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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토 도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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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모토 도시오는 1911년 효고현에서 태어나, 니혼 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산코기선을 설립하고 사장을 역임하며 기업 활동을 하다가, 1949년 중의원 의원 선거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우정상, 통산상, 경제기획청 장관 등을 역임하며 자민당 내 정책통으로 활동했다. 1970년대 '삼각대복'의 후계자로 거론되었으나, 총재 선거에서 여러 번 고배를 마셨다. 1985년 산코기선 도산으로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에서 사임했고, 1996년 정계를 은퇴했다. 2001년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사후 정3위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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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토 도시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6년의 고모토 도시오
1976년
원어명河本 敏夫
로마자 표기Gomo-to Toshio
출생일1911년 6월 22일
출생지일본 효고현 아코군 아이오이시
사망지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시나노마치
출신 학교니혼대학 법문학부 졸업
전 직업산코기선 대표이사 사장
소속 정당민주당
국민민주당
개진당
일본민주당
자유민주당
칭호/훈장정3위
훈1등욱일대수장
효고현 아이오이시 명예 시민
친족 (정치인)삼남 고모토 사부로
정치 경력
소속 정당자유민주당
국회의원중의원 의원
선거구구 효고 4구
당선 횟수17회
임기 시작1949년 1월 23일
임기 종료1996년 9월 27일
기타 직책[[파일:Liberal Democratic Party (Japan) Emblem.svg|20px]] 제26·28대 자유민주당 정무조사회장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
재임 기간1976년 - 1977년, 1978년 - 1979년
주요 직책
직책제15대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내각제2차 나카소네 제1차 개조 내각
임기 시작1984년 11월 1일
임기 종료1985년 8월 14일
직책대외 경제 문제·민간 활력 도입 담당 대신
직책제32·34대 경제기획청 장관
내각스즈키 젠코 내각
스즈키 젠코 개조 내각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임기 시작1980년 7월 17일 - 1982년 11월 27일, 1983년 12월 27일
임기 종료1984년 11월 1일
직책제34·36대 통상산업대신
내각미키 내각
미키 개조 내각
후쿠다 다케오 개조 내각
임기 시작1974년 12월 9일 - 1976년 12월 24일, 1977년 11월 28일
임기 종료1978년 12월 7일
직책제28대 우정대신
내각제2차 사토 제2차 개조 내각
임기 시작1968년 11월 30일
임기 종료1970년 1월 14일

2. 생애

효고현 아이오이시 출신으로, 구제 히메지 고등학교 재학 중 반전 운동 참여로 퇴학당했으나, 이후 노동으로 학비를 벌어 니혼 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재학 중 매형 등과 함께 해운 회사 산코기선을 설립하여 졸업 후 사장을 맡았다.

1949년 총선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이후 경제기획청 정무차관 등을 거쳐 1968년 제2차 사토 내각 (제2차 개조)에서 우정대신으로 처음 입각했다. 미키 다케오 파벌에 속해 활동하며 미키 내각에서 통상산업대신을 맡아 주목받기 시작했고, 이후 정조회장, 후쿠다 다케오 개조 내각의 통상산업대신, 스즈키 젠코 내각나카소네 내각의 경제기획청 장관 등을 역임하며 자민당 내 주요 정책통이자 경제통으로 인정받았다.

1970년대 삼각대복 시대 이후 유력한 총재 후보 중 한 명으로 여러 차례 총재 선거에 도전했으나, 파벌 규모의 한계와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번번이 성공하지 못했다. 1985년에는 자신이 실질적인 소유주였던 산코기선이 해운 불황으로 도산하면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기도 했다.

1996년 총선을 앞두고 건강 문제로 정계를 은퇴했으며, 2001년 5월 24일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사후 정3위에 추서되고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

2. 1. 초기 생애 및 기업 활동

1911년 6월 22일, 효고현 아코군 아이오이촌 (현 아이오이시)에서 태어났다.[1] 구제 다쓰노 중학교(현 효고현립 다쓰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구제 히메지 고등학교 문과 갑류에 입학했으나[2], 군부가 주도하는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여 1930년 퇴학당했다.

이후 탄광 노동자나 직공 등으로 일하며 학비를 모아 니혼 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했다. 재학 중 매형 등과 함께 산코해운(三光海運)을 설립하고 이사가 되었다.[1] 1937년 대학 졸업 후 산코해운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다음 해인 1938년에는 회사 이름을 산코기선(三光汽船)으로 변경했다.[1]

2. 2. 정계 입문 및 활동

1949년 총선에 구 효고 4구에서 입후보하여 처음 당선되면서 정치인이 되었다.[3] 이후 17회 연속 당선을 달성했다. 초기에는 경제기획청 정무차관 등을 역임했으며, 1968년 제2차 사토 내각 (제2차 개조)에서 우정대신으로 처음 입각했다.

