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리이 스네에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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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리이 스네에몬은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활약한 인물로, 오쿠다이라 가문의 전령으로 활동했다. 그는 다케다 군에 포위된 나가시노성을 탈출하여 원군을 요청하고 돌아오는 길에 붙잡혀, 원군이 곧 도착할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전달하라는 강요를 받았지만 거부하고 처형당했다. 그의 희생으로 나가시노성의 병사들은 사기를 얻어 원군이 올 때까지 성을 지켜냈고, 스네에몬의 충절은 널리 알려져 메이지 시대부터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 국정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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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이 스네에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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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토리이씨(오쿠다이라씨 가신) |
이름 | 도리이 스네에몬 |
대체 이름 | 가쓰아키 (휘) |
시대 | 센고쿠 시대 |
출생 | 덴분 9년 (1540년) |
사망 | 덴쇼 3년 (1575년) 5월 16일/17일 |
묘소 | 신쇼지 및 간센지 (모두 아이치현 신시로시) |
주군 | 오쿠다이라 노부마사 |
자녀 | 노부아키 |
계명 | 지해상통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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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토리이 스네에몬은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그의 생애 대부분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 기록에는 주로 덴쇼 3년(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와 관련된 행적만이 남아 있다. 그는 미카와국 출신으로, 오쿠다이라 가문을 섬긴 배신이었다고 전해진다.
나가시노 전투 당시, 다케다 가쓰요리가 이끄는 군대에 나가시노성이 포위되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성주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원군을 요청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스네에몬은 목숨을 걸고 사자 역할을 자원하여 포위망을 뚫고 오카자키성까지 약 65km의 거리를 달려가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원군 파견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성으로 귀환하여 이 소식을 전하려다 다케다 군에게 붙잡혔다. 다케다 가쓰요리는 스네에몬에게 목숨을 보장하며 거짓 정보를 전하라고 회유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하고 성을 향해 "원군이 곧 올 것이니 힘을 내라"고 외쳤다. 이 외침 직후 스네에몬은 처형되었으나, 그의 용기와 희생은 성 안 병사들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결국 연합군이 도착할 때까지 성을 지켜내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의 충성스러운 행동은 오다 노부나가에게도 깊은 감명을 주어, 노부나가가 직접 그의 묘를 세워주었다고 한다. 스네에몬의 이야기는 주군에 대한 충절과 희생의 상징으로 후세에 널리 알려졌다.
2. 1. 초기 생애
토리이 스네에몬이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덴쇼 3년(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 때뿐이며, 그 이전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자료에 따르면, 그는 미카와국호이군 내(현재의 아이치현 도요카와시 이치다정)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원래 오쿠다이라 가문의 직신이 아닌 배신이었으며,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했을 당시의 나이는 세는 나이로 36세였다고 전해진다.2. 2. 나가시노 전투
토리이 스네에몬이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것은 덴쇼 3년(1575년)의 나가시노 전투 때뿐이며, 그 이전의 인생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현존하는 몇 안 되는 자료에 따르면 그는 미카와국 호이군 내(현재의 아이치현 도요카와시 시다정) 출신으로, 처음에는 오쿠다이라 가문의 직신이 아닌 배신이었다고도 하며,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했을 때의 나이는 세는 나이로 36세였다고 전해진다.오쿠다이라 씨는 원래 이마가와 씨나 오다 씨, 마쓰다이라 씨(도쿠가와 씨) 사이에서 소속을 여러 번 바꾼 지역 세력이었지만, 겐키 연간에는 가이 다케다 씨의 침공을 받아 다케다 가문의 산하에 있었다. 그러나 다케다 가문의 당주였던 다케다 신겐이 겐키 4년(1573년) 4월에 사망하자, 오쿠다이라 씨는 다시 마쓰다이라 씨(도쿠가와 씨)에게 호응하여 신겐의 뒤를 이은 다케다 가쓰요리의 분노를 샀다.
