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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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겨울 전쟁은 1939년 11월부터 1940년 3월까지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한 전쟁이다. 배경은 1917년 핀란드의 독립 이후 소련과의 긴장 관계, 그리고 1939년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으로 핀란드가 소련의 세력권에 포함된 것이다. 소련은 핀란드에 영토 할양과 군사 기지 주둔을 요구했지만 핀란드가 거부하자, 마이닐라 발포 사건을 조작하여 침공을 시작했다. 핀란드는 열악한 군사력에도 불구하고 지형과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소련군에 저항했으며, 국제 사회의 지원을 받았다. 주요 전투로는 수오무살미, 톨바야르비, 콜라 전투 등이 있었다. 전쟁 결과, 핀란드는 영토를 할양하고 군사 기지 임대를 허용하는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전쟁은 소련군의 취약성을 드러내어 독소전쟁에 영향을 미쳤으며, 핀란드에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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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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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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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1939년 11월 30일 – 1940년 3월 13일 |
장소 | 핀란드 동부 |
결과 | 모스크바 평화 조약 |
영토 변경 | 핀란드 만 섬, 카렐리야 지협, 라도가 카렐리야, 살라, 리바치 반도를 소련에 할양, 한코를 소련에 조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해외 자원군 |
교전국 2 | 핀란드 민주 공화국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퀴외스티 칼리오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후고 외스테르만 하랄드 외퀴스트 에리크 하인리히스 볼데마르 해글룬드 빌료 투옴포 |
교전국 2 지휘관 | 이오시프 스탈린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세묜 티모셴코 키릴 메레츠코프 블라디미르 그렌달 그리고리 슈테른 미하일 두하노프 발레리안 프로로프 |
병력 | |
교전국 1 병력 | 300,000–340,000명 32대의 전차 114대의 항공기 |
교전국 2 병력 | 425,000–760,000명 2,514–6,541대의 전차 3,880대의 항공기 |
사상자 | |
교전국 1 사상자 | 사망 또는 실종: 25,904명 부상: 43,557명 포로: 800–1,100명 전차: 20–30대 항공기: 62대 무장 쇄빙선: 1척 손상 핀란드 라도가 해군 파견대: 소련에 양도 총 사상자: 70,000명 |
교전국 2 사상자 | 사망 또는 실종: 126,875–167,976명 부상 또는 질병: 188,671–207,538명 (최소 61,506명은 질병 또는 동상) 포로: 5,572명 전차: 1,200–3,543대 항공기: 261–515대 총 사상자: 321,000–381,000명 |
관련 정보 | |
관련 항목 | 배경 타임라인 해외 지원 공중전 해전 여파 대중문화 핀란드 소개 만네르헤임 선 프랑스-영국 개입 계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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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혼란기에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소련은 핀란드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소련은 레닌그라드의 안보를 이유로 핀란드에 군사적 양보를 요구했다.[57][58]
1809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핀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말,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은 후 핀란드는 1917년 12월 6일 독립을 선언했다. 핀란드 내전으로 소련과 핀란드의 관계는 긴장되고 냉각된 상태를 유지했다.
1939년 8월 23일, 소련과 나치 독일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에는 동유럽, 중앙유럽, 북유럽 국가들의 영토를 양국이 나누는 비밀 조항이 있었다. 핀란드는 소련의 '이해권'에 들어간다고 합의되었다. 1939년 9월, 스탈린은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상호 방위 조약'을 강요해 군사 주둔권을 획책하여 발트 3국을 병합했다.
1939년 10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핀란드를 방문해 핀-소 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요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카렐리야(Karelia), 라플란드(Lappland) 지방 등 약 2,300km2 영토 할양.
- 수리사르섬(Surisar), 코틀린섬(Kotllin) 등 핀란드만의 4개 섬과 올란드 제도 할양.
- 투르쿠(Turku), 콧카(Kotka), 항코(Hanko), 헬싱키, 비푸리(Vipuri) 등 발트해의 보트니아만과 핀란드만을 접하는 주요 항구에 대한 소련군 주둔 및 조차 권리.
- 소련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대가로 5,500km2의 동부 카렐 땅을 제안했다.
퀴외스티 칼리오 핀란드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자, 소련군은 1939년 11월 26일 마이닐라 발포 사건(Mainilan laukaukset)을 구실로 침공을 시작했다. 소련은 11월 29일 핀란드와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11월 30일 핀란드를 공격했다. 마이닐라 발포 사건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안드레이 즈다노프(ru)가 그리고리 쿨리크(ru) 장군에게 명령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마이닐라 발포 사건 당시 소련군이 점령한 테르요키(Terijoki)에서는[282] 1939년 12월 1일 오토 빌레 쿠시넨(Otto Ville Kuusinen)을 수장으로 한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괴뢰 정부 '테르요키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공화국은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겨울 전쟁이 끝나자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2. 1. 핀란드-소련 관계 및 정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혼란기에 핀란드는 독립을 선언했지만, 소련은 핀란드를 자국의 영향권 아래 두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소련은 레닌그라드의 안보를 이유로 핀란드에 군사적 양보를 요구했다.[57][58]1809년 나폴레옹 전쟁 이후 핀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말,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은 후 핀란드는 1917년 12월 6일 독립을 선언했다. 핀란드 내전으로 소련과 핀란드의 관계는 긴장되고 냉각된 상태를 유지했다.
1939년 8월 23일, 소련과 나치 독일은 불가침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에는 동유럽, 중앙유럽, 북유럽 국가들의 영토를 양국이 나누는 비밀 조항이 있었다. 핀란드는 소련의 '이해권'에 들어간다고 합의되었다. 1939년 9월, 스탈린은 발트 3국(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상호 방위 조약'을 강요해 군사 주둔권을 획책하여 발트 3국을 병합했다.
1939년 10월,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핀란드를 방문해 핀-소 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요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카렐리야(Karelia), 라플란드(Lappland) 지방 등 약 2,300km2 영토 할양.
- 수리사르섬(Surisar), 코틀린섬(Kotllin) 등 핀란드만의 4개 섬과 올란드 제도 할양.
