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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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창공원은 서울특별시 용산구에 있는 공원이다. 조선 시대에는 문효세자 등의 묘역인 효창원이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골프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해방 이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와 김구 등의 유해가 안장되어 독립운동 성지로서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현재는 백범김구기념관, 삼의사 묘역, 의열사 등의 시설이 있으며, 공원 정체성을 두고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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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효창공원 |
로마자 표기 | Hyochang kongwon |
한자 표기 | 孝昌公園 |
다른 이름 | 효창근린공원 서울 효창공원 |
위치 |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원로 177-18 (04311) |
좌표 | 37°32′42″N 126°57′40″E |
면적 | 12.33 헥타르 (30.47 에이커) |
설립일 | 공원 (1924년) 묘지 (1786년) |
관리 주체 | 용산구청 |
대중교통 | 효창공원앞역 |
개방 시간 | 매일 |
문화재 정보 | |
유형 | 사적 |
지정 번호 | 330 |
지정일 | 1989년 6월 8일 |
주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청파동2가 2번지 마포구 신공덕동, 공덕동 |
시대 | 조선 |
문화재청 번호 | 13,03300000,11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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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효창공원은 원래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거진 한적한 곳으로, 조선 시대에는 왕실 묘역이었다.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원'이 있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구용산고지'라 불리며 일본군의 숙영 및 독립군 토벌 작전지로 사용되었다. 1940년 조선총독부 고시에 의해 '효창공원'으로 지정되었다.[24]
1945년 광복 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 등 삼의사와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선생 등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안장되었고, 1949년에는 김구 선생의 유해도 안장되었다.[24] 1989년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고, 2002년 백범기념관이 건립되었다.[24]
1956년 정부가 효창운동장 건립을 발표하자 대한민국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이 반대했으나, 1960년 운동장이 준공되었다.[24][25][26]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대통령 역시 골프장 건설을 시도하다 저지당하고, 1969년 반공투사 위령탑, 1972년 노인회 시설 등이 설치되었다.[24][27]
1980년대 전두환 정부부터 묘지이자 역사 유적지로 재해석되기 시작하여, 1988년 11월 의열사와 창열문이 건립되었고, 1989년 6월 8일 대한민국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
2002년 김대중 정부 시절 테니스장 자리에 김구 박물관이 건립되었으나, 체육 관련 단체의 반발이 있었다.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경기장 철거 및 추모 공원화 계획을 발표했으나, 반대 여론으로 중단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추모 기능 강화를 주장했고, 2019년 한국독립당 창당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공원 정비 사업이 계획되어 2024년 완료될 예정이다.[22][23]
2. 1. 조선 시대
