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 트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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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이트 트래시"는 1800년대 초 미국에서 유래한 용어로,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백인을 비하하는 표현이다. 이 용어는 영국 계급 갈등, 노예 제도, 남부의 경제적 상황 등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화이트 트래시"는 도덕적 결함, 가난, 무지, 폭력 등과 연관되며, 미국 대중문화에서 종종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 백인 빈곤층이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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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트 트래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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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용어
"화이트 트래시"라는 용어는 처음에는 노예로 일하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이후 부유한 백인들이 가난한 백인들을 멸시하며 스스로와 구분 짓기 위해 사용했다.[7] 이 용어는 "하인, 돼지치기, 행상인, 거지에 대한 고대 편견"을 반영하며, "좋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나쁜 가난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7] "태키(tackeys)" 또는 "태키스(tackies)"와 같은 단어도 이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7]
이 용어는 영국 계급 및 민족 갈등과 관련이 있으며, 영국인이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아일랜드인보다 우월하다는 인식과 연관되어 있다.[10] 낸시 아이젠버그는 저서 《화이트 트래시》에서 영국인들이 미국 식민지를 "황무지"로, 사회의 "쓰레기"와 "찌꺼기"라고 부르는 하류층을 버리는 장소로 여겼다고 주장한다.[7] 초기에는 "쓰레기"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고, 이후 "불법 점유자"와 "크래커"라는 용어로 이어졌다.[7] 특히 "크래커"는 남부에서 사용되었다.[7]
가난한 백인을 지칭하는 다른 경멸적인 이름들은 다음과 같다.
- 쓰레기
- 찌꺼기
- 루버(Lubbers)
- 보그트로터(Bogtrotters)
- 악당
- 쓰레기
- 불법 점유자
- 크래커
- 클레이이터(Clay-eaters)
- 터키(Tuckies)
- 머드실(Mudsills)
- 스칼라왜그(Scalawags)
- 브라이어 호퍼(Briar hoppers)
- 힐빌리(Hillbillies)
- 로우다운너(Low-downers)
- 백인 흑인
- 퇴폐자
- 화이트 트래시
- 레드넥
- 트레일러 트래시
- 늪지 사람들
현대 미국 사회에서 "화이트 트래시"는 단순한 가난과 백인이라는 조건을 넘어, 특정 생활 방식과 관련된 부정적인 이미지를 연상시킨다.[7]
- 트레일러 파크 거주
- 블록 위에 올려놓은 자동차
- 마약 및 알코올 남용
- 가정 폭력
- 방치된 아이들
- 멍청한 어른들
- 주먹질
- 시끄럽고 거친 언어
- 좋지 않은 치아와 신체 건강
- 화려함
- 문란한 여성
- 반군 깃발 장식
- 근친상간
- 근친 교배
이 용어는 가난한 백인들의 인간성을 지우고, 그들을 사회적으로 보이지 않게 만드는 효과를 가진다.[42] 미국의 대중문화는 백인 빈곤층, 시골 남성을 음주와 폭력과 연관시킨다.[43]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으로는, "화이트 트래시"는 의미적으로 "크래커(cracker)"(조지아주, 플로리다주), "힐빌리(hillbilly)"(애팔래치아 산맥), "오키(Okie)"(오클라호마주), "레드넥"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74]。 이들의 주요 차이점은 "레드넥", "크래커", "오키", "힐빌리"는 그 사람이 가난하고 배움이 없으며, 현대 사회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시골뜨기라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 "화이트 트래시"는 그 사람의 도덕적인 결함을 강조한다는 것이다[75]。
2. 1. 어원과 의미
"화이트 트래시"라는 표현은 1800년대 초 노예로 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사용한 속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7] 부유한 백인들은 자신들을 가난한 백인들과 구분하고 낙인찍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하인, 돼지치기, 행상인, 거지에 대한 고대 편견"을 이어갔다.[7] "가난한 화이트 트래시"는 낭만화된 "고귀하고 근면한" "좋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나쁜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하며,[7] 이들에게는 "태키(tackeys)" 또는 "태키스(tackies)"라는 단어가 사용되기도 했다.[7]이 용어는 영국 계급 및 민족 갈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주장도 있으며, 영국인을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및 아일랜드인보다 우선시하는 경향과 관련이 있다.[10]
2. 2. 인종차별적 비방
White trash영어라는 용어는 가난한 백인을 그들 자신의 상황에 대해 암묵적으로 탓하는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의 한 형태"로 간주될 수 있다.[10] 특히 백인이 사용할 때, 이 용어는 "피인종차별의 변명 없이, 기소된 자를 가난하고 어떠한 면에서 문명화되지 않은 자로 선언한다."[10] 이 용어는 계급 차별적 비방이자 가난한 백인을 "그들 스스로 열등 생식적인 인종"으로 묘사하는 "인종적 모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11]3. 사회와 문화
