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4세 아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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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1792년 구스타브 3세의 뒤를 이어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으나, 1809년 쿠데타로 폐위된 인물이다. 그는 14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삼촌인 칼 13세의 섭정을 거쳐 친정을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에 반감을 품고 반동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나폴레옹 전쟁 시기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했으나 러시아의 핀란드 침공으로 핀란드 전쟁이 발발하고 영토를 상실했다. 결국 1809년 쿠데타로 폐위되어 망명 생활을 하다가 스위스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스웨덴으로 옮겨져 리다르홀멘 교회에 안치되었다. 그는 바덴의 프레데리카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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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4세 아돌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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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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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스웨덴 국왕 |
재위 기간 | 1792년 3월 29일 – 1809년 3월 29일 |
대관식 | 1800년 4월 3일 |
이전 통치자 | 구스타브 3세 |
다음 통치자 | 칼 13세 |
섭정 |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후에 칼 13세)(1792–1796) |
종교 | 루터교 |
왕가 | 홀슈타인-고토르프 |
아버지 | 구스타프 3세 |
어머니 | 소피아 막달레나 |
출생일 | 1778년 11월 1일 |
출생지 | 스톡홀름 궁전, 스웨덴 왕국 |
사망일 | 1837년 2월 7일 |
사망지 | 장크트갈렌, 스위스 연방 |
매장일 | 1884년 5월 29일 |
매장지 | 리다르홀름 교회, 스웨덴-노르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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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 |
배우자 | 바덴의 프레데리카 (1797년 결혼, 1812년 이혼) |
자녀 | 구스타프, 바사 공자 소피아, 바덴 대공비 아말리아 공주 세실리아, 올덴부르크 대공비 |
2. 생애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구스타브 3세 국왕과 왕비 소피아 마그달레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1792년 부왕 구스타브 3세가 암살되자 14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으며, 성년이 될 때까지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섭정을 맡았다. 1797년 프레데리카와 결혼했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반감으로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1800년 노르셰핑에서 의회를 소집하고 대관식을 치렀다.
1805년 나폴레옹에 맞서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으나 전쟁에서 패해 포메라니아를 잃었다. 1807년 틸지트 조약 이후 러시아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에 대륙봉쇄령 참여를 강요했다. 이를 거부하자 1808년 러시아가 핀란드를 침공하여 핀란드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패배로 1809년 프레드릭스함 조약을 맺고 핀란드를 러시아에 할양했으며, 이 지역에 핀란드 대공국이 세워졌다.
잇따른 실정으로 귀족과 군부의 불만이 커져 1809년 3월 쿠데타로 폐위되었고, 숙부 칼이 칼 13세로 즉위했다. 같은 해 독일로 망명했고 1812년 이혼했다. 망명 생활 끝에 1837년 스위스 장크트갈렌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스웨덴 리다르홀름 교회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1778년 11월 1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구스타브 3세 국왕과 왕비 소피아 마그달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3] 그의 어머니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5세 국왕과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영국의 루이세의 딸이었다.
구스타브 아돌프는 네 살 때까지 헤드비그 소피아 폰 로젠과 그녀의 대리인 브리타 에바 셀레스티나 폰 슈타우덴, 마리아 아우로라 우글라의 지도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아버지와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닐스 폰 로젠슈타인의 지도 아래 교육받으며 성실하고 진실한 성격으로 성장했다.[3]
1792년 3월, 아버지 구스타브 3세가 암살당하자[3] 13세의 나이로 스웨덴 국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당시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그의 삼촌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훗날 칼 13세)이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1796년 8월, 숙부인 섭정 칼 공작은 어린 국왕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도록 주선했다. 이는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 황제의 손녀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대공녀와의 결혼을 성사시키려는 의도였다. 약혼식 날짜까지 정해졌으나,[3] 구스타프 4세 아돌프가 알렉산드라가 결혼 후에도 러시아 정교회 신앙을 유지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결국 약혼은 이루어지지 못했다.[3]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은 이 사건이 예카테리나 2세의 죽음을 앞당겼다고 전한다.[3] 당시 사람들은 그의 이러한 완고함이 종교적 신념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 정서적 문제의 가능성은 의심하지 않았다.