오쿠다이라 가문의 당주 오쿠다이라 사다요시의 장남 사다마사(후의 오쿠다이라 노부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미카와 국 동쪽의 나가시노성을 위임받아 약 500명의 병력으로 수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덴쇼 3년 5월, 나가시노성은 가쓰요리가 이끄는 1만 5천의 다케다 군에게 포위되었다. 5월 8일 전투가 시작된 이후 11, 12, 13일에도 공격을 받았지만, 주변이 계곡으로 둘러싸인 나가시노성은 방어를 계속했다. 그러나 13일에 다케다 군이 쏜 화살로 인해 성 북쪽의 병량고가 불타버렸다. 식량을 잃은 나가시노성은 장기 농성이 불가능해졌고, 며칠 안에 낙성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사다마사는 마지막 수단으로 이에야스가 있는 오카자키성에 사자를 보내 원군을 요청하기로 결심했다. 한편, 오카자키성의 이에야스도 이미 다케다 군의 움직임을 감지하고 동맹자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원군을 요청한 상태였다. 그러나 다케다의 대군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성을 빠져나가 오카자키성까지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임무였다.
이 목숨을 건 어려운 역할에 스네에몬이 스스로 나섰다. 14일 밤, 그는 성의 하수구를 통해 빠져나와 강을 헤엄쳐 다케다 군의 경계를 피하고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다음 날인 15일 아침, 나가시노성에서도 보이는 간호산에서 봉화를 올려 탈출 성공을 알렸다. 같은 날 오후 오카자키성에 도착하여 원군 파견을 요청했다. 이때 오카자키성에는 이미 노부나가의 원군 3만이 도착해 있었고,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3만 8천은 다음 날 나가시노를 향해 출발할 예정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한 스네에몬은 한시라도 빨리 아군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즉시 나가시노성으로 돌아갔다. 16일 이른 아침, 돌아오는 길에 같은 산에서 봉화를 올린 후, 더 자세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성으로 들어가려 시도했다. 그러나 성 근처 아리우미 마을에서 다케다 군 병사에게 발각되어 붙잡히고 말았다. 봉화가 오를 때마다 성 안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수상하게 여긴 다케다 군이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네에몬을 심문하여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나가시노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가쓰요리는 원군 도착 전에 성을 함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가쓰요리는 스네에몬에게 목숨을 살려주고 다케다 가문의 가신으로 삼겠다는 조건으로, 성을 향해 "원군은 오지 않으니 포기하고 성을 넘겨라"는 거짓 정보를 외치라고 명령했다. 성병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항복을 유도하려는 의도였다. 스네에몬은 겉으로는 가쓰요리의 명령을 따르는 척하며 나가시노성이 잘 보이는 곳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처음부터 죽음을 각오했던 스네에몬은 성을 향해 "며칠 안에 원군이 올 것이니 그때까지 버텨라!"고 외쳤다. 이 말을 들은 가쓰요리는 격노하여 즉시 부하들에게 스네에몬을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스네에몬은 그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의 결사적인 외침 덕분에 원군이 온다는 확실한 정보를 얻게 된 사다마사와 나가시노성의 병사들은 스네에몬의 죽음을 헛되이 할 수 없다며 사기가 크게 올랐고, 결국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이틀 동안 다케다 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원군의 총대장이었던 노부나가 역시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나가시노성의 아군을 구한 스네에몬의 최후를 전해 듣고 크게 감명받아, 그의 충의를 기리기 위해 훌륭한 묘를 세워주었다고 전해진다.