"화이트 트래시"라는 표현은 1800년대 초 노예였던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사용한 속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부유한 백인들은 자신들을 "하인, 돼지치기, 행상인, 거지에 대한 고대 편견"을 가진 열등한 백인들과 구분하고 낙인찍기 위해 이 용어를 빠르게 채택했다.[7] "가난한 화이트 트래시"는 "좋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나쁜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했으며,[7] "태키(tackeys)" 또는 "태키스(tackies)"라는 단어로 불리기도 했다.[7] 이 용어는 부유하더라도 가문이나 혈통이 없는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으며,[8] 현재는 일반적으로 싸구려, 조잡하고, 화려하고, 초라하거나, 저속한 모든 것을 지칭한다.[9]
재클린 자라 윌슨은 이 용어가 영국인을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아일랜드인보다 우선시하는 경향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초기 스코틀랜드-아일랜드인(장로교) 이민자들이 후기 아일랜드 (가톨릭) 이민자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등 위계질서가 존재했다.[10] 낸시 아이젠버그는 영국인들이 미국 식민지를 "황무지"로, 사회의 "찌꺼기"라고 부르는 하류층을 버리는 장소로 여겼다고 주장한다.[7] 초기 용어 "쓰레기"는 미국 서부 개척지 등에 정착했지만 토지 소유권이 없고 교육이나 종교 훈련을 거의 받지 못한 정착민들을 묘사하는 "불법 점유자"와 "크래커"로 이어졌다.[7]
19세기 중반, "화이트 트래시"는 기이하고, 수척하고, 초췌한 퇴폐적인 품종으로 묘사되었다. 지저분하고, 미숙하고, 초라하고, 여위었으며, 배가 불룩하고 주름지고 시들었으며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허약한 아이들을 두었다.[14] 피부는 "섬뜩한 황백색"을 띠었고, "노란 양피지"와 같았으며, 밀랍처럼 보이거나 알비노처럼 보였다.[14] 부모는 무기력하고 게으르며,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상류층 플랜테이션주와 요먼 모두에게 경멸받았다.[14] 당시 백인 남부 사람들은 거칠고 불쾌한 외모를 부도덕, 비문명, 범죄적 행동과 동일시했다.[34] 해리엇 비처 스토는 ''드레드: 위대한 디스멀 늪의 이야기''에서 화이트 트래시 여성과 아이들을 묘사했다.[14] "화이트 트래시"의 신체적 특징은 유전적인 것으로 여겨졌다.[34] W. J. 캐시는 ''남부의 정신''에서 '화이트 트래시'를 언급했다.[15]
앨리슨 드링커드는 "화이트 트래시"가 단순히 가난하고 백인인 것과는 다르다고 썼다. 이 용어는 트레일러 파크, 마약, 가정 폭력, 방치된 아이들, 멍청한 어른들, 주먹질, 거친 언어, 좋지 않은 치아, 문란한 여성, 근친상간 등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7] 미국의 경제적 불평등이 커짐에 따라 가난한 백인들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역설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했다.[7] 넬 설리번은 "화이트 트래시"라는 용어가 니거와 유사하게 가난한 백인들의 인간성을 지운다고 주장한다.[42] 아이젠버그는 화이트 트래시가 미국 사회의 불안한 실마리라고 썼다.[42]
미국의 대중문화는 백인 빈곤층, 시골 남성을 음주와 폭력과 연관시킨다.[43] 이블린 그린리프 서덜랜드의 희곡 ''Po' White Trash'', 조지 버나드 쇼의 희곡 ''블랑코 포스넷의 폭로''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44] 어네스트 매튜 미클러의 ''White Trash Cooking''은 인기를 얻었다.[46] 해리 크루즈, 도로시 앨리슨 등 작가들이 출판했다.[51] 돌리 파튼, 지미 카터는 자신을 "백인 쓰레기"라고 언급했다.[53] 토비 키스는 ''White Trash with Money'' 앨범을 발매했다.[60] 바비 젠트리의 노래 "Fancy"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매춘을 묘사한다.[61] ''The Cleveland Show'', ''Family Guy'' 등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백인 쓰레기"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화이트 트래시"라는 비속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와 민속에서 보고되었다.[62] 노예였던 흑인들은 가혹한 노예 소유주들을 "가난한 백인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라고 불렀다.[65]
3. 1. 경제적 지위
19세기 남부의 많은 가난한 백인들은 백인에게 제공되는 최악의 땅에서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가장 좋은 땅은 이미 대규모 (플랜테이션 단지)와 소규모 플랜테이션주를 포함한 백인 노예 소유주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래땅, 늪지대, 관목 소나무로 뒤덮여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땅에서 살며 생존을 시도했고, 이 때문에 "모래 언덕 사람들", "소나무 사람들"로 알려지게 되었다.[12]19세기 중반, 대중들은 "화이트 트래시"를 수많은 신체적, 사회적 결함을 겪는 퇴폐적인 품종으로 묘사했다. 이들은 지저분하고, 미숙하며, 초라하고, 여위었으며, 배가 불룩하고 주름지고 시들었으며,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허약한 아이들을 두었다.[14]
3. 2. 문화적 전통
