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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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후성은 158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이 국을 영지로 삼았을 때 고후시 중심부에 축성된 평산성이다. 다케다 가문 멸망 후 도요토미 정권 시기에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주요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신판 및 후다이 다이묘의 성으로, 메이지 시대에는 철거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2004년에 이나리 야구라, 가지쿠루와 문, 우치마츠카게 문, 야마노테 문, 구로가네 문 등이 복원되었다. 현재는 JR 고후역에서 도보로 접근 가능한 무학성 공원으로 활용되고 있으며, 천수각 복원 여부를 두고 논의가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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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마나시현의 성 - 이와도노 산성
이와도노 산성은 야마나시현 오쓰키시에 있는 산성으로, 역암 절벽과 경사를 이용한 지형적 이점, 후지산 조망, 센고쿠 시대 오야마다 노부아리 축성, 다케다 가문 멸망과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의 역할, 노기 마레스케 시비, 주변 관광 명소 등으로 알려져 있다. - 야마나시현의 국가지정사적 - 후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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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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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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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고후성 |
다른 이름 | 마이즈루성 이치조코야마성 |
위치 | 고후, 야마나시 현, 일본 |
유형 | 히라야마 양식 성 |
좌표 | 35°39′55.04″N 138°34′16.82″E |
건립 | 1583년 |
건립자 | 도쿠가와 막부 하시바 히데카쓰 |
사용 시기 | 1583년–1871년 |
철거 | 1873년 |
상태 | 부분 복원 |
공개 여부 | 예 |
문화재 지정 | 일본 국가 사적 |
건축 정보 | |
구조 | 제곽식 평산성 |
천수각 구조 | 없음 |
주요 건축 자재 | 돌담 해자 |
복원된 건축물 | 망루 문 토벽 |
역사적 정보 | |
통치자 | 아사노 씨 도쿠가와 씨 야나기사와 씨 |
폐성 시기 | 1873년 (메이지 6년) |
공원 정보 | |
공원 이름 | 마이즈루 공원 |
2. 역사
고후시 중심부의 이치조 산에 축성된 평산성으로 1583년 무렵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이 국을 영지로 삼을 때 지어졌다.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후,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계 다이묘에 의해 고후 성을 중심으로 성하 마을이 재정비되었다. 도요토미 정권 시기에는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주요 거점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 성주로 부임하였다. 에도 시대에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신판, 후다이 다이묘의 성이었고, 이후에는 막부 직할령에 편입되었다.
- '''다케다 씨 멸망과 고후 성의 등장'''
다케다 신겐 사후, 그의 아들 다케다 가츠요리는 1582년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연합군에 패배했다. 오다 노부나가는 가이 국의 책임자로 가와지리 히데타카를 임명했지만, 노부나가는 석 달 후 암살당했고, 복수심에 불탄 전 다케다 씨 가신들이 곧 가와지리를 암살했다. 빈 자리를 두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후호조 씨가 다투었고, 이에야스가 승리했다. 그러나 1590년 오다와라 공성전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에야스에게 간토 지방의 새로운 영토와 가이 국을 교환하도록 강요하고 가이 국을 그의 가신 가토 미츠야스(1537~1593)에게 주었다.
- '''축성 배경과 논란'''
에도 시대 후기에 편찬된 『가이코쿠시(甲斐国志)』에서는 축성주를 이에야스, 시기를 158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1969년의 『고후 성 종합조사 보고서(甲府城総合調査報告書)』에서는 축성주를 이에야스, 시기를 1583년으로 보고 있다.[1]
그러나 이러한 설의 근거가 되는 사료들은 이에야스에 의한 축성을 확정짓지 못하며, 당시 가이 국내에서 대규모 동원이 이루어진 흔적이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다.[1] 1583년 축성설의 근거가 되는 히라이와 친키치(平岩親吉)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에야스는 아나타즈미(穴太積)라고도 불리는 세이코쿠(西国) 계통의 석축(石垣) 기술자를 파견하고 있는데, 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 축성에서 처음 사용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계승된 기술이었다. 당시 다케다 가문 영지나 이에야스가 지배했던 동국 5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 석축 기술은 고후 성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중단된 흔적이 없고 동일한 기술 수준을 보여 도요토미 다이묘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1]
이러한 석축 도입 시기와 가이, 이에야스를 둘러싼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오다와라 정벌과 이에야스의 관동 전봉을 앞둔 1589년 경에 이에야스가 고후 성 축성을 계획했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도요토미 다이묘 시대에 축성이 이루어졌다고 평가되고 있다.[1]
- '''도요토미 정권과 고후 성'''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간토 지방의 영지와 가이 국을 교환하도록 강요했고, 가이 국은 히데요시의 가신 가토 미츠야스에게 주어졌다.[5] 가토는 쓰쓰지가사키 관에서 통치했지만, 방어 시설이 부족하고 확장할 공간이 거의 없어, 인근의 이치죠모도리야마에 새로운 성을 짓기 시작했다. 이곳은 "고후 성"으로 불리게 되었다.[5]
- '''에도 시대의 고후 성'''
에도 막부 초기에는 적이 에도성을 함락할 경우 쇼군이 후퇴할 수 있는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아사노 나가마사가 건설한 천수각은 붕괴되어 복구되지 않았지만, 성 자체는 잘 보존되었고 도쿠가와 씨의 분가가 통치하였다.