원래 효창공원 자리는 송림(松林)이 우거지고 인적이 드물었던 곳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왕실 묘역으로, 정조의 맏아들로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난 문효세자의 무덤이 있었다. 당시에는 '효창원'(孝昌園)이라 불렀다. 같은 묘역에는 정조의 후궁이자 문효세자의 생모인 의빈 성씨의 묘, 순조의 후궁인 숙의 박씨의 묘, 숙의 박씨의 소생인 영온옹주의 묘 등이 있었다.[24]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300여 명이 효창원 앞 송림 내의 선혜청 (宣惠廳) 창고였던 만리창이 있던 곳에 야영을 하며 숲이 파헤쳐지기도 했다.[24]
『정조실록』에 따르면, 정조의 네 살 난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가 1786년 7월 19일에 이 지역에 묻혔다.[10][3][9] 정조는 묘소 위치가 길지이고 경복궁과 가까운 곳이기를 원했다. 그는 신하들과 풍수 전문가들과 함께 적절한 장소를 찾았다. 정조는 묘소가 될 곳을 세 번이나 방문한 후, 햇볕이 잘 드는 언덕과 숲, 그리고 한강이 보이는 경치에 만족하여 그곳을 택했다고 한다.[9]
이 지역은 그 후 "효창묘"(효창묘|孝昌墓한국어)라고 불렸는데, "효창"은 "효성스럽고 번성하다"는 뜻이다.[9] 문효세자의 어머니인 의빈 성씨는 다섯 달 후인 9월 14일에 사망하여 그 근처에 묻혔다. 수귀 박씨와 영온옹주 또한 같은 지역에 묻혔다. 1870년, 고종은 이 지역의 이름을 "효창원"(효창원|孝昌園한국어)으로 바꾸었다.[10][3][9]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 시대에는 이 주변 지역을 애기릉한국어이라고 불렀다.[9]
2. 2. 일제강점기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300여 명이 효창원 앞 송림 내의 선혜청 창고였던 만리창이 있던 곳에 야영을 하며 숲이 파헤쳐지기도 했다.[24] 일제강점기 때에는 일제에 의해 '구(舊)용산고지' 라 불리며 일본군이 숙영 목적과 독립군 토벌 및 소탕 작전 등을 펼쳤던 비밀 작전지로도 사용되었으며, 문효세자의 묘 등을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이전하면서 1940년 조선총독부 고시 제208호에 의해 '효창공원'이 되었다.[24]
일제강점기 당시 이 지역의 이름은 구용산고지(舊龍山高地|구용산고지일본어)로 바뀌었다.[3] 당시 서울에서 가장 큰 녹지였다. 1915년 용산경찰서에서는 이 지역에서 신임 서장 취임식을 거행했다.[9]
1921년 6월, 일제는 묘소 주변에 한국 최초의 골프장을 조성했다.[13][9][10] 묘소는 경기 라인에 바로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울타리가 쳐졌다.[12] 영국인이 설계하고 인근 호텔이 운영하는 9홀 골프장이었다.[14]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도 이 골프장에서 플레이를 했지만,[9] 대부분의 선수는 일본인이었다.[14] 이 골프장은 1924년에 문을 닫았다.[10][9][13]
1924년 6월, 이 지역은 81460pyeong 규모의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8월에는 공원에 도로가 포장되고 최초의 공중화장실이 설치되어 일반인들의 접근성이 향상되었다.[3] 1925년에는 주변 지역에서 을축년 대홍수로 수백 명의 사망자를 냈다.[15][10] 홍수 후유증으로 이 지역에 임시 피난민 캠프가 설치되었다.[10][9]
1920년대 후반, 서울의 일본 거주민들은 일제와 서울시에 압력을 행사하여 토지 소유주인 이왕직으로 하여금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했다. 결국 이왕직은 이 지역 토지의 절반 이상을 무상으로 임대했다.[9]
1930년대에는 놀이공원으로 바뀌었다. 어린이 놀이기구가 설치되었고 다양한 벚나무와 플라타너스 나무가 심어졌다.[9]
1940년 3월 12일, 일제는 이 공원에 현재의 이름인 "효창공원"을 부여했다.[9][16] 왕비의 묘는 조선왕릉 고양시 경기도로 이전되었다. 문효세자의 묘도 1944년 다른 대부분의 묘와 함께 이전되었다.[9][10][13] 이전 후 왕비와 황태자의 묘는 2km 이상 떨어져 있게 되었는데, 이는 정조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었다.[9][10] 그 자리에는 침략전쟁 희생자 위령비가 세워졌다.[10] 노형석은 ''한겨레'' 기고에서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 전쟁을 고려할 때 위령비는 위선적이며, 묘소 이전은 "만행"이라고 비판했다.[9] 그러나 윤현철, 류성룡의 2021년 논문은 관련 기록이 유실되어 일본이 묘소 이전에 책임이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고 주장했다.[13]
2. 3. 해방 이후