2. 3. 귀환과 죽음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원군 파견 소식을 들은 스네에몬은 기뻐하며 이 소식을 빨리 전하기 위해 즉시 나가시노성으로 돌아가려 했다. 노부나가와 이에야스는 다케다 군이 포위한 성으로 혼자 돌아가는 것은 위험하다며 만류하고 휴식을 권했지만, 스네에몬은 이를 거절하고 거의 쉬지 않고 출발했다. 당시 나가시노성에서 오카자키성까지는 편도 약 65km 거리였으며, 스네에몬은 왕복 약 130km의 산길을 하루 남짓 만에 주파한 셈이다.16일 이른 아침, 스네에몬은 왔던 길과 같은 간호산에서 봉화를 올려 귀환을 알린 뒤, 자세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성 안으로 들어가려 시도했다. 그러나 성 근처 아리우미 마을에서 다케다 군 병사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다. 봉화가 오를 때마다 성 안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다케다 군이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네에몬을 심문하여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나가시노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케다 가쓰요리는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서둘러 나가시노성을 함락시켜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에 가쓰요리는 스네에몬에게 목숨을 살려주고 다케다 가문의 가신으로 삼아 후대하겠다는 조건을 내걸며, 성 안의 병사들에게 "원군은 오지 않으니 포기하고 성을 넘기라"는 거짓 정보를 전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렇게 하면 성 안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쉽게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네에몬은 겉으로는 가쓰요리의 명령을 따르는 척하며, 나가시노성 서쪽의 시야가 트인 곳으로 끌려갔다. 그러나 이미 죽음을 각오한 스네에몬은 성을 향해 "며칠 안에 원군이 올 것이니 그때까지 버텨라!"라고 외쳤다. 이 말을 들은 가쓰요리는 크게 분노하여 즉시 부하들에게 명령해 스네에몬을 처형했다.
스네에몬의 목숨을 건 외침 덕분에 원군이 온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 오쿠다이라 사다마사와 나가시노성의 병사들은 그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며 오히려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들은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이틀 동안 다케다 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원군의 총대장이었던 오다 노부나가 역시 나가시노성의 아군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스네에몬의 최후를 전해 듣고 깊이 감명받았으며, 그의 충성심을 기리기 위해 훌륭한 묘를 세워주었다고 전해진다.
3. 스네에몬의 최후에 대한 여러 기록
토리이 스네에몬의 죽음에 대해서는 "참수되어 죽었다[2]"는 설과 "십자가형에 처해졌다[3]"는 설 두 가지가 전해진다. 일반적으로는 십자가형 설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스네에몬의 모습을 그린 깃발 그림(관련 그림)도 전해진다.
스네에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간에이 원년(1624년)에 간행된 『호안 노부나가기』 정본이며, 간에이 3년(1626년)경 성립된 『미카와 이야기』가 뒤를 잇는다. 하지만 이보다 앞선 『신장공기』 등에는 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또한, 스네에몬의 최후뿐 아니라 다른 내용에서도 『호안 노부나가기』와 『미카와 이야기』는 차이를 보인다.
'''『호안 노부나가기』와 『미카와 이야기』에서의 토리이 스네에몬 묘사'''
호안 노부나가기 | 미카와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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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이 스네에몬의 이름 | 토리이 쿄에몬 | 토리이 스네에몬/토리이 스네에몬노조 |
