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김유신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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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김유신묘는 7세기 삼국 통일에 기여한 신라의 무장 김유신을 기리는 묘로 알려져 있다. 묘는 신라 왕릉 중 가장 넓은 부지를 차지하며, 횡혈식 석실분으로 십이지신상이 조각된 호석과 난간석, 묘표 등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의 묘가 실제 김유신의 묘가 아닐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며, 특히 이병도와 이근직은 묘의 양식이 김유신 시대와 다르다는 점을 들어 신무왕의 묘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김상기는 김유신 사후 흥무대왕으로 추존되면서 묘가 개수되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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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김유신묘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慶州 金庾信墓 경주 김유신묘 (Tomb of Kim Yu-sin, Gyeongju) | |
![]() (1963년 1월 21일 지정) | |
위치 | |
위치 | 경상북도 경주시 7-1 |
면적 | 579,569m2 (1,398m2) |
일반 정보 | |
종류 | 유적, 분구묘 (원분) |
건립 시기 | 시대 문무왕 14년 (674년) |
건립 목적 | 전해지는 김유신의 묘 |
관리 주체 | 경주시 |
소유 주체 | 경주시 외 |
웹사이트 | 국가문화유산포털 |
2. 김유신의 생애와 업적
김유신은 진평왕 17년(595년)에 태어나 문무왕 13년(673년)에 사망한 신라의 무장으로, 7세기 삼국 통일에 큰 공을 세웠다.[10]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문무왕 8년(668년)에는 신라 최고 관위인 태대각간이 되었다.[20] 사후인 835년 흥덕왕 때에는 "흥무대왕"으로 추존되었다.[21]
3. 김유신묘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족의 후손으로, 김춘추(태종무열왕)와 혈연 관계를 맺어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백제와의 전투와 비담의 난 등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는 데 기여하여 신라의 중요한 공신이 되었다.[10] 문무왕은 그의 장례를 예를 갖추어 치르고 비를 세웠으며,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추존하였다.[21]
김유신묘는 경상북도 경주시 충효동에 있으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21호로 지정되었다. 송화산 동쪽 봉우리 능선 경사면에 조성되었으며, 신라 능묘 중에서도 넓은 부지를 차지한다. 묘제는 횡혈식 석실분이며, 남쪽을 향한 원형 봉분 형태이다.
김유신묘 동남쪽에는 1970년경 복원한 상석이 있고, 서남쪽에는 조선 숙종 36년(1710년)에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운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 묘표가 있다. 묘 앞 좌우에는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와 "개국공 순충 장렬 흥무왕릉"이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으며, 참도 입구에는 "흥무문"이 있다. 김유신 장군(흥무대왕) 묘 등으로 표기되지만, 이 능묘가 실제 김유신의 묘가 아니라는 설도 있다.[3][23]
일제강점기에는 무덤 옆에 석인상이 세워져 1960년대 이전까지 존재했으나, 1970년대를 전후하여 철거되었다.
3. 1. 묘의 구조와 특징
김유신묘는 횡혈식 석실분으로, 직경 15.8m, 높이 5.6m이다. 봉분 자락에는 면석과 탱석(각각 24개)을 사용한 호석 구조를 하고 회랑을 따라 난간석(38개)을 두르고 회랑에는 박석을 깔았다. 탱석에는 십이지신상이 부조되어 있는데, 이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조성된 전형적인 신라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10]
십이지신상은 평복 차림에 무기를 잡고 있으며, 헌덕왕릉이나 황복사터 금당지에서 나온 십이지신상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성덕왕릉이나 원성왕릉의 것과 같은 석사자상이나 석인상은 배치되어 있지 않다. 십이지신상은 수(隋)의 7세기 초 부장품에서 확인되며, 당 중기(8세기 중반[13]) 이후에 성행하는 불교적인 십이지상에 비해,[14] 신라 왕릉을 장식하는 입상은 신장상(십이신장[15])과 유사한 요소가 보이며, 이는 신라 왕권의 호국 사상과 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16] 북쪽의 자(쥐) 신으로 시작하는 십이지신상은 도검, 창, 쌍차, 망치, 발우, 보주 등을 손에 들고 있다.[17]