1945년 해방 후 일본군 숙영지가 철거되고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등 삼의사의 유해 및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등의 유해가 안장되었다.[24] 1949년 7월에는 김구의 유해가 이 공원 묘역에 안장되었으며, 1989년 사적 330호로 지정되었다.[24] 2002년에는 주변에 백범기념관이 건립되기도 했다.[24] 또한 원효대사 동상, 반공기념탑, 효창운동장이 있다.1956년 정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이장하고 효창운동장을 건립하겠다는 발표를 하자 6월 9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은 "선열에 대해서는 물질보다 추모의 정신으로 보답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반대하였다.[25][26] 공사중지건의안은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나[25][26] 효창운동장의 공사는 강행되었고, 1960년에는 운동장이 준공되었다.[24]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골프장을 만들려는 공사를 시도하다 저지당하고, 1969년에는 효창공원에 반공투사 위령탑, 1972년에는 김구의 묘 옆에 노인회서울시연합회와 대한노인회중앙회 시설을 세웠다.[27][24]
공원에는 8명의 저명한 한국 독립운동가 매장되어 있다.[19][10][5]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묘소는 삼의사묘로 알려져 있다.[5] 안중근의 임시 묘소도 이 세 분 묘소 바로 옆에 있지만, 2021년 현재 그의 유해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어 있다.[5] 김구 또한 이 공원에 묻혀 있다.[5][2][3]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이 공원에 묻혀 있다.[2][3][10]
2002년 10월에 개관한 김구 기념관이 공원 안에 있다.[3][10] 기념관 앞에는 이봉창 동상이 서 있다. 또한 공원에는 7명의 독립운동가가 봉안된 한옥 양식의 의열사가 있다.[5][16][13]
2. 4. 훼손과 정체성 논란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300여 명이 효창원 앞 송림 내의 선혜청 창고였던 만리창이 있던 곳에 야영을 하며 숲이 파헤쳐졌다.[24]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구(舊)용산고지'라 불리며 일본군이 숙영 목적으로 사용했고, 독립군 토벌 및 소탕 작전 등을 펼쳤던 비밀 작전지로도 사용되었다. 또한, 문효세자의 묘 등을 경기도 고양의 서삼릉으로 이전하면서 1940년 조선총독부 고시 제208호에 의해 '효창공원'이 되었다.[24]1956년 정부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이장하고 효창운동장을 건립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에 대한민국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은 "선열에 대해서는 물질보다 추모의 정신으로 보답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공사 중지 건의안을 냈고,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25][26] 그러나 효창운동장 공사는 강행되어 1960년 운동장이 준공되었다.[24]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골프장을 만들려는 공사를 시도하다 저지당했다. 1969년에는 효창공원에 반공투사 위령탑을 세웠고, 1972년에는 김구의 묘 옆에 노인회서울시연합회와 대한노인회중앙회 시설을 세웠다.[27][24]
김구, 김창숙 등은 원래 이 공원을 독립운동을 기리는 조용한 성역으로 만들고자 했다.[13][9] 그러나, 김구 암살, 한국전쟁, 그리고 김구와 이승만 사이의 긴장된 관계는 이 공원이 국립묘지가 되는 것을 막았다. 이승만은 김구 사후 애도자들을 막기 위해 경찰을 공원에 배치하기까지 했다.[9][18]
1956년 이승만은 서울시 정부와 공모하여 독립운동가들의 묘소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고 그 자리에 경기장과 순환 도로를 건설하려 했다.[13][9] 정부는 아이들이 그 지역에서 놀면서 독립운동가들의 묘소를 훼손한다는 구실을 내세웠다.[9] 이에 대해 생존해 있는 독립운동가들과 관련 인물들의 반발이 있었다. 김창숙은 묘소 이장을 막기 위해 불도저 앞에 드러누웠고, "효창공원을 통곡함"이라는 제목의 시를 동아일보에 발표했다.[9]