- 투르쿠(Turku), 콧카(Kotka), 항코(Hanko), 헬싱키, 비푸리(Vipuri) 등 발트해의 보트니아만과 핀란드만을 접하는 주요 항구에 대한 소련군 주둔 및 조차 권리.
- 소련은 이 모든 것에 대한 대가로 5,500km2의 동부 카렐 땅을 제안했다.
퀴외스티 칼리오 핀란드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자, 소련군은 1939년 11월 26일 마이닐라 발포 사건(Mainilan laukaukset)을 구실로 침공을 시작했다. 소련은 11월 29일 핀란드와 외교 관계를 단절하고, 11월 30일 핀란드를 공격했다. 마이닐라 발포 사건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안드레이 즈다노프(ru)가 그리고리 쿨리크(ru) 장군에게 명령해 조작한 사건이었다.
마이닐라 발포 사건 당시 소련군이 점령한 테르요키(Terijoki)에서는[282] 1939년 12월 1일 오토 빌레 쿠시넨(Otto Ville Kuusinen)을 수장으로 한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괴뢰 정부 '테르요키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공화국은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겨울 전쟁이 끝나자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되었다.
2. 2. 소련의 협상 제안과 핀란드의 거부
요세프 스탈린은 1917년 10월 혁명과 러시아 내전의 혼란 속에서 잃었던 차르 러시아의 영토를 재정복하려 했다.[56] 소련은 레닌그라드가 나치 독일의 위협에 취약하다고 판단했다.[57][58]1938년 4월, 소련은 핀란드에 접근하여 레닌그라드 해상 접근로를 따라 핀란드 만에 있는 일부 섬을 할양하거나 임대할 것을 제안했지만, 핀란드는 이를 거부했다.[59][60]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 독일은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체결하여 핀란드를 소련의 세력권으로 규정했다.[62]
1939년 10월 5일, 소련은 핀란드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초청하여 협상을 시작했다. 소련은 카렐리야 지협의 핀란드-소련 국경을 서쪽으로 이동시키고, 핀란드가 카렐리야 지협에 있는 모든 기존 요새를 파괴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핀란드 만의 섬과 리바치 반도(Kalastajasaarentofi)를 할양하고, 항코 반도를 30년간 임대하여 군사 기지를 설치할 것을 요구했다. 그 대가로 소련은 동부 카렐리아에서 레폴라와 포라야르비를 할양하겠다고 제안했다.[68][69]
소련의 제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요구 사항 | 내용 |
---|---|
영토 할양 | * 레닌그라드 만(핀란드 만)의 4개 도서 |
군사 시설 | * 카렐리야 지협의 방어선(만네르하임선) 철거 |
교환 조건 | 동카렐리아의 레포라, 폴라야르비 할양 (할양 요구 지역의 약 2배 면적) |
구스타프 만네르헤임은 소련과의 전쟁에서 핀란드의 전망에 대해 비관적이었기 때문에 협정에 찬성했다.[70] 그러나 핀란드 정부는 소련의 추가 요구를 우려하여 협정을 주저했다.[70] 핀란드는 소련에 테리요키 지역을 할양하는 역제안을 했지만, 소련은 이를 거부했다.[71]
10월 23일, 스탈린은 카렐리아에서 요구되는 토지 양을 줄이고, 항코 주둔군을 4,000명으로 줄이는 등 요구를 완화했다.[74] 그러나 핀란드는 이러한 양보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제안을 거부했다.[75] 11월 3일 모스크바에서 재개된 협상에서도 핀란드는 항코 반도 요구를 거부했고, 소련은 다른 섬들의 할양 또는 임대를 요구했다. 11월 8일, 핀란드 정부는 소련의 제안을 전면 거부했고, 11월 13일 협상은 결렬되었다.[78]
협상 결렬의 주요 원인은 다음과 같다.
- 핀란드는 주권 침해를 우려했고, 소련은 레닌그라드의 안보를 우려했다.[81]
- 양측은 서로의 입장을 오해했고, 신뢰가 부족했다.[73]
- 스탈린은 핀란드의 영토 양보가 핀란드 의회에서 5분의 4의 다수결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82]
3. 소련의 침공
1939년 11월 30일, 소련은 선전포고 없이 핀란드를 침공했다. 23개 사단 45만 명의 병력, 화포 1,880문, 전차 2,385량, 항공기 700기를 동원한 대규모 공격이었다.[262] 핀란드는 12개 사단 19만 명(최대 30만 명), 화포 700문, 전차 10여 량, 항공기 134기 정도로 맞섰다. 소련 공군은 헬싱키, 비푸리 등 주요 도시를 공격했다.
소련은 핀란드 내전 당시 백위군의 계보를 잇는 핀란드 현 정권에 대한 인민 봉기를 기대하며, 폭탄과 함께 무장 봉기를 촉구하는 핀란드어 전단을 살포했다. 12월 1일, 소련은 오토 쿠시넨을 수반으로 하는 핀란드 민주 공화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수립하여 핀란드 인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당한 정권이라고 선언했다.
소련의 침공은 국제 연맹에서 만장일치로 규탄받았고, 소련은 제명되었다.[266] 그러나 소련은 이미 핀란드 민주 공화국과 조약을 체결했으므로 다른 국가는 비난할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다.[267]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군관구의 4개 군을 투입하여 핀란드를 공격했다. 제7군은 카렐리야 지협의 요새선을 돌파하여 헬싱키를 목표로 했고, 제8군은 라도가호 북안에서 서진하여 카렐리야 지협의 배후를 노렸다. 제9군은 핀란드를 남북으로 분단하기 위해 스옴살미 공략을, 제14군은 라플란드로 진격했다.
소련의 침공 명분은 11월 26일 발생한 마이닐라 사건이었다. 소련은 핀란드 국경 근처 마이닐라 마을에서 발생한 포격 사건으로 소련군 병사 13명이 사상했다고 발표하고, 이를 핀란드의 도발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소련 NKVD 부대가 자군을 향해 고의로 포격한 것을 핀란드군의 소행으로 꾸며낸 것이었다.[83][84] 최근 공개된 소련 기밀 문서에서도 이 사실이 확인되었다.
소련은 11월 28일 소핀 불가침 조약 파기를 통고했고,[263] 29일에는 국교 단절을 발표했다.
