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17세기 프랑스 문학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17세기 프랑스 문학은 앙리 4세의 낭트 칙령(1598)부터 루이 14세의 사망(1715)까지의 시기에 프랑스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며 발전했다. 이 시기 왕권은 강화되었고, 예술에 대한 지원을 통해 "프랑스 고전주의" 사조가 확립되었다. 바로크와 고전주의 문학이 공존하며, 살롱과 아카데미가 문학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주요 작가로는 피에르 코르네유, 장 라신, 몰리에르, 라파예트 부인, 장 드 라 퐁텐 등이 있으며, 이들의 작품은 인간 심리, 도덕적 딜레마, 사회적 가치를 탐구하며 프랑스 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세기 프랑스 - 프롱드의 난
    프롱드의 난은 1648년부터 1653년까지 프랑스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왕권 강화에 대한 반발과 과도한 세금 부과에 대한 불만으로 시작되어 쥘 마자랭 추기경과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으로 변질되었고, 결국 실패했으나 루이 14세의 절대주의 왕정 체제 확립에 영향을 미쳤다.
  • 17세기 프랑스 - 콜베르주의
    콜베르주의는 17세기 프랑스 재무장관 장-바티스트 콜베르의 중상주의 경제 정책으로, 수출 증대와 수입 억제를 통해 무역 흑자를 달성하고 국내 산업을 육성하려 했으나, 자유 시장 저해 및 혁신 저해 비판과 함께 20세기 후반에는 국가 주도의 기술 개발 모델로도 나타났다.
  • 문학사 - 중세 문학
    중세 문학은 5세기부터 15세기까지 유럽을 중심으로 다양한 언어와 주제, 형태를 아우르며 발전했고, 익명 작품과 종교, 세속 문학 등 다양한 장르를 포함하며, 사회상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문학사 - 고대 문학
    고대 문학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 그리스, 로마 등지에서 서사시, 서정시, 역사서, 철학서, 종교 경전 등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
  • 프랑스 문학 - 소극
    우스꽝스러운 상황과 과장된 등장인물로 웃음을 유발하는 연극 장르인 소극은 중세 전례극에서 시작하여 막간극 형태로 발전, 사회 풍자와 해학을 담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현대에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 프랑스 문학 - 중세 프랑스 문학
    중세 프랑스 문학은 9세기부터 15세기까지 프랑스어로 쓰여진 문학 작품을 아우르는 것으로, 성자 전기에서 시작하여 무훈시, 로망, 서정시, 연극 등 다양한 장르로 발전하며 궁정문학 발달과 시적 형식 실험, 연극의 다변화를 이루었다.
17세기 프랑스 문학
17세기 프랑스 문학
몰리에르
몰리에르
기간1601년 ~ 1700년
국가프랑스
시대적 배경루이 13세루이 14세의 통치 시대
특징고전주의 부상
바로크와 고전주의의 공존
살롱 문화 발전
왕립 아카데미 설립
문학 사조
주요 사조고전주의
바로크
기타 사조프레시오지테
자연주의
주요 장르
연극비극
희극
서사시
송시
소설영웅 소설
심리 소설
기타수상록
서간문
잠언
주요 작가
극작가피에르 코르네유
몰리에르
장 라신
시인프랑수아 드 말레르브
장 드 라퐁텐
소설가마담 드 라파예트
샤를 소렐
수필가블레즈 파스칼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
마담 드 세비녜
기타장 드 라 브뤼예르
주요 작품
연극르 시드
인간 혐오자
수전노
타르튀프
페드르
베레니스
우화
소설클레브 공작부인
수필팡세
막심

2. 17세기 프랑스 사회와 문학

루이 14세


리슐리외


루이 13세


마자랭


르네 데카르트


프랑스에서 17세기는 앙리 4세낭트 칙령을 발표한 1598년과 루이 14세가 사망한 1715년 사이를 말한다. 이 시기에 루이 13세는 리슐리외의 도움을, 안 도트리슈 섭정기는 마자랭의 도움을 받아 왕권을 강화했다.[11]

왕권은 예술가들을 지원하여 "프랑스 고전주의"를 확립하고, 163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창설하여 표준을 확립하였다. 포르루아얄 데샹의 은자들은 프랑스어 문법의 기본이 되는 포르루아얄 문법을 만들었다. 보젤라는 프랑스어를 정화하고 규칙을 제정하는 일을 맡았고, 17세기 말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포함해 프랑스어 사전이 편찬되었다.

사교계의 이상형은 교양 있고 사교적인 신사 ''honnête homme|오네트 옴프랑스어''으로 변화하였다. 사상계는 이성을 중시하는 데카르트주의와 함께 변혁을 이어나갔다.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나 퐁트넬같은 혁신적 지성들에게 의문을 제기하는 동시에, 유럽에서 과학적 방법론을 통하여 17세기 말을 계몽주의의 시발점으로 이끌게 된다. 피에르 가상디를 따르는 사람들은 무신론을 향해 나아갔다.

2. 1. 개요

프랑스에서 17세기는 앙리 4세낭트 칙령을 발표한 1598년과 절대왕정을 확립한 루이 14세가 사망한 1715년 사이의 시기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리슐리외와 마자랭의 도움으로 왕권이 강화되었다.[11]

왕권은 예술계를 지원하고 간섭하여 "프랑스 고전주의"라는 사조를 확립시켰다. 163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창설하여 단어, 문장, 시학의 표준을 확립하였다. 포르루아얄 데샹의 은자들이 만든 포르루아얄 문법은 프랑스어 문법의 기본 바탕이 되었다. 17세기에는 보줄라처럼 프랑스어를 정화하고 규칙을 제정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1680년 리슐레, 1690년 퓌르티에르, 169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프랑스어 사전을 편찬했다.

사교계의 이상형은 교양 있고 사교적이며 개방적인 신사 ''honnête homme''로 변화하였다. 이성을 중시하는 데카르트주의는 위계와 규율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고전적 관념에 영향을 주었다.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은 이나 퐁트넬 같은 혁신적 지성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게 했고,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17세기 말을 계몽주의의 시발점으로 이끌었다. 피에르 가상디의 감각적 유물론무신론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문학은 백과사전적인 인문주의의 산물이었으며, 종교 및 법률 분야의 교육받은 작가들이 작품을 만들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궁정의 완벽한 궁정인의 개념을 본뜬 새로운 귀족 개념이 프랑스 문학을 통해 나타났다. 17세기에는 "정직한 사람"("honnête homme") 또는 "아름다운 정신"("bel esprit")이라는 이상적인 귀족상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유창한 연설, 춤, 세련된 매너, 예술 감상, 지적 호기심, 재치, 플라토닉한 사랑, 시를 쓰는 능력 등을 갖추어야 했다.

