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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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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보언은 종횡가의 술을 배우고 《주역》, 《춘추》 등을 익힌 전한 시대의 인물이다. 그는 무제에게 등용되기 전까지 여러 제후국을 유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후 무제에게 율령과 흉노 정벌을 건의하여 낭중으로 임명된 후, 알자, 중랑, 광록대부로 승진했다. 그는 추은령을 건의하여 제후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으며, 삭방군 설치와 무릉으로의 호족 이주를 건의했다. 제나라 재상으로 임명되어 제왕 유차경을 자결하게 한 후, 뇌물 수수 혐의로 고발되어 일가족이 몰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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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언
기본 정보
주보언
주보언의 초상화
주(主)
부(父)
이름언(偃)
장인(長人)
작위도후(都侯)
시호무(繆)
생애
출생미상
사망기원전 126년
활동 시기한 무제 시대
출신 배경 및 경력
출신지제나라 임치(臨淄)
학문종횡가 술, 주역, 춘추
경력중대부
제남상
가족 관계
아버지이름 미상
부인이씨 (李氏)
자녀아들 셋 (주충(主忠), 주인(主仁), 주매신(主買臣))
평가 및 관련 사항
특징변설에 능함, 상황 판단 능력 뛰어남
주요 활동추은령 건의, 제후 세력 약화에 기여
최후모함으로 인해 처형됨

2. 생애

종횡가의 술을 배우고, 나중에 『주역』, 『춘추』 등을 배웠다. 제나라에서 유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집이 가난하여 빚을 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연, 조, 중산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 장안으로 가서 위청에게 의지했다. 위청은 무제에게 그를 추천했지만 무제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 무제에게 율령에 관한 일과 흉노 정벌을 간하는 상소를 올렸다.

무제는 서락, 엄안과 함께 주보언을 만나 "그대들은 어디에 있었는가. 만나기가 너무 늦었구나"라고 말하며, 3인을 낭중으로 임명했다. 주보언은 그 후에도 헌책을 하고, 1년 만에 알자, 중랑, 중대부로 승진해 갔다.

주보언은 제후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정책을 건의하였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추은령이다. 무제의 능이 될 무릉에 천하의 호걸, 호족을 이주시키는 것도 진언했고, 무제는 이에 따랐다. 위황후를 세우고 연왕 유정국의 사건을 폭로하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 대신들은 주보언의 입을 두려워하여 많은 뇌물을 보냈다. 삭방 경영을 진언했고, 공손홍 등의 반대를 받았지만, 무제는 주매신에게 반론하게 하여 삭방 경영을 실행했다.

원삭 연간, 주보언은 제왕 유차창이 음란함을 진술했고, 무제는 주보언을 제의 재상으로 삼았다. 주보언은 제에 들어가 형제와 빈객을 모아 금 5백 근을 나눠준 뒤, "내가 가난했을 때, 형제는 나에게 의식을 제공하지 않았고, 빈객은 나를 문 안에 들이지 않았다. 나는 그대들과 절교하겠다. 앞으로 나의 집 문을 지나가지 말라"라고 말했다.

제왕은 주보언이 자신의 사건을 조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살했다.

조왕 유팽조는 주보언이 조에도 재앙을 가져올 것을 두려워하여, 주보언이 도성을 떠났을 때 주보언이 제후의 돈을 받고 있다는 것을 고발했다. 게다가 제왕이 자살했고, 무제는 주보언이 자살로 몰아넣었다고 생각하고 격노하여 주보언을 옥에 가두었다.

주보언은 제후의 돈을 받은 것은 인정했지만 제왕을 자살시키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무제는 주보언을 죽이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공손홍이 반대했기 때문에 주보언을 일가족 몰살시켰다.

2. 1. 궁핍한 생활

집안이 가난하여 돈을 빌려 주는 사람도 없었고, 연나라, 조나라, 중산나라를 떠돌아다녔으나 아무도 후대해 주지 않아 몹시 곤궁하게 지냈다. 종횡가의 술을 배우고, 나중에 『주역』, 『춘추』 등을 배웠다.[1] 제나라에서 유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빚을 낼 수도 없었기 때문에 연, 조, 중산으로 갔지만, 그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제후들은 유세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1]

2. 2. 임관

원광 원년(기원전 134년), 주보언은 장안으로 가 위청에게 의탁하였다. 위청은 무제에게 여러 번 주보언을 추천하였으나 무제는 부르지 않았다.[1] 주보언은 율령과 흉노 정벌에 관한 상소를 올렸는데, 아침에 올리고 저녁에 부름을 받아 무제를 뵈었다.[1]

무제는 주보언과 서악·장안을 만나보고는 매우 기뻐하여 모두 낭중(郞中)으로 삼았다. 주보언은 그 후에도 계속 계책을 바쳐 일 년 만에 알자(謁者)·중랑(中郞)·중대부로 승진하였다.[1]

2. 3. 정치 활동과 추은령

주보언은 무제에게 제후왕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을 건의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3]

  • 추은령(推恩令) 건의: 제후왕의 영지를 여러 자제에게 나누어 상속하게 하여 제후왕의 세력을 점차적으로 줄이는 정책이다. 주보언은 "지금 제후의 자제는 수십 명이나 되는데 적자 이외에는 봉지를 받지 못하며, 효를 다하는 도리가 펼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제후의 봉지를 나누어서 자제를 열후에 봉할 수 있게 하십시오"라고 건의했고, 무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 호족 이주 건의: 무제의 능인 무릉에 전국의 호족과 호걸들을 강제 이주시켜 지방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정책이었다.
  • 위황후 옹립과 유정국 사건 폭로: 위황후를 세우고 연나라 왕 유정국의 비리를 폭로하는 데 공을 세워 무제의 신임을 얻었다.
  • 삭방군 설치 주장: 삭방 지역의 비옥함을 이유로 군 설치를 주장하여 공손홍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삭방군 설치를 관철시켰다.


주보언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제나라 왕 유차경이 자신의 누이와 간통한 사실을 알고 이를 폭로하여 유차경을 자살로 몰아넣기도 했다.[3]

2. 4. 횡포와 몰락

주보언은 권력을 남용하고 뇌물을 받아 재산을 축적했다. 그는 자신의 출세를 도와주지 않은 형제, 빈객들과 절교를 선언하기도 했다. 제나라 재상 시절에는 제나라 왕 유차경을 압박하여 자살로 몰고 갔다.

조나라 왕 유팽조는 주보언이 제후들에게 뇌물을 받았다고 고발했고, 제나라 왕의 죽음까지 겹치면서 무제의 분노를 사 처형당했다. 공손홍은 주보언을 제나라 왕의 죽음에 대한 원흉으로 지목하며 처형을 주장했다. 주보언이 죽은 뒤,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않았으나 효(洨) 사람 공차만이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 지냈다.

3. 저서

《주보언》 28편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4]설원》에 한 구절이 인용된 것만 확인된다.[5]

참조

[1] 서적 Book of the Grand Historian
[2] 간행물 Excavating the genealogy of classical studies in the western Han dynasty (206 B.C.E.-8 C.E.) 2011-07-01
[3] 문서 '다섯 솥의 식사'란 뜻으로, 고대에 제후들이 연회 때 다섯 솥에 소·돼지·닭·사슴·생선을 놓고 먹던 식사. 호화로운 생활과 고귀한 신분을 일컫는다.
[4] 서적 한서
[5] 서적 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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