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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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대화는 대한민국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이다.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3년 OB 베어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며, 해태 타이거즈, LG 트윈스, 쌍방울 레이더스를 거치며 15년간 선수로 활동했다. 통산 8번의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고, 1990년에는 타격왕을 차지했다. 은퇴 후에는 동국대학교 감독, 삼성 라이온즈, KIA 타이거즈, 한화 이글스 코치를 역임했으며,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한화 이글스 감독을 맡았다. 2015년부터는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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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대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선수 정보 | |
이름 | 한대화 |
한글 표기 | 한대화 |
한자 표기 | 韓大化 |
로마자 표기 | Han Daehwa |
출생일 | 1960년 7월 8일 |
출생지 | 대전광역시 동구 |
신장 | 176cm |
체중 | 82kg |
포지션 | 3루수 |
타석 | 우타 |
투구 | 우투 |
프로 입단 정보 | |
데뷔 리그 | KBO |
데뷔 년도 | 1983년 |
데뷔 팀 | OB 베어스 |
드래프트 순위 | 1차 지명 |
최종 리그 | KBO |
최종 년도 | 1997년 |
최종 팀 | 쌍방울 레이더스 |
선수 경력 | |
선수 | OB 베어스 (1983년–1985년) 해태 타이거즈 (1986년–1993년) LG 트윈스 (1994년–1996년) 쌍방울 레이더스 (1997년) |
통계 | |
리그 | KBO |
타율 | .279 |
홈런 | 163 |
타점 | 712 |
안타 | 1,190 |
수상 경력 | |
주요 수상 | 8× KBO 골든 글러브 수상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3년, 1994년) 6× 한국시리즈 우승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1991년, 1994년) 1988년 KBO 올스타전 MVP 1990년 KBO 타격왕 |
코치 및 감독 경력 | |
코치 | 삼성 라이온즈 (2003년–2009년) KIA 타이거즈 (2013년–2014년) |
감독 |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1998년 ~ 2003년) 한화 이글스 (2010년–2012년) |
기타 정보 | |
첫 출장 | KBO / 1983년 4월 2일 동대문 대 MBC전 |
마지막 경기 | KBO / 1997년 6월 28일 전주 대 OB전 |
연봉 (2013년) | 1억 5,000만 원 |
대표 국가 | 대한민국 |
야구 월드컵 | 1982년 서울 |
2. 아마추어 선수 시절
대전 동구 출신으로 동국대학교에 진학했다. 동국대학교 4학년이던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대회에 참가하여, 잠실야구장에서 벌어진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2-2 동점 상황에서 좌측 폴대를 맞추는 3점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했다. 원래 포지션은 유격수였지만 김재박이 버티고 있었던 탓에[2] 3루수로 뛰었다.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야구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한대화는 동국대학교를 졸업하고 1982년 세계 야구 선수권 대회(야구 월드컵)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으로 참가하여 일본과의 결승전에서 끝내기 홈런을 치는 등 활약하여 금메달을 획득했다.
3. 프로 야구 선수 시절
1983년 OB 베어스에 입단하여 프로 야구 선수 생활을 시작했으나, 첫 경기에서 3타점을 기록하며 인상적인 데뷔를 한 것과는 달리 간염과 김성근 감독과의 불화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86년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1]한 후에는 '해결사'라는 별명을 얻으며 팀의 한국시리즈 4연패에 기여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해태 타이거즈에서 6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
1993년 12월 4일 LG 트윈스로 이적하여[5] 1994년 팀의 우승에 기여하고, 개인 통산 8번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로 이적했으나, 김성근 감독과의 불화로 43경기 출전에 그치고 은퇴했다. 선수 시절 통산 8번의 KBO 골든 글러브를 수상했고, 11번의 KBO 올스타전에 출전했다. 1988년 KBO 리그 올스타전 최우수 선수, 1990년 KBO 리그 타격왕을 차지하기도 했다.
