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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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7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2007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참패한 후, 아베 신조 총리의 사임으로 인해 치러졌다. 후쿠다 야스오가 62.6%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아소 다로가 37.4%의 득표율로 2위를 기록했다. 선거는 국회의원 투표와 지방 대표 투표를 합산하여 진행되었으며, 후쿠다와 아소의 양자 대결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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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치러진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는 아베 신조 내각의 스캔들과 실언 등으로 자민당이 참패하고 민주당이 대승하여 정권 교체의 발판을 마련한 선거였다. - 후쿠다 야스오 - 군마현 제4구
군마현 제4구는 일본 중의원 선거구로, 다카사키시 일부, 후지오카시, 다노군 등을 포함하며 자유민주당 후보가 주로 당선되었고,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의 아들인 후쿠다 다쓰오가 5선 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 후쿠다 야스오 - 후쿠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중의원 의원, 농림대신, 대장상, 외상을 역임하고 제67대 일본의 총리가 되어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으며, 후쿠다 독트린을 발표했다. - 아소 다로 - 지공회
지공회는 아소 다로가 이끄는 위공회가 반초 정책연구소와 합류하여 발족한 자유민주당 파벌로, 중의원과 참의원 의원들이 소속되어 활동 중이며, 2024년 자민당 정치자금 문제로 파벌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 아소 다로 - 아소 내각
아소 내각은 아소 다로 총재 하에 2008년 9월 출범한 일본 내각으로, 초기 높은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세계 금융 위기 대응 실패와 스캔들로 2009년 총선에서 자민당 참패 후 총사직했다.
2007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
---|---|
선거 개요 | |
선거 이름 | 2007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선거 유형 | 총재 선거 |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2006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2006년 |
다음 선거 | 2008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2008년 |
선거일 | 2007년 9월 23일 |
선거 제도 | 양원 의원 총회에 의한 총재 선거 |
공시일 | 2007년 9월 14일 |
투표 정보 | |
유권자 수 | 중의원 의원 304표 참의원 의원 83표 도도부현 141표 합계 528표 |
후보 정보 | |
![]() | |
후보 1 득표 - 의원표 | 254 |
후보 1 득표 - 도도부현표 | 76 |
후보 1 득표 - 합계 | 330 |
![]() | |
후보 2 득표 - 의원표 | 132 |
후보 2 득표 - 도도부현표 | 65 |
후보 2 득표 - 합계 | 197 |
선거 결과 | |
총재 | 후쿠다 야스오 |
선거 전 총재 | 아베 신조 |
선거 후 총재 | 후쿠다 야스오 |
2. 배경
200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에 참패하면서 아베 신조 총리의 리더십이 위기를 맞았다.[1] 아베 총리는 총리직 연임 의사를 표명하고 개각을 단행했지만, 9월 12일 갑작스럽게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 이후 당내에서는 "반(反) 아소" 정서가 확산되었고, 이는 후쿠다 야스오의 당선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1. 참의원 선거 패배
2007년 7월 29일에 실시된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은 민주당에 참패하여 참의원 제1당과 참의원 의장 자리를 내주었다.[1] 아베 신조 총재는 사퇴 의사가 없음을 밝히고 개각을 단행했다.2. 2. 아베 신조 총재 사임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에 참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베 신조 총재는 사퇴 의사 없이 총리직 연임 의사를 표명하고 개각을 단행했다.[1]아베 총리는 9월 10일 국회에서 소신 표명 연설을 통해 총재직 유지 의욕을 보였으나,[1] 이틀 뒤인 9월 12일 갑작스럽게 사의를 표명했다.[1] 이는 당일 예정된 대표 질문을 앞두고 벌어진 전례 없는 사태였다.
간사장 아소 다로 등 당 집행부는 국회 회기 중이라는 점과 9월 25일 총리의 유엔 총회 참석을 이유로 9월 14일 공시, 9월 19일 투표로 하는 선거 일정안을 제시했다.[1]
그러나 아베 총리의 사임 의사를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의혹, 이른바 "아소 쿠데타설"이 제기되면서 당내에서 비판 여론이 일었다.[2] 가타야마 사쓰키는 제1차 아베 개조 내각 조각 전 아시아 순방 중 아베 총리가 아소 다로와 내각 관방 장관 요사노 가오루에게 인사권을 빼앗기고, 농림수산대신·엔도 다케히코의 사임 문제나 테러 특조법 연장 문제 등이 아소·요사노 라인 주도로 결정되어 가는 것에 절망하여 사임 의사를 표명했다는 주장을 펼쳤다.[3] 이러한 의혹과 졸속 선거라는 비판에 따라 선거 일정은 9월 23일로 연기되었다.[1]
3. 선거 과정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에 참패한 후, 아베 신조 총재는 사퇴 의사를 밝혔다. 이에 따라 자민당은 새로운 총재를 선출하기 위한 절차에 돌입했다.