보에이 원년, 고후 번주 도쿠가와 쓰나토요(이에노부)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후계자가 되자, 쓰나요시의 측용인이었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가 가이·스루가 영국에 15만 1200석 이상의 영지와 고후 성을 하사받았다.
- '''근현대의 고후 성'''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고후성은 도쿠가와 씨의 손에 들어갔고, 에도 막부가 멸망할 때까지 그들의 소유로 남았다.[2]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 중에 가쓰 가이슈는 콘도 이사미 지휘하의 신선조를 파견하여, 고후성이 진군하는 황군의 손에 떨어지기 전에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황군이 먼저 고후에 도착하여 무혈로 성을 점령했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 고후성은 버려졌고, 1877년 정부의 옛 요새 파괴 명령에 따라 남아 있던 성곽 건축물이 모두 철거되었다. 1904년에는 내성 주변 지역이 마이즈루 성 공원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1990년대부터 중요한 성곽 시설에 대한 고고학 발굴과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2004년에 성문과 야구라가 복원되었다.
1873년 폐성 처분 이후에도 고후는 정치적·경제적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고후성은 현청 주도의 척산흥업 정책에 따라 건물 등의 파괴가 이루어지고, 내호가 매립되어 관영 시설화되었다. JR동일본 주오본선의 개통과 고후역의 개업에 의해 성터는 분단되었지만, 전후에는 성터의 발굴 조사와 사적의 정비가 진행되었다.
2006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25번)으로 선정되었다.
2013년 철문(루문)의 복원이 완료되어 공개되었다.[7][8]
2. 1. 다케다 씨 멸망과 고후 성의 등장
1583년 무렵,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이 국을 영지로 삼으면서 고후시 중심부의 이치조 산에 고후 성을 축성했다. 쓰쓰지가사키 관을 중심으로 성하 마을이 번영했던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후,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계 다이묘에 의해 고후 성을 중심으로 성하 마을이 재정비되었다.다케다 가문 멸망 후, 가이 국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 가와지리 히데타카가 지배했으나, 혼노지의 변으로 히데타카가 살해되면서 덴쇼 진고의 난이 발생했다. 이 난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고호조 씨가 가이 국을 두고 다투었고, 결국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이 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1583년에 가신 히라이와 친키치에게 이치조 고야마에 성을 쌓을 터를 계획하도록 명하여 고후 성 축성을 계획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에야스에 의한 축성을 확정하는 사료는 없으며, 당시 가이 국내에서 대규모 동원이 이루어진 흔적이 없다는 점이 지적된다.
고후 성의 석축은 "아나타즈미"라고도 불리는 세이코쿠(西国) 계통의 기술로,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성 축성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계승되었다. 당시 가이나 다케다 영지, 이에야스가 지배했던 동국 5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고후 성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고후 성의 석축 유구는 기술적인 중단의 흔적이 없고 동일한 기술 수준에 의한 것이므로, 도요토미 다이묘 시대의 축조로 생각되고 있다.
오다와라 정벌과 이에야스의 관동 전봉을 앞둔 덴쇼 17년경, 이에야스는 고후 성의 축성을 계획했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고후 성의 축성은 도요토미 다이묘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평가받고 있다.
