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 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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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창원 유씨는 신라 말 아찬 유삼재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기계 유씨에서 분파되어, 고려 시대 유숙손이 합포현(현 마산)으로 이주하면서 창원 유씨가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 창원 유씨는 직제학공파(수원파)와 판서공파(천안파)를 중심으로, 창원파와 성주 도절제사공파로 구성된다. 17세기 후반부터 항렬자를 사용하여 이름을 짓기 시작했으며, 2000년 기준 8,007명으로 유씨 본관 중 4번째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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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유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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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유씨 정보 | |
성씨 | 창원 유씨 (昌原兪氏) |
관향 | 경상남도 창원시 |
시조 | 직제학공파 유섭(兪涉), 판서공파 유연(兪演) |
집성촌 | 경기도 화성시(직제학공파), 충청남도 천안시(판서공파) |
주요 인물 | 유언겸, 유해, 유창, 유득일, 유신일, 유회일, 유집일, 유숭, 유경로, 유태흥 |
인구 (2000년 기준) | 8,007명 |
2. 유래
창원 유씨(昌原 兪氏)의 유래는 신라 시대의 성씨 수용과 고려 시대의 본관 제도 시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유(兪)씨의 도시조는 신라 말 아찬(阿飡) 벼슬을 지낸 육두품 출신의 유삼재(兪三宰)로 알려져 있다.[9] 유씨 성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통일신라 시기에 성씨 사용이 점차 확산되면서 받아들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지방 세력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본관 제도를 시행하였다.[14][15] 이 과정에서 유삼재의 후손이 대대로 살아온 기계현(杞溪縣)을 본관으로 삼게 되면서 기계 유씨가 시작되었다.
이후 기계 유씨의 후손 중 일부가 창원 지역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본관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창원 유씨의 시작이다. 즉, 창원 유씨는 기계 유씨에서 분관(分貫)된 성씨이다.[17] 구체적인 분관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18][19], 기계 유씨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점은 분명하다.
2. 1. 신라의 성씨 수용과 골품제도
문헌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건국 초기인 1세기경부터,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시기부터 성씨를 사용했지만, 신라는 이보다 늦은 6세기 진흥왕 때부터 성씨를 사용하기 시작했다.[8]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면서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성씨는 후대에 거의 이어지지 못했고, 신라계 성씨를 중심으로 후삼국 시대부터 한자 성씨가 널리 보급되었다.신라에서 한자 성씨가 수용되는 과정은 왕실에서 시작하여 귀족 계층으로 확산되었다. 7세기 초 신라 왕실의 성씨인 김씨와 박씨가 중국의 역사서인 ≪구당서≫와 ≪신당서≫에 등장한다. 이 기록들은 당시 임금(진평왕)이 김씨이며 나라 안에 김씨와 박씨가 많고 다른 성씨와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점, 또는 왕의 성은 김씨이고 귀인의 성은 박씨이며 일반 백성은 성씨 없이 이름만 가졌다는 사실을 전한다.[8]
신라의 주요 성씨들이 나타난 시기를 보면, 설씨는 삼국 시대 말기, 이씨는 경덕왕 때, 정씨·손씨·배씨는 통일신라 시대, 최씨는 신라 하대에 등장한다. 따라서 신라의 대표적인 3성(김, 박, 석)과 이후 등장한 6성(이, 최, 정, 손, 배, 설) 등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7세기 이후로 볼 수 있다.[8]
신라는 7세기 초 왕실을 시작으로 성씨를 사용했으며, 7세기 후반 나당 간의 문물 교류가 활발해지고 삼국 통일(676년)이 이루어지면서 진골과 육두품 계층으로 성씨 사용이 점차 확산되었다. 또한 통일 후 9주와 5소경에 수도인 왕경의 귀족들을 정책적으로 이주시키면서, 이미 성씨를 사용하던 중앙 귀족과 관료들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8]
