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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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1976년 록히드 사건 이후 후쿠다 다케오와 오히라 마사요시 간의 다이후쿠 밀약에 따라 후쿠다가 총재를 맡고 오히라가 간사장이 된 후, 2년 뒤 오히라에게 정권을 넘겨주기로 한 상황에서 치러졌다. 후쿠다가 재선을 시도하며 오히라와 대립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고모토 도시오도 출마하여 경쟁 구도가 형성되었다. 예비선거가 처음 도입되어 오히라가 승리하고 후쿠다가 사퇴하면서 오히라가 무투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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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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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정보 | |
선거 이름 | 197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선거 유형 | 대통령 |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976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976년 |
다음 선거 | 니시무라 재정 |
다음 선거 연도 | 1980년 |
선거 날짜 | 1978년 11월 26일 |
선거 제도 | 총재 공선 규정에 따른 총재 선거 |
후보 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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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이름 | 오히라 마사요시 |
득표 (예비 선거) | 748점 |
후보 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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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이름 | 후쿠다 다케오 |
득표 (예비 선거) | 638점 |
득표 (본선거) | 사임 |
후보 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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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이름 | 나카소네 야스히로 |
득표 (예비 선거) | 93점 |
득표 (본선거) | - |
후보 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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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이름 | 고모토 도시오 |
득표 (예비 선거) | 46점 |
득표 (본선거) | - |
총재 | |
선거 전 총재 | 후쿠다 다케오 |
선거 후 총재 | 오히라 마사요시 |
2. 배경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미키 다케오 내각이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 자민당은 총선에서 대패했다. 이에 미키는 책임을 지고 총재직에서 물러났고, 후쿠다 다케오와 오히라 마사요시는 이른바 다이후쿠 밀약을 맺어 정권 교체에 합의했다.[1] 그러나 1977년 참원선 승리 후 후쿠다는 재선 욕심을 드러내며 오히라와의 약속을 파기하려 했다.[1]
1978년, 총재 선거를 앞두고 파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후쿠다는 중의원 해산 및 총선을 통해 지지 세력을 넓히려 했으나, 오히라 측의 반발과 가네마루 신의 해산 반대 발언 등으로 인해 무산되었다.[1] 6월 16일 오히라는 중의원 의원들에게 "해산은 없다"라고 말하며 중의원 해산을 경계했다.
8월 12일 중일평화우호조약이 조인되자 후쿠다에 대한 지지율이 상승했고, 가가와현지사 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하여 오히라에게 타격을 입혔다(가가와현은 오히라의 고향이다). 이후 중의원 해산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았다.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고모토 도시오도 총재 선거 출마를 저울질했지만, 사실상 후쿠다와 오히라의 양자 대결 구도로 굳어졌다.[1] 언론은 후쿠다의 우세를 점쳤지만, 오히라를 지지하던 다나카파는 독자적인 여론조사를 통해 오히라의 우세를 주장하며 오히라의 출마를 독려했다.
