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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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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후는 후한 말, 조위의 책사로, 뛰어난 책략과 처세술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양주 무위군 고장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명성이 없었으나, 동탁, 이각, 곽사, 장수, 조조 등을 섬기며 다양한 계략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졌다. 동탁 사후 이각, 곽사 등에게 장안을 공격하도록 제안하여 후한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비판도 받지만, 조조에게 투항하여 관도대전 승리에 기여하고 조비의 후계 다툼에 조언하는 등 조위 건국에 영향을 미쳤다. 조비 치세에 태위에 임명되었으며, 사후 숙후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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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자허의 청나라 삽화
자허의 청나라 삽화
이름가후
본명賈詡
문화 (文和)
시호숙후 (肅侯)
출생147년
사망223년 8월 11일 (향년 76세)
출생지량주무위군고장현
직업관료, 조언가, 작가
아버지가공
자녀가모
가지
가방
작위위수향후 (魏壽鄉侯)
관직 경력
태위220년 4월 6일 ~ 223년 8월 11일
궁궐 자문관 (태중대부)? ~ 220년 4월 6일
지팡이 소지자 (집금오)199년 ~ ?
정의를 옹호하는 장군 (선의장군)195년 ~ 196년
가정 자문관 (광록대부)? ~ 195년
서기 책임자 (상서)? ~ ?
좌보좌 (좌풍익)192년 ~ ?
오랑캐 공격 대령 (토로교위)189년 ~ 192년
평진 사령관 (평진도위)? ~ 189년
섬긴 군주

2. 생애

가후는 양주 무위군 고장현(姑臧縣) 사람으로, 정사 《삼국지》에서는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 변화를 꿰뚫고 있었다'고 평가받는 책사이다. 젊은 시절에는 염충만이 그를 장량과 진평과 같은 인물로 평가했을 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동탁의 낙양 입성과 반동탁 연합군 결성, 장안 천도 등 혼란스러운 시기에 가후는 동탁 휘하에서 활약했다. 동탁이 낙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십상시원소에 의해 몰살당한 이후였고, 하진의 부하들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때 가후는 동탁에게 계책을 내어, 군사들을 세 개 조로 나누어 밤낮으로 성을 드나들게 하여 마치 대군이 계속해서 도착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이 계책으로 하진의 부하들은 동탁에게 항복했다.

동탁 사후 이각, 곽사, 장제 등을 설득해 장안을 장악하고, 조조와 대립하던 장수에게 조조에게 투항할 것을 권하는 등 뛰어난 책략을 보였다. 조조에게 귀순한 후에는 관도 대전에서 결단을 촉구하여 승리에 기여하고, 마초한수의 반란 때는 이간책을 사용하여 진압하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조조 사후 후계자 분쟁에서 조비를 지지했으며, 조비가 황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조위를 건국한 후에는 삼공 중 하나인 태위(太尉)에 임명되었다. 손권은 조비가 가후를 태위에 임명한 것을 비웃었다고 한다.

가후는 오와 정벌에 대해 시기상조라며 반대했지만, 조비는 이를 듣지 않고 강릉 전투를 일으켰다가 패배했다. 가후는 223년 7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숙후(肅侯)라는 시호를 받았다.[62]

2. 1. 초기 생애와 동탁 섬김 (147년 ~ 192년)

젊은 시절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양군(현재의 간쑤성 간구현 일대)의 관리였던 염충은 가후가 장량과 진평과 같은 초기 전한의 유명한 책사의 재능을 지녔다고 높이 평가했다.[3]

효렴으로 추천되어 조정에서 낭중으로 근무했지만, 병으로 인해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적 반군에게 붙잡혔는데, 가후는 반군에게 자신이 단경의 외손자라고 거짓말을 했다. 당시 태위였던 단경은 오랫동안 한나라 서부 지역을 지키는 장군으로 복무하여 그 지역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고, 가후는 적 반군이 단경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나를 죽이고 내 시체를 계속 보관하면 우리 외할아버지인 단경 장군님이 거액의 돈을 주고 내 시체를 찾아갈 것이다. 날 죽일 거면 내 시체나 잘 보관해라."라고 말했고, 예상대로 반군은 그를 존경하며 풀어주었다. 다른 여행자들은 모두 살해되었다.[4]