정치 활동 초기에는 미키 다케오가 이끄는 미키 파벌에 속해 파벌의 자금 조달 역할을 맡았으나, 당내에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미키 내각이 출범하고 통상산업대신으로 임명되면서 그의 존재감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과거 미키 다케오가 통상산업대신 시절 사하시 시게루와 함께 대형 공업 기술 연구 개발 제도(1966년)를 추진했던 것처럼, 고모토 역시 오일 쇼크에 대응하여 산업 구조의 전환을 목표로 초LSI 기술 연구 조합(1976년)이나 문라이트 계획(1978년)과 같은 대규모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산업 정책을 이끌었다.

1976년 자민당 내에서 이른바 '미키 끌어내리기' 움직임이 일어났을 때, 고모토는 내각총리대신 미키 다케오록히드 사건을 명분으로 중의원 해산을 고려하자, 미키 파벌의 탈당이나 야당과의 연대, 신당 창당까지 염두에 두고 선거 자금을 마련했다. 동시에 미키에게 반대파 각료들을 파면해서라도 중의원 해산을 강행해야 한다고 강력히 건의했다. 참고로 고모토는 미키와 인척 관계이기도 했는데, 미키의 사위 형제와 고모토의 딸이 결혼한 사이였다.

미키 퇴진 후에는 정조회장을 두 차례(1976년, 1978년) 역임했으며, 후쿠다 다케오 개조 내각에서는 다시 통상산업대신으로, 스즈키 젠코 내각나카소네 내각에서는 경제기획청 장관을 지냈다. 미일 무역 마찰이 심화되자 1984년 11월부터 1985년 8월까지는 대외 경제 문제 및 민간 활력 도입을 위한 특명 사항 담당 대신을 맡기도 했다.

고모토는 자민당 내에서 손꼽히는 정책 전문가이자 경제 전문가로 통했으며, 미키 다케오에게 비판적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고토다 마사하루 같은 인물들조차 그를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정책적으로는 적극적인 재정 확대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2. 3.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도전

고모토는 자민당 내에서 뛰어난 정책통이자 경제통으로 인정받았다. 미키 다케오에게 비판적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고토다 마사하루조차 고모토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모토는 총재 자리와는 유독 인연이 멀었다. 1970년대 일본 정계를 주도한 '삼각대복'(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후쿠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의 뒤를 이을 유력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혔지만, 소규모 파벌이라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1]

하지만 총재 선거 때마다 니혼 대학 인맥 등을 바탕으로 한 자금과 조직력을 동원하여 상당한 표를 모으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당원 투표에 의한 예비 선거 제도가 도입되면서 그의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3]

1978년 자민당 총재 예비 선거에 처음으로 출마했다. 이는 미키가 총재직에서 물러난 후 파벌을 계승하고 차기를 노리기 위한 포석이었으나,[1] 오히라, 후쿠다 다케오, 나카소네 야스히로에 이어 최하위에 머물렀다.[3]

1980년 총선 유세 중 오히라 총재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나카소네, 미야자와 기이치 등과 함께 후임 총재 후보로 거론되었다.[1][3] 그러나 당시 막후 실력자였던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를 받은 스즈키 젠코가 최종적으로 총재로 선출되었다.[3] 스즈키 내각 출범 후, 미키 파벌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고, 고모토는 기존 미키 파벌 소속 의원 대부분을 규합하여 자신의 파벌인 고모토파를 결성했다.[1][3] 미키로부터 파벌 회장직을 직접 물려받는 대신 해산 후 재결성이라는 복잡한 절차를 거친 것은, 고모토가 '미키의 후계자'라는 이미지를 벗고 다른 파벌의 지지를 얻기 위한 미키의 배려였다는 분석이 있다.[1][3]

1982년 총재 예비 선거에 다시 도전했다. 반(反) 다나카 세력의 대표 주자로 부상하며 초반에는 유력 후보로 떠올랐지만,[3] 다나카 파벌의 강력한 조직력과 자금 지원을 등에 업은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과반수를 득표하며 압승했다.[1][3] 고모토는 2위에 그쳤고, 3위 아베 신타로, 4위 나카가와 이치로와 함께 본선거 출마를 포기했다.[3]

1985년, 고모토가 실질적인 소유주였던 산코기선이 해운업 불황의 여파로 도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전후 일본 최대 규모의 기업 도산 사례로 기록되었으며, 고모토는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당시 맡고 있던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이 사건은 정치인으로서 고모토의 이미지와 평가에 큰 타격을 주었다.[1]

