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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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1453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군인으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과 그라나다 정복에 참여했다. 그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스페인군을 지휘하며 "대선장"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세미나라 전투 패배 후 군사 개혁을 통해 스페인 군대를 강화했다. 곤살로는 1507년 나폴리 총독에서 해임된 후 고향으로 돌아가 말년에 그라나다에서 사망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군사 개혁은 유럽 군사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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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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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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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
별칭 | 엘 그란 카피탄 ("위대한 대장군") |
출생일 | 1453년 9월 1일 |
사망일 | 1515년 12월 2일 (62세) |
출생지 | 스페인, 몬티야 |
사망지 | 스페인, 그라나다 |
군사 복무 | |
소속 | [[파일:Pendón heráldico de los Reyes Catolicos de 1492-1504.svg|20px]] 스페인 |
복무 기간 | 1482년–1504년 |
계급 | 장군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그라나다 전쟁 제1차 이탈리아 전쟁 세미나라 (1495년) 아텔라 (1496년) 오스티아 (1497년) 제3차 투르크-베네치아 전쟁 케팔로니아 (1500년) 제2차 이탈리아 전쟁 루보 (1503년) 체리뇰라 (1503년) 가릴리아노 (1503년) |
기타 이력 | |
기타 이력 | 나폴리 총독 (1504년–1507년) |
2. 어린 시절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1453년 9월 1일 스페인 코르도바 근처의 몬티야에서 태어났다.[7] 그는 아길라르 백작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와 엘비라 데 에레라의 차남이었다. 곤살로가 두 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했고, 장남인 형 알론소가 가문의 재산을 모두 상속받게 되면서 곤살로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7]
1467년, 곤살로는 카스티야의 국왕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아스투리아스 공자 알폰소의 가신으로 들어가며 경력을 시작했다. 그러나 1468년 알폰소 공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누이였던 카스티야의 이사벨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녀를 섬기기 시작했다.[7]
1474년 엔리케 4세가 사망한 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전이 발발했다. 이사벨라는 엔리케 4세의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에 맞서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후아나를 지지한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도 충돌이 발생했다. 곤살로는 이사벨라 여왕 편에 서서 산티아고 기사단의 단장 알론소 데 카르데나스 휘하에서 싸웠다. 그는 1479년 포르투갈과의 마지막 전투에도 참전하여 활약했으며, 카르데나스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전쟁은 결국 이사벨라와 그녀의 남편 페르난도의 승리로 끝나, 두 사람은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7][8]
2. 1. 출생과 성장
곤살로는 1453년 9월 1일 스페인 코르도바 근처의 도시 몬티야에서 태어났다.[13] 아버지는 아길라르 백작 돈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Don Pedro Fernández de Córdoba)였고, 어머니는 엘비라 데 에레라(Doña Elvira de Herrera)였다. 위로는 돈 알론소(Don Alonso)라는 형이 있어 곤살로는 차남이었다. 그의 가문은 왕가의 한 갈래인 엔리케스 가문에 속했으며, 대대로 카스티야 왕국의 제독을 배출한 명문가였다.[13]곤살로가 두 살이 되던 1455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7] 당시 아길라르 백작가는 카브라(Cabra) 백작가와 오랜 대립 관계에 있었기에, 아버지의 죽음은 가문에 큰 위협이 되었다. 카브라 백작가는 어린 두 형제를 해치려 했으나, 아길라르 가문의 가신들과 형 알론소의 노력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13] 아버지의 재산은 장남인 형 알론소가 모두 상속받았고, 차남인 곤살로는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만 했다.[7]
곤살로는 어린 시절 한때 교회에 몸담기도 했으나, 성인이 되자 환속하여 궁정으로 나아갔다.[13] 1467년, 그는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아스투리아스 공자 알폰소의 가신이 되었다. 그러나 1468년 알폰소 공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누이였던 이사벨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녀를 섬기기 시작했다.[7]
2. 2. 카스티야 왕위 계승전
1474년, 이사벨 1세가 카스티야 여왕으로 즉위하자, 포르투갈의 왕 아폰수 5세는 자신의 아내이자 선왕 엔리케 4세의 딸인 후아나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카스티야를 침공했다. 이와 함께 카스티야 내부에서도 후아나를 지지하는 세력이 봉기하여 내전 상태에 돌입했다.곤살로는 초기에 왕자 돈 알폰소를 섬겼으나, 그의 사후에는 이사벨 1세를 섬겼다.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에서 그는 산티아고 기사단장 알론소 데 카르데나스의 지휘 아래 참전했다. 알부에라 전투 이후, 알론소 데 카르데나스는 곤살로가 항상 위험을 무릅쓰고 전선에 나서는 용맹함을 높이 평가하며 포상을 내렸다. 곤살로는 화려한 갑옷을 착용하여 전장에서도 눈에 잘 띄었다.