신라의 신분 제도와 관료 체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골품 제도와 관등 제도를 알아야 한다. 신라는 골품 제도에 따라 신분을 왕족(성골 및 진골), 귀족(4~6두품), 평민(1~3두품)으로 나누어 8등급으로 구분했다.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관료 체계는 관등 제도에 따라 17등급으로 나뉘었다. 골품 제도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기능은 특정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 즉 관등(관직의 등급)을 규제하는 것이었다. 신라의 관등 제도는 골품 제도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11]
520년(법흥왕 7년)에 정비된 신라의 관등 제도는 골품 제도와의 명확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이에 따르면, 진골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까지 승진할 수 있었지만, 육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까지,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까지,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까지만 승진할 수 있도록 상한선이 정해져 있었다. 이러한 신분별 관등 구분은 자색(紫色), 비색(緋色), 청색(靑色), 황색(黃色)의 네 가지 공복 색깔 구분과도 일치했다.[11]
이러한 신분에 따른 관등 승진 제한은 자연스럽게 관직 임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어, 행정 부서인 집사부[10]의 장관직인 중시(후에 시중으로 개칭)나 다른 주요 행정 부서의 장관인 영(令)은 대아찬 이상이어야 임명될 수 있었으므로, 사실상 장관직은 진골 귀족이 독점하는 구조였다.[11]
아찬은 17관등 중 여섯 번째 등급으로, 오늘날의 차관급에 해당한다. 이 관등은 진골과 육두품 귀족만이 오를 수 있었으며, 특히 육두품에게는 승진할 수 있는 최고 한계였다. 육두품은 '얻기 어렵다'는 뜻의 '득난(得難)'이라고 불릴 정도로 높은 신분이었지만, 진골이 아니었기에 골품 제도의 규정에 따라 주요 관청의 장관이나 주요 군부대의 지휘관이 될 수는 없었다. 이는 골품 제도가 본질적으로 왕족 중심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고 합법화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음을 보여준다.[12]
2. 2. 기계 유씨(杞溪 兪氏)와 창원 유씨(昌原 兪氏)의 분관
유(兪)씨의 도시조는 신라 말엽에 육두품 신분으로서 아찬(阿飡) 벼슬을 지낸 유삼재(兪三宰)이다.[9] 유씨의 성이 받아들여진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지만, 본관이 처음 정해진 것은 고려 초기이다. 후삼국을 통일한 태조 왕건은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본관 제도를 실시했다.[14][15] 이 과정에서 유삼재의 4세손으로 당시 호장(戶長)이었던 유의신(兪義臣)이 대대로 살고 있던 기계현(杞溪縣)이 본관으로 정해지면서 기계 유씨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기계 유씨의 후손들이 창원 지역으로 분관(分貫)하여 창원 유씨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분관 과정은 주어진 자료만으로는 확인하기 어렵다.2. 3. 유(兪)씨의 분관 현황
유(兪)씨 성이 받아들여진 것은 통일신라 시대이지만, 본관은 고려 초기에 처음 정해졌다. 태조 왕건이 전국 군현 명칭을 정비하고 본관 제도를 실시하면서[13][14][15], 당시 기계 유씨의 시조 유삼재(兪三宰)의 4세손인 호장(戶長) 유의신(兪義臣)이 살던 기계현(杞溪縣)을 본관으로 삼은 것이 시초로 추정된다.기계 유씨 본관이 정해진 후, 후손 중 일부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정착하면서 그곳을 새로운 본관으로 삼아 분관(分貫)이 이루어졌다.[17]
「별본기계유씨세계」[18] 및「기계유씨세계초」[19]의 기록에 따르면, 기계 유씨 10세 때 천녕(川寧)을 시작으로 13세 때 장사(長沙), 15세 때 무안(務安) 및 강진(康津), 16세 때 창원(昌原)이 각각 분관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다만, 창원 유씨는 기록된 16세가 아니라 13세 때 분관했을 가능성도 있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유(兪)씨의 본관은 총 32개였으나, 탐진 유씨(耽津 兪氏)가 2017년 기계 유씨 세계(世系)에 편입되면서 현재는 31개 본관이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가운데 그 유래를 알 수 있는 본관은 탐진을 제외하고 기계, 강진, 고령, 무안, 인동, 장사, 창원, 천녕 등 8개뿐이다.[20]
다음은 2000년 인구 조사 기준 유(兪)씨 본관별 인구 현황이다.[21] 당시 유(兪)씨는 전국 286개 성씨 중 인구 순위 40위를 차지했다.