리크루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이 총사퇴하고, 뒤이어 출범한 우노 소스케 내각마저 1989년 참의원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불과 2개월 만에 물러나면서, 고모토에게 총리대신이 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찾아오는 듯했다.[1] 그러나 당시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을 이끌던 다케시타가네마루 신 등 실력자들은 세대교체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고모토파 내에서 실세로 부상하던 젊은 정치인 가이후 도시키를 차기 총리 후보로 지지했다.[1] 고모토는 이러한 당내 흐름을 받아들여 가이후에게 총리직을 권유하고 자신은 총재 선거에 불출마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고모토의 측근 오시마 다다모리는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1] 결국 가이후는 하야시 요시로, 이시하라 신타로를 누르고 총리대신에 당선되었다.[1]

2. 4. 산코기선 도산과 정치적 영향

1985년, 고모토 도시오가 실질적인 소유주로 있던 해운 회사 산코 기선이 해운업 불황의 여파로 도산했다. 이 과정에서 다케시타 노보루가네마루 신의 지원을 받아 회사갱생법 적용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산코 기선의 도산은 당시 "전후 최대 규모"의 기업 파산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며, 이로 인해 제2차 나카소네 제1차 개조 내각에서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을 맡고 있던 고모토는 책임을 지고 장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1]. 이 사건은 정치인으로서 고모토의 경력과 평가에 큰 타격을 주었다.

리크루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물러나고, 뒤이어 취임한 우노 소스케 총리마저 참의원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단명하면서 1989년은 고모토에게 총리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졌다. 그러나 당시 정계의 실력자였던 다케시타나 가네마루 등은 젊은 지도자를 내세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고모토 파벌 내에서 실세로 부상하던 가이후 도시키를 총재 후보로 밀었다. 고모토는 이러한 흐름을 받아들여 가이후에게 "가이후 씨, 당신이 하세요"라고 말하며 총재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모토의 측근 오시마 다다모리는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결국 총재 선거에서 가이후는 하야시 요시로이시하라 신타로를 누르고 압승하여 새로운 총재로 선출되었다.

1993년 제40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 이후에는 중의원 의장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으나, 자민당이 선거 패배로 야당으로 전락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당시 자민당은 오쿠노 세이스케를 의장 후보로 내세웠지만, 사회당의 전 당수였던 도이 다카코에게 패배했다.

2. 5. 총리대신 기회와 좌절

자민당 내에서 뛰어난 정책통이자 경제통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모토 도시오는 총리대신 자리와는 유독 인연이 없었다. 미키 다케오 파벌을 계승하고 삼각대복 시대 이후의 유력 주자 중 한 명으로 꼽혔지만, 여러 차례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좌절을 겪었다.

고모토가 처음으로 총재 선거에 출마한 것은 1978년이었다. 이는 미키 다케오에게서 파벌을 물려받을 준비를 하며 차기를 노리는 성격이 강했다. 1980년에는 총선 유세 중 오히라 마사요시 총재가 급서하자 유력한 후임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었으나, 결국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가 총재 자리에 올랐다. 이 시기, 미키파는 형식적으로 해산한 뒤 다시 규합하는 방식으로 고모토파가 결성되었는데, 이는 미키가 자신과의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고모토의 총재 등극에 방해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1982년 총재 선거에서도 유력 후보로 나섰지만, 당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다나카 가쿠에이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압도적인 표 차이로 밀려 본선거 진출조차 하지 못했다. 이는 당시 자민당 내 파벌 정치의 현실과 다나카파의 강력한 힘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설상가상으로 1985년, 고모토가 실질적인 소유주였던 해운 회사 산코 기선이 해운 불황의 여파로 도산했다. 이는 당시 "전후 최대 규모의 도산"으로 불릴 만큼 큰 사건이었으며, 다케시타 노보루가네마루 신의 지원으로 회사갱생법 적용 신청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고모토는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1차 개조)에서 맡고 있던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 직을 책임지고 사임해야 했으며[1],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평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1989년, 리크루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물러나고 뒤이어 취임한 우노 소스케 총리마저 참의원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단 두 달 만에 퇴진하면서, 고모토에게 총리대신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오는 듯했다. 그러나 당시 당내 실력자였던 다케시타와 가네마루 신은 '젊은 인물 대망론'을 내세우며 고모토파의 실세로 부상하던 가이후 도시키를 총재 후보로 밀었다. 결국 고모토는 "가이후 씨, 당신이 하시오"라며 가이후에게 총리직을 권유하고 자신은 총재 선거 불출마를 선언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모토의 측근 오시마 다다모리는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총재 선거 결과, 가이후는 하야시 요시로이시하라 신타로를 누르고 압승하여 새로운 총재로 선출되었다.