곤살로의 군인으로서의 뛰어난 자질은 이 시기부터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일개 장교에 불과했지만, 마치 장군처럼 날카로운 지성과 넓은 시야를 가졌으며, 강한 인내심을 보여주었다. 일단 전투가 시작되면 무모할 정도로 대담하게 행동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약 덕분에 그의 명성은 빠르게 높아졌고, 항상 전선에 앞장서는 곤살로는 병사들의 깊은 존경을 받으며 그들의 헌신을 이끌어냈다.
전쟁은 이사벨 여왕의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지원에 힘입어 점차 이사벨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1476년 벌어진 토로 전투에서 포르투갈 군대가 패배하면서 전세는 더욱 기울었으나, 이후에도 지리한 싸움이 이어졌다. 마침내 1479년,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은 알카소바스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종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는 이사벨 1세의 카스티야 왕위 계승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3. 그라나다 정복에서의 역할
1482년, 가톨릭 군주는 이베리아반도에 마지막으로 남은 이슬람 국가인 그라나다 왕국을 정복하기 위한 10년 간의 전쟁을 시작했다.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산티아고 기사단장이 된 그의 형 알론소 데 아길라르의 지휘 하에 이 전쟁에 참여했으며, 상관인 형과 적극적으로 의견을 교환하며 중요한 경험을 쌓았다.
전쟁은 도시 공성전과 지형을 이용한 그라나다 군의 기습이 반복되는 양상이었고, 양측 모두 공병과 게릴라 전술을 활발히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곤살로는 용감하고 유능한 군사 지도자로 빠르게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로하, 타하라, 일로라, 몬테프리오 등 여러 성벽 도시의 포위 공격에 참여하며 명성을 얻었다.
특히 몬테프리오 포위전에서는 성벽을 넘어 가장 먼저 공격을 감행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일로라에서 이사벨 1세 여왕을 호위한 일은 그의 경력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여왕이 전황 시찰차 일로라를 방문했을 때 그라나다 수비대가 공격해오자, 곤살로는 여왕 앞에서 이들을 성공적으로 격퇴하여 높은 신임을 얻게 되었다.
1492년, 약 10년간의 전투 끝에 그라나다는 카스티야에 항복하며 레콩키스타가 완결되었다. 곤살로는 아랍어에 능통하고 그라나다의 마지막 술탄 보아브딜과도 친분이 있었기에, 항복 협상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사신 중 한 명으로 선발되었다.[7][8][9]
전쟁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 작위, 엔코미엔다, 그라나다의 오르기바 영지, 그리고 해당 지역의 비단 생산권 등을 하사받았다.
4. 이탈리아 전쟁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이탈리아 전쟁 기간 동안 중요한 군사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그는 이 전쟁에서 두 차례나 지휘권을 맡았으며, 뛰어난 활약으로 '대선장'(El Gran Capitán|엘 그란 카피탄es)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구체적인 활약상은 제1차 및 제2차 이탈리아 전쟁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4. 1. 제1차 이탈리아 전쟁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공하면서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나폴리는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의 사촌인 페르디난도 2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은 비교적 쉽게 나폴리를 점령했고, 1495년 5월 12일 샤를 8세는 스스로 나폴리 왕위에 올랐다. 이에 가톨릭 군주인 페르난도 2세와 이사벨 1세는 프랑스의 세력을 몰아내고자 했고, 이사벨 1세의 신임을 받던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를 스페인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8][10] 곤살로는 이사벨 1세로부터 충성심과 능력을 높이 평가받고 있었기에 사령관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곤살로는 샤를 8세의 즉위 직후, 약 5,000명의 보병과 600명의 경기병으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나폴리에 상륙했다. 그는 나폴리 왕으로부터 5,000명의 원군을 추가로 받았다. 한편, 프랑스에 맞서기 위해 1495년 3월 31일 교황알렉산데르 6세의 주도로 신성 동맹이 결성되면서 전황은 프랑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에 고립될 것을 우려한 샤를 8세는 길베르 드 부르봉을 나폴리 부왕으로 남겨두고 프랑스군 절반과 함께 본국으로 철수했다.[8][10]
1495년 5월 26일, 곤살로가 이끄는 스페인-나폴리 연합군은 이탈리아 남부 칼라브리아의 세미나라에서 오비니의 베르나르 스튜어트가 지휘하는 프랑스군과 첫 대규모 교전을 벌였다. 프랑스군은 중무장 기병 600명과 스위스 창병 400명으로 구성되었고, 연합군은 보병 1,000명, 기병 400명, 그리고 나폴리 의용병으로 이루어져 수적으로는 우세했다. 그러나 전투는 프랑스군의 압승으로 끝났다. 프랑스 중장기병의 돌격에 스페인 기병이 먼저 무너졌고, 이어진 프랑스 기병의 돌격과 스위스 창병의 공격에 스페인 보병과 나폴리 의용군마저 혼란에 빠져 패주했다. 곤살로는 전열을 수습하며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는 곤살로의 군 경력에서 유일한 패배로 기록되었다.