17세기 초에는 살롱과 문학 아카데미가 번성했으며, 귀족 후원의 역할도 커졌다. 문학 작품 제작은 귀족들에게 필요한 행위로 여겨졌고, 예술 창작(또는 후원)은 비귀족과 소외된 귀족 모두에게 사회적 진보의 수단이었다. 17세기 중반 프랑스에는 약 2,200명의 작가(대부분 귀족과 성직자)가 있었고, 독자층은 수만 명에 불과했다.[1] 리슐리외 추기경 통치 아래 예술 및 문학 아카데미에 대한 후원은 군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2. 2. 사회적 배경

앙리 4세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16세기의 종교전쟁이 끝난 1598년부터, 절대왕정을 확립한 루이 14세가 사망한 1715년까지 프랑스는 큰 변화를 겪었다.[11] 루이 13세는 리슐리외의 도움을, 안 도트리슈 섭정기는 마자랭의 도움을 받아 왕권을 강화했다.[11]

왕권은 예술계를 지원하고 간섭하며 '프랑스 고전주의' 사조를 확립하도록 이끌었다. 1635년 아카데미 프랑세즈를 창설하여 단어, 문장, 시학의 표준을 확립했다. 1637년에는 <르 시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11] 포르루아얄 데샹의 은자들은 프랑스어 문법 규정을 제정하여 오늘날까지 프랑스어 문법의 기본 바탕이 되고 있다. 17세기에는 보줄라처럼 프랑스어를 정화하고 규칙을 제정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1680년 리슐레, 1690년 퓌르티에르, 1698년 아카데미 프랑세즈가 첫 프랑스어 사전을 편찬했다.

사교계에서는 교양 있고 사교적이며 개방적인 신사인 '정직한 사람(honnête homme|오네트 옴프랑스어)'이 이상형으로 떠올랐다. 르네 데카르트이성을 중시하는 데카르트주의를 통해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철학은 이나 퐁트넬과 같은 혁신적 지성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또한 케플러, 윌리엄 하비, 블레즈 파스칼, 뉴턴과 같은 학자들의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17세기 말을 계몽주의의 시발점으로 이끌었다. 피에르 가상디와 같은 유물론자들은 무신론을 향해 나아갔다.

17세기 프랑스에서는 완벽한 궁정인을 본뜬 새로운 귀족 개념이 문학을 통해 나타났다. 이들은 유창한 연설, 춤, 세련된 매너, 예술 감상, 지적 호기심, 재치, 플라톤적인 사랑, 시를 쓰는 능력을 갖춘 '정직한 사람' 또는 '아름다운 정신(bel esprit|벨 에스프리프랑스어)'으로 불렸다.

17세기 초, 살롱과 문학 아카데미가 번성하고 귀족 후원이 확대되면서 문학 작품 제작은 귀족들에게 중요한 행위로 여겨졌다. 예술 창작(또는 후원)은 비귀족과 소외된 귀족 모두에게 사회적 진보의 수단이었다. 17세기 중반 프랑스에는 약 2,200명의 작가(대부분 귀족과 성직자)가 있었고, 독자층은 수만 명에 불과했다.[1] 리슐리외 추기경 통치 하에 예술 및 문학 아카데미에 대한 후원은 점차 군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앙리 4세의 궁정은 발루아 왕들의 궁정처럼 세련되지 못했다. 궁정에는 작가와 시인을 후원하는 왕비도 없었다. 앙리의 문학적 취향은 기사 소설 아마디스 데 가울라에 국한되었다.[2] 마리 드 메디치와 발루아의 마르그리트 같은 상류층 여성들을 중심으로 사적인 살롱이 형성되어 문학과 사회에 대한 토론을 했다. 1620년대에 가장 유명한 살롱은 마담 드 랑부예가 랑부예 저택에서 개최했으며, 마들렌 드 스퀴데리가 경쟁적인 모임을 조직했다.

'살롱'이라는 단어는 1664년 이탈리아어 'sala'(저택의 넓은 응접실)에서 유래했다. 1664년 이전에는 문학 모임이 열리는 방의 이름인 '캐비닛', '레뒤', '알코브', '뤼엘' 등으로 불렸다. '뤼엘'은 침실에서 열리는 문학 모임에서 유래되었으며, 프랑스의 루이 14세도 이러한 관행을 따랐다. 귀족들은 침대에 누워 친구들을 맞이하고 침대 주변의 의자나 걸상에 앉을 자리를 제공했다. '뤼엘'('작은 거리')은 침대와 벽 사이의 공간을 지칭하며, 17세기 전반 교육받은 여성들의 보호 아래 이러한 모임과 지적 및 문학 서클의 이름이 되었다.[3]

아카데미는 프랑스 문화를 감시, 육성, 비판하는 학문 단체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장-앙투안 드 바ï프가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아카데미에서 영감을 받아 시와 음악에 전념하는 아카데미를 만들면서 프랑스에 처음 등장했다. 17세기 전반에는 6명에서 12명 정도의 개인을 중심으로 조직된 사립 아카데미가 많이 생겨났다. 아카데미는 살롱보다 더 공식적이고 비판과 분석에 집중했다. 그러나 발루아의 마르그리트의 살롱과 같은 특정 살롱은 학문적 정신에 더 가까웠다.[4]

17세기 중반에 아카데미는 점차 정부의 통제와 후원을 받게 되었고, 사립 아카데미의 수는 감소했다. 정부 통제를 받게 된 최초의 사립 아카데미는 프랑스 아카데미였으며, 프랑스어에 중점을 두고 있다. 추기경 리슐리외가 1634년에 설립했다.

17세기 귀족의 가치는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광(la gloire|라 글루아르프랑스어)과 위엄(la grandeur|라 그랑되르프랑스어)에 대한 열망이 대표적이었다. 코르네유의 영웅들은 허영심, 사치, 자만심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당대 귀족 독자들은 이들을 고귀함의 전형으로 보았다.

베르사유 궁전, 궁정 발레, 귀족 초상화, 개선문은 모두 영광과 명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영광의 개념은 귀족에게 도덕적 의무였다. 귀족들은 관대하고, 아량 있으며, 사심 없이 위대한 행위를 수행하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려야 했다.

귀족들은 권위 있는 도시 저택(hôtels particuliers|오텔 파르티퀼리에프랑스어)을 짓고, 옷, 그림, 은 식기 등을 구입하고,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예술을 후원하며 관대함을 보여주어야 했다. 귀족 계급의 특징을 취한 사회적 신흥 부자들은 비판을 받았고, 법적 조치를 받기도 했다.[5] 17세기 중반부터 블레즈 파스칼은 권력의 과시에 대한 분석을 제시했고,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는 인간적 행동은 사심 없는 것으로 간주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귀족적 가치를 비판했다.