번호 | 본관 | 가구(호) | 인구(명) | 비율(%) | 번호 | 본관 | 가구(호) | 인구(명) | 비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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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54,953 | 178,209 | 100.0 | 18 | 김해 | 216 | 666 | 0.4 | |
1 | 기계 | 34,984 | 113,430 | 63.6 | 19 | 천녕 | 188 | 658 | 0.4 |
2 | 경주 | 2,905 | 9,502 | 5.3 | 20 | 안성 | 191 | 616 | 0.3 |
3 | 고흥 | 2,836 | 9,131 | 5.1 | 21 | 단양 | 171 | 565 | 0.3 |
4 | 창원 | 2,442 | 8,007 | 4.5 | 22 | 달성 | 180 | 545 | 0.3 |
5 | 진주 | 2,477 | 7,789 | 4.4 | 23 | 금산 | 147 | 471 | 0.3 |
6 | 무안 | 2,092 | 6,629 | 3.7 | 24 | 광주 | 149 | 467 | 0.3 |
7 | 강원 | 1,501 | 4,871 | 2.7 | 25 | 남원 | 144 | 461 | 0.3 |
8 | 풍산 | 737 | 2,292 | 1.3 | 26 | 청주 | 128 | 438 | 0.2 |
9 | 강진 | 467 | 1,589 | 0.9 | 27 | 해주 | 123 | 428 | 0.2 |
10 | 인동 | 452 | 1,514 | 0.8 | 28 | 장사 | 107 | 349 | 0.2 |
11 | 파평 | 438 | 1,508 | 0.8 | 29 | 상주 | 105 | 344 | 0.2 |
12 | 강화 | 372 | 1,117 | 0.6 | 30 | 예산 | 93 | 341 | 0.2 |
13 | 하회 | 307 | 1,128 | 0.6 | 31 | 탐진 | 32 | 83 | - |
14 | 부안 | 241 | 795 | 0.4 | 32 | 사천 | 2 | 5 | - |
15 | 공주 | 233 | 758 | 0.4 | 기타 | 7 | 41 | - | |
16 | 고령 | 238 | 735 | 0.4 | 미상 | 31 | 173 | 0.1 | |
17 | 밀양 | 216 | 701 | 0.4 |
창원 유씨는 기계 유씨 12세 유신(兪愼)의 셋째 아들인 유숙손(兪叔孫)이 합포현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기계 유씨 14‧15세 후손들이 중앙 관료로 진출하여 개경에 거주하는 동안, 1282년(고려 충렬왕 8년) 합포현이 회원현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본관을 회원으로 삼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3. 시조와 인물
그 후 1408년(조선 태종 8년)에 의창현과 회원현이 합쳐져 창원부가 설치되면서 본관을 창원으로 변경하여 오늘날의 창원 유씨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15세기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당시 창원 지역의 성씨가 기록되어 있는데, 회원현(현재의 마산 지역)의 토착 성씨(土姓)로 감(甘)씨, 유(兪)씨, 정(鄭)씨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22] 이는 창원 유씨의 연원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볼 수 있다. 다만, 14세기 이전의 기록이 부족하여 초기에 합포 유씨를 거쳤는지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
창원 황씨의 경우에도 시조가 다른 여러 파가 존재하는데, 이 중 일부 파는 본래 본관이 회원현 또는 의창현이었으나, 두 지역이 창원부로 통합된 후 본관을 창원으로 변경한 사례가 있어 창원 유씨의 본관 변경 과정과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다.
3. 1. 판서공파 (천안파)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요청하신 '판서공파 (천안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원본 소스는 '직제학공파'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해당 섹션에 대한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3. 2. 기타 (창원파 및 성주 도절제사공파)
판서공파(判書公派)는 고려 말인 14세기 전반(추정)에 판도사 판서(정3품)를 지낸 유연(兪演)을 시조로 한다. 판도사(版圖司)는 고려 후기 호구(戶口), 공부(貢賦), 전량(錢糧)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중앙 관청으로, 1275년(충렬왕 1년) 원나라 간섭으로 상서호부(尙書戶部)가 개칭된 것이며, 여러 차례 변경 끝에 1389년(공양왕 1년) 호조(戶曹)로 바뀌었다.
유연(兪演)과 그의 선계(先系)는 ⌜별본기계유씨세계⌟와 ⌜정로초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1726년 간행된 창원유씨족보에서 천안·수원 양파의 세계를 비교하면, 유섭(兪涉, 직제학공파 시조)과 유연(兪演)이 같은 항렬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친족 관계는 알 수 없다.