2. 2. 축성 배경과 논란
1583년 무렵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이 국을 영지로 삼으면서 고후시 중심부의 이치조 산에 고후 성이 축성되었다. 다케다 가문이 멸망한 후,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계 다이묘에 의해 고후 성을 중심으로 성하 마을이 재정비되었다. 도요토미 정권 시기에는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주요 거점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 성주로 부임하였다. 에도 시대에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신판, 후다이 다이묘의 성이었고, 이후에는 막부 직할령에 편입되었다.고후 성 축성주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설은 오랫동안 존재했다. 에도 시대 후기에 편찬된 『가이코쿠시(甲斐国志)』에서는 축성주를 이에야스, 시기를 158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1969년의 『고후 성 종합조사 보고서(甲府城総合調査報告書)』에서는 축성주를 이에야스, 시기를 1583년으로 보고 있다.[1]
그러나 이러한 설의 근거가 되는 사료들은 이에야스에 의한 축성을 확정짓지 못하며, 당시 가이 국내에서 대규모 동원이 이루어진 흔적이 없다는 점이 지적되었다.[1] 1583년 축성설의 근거가 되는 히라이와 친키치(平岩親吉)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에야스는 아나타즈미(穴太積)라고도 불리는 세이코쿠(西国) 계통의 석축(石垣) 기술자를 파견하고 있는데, 이는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 성 축성에서 처음 사용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계승된 기술이었다. 당시 다케다 가문 영지나 이에야스가 지배했던 동국 5개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이 석축 기술은 고후 성에서 처음 사용되었으며, 중단된 흔적이 없고 동일한 기술 수준을 보여 도요토미 다이묘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1]
이러한 석축 도입 시기와 가이, 이에야스를 둘러싼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오다와라 전투와 이에야스의 관동 전봉(関東転封)을 앞둔 1589년 경에 이에야스가 고후 성 축성을 계획했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도요토미 다이묘 시대에 축성이 이루어졌다고 평가되고 있다.[1]
2. 3. 도요토미 정권과 고후 성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간토 지방의 영지와 가이 국을 교환하도록 강요했고, 가이 국은 히데요시의 가신 가토 미츠야스에게 주어졌다.[5] 가토는 쓰쓰지가사키 관에서 통치했지만, 방어 시설이 부족하고 확장할 공간이 거의 없어, 인근의 이치죠모도리야마에 새로운 성을 짓기 시작했다. 이곳은 "고후 성"으로 불리게 되었다.[5]가토 미츠야스는 솜 공사에 인력을 동원하여 고후 성 축성을 진행했고, 성내 전각 건설도 시작했다. 미츠야스 시대에 고후 성의 본마루, 텐슈구루와, 이나리구루와, 타테구루와 등 중심 부분이 준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신성 완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고, 히데요시의 처남인 아사노 나가마사가 뒤를 이었다. 아사노는 1593년에 성을 완공했다.[5]
아사노 시대에도 축성은 계속되었지만,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으로 고후 성 축성은 어려워졌고, 가이에서는 농민 도망도 발생했다. 미츠야스와 아사노 시대에는 이치조산의 일련사를 비롯한 사찰 이전도 이루어졌다.[5]
도요토미 정권기에 고후 성은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주요 거점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 성주로 부임하였다.[5]
2. 4. 에도 시대의 고후 성
1583년 무렵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이 국을 영지로 삼을 때 지어진 고후시 중심부의 이치조 산에 축성된 평산성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 성주로 부임하여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주요지로 사용되었다. 에도 막부 초기에는 적이 에도성을 함락할 경우 쇼군이 후퇴할 수 있는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아사노 나가마사가 건설한 천수각은 붕괴되어 복구되지 않았지만, 성 자체는 잘 보존되었고 도쿠가와 씨의 분가가 통치하였다.보에이 원년, 고후 번주 도쿠가와 쓰나토요(이에노부)가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후계자가 되자, 쓰나요시의 측용인이었던 야나기사와 요시야스가 가이·스루가 영국에 15만 1200석 이상의 영지와 고후 성을 하사받았다. 이듬해 4월에는 스루가 국의 지행지가 바뀌어 가이 국 국중 삼군을 지배하게 되었다. 요시야스는 대로 격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카이를 방문하는 일은 없었지만, 가로인 야부타 시게모리에게 고후 성과 성하 마을의 정비 외에, 카이 국내의 검지와 용수로의 정비, 고슈킨의 일종인 신고슈킨의 주조 등을 지시했다. 고후 성의 정비에서는 새롭게 하나바타케구루와를 설치하고, 가쿠야구루와와 야카타구루와에는 고덴을 건설했다. 야나기사와 씨 시대의 고후 성하의 번영을 『카부가마잡기(かいざっき)』에서는 “'''동에 동, 문에 문을 나란히 하고, 만들어 나란히 한 모습은, 이것이 바로 고후의 한창때'''”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야나가사와 요시사토가 야마토 고리야마 번으로 옮겨지면서, 카이 국은 임명된 하타모토 관리를 통해 막부가 직접 통치하는 텐료 영지가 되었다.
에도 시대의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 1603년(게이초 8년): 도쿠가와 요시나오(이에야스의 아홉째 아들)가 성주가 됨.
- 1607년(게이초 12년): 요시나오가 기슈로 전봉(영지를 옮김). 고후 성번이 설치됨.
- 1616년(겐나 2년): 도쿠가와 타다나가(히데타다의 셋째 아들, 스루가 성주)의 지성이 됨.