19세기 중반 남부에서는 상류층 부모들조차 자녀를 극도로 관대하게 대했으며, 심지어 아들과 딸 모두 공격적이고 맹렬해지도록 장려했다.[16] 이들은 곧 원하는 것을 움켜쥐고, 부모 앞에서 형제자매와 씨름하고, 부모의 명령을 어기고, 장난감으로 소란을 피우고, 방문객을 물리적으로 공격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류층 소녀들은 나중에 제대로 된 어린 숙녀가 되는 법을 배우겠지만, 소년들은 여성스러워질까 봐 계속 억제되지 않았다. 이러한 행동들은 환경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가난한 백인들도 실천했으며, 젊은 남성들을 도박, 음주, 매춘, 싸움으로 몰아넣었다. 이러한 "남성다운" 행동은 어느 정도 예상되었지만, 어머니들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도록 조심했고, 여성스러움보다는 분명히 선호되었다. 이러한 양육 방식은 촌락에서 우세했으며, 상류층에만 국한되지 않고 소작농과 가난한 백인들 사이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양육 방식과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폭력적인 민속 관습을 고려할 때, 화이트 트래시의 문화가 폭력적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16]그래디 맥위니는 그의 저서 ''Cracker Culture: Celtic Ways in the Old South''에서 1800년대 남부로 이주한 이민자들의 대다수가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출신이며, 스코틀랜드 출신은 그곳에서 모든 실패한 반란 이후에 파도처럼 몰려왔다고 주장한다. 이 이민자들은 감정적인 하류층 "크래커"였으며, 고대 씨족 구조를 유지하고,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를 따르지 않고, 편안함과 환대를 중시했으며, 개인적, 가족적, 씨족적 명예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쉽게 자극받았다. 이들 중 일부는 남부 플랜테이션 귀족 계층에 진입하여 그들의 특성을 "기사"에게 가져올 수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격상시킬 수 없었고 가난한 남부 백인 대중에게 섞여 들어갔다. 따라서 이러한 특성은 해당 그룹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16]
와이어트-브라운(Wyatt-Brown)은 남부의 육아 방식이 식민지 시대 이후 미국에서 끊임없이 존재했던, 특히 오지 지역에 거주했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육아 방식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16] 가난한 남부 백인들이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과 매우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이론도 있었다. 새뮤얼 스탠호프 스미스(Samuel Stanhope Smith)는 프린스턴 칼리지의 일곱 번째 총장인 목사이자 교육자였는데, 1810년에 가난한 남부 백인들이 "절대적인 야만 상태"로 살았으며, 이는 그들의 피부색과 옷차림이 인디언과 닮게 만들었다고 썼다. 이는 18세기와 19세기 초에 만연한 믿음이었다.
남부 빈곤층의 기원에 대한 과학적 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사회 평론가 H. L. 멩켄은 1919년 에세이 "보자르의 사하라"에서 "가난한 백인 쓰레기"와 남부 인구 대부분이 주로 앵글로색슨계라는 당시의 지배적인 신화에 이의를 제기하며, 남부의 주요 혈통이 색슨족보다는 켈트족이라고 주장했다.[20]
3. 3. 노예제의 유산
프랑스 귀족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그의 저서 ''미국의 민주주의''(1835)에서 가난한 백인 남부인들의 상태를 노예 제도의 영향 중 하나로 보았다. 그는 그들을 무지하고, 게으르며, 자만심이 강하고, 자기 방종적이며, 나약하다고 묘사했다.[14]가난한 백인들은 농장주와 자영농 모두에게 멸시받았고 "화이트 트래시"라고 불리는 것에 "분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집단적으로 남부의 흑인들을 깊이 경멸했다.
3. 4. 정치
북부 사람들은 화이트 트래시의 존재가 남부의 노예 제도 시스템의 결과라고 주장한 반면, 남부 사람들은 이러한 백인들이 모든 백인이 다른 모든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자연스러운" 계급 시스템을 뒤엎을까 봐 걱정했다.[34] 19세기 중반의 초월주의자 랄프 왈도 에머슨은 가난한 백인 남부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본성에 내재된 특성 때문에 가난하게 살았다고 주장했다.해리엇 비처 스토는 1856년에 출판된 ''드레드: 위대한 디스멀 늪의 이야기''에서 화이트 트래시 여성과 그녀의 아이들을 묘사했다.[14]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대니얼 R. 헌들리는 1860년 저서 ''남부 국가의 사회 관계''에서 "화이트 트래시"라는 제목의 장을 포함시켜, 사회 구조가 아닌 유전자가 문제이며, 따라서 노예 제도가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34] 그는 화이트 트래시를 "지구 표면에서 똑바로 걷는 가장 게으른 두 다리 동물"이라고 묘사했다.[34] 헌들리는 화이트 트래시 인구가 다른 백인뿐만 아니라 흑인 노예 인구보다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생각했다. 그의 평가는 미래의 쿠 클럭스 클랜 지도자인 랜돌프 쇼트웰에 의해 지지되었는데, 그는 그들을 "흑인보다 나을 것이 없는, 돈을 헤프게 쓰고, 무식하고, 생각 없는 존재"로 묘사했다.[15]
W. J. 캐시는 ''남부의 정신''(1941)에서 귀족적인 기사도 정신의 플랜테이션주 아래에는 "가난한 백인으로 무차별적으로 묶여 있는 모호한 인종, 사실상 '화이트 트래시'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다.[15]
프랑스 귀족 알렉시스 드 토크빌은 그의 고전 연구인 ''미국의 민주주의''(1835)에서 가난한 백인 남부인들의 상태를 노예 제도의 영향 중 하나로 보았다. 그는 그들을 무지하고, 게으르며, 자만심이 강하고, 자기 방종적이며, 나약하다고 묘사했다.[15]
가난한 백인들은 농장주와 자영농 모두에게 멸시받았고 "화이트 트래시"라고 불리는 것에 "분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집단적으로 남부의 흑인들을 깊이 경멸했다. 캐쉬는 노예 제도가 "일반 백인에게 흑인에 대한 야만적이고 비열한 증오를 낳았고, 이는 끈질긴 잔혹함으로 터져 나올 기회만을 필요로 했다..."라고 썼다.