세미나라 전투의 패배는 곤살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는 패배의 근본 원인이 레콩키스타 시대의 산악전과 게릴라전에 특화된 스페인군의 편제에 있다고 분석했다. 당시 스페인군은 평지에서의 대규모 야전에 익숙한 프랑스군, 특히 강력한 중장기병과 견고한 스위스 창병의 조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구분 | 스페인군 (곤살로) | 프랑스군 (샤를 8세/베르나르 스튜어트) |
---|---|---|
보병 | 주력: 검과 방패 투사병기: 크로스 보우, 소수 아르케부스 | 주력: 창병 (특히 스위스 창병 정예) 투사병기: 크로스 보우, 소수 아르케부스 |
기병 | 주력: 경기병 소수 중기병 (밀집 전투 경험 부족) | 주력: 중기병 (기동력, 충격력 우수) 경기병 (정찰, 예비대) |
포병/공병 | 수 많으나 질 낮음 (공성전/게릴라전 특화) | 다수 보유 (주로 공성전용, 야전 효율 낮음) |
특징 | 레콩키스타 경험 (산악전, 게릴라전, 공성전) | 중장기병과 스위스 창병의 유기적 조합, 평야 야전 강점 |
약점 | 평야 야전 열세 (보병 밀집도↓, 기병 돌격 대응↓) | 창병 밀집대형 정면 돌파 어려움, 포병 야전 활용 제약 |
이 패배를 계기로 곤살로는 스페인 군대의 근본적인 개혁 필요성을 절감했다. 마침 1495년 7월 6일 포르노보 전투에서 신성 동맹군에게 패배한 프랑스 주력군이 이탈리아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은 신성 동맹의 승리로 끝났다. 곤살로는 이탈리아에 남아 군대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훈련 부족과 스페인군-이탈리아군 간의 협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엄격한 훈련을 실시하고, 스페인군의 장비와 전술을 개선해나갔다.
개혁과 더불어 곤살로는 스페인군의 장점인 게릴라 전술을 적극 활용했다. 소규모 부대를 이용해 프랑스군의 보급선을 끊임없이 교란하고, 불리한 대규모 전투는 피하면서 점차 이탈리아 내에서 세력을 회복해나갔다. 결국 1년 만에 곤살로는 아텔라(Atella)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프랑스 부왕 길베르 드 부르봉을 사로잡고 나폴리에서 프랑스 잔존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또한 로마의 항구인 오스티아를 탈환하는 등 이탈리아 내 점령지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9]
1498년, 곤살로는 임무를 마치고 스페인으로 귀국했다.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엘 그란 카피탄(El Gran Capitán|엘 그란 카피탄es, 위대한 대장)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하사받았고, 산탄젤로 공작(Duke of Santangelo)에 서임되었다. 이후 그는 스페인 국내에서 발생한 무어인 반란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4. 2. 군사 개혁 (코로넬리아)
1495년 세미나라 전투에서의 패배는 곤살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당시 레콩키스타를 거치며 산악전이나 게릴라전에 특화되었던 스페인군은 평지에서 프랑스군의 중장 기병과 스위스 창병의 조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이 패배를 통해 곤살로는 스페인군의 근본적인 개혁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9]개혁 이전의 스페인군과 프랑스군
- 스페인군:
- 보병: 주력 무기는 검과 원형 방패였고, 밀집 대형을 이루기 어려워 기병 돌격에 취약했다. 투사 무기는 쇠뇌가 주력이었으며, 아르케부스 (초기 조총)는 소수만 운용했다.