189년,[5] 군벌 동탁이 수도 낙양에 입성하여 중앙 정부를 장악했을 때, 가후는 평진(平津)의 도위(都尉)로 재직하며 대사마(大司馬)부에서 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는 토로교위(討虜校尉)로 승진하여 동탁의 사위인 우보가 이끄는 부대에 배속되었다.[6]

192년,[7] 동탁은 장안에서 여포에게 암살당했고, 우보는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7] 이각, 곽사, 장제를 포함한 동탁의 나머지 측근들은 두려움을 느껴 해산하고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다. 가후는 그들에게 양주 출신 사람들을 모두 숙청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흩어져 혼자 여행한다면, 심지어 정장(亭長)조차도 체포할 수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함께 서쪽으로 후퇴하여 군대를 모아 재편성한 다음 장안을 공격하여 동탁을 위해 복수할 것을 제안했다. 성공하면 황제의 권위를 이용하여 제국을 정복할 수 있고, 실패하더라도 도망가기에는 늦지 않다고 말했다. 동탁의 측근들은 가후의 말에 동의했고, 그들은 왕윤이 이끄는 장안의 새 중앙 정부를 무찌르고 도시를 장악했다.[8]

배송지는 《삼국지》에서 가후의 전기에 주석을 달면서, 가후가 이 제안을 한 것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동탁의 죽음이 그의 폭정의 종말과 쇠퇴하는 동한 왕조의 부활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했지만, 가후의 제안으로 인해 한 제국은 동탁의 죽음 이후 더욱 혼란스러워졌다고 평가했다.[9]

2. 2. 이각, 단외, 장수 섬김 (192년 ~ 199년)

동탁(董卓)이 여포(呂布)에게 살해된 후, 이각(李傕), 곽사(郭汜), 장제(張濟) 등 동탁의 부하들은 동요하여 도망치려 했다. 이때 가후는 이들을 설득하여 단결시키고 장안을 습격하여 다시 정권을 잡도록 했다.[62] 이 공으로 가후는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관리 선발 임무를 맡아 많은 유명 인사를 등용하여 조정의 정치 체제 개선에 힘썼다. 그러나 이각은 오히려 가후를 경계하게 되었고, 가후는 동향 출신인 단외(段煨)에게 의탁했다.[10][11]

단외가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안 가후는 그의 곁을 떠나 장수에게 갔다. 이때 가족은 단외에게 남겨두었는데, 가후는 “단외는 나를 경계하니 내가 떠나면 즐거워할 것이고, 밖에서 강력한 지원자와 결합하리라고 기대하고서 가족을 후대할 것이다”라고 예상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19][21]

당시 남양군(南陽郡)에 근거지를 둔 장수는 책사가 부족했기에 가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20][21] 장수는 가후의 계책을 따랐을 때는 조조와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듣지 않았을 때는 패배했다. 조조는 장남 조앙(曹昻)을 잃을 정도로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가후는 허허실실 전략을 구사하여 조조를 유인하는 등 뛰어난 계략을 선보였다.

2. 3. 장수 휘하에서의 활약 (197년 ~ 199년)

가후는 양주 무위군 고장현(姑臧縣)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염충만은 그에게서 장량진평 같은 뛰어난 책략가의 자질을 알아보았다. 효렴으로 추천되어 관직에 나아갔으나, 병으로 귀향하던 중 저족 반란군에게 붙잡히는 위기를 겪었다. 이때 가후는 뛰어난 임기응변으로 당시 저족에게 큰 위세를 떨치던 태위단경의 외손자라고 거짓말을 하여 목숨을 건졌다.[62]

동탁이 낙양에 입성할 당시, 가후는 동탁의 사위 우보의 참모였다. 동탁 사후, 이각, 곽사, 장제 등 동탁의 잔당들이 혼란에 빠져 도망치려 할 때, 가후는 이들을 설득하여 장안을 공격, 여포를 몰아내고 다시 정권을 잡게 하였다. 이 공로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사양하고, 인사 담당 관리로서 많은 인재를 등용하며 조정의 정치 체제 개선에 힘썼다. 그러나 이각은 오히려 가후를 경계하게 되었고, 가후는 동향 출신 단외에게 의탁했다가, 단외가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을 알고 장수에게 귀의했다.[62]