10월 21일, 오히라, 나카소네, 고모토가 정식으로 총재 선거 출마를 표명했다.[1] 현직 총재가 총재 선거에 입후보하면 현직 각료는 사퇴하는 것이 관행이었으나, 고모토는 통산상 직을 유지한 채 출마했다.[1] 이는 고모토의 출마가 총재 당선이 아닌, 차기를 위한 포석이었기 때문이었다. 후쿠다 역시 고모토를 파면하지 않았다.[1]
2. 1. 록히드 사건과 미키 내각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인해 미키 다케오 내각은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같은 해 총선에서 자유민주당이 대패하자 미키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총재직에서 물러났다.[1] 이때 후쿠다 다케오와 오히라 마사요시는 이른바 다이후쿠 밀약을 맺어 후쿠다에게 총재직을 양보하는 대신 오히라가 간사장이 되어 당무를 총괄하고 2년 뒤 오히라에게 정권을 넘겨주기로 약속했다.[1] 1976년 12월 23일 후쿠다는 총재로 선출되었고, 다음 날 총리대신에 취임했다.[1]그러나 1977년 참원선에서 자민당이 승리한 후, 후쿠다는 오히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재선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1] 그해 말 개조내각을 출범시켜 정치동우회(다나카파)의 각료 수를 줄이고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총무회장으로 기용하는 등 신정동지회(나카소네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1]
2. 2. 다이후쿠 밀약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미키 다케오 총재가 퇴진하게 되자, 후쿠다 다케오와 오히라 마사요시는 이른바 다이후쿠 밀약을 맺었다. 이 밀약에 따라 후쿠다가 총재직을 양보받는 대신 오히라가 간사장이 되어 당무를 총괄하고, 2년 뒤 오히라에게 정권을 넘겨주기로 약속했다.[1] 1976년 12월 23일 후쿠다가 총재로 선출되었고, 다음 날 총리대신에 취임했다.하지만 197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하자 후쿠다는 자신감을 얻어 오히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재선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1] 그 해 말 개조내각을 출범시켜 다나카파의 각료 수를 줄이고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총무회장으로 기용하는 등 나카소네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
1978년, 총재 선거를 앞두고 파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2월 중순 자민당 간부회가 파벌 활동 자숙을 요청하자 후쿠다는 이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오히라 측은 이를 무시했다. 5월 26일 『요미우리 신문』은 오히라가 총재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고 보도했다. 후쿠다는 오히라가 불출마한다면 임기 후반부에 정권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오히라는 이를 거절했다.[1]
후쿠다는 중의원 해산과 총선을 통해 지지 세력을 넓히려 했으나, 오히라 측의 반발과 중일평화우호조약 조인으로 인한 지지율 상승으로 무산되었다. 8월 27일 가가와현지사 선거에서 자민당 공천 후보가 패배하면서 오히라에게 타격을 입혔고(가가와현은 오히라의 고향이다), 후쿠다의 재선 가능성이 더 커졌다.
10월 14일, 오히라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임시국회에서 후쿠다-오히라 체제는 종언을 고한다"라며 후쿠다와의 대결을 선언했다.
3. 전개 과정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미키 다케오 총재가 물러난 뒤, 후쿠다 다케오와 오히라 마사요시는 이른바 다이후쿠 밀약을 맺어 후쿠다가 총재직을 맡고 오히라가 간사장이 되어 당무를 총괄하기로 했다. 2년 뒤에는 오히라에게 정권을 넘겨주기로 약속했다.[1] 그러나 197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하자 후쿠다는 재선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고,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총무회장으로 기용하는 등 나카소네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3]
1978년 총재 선거를 앞두고 파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자민당 간부회가 파벌 활동 자숙을 요청하자 후쿠다는 이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지만,[4] 오히라 측은 이를 무시했다.[5] 후쿠다는 중의원 해산과 총선을 통해 지지 세력을 넓히려 했으나, 오히라 측의 반발과 여야 간 협의가 원활했던 상황 때문에 해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일평화우호조약 조인으로 후쿠다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가가와현지사 선거에서 자민당 후보가 패배하면서 후쿠다의 재선 가능성이 커졌다.[2] 10월 14일, 오히라는 후쿠다와의 대결을 선언했다.
나카소네와 고모토 도시오도 출마를 저울질했지만, 사실상 후쿠다와 오히라의 싸움으로 여겨졌다. 언론은 후쿠다의 우세를 점쳤지만, 오히라를 지지하던 다나카파는 독자적인 여론 조사를 통해 오히라가 1위라고 주장했다.
10월 21일, 오히라, 나카소네, 고모토가 정식으로 출마를 표명했다. 나카소네와 고모토는 차기 총재 선거를 위한 포석이자 파벌 내 균형을 위한 출마였다. 현직 총재가 총재 선거에 입후보하면 현직 각료는 사퇴하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고모토는 통산상 자리를 유지한 채 출마했다. 이는 고모토가 총재가 되는 것보다 파벌 내 균형을 위한 출마였기 때문에 큰 문제 없이 넘어갔다. 후쿠다는 자신이 불출마하여 당내 분란을 예방할지 검토했지만, 결국 10월 31일에 출마를 선언했다.