- 기병: 중장 기병은 소수였고 대부분 경장 기병이었다. 프랑스 기병처럼 밀집하여 돌격하는 전술에 익숙하지 않았다.
- 포병 및 공병: 공성전 경험이 풍부하여 수와 질적인 면에서 타국보다 우수했다.
- 프랑스군:
- 보병: 주력은 창병이었으며, 특히 스위스 창병의 밀집 대형은 강력한 방어력과 돌파력을 자랑했다. 투사 부대는 쇠뇌가 일반적이었다.
- 기병: 중장 기병이 핵심 전력으로, 강력한 충격력으로 적진을 돌파하는 역할을 맡았다.
- 포병: 공성전에서 주로 활용되었으나, 야전에서의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스페인군은 평지 야전에서 보병과 중장 기병 전력에서 프랑스군에 비해 명백한 열세였다.
곤살로의 군사 개혁: 코로넬리아의 탄생곤살로는 이탈리아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스페인군의 편제와 전술을 혁신했다.
1. 보병 개혁:
- 주력 무기를 검에서 창으로 변경하여 밀집 대형을 갖추도록 했다. 이는 기병 돌격에 대한 방어력을 높이고, 공격 시에도 밀집 대형을 유지하며 전진할 수 있게 했다.
- 창병 밀집 대형 주변과 양익에 아르케부스와 쇠뇌를 장비한 투사 부대를 배치하여 화력 지원과 방어를 강화했다.
2. 지휘 체계 개편:
- 부대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해 장교 수를 대폭 늘렸다. 기존에는 장교 1명이 100명에서 600명의 병사를 지휘했지만, 개혁 후에는 300명당 4명에서 6명의 장교를 배치했다. 이를 통해 각 부대가 더 독립적으로 기동하고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9]
3. 새로운 부대 편제, 코로넬리아 (Coronelía|코로넬리아es):
- 개혁된 보병과 지휘 체계를 바탕으로 약 1,000명 전후 규모의 새로운 부대 단위인 Coronelía|코로넬리아es를 창설했다. 이는 훗날 스페인 제국의 강력한 보병 부대인 테르시오 (Tercio|테르시오es)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9]
4. 야전 축성 전술 도입:
- 기병의 기동력과 돌격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공병을 적극 활용했다. 참호와 토루를 구축하여 보병과 대포를 보호하는 야전 축성 전술을 도입했다. 이는 공성전의 방어 개념을 야전에 적용한 혁신적인 발상이었다.
- 이 전술은 1503년 체리뇰라 전투에서 효과를 입증했으며, 곤살로는 '참호전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한다. 이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참호와 화력을 이용해 프랑스 기병과 보병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대승을 거두었다.
곤살로의 이러한 군사 개혁은 스페인군을 유럽 최강의 보병 군대로 변모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특히 야전 축성과 화력을 결합한 전술은 이후 유럽 군사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3. 제2차 이탈리아 전쟁
1498년 샤를 8세의 뒤를 이어 프랑스 왕위에 오른 루이 12세는 즉시 이탈리아를 다시 침공하여 나폴리를 점령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에 스페인은 시간을 벌기 위해 1500년 프랑스와 그라나다 조약을 맺고 나폴리 왕국을 양국이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같은 해,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프랑스 및 베네치아와 연합하여 이오니아해에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한다는 명분 아래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그는 잠시 오스만군과 싸워 1500년 12월, 케팔로니아 섬을 두 달간의 포위 공격 끝에 점령했다.
이후 곤살로는 나폴리로 돌아왔다. 나폴리의 페데리코 4세가 퇴위한 후, 프랑스와 스페인은 왕국 분할을 협상하는 동시에 게릴라전을 벌였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스페인군은 프랑스군에 의해 바를레타에서 포위되었다. 곤살로는 오판토 강을 따라 방어에 유리한 바를레타에 진지를 구축하고, 충분한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전면전을 피하며 게릴라전을 통해 프랑스군의 병참선을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프랑스군의 도발에도 응하지 않으며 때를 기다렸다.