당초 아소 다로 등이 9월 19일에 총재 선거를 실시하려 했으나, 아소 다로가 아베 총재의 사임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의혹과 졸속 선거라는 비판이 제기되어 9월 23일에 투표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 387명과 각 도도부현별 당원 대표 141명을 합쳐 총 528명의 선거인이 투표에 참여했으며, 이 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재는 아베 총재의 잔여 임기인 2009년 9월까지 재임하게 되었다.
아베 총재 사퇴 이후, 아소 다로가 사임을 부추겼다는 의혹으로 인해 자민당 내에서는 "반(反) 아소" 정서가 확산되었다. 이에 당내 여러 파벌들이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후쿠다 지지를 표명하면서, 아소 파벌을 제외한 다른 모든 파벌들이 후쿠다를 지지하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선거는 후쿠다 야스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진행되었고, 후쿠다가 새 총재로 당선되었다.
3. 1. 후보 등록 및 선거 운동
9월 12일 아베 신조 총리의 갑작스러운 사임 표명 이후, 자유민주당은 차기 총재 선출을 위한 선거 일정에 돌입했다. 초기에는 아소 다로 간사장이 유리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아베의 사임 사전 인지 의혹과 졸속 선거 일정 논란으로 인해 9월 23일로 투표일이 연기되었다.9월 14일 고시, 9월 15일 입후보 접수 및 기자 회견을 시작으로, 후보들은 본격적인 선거 운동에 나섰다. 9월 16일 시부야역 하치코 앞, 9월 17일 오사카 난바 다카시마야 앞과 다카마쓰 미쓰코시 앞, 9월 22일 센다이 포러스 앞에서 가두 연설을 진행했다. 9월 21일에는 일본 기자 클럽 주최 토론회가 열렸다.
이번 선거에는 후쿠다 야스오와 아소 다로 두 후보가 출마했다. 주요 경력과 파벌은 다음과 같다.
두 후보는 고이즈미 구조 개혁 추진에 대한 입장, 공공 사업비 삭감 방식, 전쟁 책임 및 동아시아 외교, 납치 문제,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 주요 정책에서 차이를 보였다.
후쿠다 야스오 | 아소 다로 | |
---|---|---|
캐치프레이즈 | 희망과 안심의 나라 건설 | 일본의 저력 |
고이즈미 구조 개혁 | 추진하지만, 지역 격차를 시정 | 추진하지만, 지역 격차를 시정 |
전국 전년도 일률 3% 삭감 | 지역별로 삭감 비율을 조정 | |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 | 역대 내각의 자세를 계승 | |
인적 교류 중시. 중국·한국인 유학생을 85만 명 증가. | 경제 지원 중시. 테러의 원인은 절망과 빈곤이며, 그것을 경제 지원으로 해소. | |
압력과 대화의 적절한 사용에 의한 해결 | 압력 없이는 대화 없음 | |
임기 중에는 참배하지 않음 | 정치 문제화하지 않음 |
두 후보 모두 헌법 개정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3. 2. 파벌 역학 관계
아베 신조 총재의 갑작스러운 사임 이후, 자민당 내에서는 "반(反) 아소 다로" 정서가 확산되고 있었다.[2][3] 이는 아소가 아베 총재의 사임을 부추겼다는 의혹 때문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내 여러 파벌들은 후쿠다 야스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기 시작했다.고가 마코토(고가 파), 야마자키 다쿠(야마자키 파), 타니가키 사다카즈(타니가키 파) 등은 후쿠다와 정치적 입장이 가깝다는 이유로 지지를 표명했다.[1] 누카가 후쿠시로 (쓰시마 파) 역시 후쿠다와의 회담 후 출마를 포기하고 후쿠다 지지를 선언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후쿠다는 고이즈미 정권을 지지해준 사람"이라며 후쿠다 지지 의향을 밝혔다. 이에 따라 새로운 바람 (다케베 그룹)도 후쿠다 지지를 표명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아소 파를 제외한 모든 파벌이 후쿠다를 지지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파벌들의 움직임은 당내 요직을 차지하려는 의도로 비춰져 여론의 불신을 사기도 했다. 또한, 젊은 의원들을 중심으로 파벌 담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3. 3. 여론의 반응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마"에 편승하여 당 간부직을 노리고 주류로 들어가려는 각 파벌 및 의원들의 행태에 대한 불신 여론이 높아졌다.[4] 1년 전 총재 선거에서 아베 신조가 압도적인 당내 지지로 총재가 되었지만, 아베 내각에 대한 총괄이나 반성도 없이 아베와 사상, 신념이 다른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하는 쪽으로 일제히 돌아선 것에 대해 비판하는 언론도 있었다.[4]아소 다로는 원고대로 발언했던 후쿠다와 달리,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연상시키는 지론을 펼쳐 지지를 늘렸다.[4] 총재 선거 당일, 자민당 본부 앞에서 토이다 토오루가 자신의 블로그에 호소하여[4] 모인 수백 명의 남녀가 아소 콜을 외치는 등, 그의 인기를 보여주었다.[4]
4. 선거 결과
2007년 자민당 총재 선거는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패배하고 아베 신조 총재가 사임하면서 치러졌다. 아베 총재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반(反) 아소" 정서가 확산되었고, 후쿠다 야스오가 당내 여러 파벌의 지지를 받았다.[4]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도 후쿠다 지지를 선언하여, 아소 파벌을 제외한 모든 파벌이 후쿠다를 지지했다.