3. 1. 후쿠다 다케오의 재선 시도와 오히라 마사요시의 대항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미키 다케오 총재가 물러난 후, 후쿠다 다케오와 오히라 마사요시는 이른바 다이후쿠 밀약을 맺었다.[1] 후쿠다가 총재직을 맡는 대신 오히라가 간사장이 되어 당무를 총괄하고, 2년 뒤 오히라에게 정권을 넘겨주기로 약속했다. 1976년 12월 23일 후쿠다는 총재로 선출되었고, 다음 날 총리대신에 취임했다.하지만 197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하자 후쿠다는 자신감을 얻어 재선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그해 말 개조내각을 출범시켜 다나카파의 각료 수를 줄이고, 나카소네 야스히로를 총무회장으로 기용하는 등 나카소네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다.[3]
1978년, 총재 선거를 앞두고 파벌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2월 중순 자민당 간부회가 파벌 활동 자숙을 요청하자 후쿠다는 이에 호응하는 모습을 보였다.[4] 그러나 오히라 측은 이를 무시하고, 5월 26일 『요미우리 신문』은 오히라가 총재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고 보도했다.[5] 양원 의원 본선거에서 오히라가 과반수를 얻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후쿠다는 오히라에게 총재 선거 불출마를 조건으로 임기 후반부에 정권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지만, 오히라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후쿠다는 중의원 해산과 총선을 통해 지지 세력을 넓혀 총재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총선에서 자민당이 패배하면 간사장인 오히라도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했다. 오히라 측은 해산에 반발했고, 6월 6일 가네마루 신 방위청 장관(다나카파 소속)은 "대의 없는 해산에는 반대한다"고 발언했다. 6월 16일 오히라도 "해산은 없다"고 말했다. 당시 여야 균형 상황이었지만, 자민당 간사장 오히라와 신자유클럽 간사장 니시오카 다케오 사이에 긴밀한 협의가 가능해 여야 간 절충이 잘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민당은 해산과 총선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았다.
8월 12일 중일평화우호조약이 조인되면서 후쿠다 지지율이 상승했고, 해산 없이도 재선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2] 또한 조약 비준을 위해서라도 해산은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8월 27일 가가와현지사 선거에서 자민당이 공천한 후보가 패배하면서(가가와현은 오히라의 고향) 후쿠다의 재선 가능성이 더 커졌다. 이 무렵에는 더 이상 중의원 해산이 거론되지 않았다.
10월 14일 오히라는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임시국회에서 후쿠다-오히라 체제는 종언을 고한다"며 후쿠다와 대결하겠다는 자세를 분명히 했다.
나카소네와 고모토 도시오가 출마를 저울질했지만, 사실상 후쿠다와 오히라의 대결로 받아들여졌다. 두 사람은 예비선거 통과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본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위해 예비선거에서 최대한 많은 점수를 얻고자 했다.
언론은 후쿠다의 우세를 점쳤다. 10월 10일 『요미우리 신문』은 "후쿠다 과반수, 나카소네 절박, 오히라 부진", 10월 16일 『마이니치 신문』은 "나카소네 21%, 오히라 20%", 10월 21일 『아사히 신문』은 "1% 차이로 나카소네 2위, 오히라 3위"라는 여론조사를 보도했다. 한편 오히라를 지지하던 다나카파는 독자적인 여론조사를 통해 오히라가 근소한 차이로 1위라고 주장하며 오히라의 출마를 독려했다.
후쿠다는 나카소네와 고모토에게 자신에게 투표해줄 것을 요청하며, 1차 투표에서 100점 이상 차이가 나면 2위 후보는 본선거를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언론은 본선거에서 미키파의 동향을 주시했다.
10월 21일 오히라, 나카소네, 고모토가 정식으로 출마를 표명했다. 나카소네와 고모토는 차기 총재 선거를 위한 포석이었고, 소속 파벌 내 후쿠다, 오히라 지지 세력 간 균형을 위한 출마였다.
