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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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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종암은 조선 숙종 때 명나라의 은혜를 기리고 청나라에 대한 굴욕을 잊지 않기 위해 바위에 글씨를 새기고 비석을 세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1644년 명나라 멸망과 청나라의 북경 입성은 조선 양반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조선은 청나라를 오랑캐로 여기며 소중화 사상을 갖게 되었다. 조종암에는 숭정제의 어필 '사무사', 선조의 '만절필동 재조번방', 효종의 글귀 '일모도원 지통재심' 등이 새겨져 있으며, 1831년부터 명나라 9의사를 위한 제사가 시작되었다. 조종암은 숭명배청 사상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현재 경기도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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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암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조종암
한글조종암
한자朝宗巖
로마자 표기Jojongam
상세 정보
종류기념물
지정 번호28
지정일1975년 9월 5일
주소경기도 가평군 하면 대보간선로 399 (대보리)
시대조선시대
관리자마영섭

2. 역사적 배경

조종암은 조선시대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했던 숭명배청(崇明排淸) 사상을 보여주는 유적이다.[4] 1831년부터 '대통행묘'와 '구의행사'에서 제사를 지냈다.[2]

2. 1. 명나라 멸망과 조선의 소중화 사상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북경에 입성한 것은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경악할 만한 사건이었다. 조선은 여진족이 건국한 청나라를 '야인'이라 부르며 멸시했고, 남쪽의 ''와 함께 야만스러운 오랑캐로 여겼다.[3] 조선은 '왜'와 '야인'에게 연이어 공격을 받았는데, 각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3]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원군 덕분에 왜군을 격퇴했지만, '병자호란'은 굴욕적인 결과를 낳았다. 1637년 1월 30일, 인조한강 남안의 에 있는 청나라 군 본영에 나아가 설치된 수항단에서 홍타이지에게 삼궤구고두례를 행하고 삼전도의 맹약을 맺는 굴욕을 겪었다.[3]

이후 조선에서는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중화 문명이 사라진 '성예수역'(생선 냄새 나는 더러운 원수의 땅)이라 여겼다. 대중화인 명나라가 멸망했으므로, 지상에 남은 유일한 중화는 조선뿐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의 양반들은 자국을 '소화', '소중화'라 부르며, 중화 문명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졌다.

조선청나라군신사대관계에 있었기에, 조선은 조선 연행사를 파견했고, 공식적으로는 청나라연호를 사용해야 했다. 그러나 조선 양반들은 사적인 서간이나 묘지 등에서는 명나라 숭정제의 연호인 숭정기원을 19세기 말까지 계속 사용했다.[3] 1684년에는 송시열숭정제의 어필인 '사무사(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를 새겼고, 이제두, 허격, 백해명 등은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 재조번방(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며, 명군이 왜군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도와주었다)'을 새겼다.[2]

2. 2. 조종암 건립과 숭명배청 사상

조종암은 큰 바위 암벽에 글씨를 새기고, 그 앞에 비석을 세운 후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불린 이름이다.

바위에는 조선 숙종 10년(1684) 임진왜란명나라가 베풀어준 은혜와 병자호란청나라로부터 당한 굴욕을 잊지 말자는 뜻의 여러 글귀를 가평군수 이제두와 허격, 백해명 등이 새겨 놓았다. 즉,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 ‘사무사(思無邪:생각에 사특함이 없음)’, 조선 선조의 글씨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일만 번 꺾여도 반듯이 동력으로 흐르거니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 주었네)’, 송시열이 쓴 효종의 글귀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道遠 至痛在心: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 낭선군 이우가 쓴 ‘조종암(朝宗巖:임금을 뵈이는 바위)’이란 글귀 등이 적혀 있다.[4]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를 자결로 몰아넣은 이자성을 쫓아 청나라북경에 입성한 것은 조선의 양반들에게는 경악할 만한 대사건이었다. 청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은 조선에서는 '야인'이라 불리며, 남쪽의 ''와 함께 야만스러운 오랑캐로 멸시받았다.[3] 조선은 그러한 '왜'와 '야인'에게 연이어 공격을 받았다. 즉,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다.[3]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원군에 의해 왜군을 격퇴했지만, '병자호란'은 굴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1637년 1월 30일, 인조한강 남안의 삼전도에 있는 청나라 군 본영에 나아가 설치된 수항단에서 홍타이지가 천자임을 삼궤구고두례로 인정하는 것을 신하들 앞에서 굴욕적으로 행하고, 신종을 맹세하게 하고, 굴욕적인 삼전도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3] 조선에서는 청나라가 지배하는 중국은 더 이상 중화 문명이 소멸된 '성예수역'(생선 냄새 나는 더러운 원수의 땅)이며, 대중화인 명나라가 소멸됨으로써 지상에 존재하는 중화는 조선뿐이라고 여기고, 조선의 양반들은 자국을 '소화', '소중화'라고 자칭하며, 중화 문명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3]

