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오 마사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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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오 마사유키는 1917년 도치기현에서 태어나 조치 대학을 졸업하고 요미우리 신문 기자를 거쳐 1963년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후쿠다 다케오의 측근으로 활동했으며, 스즈키 젠코 내각에서 노동상, 나카소네 야스히로 내각에서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과 문부상을 역임했다. 문부상 재임 시절 역사 인식을 둘러싼 발언으로 파면되었고, 이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그는 친대만파 의원으로 활동하며 중국 및 대한민국에 강경한 입장을 보였으며, 리크루트 사건으로 자민당의 금권 정치를 비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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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오 마사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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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출생일 | 1917년 1월 1일 |
출생지 | 도치기현, 일본 |
사망일 | 2006년 10월 22일 |
사망지 | 도쿄, 일본 |
출신 학교 | 메이지 대학 (중퇴), 조치 대학 문학부 신문학과, 조치 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
이전 직업 | 요미우리 신문 기자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칭호 및 훈장 | 정3위, 훈1등 욱일대수장, 영년 재직 의원, 문학사 |
정치 경력 | |
직책 | 중의원 의원 |
선거구 | 구 도치기 2구 |
당선 횟수 | 11회 |
임기 시작 | 1963년 11월 22일 |
임기 종료 | 1996년 9월 27일 |
주요 직책 | |
총리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임기 시작 | 1986년 7월 22일 |
임기 종료 | 1986년 9월 9일 |
이전 | 가이후 도시키 |
이후 | 시오카와 마사주로 |
총리 | 스즈키 젠코 |
임기 시작 | 1980년 7월 17일 |
임기 종료 | 1981년 11월 30일 |
이전 | 후지나미 다카오 |
이후 | 하쓰무라 다키이치로 |
기타 직책 |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
소속 정당 | 자유민주당 |
총재 | 나카소네 야스히로 |
임기 시작 | 1983년 |
임기 종료 | 1986년 |
2. 생애
1917년 1월 1일 도치기현에서 태어났다. 메이지 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한 뒤 조치 대학 문학부 신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요미우리 신문』 기자가 되었다가 고노 이치로의 권유로 1963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됐다.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고노가 이끄는 춘추회에 가입했다가 고노 사후에 후쿠다 다케오가 이끄는 청화회로 옮겼다. 후지오는 매일같이 후쿠다의 자택을 찾아 지도를 받을 정도로 측근이었다.[3]
메이지 대학을 다니다가 중퇴한 뒤 조치 대학 문학부 신문학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요미우리 신문』 기자가 되었다가 고노 이치로의 권유로 1963년 총선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고노가 이끄는 춘추회에 가입했다가 고노 사후에 후쿠다 다케오가 이끄는 청화회로 옮겼다. 후지오는 매일같이 후쿠다의 자택을 찾아 지도를 받을 정도로 측근이 되었다.[3]
1973년 4월, 중일항공협정 체결 과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배려하고 중화민국을 경시하는 내용의 일본 외무성 공전기밀전보를 폭로했다.[3] 이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중일 국교 정상화 추진에 반대하는 후쿠다 다케오 파의 입장을 대변한 것으로, 후지오는 친대만파이자 보수파로서 중국과 대한민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했다.[3]
후지오 마사유키는 제3차 나카소네 내각에서 문부상에 임명되었으나,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와 관련하여 "전쟁에서 사람을 죽여도 살인(죄)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도쿄 재판은 승자의 재판이므로 부당하다", "한국 병합은 합의에 따라 형성된 것으로 일본뿐 아니라 한국측에도 책임이 있다"는 등의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되었다.[7] 이 발언은 『분게이슌주』 1986년 10월호에 게재되었고, 야당의 비판과 대한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
간행물
週刊現代2020年11月14・21日号、連載亀井静香の政界交差点、第79回藤尾正行、福田赳夫に生涯を捧げ、中曽根康弘を一喝した男
1972년 사토 에이사쿠가 총재에서 물러나자 다나카 가쿠에이와 후쿠다의 경쟁인 각복전쟁이 심화되었다. 후지오는 다나카의 금권 정치를 맹비난하며 후쿠다를 지원했으나[3] 결국 다나카가 후임 총재로 선출되었다.