현직 총재가 총재 선거에 입후보하면 현직 각료는 사퇴하는 것이 자민당의 관행이었다. 총리총재가 재선을 원하는데 현직 각료가 반기를 드는 것은 내각의 일체화를 지향하는 의원내각제의 이론과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통산상이었던 고모토는 총재 선거에 입후보하면서도 사임하지 않았는데, 이는 총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파벌 내 균형을 위한 출마였기 때문에 큰 문제 없이 넘어갔다. 후쿠다 역시 각료 파면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오히라가 출마를 강행하자 후쿠다는 자신이 불출마하여 당내 분란을 예방해야 할지 검토했지만, 결국 선거 고시일 전날인 10월 31일 출마를 선언했다.
3. 2.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고모토 도시오의 역할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고모토 도시오는 1978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를 저울질했지만, 사실상 선거는 후쿠다 다케오와 오히라 마사요시의 대결로 여겨졌다. 두 사람은 예비선거 통과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본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예비선거에서 최대한 많은 점수를 얻고자 했다.나카소네와 고모토는 다음 총재 선거를 위해 자신의 몸값을 높이는 것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이들이 속한 파벌 내에는 후쿠다나 오히라에 가까운 유력 의원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자유 투표를 하게 되면 파벌의 구심력이 약화될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나카소네와 고모토는 파벌을 대표하여 출마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현직 총재가 총재 선거에 출마할 경우, 현직 각료는 사임 후 출마하는 것이 자민당의 관행이었다. 이는 총리총재가 재선을 원하는 상황에서 현직 각료가 반기를 드는 것은 내각의 일체화를 추구하는 의원내각제의 이론과 맞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통산상이었던 고모토는 총재 선거에 출마하면서도 사임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가 총재가 되는 것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후쿠다 역시 각료 파면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4. 예비선거
1978년 선거는 의원 선거 전에 일반 당원·당우들이 참여하는 예비선거가 도입된 첫 선거였다. 후쿠다 다케오는 의원 선거나 파벌 간의 담합이라면 다나카 가쿠에이파의 지지를 받는 오히라 마사요시가 유리하겠지만, 일반 당원·당우 투표에서는 자신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설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비서 하야사카 시게조에게 지시해 전화 작전용 명부를 만들게 했다. 전국의 지사, 시정촌장, 정부의장, 당3역, 농협, 어협, 상공 단체, 지역 기업 수장들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가 적힌 이 명부는 폭 1.5m, 길이 20m에 달했다.[5]
11월 1일 예비선거가 고시된 후, 다나카는 집무실에서 매일 밤 9시까지 전화 작전을 전개했다. 후쿠이현 사바에시 안경협동조합 전무이사에게까지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5]
선거 기간에 언론은 오히라가 후쿠다를 근소한 차이로 따돌릴 것이란 견해를 보였고, 다나카는 오히라가 50~60점 차이로 승리할 것이라 예상했다. 26일에 예비선거가 실시되었고, 27일 개표 결과 오히라가 110점 차이로 후쿠다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열세로 여겨졌던 도쿄도에서 오히라가 역전극을 펼친 것이 승리로 이어졌다.