3. 1. 핀란드의 저항과 게릴라 전술
핀란드는 병력, 장비 면에서 소련에 비해 열세였지만, 국민들의 단결된 저항 의지와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을 활용하여 소련군에 맞섰다.[262] 핀란드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부터 사용하던 기관총, 박격포, 소총, 야포를 주력으로 사용했고, 현대식 대전차포나 대공포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분당 900발을 발사할 수 있는 9mm 수오미 경기관총을 보유하여 근거리 전투에서 위력을 발휘했다.핀란드의 가장 큰 자원은 인적 자원이었으며, 약 30만 명의 방위 병력을 보유했다. 핀란드인들은 혹독한 기후 속에서 자구책을 기르고, 철저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32년부터 20세 이상 남성은 350일 이상 군사 훈련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침공 가능성이 높은 지역에 전략적으로 배치되었다. 특히, 카렐리야 지협에는 만네르하임선(線)이라 불리는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었다. 이 방어선은 140km에 달했고, 66개의 진지가 연결되어 있었다. 각 진지에는 토치카나 벙커가 연결되어 있었고, 모든 도로와 공지(空地)를 차단하도록 계획되었다. 탱크 통로 주변에는 지뢰와 돌 장애물이 설치되었다.
핀란드군은 게릴라 전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핀란드 특공대는 흰색 위장복을 입고 스키를 이용하여 소리없이 나타나 공격하고 사라졌다. 이들은 스키와 숲속 생활에 익숙했고, 사격술이 뛰어나 소련군에게 '하얀 주검'이라 불렸다.
핀란드군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도 활용했다. 적 부대를 함정에 빠뜨려 산산조각 내는 전법을 사용했다. 얼어붙은 호수 뒤편에 매복했다가 적군 종대에 기관총 사격을 가하거나, 눈 덮인 나무에 철조망을 연결하여 적 보병을 꼼짝 못하게 했다. 또한, 호수 얼음을 깨 구멍을 내고 위장하여 탱크를 잡는 함정을 설치했다.
핀란드군은 고립된 소련군 부대를 '모티(motti)'라 불렀다. '모티'에 빠진 소련군은 추위와 굶주림, 핀란드군의 공격으로 인해 파멸했다. 파아보 탈벨라는 모티 전술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소련군 제139사단을 함정에 빠뜨렸고, 제75사단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12월 23일, 탈벨라는 소련군 2개 사단의 생존자들을 아이토요기 강변까지 몰아내고 방어진을 구축했다.
수오무살미 전투에서는 핀란드군이 소련군 제163사단을 포위하고 괴멸시켰다. 핀란드군은 소련군 제44기갑사단도 격파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핀란드의 저항은 소련군의 취약점을 드러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전개에 영향을 미쳤다. 서방 세계의 언론들은 핀란드의 다윗이 소련 골리앗을 무찌른 것을 찬양했다. 한편 스탈린은 분노하여 그의 부하 장군들에게 그들의 무능을 꾸짖었다. 필연적인 결과로서 숙청이 시작되었다. 비노그라도프는 겨우 살아남았으나 스탈린의 분노를 정면으로 받게 되었다. 그가 처벌된 표면상의 이유는 "적에게 55개의 야전 주방을 탈취당한" 죄목이었으나, 실은 미숙한 전술로 소련 국가에 끼친 손해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핀란드 수뇌부는 실라스부오 대령을 준장으로 승진시켜 수오무살미 지구 전투에서 이룩한 전공을 포상했다. 실라스부오는 다음으로 소련 제54사단에 목표를 맞추고 쿠모(수오무살미 남쪽 약 88km) 근처에서 이를 급습했다. 소련군은 또다시 참호를 파고 항전했다. 포위된 소련군은 보급을 공중 투하에 의존했다. 그러나 핀란드군에게는 대공포가 거의 없어, 소련 공군이 식량과 탄약을 투하하는 것을 저지하지는 못했다. 그들은 기지를 발휘하여, 소련 항공기의 비행음을 듣고서 신호탄을 쏘아 소련의 보급 항공기가 아군 지역에 보급품을 투하하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한편 소련은 제54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핀란드군이 장기(長技)로 하는 바로 그 전법을 사용하여 스키병여단을 투입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소련군 사령부는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바로 스키병에게 흰색의 위장복을 지급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결빙에 대처한 무기의 유지 관리법이 전무해서, 총신의 기름이 결빙되어 발포가 되지 않는 수가 많았다. 일부 소련 스키병은 핀란드군을 공격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지만, 그들 부대는 전체가 전멸되다시피 했다. 이렇게 해서 구원부대를 섬멸시킨 실라스부오 준장은 소련군 제54사단을 분열시키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겨울이 끝날 때까지 이 작전을 계속, 제54사단은 결국 지리멸렬되었다.
핀란드 병사들의 숙련도, 특히 모신나간 M28-30 소총을 사용한 저격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271] 소련군으로부터 "백색의 사신"으로 두려움을 받았던 시모 헤이헤(Simo Häyhä), 스로 콜카(Simo Korpela) 등이 그 예이다.[271] 특히 시모 헤이헤의 활약으로 핀란드군 32명과 적군 4,000명이 싸운 콜라 전투(Battle of Kollaa)에서 적군을 격퇴하였다. 핀란드군은 스키 기술을 활용한 일격이탈 전술, 포위 전술, 혹독한 기후와 지형을 이용한 전술로 적의 공세를 저지했다.[270]
또한 핀란드군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러시아제 모신나간 소총과 그 탄약을 주력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노획한 소련제 총기 탄약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272]
반면, 당시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투하체프스키 원수 등 적군 장교의 약 65%가 숙청되었다.[262] 경험 없는 지휘관이 전쟁에 투입되었고, 병사들의 사기와 숙련도도 낮았다. 핀란드군을 과소평가하여 예비군 사단이 섞여 있었고, 동계전에 관한 지식과 대책도 부족하여 많은 수가 동사했다.[262]
겨울 전쟁의 결과는 적군의 취약성을 드러냈고,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는 소련 침공(바르바로사 작전(Unternehmen Barbarossa))에 영향을 주었다.[273][270]
3. 2. 국제사회의 반응과 지원
소련의 침공은 일반적으로 부당하다고 여겨졌으며, 국제 사회는 핀란드를 지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겨울 전쟁은 유럽에서 사실상 유일한 분쟁이었고,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287] 여러 외국 단체들이 의약품과 같은 물자를 지원했고, 미국과 캐나다의 핀란드계 이민자들은 핀란드로 돌아가거나 자원병으로 참전했다. 많은 국가들이 핀란드에 신용 대출과 군수품을 제공했다.[287]스웨덴은 군수품, 현금, 신용,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하고 8,700명의 자원병을 파병하는 등, 중립을 지키지 않고 핀란드를 지원했다.[287] 스웨덴 자원군단은 대부분 스웨덴인으로 구성되었지만, 1,010명의 덴마크인과 727명의 노르웨이인도 포함되었다. 헝가리, 이탈리아, 에스토니아에서도 자원병이 왔으며, 핀란드계 미국인 350명과 다른 국적의 자원병 210명도 핀란드에 도착했다.[227] 총 1만 2천 명의 자원병이 핀란드에 도착했고, 그중 50명이 전사했다.[228]


헬싱키의 외국 특파원들은 핀란드군의 독창성과 성공에 대해 보도했으며, 때로는 과장된 보도를 하기도 했다.[287] 국제 연맹은 핀란드의 제소를 받아들여 1939년 12월 14일 소련을 제명했다.
