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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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혁현은 청나라 도광제의 아들이자 광서제의 아버지이며, 동치제의 이복 숙부이자 이모부이다. 선통제의 친할아버지이기도 하다. 1843년 순군왕에 봉해졌으며, 신유정변을 통해 황실 최고위직에 올랐다. 동치제 사후 서태후의 섭정 아래 차남 재첨을 광서제로 즉위시켰고, 이후 해군을 통괄했으나 이화원 건설에 해군 비용을 유용하여 청일 전쟁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말년에는 서태후를 비롯한 보수파와 혁신파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정 내 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했다. 사후 황제본생고라는 존칭을 받았으며, 묘는 베이징의 관광 명소가 되었고, 옛 저택은 순친왕부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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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이훤 |
한자 표기 | 奕譞 |
로마자 표기 | I Hwan |
작위 | 순친왕 |
시호 | 순현친왕(醇賢親王) |
출생 | 1840년 10월 16일 (도광 20년 9월 21일) |
출생지 | 베이징 |
사망 | 1891년 1월 1일 (광서 16년 11월 21일) |
사망지 | 순친왕부 |
묻힌 곳 | 서산 묘고봉 |
아버지 | 도광제 |
어머니 | 장순황귀비 |
배우자 | 예허나라씨 (순현친왕비) (1860년 결혼, 1891년 사망) 류갸씨 (1883년 결혼, 1891년 사망) |
자녀 | 광서제 자이펑, 순친왕 자이쉰 자이타오 |
가문 | 아이신 교로 씨 |
작위 계승 | |
작위 | 순친왕 |
재위 기간 | 1872년 – 1891년 |
후계자 | 자이펑 |
2. 가계 및 초기 생애
1843년 3세의 나이로 순군왕(醇郡王)에 책봉되고 1850년 2월 순친왕(醇親王)에 책봉된 그는 11세 때였던 1851년에 당시 10세였던 예허나라 완전(葉赫那拉 婉貞)과 결혼하여 본부인으로 삼았다. 이후 측실 2명을 더 거느려 슬하에 총 7남 3녀를 두었다.[3]
1861년 보군통령으로 부임, 형 공친왕 등과 함께 함풍제의 고명대신 8명을 실각시키는 정변(신유정변)에 참여했다. 그의 처 여허나라 완전의 언니는 서태후로, 서태후는 처형이면서 형수가 된다. 아들 재첨이 서태후의 양자로서 차기 황제에 내정됐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을 받고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일설에는 실신했다는 설도 있다. 광서제 즉위 후 그는 철저하게 서태후에게 예속되었다. 광서제가 친정을 선포하자 서태후를 두려워하여 서태후의 섭정을 연장하는 청을 올리기도 했다. 1881년 동태후가 죽자 독살설이 유포되었는데, 그는 광서제도 독살당할까봐 두려워하여 1885년 북양 해군의 지휘권을 받았어도 계속 서태후의 눈치를 봤다. 만년에는 이화원의 공사에 참여하여 완공을 보았다. 시호는 현(賢)으로 순현친왕이 된다.
그는 생전에 황실에서 제안한 황제본생부(皇帝本生父)라는 칭호를 완강히 사양하였고, 사후에야 황제본생고라는 존칭을 공식적으로 얻게 된다.
1872년 ''군왕'' (2등급 친왕)에서 ''친왕'' (1등급 친왕)으로 승진하여 "일등 순친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1874년 동치제에 대한 부적절한 행동으로 견책되어 공친왕 등과 함께 면직되었지만, 태후들의 중재로 복직되었다.[4]
1875년 동치제가 사망하자, 서태후는 여동생을 어머니로 둔 혁훤의 차남 재첨을 동치제의 아들로 즉위시켰다(광서제). 혁훤은 친아들의 즉위와 함께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1884년 청불 전쟁의 처리를 둘러싸고 공친왕이 군기대신에서 파면되자 대신 기용되어 총리 해군 사무 아문 대신에도 임명되어 해군을 통괄하고, 이홍장과 경친왕혁광을 보좌역으로 활동했다.