사자 파견의 이유 | 군량의 고갈 | 다케다 군의 격렬한 공격에 견디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
토리이 스네에몬이 사자가 된 이유 | 스스로 자원했다 | 기술 없음 |
나가시노성 탈출의 모습 | "와카군의 목숨에 대신할 옥의 끈을 어찌 버리랴, 무사의 길"이라고 말하고 5월 14일 밤에 탈출, 다음날 아침 신호의 봉화를 올리고, 15일 밤에 오카자키에 도착 | 성에서 쉽게 탈출했다고 할 뿐 |
나가시노로 귀환하는 모습 | 노부나가는 전령을 보내겠다고 하며 스네에몬을 붙잡으려 했지만 스네에몬은 서둘러 스스로 돌아가 전하기 위해 떠나 16일 밤에 나가시노에 도착 | 노부나가가 붙잡으려는 묘사는 없음 |
포박의 경위 | 다케다 측이 해자와 울타리를 증강하여 엄계태세를 펼쳤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가쓰요리의 가신 가와하라 야타로에 의해 붙잡혔다 | 다케다 쇼요켄의 담당 구역에서 죽창을 쓰고 침입하려다 발각되어 포박 |
다케다 측의 요청 | 가쓰요리가 쇼요켄을 통해 심문한 결과, 스네에몬은 임무를 숨김없이 실토했으므로, 다케다의 가신이 되어 등용하는 것을 제안했고, 스네에몬은 이를 승낙했다. 밤늦게 쇼요켄이 스네에몬에게 성 안의 친한 사람을 불러내어 빨리 성을 개성하도록 전하도록 요청했다. | 가쓰요리가 목숨을 구하고 영지를 주어 등용하는 대가로, 십자가형 상태로 성을 향해 노부나가의 원군이 오지 않으니 성을 개성하도록 전하도록 요청하여 이를 승낙했다. |
나가시노성으로의 전달 | 새벽에 10명 정도의 사무라이를 붙여 울타리에 접근하여, 노부나가가 이틀에서 사흘 안에 도착할 것이니 성을 유지할 것과, 이생에서의 마지막 모습이니 이까지라고 알렸다. | 성 근처에서 십자가형에 처해, 노부나가・우에노스케(노부타다)・이에야스・노부야스의 원군이 다가오고 있으니, 사흘 안에 호전될 것이므로 성을 유지하도록 알렸다. |
스네에몬의 살해 | 가쓰요리는 의사(義士)라고 하여 살려주려 했지만, 스네에몬은 청하여 참수되었다. | 오히려 적의 이익이 되는 말을 하는 놈이므로 그대로 죽임을 당했다. |
스네에몬이 나가시노성을 탈출할 때, '''스즈키 긴시치로 시게마사'''라는 아시가루가 동행했거나 두 번째 사자로 뒤따랐다는 설도 있다. 『총견기』, 『조잔기담』, 『나가시노 일기』 등에는 긴시치로가 스네에몬과 함께 성을 탈출해 오카자키성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시로시 소재 젠겐지의 고문서나 가와지 촌(현 신시로시 가와지)에도 비슷한 전승이 있다. 『사전기문』, 『무덕대성기』에는 스네에몬을 뒤쫓아 긴시치로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간에이 제가 계도전』, 『간세이 중수 제가보』의 오쿠다이라 가문 기록이나 『미카와 이야기』에는 긴시치로에 대한 언급이 없다.[4] 또한, 긴시치로가 사자가 되었다는 자료들에서도 그는 원군 요청 후 오카자키성에 남았고 스네에몬처럼 영웅시되지는 못했다. 한편, 『오쿠다이라 가 세보』에는 스즈키 긴시치로가 15일 나가시노성 공방전에서 전사한 오쿠다이라 측 무사 중 한 명으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스네에몬은 죽음을 각오하고 성을 나설 때 "우리 군주를 대신할 옥의 끈을 어찌 끊으랴, 무사의 길"이라는 절명구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이는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무사도 정신을 나타내는 와카로 여겨지지만, 이 시가 기록된 『호안 노부나가기』는 스네에몬 사후 약 50년 뒤인 에도 시대 초기에 쓰인 것이므로 실제 스네에몬이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스네에몬의 주군 가문인 오쿠다이라 가문에서는 이 전투를 가문의 운을 열었다 하여 "개운전(開運戦)"이라 불렀으며, 이에야스와 연을 맺은 사다마사는 오카자키의 세습 가신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스네에몬의 충성스러운 행위는 높이 평가받아 메이지 시대부터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 국정교과서에도 실렸다. JR 도카이 이다선의 토리이역은 스네에몬이 최후를 맞은 땅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또한 그의 아내 고향인 쓰쿠데촌(신시로시 쓰쿠데)의 간센지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스네에몬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묘가 남아 있다.