- 1632년(간에이 9년): 타다나가 사망. 성번제가 시행됨.
- 1661년(간분 원년): 도쿠가와 쓰나시게(이에미쓰의 셋째 아들)가 성주가 됨.
- 1678년(엔포 6년): 도쿠가와 쓰나토요(쓰나시게의 적남)가 성주가 됨.
- 1704년(호에이 원년): 쓰나토요가 쇼군 세자로서 에도 성에 들어가 도쿠가와 이에노부로 개명함.
- 1705년(호에이 2년): 야나가사와 요시야스가 성주가 됨. 처음으로 친번(親藩) 이외의 영지가 됨.
- 1724년(교호 9년): 야나가사와 요시타다(요시야스의 적남)가 야마토고리야마로 전봉. 카이 일국이 막부령이 됨. 고후 킨반(勤番) 설치.
- 1727년(교호 12년): 고후 성 대화재.[2] 이 기간 동안 큰 화재로 궁궐의 혼마루와 아카가네몬 문이 파괴됨.
- 1734년(교호 19년): 성내에 도적이 침입하여 1400냥의 공금이 도난당하는 고후 성어금고 사건이 발생. 범인은 불명이었으나, 당일에 도박을 하고 있던 고후 킨반시의 태만이 지적되어 17명이 처벌됨. 1742년(간포 2년)에는 다카하타무라의 농민 지로베에가 체포되어 사건은 해결됨. 이 사건은 사람들 사이에서 관심을 불러일으켜, 저자 성립 시대는 불명이며 출판도 되지 않았지만, 픽션을 섞은 권선징악의 이야기로 구성된 실록 소설 『고금록(甲金録)』이 됨.
- 1866년(게이오 2년): 킨반제를 폐지하고 성대(城代)를 설치.
에도 시대 고후 성대의 역임자는 다음과 같다.
번호 | 성명 | 관위 | 전임 | 재임 기간 | 후임 | 번(藩) |
---|---|---|---|---|---|---|
1 | 마쓰다이라 데루아키 まつだいら てるあき | 종오위하(従五位下) 우경량(右京亮) | 간마석(雁間席) | 경응(慶応)2년8월 5일 - 경응 3년9월 6일 | 주자번(奏者番) | 코자키번(高崎藩)(8만 2천석) 우에노 |
2 | 오오쿠보 다다노리 おおくぼ ただのり | 종오위하 가가노카미(加賀守) | 테이칸노마석 | 경응 3년 9월 6일 - 경응 3년 12월 | 사임 | 오다와라번(小田原藩)(11만 3천석) 사가미 |
3 | 사나다 유키모토 さなだ ゆきもと | 종이위(従二位) 시나노노카미(信濃守) | 테이칸노마석 | 경응 4년1월 19일 - 경응 4년1월 25일 | 사임, 철병 신정부군에 공순 | 마쓰다이번(松代藩)(10만석) 시나노 |
4 | 홋타 마사토모 ほった まさとも | 종오위하 사가미노카미(相模守) | 테이칸노마석 | 경응 4년2월 5일 - 경응 4년2월 18일 | 사퇴(부임하지 않음) 신정부군에 공순 | 사쿠라번(佐倉藩)(11만석) 시모우사 |
2. 5. 근현대의 고후 성
1583년 무렵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가이 국을 영지로 삼을 때 고후시 중심부의 이치조 산에 축성된 평산성으로 지어졌다. 성이 축성되기 전에는 다케다 가문의 쓰쓰지가사키 관을 중심으로 성하 마을이 번영하였지만, 다케다 가문이 멸문된 후에는 도쿠가와 가문과 도요토미계 다이묘에 의해 고후 성을 중심으로 재정비되었다. 도요토미 정권기에는 간토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주요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측근이 성주로 부임하였고, 에도 시대에는 교통의 요지인 탓에 신판, 후다이 다이묘의 성이었다가 막부직할령에 편입되었다.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고후성은 도쿠가와 씨의 손에 들어갔고, 에도 막부가 멸망할 때까지 그들의 소유로 남았다.[2] 도쿠가와 막부는 처음에 적이 에도성을 함락할 경우 쇼군이 후퇴할 수 있는 거점으로 고후성을 사용했다. 아사노 나가마사가 건설한 천수각은 붕괴되어 복구되지 않았지만, 성 자체는 잘 보존되었고 도쿠가와 씨의 분가가 통치하였다.