해군 아문 대신 시절 해군 비용을 이화원 건설 비용으로 유용한 것은 악명이 높으며, 청의 주력 해군이었던 북양함대는 10년 동안 무기 갱신을 하지 못하고 함대 추가 구매도 불가능해져, 청일 전쟁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겸손하게 행동하여 서태후와 영록 등 보수파(후당)뿐만 아니라, 광서제의 측근 옹동화 등 혁신파(제당)와도 친교를 맺어 양 파의 충돌을 막는 완충 지대 역할을 했지만, 혁훤의 죽음으로 대립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청일 전쟁의 패배로 양 파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어 이후의 정쟁으로 이어졌다.[4]
부인 | 자녀 |
---|---|
순현 친왕 복진 완전(醇賢親王福晉 葉赫那拉氏) | |
얀자 씨(側福晉 顏扎氏) | 없음 |
최연(側福晉 劉佳氏 翠妍) | |
다니우(側福晉 李佳氏) |
2. 1. 가계
혁현은 청나라 제11대 황제 광서제(光緖帝)와 황족 순친왕(醇親王)의 아버지이며, 청나라 제10대 황제 동치제(同治帝)에게는 이복 숙부이자 이모부가 되고, 청나라 제12대 황제이자 최후의 황제인 선통제 푸이(宣統帝 溥儀)의 친할아버지이기도 하다.둘째 아들 광서제의 황후인 효정경황후(孝定景皇后)는 그의 처조카딸이자 며느리이다. 혁현은 도광제의 일곱 번째 아들로 아이신 교로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우야 씨족 출신의 장순 황귀비였다. 그가 태어난 지 4개월 만에, "임 귀인"으로 승진한 우야 부인은 "임 빈"의 지위로 격상되었다. 우야 부인의 급격한 승진은 계속되어 1842년과 1847년에 각각 "임 비"와 "임 귀비"로 승진했다. 동치제는 그녀에게 "장순 황귀비"라는 사후 시호를 내렸다.[3]
광서 17년(1891년) 50세로 사망했다. 다섯째 아들이자 광서제의 이복 동생인 재풍이 작위를 이어 순친왕이 되었다.[4]
2. 2. 초기 생애
1843년 3세의 나이로 순군왕(醇郡王)에 책봉되었고, 1850년 2월 순친왕(醇親王)에 책봉되었다. 11세 때인 1851년에 당시 10세였던 예허나라 완전(葉赫那拉 婉貞)과 결혼하여 본부인으로 삼았다. 이후 측실 2명을 더 거느렸다. 슬하에 총 7남 3녀를 두었다. [3]1860년, 함풍제의 칙령에 따라 서태후의 여동생인 완진과 결혼하여 이혁현과 서태후는 긴밀한 유대 관계를 맺게 되었다.[4]
1850년 2월, 도광제의 사망 후 이혁현의 넷째 형인 함풍제가 즉위하였다. 함풍제는 이혁현을 순친왕(醇親王) (''군왕'' (2등급 친왕))으로 임명했다. 이혁현은 함풍제의 11년 재위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낮은 자세를 유지했다.
1861년 함풍제가 사망하자, 동태후·서태후, 그리고 형인 공친왕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친왕재원, 정친왕단화, 숙순 등을 배척(신유 정변)하고, 조카인 동치제가 즉위하자 도통·어전대신·영시를 명받아 친왕으로 올랐다. 서태후는 그의 겸손한 자세를 마음에 들어하여 다양한 특전을 주었지만, 그는 정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했다.[3]
3. 신유정변과 권력 상승
도광 30년(1850년), 형인 함풍제가 즉위하자 순군왕에 봉해졌다. 함풍 11년(1861년) 함풍제가 붕어하자 동태후·서태후, 그리고 또 한 명의 형인 공친왕 혁흔과 협력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신유정변을 통해 재원·단화·숙순 등을 배척하고, 조카인 동치제가 즉위하자 도통·어전대신·영시를 명받아 친왕으로 올랐다. 서태후로부터 겸손한 자세를 인정받아 다양한 특전을 받았지만, 정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처신했다.[3]
광서 원년(1875년), 동치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서태후는 자신의 여동생을 어머니로 둔 혁현의 차남 재첨을 동치제의 양자로 삼아 즉위시켰다(광서제). 혁현은 친아들의 즉위와 함께 관직에서 물러났지만, 광서 10년(1884년) 청불 전쟁의 처리를 둘러싸고 공친왕이 군기대신에서 파면되자 대신 기용되어 총리해군사무아문대신에도 임명되어 해군을 통괄하고, 이홍장과 경친왕 혁광을 보좌역으로 활동했다.
이후에도 서태후와 주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광서 17년(1891년) 50세로 사망했다. 다섯째 아들이자 광서제의 이복 동생인 재풍이 작위를 이어 순친왕이 되었다.