득표수 | 국회의원 표 | 지방 표 | |
---|---|---|---|
후쿠다 야스오 | 330표 | 254표 | 76표 |
아소 다로 | 197표 | 132표 | 65표 |
(무효 투표: 1)[4]
총 투표 결과, 후쿠다 야스오가 330표를 얻어 총재로 당선되었고, 아소 다로는 197표를 얻었다. 당초 예상을 깨고 아소 다로가 200표 가까이 획득한 것은 주목할 만한 결과였다. 국내 언론과 로이터 통신은 "선전"이라고 평가했고,[4] 마이니치 신문 조사에서는 당원 투표에서 아소가 후쿠다를 근소하게 앞섰다.
4. 1. 투표 결과
후보자 | 국회의원 투표 | 지방대표 투표 | 합계 | 결과 | |||
---|---|---|---|---|---|---|---|
득표수 | 득표율 | 득표수 | 득표율 | 득표수 | 득표율 | ||
후쿠다 야스오 | 254 | 65.8% | 76 | 53.9% | 330 | 62.6% | 1위(당선) |
아소 다로 | 132 | 34.2% | 65 | 46.1% | 197 | 37.4% | 2위 |
무효표 | 1 | - | - | - | 1 | - | colspan="2" rowspan="2"| |
합계 | 387 | - | 141 | - | 528 | - |
국회의원 투표와 지방 당원 투표를 합산한 결과, 후쿠다 야스오 후보가 330표(62.6%)를 얻어 197표(37.4%)를 얻은 아소 다로 후보를 제치고 당선되었다. 무효표는 1표였다.
당시 국내 언론과 로이터 통신은 아소 다로 후보가 197표를 획득한 것에 대해 "선전"이라고 평가했다. 마이니치 신문의 조사에 따르면, 당원 투표에서는 아소 후보가 후쿠다 후보보다 더 많은 표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다.
당초 아소 파벌을 제외한 모든 파벌의 지지를 받은 후쿠다 후보의 압승이 예상되었으나, 불과 16명의 소규모 파벌에 불과한 아소 후보가 200표 가까이 획득한 것은 이례적인 결과였다. 이는 각 파벌의 영수들은 후쿠다 지지로 의견을 모았지만, 파벌 내 2인자급 인사들(예: 하토야마 구니오, 나카가와 쇼이치, 아마리 아키라, 오시마 리토리, 스가 요시히데 등)이 대부분 아소 지지로 돌아서면서, 대부분의 파벌이 후쿠다 지지와 아소 지지로 양분되었기 때문이다. 후쿠다 후보의 소속 파벌인 마치무라 파벌에서도 우익 성향 의원들을 중심으로 아소 지지 혹은 백표 투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파벌 차원에서 후쿠다 지지로 완전히 굳어진 것은 타니가키 파벌과 니카이 파벌뿐이었다고 전해진다.
4. 2. 결과 분석
2007년 자민당 총재 선거는 후쿠다 야스오가 승리했지만, 파벌 간 역학 관계와 젊은 의원들의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후쿠다는 아소 다로 파벌을 제외한 모든 파벌의 지지를 받아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이는 아베 신조 총재 사임 이후 "반(反) 아소" 정서가 확산된 결과였다.[4]하지만 아소는 예상을 뛰어넘는 197표를 얻으며 선전했다. 특히 당원 투표에서는 후쿠다를 근소하게 앞섰다는 조사 결과도 있었다. 이는 아소가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를 연상시키는 발언으로 지지를 얻었고, 파벌 영수들의 결정과 달리 파벌 내 2인자급 인사들이 아소를 지지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한편, 젊은 의원들 사이에서는 파벌 담합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나왔다. 스기무라 다이조는 파벌의 후쿠다 지지 결정에 반발해 탈퇴했고, 이나다 도모미는 파벌 창시자의 아들인 후쿠다 대신 자신의 신념과 가까운 아소를 지지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총재 선거는 파벌의 영향력이 여전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젊은 의원들을 중심으로 파벌 정치에 대한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음을 시사했다.