결국 국회의 만장일치 결의로 이장은 막혔다. 이 결의안은 독립운동가 김좌진의 아들인 김두한이 발의했다.[9] 이장이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는 효창운동장 건설을 강행했다. 1959년 6월 서울이 1970년 아시안 게임 개최지로 선정된 후, 김구 유족은 묘소 이장 없이 인근에 경기장과 도로 건설을 허용했다.[13][9][17]
박정희 정부는 공원의 정체성을 독립운동가 묘역이나 기념공원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골프장이 계곡에 건설되었고, 계곡 양쪽에는 독립운동가들의 묘소가 있었다. 체육 시설, 음식 및 음료 판매대, 노인 복지관이 건설되었다. 1969년 북한 반공투사 위령탑도 건설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다.[6][16][9] 원효대사상도 1969년에 설치되었다.[6] 박정희는 1974년 사망한 자신의 부인 육영수의 동상도 설치했지만, 김구 동상도 함께 설치했다.[18]
2. 5. 최근의 변화
1980년대 전두환 정부부터 공원의 정체성이 묘지이자 역사 유적지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16] 1988년 11월에는 의열사와 창열문이 건립되었고,[16][10][13] 1989년 6월 8일, 효창공원은 대한민국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16][2][10]
2002년 김대중 정부 시절 테니스장 자리에 김구 박물관이 건립되었으나,[18] 체육 관련 단체의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10]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경기장 철거 및 공원의 추모 공원화 계획을 발표했으나, 반대 여론에 부딪혀 계획이 중단되었다.[18]
노형석에 따르면, 공원의 정체성(그리고 공원 내 묘소에 대한 대중의 인식조차)은 여전히 불확실하며,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은 공원을 여가 공간으로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13][10] 2018년 한겨레는 효창원의 추모 기능 강화를 주장하는 "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효창원을 사랑하는 사람들|한국어)이라는 단체의 대표를 인터뷰했다.[6]
2015년 2월 9일, 문재인 대통령은 공원의 추모 기능 강화를 주장했다.[19] 2017년 8월 15일, 문 대통령은 공원에서 한국독립당(KPG)을 위한 추모식에 참석했다.[20] 2018년에는 국가보훈처가 경기장 철거 계획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19] 2019년, 한국독립당(KPG) 창당 100주년 기념 사업의 일환으로 공원 정비 및 재정비 사업이 계획되었으며,[21] 이 계획의 일환으로 의열사 이전이라는 논란이 발생했다. 공원이 사적으로 지정된 역사 유적지이기 때문에, 2020년 10월부터 12월까지 역사, 건축, 풍수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서면 인터뷰를 진행했으나, 전문가 대다수가 이전에 반대했다.[13] 전체 계획은 2024년까지 완료될 예정이다.[22][23]
3. 주요 시설
효창공원은 12.3307ha 면적에 소나무와 벚꽃 등 70종 이상, 10만 그루가 넘는 나무가 울창하게 심어져 있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2][3][4][16] 공원 곳곳에는 그네 의자가 설치되어 있으며,[5] 작은 호수에는 사람과 생명의 근원인 물 사이의 소통을 상징하는 파란 기둥 조형물이 있다.[5] 신라 시대 학자인 원효의 동상도 볼 수 있다.[16][6]
어린이 놀이터, 배드민턴 코트, 노인정(대한노인회)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어 운동과 여가를 즐기기에 좋다.[9][16] 서울 지하철 6호선과 경의중앙선이 지나는 효창공원역 1번 출구에서 도보로 8~10분 거리에 있다.[4][2][5] 빽빽한 도시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인근에는 효창어린이공원과 대한민국 건국 후 처음 건설된 경기장인 효창운동장이 있고, 동쪽에는 숙명여자대학교가 있다.[2][3][10]
3. 1. 백범 김구의 묘
1949년 6월, 백범 김구가 암살되면서 국민장을 통해 김구의 유해가 안장되었다. 묘소는 백범기념관 위쪽에 위치해 있으며,[19][10][5] 묘소 주변에는 무궁화(대한민국의 국화) 나무가 심어져 있다.3. 2. 삼의사 묘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義士) 3인의 유해를 안장한 묘소로서 3개의 묘소와 비석이 있다. 이 3의사 묘 옆에는 안중근 의사를 위해 남겨놓은 가묘(假墓)가 있는데, 유일하게 유골이 없는 가묘이다.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게 되어 국내로 봉환될 경우 이 가묘에 공식 안장할 예정이다. 이 가묘에는 비석이 설치되었다.