가후는 장수에게 형주 자사 유표와의 동맹을 제안했고, 직접 유표를 설득하여 동맹을 성사시켰다.[22]

하지만 가후는 유표가 결단력이 부족하여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평가했다.[23]

197년, 장수는 조조에게 항복했다가, 조조가 장제의 아내를 첩으로 삼고 장수를 암살하려 하자, 가후의 계책을 따라 조조군을 기습하여 조앙, 전위 등을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8년, 조조는 다시 장수를 공격했지만, 원소와의 대치를 앞두고 철수했다. 장수는 조조를 추격하려 했으나, 가후는 이를 만류하며 패배를 예측했다. 장수는 가후의 말을 듣지 않고 추격했다가 패배했다. 그러나 가후는 다시 공격하면 승리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장수는 그의 조언을 따라 재차 공격하여 승리했다.[24]

가후는 상황 변화를 정확히 읽고, 조조군의 허점을 찌르는 전략으로 장수의 승리를 이끌었다.[25]

199년, 관도 전투를 앞두고 원소가 장수에게 동맹을 제안했을 때, 가후는 원소의 제안을 거절하고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주장했다.[62]

가후는 조조가 천자를 옹립하고 있다는 점, 약소한 세력이기에 아군을 후대할 것이라는 점, 천하를 노리는 인물이라면 개인적인 원한을 씻고 덕을 보일 것이라는 점을 들어 장수를 설득했다. 장수는 가후의 의견을 따라 조조에게 항복했고, 조조는 이들을 크게 환영하며 가후를 집금오에 임명했다.[62]

2. 4. 조조와 조비 섬김 (199년 ~ 223년)

조조원소관도 대전에서 대치할 때, 원소는 장수에게 동맹을 제안했지만, 가후는 원소가 형제 원술조차 신뢰하지 못한다며 반대했다. 대신 가후는 장수에게 조조에게 항복하라고 권했다. 가후는 조조가 황제의 이름으로 천하를 다스리고, 세력이 약하므로 자기편을 늘리려 할 것이며, 과거의 원한을 덮고 덕을 보여주려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62] 장수는 가후의 조언을 따랐고, 조조는 가후의 귀순을 기뻐하며 “내게 천하인들의 신뢰를 가져다준 사람이 바로 그대다”라고 말했다.[27] 가후는 집금오(執金吾)에 임명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으며, 이후 기주 목(牧)으로 승진했다. 당시 기주는 원소의 통치하에 있었기에, 가후는 사공 직을 맡고 있던 조조의 군사 고문으로 활동했다.[27]

관도 대전 동안 보급품이 부족해지자 조조는 가후에게 조언을 구했고, 가후는 조조의 강점을 언급하며 결단력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조조는 가후의 조언대로 원소군을 공격하여 승리했다.[28] 조조는 관도 전투에서 원소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그 후 황하 북쪽의 원소의 나머지 영토를 정복했다.[28] 북중국을 평정한 후 조조가 기주 자사로 임명되자, 가후는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전임되었다.[30]

208년,[30] 조조가 형주를 병합한 후 강동 지역을 공격하려 할 때, 가후는 반대하며 형주의 안정과 인재 등용을 통해 강동을 복종시킬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조조는 이를 무시하고 적벽 대전에서 손권유비의 연합군에게 패배했다.[29][30] 배송지삼국지 가후전에 주석을 달아 가후의 충고가 부적절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형주가 불안정하여 조조의 통제하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했다.[31]

211년,[32] 조조가 통관 전투에서 한수마초가 이끄는 서북 지역 군벌 연합군과 교전했을 때, 가후는 조조에게 이간책을 제안했다. 조조는 가후의 조언대로 한수와 마초 사이에 불화를 조장하여 승리했다.[33]