원형 봉분 주위에서는 납석에 조각된[18] 무장한 모습의 묘(토끼), 오(말), 해(멧돼지)의 십이지신장상이 발굴되었다.[19]
3. 2. 십이지신상
탱석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부조되어 있는데,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전반에 걸쳐 조성된 전형적인 신라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십이지신상의 각각은 평복에 무기를 잡고 있으며, 헌덕왕릉이나 황복사터 금당지에서 나온 십이지신상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성덕왕릉이나 원성왕릉과 달리 석사자상이나 석인상 같은 것은 배치되어 있지 않다.[10][11][12]
북쪽의 자(쥐) 신으로 시작하는 십이지신상은 평복 차림으로, 도검・창・쌍차・망치・발우・보주 등을 손에 들고 있다.[17] 수(獸)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한 십이지상은 수(隋)의 7세기 초(대업 연간, 605-618년)의 부장품에서 확인된다. 당(唐)나라 중기(8세기 중반[13]) 이후에 성행하는 불교적인 십이지상에 비해[14], 신라의 왕릉을 장식하는 입상은 신장상(십이신장[15])과 유사한 요소가 보이며, 이는 신라 왕권의 호국 사상과 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16]
원형 봉분 주위에서는 납석에 조각된[18] 무장한 모습의 묘(토끼)・오(말)・해(멧돼지)의 십이지신장상도 발굴되었다.[19]
3. 3. 묘비와 상석
김유신묘 동남쪽에는 1970년경 복원한 상석이 있으며, 서남쪽에는 조선 숙종 36년에 당시의 경주부윤이었던 남지훈이 세운 '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라고 새긴 묘표가 있다.
4. 김유신묘 비정 문제
통설과는 달리 이 무덤이 실제 김유신의 무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은 이미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바가 있다. 해방 후에는 사학자 이병도가 〈전(傳)김유신묘고(考)〉(1968년)를 발표하여, 신라 중고기 왕릉의 호석 구조 및 문헌 자료를 바탕으로 세간에 김유신의 묘라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무덤은 사실 신라 신무왕의 무덤이며, 태종무열왕릉 옆의 전(傳)김인문묘(속칭 각간묘)가 진정한 김유신의 무덤이라고 주장하였다. 그 뒤 역사학자이자 전 경주대학교 문화재학과 교수였던 이근직(1962~2011)이 이병도설을 보강하여 정리한 학설이 《신라왕릉연구》(2011년)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이러한 이병도의 주장에 대해 김상기는 문무왕 13년(673년) 무덤을 처음 쓸 당시에는 무열왕릉과 같이 별도의 둘레 장식이 없는 무덤이었으나, 사후 흥무대왕으로 추봉되면서(추봉 시기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흥덕왕 직후로 보며, 혜공왕 때의 일로 보는 설도 있다) 무덤이 당시의 왕릉 묘제에 따라 개수되었다는 반론을 제기하였다.
4. 1. 이병도, 이근직의 신무왕릉설
이병도와 이근직 등은 김유신묘로 알려진 이 묘의 봉분에 두른 둘레돌과 십이지신상 등의 배치 양식이 김유신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태종 무열왕의 묘와 판이하며 김유신 사후 1백 년이 지난 8세기 성덕왕릉 이후에야 성립된 것이라는 점과, 김유신이 흥덕왕으로부터 흥무대왕으로 추봉되기는 했지만 굳이 다른 추봉된 대왕들의 무덤을 흥덕왕 당시의 양식으로 개수하지 않고 내버려둔 채 굳이 김유신의 무덤만을 개수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이 무덤은 김유신의 무덤이 아니라 신라 신무왕(또는 경덕왕)의 무덤, 즉 왕릉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3][23]4. 2. 김상기의 반론
문무왕 13년(673년) 김유신이 사망하여 무덤을 처음 쓸 당시에는 무열왕릉과 같이 별도의 둘레 장식이 없는 무덤이었으나, 사후 흥무대왕으로 추봉되면서(추봉 시기는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흥덕왕 직후로 보며, 혜공왕 때의 일로 보는 설도 있다) 당시의 왕릉 묘제에 따라 무덤이 개수되었다는 것이다.[10][20][21]5.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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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 21호 김유신묘(金庾信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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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歴史探訪 韓国の文化遺産」編集委員会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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