4. 역사
"화이트 트래시"라는 표현은 1800년대 초 노예가 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사용한 속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부유한 백인들은 자신들을 가난한 백인들과 구분하고 낙인찍기 위해 이 용어를 빠르게 채택했다.[7] "가난한 화이트 트래시"는 낭만화된 "고귀하고 근면한" "좋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나쁜 가난한 사람들"을 의미했다.[7]
재클린 자라 윌슨은 이 용어가 영국 계급 및 민족 갈등에 부분적으로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영국인을 스코틀랜드인, 웨일스인 및 아일랜드인보다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초기 스코틀랜드-아일랜드인 (장로교) 이민자들이 후기 아일랜드 (가톨릭) 이민자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등 위계질서가 존재했다.[10]
낸시 아이젠버그는 저서 《화이트 트래시》에서 영국인들이 미국 식민지를 "황무지"로, 사회의 "찌꺼기"라고 부르는 하류층을 버리는 장소로 여겼다고 주장한다.[7] 초기 용어 "쓰레기"는 미국 서부 개척지와 일부 남부 주 후방 지역에 정착했지만 정착한 토지에 대한 권리가 없고 교육이나 종교 훈련을 거의 또는 전혀 받지 못한 정착민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불법 점유자"와 "크래커"로 이어졌다.[7]
아이젠버그는 가난한 백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다른 경멸적인 이름들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 쓰레기, 찌꺼기, 루버(Lubbers), 보그트로터(Bogtrotters), 악당, 쓰레기, 불법 점유자, 크래커, 클레이이터(Clay-eaters), 터키(Tuckies), 머드실(Mudsills), 스칼라왜그(Scalawags), 브라이어 호퍼(Briar hoppers), 힐빌리(Hillbillies), 로우다운너(Low-downers), 백인 흑인, 퇴폐자, 화이트 트래시, 레드넥, 트레일러 트래시, 늪지 사람들.[7]
19세기 남부의 많은 가난한 백인들은 가장 좋은 땅이 이미 백인 노예 소유주들에게 넘어갔기 때문에, 최악의 땅에서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들은 모래땅, 늪지대, 관목 소나무로 뒤덮여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땅에서 생존을 시도했고, 이 때문에 일부는 "모래 언덕 사람들"과 "소나무 사람들"로 알려지게 되었다.[12] 많은 사람들이 당시 이 나라의 첫 번째 변경지였던 산으로 들어갔고, 남북 전쟁 이후 "힐빌리"라고 불리기 시작했다.[13]
19세기 중반의 대중적인 상상 속에서 "화이트 트래시"는 수많은 신체적, 사회적 결함을 겪는 퇴폐적인 품종이었다. 그들은 지저분하고, 미숙하고, 초라하고, 여위었으며, 배가 불룩하고 주름지고 시들었으며 실제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허약한 아이들을 두었다. 남부의 가난한 백인의 피부는 "섬뜩한 황백색"을 띠었고, "노란 양피지"와 같았으며, 밀랍처럼 보이거나, 거의 알비노처럼 보일 정도로 하얗게 보였다. 부모는 무기력하고 게으르며,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고, 알코올 중독에 빠졌다. 그들은 상류층 플랜테이션주와 요먼 모두에게 경멸을 받았다.[14]
해리엇 비처 스토는 1856년에 출판된 ''드레드: 위대한 디스멀 늪의 이야기''에서 화이트 트래시 여성과 그녀의 아이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지저분한 짚 더미에 웅크리고 앉아 큰 야생의 눈, 움푹 들어간 뺨, 헝클어진 머리카락, 새의 발톱처럼 길고 마른 손을 가진 비참하고 초췌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앙상한 가슴에는 여윈 젖먹이가 매달려 있었다.[14]
당시 백인 남부 사람들은 거칠고 불쾌한 외모를 부도덕한 생각과 비문명적이거나 범죄적인 행동과 동일시했다.[34] 이런 식으로, 부실한 식단, 개인 위생 부족, 유해한 환경의 결과로 건강하지 않거나 흉한 몸을 가진 가난한 백인들은 비난받았다.
화이트 트래시의 신체적 특징은 유전적인 것으로 여겨졌으며, 세대에서 세대로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전달되어 가난한 백인을 남부의 젠트리 및 귀족적 가치를 공유하는 요먼과 구분하는 역할을 했다.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대니얼 R. 헌들리는 1860년 저서 ''남부 국가의 사회 관계''에서 "화이트 트래시"라는 제목의 장을 포함시켜, 사회 구조가 아닌 유전자가 문제이며, 따라서 노예 제도가 정당화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화이트 트래시를 "지구 표면에서 똑바로 걷는 가장 게으른 두 다리 동물"이라고 불렀고, 그들의 외모를 "창백한 안색, 어색한 매너, 거의 믿기 힘든 타고난 멍청함 또는 둔함"으로 묘사했다.[34]
W. J. 캐시는 ''남부의 정신''(1941)에서 신화적인 올드 사우스에 대한 묘사에서 귀족적인 기사도 정신의 플랜테이션주 아래에는 "가난한 백인으로 무차별적으로 묶여 있는 모호한 인종, 사실상 '화이트 트래시'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있다고 썼다.