5. 선거 이후
제21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에 패배하고 아베 신조 총재가 사임한 후 치러진 총재 선거는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반(反) 아소" 정서 속에 후쿠다 야스오가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것은 당내 파벌 정치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4]
5. 1. 자민당의 변화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에 패배한 후, 아베 신조 총재가 사임하면서 자민당 내에서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당내 여러 파벌들은 후쿠다 야스오를 지지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마저 후쿠다 지지를 표명하면서, 아소 다로 파벌을 제외한 모든 파벌이 후쿠다를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4]후쿠다 야스오의 압도적인 우세 속에서, 당 간부직을 노리는 파벌 및 의원들의 행태에 대한 여론의 불신이 높아졌다. 1년 전 아베 신조를 지지했던 의원들이 아베 내각에 대한 반성 없이 후쿠다 지지로 돌아선 것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었다.
한편, 아소 다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연상시키는 주장을 펼치며 지지를 얻으려 했다. 총재 선거 당일 자민당 본부 앞에서는 아소 지지자들이 모여들어 그의 인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젊은 의원들을 중심으로 파벌 담합 형태의 총재 선거에 대한 비판도 나왔다. 스기무라 타이조는 파벌의 후쿠다 지지 방침에 반발하며 탈퇴했고, 전통과 창조의 모임 회장인 이나다 토모미는 후쿠다 다케오의 장남인 후쿠다 야스오 대신 아소 다로를 지지했다.
5. 2. 일본 정치에 미친 영향
제21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당이 민주당에 참패한 후, 아베 신조 총재의 갑작스러운 사임으로 치러진 2007년 자민당 총재 선거는 일본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반(反) 아소" 정서 속에서 후쿠다 야스오가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된 것은 당내 파벌 정치의 한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4]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의 지지를 받은 후쿠다가 당선되면서, 1년 전 아베를 지지했던 의원들이 아베 내각에 대한 반성 없이 후쿠다 지지로 돌아선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아졌다. 이는 파벌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민당의 행태에 대한 불신을 키웠다.
한편, 아소 다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연상시키는 발언으로 지지를 얻으며, 자민당 본부 앞에서 수백 명의 지지자들이 모이는 등 인기를 과시했다. 젊은 의원들을 중심으로 파벌 담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스기무라 타이조는 파벌의 후쿠다 지지에 반발하며 탈퇴했고, 이나다 토모미는 파벌 창시자의 아들인 후쿠다 대신 아소를 지지했다.
6. 특이 사항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 선거부터 2007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 사이에 자민당에서는 국회의원 제명 및 복당, 의원 사직이 있었다. 후지이 다카오는 9월 7일에 정식으로 입당하여 총재 선거에 참가할 수 있었지만, 9월 4일에 의원직을 사직한 고바야시 아쓰시와 제명된 타마자와 도쿠이치로는 참가할 수 없었다.
6. 1. 당원 투표 논란
일부 젊은 의원들을 중심으로 파벌 담합에 의한 총재 선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스기무라 다이조는 소속 파벌인 '새로운 바람'에서 다케베 쓰토무 전 간사장이 후쿠다 지지를 호소한 것을 비판하며 회합을 도중에 퇴장하고 그룹을 탈퇴, 총재 선거에서 아소에게 투표했다.[4] 이나다 도모미는 마치무라 파 소속 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파벌 창시자 후쿠다 다케오의 장남인 후쿠다 야스오가 아닌, 사상 신념이 가까운 아소를 지지했다.가나가와현에서는 후쿠다 미네유키, 야마우치 고이치, 다나카 가즈노리, 고노 다로, 가메이 젠타로, 야마기와 다이시로 등이 선거구 내에서 자체적으로 당원 예비 선거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따라 의원 표를 던졌다. 자민당 가나가와현 연맹에서도 당원 투표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의원 고유의 당원 투표 방식에 대해 총무회에서는 "투표 엽서를 2장 받는 당원이 당황한다"는 이견도 있었지만, "각 의원이 실시하는 앙케이트에 의한 의향 조사"로 인정되었다.
6. 2. 형제 정치인
후쿠다 야스오와 아소 다로 두 후보는 모두 정치인 가문 출신이며, 동생(후쿠다 야스오는 요코테 유키오, 아소 다로는 아소 지로)이 먼저 후계자로 주목받았으나 요절했기 때문에 형인 자신이 후계자가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4]7. 표 산출 방식
2007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는 총 528표로, 중의원 의원 304표, 참의원 의원 83표, 도도부현 지부 연합회 대표 141표(47개 도도부현별 각 3표)로 구성되었다.
7. 1. 선거인 구성
7. 2. 표 계산 방식
참조
[1]
문서
[2]
문서
[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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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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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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