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카미 겐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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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카미 겐사이(1834년 ~ 1872년)는 막부 말기 일본의 검객으로, '인살(人斬) 겐사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구마모토 번의 하급 무사로 태어나 지슈칸에서 학문과 검술을 익혔으며, 존왕양이 사상을 받아들여 사쿠마 쇼잔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다. 8.18 정변 이후 조슈 번으로 옮겨 산조 사네토미를 경호하고, 조슈 정벌에 참여했다. 메이지 유신 후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나, 그의 죽음은 신정부의 방침에 따르지 않은 데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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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카미 겐사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본명 | 고모리 겐지로(小森 彦次郎) |
다른 이름 | 고다 겐베이(高田 源兵衛) |
별명 | 히토키리(人斬り, 인斬り) |
출생 | 1834년 12월 25일 |
출생지 | 히고국구마모토 |
사망 | 1872년 1월 13일 |
사망지 | 니혼바시 고덴마초인, 도쿄 |
묘소 | 이케가미 혼몬지, 도쿄 |
배우자 | 미사와 데이코(1861년 결혼, 1872년 사망) |
자녀 | 가와카미 겐타로(아들) |
가족 | 아버지: 고모리 사다스케 어머니: 와카 양아버지: 가와카미 겐베이(또는 히코베이) 형제: 고모리 한자에몬 손자: 가와카미 도시하루 |
경력 | |
소속 | 이신 시시(전) 조슈번(전) 구마모토번 |
복무 기간 | 알 수 없음 |
부대 | 기헤이타이(전) |
역할 | 군인, 검술 훈련 교관, 전 암살자 |
전투 | |
주요 전투 | 제1차 조슈 정벌 제2차 조슈 정벌 |
2. 생애
분큐 3년(1863년), 겐사이는 구마모토번 친병 선발에서 미야베 데이조와 동격의 간부로 추천되었다. 겐사이는 많은 사람을 벤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게 그가 벤 인물은 사쿠마 쇼잔뿐이며, 그가 언제 누구를 베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겐사이는 키가 5자(150cm 정도)로 작고 피부가 희어 언뜻 보면 여성 같았다고 한다. 그는 한 손 발도(拔刀)의 달인(한쪽 무릎이 지면에 닿을 정도로 낮은 자세에서 거꾸로 베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
가타야마 호키류를 수행했다는 설이 있지만, 당시 구마모토번에서 가장 번성했던 거합이 호키류였고, 호키류에는 역가사참(逆袈裟斬)이 많았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겐사이는 에도 막부 말기 4명의 무사 중 가장 두려운 존재로 여겨졌는데, 대낮에 사쿠마 쇼잔을 암살하고도 목격자나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8월 18일의 정변 이후, 겐사이는 조슈번에서 산조 사네토미의 경호를 맡았다. 겐지 원년(1864년) 6월 이케다야 사건으로 신센구미에 토벌당한 미야베 데이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교토로 향했다. 7월 11일, 겐사이는 개국론자였던 사쿠마 쇼잔을 암살했다. 겐사이는 쇼잔 암살 이후 다시는 사람을 베지 않았다고 한다.
제2차 조슈 정벌 때 겐사이는 조슈군에 참전하여 승리했다. 게이오 3년(1867년)에 구마모토번으로 돌아왔지만, 당시 구마모토번은 막부를 지지하는 좌막파가 실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투옥되었고, 대정봉환, 왕정복고, 도바 후시미 전투 기간에는 감옥에서 보냈다. 게이오 4년(1868년) 2월, 좌막파였던 구마모토번은 유신의 물결에 합류하기 위해 겐사이에게 협력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겐사이는 이름을 高田源兵衛|다카다 겐베일본어로 바꾸고 구마모토번에서 군무원과 검술 교사로 일했다. 옛 동료를 숨겨준 혐의 등으로 1870년에 체포되었고, 1871년 도쿄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1872년 1월 13일 도쿄 日本橋小伝馬町|니혼바시 고덴마초일본어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그는 도쿄 이케가미 혼몬지에 묻혔다.[4]
묘는 도쿄도 오타구의 이케가미 혼몬지에 있다.[4] 묘비명은 정면에 응관법성신사, 오른쪽에 연월일과 통칭 다카다 겐베라고 적혀 있다. 현재는 묘 앞에 큰 석비가 서 있는데, 이는 이케가미 혼몬지로의 개장에 즈음하여, 도쿠토미 이치로, 남작후지무라 요시로, 남작 기타자토 시바사부로, 남작 야스바 스에요시 등을 발기인으로 하는 가와카미 겐사이 건비 사무소가 발족하여 "가와카미 겐사이 선생비"를 건립한 것이다.