캐시는 신세계에 도착한 사람들, 적어도 유럽 정착 초기에는 땅이 저렴하고 이용 가능했으며, 열심히 일하면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여 플랜테이션주나 요먼 농부가 될 가능성이 가난한 백인이 될 가능성과 같다고 설명한다.[15]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구식 시골 지역 인구의 가장 약한 요소"로, 플랜테이션 시스템에 의해 붉은 언덕, 모래 땅, 소나무 황무지, 늪지대 등 남부의 모든 주변 토지로 밀려났다.
캐시에 따르면, 이러한 외모는 대부분 유전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이 집단이 생존해야 했던 혹독한 환경의 결과이다.[15]
와이어트-브라운(Wyatt-Brown)은 남부의 육아 방식이 식민지 시대 이후 미국에서 끊임없이 존재했던, 특히 오지 지역에 거주했던 아메리카 원주민의 육아 방식과 유사하다고 주장한다.[15] 따라서 백인 빈민 인구의 존재에 대한 또 다른 이론은, 가난한 남부 백인들이 흑인과 아메리카 원주민과 매우 가까이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상태가 악화되었다는 것이었다. 새뮤얼 스탠호프 스미스는 프린스턴 칼리지 총장이었는데, 1810년에 가난한 남부 백인들이 "절대적인 야만 상태"로 살았으며, 이는 그들의 피부색과 옷차림이 인디언과 닮게 만들었다고 썼다.[15]
브랜다이스 대학교 역사학자 데이비드 해켓 피셔는 저서 ''알비온의 씨앗''에서 "폭력에 의존하려는 의지"에 대한 지속적인 유전적 기반을 제시하며, 특히 높은 테스토스테론 혈중 수치 발견을 인용한다.[17] 그는 중부 대서양, 남부 및 서부 주에서 폭력 성향은 잉글랜드 북부, 스코틀랜드 국경 및 아일랜드 국경 지역의 전통적인 목축 사회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이루어진 유전적 변화로 인해 상속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18]
사회 평론가 H. L. 멩켄은 1919년 에세이 "보자르의 사하라"에서 "가난한 백인 쓰레기"와 남부 인구 대부분이 주로 앵글로색슨계라는 당시의 지배적인 신화에 이의를 제기하며, 주요 혈통이 색슨족보다는 켈트족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북부 사람들은 화이트 트래시의 존재가 남부의 노예 제도 시스템의 결과라고 주장했고, 남부 사람들은 이러한 분명히 열등한 백인들이 모든 백인이 다른 모든 인종, 특히 흑인보다 우월하다는 "자연스러운" 계급 시스템을 뒤엎을까 봐 걱정했다. 양쪽 지역의 사람들은 화이트 트래시의 수가 현저하게 증가하면 견고한 미국 민주주의의 기초로서 교육받은 백인 자유민의 제퍼슨주의적 이상을 위협할 것이라고 우려했다.[15]
19세기 중반의 초월주의자이자 저명한 미국 강연자, 작가, 철학자인 랄프 왈도 에머슨에게, 가난한 백인 남부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본성에 내재된 특성 때문에 가난하게 살았다.[15]
테오도어 루스벨트와 같은 일부 사람들은 가난한 "퇴폐적인" 백인들뿐만 아니라 남부 및 동유럽에서 온 대량의 이민자들이 "인종 자살" 문제의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았다.[15]
서부 변경 지역으로 보내진 가난한 백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나 일부 남부 주 후미진 지역에 정착한 사람들을 "폐기물 인간", "불법 거주자" 그리고 "크래커"라고 불렀다. 그들은 정착한 토지에 대한 권리가 없었고, 교육이나 종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다.[7]
1854년, 해리엇 비처 스토는 저서 ''톰 아저씨의 오두막 열쇠''에 "가난한 화이트 트래시"라는 제목의 장을 썼다. 스토는 노예 제도가 "타락하고 비참한 노예"를 낳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가장 혼잡한 지역에서 존재했던 것만큼이나 타락하고 잔혹한 가난한 백인 인구"도 낳는다고 썼다. 플랜테이션 시스템은 그러한 백인들이 생계를 위해 고군분투하도록 강요했고, "깨어났을 때 제멋대로 모든 것을 짓밟는 맹목적이고 야만적인 괴물"과 같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집단으로 만들었다.[34]
스토의 두 번째 소설 ''드레드''에서 그녀는 그레이트 디스멀 습지의 가난한 백인 거주자들을 묘사하는데, 이 습지는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 사이의 경계를 이루며, 무지하고 타락하며 부도덕하며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계층으로 묘사했다.[15] 힌턴 로완 헬퍼의 1857년 저서 ''남부의 임박한 위기''는 이 지역의 가난한 백인들을 노예제의 영향으로 억압받는 계층으로 묘사했다.[35]
미시시피 대학교의 역사학자 제프리 글래스너는 가난한 백인들의 삶의 물질적 현실과 그들이 주변 사회 및 정치 구조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기 위한 지속적인 작업이 필요하다고 썼다.