1796년 11월, 구스타브 4세는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했다.[4] 그는 곧 인기가 없던 대신 구스타프 아돌프 로이테르홀름을 해임하여 초기에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에 대한 강한 혐오감을 가지고 극단적인 반동 정책을 펼쳤으며, 의회 소집을 피하기 위해 즉위식을 몇 년이나 미루기도 했다.[3]
2. 2. 즉위와 통치
1792년 3월, 아버지 구스타브 3세가 암살당하자 14세의 나이로 스웨덴 국왕에 즉위했다.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칼 13세)이 1796년 11월까지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4] 그는 닐스 폰 로젠슈타인에게 교육을 받아 성실하고 진실한 성격으로 성장했다고 전해진다.[3]섭정 기간 중인 1796년 8월, 숙부 칼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하여 러시아 황제 예카테리나 2세의 손녀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와의 약혼을 추진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가 결혼 후에도 그리스 정교회 신앙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보이자 구스타프 4세가 이를 거부하여 약혼은 성사되지 못했다.[3]
친정을 시작한 구스타프 4세는 인기가 없던 구스타프 아돌프 레우테르홀름 공작을 즉시 해임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4][3] 1797년 10월 31일에는 바덴 변경백 카를 프리드리히의 손녀인 프레데리카 도로테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은 구스타프 4세가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에 대해 가진 반감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과 자코뱅주의를 극도로 혐오하여 신분 의회 소집을 꺼렸고, 이 때문에 즉위식을 몇 년간 미루기도 했다.[3]
그러나 구스타브 3세 시대의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한 재정난과 1798년, 1799년의 대흉작으로 인해 국가 재정이 악화되자, 결국 1800년 3월 노르셰핑에서 의회를 소집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4월 3일에 즉위식을 거행했지만, 의회와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고 이후 다시는 의회를 소집하지 않기로 결심했다.[3]
구스타프 4세의 강한 반(反)프랑스 성향은 외교 정책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1804년 프랑스에서 앙기앵 공작루이 앙투안이 처형되자 이에 분개하여 1805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다.[5] 스웨덴은 네덜란드와 하노버 선제후령 탈환을 목표로 군대를 파병하기로 했으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의 불화로 인해 군대가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떠나지 못했다.[5] 1805년 12월이 되어서야 6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엘베강으로 진군했지만, 이미 동맹군은 울름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참패한 뒤였기에 스웨덴군의 참전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5] 이후 나폴레옹은 스웨덴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으나 구스타프 4세는 이를 모두 거부했고, 결국 프랑스군에게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점령당했다.[5]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807년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르 1세가 틸지트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스웨덴에게 영국에 대항하는 대륙 봉쇄령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5] 구스타프 4세는 이를 거부했지만, 핀란드 방어에는 소홀했다. 결국 1808년 2월 21일, 러시아는 핀란드를 침공하여 핀란드 전쟁(1808-1809)이 발발했다.[5] 스웨덴은 이 전쟁에서 패배하여 핀란드 대부분을 러시아에 빼앗겼다. 1809년 9월 17일 체결된 프레드릭스함 조약에 따라 스웨덴은 동부 영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핀란드를 러시아에 할양했고, 이 지역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핀란드 대공국이 세워졌다.