211년에서 217년 사이, 조조의 후계자 문제로 조비조식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조비는 가후에게 조언을 구했다. 가후는 겸허한 행동과 효성을 강조했고, 조비는 이를 따랐다.[37] 조조가 후계자 문제로 가후에게 조언을 구하자, 가후는 원소와 유표의 예를 들며 장자를 후계자로 정하지 않아 멸망한 사례를 언급하여 조비의 지위를 확정시켰다.[38]

가후는 자신이 조조 밑에서 오래 봉사하지 않았음을 알고, 다른 사람들의 질투와 의심을 피하고자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사적인 교제를 피했다. 또한 자녀들의 혼인 상대로 명문가를 고르지 않았다.[39]

손권조비에게 가후는 진심으로 조비를 섬기지 않고 기회를 엿본다고 말했고, 가후는 이를 눈치채고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조비가 문제로 즉위하자 가후는 태위(太尉)에 임명되었고, 77세에 사망하여 숙후(肅侯)라는 시호를 받았다.[62]

2. 5. 조비 치세와 죽음 (220년 ~ 223년)

220년 4월 6일, 조비가 위왕이었을 때, 가후는 삼공 중 하나인 태위(太尉)에 임명되었다.[40] 220년 말, 조비는 헌제에게 선위를 강요하여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조위를 건국했다.[41] 황위에 오른 후에도 가후는 태위로 남았고, 정후에서 위수향후(魏壽鄉侯)로 승진했으며, 식읍 800호를 받았다.[42] 가후의 승진은 조비를 도와 황위를 계승하도록 도운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고 전해진다.[43] 손권은 조비가 가후를 태위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비웃었다.[44]

220년에서 223년 사이, 조비는 오와 을 공격하여 정복하려 했다. 그는 어느 나라를 먼저 공격해야 할지 가후에게 자문을 구했다.[45]

가후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다른 사람을 정복하기 전에 먼저 군사력을 키워야 합니다. 기반을 다지기 전에 먼저 문화를 진흥시켜야 합니다. 폐하는 적절한 시기에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기회를 엿보며 문화를 진흥시킬 수 있다면, 적을 정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오와 촉은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이지만, 산과 강과 같은 자연 지형의 장벽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유비는 재능과 큰 야망을 가지고 있고, 제갈량은 국가 통치에 뛰어나며, 손권은 추세를 파악하고 속임수를 간파하며, 육손은 군사력을 매우 잘 평가합니다. 그들은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을 장악하고 있으며, 요충지와 강과 호수에 방어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공격을 계획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병법에 따르면, 실제로 전투를 벌이기 전에 우위를 점해야 합니다. 적의 세력을 평가한 다음, 전투에 보낼 장군을 결정해야 합니다. 이는 오판을 방지하기 위함입니다. 제 관찰에 따르면, 우리 신하들 중 누구도 유비와 손권에 필적할 만한 자는 없습니다. 비록 황제의 위엄으로 전쟁을 치르더라도, 상당한 손실 없이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과거 순 임금은 병사들에게 무기를 휘둘러 유묘를 항복시켰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군사 문제보다 민생에 먼저 집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46]

조비는 가후의 말을 듣지 않았다. 223년, 위는 강릉 전투에서 오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47]

가후는 223년 8월 11일 77세(만 나이 기준)로 사망했다. 그는 시호인 "숙후"(肅侯)를 받았다.[48]

3. 평가

가후는 평생 계책에 오류가 없었으며 사람의 심리를 정확하게 읽어내는 심리전의 대가였다. 당대에 이미 진수는 가후를 순욱, 순유와 더불어 조조의 가장 뛰어난 책사로 꼽았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 귀신같은 통찰력을 두고 삼국지 최고의 책사로 가후를 꼽는다.[57] 그러나 제갈량, 순욱, 주유, 노숙처럼 한 시대의 비전을 제시하고 조직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보여준 적은 없기 때문에 뛰어난 술책가였을 뿐 그 이상은 아니라며 낮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실제로도 가후의 일생은 결국 난세 속에서 자신의 재주를 팔아 스스로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안중에 없어보인다. 단, 이는 명문가도 아니고 출생도 벽지였던데다가 젊어서 의도치 않게 이각, 곽사 등과 엮여 버린 만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구석도 있다. 그러나 비슷하게 명문가도 아니며 출생지도 벽지였던 데다가 젊은 나이에 사망했지만 후한 재건을 위해 목숨 바쳐 노력했던 손견과 비교하면 가후는 그냥 인간 말종일 뿐인 인물이다.