나치 독일은 핀란드로의 무기 통과를 허용했지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이후 개선된 독일-소련 관계의 일환으로 핀란드에 대한 침묵 정책을 시작했다.[226]
페르 알빈 한손 총리의 스웨덴 정부는 무장군의 스웨덴 영토 통과를 거부했다. 스웨덴은 겨울 전쟁에 대해 중립을 선언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영국과 독일·소련 간의 전쟁에 대해서는 중립을 지켰다. 스웨덴 내각은 핀란드의 정규군 지원 요청을 거절했고, 장비와 탄환 지원도 중단될 것이라고 확인했다.[269]
프랑스는 핀란드를 가장 먼저 지원한 국가 중 하나였다. 프랑스는 폴란드 망명 부대를 재무장하여 핀란드 북극 항구인 페트사모로 수송할 계획이었다. 또한 터키의 협력을 얻어 코카서스 유전에 대한 대규모 공습을 제안하기도 했다.[230]
영국은 스웨덴 광산에서 독일로의 철광석 유입을 차단하고자 했다. 스웨덴은 독일 철 수요의 최대 40%를 공급했기 때문이다.[230] 윈스턴 처칠은 영국이 소련과의 전쟁 없이 핀란드를 돕는다는 목표로 스칸디나비아에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언급했다.[232]
영불 최고 전쟁 평의회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에 핀란드 지원과 연합군 지원을 촉구했지만, 양국은 이를 거부했다.[233] 연합군은 국제 연맹 결의안을 근거로 통행권을 요구했지만, 이 역시 거부되었다.[235]

1940년 3월 13일, 모스크바 강화 조약이 체결되면서 전쟁이 끝나자 프랑코-영국군의 핀란드 파병 계획은 취소되었다.[237]
4. 주요 전투
겨울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중요한 전투들이 벌어졌다. 소련 지도부는 전쟁 초기에 몇 주 안에 완전한 승리를 예상했지만, 핀란드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안드레이 즈다노프와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빠른 승리를 예상한 반면, 보리스 샤포시니코프와 같은 일부 장군들은 신중한 접근을 주장했다.[107] 샤포시니코프는 카렐리야 지협에 대한 협소 전선 공격, 충분한 전력 증강, 광범위한 화력 지원 및 물류 준비, 합리적인 전투 서열, 그리고 최정예 부대 배치를 주장했다.[107]
키릴 메레츠코프는 작전 지역이 호수, 강, 늪으로 나뉘어 있고 숲으로 덮여 있어 군대 운용이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했지만, 그의 병력 배치에는 이러한 의구심이 반영되지 않았다.[108] 1930년대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소련군 장교단은 약화되었고, 지휘관들은 정치장교의 감독을 받아 군사적 결정에 제약을 받았다.[109][110][111][112][113]
할힌골 전투 승리 이후, 소련군 고위 사령부는 스페인 내전 참전 용사들과 할힌골 전투 참전 용사들로 나뉘었다.[114][115] 이러한 분열은 할힌골 전투의 교훈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게 했고, 결국 겨울 전쟁에서 소련군이 큰 피해를 입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116][117]
주요 전투로는 수오무살미 전투, 톨바야르비 전투, 콜라 전투 등이 있다. 수오무살미 전투에서 핀란드군은 소련군 2개 사단을 포위하여 섬멸했고, 톨바야르비 전투에서는 파아보 탈벨라가 지휘하는 핀란드군이 소련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콜라 전투에서는 핀란드군이 게릴라 전술과 지형을 활용하여 소련군에 맞섰다.
4. 1. 수오무살미 전투
핀란드군은 수오무살미 지역에서 소련군 2개 사단을 포위하여 섬멸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핀란드군의 게릴라 전술과 지형적 이점이 효과적으로 활용된 대표적인 사례이다.히알마르 시일라스부오 대령이 지휘하는 핀란드 제9사단은 수오무살미를 점령한 소련군 제163사단을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핀란드군은 새로 충원된 병력과 함께 크리스마스까지 소련군에게 반격을 가했다.
소련군 사령부는 곤경에 빠진 제163사단을 구출하기 위해 비노그라도프 장군이 지휘하는 제44기갑사단을 투입했다. 그러나 비노그라도프는 전투 현장에 늦게 도착했고, 핀란드 저격병을 두려워하여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포위된 소련군 제163사단은 성탄 전야에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12월 28일에 괴멸했다. 핀란드군은 이 전투에서 500명의 포로와 11대의 탱크를 노획했다.
이후 핀란드군은 비노그라도프 장군이 지휘하는 소련군 제44기갑사단에 집중했다. 핀란드군은 소련군 진지 남방 8km 지점에 '눈길(snow road)'을 만들어 소련군을 유인했다. 잘 먹고 휴식을 취한 핀란드군은 소련 방위선의 취약점을 골라 공격했고, 소련군은 번번이 참패했다.