⌜별본기계유씨세계⌟에는 유섭(兪涉)의 선계가 '기계 13세 숙손(叔孫) - 기계 14세 여양(汝讓) - 기계 15세 득주(得珠) - 기계 16세 섭(涉)'으로 기록되어 있어, 유섭과 유연은 6촌 이내의 친족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정확히 몇 촌간인지는 고증할 수 없고, 유연의 조부와 부친의 휘자(諱字)를 알 수 없어, 그의 선계를 '기계 13세 숙손(叔孫) - 기계 14세 여ㅇ(汝ㅇ) - 기계 15세 득ㅇ(得ㅇ) - 기계 16세 연(演)'으로 표기하여 세계도에 나타낸다. 즉, 유연의 조부와 부는 미상이다.
이처럼 두 시조의 선계는 추정되지만, 기계 13세 유숙손(兪叔孫)은 본관지에 처음 정착했으나 신상 기록이 없어 단일 시조로 삼기 어려우므로 입향조(入鄕祖)로 칭하며 창원 유씨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기계 13세 | 기계 14세 | 기계 15세 | 기계 16세 = 창원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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叔孫(숙손) - 입향조 | 汝讓(여양) | 得珠(득주) | 涉(섭) - 직제공파 시조 |
汝ㅇ(여ㅇ) | 得ㅇ(득ㅇ) | 演(연) - 판서공파 시조 |
판서공파의 고려시대 인물로는 시조 유연의 아들로 좌부대언(정3품)을 지낸 유찬(兪瓚)이 있다. 조선시대 인물로는 효자로 이름난 형조 정랑(정5품) 유언겸(兪彦謙)이 대표적이다. 그는 중종 때 뛰어난 효행으로 관직과 효자 정문(旌門)을 받았고, 명종 때 염근리(廉謹吏)에 선정되었으며, 사후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다. 그는 어머니의 3년 시묘(侍墓)를 마친 후,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의 삼년복을 마저 입고 시묘를 하였다. 그의 큰아들 유경인(兪京仁)과 큰손자 유명립(兪命立) 또한 지극한 효행으로 관직과 효자 정문을 받았다. 또한 그의 첩 칠비(七非)는 열녀 정문을 받았다. 이들을 기리는 창원유씨 4위 정려(旌閭)가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 남관리 공사동 입구에 세워져 있다. 그의 묘갈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아! 한 고을과 한 마을에서 한 사람의 효행이 천거되는 것도 아직은 혹시 있다하더라도 드문 일인데, 한 집안 내에서 효행과 청렴으로 시골에서 천거된 자가 할아버지‧아들‧손자 3세인 것은 역시 우리나라에서도 아직 없었다. 또한 첩이 하종(下從: 아내가 죽은 남편의 뒤를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음)한 것은 그 안방을 감화시켰다는 증거이니, 아! 아름답구나.”
유언겸은 한겨울 어머니가 목병으로 생배를 찾으시자, 한밤중에 먼 절까지 가서 배를 구해와 갈증을 풀어드렸다. 이때 밤길을 오가는데 호랑이가 뒤따르며 호위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어머니의 대상을 마치고, 어릴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상을 추복(追服)하여 초상 때와 같이 함으로써 총 6년간 시묘하며 부모를 기렸다. 시묘 기간 동안 호랑이 두 마리가 여막(廬幕)을 보호해주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동야구이(冬夜求梨), 육년시묘(六年侍墓), 호호효행(虎護孝行) 등의 효행 설화는 중국의 ⟪이십사효⟫ 고사 못지않게 뛰어나다.
그 외 판서공파 인물로는 한성부 좌윤(종2품) 및 오위도총부 부총관(종2품)을 지낸 유세렴(兪世廉), 호조 참판(종2품) 및 동지의금부사(종2품)을 지낸 유후양(兪後揚), 동지중추부사(종2품)를 지낸 유응채(兪應采) 등이 있다.
''[그림] 창원유씨 4위 정려''
4. 항렬
창원 유씨는 17세기 후반부터 항렬자를 사용하여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는 1781년에 간행된 제2차 수원파세보 이후부터 항렬자 예정도를 만들어 작명에 활용하기 시작했다.[24] 이에 따라 족보 상에 항렬자가 오행법에 따라 규칙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시기는 파별로 차이가 있다.