조선청나라군신사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에서 조선 연행사가 파견되었고, 연호도 공적으로는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해야 했다. (조선의 양반들은, 사적인 서간이나 묘지 등에서는 명나라숭정제의 연호인 숭정기원을 19세기 말까지 계속 사용했다.)[3] 그러던 중 1684년송시열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의 어필인 '사무사(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를 새기고, 이제두, 허격, 백해명 등이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 재조번방(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며, 명군이 왜군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도와주었다)'을 새겼다.[2]

순조 4년(1804)에는 이러한 유래를 적은 비를 암벽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조진관이 짓고 김달순이 썼다. 또한 순조 31년(1831)에는 명나라 9의사(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간 봉림대군과 합심하여 인조 23년 대군이 귀국할 때 우리나라로 망명했던 명나라 사람들)의 후손이 이곳에 와서 지방 유림들과 함께 대통행묘(大統行廟)와 구의행사(九義行祠)를 세워 명나라 태조와 9의사를 위한 제사를 지내었다.

1831년부터 '대통행묘'와 '구의행사'에서 제사를 시작했으며, 일제강점기1934년에 '대통행묘'가 폐지되었다. 1978년, '대통행묘'가 재건되어 매년 3월 19일에 제사를 지낸다.[2]

조선시대 당시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했던 소위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4]

2. 3. 일제강점기와 현재

1831년부터 '대통행묘'와 '구의행사'에서 제사를 시작했으며, 일제강점기1934년에 '대통행묘'가 폐지되었다.[2] 1978년에 '대통행묘'가 재건되어 매년 3월 19일에 제사를 지낸다.[2]

3. 암각문의 내용

조종암은 큰 바위 암벽에 글씨를 새기고, 그 앞에 비석을 세운 후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불린 이름이다.

바위에는 조선 숙종 10년(1684) 임진왜란명나라가 베풀어준 은혜와 병자호란청나라로부터 당한 굴욕을 잊지 말자는 뜻의 여러 글귀를 가평군수 이제두와 허격, 백해명 등이 새겨 놓았다. 새겨진 글귀로는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글씨 ‘사무사(思無邪:생각에 사특함이 없음)’, 조선 선조의 글씨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일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거니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 주었네)’, 송시열이 쓴 효종의 글귀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道遠 至痛在心: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 낭선군 이우가 쓴 ‘조종암(朝宗巖:임금을 뵈이는 바위)’ 등이 있다.

순조 4년(1804)에는 이러한 유래를 적은 비를 암벽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조진관이 짓고 김달순이 썼다. 순조 31년(1831)에는 명나라 9의사(병자호란 때 청에 잡혀간 봉림대군과 합심하여 인조 23년 대군이 귀국할 때 우리나라로 망명했던 명나라 사람들)의 후손이 이곳에 와서 지방 유림들과 함께 대통행묘(大統行廟)와 구의행사(九義行祠)를 세워 명나라 태조와 9의사를 위한 제사를 지내었다.

조선시대 당시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배척했던 소위 숭명배청(崇明排淸)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라 할 수 있다.[4]

1874년 유중교이항로가 조종암에 정자를 세우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승이 정자를 지으려 했던 바위에 '견심정(見心亭)'을 새겼다.