승리한 오히라는 "순간이 의미를 가질 때도 있지만 10년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을 때도 있다. 역사란 진실로 기묘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으며, 패배한 후쿠다는 "백성의 소리는 곧 하늘의 소리이지만 하늘도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한다. 하지만 패장은 병법을 논하지 않는 법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4. 1. 선거 규칙
1978년 총재 선거부터는 국회의원에 의한 선거에 앞서 일반 당원과 당우에 의한 예비선거가 실시되었다. 예비선거에서는 현내 득표 2위 안에 들지 못하면 점수를 0으로 하는 규정이 있었다. 이 때문에 본선거 진출 가능성이 낮다고 여겨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고모토 도시오가 2위 이상을 하게 되면 오히라 마사요시와 후쿠다 다케오 중 한 명은 2위 밖으로 밀려나 0점이 되었다. 이는 1, 2위 경쟁을 하던 오히라와 후쿠다의 점수 차이가 예상보다 많이 벌어지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다.[5]4. 2. 다나카 가쿠에이의 역할
1976년 총재 선거 이후 다나카 가쿠에이는 오히라 마사요시를 지원하며 막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케시타 노보루 등 다나카 파는 치밀한 선거 운동 전략을 펼쳤다.다케시타는 자유민주당 전국조직위원장으로서 2년간 전국 210곳을 돌며 예비선거 시스템을 설명하고, 각 지방조직의 명부를 복사해 비공개 당원 명부를 확보했다. 이를 바탕으로 도쿄 담당 책임자 고토다 마사하루는 비서 2인 1조로 도쿄도 전역의 당원 주택을 호별 방문하는 '롤러 작전'을 개시했다.[5]
다나카는 비서 하야사카 시게조에게 지시해 전화 작전용 명부를 만들었다. 전국 지사, 시정촌장, 의회 의장, 당 간부, 농협·어협·상공 단체, 지역 기업 수장 등의 이름, 주소, 전화번호가 적힌 명부는 폭 1.5m, 길이 20m에 달했다.[5]
11월 1일 예비선거 고시 후, 다나카는 집무실에서 매일 밤 9시까지 전화 작전을 전개했다. 후쿠이현 사바에시 안경협동조합 전무이사에게까지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5]
언론은 오히라의 근소한 우세를 점쳤지만, 다나카는 50~60점 차 승리를 예측했다. 예비선거 결과, 오히라는 110점 차로 승리했는데, 도쿄도에서의 역전이 결정적이었다.
4. 3. 언론 보도와 여론
197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처음으로 일반 당원과 당우들이 참여하는 예비선거가 도입되면서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당초 언론은 현직 총리인 후쿠다 다케오의 우세를 점쳤다. 요미우리 신문은 후쿠다가 과반수를 득표하고,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으며, 오히라 마사요시는 부진하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했다.[5] 마이니치 신문도 나카소네와 오히라의 지지율이 비슷하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아사히 신문 역시 나카소네가 오히라를 근소한 차이로 앞서고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았다.그러나 오히라 진영을 지원하던 다나카 가쿠에이는 자체 조사를 통해 오히라가 근소한 차이로 후쿠다를 앞서고 있다고 판단하고, 오히라에게 출마를 계속하도록 격려했다. 후쿠다는 본선에서 나카소네와 고모토 도시오가 자신에게 투표하도록 물밑 작업을 하면서, 예비선거에서 100점 이상 차이가 나면 2위 후보는 본선거를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언론은 본선거에서 미키 다케오 파의 동향을 주시했다.
이러한 언론 보도와 여론의 흐름은 예비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4. 선거 결과
197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예비선거와 본선거로 나뉘어 치러졌다. 예비선거는 일반 당원과 당우들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본선거는 국회의원들의 투표로 결정될 예정이었다.예비선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예비선거에서는 오히라 마사요시가 748점을 얻어 1위를 차지했고, 후쿠다 다케오는 638점으로 2위를 기록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고모토 도시오는 각각 93점과 46점을 얻었다.
예비선거의 집계 방식은 다음과 같았다.
- 유권자는 1월 말까지 입당·입회를 신청한 당원 103만 9912명과 당우 18만 1160명이었다.[5]
- 11월 1일에 예비선거가 고시되었고, 우편 투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1월 26일 개표일 이전에 도착한 표만 유효했다.
- 당원과 당우는 1인 1표를 행사했으며, 1000표를 1점으로 환산하여 도도부현별로 점수를 할당했다.
- 각 현에서 상위 2명의 후보에게 득표수에 비례하여 점수를 배분했다.
- 전국 득표 점수를 합산하여 상위 2명의 후보가 본선에 진출하도록 하였다.