1월 8일에 이르러 전투는 거의 끝났다. 소련군은 27,500명이 전사했고, 1,3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서방 세계의 언론들은 핀란드의 다윗이 소련 골리앗을 무찌른 것을 찬양했다.
스탈린은 분노하여 부하 장군들의 무능을 꾸짖었고, 숙청이 시작되었다. 비노그라도프는 "적에게 55개의 야전 주방을 탈취당한" 죄목으로 처벌받았으나, 실제로는 미숙한 전술로 소련 국가에 큰 손해를 끼쳤기 때문이었다.
핀란드 수뇌부는 실라스부오 대령을 준장으로 승진시켜 수오무살미 지구 전투에서 이룩한 전공을 포상했다. 실라스부오는 다음 목표로 소련 제54사단을 쿠모(수오무살미 남쪽 약 88km) 근처에서 급습했다. 소련군은 참호를 파고 항전했지만, 핀란드군은 겨울이 끝날 때까지 작전을 계속하여 제54사단을 지리멸렬시켰다.
수오무살미 전투-라테 교전은 이후 군사 학자들에게 잘 훈련된 병력과 혁신적인 전술이 훨씬 더 큰 적에 맞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고전적인 사례로 사용되었다.[173]
라테 도로 전투는 겨울 전쟁에서 소련군이 입은 가장 큰 손실 중 하나였다. 약 1만 4천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소련 제44사단과 제163라이플사단 일부[175]는 숲길을 따라 행군하는 동안 핀란드군의 매복 공격으로 거의 완전히 궤멸되었다. 핀란드군은 소련군을 ''모티''(motti, 포위된 적군)로 분할한 다음 섬멸했다. 소련군은 7,000~9,000명의 사상자를 냈고,[176] 핀란드군은 400명의 사상자를 냈다.[177] 핀란드군은 수십 대의 탱크, 포병, 대전차포, 수백 대의 트럭, 거의 2,000마리의 말, 수천 정의 소총, 그리고 절실히 필요한 탄약과 의료품을 노획했다.[178]
4. 2. 톨바야르비 전투
파아보 탈벨라가 지휘를 맡기 이전 그 지역 핀란드군은 소련군의 포화에 쫓겨 후퇴를 거듭하고 있었고, 장병들은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탈벨라는 톨바야르비에서 버티기로 결심했다.[285]12월 8일, 탈벨라는 자정 직전에 기습 공격을 명령했다. 얼어붙은 호수를 소리없이 건너가 잠든 소련군을 기습한 것이다. 핀란드군은 소총과 수오미 기관단총로 얼마간 공격한 뒤 숲 속으로 철수했다. 어리둥절한 소련군은 공중을 향해 총을 난사했으나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튿날 아침 핀란드군은 톨바야르비의 진지로 안전하게 귀환했다. 이 전법을 후일 핀란드군은 아주 치명적인 전술로 발전시키게 된다.[285]
핀란드군은 이 전법을 되풀이 사용했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공격으로 적군의 휴식을 빼앗았다. 핀란드 특공대들은 흰색 위장복을 입어 눈 덮인 숲속에서 쉽게 발견되지 않았고, 스키를 이용하여 유령처럼 소리없이 나타나 공격하고는 사라졌다. 전원이 스키에 능숙하고 숲속 생활에 익숙하여 마치 사냥을 하듯 소련군을 습격했다. 또한 그들의 사격술은 거의 완벽하여 소련군들은 이들을 하얀 주검이라 불렀다. 한 소련군 장교는 "그들은 700~800m 거리에서 목표물을 사격하며, 거의 실수가 없다."라고 회고했다.[285]
12월 12일, 톨바야르비를 떠나온 파아보 탈벨라는 모티 전술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소련군 제139사단을 함정에 빠뜨렸다. 소련군은 제75사단을 투입하여 제139사단을 구출하려 했으나, 이들 역시 같은 운명에 빠지고 말았다. 12월 23일, 탈벨라는 소련군 2개 사단의 생존자들을 톨바야르비 동쪽 24km 지점의 아이토요기 강변까지 몰아내고, 그곳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이 기간 중 소련군 피해는 전사 4천 명에 수많은 부상자를 냈고, 많은 병사들이 행방불명되었다. 반면 핀란드 측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경미하여, 전사 630명, 부상 1,320명이었다.[285]
4. 3. 콜라 전투
파아보 탈벨라의 지휘 아래 핀란드군은 자정 직전에 기습 공격을 감행,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 잠든 소련군을 기습했다.[285] 수오미 기관단총등으로 무장한 핀란드군은 숲 속으로 철수했고, 혼란에 빠진 소련군은 핀란드군의 게릴라 전술에 큰 피해를 입었다. 핀란드군은 흰색 위장복을 입고 스키를 활용, 신출귀몰하게 소련군을 공격하여 "하얀 주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285] 소련군 장교는 핀란드군의 사격술이 700~800m 거리에서도 거의 실수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회고했다.핀란드군은 지형을 이용한 전술을 개발했다. 얼어붙은 호수 뒤편에 매복해 있다가 적군 종대에 기관총 사격을 가하거나, 눈 덮인 나무에 철조망을 연결해 적 보병을 묶는 방식이었다. 또한 호수의 얼음을 깨고 위장해 탱크를 빠뜨리는 함정을 설치했다. 핀란드군은 고립된 소련군 부대를 '모티(motti)'라고 불렀는데, 이는 불쏘시개용 통나무를 의미하는 핀란드어에서 유래했다. '모티'에 빠진 소련군은 추위와 굶주림, 핀란드군의 공격으로 인해 거의 전멸했다.