잇따른 전쟁 패배와 실정으로 구스타프 4세는 국민과 귀족들의 신망을 완전히 잃었다.[3] 결국 1809년 3월 13일, 군부와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왕궁에서 체포하고 그립스홀름 성에 유폐했다.[3] 3월 29일, 구스타프 4세는 자발적으로 퇴위 의사를 밝혔고 아들 구스타프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쿠데타를 승인한 의회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3] 5월 10일, 의회는 구스타프 4세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한다고 선언했다. 6월 5일, 섭정을 맡았던 숙부 칼이 칼 13세로 즉위했다.[3] 같은 해 12월, 구스타프 4세와 그의 가족은 독일로 추방되었다.[3]
2. 3. 나폴레옹 전쟁과 실정
프랑스 혁명과 자코뱅주의에 대한 강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던 구스타프 4세 아돌프는 유럽의 기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깊이 관여했다.[3] 이러한 그의 성향은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에 대한 강한 반감으로 이어졌고, 결국 스웨덴을 위험한 외교적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자코뱅에 대한 극심한 반감 때문에 의회 소집조차 꺼렸으며, 이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1804년 프랑스에서 앙기앵 공작 루이 앙투안이 처형된 사건은 구스타프 4세의 반나폴레옹 감정을 더욱 자극했다. 그는 1805년,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다.[5] 그러나 프로이센과의 갈등 등으로 인해 스웨덴군은 스웨덴령 포메라니아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고,[5] 동맹군이 울름 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스웨덴의 참전은 별다른 의미를 갖지 못했다.[5] 오히려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에게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점령당하는 등 군사적 실패를 겪었다.[5]
1807년, 스웨덴의 전통적인 동맹국이었던 러시아 제국마저 틸지트 조약을 통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면서 스웨덴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스웨덴에게 영국과의 무역을 차단하는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에 동참할 것을 강요했다.[5]
구스타프 4세는 러시아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지만, 이는 곧 재앙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1808년 2월 21일, 러시아는 대륙 봉쇄령 참여를 명분으로 핀란드를 침공하여 핀란드 전쟁(1808년-1809년)이 발발했다.[5] 전쟁 준비가 미흡했던 스웨덴군은 속수무책으로 밀렸고, 불과 몇 달 만에 핀란드 전역이 러시아군에게 점령당했다. 전쟁에서의 참패는 1809년 9월 17일 프레드릭스함 조약 체결로 이어졌고, 스웨덴은 동부 영토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핀란드 전체를 러시아에 할양해야만 했다.[3] 이 지역에는 이후 러시아 황제가 대공을 겸하는 자치령인 핀란드 대공국이 세워졌다.
잇따른 외교적, 군사적 실패, 특히 오랜 기간 스웨덴 영토였던 핀란드의 상실은 구스타프 4세에 대한 국내의 불만을 극에 달하게 만들었다.[3] 결국 1809년 3월 13일, 군부와 귀족들이 주도한 1809년 쿠데타가 발생했다. 구스타프 4세는 궁전에서 체포되어 그립스홀름 성에 유폐되었다.[3] 그는 3월 29일 자발적으로 퇴위 의사를 밝혔지만, 스웨덴 의회는 5월 10일 구스타프 4세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까지 박탈한다고 선언했다.[3] 이후 그의 숙부인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이 임시 정부 수반을 거쳐 6월 6일 칼 13세로 즉위했다.[3]
2. 4. 폐위와 망명
1805년 제3차 대프랑스 동맹에 가담했으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에 의해 스웨덴령 포메라니아를 점령당하고, 1807년 틸지트 조약 이후 러시아의 압박에도 대륙봉쇄령 참여를 거부하면서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5] 결국 1808년 2월 21일 러시아가 핀란드를 침공하여 핀란드 전쟁이 발발했고, 스웨덴은 패배하여 1809년 프레드릭스함 조약으로 국토 동부의 1/3인 핀란드를 러시아 제국에 할양해야 했다. 이로써 핀란드에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핀란드 대공국이 수립되었다.[5]