당초 12월 1일에 국회의원 투표로 본선거를 치를 예정이었으나, 예비선거에서 패배한 후쿠다 다케오가 본선 출마를 포기하면서 오히라 마사요시가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이는 자민당 역사상 현직 총재가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한 유일한 사례이다.[4]
오히라 마사요시는 "순간이 의미를 가질 때도 있지만 10년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을 때도 있다. 역사란 진실로 기묘한 것이다"라는 소감을 남겼다. 후쿠다 다케오는 "백성의 소리는 곧 하늘의 소리이지만 하늘도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오히라 마사요시의 승리에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원이 큰 영향을 미쳤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비서 하야사카 시게조를 통해 전화 작전용 명부를 만들고, 직접 전화를 걸어 지지를 호소하는 등 적극적인 선거 운동을 펼쳤다. 특히, 도쿄도에서 오히라 마사요시가 예상을 깨고 선전한 것이 결정적인 승리 요인으로 작용했다.
5. 본선거 (무산)
12월 1일에 본선거가 열려 의원 투표가 시행될 예정이었으나[1], 그전에 후쿠다 다케오가 사퇴하면서 오히라 마사요시가 무투표 당선되었다.
6. 결과 및 영향
1978년 1월까지 입당 신청을 한 당원 103만 9,912명과 당우 18만 1,160명이 투표권을 가졌다.[1] 11월 1일 선거가 고시되었고, 우편 투표는 개표일인 26일 이전에 도착한 표만 유효했다. 당원과 당우는 1인 1표를 행사했으며, 1,000표를 1점으로 환산하여 도도부현별로 점수를 할당했다. 각 현에서 상위 2명의 후보에게 득표수에 비례하여 점수를 배분했고, 전국 집계 결과 상위 2명이 본선에 진출했다.
12월 1일 의원 투표를 통한 본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으나,[1] 예비 선거에서 748점을 획득하여 1위를 차지한 오히라 마사요시에 이어 638점을 얻어 2위를 한 후쿠다 다케오가 본선거를 앞두고 사퇴하면서 오히라가 무투표 당선되었다.[1]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고모토 도시오는 각각 93점과 46점을 얻는 데 그쳤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일본 정치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6. 1. 정치적 유산
이 선거는 현직 총리였던 후쿠다 다케오가 재선에 실패하고 오히라 마사요시가 새로운 총재로 선출된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일본 정치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후쿠다는 예비 선거에서 오히라에게 패배한 뒤 본선거를 앞두고 사퇴하여, 오히라는 무투표로 당선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당시 일본 사회의 변화와 기존 정치에 대한 불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6. 2. 한국 정치에 주는 시사점
197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오히라 마사요시가 승리한 사건은 한국 정치, 특히 더불어민주당에 다음과 같은 시사점을 준다.이 선거는 파벌 정치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자유민주당 내 파벌 간 권력 투쟁은 정책보다는 계파 이익을 우선시했다. 이는 한국 정치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더불어민주당 역시 당내 파벌 갈등이 종종 발생하여 건강한 정당 정치 발전을 막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파벌 정치는 건전한 정책 경쟁을 방해하고 국민보다는 파벌의 이익을 우선시하게 만든다. 이는 정당 정치 발전을 저해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978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한국 정치, 특히 더불어민주당에 파벌 정치를 넘어 건강한 정당 정치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
참조
[1]
웹사이트
中日ニュース No.1298_3「大平新体制へ -自民党総裁選-」(昭和53年12月)
https://www.youtube.[...]
中日映画社
2020-12-13
[2]
문서
鄧小平国務院副総理が10月に訪日する際に批准書を交換することが予定され、それまでに国会による批准を済ませる必要があった。
[3]
웹사이트
歴代総裁 {{!}} 党のあゆみ {{!}} 自民党について {{!}} 自由民主党
https://www.jimin.jp[...]
2018-04-26
[4]
문서
任期切れ時に形勢悪化などで総裁選立候補断念に追い込まれた現職総裁としては[[鈴木善幸]]、[[海部俊樹]]、[[河野洋平]]、[[谷垣禎一]]、[[菅義偉]]、[[岸田文雄]]がいる。河野と谷垣は2018年時点で2人だけの、首相にならなかった自民党総裁である。
[5]
웹인용
歴代総裁 {{!}} 党のあゆみ {{!}} 自民党について {{!}} 自由民主党
https://www.jimin.jp[...]
202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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