5. 소련의 공세 강화와 핀란드의 위기
조세프 스탈린은 1939년 12월 핀란드 전역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소련군은 핀란드군보다 규모가 작았음에도 패배했기 때문이다.[199] 12월 말, 소련은 전략적 목표를 축소하고 전쟁 종식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200]
총참모장 보리스 샤포시니코프는 핀란드 전선 작전에 대한 전권을 부여받았고, 12월 말 돌격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1940년 1월 7일 세묜 티모셴코로 교체되어 소련군 사령관이 되었다.[201] 소련군의 주 공격 목표는 카렐리야 지협으로 바뀌었다. 티모셴코와 즈다노프는 소련군 각 부대 간의 통제를 재편하고 강화했으며, 상황에 맞춰 전술 교리를 변경했다.[202]
카렐리야 지협에 주둔한 소련군은 제7군과 제13군으로 나뉘었다. 키릴 메레츠코프 지휘하의 제7군은 타이팔레와 무나수오 습지 사이 구간의 만네르하임 선에 병력의 75%를 집중시켰다. 전술은 초기 돌파를 위한 기갑부대 돌격 후 주력 보병 및 차량 부대가 공격하는 방식이었다. 소련군은 핀란드 전방 요새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제123라이플사단이 실물 크기의 모형을 이용하여 공격 연습을 했다. 소련은 전선에 다량의 신형 전차와 포를 수송했다. 병력은 10개 사단에서 25~26개 사단으로 증강되었고, 6~7개의 전차여단과 여러 개의 독립 전차소대가 지원 부대로 투입되어 총 병력은 60만 명에 달했다.[202] 2월 1일, 소련군은 대규모 공세를 시작하여 폭격 첫 24시간 동안 30만 발의 포탄을 핀란드 전선에 발사했다.[204]
1월의 카렐리야 지협 전선은 12월보다 활동이 덜했지만, 소련군은 폭격을 강화하여 핀란드군을 지치게 하고 방어 시설을 약화시켰다. 핀란드군은 낮에는 폭격을 피해 방어 시설 안에 숨어 있다가 밤에 피해를 복구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핀란드군은 참호전에서 3,000명 이상의 병사를 잃었다. 소련군은 때때로 1~2개 중대 규모의 소규모 보병 공격을 가했다.[203] 탄약 부족으로 핀란드군 포병 진지는 직접적인 지상 공격에만 사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2월 1일, 소련군은 포격과 공중 폭격을 더욱 강화했다.[204]
소련군은 전술을 개선하고 사기가 향상되었지만, 장군들은 여전히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막대한 손실을 감수할 의향이 있었다. 소련군의 공격은 연막, 중포병 및 장갑차 지원으로 차폐되었지만, 보병들은 개활지에서 밀집 대형으로 돌격했다.[204] 12월의 전술과 달리, 소련군 전차는 소규모로 진격했다. 보병이 전차를 보호하면 핀란드군은 전차를 쉽게 제거할 수 없었다.[205] 10일간의 끊임없는 포격 이후, 소련군은 섬머 제2차 전투에서 서부 카렐리야 지협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206]
2월 11일까지 소련군은 카렐리야 지협에 약 46만 명의 병사, 3,350문의 포, 3,000대의 전차, 1,300대의 항공기를 배치했다. 돌파 이후 적군은 끊임없이 새로운 신병을 받았다.[207] 이에 맞서 핀란드군은 총 8개 사단, 약 15만 명의 병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핀란드군의 요새는 소련군의 공격에 하나씩 무너졌고 핀란드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2월 15일,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은 제2군단의 일반적인 후퇴를 예비 방어선으로 승인했다.[208] 지협 동쪽에서는 핀란드군이 소련군의 공격을 계속 저지하며 타이팔레 전투에서 교착 상태를 이루었다.[209]
6. 종전 협상과 모스크바 평화 조약
1940년 2월 11일, 소련군은 총공격을 시작하여 2주 반 동안 핀란드 방위망을 뚫고 내륙으로 진입했다. 핀란드군은 후퇴했고, 징집 대상을 확대하고 10대 학생으로 자원 결사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포탄이 거의 소진되었고, 동원 가능한 모든 남자가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만네르하임은 협상을 통해 전쟁을 종식시킬 것을 건의했고, 1940년 3월 6일 핀란드는 평화 협상을 위해 대표단을 모스크바로 보냈다.[288]
겨울이 끝나가면서 소련은 전쟁에서 손을 뗄 의향을 보였다. 독일은 핀란드에 소련과의 협정을 권했다. 소련군은 엄청난 전사자를 냈고, 봄이 오면서 해동으로 소련군이 삼림 지대에 갇힐 상황에 놓였다. 독일뿐만 아니라 스웨덴도 핀란드가 무너질 것을 걱정하여 겨울 전쟁의 빠른 종전을 희망했다. 핀란드 내각이 망설이는 동안,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는 핀란드의 스웨덴 정규군 지원 요청을 거절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2월 말, 핀란드군의 탄약은 바닥났고, 소련군은 만네르헤임 선을 돌파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2월 29일 핀란드 정부는 협상을 시작하기로 결정했고, 1940년 3월 6일 양국은 정전 협정에 서명했다.[288] 4개월간의 전쟁 후 소련군에서는 최소 12만 7000명이 사망했다.[289] 핀란드군은 2만 7000명 정도의 사망자를 냈지만,[290] 많은 것을 잃었다.
핀란드는 전쟁 기간 내내 모스크바와의 협상 재개를 시도했지만, 소련은 응답하지 않았다. 1월 초, 핀란드 공산당원 헬라 우올리요키가 핀란드 정부에 연락하여 소련과의 협상을 제안했다. 1월 29일, 몰로토프는 소련이 평화 협상을 할 의향이 있음을 알렸다.[38][210]
2월 중순, 핀란드군은 기진맥진했고, 소련은 많은 사상자와 국제적 비난, 프랑코-영국 개입 위험에 직면했다. 핀란드 외무장관 뷔이뇌 타너는 2월 12일 스톡홀름에서 소련과 평화 조건을 협상했다. 독일과 스웨덴은 겨울 전쟁의 종식을 원했고, 독일은 스웨덴 북부 철광석 광산을 잃을까 우려했다.
핀란드 내각이 소련의 가혹한 조건에 주저하자, 구스타프 5세는 2월 19일 공개 성명을 통해 스웨덴군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2월 25일, 소련의 평화 조건이 자세히 설명되었고, 2월 29일 핀란드 정부는 소련의 조건을 원칙적으로 수용했다.[215]
3월 5일, 소련군은 만네르하임 방어선을 돌파하여 비푸리 교외에 진입했다. 핀란드는 3월 6일 휴전을 제안했지만, 소련은 거절했다. 핀란드 평화 대표단은 3월 7일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소련은 더 많은 요구를 했다. 3월 9일, 카렐리야 지협의 핀란드군 상황은 매우 심각했고, 핀란드 정부는 소련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퀴스티 칼리오 대통령은 모스크바 평화 조약에 서명하며 "이 끔찍한 조약에 서명하는 손이 시들어 버리게 해 주십시오!"라는 말을 남겼다.