해군아문대신 시절 해군 비용을 이화원 건설 비용으로 유용한 것은 악명이 높으며, 청의 주력 해군이었던 북양함대는 10년 동안 무기 갱신을 하지 못하고 함대 추가 구매도 불가능해져, 청일 전쟁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한편 겸손하게 행동하여 서태후와 영록 등 보수파뿐만 아니라, 광서제의 측근 옹동화 등 혁신파와도 친교를 맺어 양 파의 충돌을 막는 완충 지대 역할을 했지만, 혁현의 죽음으로 대립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청일 전쟁의 패배로 양 파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어 이후의 정쟁으로 이어졌다.[4]
3. 1. 신유정변에서의 역할
1861년 형 공친왕 등과 함께 함풍제의 고명대신 8명을 실각시킨 신유정변에 참여하였다.[3]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이친왕 재원, 정친왕 단화, 숙순 등을 배척하였다.[3]4. 광서제 즉위와 서태후의 섭정
1861년 혁현은 보군통령으로 부임하여 형 공친왕 등과 함께 함풍제의 고명대신 8명을 실각시키는 신유정변에 참여했다. 그의 부인 여허나라 완전의 언니는 서태후로, 서태후는 처형이면서 형수가 된다. 혁현은 자신도 모르게 아들 재첨이 서태후의 양자로 차기 황제에 내정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충격으로 통곡했고, 일설에는 실신했다고도 한다.[3] 광서제 즉위 후 그는 철저하게 서태후에게 예속되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의 여섯째 형인 공친왕이 실각하면서 혁현은 서태후 다음으로 제국 궁정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인물이 되었다. 서태후는 심지어 모든 조정 대신들에게 결정을 내리기 전에 혁현과 상의하도록 명령했다.
4. 1. 광서제 즉위
1875년 1월, 동치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서태후는 이환의 둘째 아들 재천을 새 황제로 선택했다. 재천은 선통제의 계승자로 입적되었으며, 이는 형식적으로 더 이상 이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재천은 선통제의 "아들"로서 황위에 즉위하여 역사적으로 광서제로 알려지게 되었다.[3] 이러한 선택은 서태후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재천은 그녀의 조카였고(재천의 어머니 완진은 서태후의 여동생이었다), 재천의 아버지 이환은 서태후의 충실한 지지자였으며, 재천은 아직 어려 서태후가 섭정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환 자신에게 서태후의 선택은 재앙이었다. 그의 아들이 새 황제로 선택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자책하며 울부짖다가 의식을 잃었다고 전해진다.중국 제국의 마지막 시대에는 황제가 재위하는 동안 황제의 아버지가 살아있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청나라에서 이전의 유일한 사례는 건륭제가 15번째 아들인 가경제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된 1796년에서 1799년 사이의 상황이었다. 효는 중국 문화에서 매우 존경받는 가치이므로, 재위 중인 황제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이환은 최고의 명예와 특권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환은 서태후의 까다로운 성격과 그녀의 지위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에 대한 강박적인 편집증 때문에 자신을 극도로 위험하고 불편한 위치에 있다고 인식했다.
이환이 아들이 황제가 된 후 내린 첫 번째 결정은 모든 공식 직책에서 사임하는 것이었다. 그는 조용히 지내려 했지만, 가능한 한 거절하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명예와 특권을 피할 수 없었다. 아들이 황제가 된 직후, 이환은 "철모자" 특권을 받았는데, 이는 그의 대대로 칭호가 한 등급씩 강등되지 않고 그의 순친왕 작위를 자손에게 물려줄 수 있다는 의미였다.
1876년, 이환은 상주를 광서제에게 올렸는데, 황제의 생물학적 아버지라는 이유로 그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려는 모든 사람을 미리 비난했다. 그는 군사 및 문관 직책에서 사임한 후 어린 황제의 교육을 맡는것에 동의했다.
4. 2. 서태후의 섭정 연장 청원
1881년 동태후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일각에서는 서태후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혁현은 광서제마저 독살될까 두려워하여, 1885년 북양함대의 지휘권을 받았음에도 서태후의 눈치를 살폈다. 광서제가 친정을 시작할 때가 되자, 혁현은 서태후에게 섭정을 연장해 달라고 청원하기까지 했다.[1]
4. 3. 이화원 건설 자금 유용 의혹
서태후가 해군 자금을 횡령하여 이화원을 건설함으로써 북양 함대가 청일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었다.[2] 그러나 중국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서태후는 중국 해군의 쇠퇴에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광서제가 군대 유지 및 개발에 관심이 부족했던 것이 청나라 패배의 주요 원인이었다.[1] 광서제의 측근이었던 옹동화는 일본을 큰 위협으로 보지 않았고, 1890년대 초 여러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황제가 자금을 지출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하여 광서제에게 해군과 육군에 대한 모든 자금 지원을 삭감하라고 조언했다.[1]혁현은 해군 아문 대신 시절 해군 비용을 이화원 건설 비용으로 유용했다는 의혹을 받았다.[4] 이로 인해 청의 주력 해군이었던 북양함대는 10년 동안 무기 갱신 및 함대 추가 구매를 하지 못했고, 이는 청일 전쟁 패배의 한 원인이 되었다.[4]
5. 사망과 평가
1891년 50세로 사망했다. 다섯째 아들이자 광서제의 이복 동생인 재풍이 작위를 이어 순친왕이 되었다.