3. 1. OB 베어스 (1983~1985)
1983년 OB 베어스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하였으며, 아마추어 시절과 마찬가지로 유격수 포지션이었다.[3] 프로 데뷔 첫 경기에서 3점 홈런을 기록하는 등 인상적인 데뷔를 했으나, 김성근 감독과의 불화, 간염 등으로 인해 기대만큼 활약하지는 못했다.[4]
3. 2. 해태 타이거즈 (1986~1993)
1986년 황기선, 양승호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해태 타이거즈로 이적했다.[1] 이적 후 뛰어난 활약으로 역대 최고의 3루수 중 한 명으로 꼽혔다. 1986년 이적 첫 해부터 해태 타이거즈는 리그 4연패를 달성했다. 김봉연을 잇는 4번 타자로 김성한, 이순철 등과 함께 "KKK포"를 구축하여 6번의 우승을 이끌었다. 언론에서 '해결사'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고, '승리 타점' 부문에서 독보적인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선동열 등판 시 맹활약하여 투타에서 단짝을 이루었다.[4]
해태 이적 후 한대화는 맹타를 휘두른 반면, 양승호와 황기선은 OB 베어스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해 OB에게는 손해가 되는 트레이드가 되었다.
3. 3. LG 트윈스 (1994~1996)
1993년 12월 4일에 3대 2 트레이드를 통해 LG 트윈스로 이적했다.[5] 해태 타이거즈가 지명권을 갖고 있었던 허문회와 김봉재의 지명권을 LG가 받는 대신, 한대화, 신동수가 LG 트윈스로 가고 김상훈과 이병훈이 해태 타이거즈로 오는 트레이드였다. 주전 3루수로 활동하면서 1994년 LG 트윈스의 2번째 우승에 기여하고 골든 글러브도 받았다.(총 개인 우승 수 7차례)[5] 1994년의 우승 이후 하향 곡선을 그리며 1996년 시즌 후 쌍방울 레이더스의 투수 신영균을 상대로 트레이드되었다.[6]
3. 4. 쌍방울 레이더스 (1997)
韓大化중국어는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되어 43경기에 출장했으나, OB 시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성근 감독과 다시 갈등을 겪었다.[7] 2군으로 강등된 후, 3개월치 월급을 선납받고 그 해 시즌 후 팀에서 임의탈퇴 공시되며 현역에서 은퇴했다.[7]
4. 지도자 경력
1997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한대화는 지도자 경력을 시작했다. 2003년까지 모교인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으며, 이는 프로 선수 출신 최초로 대학 팀 감독을 맡게 된 것이었다. 2004년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로 부임할 때 삼성 라이온즈 타격 코치로 합류했다. 2005년 선동열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자, 2009년까지 수석코치를 맡았다.
2009년 9월 24일 김인식 감독의 후임으로 연고 팀 한화 이글스 제8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한화 이글스 역사상 최초로 연고지인 대전 출신 감독이었다. 2010년을 최하위로 끝냈고, 이듬해 2011년에는 외국인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어 공동 6위로 시즌을 마감하여 탈꼴찌에 성공했다. 그러나 2012년 메이저 리거 박찬호와 지바 롯데 마린스의 김태균, FA로 송신영을 영입하며 4강 전력으로 예상되었으나 리빌딩 실패의 악재가 겹쳐 최하위를 전전하게 되었고, 결국 계약 만료를 앞두고 2012년 8월 28일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2012년 시즌을 마치고 선동열 감독의 요청으로 친정 팀 KIA 타이거즈의 2군 총괄코치로 임명되었다. 2군 총괄코치는 실질적으로 2군 감독과 같다. 2013년 시즌 후 이순철의 뒤를 이어 수석코치에 올랐다. 2014 시즌 후 선동열 감독이 안치홍과의 갈등으로 사퇴하자, 한대화 역시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동반 사퇴했다.