모스크바 평화 조약은 1940년 3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체결되었다. 휴전은 다음 날 정오 레닌그라드 시간(헬싱키 시간 오전 11시)에 발효되었다.[218][219] 이 조약으로 핀란드는 카렐리야 지협과 라도가 카렐리아 대부분을 소련에 할양했다. 여기에는 비푸리(인구 등록부 기준 핀란드 제2의 도시), 핀란드의 많은 산업 지역, 그리고 핀란드군이 여전히 점령하고 있던 상당한 면적의 땅이 포함되었는데, 전체적으로 핀란드 영토의 9%에 달했다. 할양된 영토에는 핀란드 경제 자산의 13%가 포함되어 있었다.[221] 핀란드 인구의 12%인 42만 2천 명에서 45만 명에 달하는 카렐리아인들이 강제 이주되어 삶의 터전을 잃었다.[222][245] 핀란드는 또한 살라 지역 일부, 바렌츠 해의 르바치 반도, 핀란드 만의 섬 4개를 할양했다. 한코 반도는 30년 동안 소련에 군사 기지로 임대되었다. 전쟁 중 소련군에 의해 점령되었던 페츠사모 지역은 이 조약에 따라 핀란드에 반환되었다.[223]
7. 결과 및 영향
모스크바 평화 조약은 1940년 3월 12일 체결되어 핀란드는 카렐리야 지협과 라도가 카렐리야 대부분을 소련에 할양했다. 이 지역에는 핀란드 제2의 도시 비푸리를 포함한 핀란드의 주요 산업 시설이 밀집해 있었으며, 핀란드 영토의 약 9%, 경제 자산의 13%에 해당했다.[221] 핀란드 인구의 12%에 달하는 42만 2천 명의 카렐리야인들은 강제 이주되어 삶의 터전을 잃었다.[222][245] 또한 핀란드는 살라, 바렌츠해의 르바치 반도, 핀란드만의 섬 4개를 할양하고, 한코 반도는 30년 동안 소련에 군사 기지로 임대되었다.[223]
소련은 겨울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핀란드를 완전히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카렐리야 지협을 확보하여 레닌그라드의 안보를 강화했다. 공식적인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사망자는 48,475명, 부상 및 질병자는 158,863명이었다.[14] 그러나 최근 러시아 측 추산은 다양하며, 사망 및 실종자는 126,875명에서 최대 167,976명까지, 총 사상자는 최대 391,783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11][13]
국제 사회는 핀란드를 지지하며 소련을 비난했다. 1939년 12월 14일, 국제 연맹은 소련을 추방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 지원을 명분으로 스웨덴의 철광석 공급을 차단하려 했지만,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군대 통과를 거부하면서 실패했다.
7. 1. 핀란드에 미친 영향
모스크바 평화 조약으로 핀란드는 비푸리를 포함한 카렐리야 지역 등 영토의 10%를 소련에 넘겨야 했고, 인구의 12%인 42만 2천여 명의 카렐리야인들이 삶의 터전을 잃었다.[238] 핀란드는 살라 지방, 바렌츠해의 칼라스타얀사렌토 반도, 핀란드만의 섬 4개도 소련에 할양해야 했으며, 항코 반도는 30년간 소련에 군사 기지로 임대되었다.[238]105일간의 전쟁은 핀란드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238] 국제사회의 지원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독일의 봉쇄로 대부분 차단되었다.[238] 전쟁 직후 헬싱키는 공식적으로 19,576명의 사망자를 발표했으나,[242] 2005년 핀란드 역사가들의 수정된 추산에 따르면 25,904명이 사망 또는 실종되었고, 43,557명이 부상당했다.[21][22] 민간인 957명도 공습으로 사망했다.[21]
전쟁 후 핀란드인들은 가혹한 평화 조약에 분노했고, 소련에 대한 복수심을 품게 되었다.[238] 이러한 배경에서 핀란드는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으며 1년 후 계속 전쟁을 일으켜 전쟁을 재개했다.[238]

겨울 전쟁과 바르바로사 작전 사이의 15개월은 임시 평화로 불렸다.[223] 이 기간 동안 핀란드는 국방력 강화에 힘썼고, 스웨덴과 군사 동맹을 추진했으나 독일과 소련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43] 1940년 7월, 히틀러의 소련 공격 명령으로 독일은 핀란드에 대한 정책을 바꿔 8월에 비밀 무기 판매를 허용했다.[244]
카렐리야 이주민들은 핀란드 카렐리야 연맹을 설립하여 카렐리야의 권익을 옹호하고 할양된 지역의 반환을 추구했다.[245][246] 핀란드는 국제 연맹과 북유럽 중립에 의존하는 데 실패한 후, 소련의 침공에 대한 복수와 영토 회복을 위해 전쟁에 다시 참전하기를 원했다.[247] 아카데믹 카렐리야 협회와 같은 일부 우익 단체는 대핀란드 이데올로기를 지지하며 동 카렐리야로의 국경 확장을 목표로 했다.[248] 결국 1941년 6월, 핀란드는 계속 전쟁에 참전하여 레닌그라드 포위전과 동 카렐리야 점령에 참여했다.[249][250]
7. 2. 소련에 미친 영향
소련은 겨울 전쟁에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 소련 총참모부 최고사령부(Stavka)는 1940년 4월 회의를 열어 핀란드 전쟁의 교훈을 검토하고 개혁을 권고했다. 최전방 정치장교의 역할이 축소되었고, 구식 계급과 징계 방식이 다시 도입되었으며, 겨울 작전을 위한 의복, 장비 및 전술이 개선되었다.[251]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1941년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전까지 완전히 완료되지 않았다.[251]공식적인 소련 측 자료에 따르면, 사망자는 48,475명, 부상자 및 질병자는 158,863명이었다.[14] 그러나 최근 러시아 측 추산은 다양하며, 사망 및 실종자는 126,875명에서 최대 167,976명까지, 총 사상자는 최대 391,783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11][13] 니키타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100만 명 이상의 소련 병사가 사망했다고 주장했다.[253][254]
전쟁 중 파괴된 소련 전차는 1,200대에서 3,543대에 달했다.[17][18][19] 소련 공군은 약 1,000대의 항공기를 잃었지만, 그중 절반 미만이 전투 손실이었다.[19][20]
핀란드의 소련군 포로는 5,572명이었으며,[16][255][256] 이들은 전쟁 후 소련으로 송환되었으나, 상당수가 노동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처형되었다.
