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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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방언은 고려 말의 무신으로, 홍건적 격퇴, 명나라와의 외교, 왜구 방어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1363년 홍건적 격퇴에 기여하여 2등공신이 되었으며, 명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나 폭풍으로 인해 실패했다. 이후 제주도에서 말 징발에 실패하여 유배되었고, 왜구의 침입에 맞서 여러 차례 승리하며 군사적 능력을 발휘했다. 말년에는 서북면도체찰사, 안주도상원수 등을 역임하며 북방 방비에 힘썼다.
한방언은 고려 말 공민왕과 우왕 대에 활동했던 주요 무신이자 관리이다.
2. 생애
1363년(공민왕 12년)에는 전임 군기감으로서 홍건적으로부터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1] 이후 명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는데, 1371년(공민왕 20년) 밀직부사로서 명나라에 신년 하례 사신으로 임명되었으나 배가 폭풍으로 침몰하여 실패하였고,[2] 이듬해인 1372년 다시 파견되어 임무를 완수했다.[3]
1374년(공민왕 23년)에는 문하평리로서 명나라의 요구에 따라 탐라(현재의 제주도)에서 군마 2천 필을 징발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현지 목호(牧胡)들의 저항으로 3백 필만 확보하는 데 그쳤다.[4] 이 일로 명나라 사신의 요구에 의해 장형을 받고 유배되었으며,[5] 이는 이후 최영 등이 목호들을 토벌하는 목호의 난으로 이어졌다.
우왕 즉위 후 복직하여 양광도도순문사, 안주부원수, 판밀직, 문하평리 등 여러 군사 및 행정 요직을 역임했다.[6] 이 시기 그는 여러 차례 왜구 토벌에 나서 영광, 광주, 옥과현, 진주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7][8][9][10] 죽령을 넘어 단양군과 안동 지역을 침략한 왜구를 격퇴하기도 했다.[11] 또한 명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1382년(우왕 8년) 서북면도체찰사 겸 안주도상원수, 1383년(우왕 9년) 판개성부사 겸 상원수 등을 맡아 북방 국경 방어의 중책을 수행했다.[11]
2. 1. 공민왕 대 활동
(내용 없음)
2. 1. 1. 홍건적 격퇴 및 대명 외교
공민왕 12년(1363년) 전임 군기감으로서 홍건적의 침입으로부터 개경을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위위윤 염흥방, 상호군 김유, 내부령 이원계, 소부윤 김장주, 호군 조인벽, 전 호군 김사혁 등과 함께 2등 공신에 책봉되었다.[1]
공민왕 20년(1371년) 9월, 밀직부사로서 명에 신년 하례를 위한 사신으로 임명되었다. 앞서 8월에 임명된 동지밀직사사 정사도는 배가 고장 나 출발하지 못했고, 한방언 역시 그가 탄 배가 폭풍으로 침몰하여 명으로 가지 못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11월 명의 중서성에 자문을 보내, 명의 요동도사에게 한방언이 요동을 거쳐 육로로 수도인 남경으로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줄 것을 요청하였다.[2] 한방언은 다음 해인 공민왕 21년(1372년) 2월 19일 명의 수도에 도착하여 고려의 표문과 방물을 바쳤다.[3]
공민왕 23년(1374년) 4월, 명나라에서 예부주사 임밀과 자목대사 채빈을 고려에 보내 북원 원정에 필요한 말 2천 필을 고려의 탐라(현재의 제주도)에서 징발해 바칠 것을 요구했다. 고려 조정은 문하평리였던 한방언을 제주로 보내 말 2천 필을 징발하도록 명했으나, 7월 제주에 도착한 한방언에게 당시 제주 목장을 관리하던 원나라의 목호(牧胡)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은 세조 황제(쿠빌라이 칸)께서 기르신 말을 명나라에 바칠 수 없다며 300필만 내주었다.[4] 명나라 사신 임밀은 제주에서 바친 말의 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방언의 처형을 요구했다. 결국 고려 조정은 8월 19일 한방언에게 장형을 가하고 유배를 보냈으며,[5] 이후 최영 등을 제주에 파견하여 목호들을 진압하였다(목호의 난).
2. 1. 2. 목호의 난 진압
공민왕 23년(1374년) 4월, 명은 예부주사 임밀과 자목대사 채빈을 고려에 보내 북원 원정에 필요한 말 2천 필을 탐라(제주도)에서 징발해 바칠 것을 요구했다.[4] 고려 조정은 이에 당시 문하평리였던 한방언을 제주로 보내 말 2천 필을 징발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7월 12일 제주에 도착한 한방언에게, 제주 목장을 관리하던 원나라 목호(牧胡)인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은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방목한 말을 명나라에 줄 수 없다며 3백 필만 내주었다.[4] 명나라 사신 임밀은 징발한 말의 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방언의 처형을 요구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8월 19일 한방언에게 장형을 가하고 유배를 보냈으며,[5] 이후 최영 등을 파견하여 목호들을 토벌했다(목호의 난).