묘소 아래 난간 벽에는 "유방백세(遺芳百世)"(遺芳百世|유방백세한국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후세에 아름다운 길을 열었다"로 번역할 수 있다. 안중근의 임시 묘소도 이 세 분 묘소 바로 옆에 있지만, 2021년 현재 그의 유해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어 있다.[7]
이들 묘소 주변에는 각 인물에게 헌정된 여러 무궁화(대한민국의 국화) 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봉창의 무궁화에는 그가 젊은 시절 이 공원에서 놀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윤봉길의 무궁화는 1932년 그가 참여했던 훙커우 공원 사건 기념일인 같은 시간(오전 11시 40분)에 심어졌다.[5]
3. 3. 임정 요인의 묘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는 묘소이며 삼의사묘와 마찬가지로 3개의 묘소와 비석이 세워져 있다.[2][3][10] 이들 인물을 위한 추모식이 매년 열린다.[16][13]3. 4. 의열사
공원에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의 묘소인 삼의사묘가 있다. 묘소 아래 난간 벽에는 "후세에 아름다운 길을 열었다"로 번역할 수 있는 "遺芳百世|유방백세한국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안중근의 임시 묘소도 이 세 분 묘소 바로 옆에 있지만, 2021년 현재 그의 유해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비어 있다.[7] 김구 또한 이 공원에 묻혀 있다.[5][2][3]
이들 묘소 주변에는 각 인물에게 헌정된 여러 무궁화(대한민국의 국화) 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봉창의 무궁화에는 그가 젊은 시절 이 공원에서 놀았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윤봉길의 무궁화는 1932년 그가 참여했던 훙커우 공원 사건 기념일인 같은 시간(오전 11시 40분)에 심어졌다.[5]
이동녕, 차리석, 조성환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이 공원에 안장되어 있다.
공원에는 7명의 독립운동가가 봉안된 한옥 양식의 의열사가 있다.[5][16][13]
3. 5. 백범기념관
김구를 기념하기 위해 2002년 10월 김구 기념관이 공원 안에 개관하였다.[3][10] 기념관 앞에는 이봉창 동상이 서 있다.4. 논란
효창공원은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면서도 체육 시설, 위락 시설 등이 함께 있어 그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어 왔다.
4. 1. 묘역 이전 및 훼손 논란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 300여 명이 효창원 앞 송림 내 선혜청 창고였던 만리창이 있던 곳에 야영하며 숲이 파헤쳐졌다.[24]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구(舊)용산고지'라 불리며 일본군 숙영 및 독립군 토벌 작전에 사용되었고, 문효세자 묘 등이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이전되면서 1940년 조선총독부 고시 제208호에 의해 '효창공원'이 되었다.[24]1956년 정부가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이장하고 효창운동장 건립을 발표하자, 대한민국 국회 김두한 의원은 "선열에 대해서는 물질보다 추모의 정신으로 보답해야 한다"며 반대했다. 공사 중지 건의안은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나,[25][26] 1960년 운동장이 준공되었다.[24]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역시 골프장 건설을 시도하다 저지당하고, 1969년 반공투사 위령탑, 1972년 김구 묘 옆에 노인회 시설을 세웠다.[27][24]
4. 2. 공원 정체성 논란
원래 효창공원 일대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우거진 한적한 곳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왕실 묘역으로,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무덤인 '효창원'이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주둔하며 숲이 훼손되기도 했다.[24]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의 비밀 작전지로 사용되었고, 문효세자의 묘 등이 서삼릉으로 이전되면서 1940년 '효창공원'으로 지정되었다.[24]해방 후 1946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삼의사와 이동녕, 조성환, 차이석 등의 유해가 안장되었고, 1949년에는 김구의 유해가 안장되었다.[24]
1956년 정부가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이장하고 효창운동장을 건립하려 하자, 대한민국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은 "선열에 대해서는 물질보다 추모의 정신으로 보답해야 한다"라며 반대했다.[25][26] 공사 중지 건의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나, 1960년 운동장이 준공되었다.[24]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도 골프장 건설을 시도하다 저지당했고, 1969년에는 반공투사 위령탑, 1972년에는 노인회 시설을 세웠다.[27][24]
이처럼 효창공원은 독립운동가들의 묘역이자, 동시에 체육 시설, 위락 시설 등이 혼재되어 그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어 왔다.