3. 1. 사무사(思無邪)

김상헌청나라 심양에 잡혀 있을 때 입수한 명나라 마지막 숭정제 의종의 어필이다. 논어 위정편에서 따온 말로, 아무리 궁리해 봐도 절대 부정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없는 말이다.[5]

3. 2.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

조선 선조의 글씨인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蕃邦)’은 일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르거니와, 명나라 군대가 임진왜란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 주었다는 뜻이다.[4] 이는 명나라가 베풀어준 은혜를 잊지 말자는 의미이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물결이 만 번 꺾이어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조종암의 물과 조선의 의지가 그러하다는 뜻이다. 재조번방(再造藩邦)은 명나라가 번방(蕃邦)인 조선을 다시 세워 주었다는 의미로,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던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감사함을 담고 있다.[5]

3. 3. 일모도원 지통재심(日暮道遠 至痛在心)

송시열이 쓴 효종의 글귀로,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마음속에 있네'라는 뜻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기 위해 필사적으로 북벌을 추진했지만, 여러 여건이 여의치 않아 포기해야만 했던 효종의 통탄스러운 심정이 담겨 있다.[4] 日暮道遠 至痛在心|일모도원 지통재심중국어은 척화파 대신 이경석에게 내린 비사(임금이 비밀리에 내리던 명령이나 뜻을 적은 글)를 송시열의 서체로 새긴 것이다.[5]

3. 4. 견심정(見心亭)

1874년 조종암에 정자를 세우려 했던 이항로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의 제자인 유중교가 스승이 정자를 지으려 했던 바위에 새긴 글이다. ‘견심’은 주역에 나오는 말로 비록 현재는 위기 상황에 있지만 강한 기운은 반드시 되돌아온다는 낙관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즉 명나라의 멸망으로 천하가 오랑캐의 지배에 들어가고 서양 문명까지 범람하지만 자연 현상이 순환되는 것처럼 유교 문화는 반드시 역전되어 회생되리라는 믿음이 그 속에 담겨있다.[5]

3. 5. 기타


  • 사무사(思無邪) : 논어 위정편에 나오는 구절로, 김상헌청나라 심양에 있을 때 얻은 명나라 숭정제의 어필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부정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없다'는 뜻이다.
  •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 再造藩邦) : 선조가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에 감사하며 직접 써서 올린 글의 일부이다. 만절필동(萬折必東)은 '물결이 만 번 꺾이어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으로, 조종암의 물과 조선의 의지를 나타낸다. 재조번방(再造藩邦)은 명나라가 번방(제후국)인 조선을 다시 세워 주었다는 의미로, 임진왜란 때 풍전등화와 같았던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다.
  • 일모도원 지동재심(日暮途遠 至痛再心) : 송시열이 효종이 척화대신 이경에게 내린 비사를 새긴 글이다.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가슴에 남아 있다'는 뜻으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을 추진했으나 여건이 되지 않아 포기해야 했던 효종의 심정을 담고 있다.
  • 견심정(見心亭) : 1874년 유중교이항로가 조종암에 정자를 세우려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승이 정자를 지으려 했던 바위에 새긴 글이다. '견심'은 주역에 나오는 말로, '비록 지금은 위기 상황이지만 강한 기운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낙관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명나라 멸망 후 유교 문화가 쇠퇴했지만, 자연 현상이 순환하듯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을 나타낸다.[5]

4. 현지 안내문

조종암은 조선 숙종 10년(1684) 임진왜란명나라가 베풀어준 은혜와 병자호란청나라로부터 당한 굴욕을 잊지 말자는 뜻을 담아, 가평군수 이제두와 허격, 백해명 등이 바위 암벽에 글씨를 새기고, 그 앞에 비석을 세우고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면서부터 불린 이름이다.[4]

암각서는 모두 22자로 구성되어 있다. 정면에는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이우가 쓴 조종암, 왼쪽 제일 높은 곳에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글씨 사무사, 그 아래에는 조선 선조의 글씨인 만전필동 재조번방, 그 왼쪽 중앙에는 순조 4년(1804년)에 조종암을 세운 이유와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조종암기실비가 세워져 있다. 유적 오른쪽 바위에는 이항로의 제자인 유증교가 쓴 경심정 이란 글씨가 적혀있다.[4]

조종암은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인 청나라를 멀리하고 사라진 명나라의 문화를 이어받았다는 숭명배청 사상을 보여 주는 문화재로 평가되고 있다.[4]

참조

[1] 뉴스 文化財 https://www.gptour.g[...] 가평군
[2] 뉴스 조종암 朝宗岩 https://www.doopedia[...] 2022-06-29
[3] 뉴스 朝鮮儒教思想から見た韓国の対日観 ―日韓相互不理解の淵源を探る― https://ippjapan.org[...] 평화정책연구소 2019-09-18
[4] 웹인용 조종암 https://korean.visit[...] 2021-08-11
[5] 간행물 《가평 역사의 편린》 https://memory.libra[...] 가평문화원·가평 군청 2019-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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