2. 3. 언어의 체계화

리슐리외 추기경은 1634년 발랑탱 콩라르를 중심으로 한 기존 문학 모임을 프랑스 학술원(아카데미 프랑세즈)으로 공식 지정했다. 장 드스마레 드 생 솔랑, 장 오지에 드 곰보, 장 샤플랭 등 여러 초기 멤버들이 있었으며, 공식 창설 이후 장-루이 게 드 발자크, 클로드 파브르 드 보젤라, 뱅상 부아튀르 등이 합류했다. 이 학술원은 프랑스어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명확성을 증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1694년에 프랑스어 사전 초판을 출판하여 프랑스어 어휘와 철자를 표준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전은 프랑스어의 권위 있는 참고 자료로 간주되었으며, 언어 사용의 규범을 정립하는 데 기여했다.[1]

클로드 파브르 드 보젤라는 프랑스어 정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어에서 불필요한 외래어와 속어를 제거하고, 명확하고 정확한 표현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그의 노력은 프랑스어가 세련되고 정제된 언어로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1]

포르루아얄 수도원에서는 앙투안 아르노클로드 랑슬로가 포르루아얄 문법을 저술하여 프랑스어 문법의 기초를 확립했다. 이 문법서는 프랑스어 문장 구조와 규칙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프랑스어 학습과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1]

3. 17세기 프랑스 문학의 다양성

17세기에는 바로크고전주의라는 두 사조가 지배적이었지만, 이 개념들은 후대에 체계화된 것이다. 당대 문예 사조를 17세기 전반은 바로크, 후반은 고전주의 등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는 비주류 의견도 존재한다.[12]

바로크 주요 작가 및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가작품
아그리파 도비녜Les Aventures du baron de Faeneste (1617, 1619, 1630)
베로알드 드 베르빌Le Moyen de parvenir (c.1610)
프랑수아 뒤 수웨Histoires comiques (1612)
몰리에르 데세르틴Semaine amoureuse (1620)
샤를 소렐'Lhistoire comique de Francion (1622), Nouvelles françoises (1623), Le Berger extravagant'' (1627)
장 드 라넬Le Roman satyrique (1624)
앙드레 마레샬La Chrysolite (1627)
폴 스카롱Virgile travesti (1648–53), Le Roman comique (1651–57)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Histoire comique des États et Empires de la Lune (1657), Histoire comique des États et Empires du Soleil (1662)



그 외 소설가로는 마랭 르 루아 드 공베르빌, 장 오지에 드 공보, 프랑수아 드 로세, 장피에르 카뮈 등이 있다.

3. 1. 개요

17세기에는 바로크와 고전주의라는 두 가지 주요 사조가 공존했다. 이 두 개념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체계화되었으며, 이에 대한 미적 부조화와 반대 의견도 있었다. 당대 문예 사조를 17세기 전반은 바로크, 후반은 고전주의라는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을 지양하는 비주류 의견도 존재한다.

루벤스 - 마리 드 메디치의 교육.


바로크는 17세기 유럽을 지배했지만, 프랑스에서는 크게 번성하지는 않았다. 주로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으며, 1598년부터 1630년까지 주된 유파로 자리 잡았다. 바로크는 신교의 엄숙함에 대한 반발로 탄생했으며,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라는 관념과 관련이 있다.[12] 바로크 사조는 자유를 갈망하고 삶의 복잡함에 솔직했으며, 문학에서는 여러 상반된 분파들이 있었지만, 몇 가지 공통된 요소들로 집약될 수 있다. 관능성에 대한 애착, 극단적 행동, 장식, 꾸민 듯한 언어가 바로크 문학의 특징이다. 바로크에서 중요시되는 장르로는 테오필 드 비오, 피에르 드 마르뵈프, 생아망 등이 쓴 시와, 에스파냐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극작(예컨대 피에르 코르네유의 <연극의 환상>)이 있다.[13]

1630년부터 1660년까지의 과도기 동안, 바로크는 고전주의에게 점차 자리를 내어주면서도 문예사조로서의 역할을 계속했다. 바로크는 프레시외, 뷔를레스크, 리베르탱 사조 아래서 존재했는데, 이 세 사조는 바로크에 속하지 않지만, 각각의 측면에서 바로크를 통해 발달했다.

바로크 주요 작가 및 작품은 다음과 같다.

작가작품
아그리파 도비녜Les Aventures du baron de Faeneste (1617, 1619, 1630)
베로알드 드 베르빌Le Moyen de parvenir (c.1610)
프랑수아 뒤 수웨Histoires comiques (1612)
몰리에르 데세르틴Semaine amoureuse (1620)
샤를 소렐'Lhistoire comique de Francion (1622), Nouvelles françoises (1623), Le Berger extravagant'' (1627)
장 드 라넬Le Roman satyrique (1624)
앙드레 마레샬La Chrysolite (1627)
폴 스카롱Virgile travesti (1648–53), Le Roman comique (1651–57)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Histoire comique des États et Empires de la Lune (1657), Histoire comique des États et Empires du Soleil (1662)



그 외 소설가로는 마랭 르 루아 드 공베르빌, 장 오지에 드 공보, 프랑수아 드 로세, 장피에르 카뮈 등이 있다.

프레시오지테는 1650년-1660년 사이 프랑스에서 정점을 찍은 유럽의 문학 사조로, 대중과의 구별을 추구하는 귀족적 미적 사조이다. 우아함과 세련됨을 추구하며, 행동 방식, 취향, 언어 등에서 이러한 특징이 나타난다. 앙투안 보도 드 소메즈는 1660년 "세련된 귀부인Précieuses 대사전"을 집필하기도 했다.

''아스트라이아'', 17세기 판.


프레시오지테적 사교계는 살롱에서 피어났는데, 랑부예 후작부인마들렌 드 스퀴데리의 살롱이 가장 유명하다. 이 살롱들은 초기에는 귀족적이었으나, 프롱드의 난 이후 부르주아 작가들도 점차 받아들였다. 이들은 대화에서의 우아함, 특수용어 사용, 고어 및 비속어 사용 회피, 신어 및 완곡어법 고안 등을 통해 너무 대중적이거나 저속하다고 여겨진 사물들의 이름을 바꾸어 나갔는데, 이는 몰리에르의 <우스꽝스러운 재녀들>에서 풍자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체 기교의 미학''은 뱅상 브와튀르, 샤를 드 생모르, 몽토시예 공작, 클로드 드 말빌, 이자크 드 뱅스라드, 에스파냐인 루이스 데 공고라 등의 여러 시인에게서 표현되었다.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에서 문학은 백과사전적인 인문주의의 산물이었으며, 종교 및 법률 분야의 교육받은 작가들이 제작한 작품을 포함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궁정과 그들의 완벽한 궁정인의 개념을 본뜬 새로운 귀족 개념이 프랑스 문학을 통해 진화하기 시작했다. 17세기 내내 이 새로운 개념은 거친 귀족의 이미지를 "정직한 사람"("honnête homme") 또는 "아름다운 정신"("bel esprit")의 이상으로 변화시켰는데, 이들의 주요 미덕으로는 유창한 연설, 춤 실력, 세련된 매너, 예술 감상, 지적 호기심, 재치, 사랑에 대한 정신적 또는 플라톤적인 태도, 그리고 시를 쓸 수 있는 능력이 포함되었다.[1]