도쿠가와 쓰나토요는 고후의 다이묘였으나,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상속자가 되어 에도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1704년 도쿠가와 쓰나요시의 가장 가까운 가신 중 한 명인 이나가사와 요시야스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나가사와 요시야스는 다케다 씨의 후손이기도 했으며, 지역의 번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이나가사와 요시사토가 야마토 고리야마 번으로 옮겨지면서, 가이 국은 임명된 하타모토 관리를 통해 막부가 직접 통치하는 텐료 영지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1727년 큰 화재로 궁궐의 혼마루와 아카가네몬 문이 파괴되었다.[2]
메이지 유신의 보신 전쟁 중에 가쓰 가이슈는 콘도 이사미 지휘하의 신선조를 파견하여, 고후성이 진군하는 황군의 손에 떨어지기 전에 점령하려 했다. 그러나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이끄는 황군이 먼저 고후에 도착하여 무혈로 성을 점령했다. 황군은 이어서 가쓰누마 전투에서 신선조를 격파하여 성을 확보했다.
메이지 시대 초기에 고후성은 버려졌고, 1877년 정부의 옛 요새 파괴 명령에 따라 남아 있던 성곽 건축물이 모두 철거되었다. 성의 외곽 지역은 고후 역이 들어섰고, 다른 지역은 정부 기관이 차지했다. 1904년에는 내성 주변 지역이 마이즈루 성 공원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1990년대부터 중요한 성곽 시설에 대한 고고학 발굴과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2004년에 성문과 야구라가 복원되었다. 야구라는 성의 원래 건물에서 나온 많은 유물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873년 폐성 처분 이후에도 고후는 정치적·경제적 중심지로서 기능하고, 고후성은 현청 주도의 척산흥업 정책에 따라 건물 등의 파괴가 이루어지고, 내호가 매립되어 관영 시설화되었다. JR동일본 주오본선의 개통과 고후역(고후성 시미즈 곡륜 흔적에 해당)의 개업에 의해 성터는 분단되었지만, 전후에는 성터의 발굴 조사와 사적의 정비가 진행되어, 현재는 본마루·천수곡륜 및 천수대·이나리곡륜·카지곡륜의 성벽, 해자의 일부가 남아, 다케다씨 거관과 함께 고후역 주변의 관광지가 되고 있다.
메이지 초기에는 현령 후지무라 시로의 지휘 아래 고후성 성곽 내의 건물 대부분이 철거되었고, 1876년에는 가지쿠루와에 권업시험장이 설치되었다. 1880년 3월에는 메이지 천황의 야마나시현 순행이 실시되어, 메이지 천황은 고슈 가도를 따라 6월 17일에 야마나시현에 들어온 후 6월 19일에 고후에 도착했다. 메이지 천황은 6월 20일에 고후성 터에 있던 권업제사장을 시찰하고, 천수대를 능행하였다. 1938년 3월에는 메이지 천황의 천수대 능행을 기념하여 천수대 터에 "메이지 천황어등림지"가 건설되었다.
2006년 4월 6일, 일본 100명성(25번)으로 선정되었다.
2004년부터 고후 상공회의소 등은 "빛의 퓨시스"라는 이름으로 겨울 동안 일대를 일루미네이션으로 장식해 왔으나, 현과 시의 보조금이 중단되는 등의 이유로 2007년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2013년 철문(루문)의 복원이 완료되어 공개되었다.[7][8]
- '''고후 성 역대 성주'''
번호 | 성명 | 관위 | 전임 | 재임 기간 | 후임 | 번(藩) |
---|---|---|---|---|---|---|
1 | 마쓰다이라 데루아키 まつだいら てるあき | 종오위하(従五位下) 우경량(右京亮) | 간마석(雁間席) | 경응(慶応)2년8월 5일 - 경응 3년9월 6일 | 주자번(奏者番) | 코자키번(高崎藩)(8만 2천석) 우에노 |
2 | 오오쿠보 다다노리 おおくぼ ただのり | 종오위하 가가노카미(加賀守) | 테이칸노마석 | 경응 3년 9월 6일 - 경응 3년 12월 | 사임 | 오다와라번(小田原藩)(11만 3천석) 사가미 |
3 | 사나다 유키모토 さなだ ゆきもと | 종이위(従二位) 시나노노카미(信濃守) | 테이칸노마석 | 경응 4년1월 19일 - 경응 4년1월 25일 | 사임, 철병 신정부군에 공순 | 마쓰다이번(松代藩)(10만석) 시나노 |
4 | 홋타 마사토모 ほった まさとも | 종오위하 사가미노카미(相模守) | 테이칸노마석 | 경응 4년2월 5일 - 경응 4년2월 18일 | 사퇴(부임하지 않음) 신정부군에 공순 | 사쿠라번(佐倉藩)(11만석) 시모우사 |
고후성은 내호, 이노호, 사노호로 각 영역이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내성 부분, 내곽 부분, 마을 사람들의 거주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내성 부분에는 천수대와 본마루, 여러 곡륜이 존재했으며, 북쪽에는 산테몬, 남쪽에는 오테몬, 서쪽에는 야나기몬이 있어 출입구 역할을 했다. 이노호는 무사들의 거주 지역인 내곽 부분을 둘러싸고 있었으며, 고후 긴반야쿠택과 긴반시의 저택, 세금으로 거둔 쌀을 저장하는 미쿠라와 오하나바타케, 약원, 학문소인 기텐칸 등 여러 시설이 있었다. 사노호는 마을 사람들의 거주지로, 북쪽의 고후츄와 남동쪽의 신후츄로 구성되었다.
