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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목황후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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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목황후는 명나라 성화제의 후궁이자 홍치제의 어머니이다. 야오족 출신으로, 명나라 군대에 의해 포로가 되어 후궁으로 들어갔으며, 성화제의 총애를 받아 홍치제를 낳았다. 만귀비의 질투로 인해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사후 숙비로 추봉되었다가 홍치제 즉위 후 황후로 추존되었다. 최종 시호는 효목자혜공각장희숭천승성순황후이며, 능은 무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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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목황후 (명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남광사
남광사, 기씨가 하주에서 살던 곳
작위황후 (추존)
별칭기태후(紀太后)
배우자성화제(成化帝)
자녀홍치제(弘治帝) 주우당(朱祐樘)
아버지경원단희백(慶元端僖伯) 기귀(紀貴)
어머니경원백부인(慶元伯夫人) 당씨(唐氏)
출생일경태 2년(1451년)
출생지광서(廣西) 하주(賀州)
사망일성화 11년(1475년)
사망지북경순천부(北京順天府) 자금성
능묘무릉(茂陵)

2. 생애

기씨는 성화제 통치 시기 야오족 정벌 때 포로가 되어 후궁이 되었다. 성화 6년(1470년), 여러 어려움 끝에 성화제의 아들 주우탱(朱祐樘)을 낳았으나,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만귀비의 위협 때문에 아들을 숨겨 키워야만 했다. 기씨는 성화 11년(147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만귀비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사후 숙비(淑妃)로 추증되었고, 아들 홍치제가 즉위하면서 황후로 추존되어 '''효목자혜공각장희숭천승성순황후'''(孝穆慈慧恭恪莊僖崇天承聖純皇后)라는 시호를 받았다. 홍치제는 생모의 뿌리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생가를 찾지는 못했다.

2. 1. 출생과 입궁

평락부 하현 출신의 야오족으로, 아버지는 "이공", 어머니는 "당모"이다. 이 이름들은 좡어한자로 음역한 표기이다. 명나라 군대가 남쪽 지방을 정벌할 때 집안이 몰락하여 포로가 되었고, 북경으로 보내져 후궁에 들어가 여관(女官)으로 일하게 되었다.

2. 2. 성화제의 총애와 홍치제 출산

성화 6년(1470년), 기씨는 궁중 서고에서 성화제의 눈에 띄어 관계를 갖게 되었고 임신하였다. 당시 황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며 권세를 누리던 만귀비는 이 사실을 알고 기씨를 매우 질투하였다. 만귀비의 처벌을 두려워한 기씨는 낙태약을 마셨으나 낙태에 실패하였다.

결국 기씨는 궁녀와 환관들의 장례를 치르던 안락당에서 아들 주우탱(朱祐樘)을 출산하였다. 당시 홍치제는 머리카락도 제대로 나지 않은 미숙아 상태였다. 기씨는 만귀비의 위협 속에서 스스로 아들 주우탱을 죽이려 했지만, 환관 장민(張敏)이 이를 말렸다. 이후 홍치제는 만귀비의 눈을 피해 폐위되었던 오폐후와 환관 장민 등의 도움으로 궁궐 안에서 비밀리에 길러졌다.

2. 3. 죽음과 추존

성화 11년(1475년), 아들 홍치제의 존재가 성화제에게 알려졌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만귀비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후 숙비로 추봉되었고, '''공각장희숙비'''(恭恪莊僖淑妃)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아들 홍치제가 즉위하자 황후로 추존되었고, 시호를 추가하여 '''효목자혜공각장희숭천승성순황후'''(孝穆慈慧恭恪莊僖崇天承聖純皇后)로 추시되었다. 그러나 가정제효숙황후의 경우와 같이 서후(庶后)라는 이유로 황제의 제호를 삭제하고 '''효목자혜공각장희숭천승성황후'''(孝穆慈慧恭恪莊僖崇天承聖皇后)로 다시 추시되었다. 능호는 무릉(茂陵)이다.

3. 가계와 관련된 논란

홍치제는 즉위 후 생모인 기씨의 친족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조사를 명했다. 하지만 기씨의 생가나 친족에 대해 아는 사람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스스로 기씨의 숙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조사 결과 모두 가짜로 밝혀졌다. 홍치제는 이들을 처벌하지는 않았다. 결국 기씨의 친족을 찾는 데 실패한 홍치제는 생모의 고향으로 알려진 하현를 세워 어머니를 기렸다.

4. 사후

(내용 없음)

4. 1. 능호

능호는 무릉(茂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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