1503년 병참 문제로 프랑스군이 분산되자, 곤살로는 병력이 충분히 보강된 후 공세로 전환하여 프랑스군의 보급 거점인 체리뇰라를 급습했다. 그는 유리한 지형인 언덕 위에 진지를 구축하고 주변에 참호와 토루를 쌓아 야전 축성을 강화했다. 1503년 4월 28일, 체리뇰라 전투가 벌어졌다. 곤살로가 이끄는 약 6,000명의 스페인 군대(기병 1,600명, 보병 6,000명 추정, 막시밀리안 1세가 파견한 독일 용병 아르케부스병 500명 포함)는 루이 다르마냐크, 네무르 공작이 지휘하는 10,000명의 프랑스군(기병 650명, 보병 7,000명, 대포 26문)과 맞섰다. 곤살로는 보병을 중앙에 밀집시킨 창병과 측면에 아르케부스병 및 검병으로 구성된 '코로넬리아'(coronelía) 부대로 편성했다.
프랑스군은 충분한 정찰 없이 참호의 존재를 모른 채 기병 돌격을 감행했다. 스페인군의 화약고가 폭발하는 사고가 있었으나 곤살로는 "좋은 소식이다. 이것이 바로 승리의 빛이다"라며 병사들을 독려했다고 전해진다. 참호 앞에서 멈춰선 프랑스 기병은 스페인 포병과 독일 용병의 화력에 큰 피해를 입고 지휘관을 잃었다. 이어 스위스 창병을 주력으로 한 프랑스 보병이 세 차례 돌격했으나 모두 격퇴되었고, 이 과정에서 보병 지휘관도 전사했다. 두 차례의 프랑스군 돌격을 막아낸 곤살로, 즉 '엘 그란 카피탄'(El Gran Capitán)은 즉시 공세로 전환하여 프랑스군을 추격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 루이 다르마냐크는 추격해온 스페인 기병에게 살해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3,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지만, 스페인군의 손실은 100명 정도에 불과했다. 체리뇰라 전투는 화기의 위력으로 승패가 결정된 역사상 최초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이후 야전 축성과 화력을 결합한 전술이 일반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체리뇰라 전투의 결정적인 승리 이후, 곤살로는 나폴리 시를 점령하고 프랑스군을 가릴리아노 강 너머로 몰아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양측은 잠시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 곤살로는 1503년 12월 29일 밤, 부교를 이용해 기습적으로 강을 건넜다. 폭우로 강물이 불어나 도하가 불가능할 것이라 예상했던 루도비코 2세 살루초 휘하의 프랑스군은 완전히 기습당하여 스페인 창병과 아르케부스 부대에게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곤살로는 패주하는 프랑스군을 계속 추격하여 1504년 1월, 이탈리아 도시 가에타를 점령했다. 더 이상 방어가 불가능해진 프랑스군은 결국 이탈리아에서 철수했고, 1505년 블루아 조약을 통해 나폴리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9]
5. 나폴리 총독 시절과 말년
프랑스군을 나폴리에서 몰아낸 후,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는 테라노바 공작 작위를 받았고, 1504년 나폴리 부왕으로 임명되어 1507년까지 통치했다. 그러나 그의 큰 공적은 페르난도 2세의 질투와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1504년 말, 그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이사벨 1세가 사망하면서 곤살로는 정치적으로 어려운 입장에 놓였다. 이사벨 1세의 죽음으로 남편 페르난도 2세는 카스티야에서 일시적으로 권력을 잃고 아라곤 왕국의 이익을 지키는 데 집중해야 했다.