겨울 전쟁은 소련군의 약점을 드러냈고, 이는 훗날 독일의 소련 침공에 영향을 미쳤다.[258]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군의 부실한 성적을 보고 소련 침공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258]
1980년대 후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소련의 역사학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겨울 전쟁 연설에만 의존했다.[252] 몰로토프는 1939년 11월 연설에서 소련이 핀란드를 점령하거나 합병하려는 것이 아니라 레닌그라드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고 주장했다.[252]
7. 3. 국제 정세에 미친 영향
겨울 전쟁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초기 단계에서 국제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 지원을 명분으로 스웨덴의 철광석 공급을 차단하려 했지만, 노르웨이와 스웨덴이 군대 통과를 거부하면서 실패했다.[236][269]
프랑스는 핀란드를 가장 먼저 지원한 국가 중 하나였다. 프랑스는 스웨덴과 소련 모두 독일의 전략적 무역 파트너였기 때문에 핀란드의 반격을 통해 독일의 자원 수입을 약화시킬 기회를 보았다. 또한 프랑스는 자국 영토가 아닌 유럽의 외딴 지역에서 전쟁이 벌어지기를 선호했다.[230]
영국은 스웨덴 광산에서 독일로의 철광석 유입을 차단하고자 했다. 스웨덴은 독일 철 수요의 최대 40%를 공급했기 때문이다.[230] 윈스턴 처칠은 영국이 소련과의 전쟁 없이 핀란드를 돕는다는 목표로 스칸디나비아에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고 언급했다.[232] 그러나 북부 스웨덴의 철광석에 대한 독일의 의존도가 높았기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는 연합군이 스웨덴 영토에 주둔하면 즉시 독일의 침략을 유발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233]
1939년 12월 19일,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참모본부와 전쟁 내각에 핀란드 지원 계획을 제시했다. 그의 계획은 핀란드의 전쟁과 스웨덴의 철광석을 연결시켰다.[232] 핀란드가 소련의 패권 아래 놓이면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와 스웨덴을 점령할 수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의 주요 동기는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234]
1940년 3월 13일, 겨울 전쟁이 끝나면서 프랑코-영국군의 북부 스칸디나비아 파병 계획은 취소되었다.[237] 겨울 전쟁으로 적군과 국제 연맹 모두 굴욕을 당했고, 영불연합 최고 전쟁 위원회는 혼란스럽고 무력함이 드러났다. 독일의 중립 정책은 국내에서 인기가 없었고, 이탈리아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모스크바 평화 조약 이후 독일은 핀란드와의 관계를 개선했다.[257][35] 적군의 부실한 성적은 히틀러에게 소련 침공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었다.[258]
겨울 전쟁은 적군과 연합군의 조직력 부재와 무능함을 드러냈다. 영불 최고 전쟁 회의는 실행 가능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여 영국과 프랑스 모두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실패로 프랑스의 세 번째 달라디에 정부가 붕괴되었고 폴 레노가 새로운 프랑스 총리로 임명되었다.[259]
국제 여론은 압도적으로 핀란드를 지지했다. 1939년 12월 14일, 국제 연맹은 소련을 추방했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은 소강 상태였기 때문에, 실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겨울 전쟁에 주목이 집중되었다. 영국 노동당은 1940년 팜플렛에서 소련의 행위를 비난했다. 미국은 핀란드에 1000만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고, 소련에는 군수 물자 공급을 지연시키는 조치를 시작했다.
세계 각국에서 총 1만 1천 명(그중 스웨덴인 약 9천 명)이 의용병으로 핀란드 측에 참전했다. 이웃 국가 스웨덴에서는 군수 물자, 자금, 인도적 지원도 제공되었다.
독일은 핀란드 건국에 깊이 관여하여 유대 관계가 깊었지만, 독소 불가침 조약 비밀 의정서 내용을 준수하여 소련을 방관했다.
프랑스에서는 반소 감정이 고조되어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소련의 바쿠 유전을 터키 협력으로 폭격하는 계획을 영국에 제안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대독 전쟁 중이었고, 소련에 선전포고하여 전선을 확대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에 영국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8. 역사적 평가와 교훈
겨울 전쟁은 강대국의 침략에 맞선 약소국의 용감한 저항을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핀란드는 자주독립과 민족 자결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국제사회의 연대와 지원이 약소국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었다.
콜라아 전투(battle of Kollaa)는 겨울 전쟁의 상징적인 전투 중 하나로, "콜라아는 버틴다(Kollaa kestää)"라는 말은 핀란드인들에게 전설적인 모토가 되었다.[164] 이 전투에서 핀란드 저격수 시모 하이하(Simo Häyhä)는 "흰 죽음"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500명 이상의 적을 사살하여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165] "모로코의 공포"로 불린 아르네 유틸라이넨(Aarne Juutilainen) 대위 역시 콜라아 전투에서 활약했다.[166]
핀란드군은 모티(motti) 전술을 활용하여 소련군에 맞섰다. 중화기와 병력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모티 전술을 통해 소련군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이 전술은 핀란드군 특수부대, 특히 "모티-마티(Motti-Matti)"로 알려진 마티 아르니오(Matti Aarnio) 소령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171]
북카렐리아(North Karelia)에서 핀란드군은 뛰어난 스키 기술과 흰색 위장복을 활용한 게릴라 전술을 통해 소련군을 일로만시 전투(1939년)(Battle of Ilomantsi (1939))와 리엑사(Lieksa)에서 격퇴했다.[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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