이러한 문학의 변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17세기 초에 번성했던 살롱과 문학 아카데미였으며, 귀족 후원의 역할 확대도 중요했다. 시, 연극, 비평 또는 도덕적 성찰 작품과 같은 문학 작품의 제작은 귀족들에게 점점 더 필요한 행위로 여겨졌으며, 예술의 창작(또는 후원)은 비귀족 및 소외된 귀족 모두에게 사회적 진보의 수단으로 작용했다. 17세기 중반, 프랑스에는 약 2,200명의 작가(대부분 귀족과 성직자)가 있었으며, 독자층은 수만 명에 불과했다. 리슐리외 추기경 통치 하에 예술 및 문학 아카데미에 대한 후원은 점점 더 군주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7세기 프랑스 문학 시대에는 극장과 극단이 있었다.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동안 파리의 공개 극장 공연은 길드의 통제를 받았다. 16세기 말, 이러한 길드 중 하나만이 존속했다. '레 콩프레 드 라 파시옹'(les Confrères de la Passion)은 더 이상 신비극을 공연할 권리를 갖지 못했지만(1548년 이후), 수도의 모든 연극 공연을 감독할 독점적인 권한을 받았고, 극장(부르고뉴 호텔)을 극단에 비싼 가격으로 임대했다. 1599년에 길드는 특권을 포기했고, 이로 인해 다른 극장과 극단이 수도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공개 극장 외에도, 개인 주택, 궁정, 대학교에서도 연극이 공연되었다. 17세기 전반기에 공개 극장, 대학의 인문주의 극장, 궁정에서 공연된 연극은 다양한 취향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첫 10년 동안 궁정에서는 비극 희극이 유행했지만, 대중은 비극에 더 관심이 많았다. 파리의 초기 극장은 종종 테니스 코트와 같은 기존 건물에 위치해 있었고, 무대는 좁았으며, 세트와 장면 전환을 위한 시설은 거의 없었다(이것은 장소의 통일성 발전을 장려했다). 결국 극장은 17세기 전반기의 비극 희극에서 발견되는 기사들의 기사적 비행에 유행했던 정교한 기계와 장식을 갖춘 시스템을 개발하게 된다.

17세기 초 연극 공연은 일주일에 두 번, 2시 또는 3시에 시작되었다. 연극 공연은 종종 여러 작품을 포함했으며, 코믹한 서곡, 비극 또는 비극 희극, 파르스(풍자극)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노래로 끝났다. 귀족들은 때때로 공연 동안 무대 옆에 앉았다. 객석의 조명을 낮추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관객들은 항상 서로를 의식했고, 공연 중에는 특히 목소리가 컸다. 무대 바로 앞의 좌석이 없는 공간인 '파르테르'(parterre)는 남성 전용이었지만, 가장 저렴한 티켓이었기 때문에 파르테르는 보통 다양한 사회 집단이 섞여 있었다. 우아한 사람들은 갤러리에서 쇼를 관람했다. 공작, 머스킷병 및 왕실 시종들은 무료 입장을 받았다. 1630년 이전에는 "정숙한" 여성은 극장에 가지 않았다. 영국과 달리 프랑스는 무대에서 여성의 연기를 제한하지 않았지만, 남녀 배우의 경력은 가톨릭 교회(배우는 파문 당했다)와 금욕적인 종교 얀센주의 운동에 의해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으로 여겨졌다. 배우들은 일반적으로 전형적인 역할이나 전형적인 캐릭터를 나타내는 예명(무대 이름)을 사용했다.

대본이 있는 희극과 비극 외에도 파리 시민들은 또한 유형에 기반한 즉흥 연극의 일종인 '콤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를 공연하는 이탈리아 배우 극단을 매우 좋아했다. '콤메디아 델라르테'의 등장인물은 프랑스 연극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프랑스 연극을 여전히 채우고 있는 허풍선이, 바보, 연인, 노인, 교활한 하인에게서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오페라는 17세기 후반에 프랑스에 도달했다.

파리에서 가장 중요한 극장과 극단은 다음과 같았다.

  • ''부르고뉴 호텔''(Hôtel de Bourgogne) – 1629년까지 이 극장은 Vallerin Lecomte가 감독하고 (그가 죽은 후) Bellerose (Pierre Le Messier)가 감독한 '코메디앙 뒤 루아'(Comédiens du Roi)를 포함한 다양한 극단이 사용했다. 이 극단은 1629년에 공식적인 '트루프 로얄'(Troupe Royale)이 되었다. 배우로는 튀르퓐, 그로-기욤, 고티에-가르구이, 플로리도르, 몽플레리, 그리고 라 샹멜레가 있었다.
  • ''마레 극장''(Théâtre du Marais)(1600–1673) – 이 부르고뉴 호텔의 경쟁 극장은 클로드 데샹을 중심으로 한 '비외 코메디앙 뒤 루아'(Vieux Comédiens du Roi) 극단과 조델레 극단을 수용했다.
  • ''라 트루프 드 므시외''(La troupe de Monsieur) – 루이 14세의 동생의 보호를 받아, 몰리에르의 첫 번째 파리 극단이었다. 이 극단은 '프티-부르봉'(Petit-Bourbon)과 '팔레 루아얄''(Palais-Royal) 등 파리의 여러 극장으로 옮겨 다니다가 1673년에 '마레 극장'(Théâtre du Marais) 극단과 합쳐져 '오텔 귀네고''(Hôtel Guénégaud) 극단이 되었다.
  • 코메디 프랑세즈(La Comédie française) – 1680년, 루이 14세는 '부르고뉴 호텔'(Hôtel de Bourgogne)과 '귀네고 호텔'(Hôtel Guénégaud)을 하나의 공식 극단으로 통합했다.


파리 외곽, 교외 및 지방에는 많은 유랑 극단이 있었으며, 몰리에르는 이러한 극단에서 시작했다. 왕실과 다른 귀족 가문들은 또한 연극 공연, '발레 드 쿠르'(ballets de cour), 모의 전투 및 축제를 위한 다른 형태의 '디베르티스망'(divertissement)을 조직하는 데 중요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댄서와 배우의 역할을 귀족들이 직접 맡았다. 베르사유의 초기 시절 - 거대한 저택 확정 이전 -은 이러한 즐거움에 전적으로 바쳐졌으며, 유사한 볼거리가 통치 기간 동안 계속되었다. 판화는 루이 14세와 궁정이 베르사유의 '마블 코트'(Cour du marbre) 앞에서 앉아 연극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7세기의 대다수 대본 연극은 운문으로 쓰여졌다. 주목할 만한 예외는 몰리에르의 일부 희극이며, ''르 테아트르 프랑수아''(Le Théâtre François)의 저자인 사뮈엘 샤푸조는 한 희극을 다른 시기에 산문과 운문으로 인쇄했다. 이 연극의 서정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사용된 운율은 여섯 번째 음절 이후의 규칙적인 쉼표(또는 ''세수라'')가 있는 12 음절의 알렉상드랭 구절이었다. 이 구절은 운율이 있는 쿠플레로 묶였으며, 쿠플레는 "여성적"(즉, 묵음 'e'로 끝남) 및 "남성적"(즉, 묵음 'e', 자음 또는 비음 모음이 아닌 모음으로 끝남) 운율을 번갈아 사용했다.