또한, 교토의 묘호인과 구마모토의 사쿠라야마 신사에 가묘가 하나씩 있으며, 후자의 린오엔의 묘는 히고 존황당과 신풍련의 123사에 열거되어 2번째로 다카다 겐베의 명으로 묘비가 있다.
연도 | 사건 |
---|---|
1868년 (만 34세) | 출옥. 메이지 신정부 수립에 따라 상경하여 다카다 겐베(高田源兵衛)로 개명. 구마모토번의 서기 군사계로서 도호쿠 각 번에 귀순을 요구하는 사신이 됨. |
1869년 (만 35세) | 번병대장으로서 쓰루사키에 부임, 유종관(有終館) 설립. |
1870년 (만 36세) | 7월, 쓰루사키를 떠나 구마모토로 돌아감. 11월, 체포됨. |
1871년 (만 37세) | 투옥, 에도로 이송됨. |
1872년 (만 38세) | 참수. |
2. 1. 초기 생애 (1834년 ~ 1861년)
1834년 히고 호소카와번 구마모토성 아래의 신마바카마치(현재의 구마모토시주오구 신마치 3초메)에서, 하급 번사인 小森 貞助|고모리 사다스케일본어와 그의 아내 和歌|와카일본어의 둘째 아들 小森 彦次郎|고모리 겐지로일본어로 태어났다.[1] 겐지로의 형인 한자에몬이 가문의 후계자로 선택되었기 때문에, 11세에 구마모토의 또 다른 가신인 河上 彦兵衛|가와카미 겐베일본어에게 입양되어 '''가와카미 겐사이'''로 개명되었다.[1] 처음 이름은 히코지로였으며, 같은 번의 하급 번사인 가와카미 겐베에(또는 히코베에)의 양자가 되어 이름을 히코사이로 고쳤다.이후 그는 번의 학교인 '''지슈칸'''(時習館)에 입학하여 학문과 무술 과정을 따랐다.[1] 훗날 그의 무술 실력을 고려하면, 훈련 중에 많은 시합에서 이기지 못했다는 점이 다소 특이한데, 이에 대해 그는 "대나무 시나이로 하는 ''겐주쓰''(검술)는 단순한 놀이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 16세에는 구마모토 성하 마을에서 청소를 담당하는 하인(''오소지-보즈'' お掃除坊主일본어)으로 일하게 되었으며,[1] 차방주로서 번주 저택의 하나하타야시키에서 채용되어 번주의 근습이 되었다. 이후 청소 방주에서 국로 부임 방주로 출세했다.
비록 낮은 직위였지만, 겐사이는 이 일에 전념하며 남는 시간을 무술과 문학 실력을 갈고 닦는 데 사용했을 뿐만 아니라 사도 (다도)와 이케바나 (꽃꽂이)도 배웠다.[1] 이때 그는 훗날 ''이신 시시''의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토도로키 부헤이와 미야베 테이조를 만났으며,[1] 유학자도도로키 타케베에나 국학자하야시 오우엔에게 사사했다. 신풍련의 오타구로 반유나 가야 세이켄과 함께 병법을 미야베 테이조에게 배워 존황양이 사상을 굳힌 것도 이 무렵으로, 히코사이는 특히 배외주의적인 양이론자였다. 그는 이들과의 대화를 통해 ''킨노'' (勤王), 즉 천황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개념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1]
분큐 무렵부터 세이카와 하치로 등과 교류하여 존황양이파로서 활동했으며, 삭발하고 승적을 벗었다. 분큐 3년(1863년)에는 구마모토번 친병 선발이 되어, 미야베 데이조 등과 동격의 간부로 추대되었다.