3. 1. 십자가형 깃발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쓰구 배기)
도쿄 대학 사료편찬소가 소장하고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토리이 스네에몬을 그린 기사시모노(깃발 그림)이다. 사료편찬소에서는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쓰구 배기"라는 관리 명칭을 사용하지만, 깃발을 보관하는 상자에는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쓰구 배기, 토리이 스네에몬 쇼타카 역참형의 그림"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쇼타카"는 스네에몬의 휘인 "카쓰타카"(勝高)를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깃발에 그려진 스네에몬은 온몸이 적토와 같은 붉은색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매서운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 깃발은 원래 기슈 번의 무사 오치아이 가문에 전해 내려오던 것이었으나, 메이지 시대에 옛 주군이었던 기슈 도쿠가와 가문에 기증되었다. 이후 쇼와 14년(1939년) 3월에 도쿄 대학 사료편찬소가 구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오치아이 가문에는 이 깃발을 모사한 것이 4장 더 현존하는데, 이는 오치아이 가문의 2대 당주 이후 각 당주가 초대 당주가 사용했던 원본(현재 사료편찬소 소장본)을 베껴 만든 것이다. 초대 깃발은 실제로 전장에서 사용된 것으로 전해지며, 화살, 총알, 창에 의해 뚫린 구멍이나 혈흔으로 보이는 자국이 남아 있다. 폴리라이트 조사를 통해 깃발의 얼룩에서 단백질 성분이 확인되어, 이것이 혈흔일 가능성도 있다.
에도 시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유학자 야스이 소켄의 유고를 모아 메이지 11년(1878년)에 간행한 『소켄 유고』에는 이 깃발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에 따르면, 오치아이 사헤이지(원문 표기)는 다케다 가문의 가신이었는데, 빈사 상태의 토리이 스네에몬에게 그의 모습을 깃발 그림으로 남기겠다고 청했다. 목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던 스네에몬은 고개를 끄덕여 이를 승낙했고, 그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사헤이지가 총으로 쏘아 숨을 거두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 깃발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오치아이 사헤이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난키 도쿠가와 시』에 따르면, 오치아이 가문의 초대 당주인 오치아이 사헤이지의 휘는 "미치쓰구"(倫次)이며, 도토미 출신으로 처음에는 다케다 가문을 섬기다가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그리고 도쿠가와 요리노부를 섬겼다고 한다. 그는 토리이 스네에몬의 "사절도"(깃발 그림)를 자신의 배기(背旗, 등에 다는 깃발)로 삼았으며, 겐나 6년(1620년)에 사망했다.
반면, 『간세이 제씨 계도전』에서는 오치아이 사헤이지의 휘를 "미치히사"(理久)로 기록하고 있다. 도토미 출신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겨 나가시노 전투에 참전했으며, 이후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오사카 전투에서는 도쿠가와 요리노부를 따랐다. 16세 때 하나자와 성 전투에서 처음으로 적의 목을 베었으며, 향년 76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몰년을 계산하면 간에이 7년(1630년)으로 추정된다.
두 기록의 인물을 다른 사람으로 보는 설도 있지만(마루야마 팽), 하나자와 성 전투가 이마가와 가문과 다케다 가문의 전투였고, 『고요 군감』에 다케다 측 무사로 "오치아이 지부·동생 사헤이지" 형제의 이름이 보이는 점 등을 근거로, 가네코 다쿠는 『간세이 제씨 계도전』의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히사가 원래 다케다 가문을 섬기다가 후에 도쿠가와 가문을 섬긴 인물이며, 기슈 오치아이 가문의 초대 당주인 오치아이 사헤이지 미치쓰구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오치아이 가문에 화재로 초기 기록이 소실되었고, 휘가 나중에 발견된 서찰을 통해 판명된 점 등을 고려할 때, 미치히사에서 미치쓰구로 개명했거나 서찰의 휘를 잘못 읽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만약 동일 인물이라면, 나가시노 전투 당시 오치아이 사헤이지는 이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고 있었으므로, 적진에 잡혀 있던 토리이 스네에몬이 처형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을 가능성은 낮다. 대신 십자가에 매달린 채 방치된 스네에몬의 시신을 보았을 가능성은 있다.