3. 구조
이나리곡륜 서쪽에는 초석·화약을 저장하는 염초창(えんしょうぐら)이 있었다[1]. 발굴 조사에 따르면, 고후성터의 염초창은 지표면에서 1.8미터 정도 지하에 돌을 깔아 건물의 기초로 삼았다[1]. 17세기 전반의 「고후성 및 근방의 그림」(교토대학 소장)에서는 이 지역이 공백지였으나, 『낙지당연록』에 따르면 야나가사와씨 시대에는 존재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어,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기에 건조된 시설로 추정된다[1]. 메이지 시대 사진에도 염초창 건물이 찍혀 있다[1].
3. 1. 주요 건축물
고후시 중심부의 이치조 산에 축성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583년경 건립한 평산성이다. T자형 구조로, 동서 방향으로 언덕 능선을 따라 본채가 위치하며, 200m x 100m 면적에 3~4층의 계단식 구조를 갖추고 있다. 남북으로 돌출된 정면에는 정문이, 언덕 꼭대기에는 100m x 50m 크기의 본성이 자리 잡고 있으며, 검은색 바탕에 금색 기와를 얹은 4층 천수각이 있었다. 본성 아래에는 여러 구역이 복잡한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일부는 높이가 15m에 달했다.
고후성의 주요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명칭 | 설명 |
---|---|
오테몬(追手門) | 고후성 남쪽에 위치. 좌회전하는 마스가타(枡形) 형태. 안팎에 망루가 있었고, 난간이 붙은 둥근 다리. 옛 사진이 발견됨. |
산테문 | 고후성 북쪽에 위치. 우회전하는 마스가타 형태. 망루가 있었고, 난간이 붙은 둥근 다리. 목조로 복원됨. |
야나기문 | 고후성 서쪽에 위치. 엇갈린 형태. 내부에 망루, 난간이 붙은 둥근 다리. |
본마루야구라 | 본마루 천수대 부근. 4×5칸 규모, 이중 야구라, 2층에 첨탑. 옛 사진이 발견됨. |
쓰키미야구라 | 니노마루 남서쪽. 삼중 야구라. 서쪽 2층에 첨탑. |
스기야야구라 | 스기야 구루와 남동쪽. 이중 야구라(원래 삼중), 2층에 첨탑. 다츠미야구라로도 불림. 옛 사진이 발견됨. |
이나리야구라 | 이나리 구루와 북동쪽. 이중 야구라, 2층에 첨탑. 우시토라야구라로도 불림. 목조로 복원됨. 옛 사진이 발견됨. |
시미즈야구라 | 시미즈 구루와 북서쪽. 이중 야구라, 2층에 첨탑. 이누이야구라로도 불림. |
타이코야구라 | 야나기문 안. 우물정자 형태로 추정. |
팔방정면야구라 | 다이고쿠루와 남동쪽 (옛 기록). |
도우몬 | 본마루 오테몬. 야구라몬 (창건 당시). 목조 복원 계획. |
테츠몬 | 본마루 나가테몬. 야구라몬. 목조로 복원됨. |
쇼우인몬 | 내문, 외문으로 구성된 야쿠이몬. 목조로 복원됨. |
텐슈아나구라몬 | 텐슈아나구라 입구. 야쿠이몬. |
야마노이몬 | 쇼우인몬 안쪽, 니노마루 입구. 야쿠이몬. |
나카시키리몬 | 야나기문 안쪽. 야쿠이몬. |
야가타몬 | 야가타 구루와 입구. 야구라몬. |
야가타우라몬 | 야가타 구루와 서쪽. 야쿠이몬. |
가쿠야구루와몬 | 가쿠야 구루와 쇼인의 정문. 나가야몬. |
가쿠야구루와우라몬 | 가쿠야 구루와 쇼인의 뒷문. 야쿠이몬. |
사카시타몬 | 다이고 구루와 입구. 야쿠이몬. |
다이고몬 | 사카시타몬 안쪽. 야쿠이몬. |
우메바야시몬 | 이나리 구루와 서쪽. 야쿠이몬. |
타케바야시몬 | 산테문 남쪽. 야쿠이몬. |
이나리몬 | 이나리 구루와 남서쪽. 야쿠이몬. 목조로 복원됨. |
스기야몬 | 정문(스기야 구루와 남쪽), 뒷문(스기야 구루와 서쪽)으로 구성. |
카지몬 | 카지 구루와 입구. 야쿠이몬. 요츠아시몬으로도 불림. 목조로 복원됨. |
야나가사와 요시야스 시대 본마루에 있던 비사문당(毘沙門堂)은 2014년 고후시 모토콘야초 화광원(華光院) (진언종 사찰)의 다이시당을 이축(移築)한 것으로 확인, 고후성 건물 중 유일하게 현존한다.