17세기 프랑스 연극은 종종 피에르 코르네유, 몰리에르, 장 라신이라는 세 명의 위대한 이름과 "고전주의"의 승리로 축소되곤 한다. 그러나 진실은 훨씬 더 복잡하다. 17세기 초 연극은 이전 시대의 장르와 극작가에 의해 지배되었는데, 이 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로베르 가르니에였다. 왕실 궁정은 비극에 싫증을 느꼈지만 (더 현실 도피적인 비극 희극을 선호), 연극을 관람하는 대중은 전자를 선호했다. 1630년대와 1640년대에 (당시의 긴 바로크 소설의 영향을 받아) 기사와 처녀의 영웅적이고 마법 같은 모험인 비극 희극이 지배적인 장르가 되면서 이러한 상황이 바뀌었다. 1637년 코르네유의 『르 시드』와 1640년 『오라스』의 놀라운 성공은 비극을 다시 유행으로 이끌었고, 17세기 나머지 기간 동안 이러한 경향이 유지되었다.

비극 연극의 가장 중요한 자료는 세네카와 호라티우스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칼리게르와 로도비코 카스텔베트로의 현대적 해설)이었으며, 플롯은 플루타르코스수에토니우스와 같은 고전 작가,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단편 소설집에서 가져왔다. 그리스 비극 작가(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는 17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점점 더 중요해졌다. 17세기 희극, 비극, 비극 희극의 중요한 모델은 또한 스페인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티르소 데 몰리나, 로페 데 베가에 의해 제공되었으며, 이들의 작품 중 다수가 프랑스 무대에서 번역되고 각색되었다. 또한 이탈리아 무대 (전원극 포함)에서 중요한 연극 모델이 제공되었으며, 이탈리아는 특히 데코럼에 관한 연극 이론에 대한 토론의 중요한 원천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스페로네 스페로니의 『카나체』와 조반니 바티스타 지랄디의 『오르베케』에 대한 논쟁 참조).[10]

5막으로 된 정규 희극(즉, 플라우투스 또는 테렌스를 모델로 하고 아일리우스 도나투스의 가르침을 따른 희극)은 17세기 초에 비극과 비극 희극보다 무대에서 덜 빈번하게 상연되었으며, 초기 무대의 희극적 요소는 광대극, 풍자적인 독백, 그리고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의해 지배되었다. 장 로트루와 피에르 코르네유는 1630년 직전 정규 희극으로 돌아왔다. 코르네유의 비극은 이상하게도 비극적이지 않았고 (그의 초기 버전의 『르 시드』는 비극 희극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해피 엔딩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코르네유는 연극에 관한 그의 이론적 저서에서 다음과 같은 가정을 중심으로 희극과 비극을 재정의했다.

  • 무대—희극과 비극 모두에서—고귀한 인물을 특징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코르네유의 희극에서 광대극의 전형적인 저속한 인물을 제거할 것이다). 고귀한 인물은 사악하게 묘사되어서는 안 된다 (비난받을 만한 행동은 일반적으로 코르네유의 희곡에서 비열한 인물 때문이다).
  • 비극은 국가의 일 (전쟁, 왕조 결혼)을 다루고, 희극은 사랑을 다룬다. 작품이 비극적이려면 비극적인 결말을 가질 필요는 없다.
  • 아리스토텔레스카타르시스 (감정의 정화)가 비극의 목표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단지 이상일 뿐이다. 당시의 도덕률에 따라 희곡은 악이 보상받거나 고귀함이 훼손되는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코르네유의 『르 시드』에 대한 대중과 비평의 반응의 역사는 다른 기사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자료의 사용, 미적 감각의 위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호라티우스 규칙을 따르지 않는 기타 불규칙성으로 비판받았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엄청났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새로 결성된 프랑스 학사원에 그 비판을 조사하고 판결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는 학사원의 첫 번째 공식적인 판결이었다), 이 논쟁은 연극과 연극 형식을 통제하고 규제하려는 시도가 증가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17세기 "고전주의"의 시작이 될 것이다. 코르네유는 1674년까지 (주로 비극, 또한 그가 "영웅적 희극"이라고 부른 작품도) 계속해서 희곡을 썼다. 많은 작품이 성공했지만, 그의 연극적 방법에 대한 "불규칙성"에 대한 비판은 점점 더 많아졌다 (특히 프랑수아 에델린, 오비뇽의 수도원장에 의해). 1660년대 후반부터 장 라신의 성공은 그의 탁월함의 종말을 알렸다.

극작가와 희곡의 선택 목록은 장르 표시와 함께 다음과 같다. (초연 날짜보다 출판 날짜가 더 오래된 경우가 많으므로, 날짜는 종종 대략적임)

  • 앙투안 드 몽크레티앵
  • 『소포니스베』, 일명 『라 카르타고아즈』, 일명 『라 리베르테』 (비극) 1596
  • 『스코틀랜드 여왕』, 일명 『레코세즈』 (비극) 1601
  • 『아만』 (비극) 1601
  • 『라 베르제리』 (전원극) 1601
  • 『에크토르』 (비극) 1604
  • 장 드 셸랑드르
  • 『티르 에 시동, 우 레 퓬스테 아무르 드 벨카르 에 밀리안』 (1608)
  • 알렉상드르 아르디 아르디는 600편의 희곡을 썼다고 전해지지만, 34편만 남아 있다.
  • 『세다스, 우 롤피탈리테 빌리에』 (비극) 1624
  • 『라 포르스 뒤 상』 (비극 희극) 1625 (플롯은 세르반테스의 단편 소설에서 가져옴)
  • 『루크레스, 우 라들테르 푸니』 (비극) 1628
  • 오노라 드 뵈유, 라캉 영주
  • 『레 베르제리』 (전원극) 1625
  • 테오필 드 비오
  • 『레 아무르 트라지크 드 피람 에 시스베』 (비극) 1621
  • 프랑수아 르 메텔 드 부아로베르
  • 『디돈 라 샤스테 우 레 아무르 드 이아르바스』 (비극) 1642
  • 장 메레
  • 『라 실브』 (전원 비극 희극) c.1626
  • 『라 실바니레, 우 라 모르트 비브』 (전원 비극 희극) 1630
  • 『레 갈랑테리 뒤 뒤크 도손 비스-로이 드 나플』 (희극) 1632
  • 『라 소포니스브』 (비극) 1634
  • 『라 비르지니』 (비극 희극) 1636
  • ''트리스탄 레르미트''
  • 『마리암네』 (비극) 1636
  • 『팡테』 (비극) 1637
  • 『라 모르 드 세네크』 (비극) 1644
  • 『라 모르 드 크리스페』 (비극) 1645
  • 『기생충』 1653
  • 장 로트루
  • 『라 바그 드 르블리』 (희극) 1629
  • 『라 벨 알프레드』 (희극) 1639
  • 『로르 페르세큐테』 (비극 희극) 1637
  • 『르 베리타블 생 제네스트』 (비극) 1645
  • 『방세슬라스』 (비극 희극) 1647
  • 『코스로에스』 (비극) 1648
  • 피에르 코르네유
  • 『멜리트』 (희극) 1629
  • 『클리탕드르』 (비극 희극, 나중에 비극으로 변경) 1631
  • 『라 브브』 (희극) 1631
  • 『라 플라스 로얄』 (희극) 1633
  • 『메데』 (비극) 1635
  • 『리뤼지옹 코미크』 (희극) 1636
  • 르 시드』 (비극 희극, 나중에 비극으로 변경) 1637
  • 『오라스』 (비극) 1640
  • 『친나』 (비극) 1640
  • 『폴리에르』 ("기독교적" 비극) c.1641
  • 『라 모르 드 폼페』 (비극) 1642
  • 『르 멍퇴르』 (희극) 1643
  • 『로도군, 프린세스 데 파르테』 (비극) 1644
  • 『에라클리우스, 엠페레르 도리앙』 (비극) 1647
  • 『동 산체 다라공』 ("영웅적" 희극) 1649
  • 『니코메드』 (비극) 1650
  • 『세르토리우스』 (비극) 1662
  • 『소포니스브』 (비극) 1663
  • 『오통』 (비극) 1664
  • 『티테 에 베레니스』 ("영웅적" 희극) 1670
  • 『수레나, 제네랄 데 파르테』 (비극) 1674
  • 피에르 뒤 리에르
  • 『루크레스』 (비극) 1636
  • 『알시온』 1638
  • 『세볼라』 (비극) 1644
  • 장 데마레
  • 『레 비지오네르』 (희극) 1637
  • 『에리고네』 (산문 비극) 1638
  • 『스키피옹』 (운문 비극) 1639
  • 프랑수아 에델린, 오비뇽의 수도원장
  • 『라 시민드』 1642
  • 『라 퓌셀 달레앙』 1642
  • 『제노비』 (비극) 1647 (극의 엄격한 규칙이 준수되는 모델을 제공할 의도로 작성됨)
  • 『르 마티르 드 생트 카트린』 (비극) 1650
  • 폴 스카론
  • 『조델레』 1645
  • 『동 자펠 다르메니』 1653
  • 아이작 드 벤세라드
  • 『클레오파트르』 (비극) 1635