가후의 재능은 분명 뛰어나나, 제갈량, 순욱, 주유, 노숙이 모든 역량을 다 활용해 일을 하는 것과는 달리 가후는 딱 자기 목숨을 보존하는 정도 만큼만 일했으며 이 때문에 손권이 가후에게 벌레 같은 인간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당대의 맹장이자 후한 재건에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손견과는 대척점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가후의 전기를 썼으며, 다음과 같이 그를 평가했다: "순유와 가후는 책략에 매우 상세하며, 지금까지 실수가 없었다. 그러나 융통성과 유연성 면에서는 장량과 진평에 비할 바가 못 된다."[57]

배송지는 《삼국지 주》를 주석하면서 진수와 의견을 달리했다. 그는 전기는 유사성을 기반으로 같은 권에 분류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가후의 전기는 정욱과 곽가의 전기와 같은 권에 있어야 하며, 순욱순유의 전기와 같은 권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배송지는 가후가 후자 두 사람보다 전자 두 사람과 더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배송지는 심지어 "순유와 가후의 도덕적 인격의 차이는 달빛과 촛불의 차이와 같다. 둘 다 빛을 내지만 근본적으로 다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진수가 순유와 가후를 개별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같은 문장에서 평가한 것을 비판했다.[58]

진수는 순유와 가후에 대해 "치는 수에 실책이 없고 사태의 변화에 통달했다 해도 좋다. 전한의 장량이나 진평에 다음간다"고 높이 평가했다.

한편, 『삼국지』에 주석을 가한 배송지는 가후가 동탁 사후 이각, 곽사 등의 도망을 막고 장안 공략을 진언한 것에 대해 "악의 화신인 동탁이 옥문대에 효수되어, 비로소 중원이 평화로워지려 했는데, 재앙의 실마리를 거듭 묶어 다시 맺고, 인민에게 나라 말기와 같은 고난을 강요한 것은 모두 가후의 한 마디에 의한 것이 아닌가"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가후의 열전이 순욱이나 순유와 병렬되어 있는 것에 대해서도 "(가후와 같은 인물은) 정욱·곽가 등의 전과 함께 편입해야 하며, 순욱·순유와 동열로 하는 것은 종류 구분을 잘못했다"고 엄격한 평가를 내렸다.

4. 가족 관계

가후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63]

관계이름비고
증조부가수옥(賈秀玉)무위태수(武威太守), 가의(賈誼,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68년)의 9대손
조부가연(賈衍)연주자사(兗州刺史)
아버지가습(賈龔)경기장군(輕騎將軍), 무위군으로 거처를 옮김
가채(賈綵)
장남가목(賈穆)부마도위(駙馬都尉), 태수(太守), 아버지의 작위(위수향후) 계승[62]
차남가기(賈璣)부마도위, 관내후(關內侯), 장락군(長樂郡)으로 거처를 옮김, 가필(賈疋, ? ~ 312년)의 조부[63]
막내아들가방(賈訪)열후(列侯)[62]



구당서》에 따르면, 가후는 주나라 왕족의 후손이다. 그의 선조는 주나라 무왕의 아들인 당숙우의 막내 아들인 공명(公明)이었다. 공명은 주 강왕에 의해 가백(賈伯)으로 봉해졌고, 린펀 주변의 땅을 영지로 받아 "가(賈)"로 명명되었다. 그의 후손들은 ""를 성씨로 삼았다.[49]

『원화성찬』에서는 먼 선조에 대해 "당숙우의 소자 공명은 강왕에게 가에 봉해졌다. 후, 진에 의해 멸망하여, 나라를 성씨로 삼았다"고 하며, 원래는 희씨였으나, 진에 의해 가국이 멸망했으므로 가씨로 성을 바꿨다고 한다.