4. 현대의 활용과 복원 노력
고후 성은 1873년(메이지 6년) 폐성 이후, 현청 주도의 산업화 정책에 따라 건물 대부분이 철거되고 내호가 매립되는 등 큰 변화를 겪었다. JR동일본 주오본선 개통과 고후역 건설로 인해 성터가 분단되기도 했다.[7][8]
그러나 전후, 성터 발굴 조사와 사적 정비가 진행되면서 고후 성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1992년부터 야마나시현 매장문화재센터와 현 교육위원회 등이 발굴조사를 실시했고, 고후 성 유적 종합 학술 조사단이 조직되어 종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본마루, 천수 곡륜, 천수대, 이나리 곡륜, 가지 곡륜의 성벽과 해자 일부가 남아있음이 확인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복원 정비가 시작되었다.
2006년에는 일본 100명성(25번)에 선정되기도 했다.
2004년부터 "빛의 퓨시스"라는 이름으로 겨울 동안 일대를 일루미네이션으로 장식했으나, 현과 시의 보조금 중단 등의 이유로 2007년을 끝으로 종료되었다.
4. 1. 복원된 건축물
고후 성은 1873년 폐성처분에 따라 파각되었고, 산업화에 따른 개발로 시가지로 조성되었다. 현재 성터 주변은 마이즈루조 공원(舞鶴城公園)으로 정비되어 있으며, 성문과 이나리 망루(稲荷櫓)가 복원되었다. 또, 석벽과 해자 일부는 현존해 있다.[7][8]- '''오테 문(大手門)''': 고후 성 남쪽에 위치한다. 안팎에 망루가 있었으며, 좌회전하는 마스가타 형태이다. 다리는 난간이 붙은 둥근 다리이다. 옛 사진이 발견되었다.
- '''산테 문''': 고후 성 북쪽에 위치하며, 목조로 복원되었다. 우회전하는 마스가타 형태이며, 망루가 있었다. 다리는 난간이 붙은 둥근 다리이다.
- '''야나기 문''': 고후 성 서쪽에 위치하며, 엇갈린 형태이다. 내부에 망루가 있고, 다리는 난간이 붙은 둥근 다리이다.
- '''이나리 야구라''': 이나리 구루와 북동쪽에 위치하며, 목조로 복원되었다. 이중 야구라로 2층에 첨탑이 있으며, 우시토라야구라라고도 불린다. 옛 사진이 발견되었다.
- '''도몬''': 본마루 오테몬에 해당하며, 창건 당시에는 야구라몬이었다. 목조 복원 계획이 있다.
- '''데쓰몬''': 본마루 나가테몬에 해당하며, 야구라몬으로 목조로 복원되었다.
- '''쇼인몬''': 내문, 외문으로 구성되며, 야쿠이몬으로 목조로 복원되었다.
- '''이나리몬''': 이나리 구루와 남서쪽에 위치하며, 야쿠이몬으로 목조로 복원되었다.
- '''가지몬''': 가지 구루와 입구의 문으로, 야쿠이몬이며 목조로 복원되었다. 요쓰아시몬이라고도 불린다.
중앙본선(中央本線) 개통으로 인해 단절되었던 고후 성은, 전후 마이즈루조 공원 정비 사업에 앞서 1992년부터 야마나시현 매장문화재센터(山梨県埋蔵文化財センター)와 현 교육위원회, 토목부 등에 의한 발굴조사(發掘調査)가 실시되었다. 고후 성 유적 종합 학술 조사단이 조직되어 종합적인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복원 정비가 시작되었다. 몇몇 곡륜과 문의 정비가 이루어졌고, 2003년에 이나리야구가, 2007년에는 단절된 북쪽의 야마테와타리야구몬이 복원되었다.
2004년에 복원된 이나리 야구라는 성내 북동쪽에 위치하여 우토로라고도 불렸다. 1996년에는 단조 곡륜과 막사 곡륜을 잇는 단조 곡륜문이, 1999년에는 본마루 곡륜과 니노마루를 잇는 문이 복원되었다.