2. 2. 우왕 대 활동
고려 우왕 즉위 후, 한방언은 왜구 격퇴와 북방 방비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375년(우왕 원년)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로서 왜구 토벌에 나섰다가 패배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으나,[6] 곧 복직하여 여러 차례 군사 요직을 거치며 왜구 격퇴에 공을 세웠다.[7][8][10] 또한 명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 겸 안주도상원수(安州道上元帥),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겸 상원수 등을 역임하며 북방 방비를 책임지는 중책을 맡았다.[11] 이 시기에도 왜구 토벌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여 전과를 올렸다.[11]
2. 2. 1. 왜구 격퇴
1375년 (우왕 원년) 3월 왜구가 경양현(慶陽縣)에 쳐들어 왔을 때 한방언은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로써 왜구에 패하였고, 이로 인해 같은 해 10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양광도안무사(楊廣道安撫使) 정비(鄭庇)와 함께 수자리 사는 병졸(戍卒)로 편배되었다.[6]
1376년 (우왕 2년) 9월 다시 복직하여 안주부원수(安州副元帥)가 되었고, 이듬해인 1377년 (우왕 3년) 6월 판밀직(判密直)으로 승진하여 안주원수(安州元帥)가 되었다.
1378년 (우왕 4년) 9월에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양광도조전원수(楊廣道助戰元帥)가 되었으며, 왜구가 영광(靈光) · 광주(光州) · 동복(同福) 등지를 침략하였을 때, 도순문사(都巡問使) 지용기(池湧奇)와 전라도조전원수 판밀직 이림(李琳) 등과 함께 옥과현(玉果縣)까지 추격하여 왜적을 미라사(彌羅寺)로 몰아넣고 화공을 가하여 섬멸하였다.[7] 또한 같은 해 10월에도 옥주(沃州) · 진동(珍同) · 회덕(懷德) · 청산(靑山) · 임주(林州)로 쳐들어온 왜구를 양광도원수(楊廣道元帥)로써 쳐서 2급을 베고 말 열 필을 노획하였다.[8]
1379년 (우왕 5년) 4월 한방언은 다시 양광도조전원수로 임명되었고 양백연(楊伯淵), 홍인계(洪仁桂)와 함께 왜구를 막으러 나서서[9] 5월에 진주(晉州)를 공격한 왜구를 반성현(班城縣)에서 격퇴시켰다. 1380년 (우왕 6년) 안주도원수(安州道元帥)로 임명되었다.[10]
왜구 진압에도 지속적으로 나서서, 1382년 (우왕 8년) 4월에는 죽령(竹嶺)을 넘어 단양군(丹陽郡)을 노략질하던 왜구를 변안열(邊安烈)과 함께 쳐서 무너뜨리고 80여 명의 목을 베었으며 말 200여 필을 노획하는 공을 세웠다. 이어 5월에 다시 안동에서 왜구 30명의 목을 베고 말 60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1383년 (우왕 9년) 11월에는 청풍군(淸風郡)을 노략질한 왜구를 도순찰사(都巡察使)로써 금곡촌(金谷村)에서 싸워 이기고, 8명의 목을 베었다.[11]
2. 2. 2. 대명 관계 악화 및 북방 방비
공민왕 20년(1371년) 9월, 밀직부사 한방언은 명(明)에 신년 하례 사신으로 임명되었으나, 배가 폭풍으로 침몰하여 가지 못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11월 명의 중서성에 자문을 보내, 한방언이 요동도사(遼東都司)를 경유하여 육로로 남경에 갈 수 있도록 요청했다.[2] 한방언은 이듬해인 공민왕 21년(1372년) 2월 19일 명나라 수도에 도착하여 고려의 표문과 방물을 바쳤다.[3]
공민왕 23년(1374년) 4월, 명은 예부주사 임밀과 자목대사 채빈을 고려에 보내 북원 원정에 필요한 말 2천 필을 탐라(제주도)에서 징발해 바칠 것을 요구했다. 고려 조정은 문하평리 한방언을 제주로 보내 이를 처리하게 했으나, 제주 목장을 관리하던 원나라 목호(牧胡)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은 쿠빌라이 칸이 기르던 말이라며 3백 필만 내주었다.[4] 명나라 사신 임밀은 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방언의 처형을 요구했고, 고려 조정은 8월 19일 한방언에게 장형을 가하고 유배 보냈다.[5] 이후 최영 등이 제주로 파견되어 목호들을 진압했다(목호의 난).