- '''직제학공파''': 17세부터 항렬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 '''판서공파''': 18세부터 항렬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름 자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해 23세부터는 항렬자를 두 글자로 정하여 사용하고 있다.
한편, 직제학공파의 지파 중 하나인 성주파와 성주의 도절제사공파는 독자적인 항렬자를 사용하고 있다.
구분 | 17세 | 18세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25세 | 26세 |
---|---|---|---|---|---|---|---|---|---|---|
직제학공파 | 鉉ㅇ ㅇ原 | ㅇ源 達ㅇ 昌ㅇ | 相ㅇ | 炳ㅇ | ㅇ老 | ㅇ鎭 | 泰ㅇ | ㅇ東 | 熙ㅇ | ㅇ埰 |
판서공파 | ㅇ善 ㅇ源 | 永ㅇ ㅇ源 | 相ㅇ ㅇ植 ㅇ相 | 炳ㅇ | ㅇ老 ㅇ基 | 鎭ㅇ | ㅇ濬 ㅇ泰 | 東ㅇ 桂ㅇ | ㅇ熙 ㅇ然 | 埈ㅇ 在ㅇ |
구분 | 27세 | 28세 |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
직제학공파 | 錫ㅇ | ㅇ承 | 杞ㅇ | ㅇ烈 | 在ㅇ | ㅇ鎬 | 永ㅇ | ㅇ植 | 然ㅇ |
판서공파 | ㅇ錫 ㅇ鉉 | 承ㅇ 永ㅇ | ㅇ杰 ㅇ根 | 燦ㅇ 炅ㅇ | ㅇ在 ㅇ圭 | 鐘ㅇ 錦ㅇ | ㅇ泳 ㅇ源 | 榮ㅇ 林ㅇ | ㅇ燮 ㅇ煜 |
5. 발자취
창원 유씨의 이동 경로는 족보상의 인물 정보와 묘지 소재지를 통해 추적해 볼 수 있다.
고려 말엽인 13세기 전반 무렵, 기계 유씨 13세인 유숙손이 기계현을 떠나 합포현(현 창원시)에 처음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4세와 15세 후손들이 5품 이상의 귀족 관료로 진출하면서 개경으로 이주하여 약 6~7대 동안 세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가 멸망한 후, 각 파는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했다.
- 수원파: 창원 유씨 5세 때 수원부(현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 일대)로 낙향하여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 천안파: 창원 유씨 6세 때 천안군(현 천안시 동남구 풍세면 일대)으로 낙향하여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 도절제사공파: 수원파 또는 천안파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이나 명확하지 않다. 자체 1세(창원 유씨 5세로 추정) 때 금산군(현 김천시)에 낙향했다가, 8세 때 성주목(현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일대)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 창원파: 수원파의 지파로, 1~4세는 수원파와 동일하다. 5세 때 창원부로 낙향하여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창원파는 1781년에 간행된 제2차 수원파세보에 14세 및 15세 일부까지 기록된 후 현재까지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다. 족보에 기록된 12세까지의 묘소 위치를 보면,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사화동 등명산(속명 등매산) 부근에 세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곳이 창원 유씨 입향조가 처음 정착했던 곳인지는 불분명하다.
사화동 일대는 1974년 시작된 창원공업단지 및 신시가지 조성 사업 구역에 포함되었다. 만약 창원파가 그때까지 세거했다면 보상을 받고 이주했을 것이나, 그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문중이 해산된 것으로 보인다.
안타깝게도 현재 본관지인 창원에는 오래전부터 후손이 살지 않고 있으며, 관련 유적이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합포현에 입향하여 거주한 기간도 약 2대에 불과하여 입향조의 유허를 찾기 어렵고, 두 시조의 묘 역시 개경에 있다고 전해질 뿐이어서 창원을 방문하더라도 본관지임을 실감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6. 참고사항
'''신라 건국과 조선 유민'''
중국이 기원전 3세기에 진나라와 한나라에 의해 통일되자, 중국 동북지방의 동이족들은 대부분 중국인으로 동화되었으나, 지배층들은 무리를 지어 고조선과 삼한으로 망명해 왔다. 기원전 2세기 말에 기자조선이 연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망하자, 준왕(準王)을 비롯한 고조선의 망명객들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왔다. 다시 기원전 2세기 초에 위만조선이 한나라에게 망하면서 그 지배층이 대거 남하하면서 진국(辰國)의 사회발전이 촉진되어 삼한이 형성되었다.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을 관할한 것은 마한으로서 기자조선 망명인이 정권을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경상북도 낙동강 유역과 경주지역에는 위만조선의 지배층이 대거 남하하여 진한을 형성했다.