"화이트 트래시"라는 비속어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문화와 민속에서 광범위하게 보고되었다.[62] 예를 들어, 노예였던 흑인들은 들리지 않는 곳에서 가혹한 노예 소유주들을 "가난한 백인 쓰레기보다 못한 존재"라고 불렀다.[65] 일부 흑인 작가들은 흑인들이 백인들에게 "흑인"(niggers)이라고 조롱받았을 때, 그들을 "화이트 트래시"라고 맞받아쳤다고 언급했다.[66]
- 조라 닐 허스턴의 ''수와니의 세라프''(1948)는 "화이트 트래시" 여성의 이미지를 탐구했다.[67]
미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방식으로는, "화이트 트래시"는 의미적으로 "크래커(cracker)"(조지아주, 플로리다주), "힐빌리(hillbilly)"(애팔래치아 산맥), "오키(Okie)"(오클라호마주), "레드넥"과 중복되는 부분이 있다[74]。 이들의 주요 차이점은 "레드넥", "크래커", "오키", "힐빌리"는 그 사람이 가난하고 배움이 없으며, 현대 사회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시골뜨기라는 점을 강조하는 반면, "화이트 트래시"는 그 사람의 도덕적인 결함을 강조한다는 것이다[75]。
4. 1. 17세기-18세기
17세기 초, 토머스 데일 버지니아 주지사는 농지에서 일할 더 많은 식민지 개척자를 요청했다. 식민지로 이주할 만큼 부유한 사람들은 종종 토지 소유주가 되었기 때문에, 현지 노동자를 찾는 것은 어려웠다. 이에 제임스 1세는 죄수와 부랑아 아이들을 버지니아로 보냈다.[22][23]1617년, 버지니아 회사는 고용 계약 노동자의 식민지 이주를 후원하는 사람에게 토지를 주는 토지 증여 제도를 도입했다. 플리머스 회사도 이를 따랐고, 메릴랜드 식민지, 조지아 식민지, 노스캐롤라이나 식민지, 사우스캐롤라이나 식민지를 포함한 다른 식민지들도 마찬가지였다.[23][24]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영국의 갱들은 때때로 농장주와 투기꾼의 자금 지원을 받아 납치를 조직하여 해외로 보내지는 사람들의 수를 늘렸다.[25][23] 정치범과 포로 또한 아일랜드 봉기의 결과로 고용 계약 노동자로서 식민지로 보내졌다. 올리버 크롬웰은 아일랜드 연합 전쟁 (1641–1653) 동안 수백 명의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를 영국령 북아메리카로 보냈다.[10]
1717년, 대영 제국 의회는 북미로 죄수를 고용 계약 노동자로 보내는 시스템을 규제하기 위해 1717년 이송법을 통과시켰다.[26] 1720년, 이 법은 상인들이 죄수를 이송하는 대가를 받을 수 있도록 개정되었다.[27][28]
4. 2. 19세기 초
1821년, "화이트 트래시"라는 표현이 인쇄물에 처음 사용되었다.[31] 1830년대에 이 용어는 "고품격 사람들"의 노예들이 빈곤 백인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면서 널리 사용되었다.[13] 1833년, 조지아를 방문한 영국의 여배우 패니 켐블은 일기에 "노예들 스스로 백인 하인들을 매우 경멸하며, 그들을 '가난한 화이트 트래시'라고 부른다"고 적었다.[32] 1850년대에 이 용어는 널리 퍼졌고,[33] 1855년경에는 상류층 백인들이 흔히 사용하게 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는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남부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용어가 되었다.4. 3. 남북 전쟁 중
남북 전쟁 기간 동안 남부 연합은 징병제를 실시했는데, 처음에는 18세에서 35세 사이, 나중에는 17세에서 50세 사이의 모든 남성이 징집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20명 이상의 노예를 소유한 노예 소유주 등은 징집에서 면제되었다. 징집 대상이 되거나 유급 대리인을 고용해야 했던 가난한 화이트 트래시 남부인들은 소모품으로 여겨졌다.[34] 징집을 거부한 이들은 "개 잡이"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추적당했다.[34] 가난한 남부인들은 이 전쟁을 "부자들의 전쟁"이지만 "가난한 자들의 싸움"이라고 불렀다.[34]4. 4. 재건 시대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귀족이 재산을 유지하고 어느 정도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지만, 연합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줄 수 있을 때까지 선거권을 박탈당하는 "백인 쓰레기 공화국"을 구상했다.[37] 노예 해방자 사무소는 흑인과 백인 모두 "모든 난민과 모든 해방된 자"를 돕도록 권한을 받았다.[37]4. 5. 재건 이후
남부 재건에 대한 앤드루 존슨 대통령의 구상은 평등주의적 민주주의가 아닌, 귀족이 재산과 사회적 권력을 유지하면서 연방에 충성할 때까지 선거권을 박탈당하는 "백인 쓰레기 공화국"이었다. 해방된 흑인들은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가난한 백인 남부인들은 투표하고 정치 관직을 차지하며 흑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다. 존슨은 농장 시스템에서 해방된 가난한 백인들이 남부 재건과 연합 복원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15]존슨의 계획은 시행되지 않았고, 노예 해방자 사무소는 흑인과 백인 모두를 돕도록 권한을 받았다. 그러나 사무소는 가난한 백인을 재건된 남부의 기반으로 보는 존슨의 비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북부 언론인과 관찰자들은 가난한 백인들이 여전히 빈곤과 부랑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부 구호품을 받는 "빈둥거리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흑인보다 약간 더 지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15]