명과의 관계가 악화되던 우왕 8년(1382년) 2월, 한방언은 문하평리로서 서북면도체찰사(西北面都體察使) 겸 안주도상원수(安州道上元帥)에 임명되어, 전 지문하사상의(知門下事商議) 도안무사(都安撫使) 겸 안주도부원수 김용휘(金用輝)와 함께 명의 정요위(定遼衛) 병력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우왕 9년(1383년) 8월에는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로서 상원수가 되어 북방 방비를 책임졌다.
2. 3. 주요 관직
공민왕 12년(1363년)에는 전임 군기감으로서 홍건적의 침입으로부터 개경을 수복한 공로를 인정받아, 위위윤 염흥방, 상호군 김유, 내부령 이원계, 소부윤 김장주, 호군 조인벽, 전 호군 김사혁 등과 함께 2등 공신에 책록되었다.[1]
1371년(공민왕 20년) 9월, 밀직부사로서 명에 신년 하례 사신으로 임명되었으나, 타고 가던 배가 폭풍으로 침몰하여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다. 이에 고려 조정은 같은 해 11월 명의 중서성에 자문을 보내, 한방언이 요동도사를 통해 육로로 명의 수도(남경)로 갈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2] 이듬해인 1372년(공민왕 21년) 2월 19일, 한방언은 명의 수도에 도착하여 고려의 표문과 방물을 바쳤다.[3]
1374년(공민왕 23년) 4월, 명나라가 북원 원정에 필요한 말 2천 필을 고려의 탐라(제주도)에서 징발해 바칠 것을 요구하자, 당시 문하평리였던 한방언이 제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제주 목장을 관리하던 원나라 목호(牧胡) 석질리필사, 초고독불화, 관음보 등은 쿠빌라이 칸이 방목한 말을 명나라에 줄 수 없다며 3백 필만 내주었다.[4] 이에 명나라 사신 임밀은 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한방언의 처형을 요구했고, 고려 조정은 1374년 8월 19일 한방언에게 장형을 가한 뒤 유배 보냈다.[5] 이 사건은 이후 최영 등이 제주로 파견되어 목호들을 진압하는 목호의 난으로 이어졌다.
우왕 원년(1375년) 3월, 양광도도순문사로서 경양현에 침입한 왜구를 막으러 나섰으나 패배하였다. 이로 인해 10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양광도안무사 정비와 함께 수자리 군사(戍卒)로 강등되었다.[6] 그러나 1376년(우왕 2년) 9월 다시 복직하여 안주부원수가 되었고, 1377년(우왕 3년) 6월에는 판밀직으로 승진하여 안주원수를 맡았다.
1378년(우왕 4년) 9월에는 문하평리로서 양광도조전원수가 되어 왜구 토벌에 나섰다. 영광, 광주, 동복 등지를 침략한 왜구를 도순문사 지용기, 전라도조전원수 판밀직 이림 등과 함께 옥과현까지 추격하여 미라사(彌羅寺)에서 화공으로 섬멸하였다.[7] 같은 해 10월, 양광도원수로서 옥주, 진동, 회덕, 청산, 임주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여 2명의 목을 베고 말 10필을 노획했다.[8] 1379년(우왕 5년) 4월 다시 양광도조전원수로 임명되어 양백연, 홍인계와 함께 왜구를 방어했으며,[9] 5월에는 진주를 공격한 왜구를 반성현에서 격퇴했다. 1380년(우왕 6년)에는 안주도원수로 임명되었다.[10]
명과의 관계가 악화되던 1382년(우왕 8년) 2월, 문하평리로서 서북면도체찰사 겸 안주도상원수로 임명되어, 전 지문하사상의 도안무사 겸 안주도부원수 김용휘와 함께 명의 정요위 병력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왜구 진압에도 나서, 4월에는 변안열과 함께 죽령을 넘어 단양군을 노략질하던 왜구를 격파하여 80여 명의 목을 베고 말 200여 필을 노획했으며, 5월에는 안동에서 왜구 30명의 목을 베고 말 60필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1383년(우왕 9년) 8월에는 판개성부사로서 상원수가 되어 북방 방비를 담당했으며, 11월에는 도순찰사로서 청풍군을 노략질한 왜구를 금곡촌에서 싸워 이기고 8명의 목을 베었다.[11]
참조
[1]
서적
고려사
[2]
서적
고려사
[3]
서적
대명태조고황제실록
[4]
서적
고려사
[5]
서적
고려사
[6]
서적
고려사
[7]
서적
고려사
[8]
서적
고려사
[9]
서적
고려사
[10]
서적
고려사
[11]
서적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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