1993년 총선 이후에는 중의원 의장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으나,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한 야당 연립 정권이 들어서면서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자민당은 대신 오쿠노 세이스케를 의장 후보로 내세웠지만, 일본사회당도이 다카코에게 패배했다.

2. 6. 정계 은퇴 및 사망

1996년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건강상의 이유로 불출마를 선언하며 47년간 역임한 중의원 의원직에서 물러나 정계를 은퇴했다. 그의 지역구는 당시 참의원 의원이던 셋째 아들 고모토 사부로가 물려받았다. 같은 해 훈1등 욱일대수장을 수훈했다.[6]

정계를 은퇴한 뒤에도 반초 정책 연구소(구 고모토파)의 명예회장을 맡는 등 정치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2001년 5월 24일, 도쿄도 신주쿠구 시나노마치에 위치한 게이오기주쿠 대학 병원에서 심부전으로 향년 89세에 사망했다. 사후 정3위에 추서되었다.

3. 평가

자민당 내에서 손꼽히는 정책 및 경제 전문가로 통했다. 미키 다케오에게 비판적이었던 오히라 마사요시고토다 마사하루 같은 인물들도 고모토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뛰어난 정책 능력에도 불구하고 당 총재직과는 인연이 멀었다. 여러 차례 총재 선거에 도전했으나, 소규모 파벌의 한계와 당내 역학 관계 등으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85년, 사실상 오너로 있던 산코기선이 해운 불황의 여파로 도산한 사건은 그의 정치 경력에 큰 오점을 남겼다. 이는 전후 일본 최대 규모의 기업 도산 사건이었으며, 이로 인해 고모토는 장관직에서 사임해야 했고 정치적 평가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다.

평소 과묵하고 근엄하며 좀처럼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태국의 왕족 완와이타야콘 워라완에 빗대어 "웃지 않는 전하"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편, 그의 출생지에 있는 아이오이역히메지역과 가까움에도 산요 신칸센 정차역이 된 것을 두고, 고모토의 정치적 영향력 행사(소위 정치역) 때문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야행 신칸센 계획에 따른 대피역 건설 필요성 때문이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4. 역대 선거 기록

연도선거 종류회차직책선거구소속 정당득표수 (표)득표율 (%)순위당락
1949년총선거24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민주당49,92618.71위당선
1952년총선거25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개진당47,88215.92위당선
1953년총선거26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개진당45,48615.64위당선
1955년총선거27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일본민주당59,11920.03위당선
1958년총선거28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72,28023.01위당선
1960년총선거29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55,17018.03위당선
1963년총선거30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60,97718.52위당선
1967년총선거31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61,17318.02위당선
1969년총선거32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80,01720.51위당선
1972년총선거33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76,87119.41위당선
1976년총선거34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90,38920.71위당선
1979년총선거35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105,80224.41위당선
1980년총선거36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116,47425.61위당선
1983년총선거37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102,08523.81위당선
1986년총선거38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95,59320.92위당선
1990년총선거39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88,46018.43위당선
1993년총선거40회중의원 의원효고현 제4구자유민주당70,74315.43위당선


5. 저서

wiki

제목출판 연도출판사 / 편집자
파도 30년1968년산코 기선
우정 사업의 새로운 시대1970년국제 정치 경제 연구소
대 상선대1977년산코 기선 (편집)
세계 속의 일본: 80년대 정치에 대한 제언1982년신정책연구회 (편집)
80년대 정치에 대한 제언1983년신정책연구회 (편집)
세계 속의 일본: 80년대 정치에 대한 제언 속1983년신정책연구회 (편집)
세계 속의 일본: 80년대 정치에 대한 제언 제3집1984년신정책연구회 (편집)
시장 개방과 민간 활력1985년신정책연구회
일본의 진로1985년신정책연구회
세계 속의 일본 제5집1987년신정책연구회


참조

[1] 웹사이트 河本 敏夫とは https://kotobank.jp/[...] 2021-05-29
[2] 간행물 旧制高等学校物語 第15 財界評論新社 1968
[3] 문서 당선 동기
[4] 서적 自民党
[5] 웹사이트 https://allabout.co.[...]
[6] 뉴스 96秋の叙勲受章者 勳一等・勳二等 読売新聞 1996-11-03
[7] 간행물 吉田市之助 https://dl.ndl.go.jp[...] 人事興信録 1941
[8] 서적 永田町の上流家族 龍興社 1987 #쇼와 62년은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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