많은 논평가들은 가난한 백인 남부인들이 "유능하고 검소하며 연합에 충실"하다고 묘사된 해방된 흑인과 비교해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노예 해방자 사무소 요원 마커스 스털링은 "가련한 가난한 백인 계급"이 사무소의 개혁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유일한 계급이라고 말했다. 애틀랜틱 먼슬리는 정부가 "겸손하고 조용한 흑인"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가치 없는 야만인" 백인 쓰레기 인구에 대한 도움을 중단해야 한다고 제안했다.[15]
재건 시대에 백인 쓰레기는 더 이상 시골 황무지에 숨어 사는 기괴한 품종이 아니라, 사회 주류로 나와 위험한 범죄자, 부랑자, 비행 계층, 사회 진화론자의 사고에서 진화론적 막다른 골목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그들은 부도덕하고 모든 사회 규범과 성적 규범을 깨고, 근친상간과 매춘에 참여하며, 수많은 근친교배 잡종 자녀를 낳았다.[15] 1890년경, "레드넥"이라는 용어는 가난한 백인 남부인, 특히 당시 민주당 선동가들의 인종차별적 추종자들을 지칭하는 데 널리 사용되기 시작했다.[36]
4. 6. "뉴 사우스"
1890년대부터 세기 전환기까지 이어진 "뉴 사우스" 운동은 남부에 산업화를 도입했는데, 주로 면방직 공장 형태로 나타났다.[15] 가난한 백인들은 공장이 제공하는 주택으로 이주했고, 모든 가족 구성원이 공장에서 일했다.[15] 공장 노동자들은 "린트헤드", "코튼테일", "공장 쥐", "면방직 공장 쓰레기"와 같은 새로운 모욕적인 별명을 얻게 되었다.[15]4. 7. 우생학
1890년경, 미국 우생학 운동은 가난한 화이트 트래시에 주목했다. 우생학자들은 이들을 정신 박약, 문란한 성생활, 근친상간 및 인종 간 성관계, 그리고 이러한 관계에서 낳은 자녀를 버리거나 학대하는 이들로 낙인찍었다. 이들은 결함 있는 유전적 유산을 사회에서 "정화"한다는 명목하에 시골 백인들을 주에서 강제로 불임 시술을 받게 하는 법률을 추진했다.[7]1907년, 인디애나주는 세계 최초로 우생학에 기반한 강제 불임 시술 법을 통과시켰다. 이후 30개의 미국 주가 이를 따랐다.[38][39] 1921년 인디애나주 대법원에서 이 법이 뒤집혔지만,[40] 1927년 ''벅 대 벨'' 사건에서, 미국 연방 대법원은 1924년 버지니아 불임 시술법의 합헌성을 인정하여 주립 정신 병원의 환자들에 대한 강제 불임 시술을 허용했다.[41]
4. 8. 대공황
20세기 초, 특히 대공황이 시작된 후에도 가난한 백인 남부인들의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은 농촌 빈곤층의 자립을 돕고 그들을 억누르던 남부 사회의 사회적 장벽을 허물어 상향 이동의 아메리칸 드림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이를 위해 내무부의 자급 자족 농장 분과, 그 후신인 재정착 행정처, 그리고 농업 안정국과 같은 프로그램이 시행되었다.[7] 이들 기관은 소작농과 분할 경작의 악순환을 끊고 가난한 백인과 흑인이 자신만의 농지를 소유하고 그러한 농지를 지원하는 데 필요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다.[7] 또한 더스 볼로 인해 황폐해진 아키스와 오키스와 같은 이주 노동자들에게도 서비스를 제공했다.[7] 더스 볼의 상황은 사진 작가 도로테아 랭이 ''미국 탈출''(1939)에서 잘 기록했으며, 이들은 모든 소지품을 포드 자동차에 싣고 서쪽 캘리포니아로 향해야 했다.[7]
이러한 프로그램의 설계 및 운영에 중요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헨리 월리스: 농무부 장관
- 밀번 링컨 윌슨: 사회 과학자이자 농업 전문가, 자급 자족 농장 분과의 초대 책임자
- 렉스포드 G. 터그웰: 컬럼비아 대학교 경제학 교수, 재정착 행정처의 초대 책임자 ("수수하고 민주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임명됨)[7]
터그웰은 소작농이 투표권을 가질 수 없다면 그들의 지위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인두세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였다.[7] 그의 기관의 목표는 "불량 토지 정리, 농촌 빈곤층 재정착, 교외 공동체로의 실업자 재정착, 농가 재활"이라는 4가지 "R"이었다.[7]
농촌 빈곤층을 돕기 위한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다른 인물들은 아서 레이퍼와 하워드 W. 오덤이었다.[7] 레이퍼는 소작농에 대한 전문가로, 그의 연구 ''농민 사회 서문''(1936)은 남부의 시스템이 지역의 빈곤층을 억누르고 그들을 이주하게 만드는 이유를 설명했다.[7] 오덤은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사회학자이자 심리학자로, 소셜 포스 저널을 창간하고 연방 정부와 긴밀히 협력했으며, 뉴딜의 지침서가 된 600페이지 분량의 역작 ''미국 남부 지역''을 저술했다.[7] 언론인 제럴드 W. 존슨은 오덤의 아이디어를 대중적인 책인 ''낭비된 땅''으로 번역했다.[7]