3. 2. 바로크 문학

바로크는 17세기 유럽을 지배했던 사조이다.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여 1598년부터 1630년까지 주된 유파로 자리매김했다. 바로크는 신교의 엄숙함에 대한 반발에서 탄생했으며, 불안정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라는 관념과 연관이 있다.[12] 바로크 사조는 자유를 갈망하고 삶의 복잡함에 솔직했다.

바로크 문학은 여러 상반되는 분파들이 있지만, 몇 가지 공통된 요소들로 집약할 수 있다. 관능성에 대한 애착, 극단적 행동, 장식, 꾸민 듯한 언어가 바로크 문학의 특징이다. 바로크에서 중요시되는 장르로는 테오필 드 비오, 피에르 드 마르뵈프, 앙투안 제라르 드 생-아망 등이 쓴 시와, 에스파냐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피에르 코르네유의 <연극의 환상>과 같은 희곡이 있다.[13]

1630년부터 1660년까지의 과도기 동안, 바로크는 고전주의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도 문예사조로서의 역할을 계속 이어나갔다. 바로크는 프레시외, 뷔를레스크, 리베르탱 사조 아래서 존재했으며, 이 세 사조는 바로크에 속하지 않으나 각각의 측면에서 바로크를 통해 발달했다.

3. 3. 프레시오지테(Précieuses)

프레시오지테는 1650년에서 1660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정점에 달했던 유럽의 문학 사조이다. 이는 대중과 구별되는 귀족적인 미적 사조를 추구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러한 우아함과 세련됨의 추구는 행동 방식, 취향, 언어 등에서 나타났다. 앙투안 보도 드 소메즈는 1660년에 "세련된 귀부인(Précieuses) 대사전"을 집필하였다.[14]

프레시오지테 사교계는 살롱에서 발전하였는데, 랑부예 후작부인마들렌 드 스퀴데리의 살롱이 가장 유명했다. 이 살롱들은 초기에는 귀족적이었으나, 프롱드의 난 이후에는 부르주아 작가들도 점차 받아들였다.

이들은 대화에서 우아함을 추구하고, 특수 용어, 고어, 비속어 사용을 피하며 단어의 순수성을 탐구하였다. 또한, 신조어와 완곡어법을 고안하여 너무 대중적이거나 저속하다고 여겨지는 사물들의 이름을 바꾸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 사용은 과도한 면이 있어 몰리에르의 <우스꽝스러운 재녀들>에서 풍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문체 기교의 미학''은 뱅상 브와튀르, 샤를 드 생모르, 몽토시예 공작, 클로드 드 말빌, 이자크 드 뱅스라드 등의 여러 시인에게서 표현되었다.

3. 4. 리베르탱(Libertins)

Libertin프랑스어은 17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사상 조류로, 자유로운 사상과 종교적 회의주의, 감각적 유물론 등을 특징으로 한다. 이들은 기존의 권위와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고 이성과 경험을 중시하며, 쾌락과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태도를 보였다.

주요 Libertin프랑스어 사상가로는 피에르 가상디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등이 있다. 가상디는 고대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을 부활시켜 감각적 경험과 쾌락을 중시하는 유물론적 세계관을 제시했다.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소설과 희곡을 통해 종교적, 사회적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을 표현했다.[1]

3. 5. 고전주의 문학

아리스토텔레스호라티우스의 저작, 그리고 고대 그리스 및 로마의 걸작에서 영감을 받아, 17세기 프랑스 문학에서 Classicism(고전주의)은 질서, 명확성, 도덕적 목적 및 좋은 취향에 대한 개념을 함축한다.[5] 연극에서는 ''3일치의 법칙''을 따르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5]

  • 장소의 통일성: 배경은 변경되어서는 안 된다. 전투는 무대 밖에서 벌어진다.
  • 시간의 통일성: 이상적으로는 전체 연극이 24시간 내에 진행되어야 한다.
  • 행동의 통일성: 하나의 중심 이야기가 있어야 하며, 모든 부차적인 플롯은 이에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규칙의 목적은 관객이 극적 행동에 완전히 몰입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극적 환상을 깨트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5]

연극의 통일성과 관련된 개념은 다음과 같다.[5]

  • ''레 비앙세앙스''(데코럼): 문학은 도덕 규범과 좋은 취향을 존중해야 한다.
  • ''라 브레상블랑스'': 행동은 믿을 만해야 한다.