깃발의 제작 시기는 오치아이 사헤이지의 경력과 깃발이 실제 전투에서 사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늦어도 오사카 여름 전투(1615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제작 시기의 상한은, 『간세이 제씨 계도전』의 원본 자료 작성 시점에 이 깃발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점에서 추정해 볼 수 있다. 자료를 작성한 오치아이 사헤이지의 양자 오치아이 고헤이지 미치쓰구(이후 에도에서 하타모토가 됨)가 깃발의 존재를 몰랐다고 가정하면, 고헤이지가 양아버지 곁을 떠나 이에야스의 측근으로 들어간 게이초 4년(1599년) 이후에 깃발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코지마 미치히로는 깃발 보관 상자에 "역참형(逆磔刑, 거꾸로 매달아 처형)의 그림"이라고 쓰여 있는 것을 근거로 이 그림이 스네에몬을 거꾸로 매단 역참형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구로다 히데오, 후지모토 마사유키 등은 원본이 도쿠가와 가문에 헌상될 때의 기록이나 기사시모노의 일반적인 형태 등을 근거로 이에 반박했다. 또한, 메이지 5년(1872년)에 현재 형태로 꾸미기 전에 찍힌 사진 자료에는 명칭이 "토리이 스네에 역참형도 기사시모노"라고 되어 있지만, 그림의 왼쪽과 윗부분에 깃대에 묶는 부분으로 보이는 천이 달려 있어 역참형의 모습일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야스쿠니 신사 유슈칸이 소장한 "오치아이 사헤이지 배기 그림" 등 에도 시대에 이 깃발을 모사한 그림들에서도 동일한 형태가 확인된다.
4. 후세에 미친 영향
토리이 스네에몬의 충성스러운 죽음은 후대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용기와 희생은 무사도의 귀감으로 여겨져, 그의 자손들은 에도 시대 동안 가문 내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가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스네에몬의 이야기는 여러 기록과 문학 작품을 통해 전해졌으며, 특히 메이지 시대 이후 일본의 국정교과서에 실려 충성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그의 행적은 지명 유래나 묘소 건립 등 문화적으로도 기념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소설, 영화,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 문화 매체에서 그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4. 1. 가계 계승
토리이 스네에몬(強右衛門|강우에몬일본어)의 자손들은 그의 명성으로 인해 '강우에몬'이라는 통칭을 대대로 물려받았다. 강우에몬 카츠아키의 아들인 토리이 노부아키는 아버지의 공적으로 100석의 봉록을 받았다. 노부아키는 처음에는 마츠다이라 이에하루를 섬겼으나, 이에하루가 일찍 사망하자 다시 돌아왔다. 이후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여 교토에서 안코쿠지 에케이를 사로잡는 큰 공을 세워 200석이 더해져 총 300석의 봉록을 받게 되었다.그 후, 노부아키의 막내아들인 마츠다이라 타다아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양자가 되어 분가(오쿠다이라 씨의 한 갈래로, 현재 사이타마현 교다시에 있던 오시번에서 메이지 유신을 맞이한 오쿠다이라 마츠다이라 가문)를 이루자, 토리이 노부아키는 그의 가신이 되었다. 또한, 13대 후손인 토리이 쇼지가 가로의 지위에 오르는 등, 스네에몬의 자손들은 가문 내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강우에몬의 가계는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4. 2. 문화적 영향
토리이 스네에몬의 죽음에 관해서는 "참수되어 죽었다[2]"는 설과 "십자가형에 처해졌다[3]"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반적으로는 십자가형 설이 더 널리 알려져 있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스네에몬의 모습을 그린 깃발 그림이 현재까지 남아있다.그러나 스네에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간에이 원년(1624년)에 간행된 『호안 노부나가기』이며, 간에이 3년(1626년)경에 성립된 『미카와 이야기』가 그 뒤를 잇는다. 이보다 앞선 시기의 기록인 『신장공기』 등에는 스네에몬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호안 노부나가기』와 『미카와 이야기』 사이에도 스네에몬의 행적에 대한 묘사가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호안 노부나가기』와 『미카와 이야기』에서의 토리이 스네에몬 묘사 비교'''