겐사이의 용모는 키가 5척 전후(150cm 정도)로 작고 피부가 하얬기 때문에, 언뜻 보면 여성 같았다고 한다. 그의 검은 독자적인 것으로, 한 손으로 칼을 뽑는 달인(한쪽 무릎이 땅에 닿을 정도로 낮은 자세에서 거꾸로 베기)이었다고 전해진다. 호키류 검술을 수련했다는 설도 있으며, 당시 구마모토번에서 가장 성행했던 검술이 호키류였다는 점과, 동작은 다르지만 호키류에는 거꾸로 베기 기술이 많다는 점이 그 근거가 되고 있다. 다만, 가와카미 히코사이의 후손에 의한 운홍류 검술을 익혔다는 증언도 있다.
8월 18일의 정변 이후, 겐사이는 교토를 떠나 조슈로 옮겨 산조 사네토미의 경호를 맡았으며, 이후 조슈의 양이파들과 친하게 지내며 인맥을 만들었다.
2. 2. 존왕양이파 활동 (1861년 ~ 1868년)
분큐 3년(1863년), 겐사이는 구마모토번 친병 선발에서 미야베 데이조와 동격의 간부로 추천되었다. 겐사이는 많은 사람을 벤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확실하게 겐사이가 벤 인물은 사쿠마 쇼잔뿐이며, 그가 언제 누구를 베었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겐사이는 키가 5자(150cm 정도)로 작고 피부가 희어 언뜻 보면 여성 같았다고 한다. 그는 한 손 발도(拔刀)의 달인(한쪽 무릎이 지면에 닿을 정도로 낮은 자세에서 거꾸로 베는 것)이었다고 전해진다.가타야마 호키류를 수행했다는 설이 있지만, 당시 구마모토번에서 가장 번성했던 거합이 호키류였고, 호키류에는 역가사참(逆袈裟斬)이 많았다는 점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겐사이는 에도 막부 말기 4명의 무사 중 가장 두려운 존재로 여겨졌는데, 대낮에 사쿠마 쇼잔을 암살하고도 목격자나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8월 18일의 정변 이후, 겐사이는 조슈에서 산조 사네토미의 경호를 맡았고, 겐지 원년(1864년) 6월 이케다야 사건으로 신센구미에 토벌당한 미야베 데이조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교토로 향했다. 겐지 원년 7월 11일, 겐사이는 개국론자였던 사쿠마 쇼잔을 암살했다. 겐사이는 쇼잔 암살 이후 다시는 사람을 베지 않았다고 한다.
제2차 조슈 정벌 때 겐사이는 조슈군에 참전하여 승리했다. 게이오 3년(1867년)에 구마모토번으로 돌아왔지만, 당시 구마모토번은 막부를 지지하는 좌막파가 실권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투옥되었고, 대정봉환, 왕정복고, 도바 후시미 전투 기간에는 감옥에서 보냈다. 게이오 4년(1868년) 2월, 좌막파였던 구마모토번은 유신의 물결에 합류하기 위해 겐사이에게 협력을 요청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다.
2. 3. 메이지 시대와 죽음 (1868년 ~ 1872년)
메이지 유신 이후 겐사이는 투옥에서 풀려났다. 그는 이름을 高田源兵衛|다카다 겐베일본어로 바꾸고 구마모토번에서 군무원과 검술 교사로 일했다.[4] 옛 동료 오라쿠 겐타로 밑에 있던 일부 기헤이타이 잔당을 숨겨준 혐의로 1870년 11월에 체포되었고, 1871년 도쿄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4] 그는 1872년 1월 13일 도쿄 日本橋小伝馬町|니혼바시 고덴마초인일본어에서 참수형을 당했다.[4] 그는 도쿄 이케가미 혼몬지에 묻혔다.[4]메이지 원년, 메이지 신정부의 참여관이 된 번주 호소카와 모리히사의 동생 나가오카 모리요시를 따라 상경했다. 이때부터 암살을 우려한 나가오카 모리요시의 조언으로 '''다카다 겐베'''(高田源兵衛, 후에 겐)로 개명하고 그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사쿠마 쇼잔의 아들이자 신센구미 대사인 사쿠마 가쿠지로(미우라 게이노스케)가 겐사이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겐사이는 이 해에 나카센도와 도호쿠 지방을 유세하며 존황을 설파했다.