전쟁 패배와 영토 상실로 인해 구스타프 4세는 인기를 완전히 잃었으며[3], 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쿠데타 음모가 진행되었다. 1809년 3월 7일, 게오르크 아들레르스파르 중령은 베름란드에 주둔한 서부군 일부를 이끌고 칼스타드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톡홀름으로 진격했다. 국왕이 남부 스코네의 충성스러운 군대와 합류하는 것을 막기 위해, 1809년 3월 13일 칼 요한 아들레르크로이츠가 이끄는 7명의 공모자들이 왕궁에 침입하여 국왕을 체포했다. 구스타프 4세와 그의 가족은 그립스홀름 성에 감금되었다.[3] 국왕의 삼촌인 칼 공작은 임시 정부 수립에 동의하고 지도자가 되었으며, 급히 소집된 신분 의회는 이 1809년 쿠데타를 공식적으로 승인했다.[3]
1809년 3월 29일, 구스타프 4세는 아들 구스타프 왕세자를 위해 왕위를 지키고자 자발적으로 퇴위했다. 그러나 군대가 장악한 의회는 5월 10일, 구스타프 4세뿐만 아니라 그의 가문 전체가 왕위 계승 자격을 상실했다고 선언했다.[3] 이는 표면적으로는 구스타프 4세의 출생에 대한 의혹(사생아설)을 근거로 했지만, 실제로는 왕위를 계승할 아들이 훗날 아버지의 폐위에 대해 복수할 것을 두려워한 쿠데타 세력의 의도가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6월 5일, 칼 공작은 새로운 자유주의적 1809년 스웨덴 헌법을 받아들인 후 칼 13세로 즉위했고, 다음 날 의회에서 헌법이 비준되었다.[3]
1809년 12월, 구스타프 4세와 그의 가족은 독일로 추방되었다.[3] 그는 망명 생활 동안 '고토르프 백작', '홀슈타인-오이틴 공작', '호른 백작' 등 여러 칭호를 사용했으며, 나중에는 '구스타프손 대령'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했다.[3] 1812년에는 아내 프레데리카와 이혼하고 자녀들과도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3] 말년에는 스위스 장크트갈렌의 한 작은 호텔에서 큰 고독과 빈곤 속에서 지내다가[3], 1837년 2월 7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다.[3] 그의 시신은 처음에 모라비아에 묻혔으나, 오스카르 2세 국왕의 제안으로 스웨덴으로 옮겨져 스톡홀름의 리다르홀름 교회에 안치되었다.[3]
3. 가족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구스타브 3세 국왕과 그의 아내인 소피아 마그달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소피아 마그달레나는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5세 국왕과 그의 첫 번째 아내인 영국의 루이세의 딸이다.
1797년 10월 31일, 바덴의 카를 루트비히 대공세자의 딸이자 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의 손녀인 프레데리카 도로테아 빌헬미나와 결혼했다.[3] 이 결혼은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러시아 제국과 프랑스 공화국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에 성사된 측면이 있다.[3] 1812년에 두 사람은 이혼했다.
프레데리카와의 사이에서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생몰년 | 배우자 및 특이사항 |
---|---|---|
구스타프 | 1799년 11월 9일 ~ 1877년 | 1809년 이후 바사 공 구스타프 구스타프손으로 알려짐. 오스트리아 군 장교로 복무. 바덴의 루이제 아멜리에 공주와 결혼, 아들은 유아기 사망, 딸 카롤라는 작센의 알베르트 국왕과 결혼, 자녀 없음. |
소피아 빌헬미나 | 1801년 5월 21일 ~ 1865년 | 바덴 대공 레오폴트와 결혼. 손녀 바덴의 빅토리아는 베르나도트 왕가의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와 결혼. (현재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는 구스타프 4세의 후손) |
카를 구스타프 | 1802년 12월 2일 ~ 1805년 9월 10일 | 핀란드 대공. 유아기 사망. |
아말리아 | 1805년 2월 22일 ~ 1853년 8월 31일 | 미혼, 자녀 없음. |
세실리아 | 1807년 6월 22일 ~ 1844년 | 올덴부르크 대공 아우구스트와 결혼. |
이혼 후, 구스타브 아돌프는 마리아 슐레겔을 포함한 여러 정부를 두었으며, 마리아 슐레겔과의 사이에서 아돌프 구스타프손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참조
[1]
서적
Debrett's Kings and Queens of Europe
[2]
서적
A History of Sweden from the Earliest Times to the Present Day
https://archive.org/[...]
[3]
간행물
Gustavus IV.
Cite EB1911
[4]
간행물
Charles XIII.
Cite EB1911
[5]
간행물
Sweden
Cite EB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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