이러한 규칙들은 17세기의 많은 걸작들에서 감정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깨지기도 하였다.[5]

  • 코르네유의 ''르 시드''는 로드리고가 시멘을 죽인 후 그녀의 아버지 살해에 대해 도덕 규범을 위반하여 시멘 앞에 나타난 것에 대해 비판을 받았다.[5]
  • ''클레브 공주''가 남편에게 네무르 공작에 대한 불륜의 감정을 드러낸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다.[5]


1674년에는 고대와 현대의 논쟁이 일어났다. 프랑스 학술원은 "현대인"(샤를 페로, 장 드스마레 드 생 솔랑)이 지배했고, 니콜라 보알로-데프레오는 ''고대인''의 챔피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장 라신, 장 드 라 퐁텐 및 장 드 라 브뤼예르는 그를 옹호했다. 한편, 베르나르 르 보비에 드 퐁트넬과 신문 ''메르퀴르 갈랑''은 "현대인"에 합류했다. 이 논쟁은 18세기 초까지 지속되었다.[5]

시는 17세기 귀족과 그들의 후원을 받는 비귀족 전문 작가들이 문학 작품을 생산하는 주요 장르 중 하나였다. 17세기와 18세기의 많은 시는 특별한 행사(결혼, 출생 또는 군사적 승리)를 기념하거나 비극적인 사건(죽음 또는 군사적 패배)을 엄숙하게 하기 위해 쓰였다.[9] 시는 풍자(니콜라 보일로-데프레오는 그의 ''풍자''(1666)로 유명하다)와 서사시에도 사용되었다.[9]

프랑수아 드 말레르브의 작품에서, 그는 라 플레아드와 필리프 데포르트의 운율 또는 형식의 불규칙성을 비판했다. 17세기 후반에는 말레르브가 시적 고전주의의 할아버지로 여겨지게 된다.[9]

1660년대부터 세 명의 시인이 두각을 나타냈다. 장 드 라 퐁텐은 이솝과 파이드루스에서 영감을 받은 "우화"(1668–1693)를 통해 엄청난 명성을 얻었다. 장 라신은 그의 시대 최고의 비극 작가로 여겨졌다. 니콜라 보일로-데프레오는 시적 고전주의의 이론가가 되었다. 그의 ''시학''(1674)은 이성과 논리, 신뢰성, 도덕적 유용성 및 도덕적 정확성을 칭찬했다.[9]

17세기 프랑스 시인 목록은 다음과 같다.[9]

  • 프랑수아 드 말레르브 (1555–1628)
  • 오노레 뒤르페 (1567–1625)
  • 장 오지에 드 곰보 (1570?–1666)
  • 마튀랭 레니에 (1573–1613), 필리프 데포르트의 조카
  • 프랑수아 드 메나르 (1582–1646)
  • 오노라 드 뵈이, 라캉 영주 (1589–1670)
  • 테오필 드 비오 (1590–1626)
  • 프랑수아 르 메텔 드 부아로베르 (1592–1662)
  • 앙투안 제라르 드 생-아망 (1594–1661)
  • 장 샤플랭 (1595–1674)
  • 뱅상 부아튀르 (1597–1648)
  • 자크 발레, 데 바로 영주 (1599–1673)
  • 트리스탕 로르미트 (1601?–1655)
  • 피에르 코르네유 (1606–1684)
  • 폴 스카롱 (1610–1660)
  • 이삭 드 방스라드 (1613–1691)
  • 조르주 드 브레뵈프 (1618–1661)
  • 장 드 라 퐁텐 (1621–1695)
  • 니콜라 보일로-데프레오 (1636–1711)
  • 장 라신 (1639–1699)
  • 기욤 암프리 드 숄리에 (1639–1720)
  • 장-프랑수아 레냐르 (1655–1709)

3. 6. "모랄리스트(Moralistes)"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는 1665년에 인간의 행동을 깊은 도덕적 비관주의에 비추어 분석한 산문집 ''격언''(Maxims)을 썼다.[5] 장 드 라 브뤼예르는 테오프라스토스의 인물에서 영감을 받아, 동시대의 도덕적 유형을 묘사한 자신만의 ''성격론''(1688) 모음을 썼다.[5] 블레즈 파스칼은 기독교 종교를 정당화하는 미완성이자 단편적인 사상 모음인 ''팡세''(성찰)을 썼다.[5]

3. 7. 회상록 작가와 역사 기록

장프랑수아 폴 드 공디(레츠 추기경)(1613-1679), 로제 드 뷔시라뷔탱(1618-1693), 가스파르 드 탕드(1618-1697) 등 여러 작가들이 회상록을 저술했다. 제데옹 탈망 데 레오(1619-1692)는 ''소사''를 저술했고, 폴 펠리송(1624-1693) 또한 회상록 작가로 활동했다.

17세기 말에 태어난 루이 드 루브루아 드 생시몽(1675-1755)은 18세기 초에 회상록을 집필했지만, 혁신적인 문체 덕분에 17세기 고전주의 작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그의 문체는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 마르셀 프루스트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프롱드 참가자들은 회상록을 정치적 정당화 수단으로 활용했다.[1] 로제 드 라뷔탱, 부시 백작은 궁정 여성들의 애정 관계를 다룬 스캔들적인 ''갈리아의 연애사''를 썼다.[1] 폴 펠리송은 왕의 역사가로서 1660년부터 1670년까지를 다룬 ''루이 14세의 역사''를 썼다.[1] 게데옹 탈르망 데 레오는 동시대 인물들에 대한 짧은 전기적 스케치 모음인 ''역사화''를 썼다.[1]

장 루이 게즈 드 발자크의 편지 모음은 프랑스 산문에서 프랑수아 드 말레르브의 시 개혁과 병행하는 개혁으로 평가받는다.[1] 세비네 부인(1626–1696)의 편지는 루이 14세 치하의 사회 및 문학적 사건에 대한 중요한 기록으로 간주된다.[1] 1세기 이상 지난 후에 출판된 루이 드 루브루아, 생시몽 공작의 회고록은 17세기의 가장 유명한 회고록으로 꼽힌다.[1]

4. 17세기 프랑스 문학의 주요 작가와 작품

17세기 프랑스 연극은 피에르 코르네유, 몰리에르, 장 라신으로 대표되는 고전주의 시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했다. 17세기 초에는 로베르 가르니에와 같은 이전 시대 작가들의 영향력이 컸고, 왕실은 비극 희극을, 대중은 비극을 선호했다.

1630년대와 1640년대에는 기사와 처녀의 모험을 다룬 비극 희극이 인기를 얻었으나, 코르네유의 르 시드(1637)와 오라스(1640)의 성공으로 비극이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당시 연극의 주요 소재는 세네카, 호라티우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과 플루타르코스, 수에토니우스 등의 고전 작가, 그리고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단편 소설들이었다. 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와 같은 그리스 비극 작가들의 영향력은 17세기 중반부터 커졌다. 또한, 스페인 극작가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 티르소 데 몰리나, 로페 데 베가의 작품들이 프랑스에서 번역, 각색되어 상연되었다.

