춘추관 수찬관으로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실록이 완성되자 그 공로로 망아지를 하사받았다. 1470년(성종 1년) 2월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형조참의가 되었으며, 같은 해 3월 도사 선위사(都司宣慰使)로 파견되었다. 이후 부호군 낭관을 거쳐 1479년(성종 10년) 다시 형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481년(성종 12년)에는 한성부좌윤으로 부임하였고, 그해 12월 한성부 좌윤으로서 한평군(漢平君)에 봉해졌다. 1482년(성종 13년) 3월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과거시험의 독권관(讀券官)으로 선발되어 시험을 감독하였다. 1483년(성종 14년)에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과 이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성종 대에 그는 뛰어난 문장력으로 문예 활동 발전에 기여하였다. 또한 지방관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할 방안으로 암행어사 파견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신숙주(申叔舟) 등 일부 대신들은 암행어사 파견이 지방관의 권위를 실추시킬 것을 우려하였으나, 성종은 조익정의 주장을 받아들여 암행어사 제도를 시행하게 되었다.
2. 2. 관직 생활
1453년(단종 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465년(세조 11년)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였다. 1466년 7월에는 동국통감 편찬에 수찬낭관으로 참여하였다. 1467년 동료들의 추천으로 한림(翰林)에 선발되었으며, 이후 승정원 주서, 예문관 봉교 등을 역임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 10월에는 남이(南怡)와 강순(康純)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익대공신 3등관에 책록되었다.
1469년에는 세자시강원 문학, 사헌부 지평을 거쳐 봉렬대부(奉列大夫)로 승진하였고, 춘추관 수찬관으로서 세조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세조실록이 완성되자 그 공로로 망아지를 하사받았다. 1470년(성종 1년)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로 품계가 오르고 형조참의가 되었으며, 그해 3월 도사 선위사(都司宣慰使)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이후 부호군 낭관을 거쳐 1479년 다시 형조참의가 되었고, 1481년에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으로 임명되어 같은 해 12월 한평군(漢平君)에 봉해졌다. 1482년에는 이조참판이 되었고, 그해 10월에는 과거 시험의 독권관(讀券官)으로 선발되어 시험을 감독하였다.
1483년에는 사헌부 대사헌과 이조참판을 지냈다. 1489년 호조 참판으로서 성절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귀국 후 다시 대사헌과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이후 다시 대사헌, 예조 참판을 거쳐 1492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부임하였다. 1494년 12월 명나라에 파견될 사은사로 임명되었으나, 성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는 뛰어난 문장력으로 성종 시대 문예 발전에 기여했으며, 특히 암행어사 파견을 건의하여 지방관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495년(연산군 1년) 한성부 좌윤을 거쳐 같은 해 8월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 1497년에는 공조참판으로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임하였고, 1499년 춘추관 동지관사(春秋館同知館事)로서 성종실록 감수 작업에 참여하던 중 세상을 떠났다. 그는 외모가 수려하고 특히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2. 2. 1. 암행어사 파견 건의
조익정은 성종 재위 시기 암행어사 파견을 건의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그는 지방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한 방안으로 암행어사 제도를 제안하였고,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시행하게 되었다. 당시 신숙주 등 일부 대신들은 암행어사 파견이 지방관의 권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으나, 성종은 조익정의 개혁적인 주장을 받아들여 암행어사 제도를 도입하였다.
2. 3. 말년
1495년(연산군 1년) 한성부좌윤으로 나갔다가 같은 해 8월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497년(연산군 3년) 공조참판으로 오위도총부부총관을 겸임하였고, 1499년 춘추관동지관사(春秋館同知館事)로 임명되어 성종실록의 감수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실록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그는 외모가 수려하였고 특히 수염이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2. 4. 사후
사후 바로 시호가 추서되었는데, 태상시 (太常寺)에서는 "원래의 마음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견고히 하였으니 공(恭)이고, 강직한 덕을 잘 이루었으니 숙(肅)이다."라고 논의하여 공숙(恭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 이후 자헌대부 예조판서 겸 지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1]
시신은 양주군 고주내면 광문리(후에 주내면에 병합되어 광사리가 되었고, 현재의 양주시 광사동)에 안장되었다.[1] 신도비는 그의 5대손 조직(趙溭)이 외외5대손인 홍서봉에게 부탁하여 글을 받았다.[1] 홍서봉이 지은 신도비는 후에 소실되었으나, 1735년(영조 11년)에 조종운(趙從耘)의 글씨로 다시 세워졌다. 이때 비문은 홍서봉이 쓴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1]
3. 가계
누이 : 한산 이씨 이공순(李公淳)에게 시집감
누이 : 송걸(宋傑)에게 시집감
누이 : 전의 이씨 이분양(李汾陽)에게 시집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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