1980년대 전두환 정부부터는 공원의 정체성이 묘지이자 역사 유적지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1989년 6월 8일, 효창공원은 대한민국 사적 제330호로 지정되었다.[16][2][10]
2002년에는 김구 기념관이 건립되었지만, 체육 시설 존치 문제 등으로 논란은 계속되었다.[3][10]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은 경기장 철거 및 추모 공원화를 추진했으나, 반대에 부딪혀 중단되었다.[18]
문재인 대통령은 공원의 추모 기능 강화를 주장했고,[19] 2019년에는 공원 정비 사업이 계획되었으나, 의열사 이전 문제 등으로 논란이 일었다.[21][13]
5. 기타 시설
효창공원은 12.3307ha의 면적에 광활한 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2][3] 벚꽃 나무도 있으며, 총 70종 이상의 나무 10만 그루가 넘게 심어져 있다.[4][16] 다양한 그네 의자가 설치되어 있고,[5] 작은 호수에는 사람과 생명의 근원인 물 사이의 소통을 상징하는 파란 기둥 조형물이 있다.[5] 신라 시대 학자 원효의 동상도 있다.[16][6]
어린이 놀이터, 배드민턴 코트, 노인정 등 편의시설이 있어 운동하기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9][16]
6. 교통
효창공원역 1번 출구에서 도보로 8~10분 거리에 있으며, 서울 지하철 6호선과 경의중앙선이 지난다.[4][2][5]
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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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ul Hyochang Park (서울 효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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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Tourism Organization
2023-07-19
[2]
웹사이트
Hyochang Park, Seoul
https://english.cha.[...]
2023-07-17
[3]
웹사이트
Hyochang Park in Seoul
https://encykorea.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3-07-17
[4]
웹사이트
Hyochang Park
https://english.visi[...]
Seoul Tourism Organization
2023-07-16
[5]
웹사이트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효창공원 다섯 무궁화 이야기'
https://mediahub.seo[...]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2023-07-17
[6]
웹사이트
김구 등 7명 잠든 효창공원에 반공탑·축구장 들어선 사연
https://www.hani.co.[...]
2023-07-17
[7]
웹사이트
"안중근 의사 유해는 '둥산포'에 묻혀 있을 것"
http://www.sisajourn[...]
2023-07-17
[8]
웹사이트
105주년 삼일절…효창공원에 태극기 꽃나무
http://www.atlasnews[...]
2024-04-02
[9]
웹사이트
왕실묘→골프장→유원지→독립투사 묘지 '영욕의 232년'
https://www.hani.co.[...]
2023-07-17
[10]
웹사이트
'옷소매' 성덕임과 그의 아들의 묘가 '효창공원'에?
https://mediahub.seo[...]
Seoul Metropolitan Government
2023-07-17
[11]
웹사이트
http://hyochangpark.[...]
2024-05-02
[12]
웹사이트
https://museum.seoul[...]
2023-07-18
[13]
논문
VR and AR Restoration of Urban Heritage: A Virtual Platform Mediating Disagreement from Spatial Conflicts in Korea
2021-11-20
[14]
웹사이트
[FOUNTAIN]New milestone in Korean golf
https://koreajoongan[...]
2023-07-17
[15]
뉴스
Flood in Korea Wiped Out Entire Villages; Refugees on Floating Roofs Cry Vainly for A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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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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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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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Hyochang Stadium, Korea's First International Soccer Stadi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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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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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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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king independence fighters - either leaders or grassroo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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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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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ochang Park, Resting Place of Independence Activists, to Become Centenary Memorial 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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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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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dress by President Moon Jae-in on 101st Anniversary of Founding of Provisional Republic of Korea Gover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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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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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효창공원 둘레길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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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25
[24]
서적
표석을 따라 경성을 거닐다
유씨북스
2016-12
[25]
뉴스
효창공원 공사중지를 건의 국회선열묘존엄성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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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56-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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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효창공원문제논의
http://newslibrary.n[...]
경향신문
1956-06-10
[27]
뉴스
효창 공원 독립투사들의 수난
https://news.naver.c[...]
MBC 뉴스데스크
2007-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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