나폴리는 아라곤 왕국의 영토였지만, 곤살로는 카스티야 출신으로 현지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이 때문에 페르난도 2세는 그의 충성심을 의심했다. 또한 곤살로가 공금을 군대 유지비와 자신의 급여로 사용하면서 재정 관리를 소홀히 한 점도 문제가 되었다. 페르난도 2세는 이를 빌미로 삼아 1507년 직접 나폴리로 가서 곤살로를 해임하고 스페인으로 돌아올 것을 명령했다. 이때 페르난도 2세는 그에게 강력한 지위인 산티아고 기사단의 단장직을 약속했다.[7][11]
스페인으로 돌아온 곤살로는 추가로 세사 공작 칭호를 받았지만, 페르난도 2세는 약속했던 산티아고 기사단 단장직을 끝내 주지 않았다. 페르난도 2세는 겉으로는 곤살로를 칭찬했지만, 실제로는 어떠한 중요한 직책도 맡기지 않았다. 결국 곤살로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의 시골 영지로 은퇴했다. 그는 1515년 12월 2일, 그라나다 근처 로하(Loja)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말라리아로 인해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7]
6. 평가
곤살로는 의심할 여지 없이 당대 최고의 장군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세미나라 전투에서의 패배 경험을 통해 교훈을 얻어 다음 전투에 반영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1][2] 체리뇰라 전투에서는 야전 축성을 효과적으로 활용했으며, 이는 중장기병을 야전에서 화력으로 격파한 초기 전투 사례로 기록된다.[1][3] 하지만 이를 통해 곤살로를 화력전의 선구자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당시 그가 중시한 것은 포병의 일제사격이었고, 아르케부스를 사용하는 총병에게는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는 점(이들은 막시밀리안 1세가 파견한 독일 용병이었다)이 이를 뒷받침한다.[1][4] 승리의 주된 요인은 야전 축성을 통해 적을 공성전과 유사한 상황으로 끌어들인 것이며, 이는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공성전 경험이 풍부했던 스페인군에게 유리한 전술이었다.[1]
체리뇰라 전투 이후 스페인군과 프랑스군 모두 총병의 비율이 증가했으며, 야전 축성 역시 일반적인 전술이 되었다. 이로 인해 16세기 전장에서는 참호를 사이에 두고 양군이 대치하는 양상이 자주 나타났으며, 이러한 상황은 17세기 구스타브 2세 아돌프의 등장으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1][2]
그러나 곤살로의 군사 개혁이 갖는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가 창안한 '코로넬리아' 편제는 이후 테르시오로 발전하여 16세기와 17세기에 걸쳐 유럽 최강의 보병 부대로 명성을 떨쳤다.[1][2] 또한 장교 수를 늘려 부대의 유연성을 높인 방식은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각국에 사관학교 설립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1][2] 합스부르크 제국을 건설한 카를 5세의 군대를 이끈 장교들 중 다수가 이러한 사관학교 출신이었다.[1][2] 곤살로는 화약 소화기(아르케부스) 사용을 보병 전술에 통합하고, 보병, 기병, 포병 및 해군 지원을 결합한 합동 작전의 선구자[5]로서 16세기 스페인 번영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1][2]
1507년까지 나폴리 총독으로 재임했으나, 그의 뛰어난 공적은 오히려 페르난도 2세의 질투와 의심을 샀다.[6] 특히 1504년 이사벨 1세의 죽음으로 정치적 후견인을 잃은 것이 결정적이었다.[6] 페르난도 2세는 곤살로의 군자금 관리가 부실했다는 점을 빌미로 그를 해임했으며, 이후 어떠한 공직도 맡기지 않았다.[6] 결국 곤살로는 1515년 스페인 로하에서 세상을 떠났다.[6]
그의 유해는 그라나다의 산 제로니모 수도원에 안치되었다.[7] 이 수도원은 르네상스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1552년 약 700개의 노획한 적군의 깃발과 함께 그의 유해가 옮겨졌다.[7] 그의 아내 마리아 만리케 데 라라(1527년 사망)와 딸 엘비라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이 만리케(1524년 사망) 등 다른 가족 구성원들도 함께 묻혔다.[7] 그러나 그의 무덤은 반도 전쟁 중인 1810년에서 1811년 사이, 세바스티아니 장군이 이끄는 나폴레옹 군대에 의해 심하게 훼손되었다.[7] 곤살로의 유해는 불법적으로 파헤쳐졌고, 함께 안치되었던 700개의 깃발은 불태워졌다.[7] 수도원의 석재 일부는 헤닐강의 푸엔테 베르데 다리 건설에 사용되기도 했다.[7] 수도원은 19세기 말에 복원되었다.[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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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Masters of Warfare: Fifty Underrated Military Commanders from Classical Antiquity to the Cold War
Pen and Sword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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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orld's Greatest Military Leaders: Two Hundred of the Most Significant Names in Land Warfare, from the 10th to the 20th Century
Gramercy
2000
[3]
서적
Who's Who in Military History: From 1453 to the Present Day
Routledge
[4]
서적
The Oxford Encyclopedia of Medieval Warfare and Military Technology vol. 1
Oxford University Press
[5]
서적
Guerra y sociedad en la monarquía hispánica: política, estrategia y cultura en la Europa Moderna, 1500-1700
Laberin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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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Razón de linaje y lesa majestad: El Gran Capitán, Venecia y la corte de Fernando el Católico (1507–150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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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rcell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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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cker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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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그란 카피탄, El Gran Capitán ("The Great Captain")
[13]
웹사이트
Gonzalo, pedro fernández de córdoba 검색 결과 - Google 도서검색
http://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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