내용 | 호안 노부나가기 | 미카와 이야기 |
---|---|---|
이름 | 토리이 쿄에몬 | 토리이 스네에몬 / 토리이 스네에몬노조 |
사자 파견 이유 | 군량의 고갈 | 다케다 군의 격렬한 공격을 견디기 어려워졌기 때문에 |
사자가 된 이유 | 스스로 자원함 | 기록 없음 |
나가시노성 탈출 모습 | "우리 주군의 목숨을 대신할 옥 같은 목숨을 어찌 버리랴, 이것이 무사의 길"이라 말하고 5월 14일 밤 탈출, 다음날 아침 신호 봉화를 올리고 15일 밤 오카자키 도착 | 성에서 쉽게 탈출했다고만 기록 |
나가시노성 귀환 모습 | 노부나가가 전령을 보내겠다며 만류했으나, 스네에몬은 직접 전하기 위해 서둘러 떠나 16일 밤 나가시노 도착 | 노부나가의 만류 묘사 없음 |
포박 경위 | 다케다 측이 해자와 울타리를 강화하여 경계가 삼엄해진 상황에서, 가쓰요리의 가신 가와하라 야타로에게 붙잡힘 | 다케다 쇼요켄의 담당 구역에서 죽창을 쓰고 침입하려다 발각되어 포박 |
다케다 측의 회유 | 가쓰요리가 쇼요켄을 통해 심문하자 스네에몬이 임무를 실토. 다케다의 가신으로 등용 제안, 스네에몬 승낙. 밤늦게 쇼요켄이 성 안의 친한 사람을 불러내 성문을 열도록 설득하라고 요청. | 가쓰요리가 목숨을 살려주고 영지를 주는 대가로, 십자가형 상태에서 성을 향해 "원군은 오지 않으니 항복하라"고 외치도록 요청, 스네에몬 승낙. |
나가시노성에 전달한 내용 | 새벽에 사무라이 10여 명과 함께 울타리에 접근하여, "노부나가가 이틀 안에 도착할 것이니 성을 지켜라. 이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모습이다"라고 외침. | 성 근처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채, "노부나가, 노부타다, 이에야스, 노부야스의 원군이 오고 있으니 사흘만 버티면 상황이 좋아질 것이다"라고 외침. |
최후 | 가쓰요리는 의로운 무사라며 살려주려 했으나, 스네에몬이 죽기를 청하여 참수됨. | 오히려 적에게 이로운 말을 했으므로 그대로 처형됨. |
스네에몬이 나가시노성을 탈출할 때 '스즈키 긴시치로 시게마사'라는 아시가루(족경)가 동행했거나 두 번째 사자로 뒤따랐다는 설도 있다. 『총견기』, 『조잔기담』, 『나가시노 일기』 등에는 긴시치로가 스네에몬과 함께 성을 탈출하여 오카자키성으로 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시 소재 젠겐지의 고문서나 가와지 촌(현 신시 가와지)의 전승도 비슷하다. 반면 『사전기문』, 『무덕대성기』에는 스네에몬을 뒤쫓아 긴시치로가 파견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간에이 제씨 계도전』, 『간세이 중수 제씨보』의 오쿠다이라 가 계보나 『미카와 이야기』에는 긴시치로에 대한 언급이 없다.[4] 또한, 긴시치로가 함께 사자가 되었다는 자료들에서도 원군 요청 임무를 완수한 뒤 나가시노성으로 돌아간 것은 스네에몬뿐이며, 긴시치로는 오카자키성에 남아 스네에몬처럼 영웅적인 인물로 기록되지는 못했다. 한편, 『오쿠다이라 가 세보』에는 스즈키 긴시치로가 15일 나가시노성 공방전에서 전사한 오쿠다이라 측 무사 중 한 명으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스네에몬은 죽음을 각오하고 성을 나설 때 "우리 군주를 대신할 옥의 끈을 어찌 끊으랴, 무사의 길"이라는 와카(절명구)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주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무사도의 이상을 상징하는 노래로 여겨지지만, 이 와카가 기록된 『호안 노부나가기』는 스네에몬 사후 약 50년이 지난 에도 시대 초기에 쓰인 책이므로, 실제로 스네에몬 본인이 지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스네에몬의 주군 가문인 오쿠다이라 가에서는 이 전투를 가문의 운을 연 싸움이라는 의미로 "'''개운전'''(開運戦)"이라 불렀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인연을 맺은 오쿠다이라 사다마사는 오카자키의 세습 가신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게 되었다.