그는 생전에 황실에서 제안한 황제본생부(皇帝本生父)라는 칭호를 완강히 사양하였다. 그는 사후에야 황제본생고라는 존칭을 공식적으로 얻게 된다. 시호는 현(賢)으로 순현친왕이 된다.
해군 아문 대신 시절에 해군 비용을 이화원 건설 비용으로 유용한 것은 악명이 높으며, 청의 주력 해군이었던 북양함대는 10년 동안 무기 갱신을 하지 못하고 함대 추가 구매도 불가능해져, 청일 전쟁에서의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4] 한편 겸손하게 행동하여 서태후와 영록 등 보수파(후당)뿐만 아니라, 광서제의 측근 옹동화 등 혁신파(제당)와도 친교를 맺은 것은 완충 지대로서 양파의 충돌을 막았지만, 혁현의 죽음으로 대립은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청일 전쟁의 패배로 양파의 대립은 결정적이 되어 이후의 정쟁으로 이어졌다.[4]
6. 무덤과 저택
이혁은 베이징 북서쪽으로 35km 떨어진 곳에 있는 왕자 신분의 묘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은 현재 "7왕릉"(七王墳)으로 알려져 있다. 푸이의 자서전에 따르면 은행나무가 이혁의 묘에서 자라 매우 크고 웅장해졌다고 한다. 이 사실은 서태후에게 보고되었고, 그녀는 매우 놀랐다. 중국어에서 "은행나무"의 첫 글자는 '백'(白)이고, "황제"의 첫 글자는 '황'(皇)인데, 이는 '백' 자와 '왕'(王 – "왕자", 親王) 자를 합친 것이다. 이혁(王)의 묘에 은행나무(白)가 자라는 것은 이혁의 집안에서 새로운 황제(皇)가 나타날 징조로 해석되었다. 권력에 대한 도전을 막는 데 집착했던 서태후는 이를 용납할 수 없었고, 결국 그 나무를 베어 버렸다. 이혁의 묘는 19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복원되어 현재 베이징 주변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이 묘와 주변 지역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2004년 영화 ''킬 빌 2''에 전설적인 소림 승려 파이 메이의 집과 훈련장으로 등장한다.
이쉔의 옛 저택은 현재 순친왕부로 알려져 있으며, 베이징의 시차하이 근처에 있다.
6. 1. 순친왕릉
이혁은 북서쪽으로 35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현재 "7왕릉"(七王墳)으로 알려진 왕자 신분의 묘에 안장되었다. 푸이의 자서전에 따르면 은행나무가 이혁의 묘에 자라 매우 크고 웅장해졌다고 한다. 이 사실은 서태후에게 보고되었고, 그녀는 이 사실에 매우 놀랐다. 중국어에서 "은행나무"라는 단어의 첫 번째 글자는 ''백''(白)이고, "황제"라는 단어의 첫 번째 글자는 ''황''(皇)인데, 이는 글자 ''백''과 글자 ''왕''(王 – "왕자", 親王)을 결합한 것이다. 이혁(王)의 묘에 은행나무(白)가 자라는 것은 이혁의 집에서 새로운 황제(皇)가 나타날 징조로 해석되었다. 이는 권력에 대한 도전을 막는 데 집착했던 서태후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고, 결국 그녀는 즉시 그 나무를 베어 버렸다. 이혁의 묘는 1949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현재 베이징 주변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이 묘와 주변 지역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2004년 영화 ''킬 빌 2''에서 전설적인 소림 승려 파이 메이의 집과 훈련장으로 등장한다.
6. 2. 순친왕부
베이징 시차하이 근처에 있는 이쉔의 옛 저택은 현재 순친왕부로 알려져 있다.참조
[1]
서적
The Concubine Who Launched Modern China: Empress Dowager Cixi
Anchor Books
2013
[2]
서적
The Concubine Who Launched Modern China: Empress Dowager Cixi
Anchor Books
2013
[3]
서적
[4]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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