다나카는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해 중일국교정상화를 이루어냈다. 이 과정에서 1973년 4월에 「일중항공협정」을 체결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을 배려해주면서 중화민국을 경시하는 외무성 공전기밀전보를 후지오가 폭로했다. 후지오는 후쿠다와 함께 친대만파 성향으로 중국과 대한민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3]
같은 해 7월에는 자민당 내에서 파벌에 상관없이 결성된 보수정책집단인 청람회에 참여했다. 1975년에 중의원 문교위원장과 일본경영관리협회장을 역임했으며[5] 1976년에는 중의원 내각위원장에 취임했다.
1980년 스즈키 젠코 내각이 출범한 7월에 노동상으로 입각해 1년 4개월을 재임했다. 1983년부터 3년간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으로 재임했다. 정조회장으로 재임하던 1985년에 대장성이 지방자치체에 지급하는 보조금을 삭감하는 법안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며 대장성 관료의 자민당 정조회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결과적으로 대장상 다케시타 노보루가 중재하여 대장성이 후지오의 주장을 반영하기로 하면서 출입 금지 조치는 해제됐다.
1986년 7월에 출범한 제3차 나카소네 내각에 문부상으로 입각했지만 후지오의 역사 인식을 둘러싼 발언으로 비판을 받자 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관방장관 고토다 마사하루로부터 사임을 종용받았다. 하지만 후지오는 이를 거부하고 파면을 선택했다. 총리대신의 각료파면권은 1953년 농림상 히로카와 고젠 이후 33년 만에 행사되었으며 헌정사상 3번째 일이었다.
문부상에서 파면된 이후 후지오는 더 이상 각료나 당직을 맡지 않았다. 1988년에 리크루트 사건이 터져 다케시타 내각이 퇴진한 다음에도 경세회가 자민당을 지배하고 당이 금권 체질에 절인 것을 비판했다. 1990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가네마루 신이 김일성에게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자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한편 일화의원간담회장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해 친대만파 의원의 대표격 존재가 되었다. 1996년에 정계를 은퇴했다. 1998년 11월에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6]
2006년 10월 22일에 폐렴으로 도쿄도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향년 89세.
3. 정치 경력
1972년 사토 에이사쿠가 총재에서 물러나자 다나카 가쿠에이와 후쿠다의 경쟁인 각복전쟁이 심화되었다. 후지오는 다나카의 금권 정치를 맹비난하며 후쿠다를 지원했으나[3], 결국 다나카가 후임 총재로 선출되었다.
다나카는 중국과의 관계를 중시해 중일국교정상화를 이루어냈다. 이 과정에서 1973년 4월에 「일중항공협정」을 체결하면서 중화인민공화국을 배려해주면서 중화민국을 경시하는 외무성 공전기밀전보를 후지오가 폭로했다. 후지오는 후쿠다와 함께 친대만파 성향으로 중국과 대한민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3]
같은 해 7월에는 자민당 내에서 파벌에 상관없이 결성된 보수정책집단인 청람회에 참여했다. 1975년에 중의원 문교위원장과 일본경영관리협회장을 역임했으며[5] 1976년에는 중의원 내각위원장에 취임했다.
1980년 7월, 스즈키 젠코 내각의 노동상으로 입각해 1년 4개월을 재임했다. 1983년부터 3년간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으로 재임했다. 정조회장으로 재임하던 1985년에 대장성이 지방자치체에 지급하는 보조금을 삭감하는 법안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며 대장성 관료의 자민당 정조회 출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결과적으로 대장상 다케시타 노보루가 중재하여 대장성이 후지오의 주장을 반영하기로 하면서 출입 금지 조치는 해제됐다.
1986년 7월, 제3차 나카소네 내각에 문부상으로 입각했지만 후지오의 역사 인식을 둘러싼 발언으로 비판을 받자 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관방장관 고토다 마사하루로부터 사임을 종용받았다. 하지만 후지오는 이를 거부하고 파면을 선택했다. 총리대신의 각료파면권은 1953년 농림상 히로카와 고젠 이후 33년 만에 행사되었으며 헌정사상 3번째 일이었다.
문부상에서 파면된 이후 후지오는 더 이상 각료나 당직을 맡지 않았다. 1988년에 리크루트 사건이 터져 다케시타 내각이 퇴진한 다음에도 경세회가 자민당을 지배하고 당이 금권 체질에 절인 것을 비판했다. 1990년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한 가네마루 신이 김일성에게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자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한편 일화의원간담회장 자리를 오랫동안 유지해 친대만파 의원의 대표격 존재가 되었다. 1996년에 정계를 은퇴했다.