스네에몬이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한 행위는 높이 평가되어, 메이지 시대부터 태평양 전쟁 시기까지 일본의 국정교과서에도 소개되었다.
JR 도카이 이다선의 토리이역은 스네에몬이 최후를 맞이한 장소라는 점에서 유래하여 이름 붙여졌다. 또한, 스네에몬의 아내 고향인 쓰쿠데 촌(신시 쓰쿠데)의 간센지에는 오다 노부나가가 스네에몬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전해지는 묘가 남아 있다.
=== 대중 문화 ===
토리이 스네에몬은 여러 창작물에서 다루어졌다.
- '''1913년''': 『심상소학교 국어독본 권 12』[5]
- 심상소학교 6학년용 국어 국정 교과서. 스네에몬의 무용담이 실리면서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에서는 역사 애호가 외 일반 대중에게는 인지도가 낮아졌다. (1937년 발행본에는 해당 내용 없음)
- '''1939년~1945년''': 소설 『신서 태합기』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6]
- 요미우리 신문 연재. 스네에몬의 이야기가 비중 있게 다루어졌다. 1941년 신초샤에서 단행본(전 9권)으로 출간될 때 제5권에 수록되었다.
- '''1942년''': 영화 『토리이 스네에몬』[7]
- 원작: 요시카와 에이지 『신서 태합기』. 감독: 우치다 토무. 주연(토리이 스네에몬 역): 코스기 이사무. 아내 마츠 역: 미토 미츠코, 타카스 다이야타 역: 시무라 타카오, 다케다 가쓰요리 역: 츠키가타 류노스케, 오쿠다이라 사다마사 역: 히가시노 에이지로. 배급: 쇼치쿠.
- '''1979년''': 소설 『불꽃의 무사』 (작가: 이케나미 쇼타로)
- 토리이 스네에몬, 히지카타 토시조, 마미야 린조, 하라다 사노스케 4명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집. 출판사: 카도카와 서점 (현 KADOKAWA), 문고: 카도카와 문고.
- '''1983년''': NHK 대하드라마 『도쿠가와 이에야스』 제19화 "나가시노 전투"
- 배우: 카미죠 츠네히코
- '''2002년''': 텔레비전 프로그램 (버라이어티) 『수요일의 다운타운』 "시험에 나오는 일본사"
- 배우: 야스다 켄
- '''2023년''': NHK 대하드라마 『어떻게 할까 이에야스』 제21화 "나가시노를 구하라!"
- 배우: 오카자키 타이쿠[8]
5. 유적
하층은 자연석을 쌓아 올린 듯한 형태이며, 상층은 키가 큰 화장석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는 스네에몬의 묘가 신쇼지에 세워졌으나, 게이초 8년(1603년)에 간센지(甘泉寺)로 옮겨졌다. 사진 속 신쇼지의 묘비(중앙 뒤쪽)는 호레키 13년(1763년)에 새로 세워진 것이며, 1919년(다이쇼 8년)에 묘역이 대규모로 확장되었다. 고마이누가 지키는 석조 묘소이다.
산 중턱에 자리한 아담한 묘소이다. 오다 노부나가가 세웠다고 전해지는 오래된 고륜탑과 현대적인 안내판이 함께 있다.
참조
[1]
서적
The Samurai
Macmillan Publishing Co., Inc.
1977
[2]
문서
甫庵信長記
[3]
문서
三河物語
[4]
논문
強右衛門と金七郎、二人脱出の説検証
新城地区郷土研究会
[5]
웹사이트
尋常小学国語読本 巻十二
http://dc.lib.hirosh[...]
広島大学
2020-11-26
[6]
문서
新書太閤記 05 第五分冊
[7]
문서
鳥居強右衛門
[8]
웹사이트
"「どうする家康」鳥居強右衛門の壮絶最期にネット号泣…岡崎体育が語る磔刑シーン裏側「満身創痍(笑)」"
https://www.sponichi[...]
スポニチアネックス
2023-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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