야마테 문은 본마루 북쪽에 위치하며, 유구는 남아있지 않다. 현존하는 그림이나 메이지 시대의 측량도, 옛 사진 등으로 보아 낮은 돌담 위에 흙벽을 설치한 추수마스형의 담을 가진 고려문 형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9] 2007년에 복원되었다.
고후 성 철문은 본마루 남쪽에 위치한 좌우에 석축을 가진 2층의 누문이다. 창건 당시에는 "남문"이라 불렸으며, 『낙지당연록』 보영 2년(1705년) 조에 따르면 야나가사와 씨 시대에 "철문"으로 개칭되었다. 철문의 창건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여러 기록과 그림에서 분로쿠·게이쵸 연간의 축성기부터 에도 초기까지로 추정된다. 1876년경에 해체되어 소실되었다.
마쓰루 성 공원 정비 사업에서 2004년에는 이나리 누각의 복원이 완료되었고, 다음 정비 계획으로 철문과 동문의 복원이 검토되었다. 2010년에는 철문의 복원이 결정되어, 고후 성 흔적 누문 복원 검토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복원 공사와 석축 보수는 기본적으로 전통 공법에 기초하여 이루어졌지만, 구조 계산상 필요하다고 여겨진 보강재는 도입되었다. 건축 자재는 국산재를 사용하여 2013년에 복원이 완료되었다.
4. 2. 천수각 복원 논의
고후 성의 천수대만 남아 있고, 천수각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천수각이 성을 쌓을 당시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 폐성될 때까지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와 검증이 이루어지고 있다.오기 소라이(荻生徂徠)는 1706년에 저술한 『협중기행(峡中紀行)』에서 고후 성에 천수각이 없었다고 썼다. 종합학술조사단 등도 천수각이 없었다는 견해를 보였다. 그러나 하기와라 미츠오(萩原三雄) 등 고고학계에서는 금박 기와와 샤치호코 기와(鯱瓦) 등이 출토된 것을 근거로, 도요토미 계열 다이묘(大名)가 축조한 성곽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며, 근세 가이 지방의 지형적 조건을 고려할 때 일시적이나마 천수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2008년에는 문헌 사학과 고고학 양면의 조사 위원회가 발굴 조사에서 샤치호코 기와 등이 출토되었고, 새롭게 발견된 그림 등을 검토하여 새로운 문의 존재와 마쓰모토 성(松本城)에 필적하는[10] 근세 초기의 고층 건축 유구의 존재를 지적했다. 그러나 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서는 천수각 유무에 관해서는 문헌 및 고고학 양면에서 확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들어 복원 및 신축론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2015년부터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고후 성터 종합 조사 검토 위원회」가 발족하였고, 고토 사이(後藤斎) 지사도 선거 공약에서 복원에 대해 언급했지만, 2017년 3월 27일에 야마나시 현 교육위원회가 2년에 걸쳐 조사한 결과에서도 "(천수각의) 존재를 보여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11]
고후 상공회의소(甲府商工会議所)와 고후 중앙상점가(甲府中央商店街) 등에서는 시가지 활성화를 위해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더라도 모의 천수각을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있다.[11] 반면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은 모의 천수각 건립에 부정적이며, 정비 사업을 진행하는 야마나시 현도 실제 존재했던 시설의 복원만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5. 교통
참조
[1]
웹사이트
甲府城跡
https://kunishitei.b[...]
Agency for Cultural Affairs
2016-12-25
[2]
웹사이트
Kofu Castle
https://web.archive.[...]
2007-04-23
[3]
문서
平成31年2月26日文部科学省告示第20号
[4]
웹사이트
史跡等の指定等について
https://www.bunka.go[...]
2022-05-07
[5]
웹사이트
富士山NET
http://www.fujisan-n[...]
[6]
서적
写真集 明治大正昭和 甲府
図書刊行会
2019-03-22
[7]
웹사이트
県指定史跡甲府城跡に鉄門が復元整備されました
https://web.archive.[...]
2022-05-07
[8]
웹사이트
鉄門への道
https://www.pref.yam[...]
2022-05-07
[9]
서적
甲府城跡山手御門 甲府市歴史公園山手御門埋蔵文化財の試掘調査・発掘調査・整備報告書 甲府市文化財調査報告50
https://sitereports.[...]
甲府市教育委員会
2010
[10]
문서
甲府城本丸から出土した鯱瓦は推定130センチメートルで、現存する松本城天守全長130センチメートルの鯱瓦と同規模である。
[11]
웹사이트
存在しなかった(かもしれない)甲府城天守閣を「再建」したい地元の言い分
https://web.archive.[...]
2022-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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