개국 정책으로 나아가는 신정부는, 어디까지나 배외주의적인 쇄국존왕양이를 요구하는 겐사이와 같은 양이론자를 껄끄럽게 여겼다. 산조 사네토미와 기도 다카요시는 겐사이에게 변절을 꾸짖어 왔고, 교토의 요인들은 그를 더 이상 만나려 하지 않았다. 산조 사네토미는 "겐사이가 살아있는 한 베개를 높이하고 잠들 수 없다"고 측근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메이지 2년, 겐사이는 쓰루사키 (구마모토번 비지)로 좌천되어, 그곳에 "유종관"을 설립하여 수백 명의 병사를 모아 병법과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식산흥업을 위해 조선, 오사카, 홋카이도와의 교역에도 착수했지만, 번으로부터 갑작스러운 면직 통보를 받고 해산했다. 쓰루사키 시대에 오무라 마스지로 암살 사건에 연루된 오라쿠 겐타로가 도망쳐 왔기 때문에 숨겨준 탓에, 다음 해 구마모토로 돌아왔을 때 이경 사건에의 연루가 의심받았고, 이어 참의 히로사와 사네오미 암살 사건의 의혹도 받게 되어, 번옥에 갇혔다가 이어서 에도로 보내졌다.
메이지 4년 12월 4일 (1872년 1월 13일), 니혼바시 고덴마초에서 참수되었다. 그러나 오무라·히로사와 등의 암살 사건에 대한 겐사이의 연루 정도는 낮았고, 신정부의 방침에 따르지 않고 위험한 양이론자로서의 반란 분자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겐사이 등 존황파를 봉쇄하려는 구마모토번의 책략이라는 설도 있다.
사형 판결을 받았을 때와 유언으로 남긴 노래는 각각 2수이다.
향년 37세. 계명은 應観法性信士(응관법성신사)이다.[4]
묘는 도쿄도 오타구의 이케가미 혼몬지에 있다.[4] 묘비명은 정면에 응관법성신사, 오른쪽에 연월일과 통칭 다카다 겐베라고 적혀 있다. 현재는 묘 앞에 큰 석비가 서 있는데, 이는 이케가미 혼몬지로의 개장에 즈음하여, 도쿠토미 이치로, 남작후지무라 요시로, 남작 기타자토 시바사부로, 남작 야스바 스에요시 등을 발기인으로 하는 가와카미 겐사이 건비 사무소가 발족하여 "가와카미 겐사이 선생비"를 건립한 것이다.
또한, 교토의 묘호인과 구마모토의 사쿠라야마 신사에 가묘가 하나씩 있으며, 후자의 린오엔의 묘는 히고 존황당과 신풍련의 123사에 열거되어 2번째로 다카다 겐베의 명으로 묘비가 있다.
연도 | 사건 |
---|---|
1868년 (만 34세) | 출옥. 메이지 신정부 수립에 따라 상경하여, 다카다 겐베(高田源兵衛)로 개명. 구마모토번의 서기 군사계로서 도호쿠 각 번에 귀순을 요구하는 사신이 됨. |
1869년 (만 35세) | 번병대장으로서 쓰루사키에 부임, 유종관(有終館) 설립. |
1870년 (만 36세) | 7월, 쓰루사키를 떠나 구마모토로 돌아감. 11월, 체포됨. |
1871년 (만 37세) | 투옥, 에도로 이송됨. |
1872년 (만 38세) | 참수. |
바쿠후의 신하였던 사쿠마 쇼잔이 지사들의 술자리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때, 가와카미 겐사이는 잠시 자리를 떠났다가 쇼잔의 목을 베어 돌아왔다고 한다.