17세기 초, 정규 희극은 광대극과 풍자적인 독백,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밀려 자주 상연되지 않았다. 그러나 장 로트루와 피에르 코르네유가 1630년경 정규 희극을 다시 무대에 올렸다. 코르네유는 희극과 비극에 대한 이론을 정립하여, 고귀한 인물을 중심으로 국가의 일(비극)과 사랑(희극)을 다루어야 하며, 비극이 반드시 비극적 결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코르네유의 르 시드는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동시에 비판도 받았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프랑스 학사원에 이 작품에 대한 평가를 요청했고, 이는 연극의 형식과 내용을 규제하려는 시도로 이어져 17세기 "고전주의"의 시작을 알렸다. 코르네유는 1674년까지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지만, 1660년대 후반부터 장 라신의 등장으로 그의 명성은 점차 쇠퇴했다.

다음은 17세기 주요 작가와 작품 목록이다. (일부 작품의 연도는 대략적이다.)

작가작품장르연도
앙투안 드 몽크레티앵『소포니스베』, 『라 카르타고아즈』, 『라 리베르테』비극1596
앙투안 드 몽크레티앵『스코틀랜드 여왕』, 『레코세즈』비극1601
앙투안 드 몽크레티앵『아만』비극1601
앙투안 드 몽크레티앵『라 베르제리』전원극1601
앙투안 드 몽크레티앵『에크토르』비극1604
장 드 셸랑드르『티르 에 시동, 우 레 퓬스테 아무르 드 벨카르 에 밀리안』1608
알렉상드르 아르디『세다스, 우 롤피탈리테 빌리에』비극1624
알렉상드르 아르디『라 포르스 뒤 상』비극 희극1625
알렉상드르 아르디『루크레스, 우 라들테르 푸니』비극1628
오노라 드 뵈유, 라캉 영주『레 베르제리』전원극1625
테오필 드 비오『레 아무르 트라지크 드 피람 에 시스베』비극1621
프랑수아 르 메텔 드 부아로베르『디돈 라 샤스테 우 레 아무르 드 이아르바스』비극1642
장 메레『라 실브』전원 비극 희극c.1626
장 메레『라 실바니레, 우 라 모르트 비브』전원 비극 희극1630
장 메레『레 갈랑테리 뒤 뒤크 도손 비스-로이 드 나플』희극1632
장 메레『라 소포니스브』비극1634
장 메레『라 비르지니』비극 희극1636
트리스탄 레르미트『마리암네』비극1636
트리스탄 레르미트『팡테』비극1637
트리스탄 레르미트『라 모르 드 세네크』비극1644
트리스탄 레르미트『라 모르 드 크리스페』비극1645
트리스탄 레르미트『기생충』1653
장 로트루『라 바그 드 르블리』희극1629
장 로트루『라 벨 알프레드』희극1639
장 로트루『로르 페르세큐테』비극 희극1637
장 로트루『르 베리타블 생 제네스트』비극1645
장 로트루『방세슬라스』비극 희극1647
장 로트루『코스로에스』비극1648
피에르 코르네유『멜리트』희극1629
피에르 코르네유『클리탕드르』비극 희극(후에 비극으로 변경)1631
피에르 코르네유『라 브브』희극1631
피에르 코르네유『라 플라스 로얄』희극1633
피에르 코르네유『메데』비극1635
피에르 코르네유『리뤼지옹 코미크』희극1636
피에르 코르네유르 시드비극 희극(후에 비극으로 변경)1637
피에르 코르네유오라스비극1640
피에르 코르네유신나비극1640
피에르 코르네유『폴리에르』"기독교적" 비극c.1641
피에르 코르네유『라 모르 드 폼페』비극1642
피에르 코르네유『르 멍퇴르』희극1643
피에르 코르네유『로도군, 프린세스 데 파르테』비극1644
피에르 코르네유『에라클리우스, 엠페레르 도리앙』비극1647
피에르 코르네유『동 산체 다라공』"영웅적" 희극1649
피에르 코르네유『니코메드』비극1650
피에르 코르네유『세르토리우스』비극1662
피에르 코르네유『소포니스브』비극1663
피에르 코르네유『오통』비극1664
피에르 코르네유『티테 에 베레니스』"영웅적" 희극1670
피에르 코르네유『수레나, 제네랄 데 파르테』비극1674
피에르 뒤 리에르『루크레스』비극1636
피에르 뒤 리에르『알시온』1638
피에르 뒤 리에르『세볼라』비극1644
장 데마레『레 비지오네르』희극1637
장 데마레『에리고네』산문 비극1638
장 데마레『스키피옹』운문 비극1639
프랑수아 에델린, 오비뇽의 수도원장『라 시민드』1642
프랑수아 에델린, 오비뇽의 수도원장『라 퓌셀 달레앙』1642
프랑수아 에델린, 오비뇽의 수도원장『제노비』비극1647
프랑수아 에델린, 오비뇽의 수도원장『르 마티르 드 생트 카트린』비극1650
폴 스카론『조델레』1645
폴 스카론『동 자펠 다르메니』1653
아이작 드 벤세라드『클레오파트르』비극1635


4. 1. 피에르 코르네유 (1606-1684)

피에르 코르네유는 1660년대 프랑스 연극에 고전주의가 자리 잡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평생 비극을 계속 제작했지만, 1660년대 후반부터 장 라신의 작품이 코르네유의 후기 작품들을 능가하기 시작했다.[1] 코르네유의 대표작으로는 르 시드(1637), 오라스(1640), 신나(1641), 폴리외크트(1642) 등이 있다.[1]

4. 2. 라파예트 부인 (1634-1693)

라파예트 부인1678년에 출간된 소설 클레브 공작 부인으로 유명하다. 이 소설은 앙리 2세 치하에서 결혼한 귀부인이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지만, 남편에게 자신의 열정을 고백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은 몇 개의 삽입된 이야기를 포함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예절과 도덕적 올바름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두 개인의 말하지 않은 의심과 두려움에 집중한다.[7]

프랑수아 드 라 로슈푸코의 비관주의에 가까운 심리 분석과 주인공의 자기 부정은 결국 전통적인 해피엔딩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역사적 배경에도 불구하고, 라파예트는 분명히 그녀의 현대 세계를 묘사하고 있었다.[7]

4. 3. 장 드 라 퐁텐 (1621-1695)

장 드 라 퐁텐은 이솝과 파이드루스에게서 영감을 받아 불규칙한 운율 형태로 쓰여진 "우화"(1668–1693)로 큰 명성을 얻었다.[9]

참조

[1] 서적 Naissance de l'écrivain Minuit
[2] 서적 La Cour de France Fayard
[3] 서적 op. cit.
[4] 서적 op.cit.
[5] 서적 The Court Society Blackwell
[6] 서적 Le Roman sentimental avant l'Astrée Corti
[7] 서적 La Princesse de Clèves Folio
[8] 서적 Histoire de la nouvelle française aux XVIIe et XVIIIe siècles Droz
[9] 서적 La préciosité et les précieux, de Thibaut de Champagne à Giraudoux
[10] 서적 La formation de la doctrine classique en France Hachette
[11] 서적 Initiation à l'histoire de la France Fayard-Taillandier
[12] 서적 Le baroque : profondeurs de l'apparence Presses Univ de Bordeaux
[13] 서적 La littérature de l’âge baroque en France José Corti
[14] 서적 La Préciosité: Étude historique et linguistique Librairie Droz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