4. 1. 동국대학교 감독 (1998~2003)
1997년 현역에서 은퇴한 후 2003년까지 모교인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았는데, 이는 프로 선수 출신 최초로 대학 팀 감독을 맡게 된 것이었다.[8] 1998년 ~ 2002년 사이 동국대 야구부에서 많은 선수들이 그의 지도를 받았다. 한대화가 삼성에서 프로 코치 생활을 시작한 이후, 이들 동문들은 프로 무대에서 넓은 인맥을 형성했다. 박한이[9], 박정권[10], 송광민, 이여상, 강귀태, 서승화, 박정환, 정원석, 유한준 등이 대표적이다. 이여상의 경우 프로 지명을 받지 못하자 직접 프로 진출을 돕기도 했다.[11] 정원석은 2009년 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된 후, KIA 타이거즈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다가 이범호의 이적으로 인한 내야진 공백을 메우려던 한대화 감독의 부름을 받고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여 주전 선수가 되었다.[12] 박정권은 대학 시절 한대화 감독에게 가능성을 인정받았고, 2009년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의 해결사로 활약하며 강타자로 성장했다.4. 2. 삼성 라이온즈 코치 (2004~2009)
2004년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코치 연수를 마치고 삼성 라이온즈 수석코치로 부임할 때 삼성 라이온즈 타격 코치로 합류했다.[1]2005년 선동열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승격되자, 2009년까지 수석코치를 맡았다.[3] 이후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취임했으며, 프로 야구 선수 중 그의 제자로는 박한이, 박정권 등이 있다.[2]
4. 3. 한화 이글스 감독 (2009~2012)
2009년 삼성 수석코치로 활동하다가 시즌 종료 후 계약이 만료된 김인식 감독의 후임으로 2009년 9월 24일 연고 팀 한화 이글스 제8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13] 한화 이글스 역사상 최초로 연고지인 대전 출신 감독이었다. 한화 감독 취임 이후 정원석, 이대수 등을 영입하여 리빌딩을 꾀했다. 그러나 동국대학교 감독 시절 애제자였던 3루수 송광민이 프런트의 행정 미숙으로 시즌 중 갑작스럽게 군에 입대했고, 이미 경찰청에서 병역 의무를 다한 외야수 최진행을 제외하면 당장 군에 입대해야 할 젊은 선수들이 많아지게 되어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결국 2010년을 최하위로 끝냈고, 이듬해 일본에서 돌아온 이범호마저 놓쳐 많은 전문가와 팬들은 2011년 성적을 비관적으로 예상했다.2011년 시작 후, 4월에는 리그 최하위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디시인사이드의 국내 야구 갤러리와 한화 이글스 갤러리의 유저들은 한대화를 '돌대화'라는 비꼬는 별명으로 불렀다. 하지만 2011년 5월 12일 잠실 LG전에서 전현태와 LG 트윈스의 포수 조인성의 홈 충돌 당시, 주심의 홈 아웃 판정에 한대화 감독이 심판에게 욕설을 한 것이 알려지면서부터 팀 분위기가 급반전되어 5월에 9승 8패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2011년 시즌 공동 6위로 마감, 탈꼴찌에 성공했다. 그 때 그가 한 욕설은 한화 이글스의 응원 구호가 되었다.[14]
2012년 메이저 리거 박찬호와 지바 롯데 마린스의 김태균, FA로 송신영을 영입하며 전문가들 사이에서 4강 전력으로 예상되었으나 유창식, 이여상, 송신영의 부진 등 리빌딩 실패의 악재가 겹쳐 최하위를 전전하게 되었다. 많은 네티즌들이 한대화 감독을 '돌대화' 라는 모욕적인 별명으로 부르며 사퇴를 요구했으며, 결국 계약 만료를 앞두고 2012년 8월 28일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의리를 중요하게 여겨 임기를 최대한 보장해 주려 했던 한화그룹의 입장으로 보았을 때, 한대화 감독의 경질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2012년 8월 28일 구단 측에서는 경질이 아닌 자진 사퇴로 공식 발표하였다. 그의 자리는 한용덕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
4. 4. KIA 타이거즈 코치 (2013~2014)
2012년 시즌을 마치고 선동열 감독의 요청으로 친정 팀 KIA 타이거즈의 2군 총괄코치로 임명되었다. 2군 총괄코치는 실질적으로 2군 감독과 같다.[9] 2013년 시즌 후 이순철의 뒤를 이어 수석코치에 올랐다.[10]2014 시즌 후 선동열 감독이 안치홍과의 갈등으로 사퇴하자, 한대화 역시 성적 부진에 책임을 지고 동반 사퇴했다.[11]
5. 행정가 경력
2015년부터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선임되어 행정가로 활동하고 있다.[15]
6. 수상 경력
7. 주요 기록
8. 통산 기록
실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