가까운 선조는 전한의 가의로, 가후와 마찬가지로 모략에 능했으며, 제후들의 세력을 꺾기 위해 분가를 만들게 하는 계략 등을 펼쳤지만, 태평성대였기 때문에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장사왕태부라는 한직으로 좌천되어 실의 속에 죽었다. 후대의 명나라 유학자 왕부지는 "가의처럼 뛰어난 인물도 태평성세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다.[60]

『원화성찬』에 따르면, 가후의 아들 가기는 장락령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가씨와 달리 "장락가씨"를 칭했다고 한다. 『신당서』 권75·표제15하·재상세계5하에 따르면, 당대에는 자손이 번성하여, 두 명의 재상을 배출할 정도였다. 유명한 자손으로는 당 현종 시기의 태자사인 가증과, 그의 아들로 당시선에도 시가 게재된 시인 가지가 있다.[61] 또한, 『신당서』 재상세계5하에 따르면 당 덕종 시기의 재상으로 지리에 능통하고, 다수의 지도를 제작한 가담도 자손이며, 감로의 변에서 환관에게 살해된 가속도 자손이라고 하지만, 가속은 모반자로 여겨져 자손도 처형되었고, 계보도 재상세계5하에서 제외되었다.

5. 《삼국지연의》 속 가후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가후는 기지에 뛰어난 참모로서 활약한다. 주요 에피소드로는 이각 등에 대한 헌책, 헌제에 대한 접근, 장수에 대한 조조의 기습책, 조조에게 귀순할 것을 진언, 동관 전투에서의 이간계, 조조에게 조비후계자 계승에 대한 조언, 문제 치세에서의 활약 등이 사료에 따라 묘사되어 있다.[1] 가후의 행적 중 동탁이 살아있을 때 동탁의 책사 역할을 한 것은 모두 이유에게 넘겨졌으며, 동탁의 부하 시절 가후에 대한 묘사는 없다. 『삼국지연의』에서 가후의 행적은 동탁이 사망한 이후부터 묘사되기 시작한다.[1]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Zizhi Tongjian
[6] 서적 Sanguozhi
[7] 서적 Zizhi Tongjian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12] 서적 Sanguozhi
[13] 서적 Zizhi Tongjian
[14] 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16] 서적 Sanguozhi
[17] 서적 Sanguozhi
[18] 서적 Sanguozhi
[19] 서적 Sanguozhi
[20] 서적 Zizhi Tongjian
[21] 서적 Sanguozhi
[22] 서적 Sanguozhi
[23] 서적 Sanguozhi
[24] 서적 Sanguozhi
[25] 서적 Sanguozhi
[26] 서적 Sanguozhi
[27] 서적 Sanguozhi
[28] 서적 Sanguozhi
[29] 서적 Sanguozhi
[30] 서적 Zizhi Tongjian
[31] 서적 Sanguozhi
[32] 서적 Zizhi Tongjian
[33] 서적 Sanguozhi
[34] 서적 Zizhi Tongjian
[35] 서적 Zizhi Tongjian
[36] 서적 Sanguozhi
[37] 서적 Sanguozhi
[38] 서적 Sanguozhi
[39] 서적 Sanguozhi
[40] 서적 Sanguozhi
[41] 서적 Zizhi Tongjian
[42] 서적 Sanguozhi
[43] 서적 Weilue
[44] 서적 Xun Xu Biezhuan
[45] 서적 Sanguozhi
[46] 서적 Sanguozhi
[47] 서적 Sanguozhi
[48] 서적 Sanguozhi
[49] 서적 Xin Tang Shu
[50] 서적 Sanguozhi
[51] 서적 Sanguozhi
[52] 서적 Xin Tang Shu
[53] 서적 Sanguozhi
[54] 서적 Shiyu
[55] 서적 Xin Tang Shu
[56] 서적 Sui Shu
[57] 서적 Sanguozhi
[58] 서적 Sanguozhi
[59] 웹사이트 元和姓纂 (四庫全書本)/卷07 https://zh.wikisourc[...] 新唐書
[60] 서적 読通鑑論
[61] 서적 元和姓纂
[62] 서적 삼국지
[63] 서적 신당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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