4. 주요 활동
1975년 중의원 문교위원장 및 일본경영관리협회장을,[5] 1976년에는 중의원 내각위원장을 역임했다.
1985년 대장성이 지방 자치체에 대한 보조금 삭감 법안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하며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에 대장성 관료의 출입을 금지했다. 이후 다케시타 노보루 대장대신의 중재로 대장성이 후지오의 주장을 전면 수용하여 출입 금지가 해제되었다.
1990년 가네마루 신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김일성에게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자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
5. 논란과 비판
총리대신 나카소네 야스히로는 외교 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하여 후지오에게 자진 사임을 요구했으나, 후지오는 "발언을 문제삼는다면 파면하면 된다"라며 사임을 거부했다. 결국 나카소네는 파면권을 발동하여 후지오를 파면했다.[7]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총리관저는 사전에 후지오의 발언 내용을 알고 있었으며, 관방장관 고토다 마사하루가 『분게이슌주』에 외무성 아시아국장을 파견하여 기사 내용 수정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는 사전 검열로 헌법 위반이라는 비판을 받았다.[7]
후지오는 자신의 발언에 대해 "시류에 영합하는 나카소네의 임시방편적 외교에 파문을 일으키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이었다"고 주장했다. 고바야시 요시노리는 나카소네가 한국의 심기를 고려해 후지오를 파면했다고 주장했다.[8] 이 사건으로 후지오는 신념을 가진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한국과 중국에서는 극우 망언 정치가라는 비판을 받았다.
파면 직후, 후지오는 『분게이슌주』에 「방언(放言)대신 다시 짖다」라는 글을 기고하여 분게이슌주 독자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의 평전도 출판되었다.
같은 파벌의 가메이 시즈카는 나카소네의 기회주의적 행동에 대한 후지오의 불만이 파면의 배경에 있었다고 회고했다.[3]
6. 역대 선거 기록
선거명 회차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 여부 비고 1960년 총선거 29회 도치기현 제2구 무소속 22,619표 7.3 9위 낙선 중선거구제 1963년 총선거 30회 도치기현 제2구 자유민주당 42,226표 14.5 4위 당선 중선거구제 1967년 총선거 31회 도치기현 제2구 자유민주당 34,901표 10.7 5위 당선 중선거구제 1969년 총선거 32회 도치기현 제2구 자유민주당 48,529표 13.7 1위 당선 중선거구제 1972년 총선거 33회 도치기현 제2구 자유민주당 50,033표 13 5위 당선 중선거구제 1976년 총선거 34회 도치기현 제2구 자유민주당 61,382표 15.1 2위 당선 중선거구제 1979년 총선거 35회 도치기현 제2구 자유민주당 53,595표 14.8 4위 당선 중선거구제 1980년 총선거 36회 도치기현 제2구 자유민주당 67,009표 16.4 3위 당선 중선거구제 1983년 총선거 37회 도치기현 제2구 자유민주당 61,494표 15.4 5위 당선 중선거구제 1986년 총선거 38회 도치기현 제2구 자유민주당 80,364표 18.58 1위 당선 중선거구제 1990년 총선거 39회 도치기현 제2구 자유민주당 71,804표 15.77 2위 당선 중선거구제 1993년 총선거 40회 도치기현 제2구 자유민주당 61,628표 13.7 2위 당선 중선거구제
참조
[2]
뉴스
JAPANESE OFFICIAL FIRED OVER KOREA, CHINA REMARKS
https://www.chicagot[...]
Chicago Tribune
1986-09-09
[3]
간행물
週刊現代2020年11月14・21日号、連載亀井静香の政界交差点、第79回藤尾正行、福田赳夫に生涯を捧げ、中曽根康弘を一喝した男
[4]
웹사이트
"#22石原信雄(22)PKO協力法自衛隊の海外派遣に道 天皇の訪中 初めて実現"
https://www.nikkei.c[...]
2019-06-23
[5]
웹사이트
協会歴代会長
https://www.jima.org[...]
[6]
뉴스
98年秋の叙勲 勲三等以上と在外邦人、及び外国人の受章者一覧
読売新聞
1996-11-03
[7]
문서
江藤淳『同時代への視線』「総理官邸の「事前検閲」」
[8]
서적
新・ゴーマニズム宣言SPECIAL 戦争論2
幻冬舎
2001-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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