바쿠후의 신하인 사쿠마 쇼잔을 살해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가와카미 겐사이는 평소 예의 바르고 온화했지만, 사람을 거침없이 베는 잔혹함도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인참(人斬) 겐사이", "히라쿠치(살무사) 겐사이" 등으로 불렸다.[3] 겐사이가 누구를 베었는지는 사쿠마 쇼잔 외에는 확실한 기록이 없지만, 많은 일화로 미루어 보아 기록되지 않은 살인을 자주 저질렀던 것으로 보인다.[3]
일본의 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의 주인공 히무라 켄신과 《은혼》의 등장인물 '가와카미 반사이'는 가와카미 겐사이를 모티브로 한 것이다.[1]
[1]
서적
Rurouni Kenshin, Volume 1
Viz Media
3. 암살 의혹
겐사이는 안세이 대숙청 당시 에도에 있는 구마모토 저택에 있었다. 이이 나오스케 암살 사건 이후, 탈출하는 암살단이 저택으로 들이닥치자, 겐사이는 혼란을 진정시키고 의사를 부르며 그들을 위해 다과회를 열고 존경심을 표했다.
1864년, 겐사이는 가장 유명하고 유일하게 확인된 암살 사건인 사쿠마 쇼잔 암살을 감행했다. 1864년 8월 12일, 그는 최소 3명의 다른 암살범들과 함께 대낮에 쇼잔을 매복 공격하여 단칼에 그를 죽였다. 그 사건 직후, 교토 사가 텐류지 절에서 겐사이는 그의 동료들에게 "사람을 죽였다는 것을 실제로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그 시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기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라고 말했다. 다른 암살 사건들이 그에게 기인되지만, 쇼잔 암살만이 증명될 수 있다.[4]
4. 인물됨
가쓰 가이슈는 겐사이를 "끔찍한 놈"이었다고 평가하며, 겐사이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밭의 가지나 오이를 따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가쓰는 겐사이가 결국 살해당한 것은 인과응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은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아 살아남았다고 믿었다.[4]
가쓰는 겐사이가 야심 있는 사람을 바로 베어버리고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겐사이는 가쓰의 질문에 "사람을 죽이는 것은 밭에서 채소를 수확하는 것과 같다"고 답했고, 가쓰는 자신도 표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자고 제안했다. 겐사이는 이 제안에 웃으며 동의했다고 한다.[4]
겐사이는 술자리에서 동료들이 막부 관리를 비난하자, 잠시 후 그 관리의 피투성이 머리를 들고 돌아와 다시 술을 마셨다는 일화가 있다. 겐사이에게 한번 노려지면 도망칠 수 없었기에 동료들은 그를 "히라쿠치(살무사) 겐사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5]
겐사이의 검술은 자기류로,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고 무릎을 약간 굽힌 후, 왼발을 뒤로 뻗어 오른손으로 베는 방식이었다.[5] 그는 완고하고 야성적이며 격렬한 성격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인정 많고 부모와 처자에게 다정한 면모도 있었다.
5. 대중문화 속의 겐사이
검객이자 방랑자인 가공의 인물, "발도재"로도 알려진 히무라 켄신은 만화 ''바람의 검심''에 등장하며, 겐사이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이 캐릭터는 메이지 유신 이후 10년 동안 살인을 맹세한 참회하는 전 암살자이다.[1]
만화 ''은혼''의 등장인물 가와카미 반사이는 겐사이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참조
[2]
웹사이트
大政奉還150周年記念プロジェクト
http://www.taiseihok[...]
京都市
2017-05-12
[3]
웹사이트
河上彦斎~「るろうに剣心」のモデルとされる人斬りの実像
https://shuchi.php.c[...]
PHP研究所
2018-12-25
[4]
뉴스
「るろうに剣心」のモデルの墓は力道山と同じ寺にあった 石碑の裏にひっそりと
https://www.daily.co[...]
2023-06-16
[5]
문서
「河上彦斎小傳刊行及建碑發起人名簿」『河上彦斎』(初版)、92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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