오덤은 1938년에 학자들에게 "가난한 백인"이 그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묻는 설문지를 보냈는데, 그 결과는 수십 년 동안 유지되어 온 "화이트 트래시"에 대한 대중의 견해와 거의 구별할 수 없었다.[7] 모든 응답에서 "무목적, 근근이 살아가는, 게으른, 야심 없는, 쓸모없는, 스스로를 개선하려는 욕망이 없는, 무기력한" 등의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가장 흔한 표현은 "부주의한"이었다.[7] 이는 가난한 백인들이 여전히 흑인과 백인의 중간 계층으로 여겨졌으며, 그들의 부주의한 방식은 흑인과의 근접성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다.[7]
4. 9. "트레일러 쓰레기"
트레일러는 1930년대에 처음 등장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주택 부족 현상으로 인해 사용이 급증했다.[7] 미국 연방 정부는 전국의 방위 산업 종사자, 군인, 해군을 수용하기 위해 최대 3만 대의 트레일러를 사용했으며, 특히 앨라배마주 모빌과 미시시피주 파스카굴라와 같이 군사 시설이나 방위 산업이 많은 지역 주변에 집중적으로 배치했다.[7]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 아그네스 E. 마이어는 저서 ''혼돈 속의 여행''에서 전국을 여행하며 "소외된 농촌 지역"의 실태를 보도했는데, 트레일러, 텐트, 판잣집에 사는 사람들을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글을 읽거나 쓸 수 없으며, 전반적으로 초라한 모습이라고 묘사했다.[7] 모빌과 파스카굴라에 조선소에서 일하기 위해 온 노동자들은 남부의 외딴 지역 출신이었으며, 지역 주민들은 그들을 "벌레"라고 묘사했고, 다른 지역에서는 "불법 점유자"라고 불렀다.[7] 그들은 문란한 도덕관념, 높은 사생아 출산율, 그리고 그들의 "힐빌리 안식처"에서 매춘을 성행하게 놔둔다는 비난을 받았다.[7] 때로는 중고 또는 삼중고로 구입하는 트레일러 자체는 종종 흉하고, 위생적이지 못하며, 낡아서, 지역 사회에서 더 나은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구역을 정했는데, 이는 학교, 상점 및 기타 필요한 시설에서 멀리 떨어진, 문자 그대로 철도 반대편을 의미했다.[7]20세기 중반에 교외 주택을 구매할 여유가 없는 가난한 백인들은 이동식 주택을 구매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더 저렴할 뿐만 아니라 한 지역에서 일자리가 끊어지면 쉽게 이동할 수 있었다.[7] 이러한 사람들은 때로는 선택에 의해, 때로는 지역 구역 설정 법규에 의해 트레일러 캠프에 모였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트레일러 쓰레기"로 알려지게 되었다.[7]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가지고 있었지만, 때로는 유동적인 직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가난한 백인 쓰레기들에게서 인식되었던 성격적 결함이 소위 "트레일러 쓰레기"에게 전가되었고, 트레일러 캠프 또는 공원은 퇴직자, 이주 노동자 및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여겨졌다.[7] 1968년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동식 주택을 소유하고 거주하는 사람들 중 단 13%만이 화이트칼라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7]
5. 대중문화
미국의 대중문화는 백인 빈곤층, 특히 시골 남성을 음주와 폭력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43]
1900년, 이블린 그린리프 서덜랜드의 희곡 ''Po' White Trash''는 재건 이후 남부의 가난한 백인들의 복잡한 문화적 긴장과 사회적, 인종적 지위를 탐구했다.[44] 1980년대에는 해리 크루즈, 도로시 앨리슨 등 스스로를 레드넥 또는 백인 쓰레기 출신이라고 밝히는 남부 작가들의 소설이 출판되었다.[51]
돌리 파튼은 자신을 백인 쓰레기라고 자주 언급하며, "백인 쓰레기! 맞아요."라고 말하기도 했다.[53] 지미 카터 대통령은 자신을 "성공한 백인 쓰레기"라고 부른 지지자를 인용했다.[57]
6.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최근 푸어 화이트(poor white)라고 불리는 백인 빈곤층이 증가하고 있다. 2009년 기준으로 백인 인구 447만 명 중 약 10%인 40만 명[76]이 빈곤층으로 분류되었다. 1940년경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인구 비율은 전체 인구의 약 20%였으나, 1994년에는 13.6%, 2009년에는 9.1%로 지속적으로 감소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 폐지 이후, 역차별, 실업, 범죄 등을 피해 국외로 이민하는 백인이 늘어났으며, 1995년 이후 약 80만 명[77]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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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flight from South Africa | Between staying and go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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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Economist
2008-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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