중국 사서에는 오로지 사로국의 국명만 소개되었을 뿐이므로, 사로국의 건국과 초기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삼국사기』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찍부터 일본의 사학자들을 필두로 국내의 일부 사학자들이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불신론에 입각해 사로국 형성 기반인 육촌의 실재를 불신하거나 건국 기년인 서기전 57년을 후대의 조작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경주 일대에서 조영된 서기전 2세기대의 구정동, 입실리, 죽동리 유적들과 서기전 2세기 말 ~ 1세기 초 전후로 비정(比定)되는 황성동, 조양동, 덕천리 등의 널무덤(목관묘) 유적들이 서북한 지역의 고조선 문화와 연계된다. 그런 까닭에 기원전 위만조선의 성립과 멸망 그리고 한사군 설치 이후 한나라의 지배를 피해 여러 차례에 걸쳐 남하한 조선 유민들이 경주 일대에 정착하는 와중에 사로국이 건국되었음은 사실인 듯 하다. 그런 까닭에 후대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국가 기원이 조선 유민에 의해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신라의 불분명한 건국 기년을 조선 멸망 이후 최초의 갑자년인 서기전 57년으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본관 제도의 변화'''
유씨(兪氏)의 본관은 조선시대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 98개로 전하지만[25], 이것은 향소부곡 등과 같은 고려시대의 특수 행정구역에 의해 정해진 본관들이 포함된 숫자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향·소·부곡 등의 임내(任內)의 승격과 소속의 변동, 행정구획의 개편과 폐합 등에 따라 15세기 말부터는 세분된 본관이 점차 주읍(主邑)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즉 촌과 향·소·부곡 등이 소속군현에 폐합되듯이, 종래의 촌성(村姓)과 향성(鄕姓)·소성(所姓)·부곡성(部曲姓)이 군현성(郡縣姓)에 흡수되어 갔고, 향·소·부곡과 독자적인 촌이 소멸되어 갔듯이, 그곳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가 이제는 당초의 본관을 버리고 소속 군현성에 흡수, 병합되어 갔다.
그 결과 15세기 지리지에 실려 있던 폐현·촌·향·소·부곡·처·장·역 등을 본관으로 했던 성씨는 대부분 소속 주읍성(主邑姓)에 흡수되거나 주읍을 새 본관으로 개정하게 되고, 15세기까지 존재했던 임내성(任內姓)의 본관은 대부분 사문화(死文化)되었다. 이에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각 성씨의 본관의 수가 대폭으로 줄어들었다.
'''고려 시대 귀족의 거주지'''
고려 시대에 관료로 출세하여 귀족(5품 이상)이 되면 직계가족은 모두 개경으로 이주가 가능했으며, 개경 이주 후에도 본관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귀족 관료는 보통 개경과 그 일대에 거주했고 개경 근처에 가묘(家廟)를 두기 위해 노력했다. 유배의 일종으로 개경에서의 거주권을 박탈하여 자신의 본관지로 돌아가도록 하는 귀향형이 있었다.
'''사화동(沙火洞)의 어원'''
사화동(沙火洞)의 어원을 밝혀 보면 ‘사(沙)’는 동쪽을 뜻하는 ‘사’의 차자(借字)로 보이며, ‘화(火)’는 갯벌을 뜻하는 ‘벌’의 차자로 보인다. 즉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신라의 지명에 화(火)라 칭하는 것이 많은데 화는 불(弗)이 변해 그렇게 된 것이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사화리는 동쪽 갯벌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명칭으로 보인다.“[26] 따라서 사화촌(沙火村)‧사화리(沙火里)가 의창현(義昌縣)이 아니라 골포현(骨浦縣)‧합포현(合浦縣)‧회원현(檜原縣)에 속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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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마을에 처음으로 정착한 각 성씨의 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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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창원유씨월산공파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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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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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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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창족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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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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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품제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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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한국의 성씨와 족보
서울대학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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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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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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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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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동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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